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입양의 기독교 역사

오리건의 한 가족이 8명의 혼혈인 아이들을 입양하고 월드비전과 컴패션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기까지 지나온 입양의 역사에 관하여

1955년 7월 16일. 한국 전쟁 고아가 된 아이들이 한국의 부산에 있는 어린이 보호 시설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

1955년 7월 16일. 한국 전쟁 고아가 된 아이들이 한국의 부산에 있는 어린이 보호 시설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15, 2022
John Chillingworth / Stringer / Getty

수십 년 동안, 미국인들은 동아시아인들을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 타지인으로 여겼다. 1882년 시행된 중국인 배제법은 다른 인종 또는 민족의 이민을 금지하는 최초의 미국 법안이었다. 30년 후 일본인 및 한국인 배제연맹이 결성되었고, 뒤이어 미국과 일본 국가 간에 미국 취업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여권을 거부하는 조약을 맺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거세진 일본인들을 향한 증오로 인해 약 120,000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억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5년 의회의 특별법안으로 백인 부부인 베르타와 해리 홀트가 한국전쟁 고아 8명을 입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리건에 기반을 둔 농부이자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었던 홀트 가족은 궁극적으로 수천 명의 미국 가정이 동아시아 아이들을 입양하도록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리처드 뉴버거 오리건주 상원의원도 그들을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환영했을 정도다. 수십 년 동안, 백인 미국인들은 아시아인들에 대해 무지했지만, 이는 이내 미국인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입양 문화를 촉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월드비전과 에버렛 스완슨 전도협회

1910년,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다. 한국은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기 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대립하였던 두 정부는 미국이 지지하는 남과 소련이 지지하는 북으로 나뉘었다. 1951년, 북한은 남한을 침략했고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말, 미국과 중국군은 내전을 세계적인 분쟁으로 확대시켰다.

전쟁은 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사상자는 250만 명이 넘었는데, 그 중 다수가 민간인이었고, 10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발생하여 수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생겨났다. 1953년 휴전과 함께 전쟁이 중단되었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으로 공포와 충격을 받은 로버트 피어스와 에버렛 스완슨은 1950년과 1952년 각각 월드비전과 에버렛 스완슨 전도협회(ESA·현 컴패션인터내셔널)를 설립했다. 피어스와 스완슨은 해외선교 전 현지 목회자이자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인들이 매달 재정적으로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가난한 고아들의 원격 ‘입양’을 도입했고, 한국 고아들의 이미지를 더는 버림받은 떠돌이가 아닌 그들이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월드비전과 ESEA의 팜플렛 곳곳에는 “동양에 있는 여러분의 아이입니다”와 삐뚤게 쓴 한글로 “감사합니다” 등 어린이들이 직접 쓴 메모가 큰 글씨체로 실려 있었다. 후원자에게는 남자나 여자 고아 중에서 한 명을 ‘입양’하고 아이의 사진과 간단한 이력 사항, 아이의 발자국 등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당신이 후원해야 할 한국의 고아를 월드비전을 통해 만나보십시오!”라는 문구로 월드비전은 수많은 포스터와 소책자를 제작했다. 후원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소책자에는 “당신도 아이들의 감동적인 감사 편지를 받고, 아이들이 밤마다 기도하며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소중한 후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피어스는 인종이나 신체적 조건을 모두 떠나서 모든 아이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피어스와 스완슨은 전도를 인도주의와 접목해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와 사회적 행동을 통합하도록 도왔다. 월드비전과 컴패션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아원과의 결연이 전도로 이어졌고, 기도 위에 교육 활동이 세워졌다. 아이들은 직접 정기예배에 참석해 지속적인 제자훈련을 받기도 했다.

피어스는 성경 공부와 성경 암기를 통해 영적 성장을 우선시하는 ‘작은 목자 훈련(Little Shepherd Movement)’을 시작했다. 보육원들은 현지 한인교회와 협력해 9,000여명의 고아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했다. 피어스는 아이들의 사진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향한 인류의 필요성을 대변한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국제주의: 월드비전과 복음주의 인도주의 시대 에 관한 CT의 리뷰는 “1950년대 말까지 월드비전은 연간 예산의 79%를 고아들에게 투입하며 약 13,000명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425,000달러 이상을 지출했다”라고 기록했다. “아동 후원은 월드비전 모금의 가장 주요한 부분이자 기관의 정체성이 되었다.”

