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필자는 대한민국의 서울 여의도에 있는 9층짜리 월드비전 건물 꼭대기 층에 앉아있었다. 그 건물은 국회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한국의 주요 정치, 금융 단지의 마천루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그 땅의 가치는 최상이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비영리 단체에 걸맞게 그 건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1970년대의 튼튼한 고 가구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몇몇 한국 경영진을 인터뷰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도주의 단체 중 하나인 월드비전의 기원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었다. 나는 1950년 서울에서 공산주의의 잔학행위를 경험한 후 풀려난 밥 피어스라는 이름의 역동적인 복음주의자의 공인된 이야기를 확인하기를 기대했었다. 미군과 함께 일하면서, 피어스는 한국을 전시의 황폐함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지위로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준 학교, 고아원 그리고 교회를 시작했다. 냉전의 불안한 소란 가운데 출범한 이타적인 미국 복음주의 단체인 월드비전의 창립 신화는 반세기가 훨씬 넘게 굳건하게 서 있었다.
월드비전 코리아에서 갓 퇴임한 박종삼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나를 이 진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유명한 은발의 대표는 밥 피어스에 대한 나의 집요한 질문을 받아넘겼지만, 그는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한 한국인 목사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한경직 목사는 6·25전쟁 당시 박씨가 서울 거리에서 겨우 멍석을 두르고 잠을 자던 노숙자 난민 아이였을 때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
나는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나의 질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조바심을 내면서 듣고 있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본론으로 돌리려 하자 화를 냈다. 한 목사 또한 월드비전의 창시자라고 그는 설명했다. “월드비전 코리아 말씀이신가요? 나는 분명히 하려고 했다.” 그는 대답했다. “아뇨, 전부요.”
다시 생각해 보니, 박 대표의 주장은 내가 이전에 간과했던 증거와 맞아떨어졌다. 나는 피어스와 한 목사가 함께 나오는 사진을 여러 장 본 적이 있었는데, 보통 한 목사를 피어스의 ‘통역가’라고 설명하는 자막이 붙어 있었다. 실제, 1950년대 초반의 많은 자료들에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있었으며, 특히 서울에서의 자료가 그랬다. 한 목사가 피어스의 설교를 그의 교인들을 위해 한국말로 통역했을지 모르지만, 한 목사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의 목사로서, 그리고 이후 월드비전의 기반이 된 수백 개의 인도주의적 운동의 설계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피어스가 전 세계 대통령들의 친구이자 월드비전의 설립자로 인정받는 전설이 되면서, 한 목사는 미국인의 의식에서 사라지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에도 한 목사의 기여에 대한 단서가 있긴 했다. 1954년 11월 어느 추운 겨울 저녁, 한 목사가 일찍 무대에 섰던 시카고의 오케스트라 홀에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듯한 피어스는 한 목사의 복음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진실성을 인정했다. 피어스는 한 목사가 “전쟁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쌀과 복음을 전문가처럼 나눠주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로 서로를 파괴할 것처럼 보였던 냉전의 무서운 시기였던 그 순간, 피어스는 부분적으로 한반도에서의 한 목사의 섬김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희망을 선언했다. 피어스는 그를 “하나님의 사람,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 진정한 영혼의 승리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피어스는 그의 모든 소망을 한 목사나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 그는 미군의 서울 폭격을 칭송했고,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저는 병원 침상에서 죽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는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 밤 이 부름에 응답하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성령으로 가득 차고, 얼어붙은 마음이 깨어질 사람들이 있게 해 달라고 어떻게 기도할까요?… 이번 달에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600명이나 됩니다. 이미 그들의 사진을 찍었고, 열흘 안에 그들의 이름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 봉투에 “한 아이를 입양하겠습니다”라고 쓰고, 1년 동안 매달 10달러를 보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다면요.
비즈니스 할 때와 같은 효율성으로, 안내자들이 서약서를 모으고, 사람들을 내보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면, 피어스는 프레젠테이션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시카고에서 모인 자금은 월드비전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단체로 갔다. 빌리 그레이엄과 1950년대 성장한 Youth for Christ,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같은 복음주의 단체들처럼, 월드비전은 영적 부흥에 대한 강한 헌신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를 키워왔다. 다른 점이라곤 인도주의적 자선에 대한 월드비전의 강조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월드비전을 유명하게 만든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이 사역의 1954년 240명의 아동 후원이 1990년에는 100만 명, 2015년에는 350만 명 후원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미국 정부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보조금과 개인들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소액 기부를 받는 월드비전은 개인 기부 규모로는 미국에서 19번째로 큰 자선 단체이다. 미국 지부의 연간 수입은 10억 달러 이상이며, 월드비전 인터내셔널과 합하면, 이 국제기구의 총 수입은 27억 5천만 달러이다.
