저는 구약 신학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구약을 사모해왔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 묵상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 시간 동안 저는 자연스럽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구약 성경에 이끌렸습니다. 성경과 묵상노트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성경공부 교제나 시집을 읽으며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히 시편은 놀라웠습니다. 시편은 분노와 슬픔, 외로움과 의문, 그리움과 열정, 예배와 경외감 같은 제가 청소년기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편에 몰두했을 때 마치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준 것처럼 위로를 느꼈습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고백이나 적들에 대한 그의 고백을 읽을 때, 저는 하나님의 앞에서 고백할 수 없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계를 벗어난 것은 없었습니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열정적이지만 우울한 소녀이며 목사의 자녀인 저에게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은 저에게 숨 쉴 곳이 되어 주었고,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약의 가르침(역시 중요하지만)이 아닌 구약의 위대한 기도자들과 실제로 함께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시편 필자들을 통해 공허할 때 말씀을 얻었고, 덕분에 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의해 제 영성이 형성되는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형성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성’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문화에서 다소 모호하고 아주 흔한 용어입니다.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명상에서 등산에 이르기까지, 농구 코트에서 운동선수가 느끼는 ‘흐름’이나 자신의 예술에 휩싸인 예술가의 무의식 상태, 대성당에서 드리는 조용한 예배 뿐만 아니라 요가 연습에서 단순히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까지도 모두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성의 언어는 불분명하고 무정형적이며 중심이 단단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성이나 종교적인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신비로운 비현실적인 감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를 우리가 되찾아서 잘 활용해봅시다. 간단히 말해서, 영성은 인간이 하나님, 진리, 개인적 중요성 및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도달하는 모든 방법을 뜻합니다. 모든 인간은 몸과 영혼과 영을 가지고 있으며 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영성의 개념이 기독교라는 단어와 결합되면 더 명확한 관점이 나타납니다. 브래들리 홀트는 그의 저서 <기독교 영성사>에서 기독교 전통적으로 이 용어는 “인생 경험을 위한 첫 단계”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시작점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홀트가 말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과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령’,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옹호자이자 조언자가 되시고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보내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인격을 의미합니다. 필립 쉘드레이크가 그의 저서 <영성의 역사>에서 주장했듯이, 바울의 편지에서 말한 “영적인 사람”(고전 2:14-15)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서 하나님의 영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성을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영과 신성한 영을 모두 의미하는 넓은 성경적 개념인 영의 어원의 중요성에 집착합니다. 신성한 영이란 구약 성경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며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분명히 기독교인의 영성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활성화되고 인도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어가 일반적이고 부정확하게 사용되어 의미가 누락 될 수 있는 상황에도 특정한 힘을 부여합니다.
구약으로 함께 하는 기도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영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발점은 각각의 그리스도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지만, 우리는 각자 특정한 방식의 그리스도인 제자도를 갖고 있습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듯이 “그와 함께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와 함께” 합니다.
