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젊은 전문 직업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그 과정에서 매력적인 기독교 증인이 우호적이지 않은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줬던 대표적인 사례가 된 뉴욕의 목회자 팀 켈러가 5월 19일에 7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켈러는 맨해튼에 개혁적 복음주의 교회를 세우고, 키웠고, 교회 개척 네트워크를 시작했으며, 복음 연합을 공동 설립했고, 하나님, 복음, 기독교 삶에 관한 베스트셀러 책을 여러 권 썼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죄와 은혜에 대해 설교했다.
켈러는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히 믿었던 것보다 내적으로는 더 죄가 많고, 결함투성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감히 소망했던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사랑받고 받아들여졌습니다.”라고 거듭 말했다.
켈러는 문화적 수용 때문에 자주 특히 말년에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는 문화전쟁을 통한 반목과 복음주의의 “굴복시키기”식 접근을 거부했고,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수용성에 대한 잘못된 열망으로 사회와의 연관성, 선명한 복음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물타기 또는 심지어 기독교의 진리를 배반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우상숭배였다. 켈러는 인간은 망가졌으며,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주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예수만이 진정으로 그들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맨해튼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켈러는 미국의 문화적 엘리트들에게 그들이 거짓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2009년의 설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소중하다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그것이 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켈러는 뉴욕 메거진에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죄에 대한 구식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를 들으면, 섹스, 마약, 그리고 어쩌면 도둑질 같은 것들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달하기 원했던 오늘날의 독창적 계층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체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 더 많은 파괴적인 죄들에 의해 시달리고 있다.
“연관성”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의 영혼을 쥐고 있는 우상들을 식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들에게 당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켈러는 2021년에 “맨하탄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님, 음악 선생님, 코치, 교수님 그리고 상사들로부터 더 잘하고, 더 잘해야 하고, 더 노력하라는 말을 들으며 평생을 살아왔다.”라고 지적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는 의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으며, 이제 그 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듣는 것은 놀랍도록 자유케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켈러 자신도 버크넬 대학교의 대학생이었을 때 이 메시지를 들었다. 그는 1950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에서 부모 윌리엄과 루이스 클레멘테 켈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루터교회에 다녔다. 어린 티머시는 2년간의 기초성경공부반에 참여했지만, 그는 대부분 기독교가 선해져야 하는 종교라고 배웠다.
그는 1968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그곳의 기독교인들이 시민권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IV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곧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영국 복음주의자들, 특히 존 스토트, F. F. 브루스, C. S. 루이스의 작품들을 섭렵했다.
이후 그는 루이스를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으며, 그의 책 ‘믿는 이유’에서 그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1972년 졸업 후, 켈러는 고든 콘웰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캐시 크리스티라는 이름의 학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루이스 서적을 읽은 후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녀가 13살이었을 때 즉 루이스가 죽었을 때까지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티머시와 캐시는 사랑에 빠졌고 1975년 고든 콘웰 졸업 직전에 결혼했다.
켈러는 교회 설립 2년 전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약 300개의 교회를 보유한 미국 장로교회(PC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연방 교도소와 제임스 강 사이에 위치한 버지니아주 호프웰에 있는 교회의 청빙을 수락했다.
24살에 새로운 목회자로 출발한 켈러는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았다.”라고 그는 월드 메거진에 말했다. “제 설교는 너무 길었고, 몇몇 사람들에 대한 저의 목양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너무 직설적이었고, 때로는 충분히 직설적이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도 원하지 않던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도들은 너무나 저를 지지했고, 사랑해줬기 때문에, 저는 그런 실수들 때문에 아무도 저를 공격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실수들을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켈러는 자신의 설교 길이를 줄이고, 신도들이 원치 않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목회를 감당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는 점이다.
그는 “저는… 리더십 카리스마(어쨌든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나 설교 기술(초기에는 그리 많지 않았던)에 근거한 사역이 아니라, 교인들을 목회적으로 사랑하며, 제가 잘못했을 때 회개하는 것에 근거한 사역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또는 당신의 특징을 개인적으로 신뢰한다면, 당신을 따를 것이고, 그리고 그 신뢰는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합니다.”
9년 후 켈러는 버지니아를 떠나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갔고,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쳤는데, 특히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인 ‘집사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또한 교단 소속 교회 설립을 도우며, 미국 장로교단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년 뉴욕에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목회자를 선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던 사람들 모두는 그를 거절했다. 그들은 그것이 나쁜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저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것이 바보 같은 사역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켈러는 나중에 회상했다. “맨하탄은 회의론자, 비평가, 냉소주의자들의 땅이었습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대상인 중산층은 범죄와 주거 비용 증가로 인해 도시를 탈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도망갈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인들의 탈출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라틴계 미국인들을 섬기는 많은 활기찬 도시 교회들을 남겼다. 이 도시는 또한 젊은 백인들에게 매력적이었는데, 그들은 누구보다 교회에 출석할 가능성이 적었고, 기독교가 자신들에게 뭔가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켈러와 그의 아내는 맨해튼에 리디머 장로교회를 세우고 이런 젊은이들을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켈러가 마흔 살 되던 해, 그는 뉴욕으로 이사 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전국에서 온 젊은이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로 인해 몰아붙임을 당합니다. 단지 조금 더 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텍사스의 핫 커피에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펜 역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역 앞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구걸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당신보다 뛰어난 연주자입니다. 이런 사실은 당신을 좌절하게 만들며, 그냥 연습하고, 연습하고, 연습하게 만듭니다.”
