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으라: 바울의 멘토링 모델

권력 중심 접근법과 달리, 건강한 기독교 멘토링은 관용과 신뢰로 특징 지어진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6, 2022
Source Images: Wikimedia Commons / Getty / Tempura

나는 독일에서 6개월 동안 살았고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식료품을 주문하거나 버스표를 사는 것은 잘했다. 하지만 농담은 할 수 없었다. 이야기나 소망도 나눌 수 없었다. 나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다른 어학원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나는 작은 대학 마을인 튀빙겐에 있는 다른 어학원에 전화를 걸어 즉시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느린 독일어로 어학원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고, 나를 배치 시험에 초대하기도 했다. 며칠 후 그 학원에 내가 들어갔을 때,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다. 그녀는 내 목소리와 억양을 기억했다. 사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즉각적인 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로 그 기쁨으로 모든 사람들을 맞이했다.

독일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친절했다. 그녀를 지켜본다면 이 새로운 언어로 기쁨과 온화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 모습, 아니 적어도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보았다.

효과적인 멘토링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의도적인 모방 행위를 포함한다. 먼저 듣는 것으로 시작해 호기심을 키우고, 새로운 언어 기술을 습득하고, 언젠가 딱 맞는 버전을 찾을 때까지 시행착오를 참아주는 관계다.

모방 그 이상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일자리를 찾을 때,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시기 즉 전환기에 멘토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멘토는 멘티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종종 그 사이 혼란기까지 아는 독특한 형태의 친구라 할 수 있다. 멘토링은 새로운 상황에서의 필요와 요구에 맞닥뜨릴 때,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연속성을 제공하여 우리가 누구인지를 상기시켜주는 우정의 한 형태이다.

교회에서의 멘토링은 새롭게 섬기기 시작한 리더들뿐 아니라 이미 사역자로 섬기고 있는 리더들의 계속적인 성장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리더십 계발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들에 있어서 멘토링은 종종 자신의 교회 상황 밖의 동료 목회자나 리더들로부터 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멘토링은 목회자들에게 독특한 형태의 제자도가 될 수 있으며, 양쪽 참가자 모두 관용의 자리에서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교회에서의 멘토링이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다. 이 위험은 탁월하고자 하는 욕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단순한 암기와 모방으로 이어질 때 온다. 그 접근법을 취하면, 사람들은 그 고유의 표현법 일부를 배울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창의성과 유연성은 부족할 수 있다.

힘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

비즈니스 세계와 불행하게도, 몇몇 기독교적 맥락에서, 멘토링은 네트워킹을 확장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과정이다. 당신의 멘토는 당신을 위해 줄을 당겨주고, 당신을 변호하며, 당신에게 조언을 해 준다. 이러한 “멘토십” 모델에 기초한 일부 교회 승계 계획에는 권력의 승계가 포함된다. 권력이나 영향력은 어떤 것이 전해지고 넘겨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경우 멘토링은 취약성, 진정성, 성장을 장려하는 우정의 관계보다 통제와 야망에 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접근은 특정 직장에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교회에 적용을 해보면? 멘토링에 대한 이러한 네트워킹 접근은 우리에게 힘을 다르게 보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접근에는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주님을 따르라는 요구가 없다.

진정한 멘토링은 힘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멘토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고전은 호머의 오디세이라 할 수 있다. 이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의 오랜 친구인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돌봤다. 아테나 여신은 어린 텔레마코스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오래된 가족의 친구로 인간화하여 나타났다.

나는 종종 멘토링 집단과 함께 내가 일하는 신학교에서 목회자들과 최근에 졸업한 신학생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사례로 들곤 한다. 이 사례에서, 나는 멘토란 어떤 사람이 직업을 가지려 할 때,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멘토는 멘티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멘토는 주로 친구 관계로 온다. 구약성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만약 멘토링이 성공한다면 상호학습의 길이 열릴 것이라 지적한다. 두 사람은 우정과 취약성으로 연결돼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고, 그 연결로 인해 둘은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함께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한 중견 담임목사가 지역의 한 교회에서 막 사역을 시작한 신임 목사를 멘토링하면서 ‘그 말이 맞다’라고 했을 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멘토와 멘티 둘 다 팬데믹 기간 동안 예배, 설교, 그리고 제자훈련에 대해 비슷한 질문을 하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서로 대화하면서, 그들은 최근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의 교회에서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역자들은 속도를 늦추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고, 신뢰가 길을 인도하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서로의 상상력을 다듬었고, 그 결과 자신들의 회중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멘토링은 실제로 삶의 정황이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할 때, 권력을 장악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것을 배우는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고,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모방도 요구한다.

