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올해에 더 어려워졌다. 점점 추악해지는 미국 정치와 교회 안에 있는 신랄함 사이에서, 나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번 주일을 기뻐하기 위해 상한 주님의 몸을 바라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좋은 친구와 이런 어려움을 나눴을 때, 그는 19세기 신부인 존 뉴먼이 그 시대의 어려움에 대한 응답으로 옥스퍼드에서 설교했던 설교 모음집을 다시 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뉴먼의 설교에 집중하기 시작한 후 나는 놀라운 그의 통찰력을 발견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부활에 대한 나의 누그러진 기쁨은 단순히 용인되거나 견딜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절에 대한 깊은 기독교적 응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뉴먼은 ‘계속 금식하고 축제를 즐겨라’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을 비교하며 시작한다. 그는 성탄절에 우리는 ‘아이 같이 자연스럽고 때 묻지 않은 기쁨’으로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활절의 기쁨은 이와 같지 않다. 이 기쁨은 ‘처음이 아닌 마지막 감정’으로 경험된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그 즐거움은 고난 가운데서 자라며 추수에서 나오며(이사야 9:3), 사순절과 성금요일이 지난 후에 온다.
즉, 사순절을 보내며 그리스도가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짊어지셨는지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부활절에 관한 우리의 열정은 하나님께서 성탄절에 갓난아기로 오셨을 때의 반응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더 노련하고, 오래되고, 낡은 것으로 느껴져야 한다. 뉴먼은 부활의 기쁨은 아이 같은 즐거움이 아니라,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우리의 나약함에 맞서고 우리의 죄를 애도하는 사순절 이후에 여전히 힘을 되찾는 회복의 약속을 받은 회복 중인 자들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회복 중인 기독교인에 대한 뉴먼의 이미지는 C. S. 루이스가 쓴 ‘마법사의 조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중)’의 마지막 부분에서 치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책의 절정에서, 젊은 영웅 디고리는 아슬란이 새로 만들어진 나니아 땅에 마법의 사과를 심는 것을 지켜본다. 나무는 즉시 자라난다. 나니아에서 사과는 치유와 강화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다음 아슬란은 디고리에게 나무의 열매를 주고 아픈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그를 다시 우리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디고리가 어머니에게 마법의 사과를 주었을 때, 즉각적인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창조가 아닌 구원의 기운으로 가득 찬 우리의 세상에서 어머니의 치유는 느리고 점진적이다. 디고리는 먼저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녀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마침내 한 달 후,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정원에 나란히 앉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러한 치유의 과정에서 디고리는 치유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가 아슬란의 얼굴을 기억했을 때 그는 희망에 찼다.
우리도 종종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치유가 투쟁과 같은 누그러진 기쁨으로 특징지어지는 디고리의 어머니의 치유처럼 보일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조지 허버트가 쓴 것처럼, 우리는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종 ‘울타리나 친구 없이 마르고 기울어서… 완전히 폭풍과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고 느낀다.
다양한 종류의 복음주의에 노출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주관적인 경험, 감정, 외적인 표현을 높이 평가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 뿐만 아니라 일 년 중 다른 어떤 때도 기쁨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나약함과 죄악 때문이라고 두려워하기 쉽다. 때때로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뉴먼은 그것에 도전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 때문에 의로움으로 결코 근심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는다면 더 기뻐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적절한’ 감정 부족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며, 문제의 일부에 불과할 수 있다. 나 자신과 세상의 상처에 대한 실망을 떨쳐 버리기를 거부할 때, 나는 천국의 이면에 지속되는 ‘우리 옛 자아의 나약함과 억압’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의 현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해결책은 이 세상의 슬픔을 더 많이 표현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이 아닌 위로 향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생명의 군주이자 생명 그 자체이신 그분께 간청해야 한다.’라고 뉴먼은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그의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그곳으로 가거나, 모세처럼 그 땅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묵상할 수 있는 자리에 앉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활절의 기쁨은 우리에게 현재의 시간을 뒤로하거나 이 세상의 사건에 의해 상처받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고리처럼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임재와 위안과 유월절 기간 동안 주시는 은총의 도구를 가지고 우리 주변의 상함(자신의 상함을 포함하여)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 귀환의 행위에서 기쁨은 다른 어두운 모습을 띠고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훌륭하고 기적적으로 찾아온다.
ELISABETH RAIN KINCAID는 아퀴나스 신학연구소의 윤리 신학 조교수이며, 윤리적 형성, 덕(virtue)의 발전, 법, 비즈니스 및 신학의 교차점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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