켈러는 뉴욕으로 온 새로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두 번째 일은, 그들이 대도시 뉴욕 밖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종류의 다양성에 의해 충격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로 온 사람들은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그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당신이 이전에 얻었던 것보다 더 나은 이론적 근거를 생각해 내게 하거나, 혹은 당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혼합하게 만듭니다.”라고 말했다.
교회 내에서 켈러는 둘 다 했다. 사역의 핵심과 그의 메시지는 호프웰에서 했던 것과 같았지만, 그와 사역자들은 또한 그것을 다른 맥락으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주요 방향은 “평소처럼 하던 교회 사역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였고 그들은 “선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그 교회는 설립 후 10년 동안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말까지 약 250명의 정기적인 출석자가 있었다. 1990년 가을, 켈러의 말에 관심이 기울인 몇몇 불신자들을 포함하여 교회는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리디머 교회가 전국적인 주목을 끌게 된 극적인 순간은, 2001년 테러리스트의 테러에 의해 세계 무역 센터가 파괴된 후였다.
그 다음 주일,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가 한 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켈러는 예배를 2부로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수백 명이 돌아갔다. 도시가 정상을 회복했을 때, 리디머 교회의 매주 출석자 수는 약 800명 정도로 증가했다.
켈러와 리디머 교회 사역자들은 도시 환경에서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했다. 2006년까지, 리디머 교회는 미국 장로교단 내에 16개의 지 교회를 세웠고, 뉴욕에서 약 50개의 다양한 교단 소속 교회들이 시작하는 것을 도왔다.
켈러는 또한 보스턴과 워싱턴 DC에서,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도시 목회자들을 지도하여 그들의 도시에서 복음을 상황화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몇 년 후 켈러는 변증법에 대한 연구 서적을 출간했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이 책에서 켈러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회의론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신념의 비약”을 보여주고, 역사속의 기독교인들이 의심의 반대편으로 걸어온 다른 통로를 제시하고자 했다.
켈러는 당시 가장 대중적인 신앙 비평가들이었던 “신 무신론자”들에게 C. S. 루이스와 신학자 N. T. 라이트, 철학자이기도 한 쇠렌 키에르케고르,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와 앤 라이스를 포함한 다양한 사상가들을 통해 믿음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했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는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7위를 차지했고, 켈러는 오늘날 가장 엘리트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문화 장소들 중 일부에서 청중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구글에서 믿음에 대한 강연을 했고 “우리 시대의 가장 똑똑한 사람들과 가장 대담한 생각들”과의 대화를 큐레이팅하는 새로운 웹사이트인 Big Think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켈러는 당시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문화적 참여 모델이 되었다. 그의 접근법은 도시 외곽 지역의 강력한 정체성, 교회들의 정치적 동원, 기독교 증인에게 해를 끼쳤다고 받아들여진 반지성주의와의 강한 긴장들과 문화 전쟁 중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후,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도시에 대한 사랑, 자비와 정의에 대한 헌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팀 켈러는 새로운 도시 기독교인들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편집자는 썼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비전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로브 시티 대학의 칼 트루먼 교수는 켈러의 도시에 대한 사랑과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그의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트루먼은 “저에게 도시는 저와 같은 시골 소년들이 가끔 극장에 갈 수 있는 곳을 제공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필요악”이라고 썼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켈러처럼 낙관론적 변혁주의자는 아닙니다. 저를 믿으세요. 상황은 전보다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그 전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입니다.”
켈러는 또한 비우호적인 비판에도 직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 심지어 “기독교 청중을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재포장하는 데 특히 효과적인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었다.
켈러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미국의 양당 체제에서 한 정당만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켈러가 문화가 변해왔던 방식을 깊이 오해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매력적인” 접근법은 이미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깊이 적대적인 세계에서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First Things의 편집자인 제임스 R. Wood는 한때 켈러에게 매우 헌신적이어서 그의 신랑 들러리들에게 켈러의 최신 서적을 선물로 주었다. 그와 그의 아내가 반려견을 입양했을 때, 그들은 뉴욕 목회자의 이름을 따서 반려견의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2016년 선거를 통해 그의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우드는 “우리를 둘러싼 문화의 변화와 그 태도를 살펴보면서 켈러에게서 얻은 복음주의적 틀이 문화적, 정치적 순간들을 위한 충분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밝혔다. “저 같은 성덕 출신들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어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공격을 최소화하려는 복음주의적 열망은 우리의 정치적 순간에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모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켈러는 몇 년 동안의 비판 가운데 일부에 대응했지만, 대부분은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66세에 은퇴할 때까지 맨해튼에서 자신의 교회의 목회자로 계속 섬겼다.
그는 자신의 교회 개척 네트워크인 시티 투 시티에서 계속 사역했고, 설교하며, 집필했다.
2020년, 켈러는 췌장암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켈러는 집중 치료를 받으면서도, 목사로서 계속해서 하나님과 복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설교하며 글을 썼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은혜에 대한 말씀을 나눴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가장 깊은 갈망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켰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요청했다.
켈러는 뉴욕타임스에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악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죽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노화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췌장암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제가 짐작하기에 모든 시도는 무효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세상에 진정한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켈러의 유족으로는 그의 아내 캐시와 그들의 세 아들 데이비드, 마이클, 조나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