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말: 약자를 보호하십시오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이해해 온 것처럼, 신약에는 강력한 법 집행에 관한 신학이 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3, 2020
Source images:Library of Congress / Wikimedia Commons / Aijohn784 / Getty

나는 알라바마주 헌츠빌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16살이 되었을 때 나는 미식축구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코치들의 편지와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운동하고, 성적을 유지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건 내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찰에 의해 해를 당할까봐 두려웠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처하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어린 시절 로드니 킹 사건을 접하며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흑인들이 길에서 겪는 일들은 단순히 뉴스에서 본 문제가 아니었다. 나 또한 직접 경험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밤, 친구들과 나는 쇼핑몰에 갈 계획이었고, 같은 지역에서 파티를 열 계획이 있었다. 우리는 밤에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주유를 하고 간식을 사러 잠시 주유소에 들렀다. 기름을 넣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타서 떠나려고 할 때, 검은 색 SUV가 우리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차 한 대가 내 왼쪽으로 왔고, 다른 한 차는 내 앞에 정차했다. 순간 내가 강도를 당하는구나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누가 이 밝은 주유소에서 강도질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경찰이 차에서 나왔고,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볼 수 있게 손들어.” 한 경관이 말했다.

"우리가 왜 손을 들어야 합니까?" 내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때 내 미래가 눈앞에 번쩍였다. 내 모든 계획이 무산되면 어쩌지? 내 꿈을 겨우 과자 한 봉지와 몇 갤런의 기름과 바꾸어야 하는 걸까?

나는 친구에게 조용히 하고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고 우리는 따랐다. 나는 경찰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이 주유소가 유명한 마약 거래장소이며 우리가 마약 거래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곳에 주유를 하러 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분이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수색이 지속됐다. 물론 경찰은 수색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최소한의 사과를 기대했고, 왜 젊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수색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면허를 돌려주며 자유롭게 가도 된다는 말만 했다.

그러나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나는 무력했고 화가 났다. 장학금을 받고 빈곤에서 벗어나 가족을 부양할 기회를 잃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공포를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아무 죄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길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일곱 번 내지 열 번 정도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법적 정당성 없이 제지나 수색, 고발이나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경찰관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좋은 경찰관들도 많이 만났다. 경찰들이 업무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그 직업이 수반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해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 인종차별적 법 집행과 그들이 흑인의 몸에 가했던 위협과 같이 넓은 맥락에서 우리 나라에서 경찰이 행했던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

이 어두운 역사는 경찰의 손에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당한 최근의 사건으로 인해 표면 위로 드러났다.나라 곳곳에서 거리를 행진한 많은 시위자는 플로이드가 첫 번째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흑인 미국인들은 하루 이틀이 아닌 수 세기 동안 “무릎 아래에” 짓눌려 왔으며, 누적된 억압이 다시 한번 우리나라 전체의 화두이자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경찰의 활동에 대한 국가적 관점의 합의를 추구하기 위해 책, 팟 캐스트, 광장에서의 대화, 지역 사회의 프로젝트를 통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두 훌륭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단지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성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평신도나 목회자, 심지어 학자들까지도 종종 경시하지만, 신약은 국가 권력에 관한 신학을 분명히 언급한다. (CT의 9월호의 마이클 르페브레의 경찰과 구약 성서에 대한 글 참조)

놀랍게도 이 주제는 신약 윤리에 관한 표준 성경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었다. 하지만 협회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다. 국가가 시민에게 해야 할 대우는 신약 성서에서 벗어나는 주제가 아니며, 이러한 내용을 찾는 흑인들은 실제로 도움과 희망을 얻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구절들은 우리가 미국에서 경찰 권력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지에 관한 절대적 기초가 될 것이다.

신약의 두 구절에서 경찰 권력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시초가 되는 내용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로마서 13장 1-7절 말씀으로, 많이 비방 되거나 오해를 받는 구절이다. ‘칼’에 관한 바울의 말은 국가가 주민들을 어떻게 보호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언뜻 보기에 로마서 13장의 처음 몇 구절은 효과적인 접근으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적혀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이 구절의 초점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바울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거기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한다.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신도 독자와 학자들은 모두 이 구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말을 부적절하다고 여기며 우려했다. 그러나 린더 켁은 그의 주석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구절이 불분명해 해설자들을 괴롭게 하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료하게 설명한다.”

바울은 학대를 향한 적합한 기독교적 대응이 혁명이 아니라 순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이 땅의 반대편에 있는 잘못을 종말론적으로 바로 잡는 것뿐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종말론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더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권위에 대한 복종에 관한 그의 말은 훨씬 더 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바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연구를 살펴봐야 한다. 그가 바로 이야기를 인용할 것이 로마서 13장의 연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경시되지만, 그것은 성경적으로 정보에 근거해 경찰 권력에 관한 신학의 필수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바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로마서 9:17)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악한 왕들을 심판하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노예화하고, 가혹하게 처우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부당하고 폭군적 통치 때문에 결국 그를 멸하셨다.

