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으로 살면서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질병, 장애나 학대와 같은 어려움은 우리 현실에 항상 존재하며, 우리의 주의를 온통 잡아끕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종종 어지럽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을 비하하며 우리의 주의를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는 메마른 영혼이 물을 찾을 수 있는 곳,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안식을 원합니다. 우리는 구조해달라고 부르짖으며 우리 안의 불의에 대한 복수를 꿈꾸기도 합니다. 거품이 일렁이는 샘물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라지만 발밑의 불타는 모래에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치유의 언어로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는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이지만 구속 받은 자들의 상처 입은 몸도 간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시온으로 노래하면서 올라가게 하고, 소망의 밝은 새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을 알면서도 불신의 길을 따라 방황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종종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에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다른 왕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합니다. 우리가 엉뚱한 사람에게 소망을 둔 것은 아닐까요?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나요? 우리는 구원이 오기를, 그리고 그 구원이 우리의 현실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를 갈망합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 11:4-5).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자이십니다. 그의 손에서 나오는 치유를 통해 그의 신성이 증거됩니다. 이스라엘은 영적, 육체적 아픔을 치유해 주실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희망은 아기의 탄생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기적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치유의 첫 신호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찢기고 연약한 모습으로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헌신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우리는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을 향한 기대의 눈을 들어봅니다. 이번 절기 동안, 우리는 “오 오소서, 임마누엘”을 부르며 고대 이스라엘의 소망을 되새길 것입니다. 이 예언이 우리의 현실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거룩한 길을 걸을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환희가 머리 위에 가득할 것이며 모든 슬픔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아기를 기억합니다. 그분은 잘못에 대한 신성한 보복과 우리의 상처에 대한 치유를 가져올 것이며, 우리는 온전해질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사 35:4).
베카 브루더는 Comment 매거진의 편집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