하지만 65년 전 오케스트라 홀에서 있었던, 월드비전이 두 사람의 아이디어라는 생각은 이미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피어스가 전 세계 대통령들의 친구이자 월드비전의 설립자로 인정받는 전설이 되면서, 한 목사는 미국인의 의식에서 사라지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 쪽 이야기
피어스는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망연자실하고 있던 다른 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극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과 흔들리던 결혼생활을 극복하고, 극적으로 개종을 경험한 사람의 열정으로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카리스마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침례교 신자들, 나사렛성결교 신자들, 그리고 기독교선교연합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등 급상승하는 선벨트 복음주의 세계를 통해 빠른 길로 그를 이끌었다. 여러 교회에서 청년부 리더와 부목사로 사역한 후, 피어스는 Youth for Christ의 사역자가 되었다.
1940년대 후반 피어스의 첫 번째 중국 여행은 그의 반공 신념을 부채질했다. 성공적인 전도 여행 동안 놀랍게도 17,852명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을 본 후, 그는 붉은 군대에 의해 병원, 학교, 선교 시설들이 파괴되는 것도 목격했다. 미국인 전도자 피어스의 새로운 친구들이었던 중국인 목사들은 살해당했다. 최전선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피어스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본토 전체를 점령하기 직전 간신히 탈출했다. 공산주의의 망령이 비참한 광경으로 변해 있었다.
중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간 것을 본 피어스는 한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1950년 초의 한국 방문은 그의 경각심을 새롭게 강화시켰다. 러시아군은 38선을 넘어섰고, 피어스가 미국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주 후에 북한은 남한을 침공했다. 한국전쟁을 촉발시킨 이 공격은 즉시 서울을 집어삼켰고 남한 사람들을 남쪽 해안지대로 밀어냈다. 1950년 9월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의 9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11월 인천에서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과감한 개입은 서울을 탈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미군과 유엔군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후 대세는 다시 바뀌었다. 중국 인민군의 갑작스러운 투입은 진격을 뒤바꾸어 피어스의 기술에 의하면, ‘피흘리고 구타당한 도시’인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물러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1953년까지 계속되었고, 휴전 협정으로 3년 전에 전쟁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선에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한국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피어스의 사역은 공산주의에 대한 실존적 대응으로 부각되었다. 피어스는 그 몇 년간의 군사 충돌 기간 동안 엄청난 걸음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미국에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그는 속수무책으로 관망만 하다가, 냉전의 첫 번째 뜨거운 최전선 중 한 곳을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1950년 인디애나주 위노나 호수에서 열린 회의에서 피어스는 기독교인 순교자의 극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넓은 아량으로 기부해 줄 것을 간청했다. 피어스의 뒤를 이어 빌리 그레이엄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저는 벨에어 쉐비를 살 계획이었지만, 대신 한국인들을 위해 밥 피어스에게 기부했습니다.”
영적 최전선에서 피어스는 복음으로 계속 공세를 취했다.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그는 2만5000명의 한국 민간인과 한국군, 미군에게 “토착 종교와 불신의 어둠에서 복음의 찬란한 빛으로 돌아오라”고 복음을 전했다. 기독교인인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피어스의 성공을 높이 칭송했다. 피어스는 이날 뉴스레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그리스도를 위한 젊은이’와 같은 유형의 복음화가 극동을 지배하고 있는 무신론의 홍수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전했다.
만약 피어스의 방랑벽과 부흥주의의 조합이 유별나다면, 고통에 대한 그의 반응 역시 그렇다. 비록 복음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전 세계에 걸쳐 병원과 학교를 지어왔지만, 1920년대의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은 적어도-수사학적으로는- 복음주의자들을 사회 복음주의 낌새가 나는 사역에서는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에서의 육체적 고통과 가난을 접한 피어스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수사학적으로 인도주의적 노력에 다시 참여하도록 자극했다.
