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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케네스 배, 북한 강제 수용소의 경험을 이야기하다

“주님,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에서 “주님, 저를 사용해주시옵소서”로 바뀐 기도제목

Christianity Today June 6, 2022
Micah Kandros / Courtesy of W Publishing Group

이 박해받은 그리스도인이 데니스 로드먼보다 승자처럼 보인다. 북한 체제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억류되어 15년 중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케네스 배 선교사를 둘러싼 극적인 이야기에 전미 농구 스타 로드먼은 유별난 카메오로만 등장했다. 2013년 4월 배 선교사가 15년 형의 선고를 받은 후, 고립무원의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한 로드먼은 은둔의 지도자 김정은과 친구관계를 표방하며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 제가 ‘ 김 ’ 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케네스 배를 풀어달라고 즉시 요청할 것입니다.” (이 변덕스러운 농구선수는 나중에 〈 CNN 〉 진행자와 설전을 벌이면서 북한을 옹호하고 오히려 배 선교사를 탓하는 발언을 했다.)

Not Forgotten: The True Story of My Imprisonment in North Korea

Not Forgotten: The True Story of My Imprisonment in North Korea

Thomas Nelson

272 pages

$17.49

배 선교사는 북한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체포될 때까지 2년 동안 15번이나 북한에 들어갔다. 북한 “관광”을 목적으로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국제 투자가 허용되는 나선 경제무역특구를 방문했다. 이는 북한에도 투자수익을 가져오는 일이기에, 선교사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북한에 드러내는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선교 관련 파일, 사진이 가득한 외장 하드를 지닌 채 북한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었다. 북한 체제전복 음모라는 죄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북한은 “여리고 작전 (Operation Jericho) ” 이라는 표현에 군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꼬투리를 잡았다. 미국이 끈질기게 로비한 결과로 2014년 11월 배 선교사는 석방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미국인이 됐다. CT의 모건 리는 그의 수감생활, 북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그치지 않는 사랑, 그의 비망록 「잊지 않았다 (Not Forgotten) 」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이 당신을 선교사가 되도록 이끌었습니까?

1984년에 저는 “예수님 안에서의 비전”이라는 주제의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고, 제가 받은 단어는 ‘목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저는 중국 교회들이 모인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설교자는 중국을 위한 선교에 헌신하길 원한다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그곳에는 500명이 있었고, 제가 처음으로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중국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마음을 간직했습니다.

남한에서 자라면서 북한에 대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는 공산주의는 악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1997년과 2002년 사이에 저는 서구와 남한의 언론을 통해서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한의 대기근, 특히 그곳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탈북자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는 선교사들(남한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들은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2005년에 저는 단둥이라는 중국 국경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그때가 북한을 위한 제 소명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시기입니다.

처음으로 북한에 입국할 때 두려웠습니까?

저는 2~3년 동안 단둥에서 살긴 했지만, 국경을 넘어 북으로 들어간 적은 없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북한 당국의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서는 그렇게는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방문은 북한에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계획의 실현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는 좀 겁이 났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제 아내와 다른 부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바로 북한당국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노동 수용소는 어떤 곳입니까?

처음에는 그 말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5개월 동안 독방에 있었고 교도관과 검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노동수용소에 대해 제가 들은 내용은 꽤나 끔찍했지만, 동시에 든생각은 최소한 감방 안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엔 제가 유일한 죄수였습니다. 텔레비전과 책상이 있는 작은 거실과 침대와 화장실, 그렇게 세 구역으로 되어있는 독방을 받았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씻고,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현장에 일하러 가기 전까지 1시간 정도 성경을 읽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주님의 능력과 보호를 구하며 주님의 전신갑주를 입었습니다.

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렸고 콩밭에서 일했습니다. 밭에는 거의 반이 돌이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8시간 일했고, 잠깐의 휴식과 점심시간 1시간이 허용되었습니다. 일요일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독서나 빨래를 하는 몇 시간 외에는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만 허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상이 몇 개월 지속되었고, 몸무게가 상당히 줄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저를 병원으로 보냈고, 제가 체중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다시 노동수용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요요 현상처럼, 한 곳에서는 10킬로그램 정도가 빠지고, 다른 곳에서는 5킬로그램 정도가 도로 찌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영양실조와 관절염, 그리고 다른 합병증에도 시달렸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근처에는 교도관이 최소 두 세 사람 있었습니다. 위협적인 장면일 수 있지만, 일단 날씨가 매우 더워지면 그들도 그늘이나 앉을 곳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재를 부수고 땅에 구멍을 파고 돌을 옮기고 길을 닦는 일 같은, 제게 주어진 일에 그냥 집중했습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하루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의 가족이나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애를 썼습니다. 저는 여러 찬송,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고등학교 합창단에서 즐겼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중에 고등학교 합창단 선생님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분이 저를 생각하고 계시며 교회 친구들과 학교 사람들과 함께 저를 지원하는 운동을 하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교도관이나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나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선교사이며 목사라는 것을 모두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지만 그리스도인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록 수감되어 있지만 여전히 나는 선교사다’라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저는 103번 죄수 혹은 “103번”으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끼리 있을때, 때때로 그들은 “목사님,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가정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가족 상담이나 혼전 상담을 했습니다. 한 교도관은 자주 아픈 10대 아들이 있었고, 저는 비타민C를 먹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어느 날, 인권특사가 제 석방 협상을 하러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매우 흥분되었고, 당연하게 교도관들에게 “저는 이제곧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작별노래를 불렀습니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다음에 또 봐요.” 한 교도관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무데도 가지 마세요. 당신이 여기 있어서 우리는 행운이었어요. 조금만 더 계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워요.” 저는 그들에게 금방 가겠지만 곧 다시 돌아올 것인데 그때는 죄수가 아닌 신분으로 올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는 선교사지만 꼭 나쁘지는 않아”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교도관이나 다른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저는 복음을 나누는 일에 조심스러웠는데,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사실이 발각되면 그 사람은 바로 감옥행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우리는 교도관이고 당신은 죄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보다 행복해 보일 수 있나요? 당신의 기쁨은 대체 어디서 오나요?”

