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흑색 거짓말에 직면하고 있는 흑인 그리스도인들

도시 변증학자들은 어떻게 “흑인 의식” 운동이 조장하는 왜곡된 주장을 다루는가?

Christianity Today February 8, 2022
Illustration by Sarah Gordon / Source Images: Raimund Koch / Labsas / Portra / Getty

1991년 부이주립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8, 90년대의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정체성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필드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 시기에 대학(특히 흑인 대학)에 입학한 많은 흑인들은, 가죽으로 만든 아프리카 메달에서부터 아프리카의 예술적 패턴을 사용하여 아프리카를 묘사한 티셔츠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와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문화적 장신구를 많이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흑인들이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과 씨름하는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마 학생회에서는 서적들과 청나일, 백단향, 유향, 몰약 오일을 판매하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판매대는 백인들이 흑인들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도록 억압한 진실 즉 흑인 정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흑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때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들의 종교를 따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미국에서 흑인이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는 내재된 지속적 긴장이 있는데, 이것은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흔히 "흑인 의식" 공동체라 부르는 단체 지도자들의 다음 인용문들을 살펴봅시다. 오랜 기간 이슬람 국가 지도자였던 엘리야 무하마드(Elijah Muhammad)에 의하면, “소위 깜둥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깨어나야 한다. 그들은 백인의 기독교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구원하리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은 백인의 종교가 하나님이나, 예수 심지어, 어떤 선지자들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전능하신 알라(신)가 아니라 백색 인종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역사가이자 고대 케메틱(이집트) 왕국의 자칭 사제인 자바리 오사제(Jabari Osaze)의 주장도 살펴봅시다. 그의 저서 <7개의 작은 하얀 거짓말: 흑인 자아상을 파괴하려는 음모>에서 말했듯이,

“어릴 때 주일학교 수업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상자에서 모세와 노아의 종이 인형을 꺼냈어요. … 그들은 내 옆집 이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예복을 입은 늙은 백인 남자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의 모든 영웅이 백인이라는 사실이 주입되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건 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런 주장들은 흑인들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인지부조화의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기독교 변증론자로서 우리는 이 도전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오늘날 도시 변증학(urban apologetics)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필요한 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서구 백인 유럽 기독교가 줄곧 흑인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다 아기를 버리듯, 흑인 의식 공동체가 기독교 신앙 전체를 포기하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필요한 과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 변증학은 이 단체가 조장하는 거짓된 기원 이야기를 반대합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흑인 의식 공동체에 의해 항상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항상 큰 비난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납치하고 노예로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흑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이 노예무역을 통해서였다고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예 제도에 대한 기독교의 역사적 역할을 흑인 정신의 파괴에 대한 핵심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백인 압제자들이 흑인들을 속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유럽 사람들의 창작물로 봅니다.

그리고 이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서구의 노예 제도 시대에는 인신매매를 정당화하는 거짓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기독교 지지자들이 노예들이 복음을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노예 성경’이라는 축약된 성경 번역본을 만들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또한,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들은 흑인들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서 모든 인간에게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더럽혔나요? 그렇습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흑인 공동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도전에 대해 확고한 신학적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까지 우리는 흑인 의식 운동의 지지자들이 제기한 반대와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노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인터넷 시대에는 판도가 달라졌습니다. 반대 의견은 이전보다 훨씬 빨리 퍼져나갑니다. 기독교에 대한 거짓말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흑인 의식 운동과 기독교에 대한 흑인의 다른 반대 운동을 다루는 독특한 도시 변증학이 시급히 필요한 이유입니다.

수정주의 내러티브에 답하기

도시 변증학(urban apologetics)이란 무엇입니까? 도시(urban)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 지난 45년 동안 꾸준히 그 사용이 증가해 왔습니다. 도시 변증학에서의 도시는 실제 도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속어로 사용되기 전에 _도시_ 라는 용어는 사람, 건물, 교통, 다양한 문화, 상업, 정치, 그리고 영성의 다양한 혼합으로 정의되는 여러 가지가 집중된 복잡성의 함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딘가에 선을 긋는 순간 도시는 흑인, 황색인종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기준입니다. 회사에서 도시와 관련된 부서는 제품을 흑인과 황인종 사람들에게 마케팅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힙합과 같은 예술 형식의 급증하는 인기로 인해 도시 문화가 더는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시골과 교외에서도 접하는 모바일 문화가 되었습니다.

변증학(apologetics)은 베드로전서 3:15에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개역개정). 이 구절에서 ‘준비’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apologia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변증학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변혁를 보여줌으로써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이끌어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종말론적이고 궁극적 소망에 근거한 복음의 합당한 준비(방어)입니다.

유다서 1장 3절은 변증학의 성경적 기초를 설명하는 또 다른 핵심 본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개역개정). 여기서 “힘써 싸우다” 라는 단어는 레슬링 경기와 같은 운동 경기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 epagonizomai를 번역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이 연관성을 암시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개역개정).

변증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고전적(Classical) 변증학_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강조합니다. 실증적(Evidential) 변증학_은 합리성, 역사, 고고학, 심지어 경험을 사용해서라도, 기독교 진리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역사적(Historical) 변증학은 기독교 진리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를 강조합니다. 경험적(Experiental) 변증학_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서 초자연 현상과 같은 일반적인 종교적 경험이나 특별한 종교적 경험에 호소합니다. 전제론적(Presuppositional) 변증학_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전제로 하고, 이후 기독교만이 이치에 맞는지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줍니다.

도시 변증학에 대해 말할 때 저는 특히 흑인 반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것과 기독교가 흑인들의 독특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지에 대한 논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시 변증학은 위에 열거된 몇 가지 접근 방법을 합쳐서 사용합니다.