다양한 전통, 교파 및 종교적 질서가 이러한 방식을 구현하고 성문화합니다. 홀트는 “예시로 예수회, 루터교도, 페미니스트들은 각각의 주제와 관행의 특별한 조합으로 인해 독특한 특징을 갖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영성에 있어서 우리는 가정, 회중 또는 민족 집단에서 이미 친숙한 전통에만 단순히 머물지 않고 그 전통과 전 세계 기독교인에 대해 폭넓은 견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전통을 살펴보면 더 큰 범위의 영성에 눈을 떠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 지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양한 부차적 자료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구약 성서 (성서의 대부분)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재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가 우리 영성의 주된 표현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웨스트민스터 그리스도인 영성 사전에 의하면 “기도는 간청이나 청원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부를 의미합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저에게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모든 방법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라는 행위를 함으로써 기도를 통해 형성됩니다. 시편에 대한 저의 초기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것이 정확히 수행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그의 유대인 제자들이 수련했던 기도를 통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순전히 포괄적 장르의 관점에서 기도를 살펴본다면, 시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기도, 슬픔의 기도와 감사의 기도, 깊은 겸손을 표현하는 참회의 기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담대하게 부르는 기도, 즉흥적인 기도와 성전 전례,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나 친밀함을 표현한 짧은 찬가 등 깊은 질문과 의심을 표하는 기도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대-기독교 관습에서 매일 시편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성 성장을 위한 구약 성경의 유일한 역할이었다고 하더라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시편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저는 구약 성서를 통해 신학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영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30대 초반 즈음 말씀과 체계적인 신학만으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저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게다가 저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찾고 있었으며 신약 말씀 역시 예전처럼 제 마음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복음적 양육의 특징이었던 자유로운 행동주의로 인해 저는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는 확신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확실한 것 한가지는 전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그리고 그때 제 이야기가 열왕기상 19장 엘리야의 이야기와 교차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영적 지도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큰 성공을 거둔 엘리야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버리고 고독히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이것은 가장 깊은 고독이자 내면이며, 엘리야는 알지 못했지만 그 고독을 통해 선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를 접했을 때 자세한 사항은 다르지만 저도 내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복음주의 어느 누구도 저에게 고독과 침묵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저를 이 길로 인도하기 시작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정통 기독교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싶었는데, 구약 성경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 (그의 경건한 이야기가 아님)는 고독과 고요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안식처로 삼으며 고독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간은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하나님의 질문을 들을 수 있는 곳, 내면의 혼돈이 안정되기 시작하는 평화의 장소, 그리고 마침내 다음 단계를 위해 하나님의 인도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집중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없이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간과 그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엘리야의 경험을 통한 인간성 그대로에 대한 무언가가 저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다시 역동적인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리더십의 요구와 도전이 강화됨에 따라 저는 성경에 있는 인물 중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리더에게 일어나는 일은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장기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모세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리더십에 대한 자세하고 깊은 영적 관점을 발견했습니다. 어쩐지 모세의 이야기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간적 요소를 더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았고, 그의 사투와 그 과정의 모든 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려움과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그는 어떻게 오랜 사역을 견뎌냈을까?” 모세가 리더십으로서 훌륭한 전략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를 끌리게 한 그의 신성한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이는 고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정확히 행하는 신성한 변화였습니다. 모세에게 리더십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고, 이것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한 접근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의 동반자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인생에서 리더로 살아온 과정에서도 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삶에 대한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 제 리더십의 경험을 뒤집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지속적으로 영적 수준에서 강화되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어라
제 경험상 구약의 이야기는 내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신비롭기까지 한 영적 삶을 보여줍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응답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노래, 시, 기도문에 담겨있는 찬양과 하나님과의 격렬한 씨름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도 받아들이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엘리야가 평생동안 지속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 고독의 강력한 결과를 조명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순간에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이자 재판관이었던 드보라를 통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사기 4장). 사역에 부름을 받은 청년으로서 저는 이 점을 배워야 했습니다. 또한 여성 지도자와의 협력의 가치를 알고 힘든 영역으로 함께 걸어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따른 위험과 보상을 기꺼이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락과 같은 남성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능력이 자라면서 엘리가 사무엘을 도운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 이것은 새로운 영적 지도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방향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중요한 짤막한 성경적 묘사입니다. 한밤중에 어린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엘리가 사무엘이 다시 깼을 때 인도한 방식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완벽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바로 영적 감독관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인 경험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이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저 우리 안에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경험을 내면에서 비추어 우리에게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통해 이러한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기대하도록 초대합니다. 추후에 우리가 지식이나 선견지명이 부족해 어떠한 어려움에 빠진다면, 구약 성서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게 바로 그 순간이군요. 저도 경험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루스 헤일리 바톤은 경험이 많은 영적 지도자이며 트랜스포밍 센터의 창립자이며, <리더십의 영혼 강화: 사역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 찾기 (IVP Books)>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