해리와 베르타 홀트

피어스는 월드비전의 아동 후원 프로그램 모집 투어 때 한국 전쟁으로 인한 과부와 고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관객 중에는 해리와 베르타 홀트가 있었다. 베르타 홀트는 동양의 씨앗이라는 책에서 혼혈 인종 아기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라고 묘사했다. 그 당시 한국 여성들과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GI 아기들은 쉽게 낙인이 찍히곤 했다. 그들은 아버지 없이 성매매 여성에게서 태어난 인종적으로 ‘불순한’ 아이들로 여겨졌다. 많은 한국 여성들은 혼혈인 아이들을 오래 숨겨서 키우기도 했으며, 일부는 아이들을 버렸다.

홀트 가족은 이 아이들을 단순히 후원하는 것 이상을 하기를 열망했다. 베르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국인 고아들을 더 사랑해주고 돌보아 주기 위해 몇 명을 집으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제 안에 점점 커졌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상적인 꿈만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 꿈은 계속 커졌습니다”라고 되뇌었다.

이어 베르타는 해리도 자신과 같은 마음을 표현했을 때 신성한 영감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해리는 고아들의 사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마음의 짐이 계속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해리는 혼혈인 고아를 입양하기 위해 한국에 가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함을 누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베르타와 해리가 일주일 내내 거의 똑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묵상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만이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홀트 가족은 이 일을 거룩한 의무로 받아들였다. 해리는 자신의 사명과 소명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기했다고 회상했다. “적들이 나를 계속 방해했습니다. ‘집에서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 무엇을 하고 있나? 넌 단지 농부일 뿐이고 그 분야를 아는 사람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해리가 성경을 열어 눈을 들었을 때 해리의 의심은 사라졌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 중에서도 특히 이 말씀을 주셨다. 이사야 43장 5-7절: ‘두려워하지 말라…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장은 해리와 베르타 홀트의 입양신학의 토대가 됐고, 베르타는 ‘동쪽에서 온 씨앗’이라는 문구를 책 제목으로 사용했다.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라는 또 다른 책에서, 베르타는 이전에는 “동쪽에서 너의 씨앗을 데려오겠다”와 “내 아들들을 먼곳에서 데려와라”가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두 문장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데려오겠다”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반면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라”는 약속이 아니라 명령이었던 것이다.

홀트 가족은 8명의 외국인 아이들의 입양을 허용하는 특별 법안을 청원하게 되었다. 1953년 난민구제법은 1956년까지 입양을 위해 4,000명의 고아의 미국 입국만을 허용했고, 외국인 고아의 입양을 가구당 2명으로 제한했다. 해리 홀트가 뉴버거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쓴 뒤 동료인 웨인 모스 오리건주 상원의원과 함께 법안을 상원에 상정했다. 에디스 그린 오리건주 하원의원이 하원에 이 법안을 상정했고, 양 의회가 모두 승인한 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5년 ‘홀트 법안’에 서명했다.

해리 홀트는 사비를 들여 1955년 처음으로 한국에 왔고 월드비전과 함께 수많은 고아원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이민국의 보건 기준을 충족시킬 아이들을 찾기 위해 멀리 떨어진 시골 지역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같은 해 10월, 해리와 베르타 홀트는 그들의 가족이 될 8명의 아이들과 다른 세 가족과 만날 4명의 아이, 총 12명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왔다. 이듬해, 그들은 홀트 입양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현재 홀트 국제 아동 복지회는 1956년부터 미국 가정에 약 50,000명의 한국 아이들의 입양을 성사시켰다.

국제적 반응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초월한 입양 운동을 지지했고 해리 홀트를 “국제적인 이해와 선의를 지닌 선구자”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러한 지지 동기는 다각적이었다. 사상적으로 그는 한국인의 인종적 단일성을 찬양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인 일민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또한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지지했다. 혼혈아를 배척하는 인종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이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아이들은 혼혈을 의미하는 별명인 ‘튀기’라고 조롱받았다.

더욱이 미국 군인이 점령한 마을에서 매춘이 만연하고 많은 혼혈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많은 한국인이 혼혈아와 그들의 생모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외면했다. 한국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이었지만 미군 정부는 군사기지 주변에서 성매매를 허용했다. 한국 정부는 또한 매춘이 외화를 벌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묵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본 것은 혼혈 아이들이었다. 미국인 생부는 혼혈 아이들을 버렸고,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아버지 없는 아메라시안 아이들은 보살핌받지 못하고 배척당했다. 홀트가 일을 시작한 후 첫 10년 동안, 한국 입양인들의 절반 이상이 혼혈이었다.

