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9:4–21
저와 얼마 전 대화를 나눈 대학원생 한 명은 불가지론자 친구들이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던진 질문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불타는 고통의 모습과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최후의 심판이 어떨지에 대한 정통 기독교적 견해가 많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신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제서야 학생은 안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통적 기독교 또는 중세의 미신적 이미지로 인한 것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대학살이나 멀리서 날아오는 폭탄처럼 비인격적이고 냉정하게 임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의도적으로 열방의 심판에 참여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정의와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려면 심판을 집행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세상을 바로잡기를 원한다면 불의와 악은 함께 다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공의와 심판은 1세기의 방식 같은 생생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을 탄 전사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유는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공의와 심판을 집행하는 분으로 나타나신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재림하실 때까지 그분의 정체성에 변화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서 13:8). 이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공의를 제정하시고 심판을 집행하시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과 고통받는 자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와 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그에게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의가 이루어지고 즉,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에 젖은 옷을 입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는 그 피는 바로 그분의 피입니다. 결국,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왕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전에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권능과 능력을 구현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이 구절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방식, 자신의 통치, 자신의 제국을 주장하며 전능하신 왕에게 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끝장날 것입니다. 삼켜지고 있는 섬뜩한 이미지는 삶의 끝을 묘사합니다.
만왕의 왕은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에 저항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고집한다면 생명 대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과 정의는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루실 분은 신실하시고 참되십니다. 당신은 정의와 심판을 집행하는 그분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글렌 패키암(Glenn Packiam) 캘리포니아주 코스타메사에 있는 록하버교회의 담임목사이며, The Resilient Pastor의 저자이자 The Intentional Year의 공동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