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운명론적인 사고는 주로 한국의 샤머니즘 또는 ‘무교(巫敎)’에서 비롯된다. 한국에는 불교(고려시대)와 유교(조선시대)가 지배했던 왕조들이 있었지만, 무속신앙은 혼합적으로 남아있다. 오늘날에도 커플들은 그들이 맞는지 잘 어울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타로점, 손금점, 또는 운명점을 보는 사람들을 찾는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이런 ‘운명’의 측면을 흥미로워한다. 이러한 운명론은 한국에서만 관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재미로 운세를 점쳐보며 이를 부정적인 운명론적 관행으로 여겨지 않는다.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고 유지한다고 믿는 섭리론 대신에 한국인들은 손바닥이나 생일을 근거로 판단하는 ‘운세’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궁극적으로 이 관행은 우리 삶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참으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는 반대 개념이며, 점쳐 봐야 할 닫힌 미래(운명)가 있다는 믿음과 관련되기 때문에 운명론과 연결된다.
운명론적 태도가 나타나는 또 다른 방식은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단어다. 이는 한 사람이 집안에서 가지고 있는 세대의 영향력을 말한다. 금수저가 된다는 것은 한국의 현대적 맥락에서 매우 부잣집 출신이고, 사회에서 금수저란 ‘잘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흙수저가 되는 것은 성공하기 매우 힘든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흙수저와는 반대로 금수저가 되면 더 나은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고통과 자연재해에 대해 한국의 신학은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이다. 100여 명이 사망한 이태원 군중 참사 사건에서 상당수의 교회가 그곳에서 핼러윈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벌하신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잘못된 일대일 신학으로 이 땅을 뒤덮는 신음과 깨어짐이 죄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누가복음 13장 1~5절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운명론의 긍정적인 혼합이라기보다 신학의 부재이다.
운명론이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은 전반적으로 한국의 경제 상태와 개인의 사회적 지위 상승의 측면이다. 취업이 너무 힘들고 경쟁이 치열하고 그들이 꿈꾸는 일정한 수준의 삶을 살기 너무 어렵기 때문에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헬조선’이라는 통속적인 표현이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결말이 없다고 느끼며 미리 정해진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운명론적이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여기에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 0.78명으로 저출산에 대한 우려가 크다.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문제를 국민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통계에서 바로 잡아야 할 사안으로 사회현상 관점에서 다룬다.
따라서 교회 안팎의 젊은 세대의 빈곤은 (주택가격이 엄청나게 오르는) 주택시장 통계와 국내 저출산 현상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질투나 경쟁심 같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전통적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다루지만, 젊은 세대에게 특화된 상황적 통찰력을 가지고 이를 다루는 목회자들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국교회에서 차세대 사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방법론과 신학은 현시점에서 모호하다.
그런데도 운명론과 예정론을 구별하기 위한 에베소서 2장은 희망이 있으며, 그것은 단지 무작위로 작용하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에 대한 복음의 기본 메시지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나 재물 추구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고심해야 할 것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인 운명이 전부인가? 운명론이 아시아 전역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읽어보세요. (이 특별시리즈의 추가 기사는 PC버전은 오른쪽, 모바일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