어느 날, 한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게 저한테 무슨 이득이죠?” 누군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길 원한다면, 교회에 무엇을 내야 하나요? 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며, 값없이 주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은 전에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대화 끝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들에 응답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진짜라면, 당신은 왜 여전히 여기에 있는거죠?” 저는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에 당신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겠어요?” “그건 맞네요. 저는 이런 말은 전에 들어본 적도 없어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저는 복음을 직접적으로는 나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도관들이 제 안의 복음의 단초라도 보고, 말씀을 나누던 제가 없이도 그들에게 무언가 일어나길 희망했습니다. 제가 떠날 때, 교도관과 악수하며 서로에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보낸 시간에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하심이 있으심을 알게 되자, 저는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데니스 로드먼의 개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저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도움을 주는 시도를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개입으로 인해 미디어의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가〈CNN〉과 인터뷰한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로드먼은 농구경기를 위해 평양에 갈 때 배 선교사의 석방을 위한 로비를 계속할 것이냐는 진행자 크리스 쿠오모의 질문에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저는 북한 텔레비전에서 그를 봤습니다. 관중석에는 대략 2만 5000명이 있었습니다. 로드먼은 김정은 옆에 앉아서 시가를 피우고 있었는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경기 전에 그는 김정은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고, 그 주에만 5번 상영했습니다.

대략 10일 후에 검사가 제 병실로 왔고 로드먼의 그 인터뷰 때문에, 서방 언론들이 북한이 무고한 사람을 가두고 있다고 비난한다며, 당국에서 이를 매우 언짢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가 기자회견에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제가 그렇게 한다면 저를 석방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한겨울에 저를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영혼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관심이 제 석방을 위한 더 많은 협상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도 2014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저를 언급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지지하기 위해 달리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석방을 요구했는지 알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혼자라든가 버려졌다고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와 지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저와 함께했습니다.

저는 45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미국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특히 제가 희망을 잃기 시작할 때마다, 이 편지들이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과 함께요.

이 모든 경험이 당신의 여동생 테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여동생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여동생은 저의 석방을 위한 목소리, 저희 가족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영어를 가르쳤는데, 제 일 때문에 수업을 줄이거나 휴강을 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동생은 하던 일에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저를 위해 일하면서 더 강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에 더 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테리가 변호사인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CNN>에 출연해 제 상황에 대해서 알렸는데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이런 경험은 저희 가족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이전보다 더욱 가깝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이 말씀을 실감합니다.

당신의 아내 리디아와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지난 2년간은 아내에게 끔찍한 나날이었고, 특히 처음 몇 달 동안 매우 그러했습니다. 제가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오기는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매달 아내는 좋은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단둥 선교를 위해 해야 할 너무나 많은 업무를 두고 북한에 억류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기운을내어 제 일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냈고, 북한과 중국을 향한 훨씬 더 큰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 아이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중국에 살고 있을 때도 떨어져 있는 날이 자주 있었지만, 크리스마스와 여름에는 하와이나 시애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수감되기 전에 가족들에게도 말한 적이 있는데, 제가 집에 돌아온 후에 저는 제가 그들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헌신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여전히 예수전도단 YWAM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북자와 그 자녀들에게 교육·경제적인 필요가 있을 때 도움을 주는 일에 특화된 비정부기구를 출범할 계획입니다. 그들은 새로 정착한 후에도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고립되기 쉽습니다. 저는 교회와 탈북자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생각이 있습니까?

위협이 아닌 축복으로서 다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선교사의 신분으로 가면 저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크나큰 어둠과 억압 아래 있는 북한 사람들을 보듬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그러한 사역의 일부로 사용되길 바라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험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무엇입니까?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다음에는 집에 다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믿음을 지키라고 편지로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북한에 있기를 원하시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지만 저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저의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주님께 맡깁니다.” 저의 기도는 “주님,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에서 “주님,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저를 감시하는 사람들과 제가 연결되도록 문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관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버리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CT 독자들도 아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북한의 감옥이나 다른 어떤 고난의 시기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보낸 시간을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북한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할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의 몸된 우리는 북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지원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저의 소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석방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듯이, 제가 할 일은 말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는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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