이런 가운데 홀트 가족은 널리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1958년 이승만은 그들의 업적을 기리며 해리 홀트에게 한국 최고의 시민상을 수여했다. 린던 B. 존슨 대통령은 1966년 베르타 홀트에게 ‘미국의 어머니’상을 수여했다. 1995년 한국 보건부는 입양부처에 지속적으로 헌신한 공로를 인정해 그들에게 무궁화상을 수여하였다.

한국 매체들도 해리 홀트를 ‘한국 입양의 아버지’로 지칭하며 홀트 가족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베르타는 후에 한국인들에게도 다정한 ‘홀트 할머니’로 불리며 ‘한국 고아들의 선구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국계 미국인들도 홀트 가족을 칭찬했다. 한 한인 신문은 해리 홀트를 선한 사마리아인에 비유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 사람만 돕는 반면 홀트 부부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수많은 아이들을 돕고 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1950년대 한국 대중은 초국가적인 입양 운동을 미국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자선적인 인도주의 프로젝트로 보았다. 홀트 부부가 기독교인 부모를 선택하는 데 집중했기에 때로 부부의 경제적 안정과 정신건강, 가족력 등을 덜 엄격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해리는 기관이 기독교인 양부모만 받아들이는 정책과 양부모가 입양 대리인을 보내는 관행을 두고 세속 사회복지사, 특히 국제사회서비스 아메리카(ISS-USA)와 신랄하게 대립했다. 반대로 ISS-미국은 대리입양이 자녀와 잠재적 부모의 접촉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양부모가 새 자녀와의 유대감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북한은 1950년대에 한국 아이들을 입양한 것에 대해 미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평양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친척을 ‘미국 노예 상인들’에게 팔았다고 비난했다. 한 평양 라디오 방송은 한국이 실업 완화를 위해 이민을 조장했고, 이는 한국인을 강제로 팔려는 미국 제국주의와 이승만 정권의 악랄한 시도였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국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대한 비난은 한국의 대중 정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결론

당시 한국 아이들에 관한 미국의 수식어는 때때로 가부장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월드비전의 소식지는 너그러운 미국인들이 운 좋은 한국 아이들을 구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옷을 제공한다고 언급했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빠른 시일 내에 ‘한국에서의 삶을 잊고’, ‘아이들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착한 부모에 관한 기억’만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입양 부모들은 그것이 비록 아이들이 온 조국과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미국에서의 삶이 아이들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입양운동과 세계선교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중 하나는 분리된 사회에서 더는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수식어와 세계관을 널리 알린 점이었다. 대중에 대한 선교사들의 전략적 호소는 무고한 아이들의 이미지가 인종에 대한 분열적인 신학적, 사회적 낙인을 피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 피어스와 스완슨, 홀트 부부는 선교이사회가 파송한 전통적인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선교사 직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교사로 자처하기도 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가족은 가장 소중한 공동체였고, 가족 중심의 설득력 있는 수식어는 백인 미국인들이 한국 전쟁 고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입양된 부모들은 가족 내의 다른 인종을 포함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보수 백인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담론을 깊이 받아들이며 인종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한국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서서히 회복되면서 초국가적 입양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혼혈 전쟁 고아들이 입양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혼외자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혈통’의 아시아 아이들이 입양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이비리프트 작전 등 구호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고, 1970년대까지 선교사들이 긴급 개입함으로써 서서히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한국 전쟁 무렵 입양된 성인 입양인들이 영화, 다큐멘터리, 시, 소설 등 창의적인 형태로 입양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논란의 대상이었던 이들 입양인들은 이제 자신들만의 서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버림받은 경험, 정체성 위기, 문화적 뿌리에 대한 그리움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한 입양아는 인터뷰에서 “친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친모를 얼마나 닮았는지 항상 궁금했기 때문에” 양부모와 유대감을 쌓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녀는 대학 시절 심리치료를 받으며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1953년부터 2018년까지 약 170,000명의 한국 아이들이 29개국 이상의 가정에 입양되었다. 미국인들은 그 중 3분의2 이상인 114,117명의 아이들을 입양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1970년대 격동의 10년 동안에도 입양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가 국내 입양을 우선적으로 장려하는 노력으로 인해 국제 입양 비율이 크게 줄었다. 2008년에는 1,064명의 한국 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된 반면, 2018년에는 오직 206명만이 입양되었다.

정수진은 캘리포니아 침례 대학교의 조교수이자 문화 연구 소장이며, 연구 관심사는 동아시아 선교사, 기독교 국제주의, 세계 기독교에서 여성의 역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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