먼저 믿음에 근거한 주장보다 과학적 설명을 중시하는 흑인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과 이야기할 때는 고전적 변증법적 접근을 사용합니다. 실증적 변증법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나?” 또는 “기독교는 유럽에서 시작되었다”와 같은 질문에 대응할 때 특히 유용합니다.

우리가 도시 변증학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진술이나 질문의 기저에는 다양한 수정주의적 내러티브가 있습니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많은 흑인들이 인종차별과 불의에 대해 겪는 경험에 호소하고 확증합니다. 그것들을 논박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적 변증학과 경험적 변증학의 요소를 모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도시 변증학에서 우리의 임무는 겸손과 보살핌 가운데 이러한 문제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세계에 진실을 말하다

도시 변증학은 소수 집단의 지적, 정서적, 인종적 정체성 문제를 가지고 있는 흑인들에게 기독교를 옹호함으로써 복음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흑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영적, 신학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에게 복음의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도시 변증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회복입니다. 인종적 불의와 불평등은 죄 많은 인간의 자긍심에 도전하면서 인류를 긍정해야 할 필요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창세기 1:26-27, 야고보서 3:9).

도시 변증학은 또한 거짓말이 팽배한 이 세상에 진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BRICs(흑인 종교 정체성 종파 Black Religious Identity Cults)가 조장하는 불법적인 진실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오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을 믿습니다. 흑인에게 호소하는 대부분의 이데올로기나 종파는 유대-기독교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거부와 이른바 진리의 틀을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들 이야기에 비추어 접근합니다. 도시 변증학은 기독교만이 세계관으로서 합리적이고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도시 변증학은 또한 흑인 공동체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시 전설, 역사적 신화, 신학적 오류, 과학적 잘못된 명칭, 기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견해를 버립니다. 우리가 도시 변증학에서 싸우는 것의 대부분은 이전 세대에서 유행했던 논쟁들이며 현재 인종적 편향성으로 다시 부각되고 있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케메티즘(Kemeticism)이라는 고대 이집트 종교의 사본이라는 이론이 재등장하였는데, 이 이론은 수십 년 전에 이미 폐기된 이론입니다.

흑인 커뮤니티는 백인과 유럽인의 사상을 깊이 불신하기 때문에, 많은 흑인들은 백인들의 부패 암시에 쉽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으며 이때 기독교는 쉬운 표적이 됩니다. BRICs가 기독교가 백인 유럽인에 의해 설립된 백인 종교라고 제안할 때 많은 흑인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아프리카로, 이후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로마에 기독교 본부(천주교)가 자리잡기 훨씬 이전에 기독교의 본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믿으려는 사람들의 의지는 훨씬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신학자 Thomas C. Oden은 2010년 저서인 <어떻게 아프리카는 기독교적 정신을 형성했는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현대의 지적인 역사가들은 아프리카가 무엇을 배웠든 그것은 유럽에서 배운 것이라는 간단한 전제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경우,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했다는 사실(남에서 북으로 이동)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러나 이 궤도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기가 왜 그렇게 쉬울까요?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우리가 세속 및 기독교 학문에서 목격하는 인종주의의 기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스(이집트 바로 남쪽에 있는 나일강을 따라 있는 흑인 아프리카 왕국)와 성서 세계에서 구스인이 수행한 역할에 관한 역사 연구에서, 저는 여전히 백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학문 내에 남아 있는 인종적 편견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인종적 편견이란 말을 쓸 때 특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역사, 종교학에서 비교적 흔했던 노골적인 인종적 편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종종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주하는 현실 즉 무의식적이거나 미묘한 인종 편견입니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기독교 역사학문을 포함하여 사회의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으며, 다른 흑인들과 복음을 전하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노력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잠재의식과 많은 사람이 연류되어 있는 인종차별이 흑인 커뮤니티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과 교회 속에 있는 인종차별과 싸우고, 인종차별을 부정함으로써 백인화가 되는 것을 노리는 흑인들과 맞서고, 우리 커뮤니티를 파괴하고 있는 신비주의 종파와 흑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합니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영혼을 위한 투쟁

참과 거짓의 문제에 있어서 피부색이 중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역사를 흰색과 유럽식 붓으로 그리려는 백인들의 시도는 피부색을 문제로 만들었습니다.

인종차별에 맞서는 길을 따르는 대신, 서구 기독교 학문은 세속 수정주의자들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백화는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언급된 인물들의 실제 인종과 교회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을 제대로 조사하기보다 자기가 선호하는 색으로 역사를 그리는 것은 분열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오직 백인 유럽인을 통해서만 구원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은 복음 자체에 대한 모독입니다.

저는 흑인 친구들이 기독교를 계속 의심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변증학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존재하며, 도시 변증학은 그 죄가 특히 소수 인종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합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 세상의 인종차별과 불의 때문에 필요합니다. 복음이 백인만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상상할 수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과제는 서구 기독교계가 역사적(비서구적) 기독교 신앙과 융합하면서 흑인들이 경험한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답을 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기독교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배제하려는 문제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기독교가 특정 인종만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열방 구원에 대한 비전(사도행전 10장)과 예루살렘 공의회(사도행전 15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인종적 구분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 문제임을 더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인종이나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 본인들의 회심에 호소합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인간적으로 강력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십자가의 연약함에 대한 강력한 설교였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8).

변증은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의 영혼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실수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인종적 정체성, 인종차별, 그리고 불의의 장벽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과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6:8). 우리의 소망은 성령님께서 복음에 대한 필요를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흑인들에게 자행된 잔혹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잔혹 행위를 외면하진 않겠지만, 우리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기사는 Eric Mason의 <Urban Apologetics: Restoring Black Dignity with the Gospel>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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