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년에 영화 <노트북>을 처음으로 봤다. 거의 25년 동안 이 영화에서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와 노아(라이언 고슬링)가 얼굴을 비비며 빗속에서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사랑과 운명을 상징하는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로맨스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노트북>은 불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 시점에서 노년의 노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앨리를 위로하는 장면과 앨리가 바람을 피우고 결국 약혼자를 떠나 노아와 몇 년 만에 재결합하는 1940년대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현대의 장면에서는 노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앨리를 향한 충실함을 보여주는 반면,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앨리의 불륜이 로맨스의 절정으로 표현된다.
2023년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등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러한 한시적인 관점이 삶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 반대로 보여준다. 노라(그레타 리)는 남편 아서(존 마가로)와 함께 침대에 누워 아내의 옛 연인이었던 해성(유태오)의 방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다:
아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지 많이 생각했어.
노라: 해성과 내 이야기?
아서: 응, 난 경쟁이 안 되네.
노라: 무슨 말이야?
아서: 어릴 적 연인이 20년 만에 다시 만나 서로에게 운명임을 깨닫는 이야기.
노라: 우린 서로의 운명이 아니야.
아서: 이 이야기에서 나는 운명을 가로막는 사악한 미국인 백인 남편일 거야.
아서는 나중에 “전 애인이 당신을 데리러 온다면, 난 당신이 떠날 사람”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아서의 고백은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의 내면을 울리는 대사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노트북>과 같은 영화를 통해 주인공들이 주어진 한계에 거부하기를 기대하도록 길들어 있다. 우리는 안정된 삶을 살던 인물들이 가능성을 확장하고 평화와 깨달음을 얻거나 자신의 운명을 찾기 위해 신뢰를 깨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주인공이 이러한 것들을 찾는 여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가 발생해도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런 피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약속을 지키고, 가능성을 좁혀나간다면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묻는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노라는 타인의 선택과 자신이 내린 여러 선택의 조합이 이루어낸 삶을 살고 있다. 서울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 그녀는 같은 반 친구 해성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가족이 캐나다에 이민을 가면서 둘은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노라는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다가 성인이 되어 해성과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역동적인 관계로 인해 노라는 잠시 행복했지만, 결국 그녀는 헤어짐을 말한다. 그녀는 뉴욕에서 삶을 꾸리고 싶은데, 이 화상 통화로 이어진 관계가 그녀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노라는 해성에게 잠시 헤어지는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곧 아서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한다.
시간이 지난 후, 해성이 뉴욕에 오겠다고 말했을 때 노라는 극작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서와의 관계가 나오고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의 캐릭터를 동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노트북>의 패턴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 시작해도 노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아서에게 “이게 내 인생이야. 난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라고 말하며 확신한다. 노라는 선택의 폭을 제한하면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행동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노라의 반문화적인 한계와 자기 부인의 수용은 창조 이야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는 성경의 모티브(창세기 2-3장)를 연상시킨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직후부터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은 선택권을 얻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하나님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가 후회하게 되는 이러한 패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왕을 간청하는 모습(사무엘상 8장)부터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를 취하는 모습(에스라 10장)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풍성한 왕실 음식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했던 것처럼(다니엘 1장), 이 패턴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번성했다.
우리 삶에서 선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바벨론의 길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라고 베스 무어는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결단이란 미리 내린 결정, 이미 내린 결정, 결정의 순간에 그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의미한다. 그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이다. 결단이 내려졌다. 나는 이미 내가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다. …그 순간의 열기에 휩싸인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일과 유혹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탈출할 길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결단은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결국 도착한 곳은 여기야.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노라는 불안해하는 남편에게 말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선택한 결혼 생활의 한계를 지키며 충실하기로 결단했다. 어쩌면 노라에게는 아서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해라'와 같은 말들을 들으며 자란 우리는 이미 내린 충실한 선택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
따라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관객에게 운명에 가려진 결단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노라는 아서와의 첫 만남에서 한국인에게 인연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한다. 인연은 섭리 또는 운명 같은 것으로,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노라는 그 개념은 한국식 유혹법일 뿐이라고 농담을 던지고 아서에게 키스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해성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데 이 방법을 사용한다. 해성이 뉴욕을 떠나기 직전 술집에서 두 사람이 한국어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클로즈업 샷과 어두운 조명, 서로를 향해 기대는 자세는 그들이 여전히 <노트북>의 불륜을 따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노라는 어린 시절의 사랑을 거절하고 남편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인연을 운명적 언어로 받아들여 반대로 해성과 아름다운 연결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말하는 인연은 불교적 개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는 적용이 제한적일 수 있다. 하지만 해성과의 관계가 아서에 대한 헌신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노라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가치 있는 점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단은 운명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Morgan Lee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글로벌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