피어스의 인도주의는 월드비전의 창립 신화가 된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일깨워졌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그녀의 아버지에게 구타당하고 의절 당한 백옥이라는 이름의 중국 소녀를 만났다. 사실상 고아가 된 백옥은 갈 곳이 없었다. 그 지역의 선교사는 이미 고아를 돌보고 있었기에 또 다른 고아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피어스는 선교사와 백옥에게 그가 가진 현금 5달러 전액을 주었고, 그 후 매달 같은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만남들처럼, 이 만남은 특히 피어스를 감동시켜 성경 속 표지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소서”라고 썼다. 이것은 월드비전의 구호가 되었고, 그것이 어린이 후원 프로그램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한 달에 10달러를 기부하면, 고아 한 명의 음식, 옷, 교육, 종교 교육을 후원할 수 있었다. 피어스가 명명한 “나의 고아원”을 위한 기금은 1954년 57,000달러에서 1956년 450,000달러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월드비전은 비종교 미국인들에게조차 친숙한 인도주의적 거물이 되었다. 역사가 데이비드 킹이 언급했듯이, 그것은 “개신교 선교 사역을 둘로 찢어버린 복음주의와 사회적 행동 사이의 이분법”을 하나로 묶어냈다. 피어스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한 거대한 자연의 힘처럼 보였다.
이것이 월드비전의 공식 역사이다. 그러나 한국쪽 시각으로 보자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승리주의적인 미국의 서사에 역행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 쪽 이야기
한경직 목사가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은 피어스보다 낮았다. 1902년 유교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난 한 목사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가난에 시달리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부흥 운동은 한 목사의 출생 무렵에 이 지역을 휩쓸었고, 그의 가족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기독교로 개종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평양은 무신론 국가 북한의 수도가 되기 전에는, 아시아 기독교 전체의 영적 수도였다.
한경직은 매우 인상적인 젊은 청년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상냥한 성격, 뛰어난 지적 능력, 근면한 직업 윤리, 그리고 깊은 신앙에 주목하면서 그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부자들이 그를 프린스턴 신학교로 보내, 그는 저명한 신학자 J. 그레샴 메이첸 지도하에 공부할 수 있었다. 메이첸의 지성과 신학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의 호전적인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한경직은 온화하고 에큐메니컬한 보수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신학적 중간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질들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지대 큰 도시인 신의주에서 그의 첫 번째 한국 목양기간 동안 잘 작동했다. 피어스의 사회적 관심이 외국의 빈곤에 대한 미국인 특권층의 충격에 대한 강렬한 감정적 반응 위에 세워졌다면, 한 목사의 사회적 관심은 고통받는 양떼에 대한 오랜 기간의 목양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신도들이 깊은 사회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의 먼 북쪽에서 보낸 그의 13년은 걱정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생산적인 기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증대한 영향력은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의 교회는 어려운 재정으로 고통받았고, 정치적 자유는 거의 없었다. 한때, 일본 당국은 한 목사를 고문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이는 그가 평생 후회한 행동이었다. 이런 여러 어려운 와중에도, 그는 교회 건물, 고아원, 양로원의 건설을 독려했다. 한 목사는 종교와 시민사회 이슈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 목사의 명성은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 목사는 일본 총독에 의해 과도기 동안 치안을 감독하기 위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젊은 남성들이 치안 유지 활동에 참여하도록 신의주 자치 협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복에 대한 한 목사의 기쁨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한반도 북부 지역 통치는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소련의 신의주 감독과 함께 위도 38도에 남북 경계선이 설치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즉시 단속을 실시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토지 압류, 고문, 즉결 처형에 처했다. 한 목사에 대한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일반 난민으로 위장했다. 그는 1945년 말, 여전히 국경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남한으로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한 목사의 리더십은 서울에서 꽃을 피웠다. 북쪽에서 몰려온 난민들로 인해 악화된 서울도 신의주 못지않게 상황이 좋지 못했다. 한 목사는 거지들, 노숙자들, 매춘부들 사이를 걸으며 절망에 빠졌다. 그는 ‘무소유의 복음’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제 마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저는 고개를 들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텐트를 확보하고 난민들을 협동조합 형태로 조직하고, 작업을 할당하고,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27명의 난민의 첫 번째 모임을 영락장로교회에서 주재했고 그 이름을 ”난민 교회’라 불렀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북에서 왔기 때문이다. 반년 만에 교회는 1,000명의 교인을 확보했고, 2년 내에 4,300명이 모였다.
처음 4년 동안 이들 난민들은 텐트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후 미국에서의 한 목사의 연결고리를 통해, 영락교회는 직접 손으로 거대한 석조 고딕 건축물을 짓기 위한 재료를 위해 2만 달러를 모았다. 그 기간 동안, 한 목사는 인도주의적 사역을 계속했다. 1947년, 그는 6개 정도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몇몇 고아원, 과부를 위한 집, 더 많은 학교들, 그리고 장례식장이 포함됐다. 1948년, 그는 북한에서 내려온 난민들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운동도 펼쳤다. 한 목사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50년 6월 25일, 비극이 다시 일어났다. 영락교회가 교회 건물을 완공한 지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 북한이 침공했다. 양측 모두 잔학 행위를 저지르면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수가 배로 증가했다. 영락교회를 무기고로 사용하길 원했던 침공세력의 진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회 문 앞에서 교회 지도자 1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공산주의 무장세력에 의해 3000여명의 기독교 목사들이 익사 당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몇 달 안에,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파괴되었다.