바울과의 우정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역의 현장에서 나의 멘토가 되어 준 많은 분들이 없는 나의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들은 나에 대한 진실을 지적하는 좋은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역자 친구들은 우리에게 이 부르심, 이 사역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일단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면, 우리는 많은 선한 일에 계속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 각자는 우리를 부르신 더 큰 맥락인 교회의 사명에 대한 공통점을 지키는 가운데, 자신의 스타일과 고유한 목소리를 더할 수 있다.

우리는 바울 서신에서, 리더들 사이의 우정과 상호 격려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볼 수 있다. 바울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우리는 종종 바울이 그들을 꾸짖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바울이 독자들에게 그들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들 편에 서 계심을 말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음을 잊곤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특히 빌립보서에서 볼 수 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과 가까웠다. 그들은 바울에게 음식과 헌금을 보냈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염려했다. 그것에 대한 답으로, 바울은 감옥에서 기쁨에 관한 편지를 썼다. 그들에게 감사의 글을 적기 전에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3:17, 개역개정)고 말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본받고,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는 같은 권유를 다른 바울 서신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린도전서 4:16; 11:1, 데살로니가전서 1:6).

이 권유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만해 보이거나 자아도취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특히 유명인 목사들의 입에서 이 초대를 들을 때 그렇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유명인이 되기에 적합한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항상 통제력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바울의 나를 본받으라는 권유는, 권력과 영향력에 대해 자신처럼 우리도 달리 생각하라는 초청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믿음과 신실함을 본받으라는 초청이다.

바울과 1세기 편지 쓰기, 바울, 편지 저술가, 고대 편지 저술가 바울 등의 저술이 포함된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주요한 신약성경 학자들의 책에서, 그들은 구전 문화에서 편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전달되었는지에 대해 토론을 벌여 왔다. 우리는 편지를 쓰는 것을 혼자만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울은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 내에서 편지를 썼다. 편지 쓰기 과정에는 바울이 편지 쓰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공연하듯 편지를 전달하는 모방 행위가 수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은 바울의 버릇과 어조를 배웠다. 그들은 특정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바울의 바디 랭귀지를 흉내 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바울을 모방했다.

실비아 키이즈마트와 브라이언 월시는 그들의 새로운 주석 ‘Romans Disarmed’에서 어떻게 이런 모방 행위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반복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들은 로마 교회 신자들이 부엌에서 어떻게 만났을지 상상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공연하듯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 상술하고, 그 사람이 이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설명한다. 키이즈마트와 월시는 우리는 이 편지들을 한 특정 그룹이 단 한 번에 받은 것이 아니라, 질문과 추가 설명을 위한 시간과 함께 반복해서 공연하면서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편지는 공동체에서 전달되었고, 관계를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각각의 편지는 본받을 대상으로 바울을 제시했지만, 그 본보기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학자 엘리자베스 시블리는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본보기라는 단어 설명을 위해 사용한 그리스어 단어 typos는 봉인이나 도장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시블리는 지적하기를 “바울의 삶에 각인된 typos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특정한 삶의 형태이다.”

멘토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우리가 바울을 기독교 멘토의 진정한 모델로 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가면을 끊임없이 벗고, 진정한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본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을 본받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능력

교회들의 목회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멘토링 관계는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신뢰하는 능력이라는 같은 종류의 변혁적 힘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멘토링이다.

바울처럼 이 힘은 권력을 포기하는 힘이다. 그것은 우리의 견고한 사고방식을 내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며, 우리가 무엇을 잃어야 하며, 우리가 무엇을 통제하려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그래서 다른 이들이 행할 수 있는 편지를 쓸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복음이다. 아마도 몇몇 멘토들의 기쁨에 대한 매너리즘 중 일부는 여전히 모방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신의 고유한 강조로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할 수 있는 장소로 안내할 수 있도록 배울 것이다.

좋은 멘토는 결코 자신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좋은 기독교 멘토는 멘티가 그 대가로 그리스도의 큰 그림을 제공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도록 신뢰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밝힌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1:3-5)

멘토링의 중심 요소는 협업과 신뢰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관용을 낳는 신뢰이다. 관용의 마음으로, 우리는 우정이 계속될 수 있음을 언제나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무한한 여정을 볼 수 있고,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기쁨의 소리를 내는 새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Beth Jarvis는 밀리건 대학의 사역 자원 센터의 센터장으로 사역자들이 그들의 사역의 현장에서 서로 연결되도록 돕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안수받은 목회자이며, 밀리건의 에마누엘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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