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점점 더 많은 복음주의자가 사순절을 지키려 한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심오한 전환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찬송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의 가사처럼 “우리 마음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쉽다.” 우리는 연약하고 죄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 앞에서 우선 순위와 동기 및 약속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환의 시간에 금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역사적인 선례를 가지고 있는 좋은 방법이다.
성경을 보면 금식은 죄에 대한 슬픔의 표시(신명기 9:9, 18, 10:10, 에스라 10:6)이자 회개의 표시(사무엘상 7:6), 기도에 대한 도움(에스라서 8:21~23, 사도행전 13:2~3)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금식은 종종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방법으로 묘사된다. 우리의 나약함과 죄의 본성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상기시킨다.
사순절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의 삶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순절은 결국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 닮기를 바라는 영적인 여행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좋지만 개인의 거룩함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많다. 이런 행위가 현실 도피의 방편으로 활용되진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광야 금식에 관해 중요한 측면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금식을 본받아 이 40일 동안 그의 삶에 참여하고 싶다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금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진실되고 신실한 이스라엘
예수께서 금식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금식은 종종 죄와 회개에 대한 슬픔의 표시였다. 크레이그 블롬버그의 설명처럼 유대인들은 대개 금식을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이미 아버지와 함께 있는 죄 없고 신성한 예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음식을 멀리하겠는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 혹은 침례를 받으셨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예수가 부임하거나 사역을 위임받은 시기인 ‘기름부음(anointing)’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도와 금식에 시간을 더 들이지 않고 사역을 시작하는 더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
하지만 이것은 영적 수련회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과 교감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받기 위해”(4:1) 광야로 갔다. 사역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예수는 직접 사탄과 정면으로 맞서고 계셨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장면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시험하기 위해 홍해를 지나 광야로 40년 동안 인도하신 것처럼(신명기 8:2) 성령께서 40일 동안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여 유혹받게 하셨다. 순종적인 하나님의 아들과 불순종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대비되며, 두 이야기 사이의 유사점이 눈에 띈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이 더 좋았다며 음식에 대해 연신 불평했다 (출애굽기 16장).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린 순간에도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복음 4:4)”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을 의심하며 시험에 들었던 반면 (출애굽기 17:2~7), 예수는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는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사탄에게 경배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광야에서, 그리고 모든 구약 성경에 걸쳐 이스라엘은 다른 피조물들을 경배함으로써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했다 (출애굽기 32장). 하지만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4:10).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바로 그 율법에 근거해서 사탄의 간교함을 물리쳤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대표하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백성들은 실패했지만 예수는 성공하셨다. 그들은 불성실했지만 예수는 변함없이 신실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는 인류의 모든 삶을 경험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고, 금기된 선악과에 손을 뻗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 동등해지고자 했다. 하지만 N.T. 라이트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유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금기된 동등성을 낚아채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강탈한 결과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해야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거부하고 자신의 권리를 고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류의 반역의 결과를 되돌리려 했다. 40일 동안 예수는 음식, 편안함 그리고 안전함을 포기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침으로, 인간이 포기했던 것을 되찾을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모두를 위한 종
그리스도께서 단지 40일 동안만 인류를 위해 싸우며 특권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의 예수에 대한 묘사는 그의 어린 시절 전체와 궁극적으로는 성육신에 대한 제유(提喩)다. 제유는 직유법의 일종으로, 여기서는 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도록 작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셔서, 우리가 그가 공동상속인이 되도록 하셨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한 내용이다.
그[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6~7)
이로부터 신학자들은 ‘비움’을 뜻하는 그리스어 용어에서 유래해 케노시스(kenosis:신성포기) 교리를 개발했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을 비웠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셨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을 통해 본래 자신이 가졌던 신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9)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종이 되심으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셨다. 바울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는 신성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일평생 자기희생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예수가 특정한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고 이렇게 종노릇을 하신 바로 그 이유는, 나와 당신이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존 칼뱅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그의 한량없는 자비로 우리와 맺은 놀라운 교환이며, 그리스도는 지상으로 내려오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필멸성을 취하심으로써 그분의 불멸성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 그는 우리의 가난함을 자신에게 맡기게 하시고 그의 부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짓누르던 죄악을 짊어지시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히셨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리스도는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사셨으며 우리의 안위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그리스도의 금식은 이런 삶의 결정적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의 삶과 금식을 우리 삶에서 본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위한 금식 즉 그들의 유익과 축복을 위해 금식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방법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사순절은 단지 개인의 거룩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삶의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사순절은 또한 사회적으로 놀라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 목사이자 칼럼니스트인 척 콜슨의 말처럼 ‘사순절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서 손을 내밀 기회를 준다’ 왜냐하면 “타인을 위한 단순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사순절을 기억하며 그 기간에 술, TV, 단 음식 등 당신이 자제할 수 있는 무엇이든 포기로 마음먹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절제가 자신에게 치중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면 어떨까? 콜슨이 제안한 것처럼, 우리가 금식을 통해 저축한 비용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어떨까?
젠 해트메이커의 실험에 함께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해트메이커는 자신의 책 ‘7: 과잉에 대한 실험적 반란’에서 자신의 가족이 일상 속 일곱 개의 영역에서 어떻게 어지러운 것을 정리하여,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관대하게 베풀 수 있었는지 회상했다. 만약 타인에게 베풂이 금식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의 금식에 더 깊은 의미에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성육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로, 안으로 그리고 바깥으로 보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순절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힘의 원천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것을 그리스도께 바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섬기고 우리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지 깨닫도록 가르친다.
Kevin P. Emmert는 CT의 온라인 편집보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