바울이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법을 제정하셨다. 바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권위를 제거하신 예를 보여준다. 요컨대, 그 이야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항에 대한 금지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해야 한다. 성서 해설자들은 개인에 대한 바울의 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국가에 대한 그의 논평은 더 완전한 그림을 제공한다.

바울은 국가에 복종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설명한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로마서 13:3-4)

칼에 대한 이러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시대에 군인들이 경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푸어만은 "민간 환경에서 공공질서와 국가 통제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식 지휘하에 조직된 부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현대의 경찰과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군인의 역할이 경찰과 가장 가까웠다.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군인이 아닌 권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주민에 대한 군인의 태도가 대부분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인식하는 것 같다. 문제는 칼을 든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휘하는 자들에게 있다. 즉, 여기서 바울의 초점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권력 구조에 있다.

주의 깊게 구절을 읽은 사람은 3절의 해석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경찰을 통제하는) 다스리는 자들이 선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부패한 관료에 대해 국가와 통치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려한 이상적인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라”는 그의 명령은 통치자들이 올바른 행실과 잘못된 행실의 차이를 분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전제가 핵심이다.

분명히 바울은 일부 통치자들이 선한 사람들에게도 두려운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9장에서 바로에 대한 그의 기록이 이를 명백하게 설명한다. 13장에서 바울은 악한 통치자들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고 통치자들의 책임에 대해 설명한다. 더 큰 맥락에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더 넓은 성경적 설명으로 인해 여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 구조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할까? 적용은 꽤 분명하다. 미국에서 우리는 인종주의가 기업의 제도적 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국가의 경찰 권력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수십 년이 이상 수 세기 동안 우리 정부는 흑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국가가 칼을 휘두르며 시행하였다.

바울의 신학적 논리에 따르면, 사회 구조를 만드는 정부는 정의로운 것을 분별하고 불의를 없애고 제도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통치자나 선출된 공무원이 경찰이나 공무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할 시민의 의무가 있다.

경찰 권력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인간에 관한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이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며 국가는 청지기나 관리인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국가가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를 소유하거나 정의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 권력의 한계를 상기시키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종합하면 바울의 말은 분명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렇다, 그는 정부에 순종해야 할 기독교인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정부 상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정부가 잠재적으로 선하다고 여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종에 대한 이러한 구절은 더 큰 맥락에서 정부가 먼저 정당하게 권력을 관리하도록 요구한다.

그렇다면 경찰관은 어떤가? 국가를 대표하는 개인을 위한 성경적 모델이 있는가? 군인이 현대 경찰관과 가장 비슷한 존재라면 신약 성경에 나온 군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침례 요한의 사역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경찰의 행동에 대한 명확하고 강력한 비전을 제공한다.

첫째, 침례 요한이 전체 기독교 서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요한을 다가오는 메시아와 메시아 시대의 전령으로 임명하셨다. 모두는 그를 이사야에 묘사된 인물과 연관시킨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누가복음 3:4-6). 회개하라는 요한의 부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라는 명령이다. 귀 기울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요한은 여러 무리의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제안으로 응답한다. 그중 하나는 군인 또는 오늘날의 경찰관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사람들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누가복음 3:14)고 말한다.

로마서 13장 3-4절이 국가의 공동 책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위 누가복음의 구절은 법 집행관의 개별 책임에 대한 내용을 제공한다. 세례 요한은 강탈을 비난하지만 이 비판의 무게는 단순한 뇌물을 뛰어 넘는다. 갈취는 힘을 사용하여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며, 갈취를 당한 사람이 힘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요한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권력의 한 형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함께 가기 때문에 거짓 비난에 대한 비판과 갈취에 대한 비판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강탈당하는 사람이 따르기를 거부하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요한은 통치자의 변덕을 충족시키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군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는 바로 전형적인 예시이다. 예수님께서는 국가에 의해 살해된 진정으로 결백한 사람이었다.

사도 요한은 빌라도가 “이 사람이로다” (요한복음 19:5) 라고 한 말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긍정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품위 있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시다. 오늘날 흑인들은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양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를 모든 경우에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결백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끔찍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유대인도 조롱과 구타를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복음에 기록 된 대로, 요한은 모든 상황에서 군인들이 비인간적 행위를 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을 극복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관료 개인에 대한 요한의 권고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권고를 뒷받침한다. 모든 주민의 고유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칼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울은 통치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반면, 요한은 개별 병사들을 육체적 용감한 영웅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미덕을 요구한다. 따라서 종합해보면, 신약에서 언급된 경찰 권력에 관한 신학은 정부와 공무원 모두에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영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신학적 원리는 이론상으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이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꼭 필요하다면 신앙의 영역은 국가 문제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분명한 예시를 남겼다.