한 목사의 인도주의적 활동은 혼동 속에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쟁 발발 하루 뒤, 그는 한국 기독교 국민 구호회(Korean Christian National Relief Society)를 발족시켰다. 그는 또한 기독교 연합 전쟁 비상 위원회(Christian Union Emergency Committee for War)를 이끌었다. 그는 맥아더 장군과 미군의 텐트를 얻기 위해 협상하여 난민 캠프에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한 목사가 1951년 3월 주 한국 유엔 대표로 근무했다는 사실은 고위급 인도주의 협정을 중개한 완벽한 내부 인사로서의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한 목사는 한국 내 수십 개의 조직을 이끌었기에 천성적으로 관료주의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관찰자들은 그의 조직에 있어서의 천부적 재능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겸손한 지도자로서 그의 조용한 카리스마가 동료들에게 그의 리더를 따르도록 “영감과 격려”를 줬음을 주목했다. 다른 사람은, 한 목사를 온화한 설득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탁월한 중재자로 불렀다. 그는 또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끈질기게 일한 잔인하다 할 정도로 효율성을 보인 사람이었다. 주변의 한 사람은 한 목사가가 “비록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늙은 종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매우 이성적인 사업가처럼 행동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서쪽을 바라보며
밥 피어스의 한국 기독교인 ‘구조’와 서구에서 보는 ‘이질적 통역사’인 한 목사와의 관계 묘사는 동쪽이 아닌 서쪽을 바라볼 때 매우 달라 보인다. 피어스가 한국에 발을 채 들여놓기도 전에 이미 월드비전의 설립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탁월한 교인이자 영어에 능통한 한 목사는 이미 전 세계 인맥들과 구호 활동과 네트워킹을 조율하고 있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결코 이런 식으로 기술하지 않았지만, 피어스가 한 목사를 발견한 것만큼 한 목사도 피어스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1950년 초 미국 선교사의 조언으로 피어스를 영락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한 사람은 한 목사였다. 피어스가 자신이 세운 인도주의 사업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한 한 목사는, 피어스가 서울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 그를 초청했다. 피어스는 1,500여 명의 신도들에게 “인간 육신의 거대한 모자이크로 함께 끌어안고” 설교를 했다고 기록했고, 한 목사는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야외 부흥회에서 피어스를 설교하도록 초대함으로써 거의 동시에 이 새로운 관계를 이어나갔다.
때때로, 통역사는 통역 이상의 역할을 한다.
불과 몇 주 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 목사는 피어스에게 상황을 계속 알려주었다. 1950년 말, 그들은 부산에서 다시 만나 몇 번의 목회자 수련회 개최를 위해 함께 일했다. 막바지 행사에서 피어스는 주 설교자였고, 그가 수련회 전체 비용을 지불했다. 미국이 끊임없이 언급했듯이, 한 목사는 확실히 피어스를 위해 통역했지만, 이것이 그가 둘의 관계에 있어서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한 목사가 모든 것을 조직했다.
이 협력적인 정리는 두 인도주의자들의 패턴이 되었다. 피어스는 모금과 홍보에 앞장섰고, 한 목사는 월드비전의 유아 사역을 감독했다. 이 사역들 대부분은 피어스가 현장에 나타나기 전부터 가동되고 있었다. 한 목사의 영향 아래, 그들의 파트너십은 점점 더 사회적 구호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이것은 전 세계 월드비전 활동의 중심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피어스는 한 목사가 구축한 이미 존재하는 인도주의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있었다. 월드비전 이전에는 영락교회가 있었고, 영락교회 이전에는 신의주가 있었고, 신의주 이전에는 평양 외곽에 사는 한 기독교 가족이 있었다. 월드비전의 계보는 매우 한국적이다.
그러나 해가 지남에 따라 월드비전의 기원 신화에서 한 목사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줄어들었다. 작가 리처드 게먼의 1960년 기사는 서울 공항에서 피어스를 맞이하는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한 목사를 간략하게 언급할 정도였다. 그 기사에서는 고아원 사역의 공을 서구 단체들에게 돌렸다. 1972년 기고문에는 한 목사를 헌신된 성자이며 난민들을 위해 여러 고아원과 학교를 지은 “온화하고 헌신적인 목사”라고 묘사했지만, 월드비전이 한 목사의 한국전쟁 전과 전쟁 중 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 1983년,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훌륭한 통역가, 닥터 한(Dr. Hahn)[틀린 철자]”이 피어스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통역했다는 오랜 대사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피어스의 딸인 메릴리 피어스 던커가 쓴 전기인 맨 오브 비전은 피어스가 “영(Yung)[틀린 철자]낙장로교회가 후원하는 타비타 과부들의 집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사역 뒤에는 한 사람의 동정심, 에너지, 그리고 비전이 있었는데, 결국 월드비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밥 피어스였다.”고만 기록하였다.