1963년 1월 16일, 8명의 성직자 (감리교 주교 2명, 감독 주교 2명, 로마 가톨릭 주교 1명, 랍비 1명, 장로교인 1명, 침례교인 1명)가 알라바마주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와 상식에 대한 호소”라는 편지를 썼다. 이를 통해 시민권 운동 시위를 둘러싼 폭력을 종식할 것을 촉구하고 양측 모두에게 법원 시스템을 신뢰하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차별에 대한 강한 입장을 피력하지 못했다.

3개월 후인 1963년 4월 12일, 8명으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또 다른 편지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마틴 루터킹과 그들이 ‘외부 선동자’라고 지칭한 남부 기독교 지도위원회 참가자들에 대한 비판도 실려 있었다.

그들은 마틴 루터킹과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증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방법론적으로 평화롭더라도 우리 지역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버밍엄에서 극단적인 조치가 정당화되는 오늘날이 새로운 희망의 시대라고 믿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킹의 업적에 대한 이 비판은 백인과 남부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적인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가톨릭교, 성공 회교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를 반대했다. 이에 관한 마틴 루터킹의 대답이었던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는 8명의 성직자뿐 아니라 복음의 요구보다 법과 질서에 초점을 맞춘 신앙에 대한 특별한 접근을 중요시했다.

그의 대답에서 마틴 루터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의가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버밍엄에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마을과 고향을 멀리 떠나 “주님이 말씀하시니”라고 말한 것처럼, 사도 바울이 고향 타르수스 마을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의 영향을 받은 세계의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했듯이, 저도 고향을 떠나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저 또한 바울처럼 마케도니아의 도움 요청에 지속해서 응하기로 했습니다.

이 편지가 출판된 지 거의 60년이 지났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광장에서 교회의 역할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마틴 루터킹이 했던 정의로운 사회 추구는 바울과 선지자들의 일과 유사했을까, 아니면 단지 당파 정치였을까? 권력 구조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비판은 그의 목회 사역의 핵심 요소였나?

많은 흑인 기독교인들에게 대답은 자명하다. 바로 우리는 신앙과 정치적 행동을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사치를 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편지는 영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간의 긴밀한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신약학자 루이스 마틴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이 악한 영적 힘의 영역 아래에 있다고 믿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갈라디아서 1:3-4).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권세는 이 땅의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1:21). 구원받지 못한 통치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하나님이 반대하는 악한 세력을 나타낸다. 이 세력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보내 인간의 죄와 함께 멸하도록 명하신 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현대사회에서 영적 악과 정치적 악의 묘사를 바울의 생각에 비춘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이다. ‘악한 현대 시대’의 관점에서 로마 노예 제도의 사악함과 통치자들이 대중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부패한 로마 지도층의 정책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영적인 힘에 의해 통치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요점은 분명하다. 제도가 악하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평가를 넘어선 정치적 평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흑인 기독교인들이 경찰관, 정치 지도자, 정부의 행동을 보고 그들을 악하다고 선언한다면,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킹의 말처럼 우리는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의 항의는 비성경적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에 비추어 우리의 상황을 돌아봐야 한다. 그의 정한 때는 비록 더딜지라도 오고 있다 (하바국 2:1-4).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에게 이 진리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개인적인 영역의 일일 것이다. 경찰에 대한 나의 희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다. 경찰은 그동안 내 삶과 선조들의 삶, 그리고 우리 국민의 삶에서 공포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도로에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우면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버지로서 나의 아들과 딸들이 같은 공포를 경험할까 봐 염려스럽다. 이 공포는 우리의 피부색만으로 우리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국가 정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두려움이 부당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경찰이 그동안 흑인을 대우했던 사례에 대한 통계를 일일이 나열하고 싶다. 그러나 이 통계가 우리의 대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설득할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더욱이 이 나라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에게 통계는 쓸모가 없다.

미국은 지난 역사 속에서도, 현재에도 우리를 보호하는데 실패했다. 칼을 휘두르며 흑인 가정과 교회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두려움만 심화 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가장 마지막에 남는 단어는 아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에만 해를 가할 수 있는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왔다.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최고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자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가 우리의 피나 두려움의 대가가 되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경찰 권력에 관한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자유의 신학과 일치한다.

Esau McCaulley는 북미 성공회 교회의 신부이자 Wheaton College의 신약학 조교수이며 <Reading While Black : African American Biblical Interpretation as an Exercise in Hope] (IVP Academic)>의 저자이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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