한 목사가 월드비전 인터내셔널과 월드비전 코리아에 지속적으로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에 대한 언급은 서구 복음주의 사회 행동에 대한 승리주의적 서사에 묻혀버렸다.
피어스 자신은 한 목사의 업적을 간과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월드비전의 초기 기록에는 한 목사 대한 묘사와 심지어 그에 대한 열렬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회고록인 “한국의 들려지지 않은 이야기(The Untold Korea Story”에서 피어스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섬긴 한 목사의 용기, 경건함, 그리고 훌륭한 솜씨를 극찬했다. 피어스는 “과거의 혼란에서 벗어나 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민족을 위해 미래를 만들었다.”고 까지 썼다. 던커는 CT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나는 비전이 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난 단지 기금 조성자에 불과했다. 난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거기 있었던 분이 그것을 해냈다.’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일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한 목사 역시 피어스를 떠오르는 스타로 원망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한 목사는 서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와 그의 동료인 피어스의 1978년 장례식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는 “한국 사람들은 그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그는 가장 잘 알려진 복음 전도자이자 해외에서 온 사회복지 사업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왔다”는 한 목사의 제한적인 표현은 피어스가 결코 유일한 창업자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은 월드비전을 피어스와 한 목사가 공동 설립한 합작기관으로 꾸준히 그려왔다. 월드비전 코리아 박 전 대표는 피어스는 “악보 대로 연주한 명연주자였다. 나머지 90%는 한국인이 해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월드비전은 미국에서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북한 출신 목사가 실제로 서울의 빈민가에 그것을 정착시켰다.
“한쪽 이야기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TED 강연에서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마만다 아디치(Chimamanda Adichie)는 지배적인 서사가 어떻게 다른 배우들을 고정관념으로 묶고, 궁극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를 묘사한다. 그들 자신들의 영웅 중 한 사람의 경건함과 진보를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기를 열망하는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이 정확히 이것을 행하였다. 그 결과는 강하고 자비로운 미국과 궁핍하고 절망적인 한국에 대한 강조라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확실히, 미국의 자본과 기술적 전문 지식이 한국을 처참한 파괴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피어스는 그것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이미 활기찬 기독교가 거기 있었고, 그것은 미국 버전 보다 확실히 더 활기찬 것이었으며, 미국인들에게 열렬한 기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발전적인 사역을 가르친 기독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통역사는 통역 이상의 역할을 한다.
한 목사와 피어스 사이의 협력과 같은 초국가적인 협력 사역은 이 새로운 세기에 믿음이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이듯 배가되고 있다. 현재 기독교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북미와 유럽 밖에 있다. 그리고 인구학자들은 미국이 2040년대 어느 시점에 다수를 차지했던 소수 국가가 될 것이라 예측한다.
컴패션 인터내셔널 에서부터 IVF, 전미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까지 많은 미국 단체들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독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의 리더십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의한 신앙에 기반을 둔 기관 형성이 단지 현재와 미래의 현실만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것은 그동안 줄곧 일어나고 있었던 현상이다. 지금은 선교 단체와 인도주의 단체들이 자신들의 한경직 목사를 찾아 과거를 파헤쳐야 할 때다. 전 세계에 기독교 기관을 세운 그렇지만 역사적 명성을 잃었거나, 혹은 계속 외면되어 왔던 남성들과 여성들은 누구일까?
2018년 최초로 비백인 미국인 에드거 산도발을 CEO로 임명하고, 1970년대에 기관 구조를 국제화했고, 반세기 동안 다양한 후원자 모집을 표방해온 월드비전의 경우 이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월드비전이 이미 존재하는, 한 목사를 창립 서사에 포함시키는 것은 국제적이고 다민족적인 조직에 훨씬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사실, 이야기가 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있다. 아버지의 전기를 쓴 지 40년이 지난 뒤, 던커는 다음 책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것은 월드비전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관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다른 교회들과 개인들의 이야기와 함께 한 목사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한다.
데이비드 R. 스와츠는 애즈베리 대학교의 역사학과 부교수이다. 그는 Facing West: American Evangelicals in an Age of World Christianity (Oxford University Press, April 2020) 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