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이슬람이나 기독교가 정착하기 전에 애니미즘 문화였다. 애니미즘 문화에서, 운명은 자비로운 정령들이나 악령들의 행동이나 반응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정령들을 기쁘게 하고 달래려고 노력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변덕은 추수와 강우와 같은 존재의 모든 면에서 운명을 결정한다.
비록 기독교가 이제 국가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애니미즘적 신념은 필리핀인들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박혀 있다. 사람들은현재 상황에 대해 체념하는 경향이 있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리핀인들이 어려운 시기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칭찬하지만, 이는 그들이 겪은 불행한 일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지방에서는 애니미즘적 관습이 여전히 필리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민간 기독교’라고부르는데,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믿으면서도 애니미즘적 의식에 참여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믿거나, 카톨릭과 애니미즘적 신앙이 결합하여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려주일에는 카톨릭 신자들이 교회로 잎을 가져오고, 사제가 거룩한 물을뿌린다. 사람들은 이 잎을 자신들의 집 문 근처에 두는데, 이는 그 잎이 악령과 불행을 쫓아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필리핀은 1521년부터 식민지였다. 처음에는 스페인, 그다음에는 미국, 그다음은 일본, 그리고 다시 미국의 식민지였다. 우리의 독립은 1946년에 선물로 주어졌고,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수 세기 동안 우리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직 더 높은 권력에 의해 강요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인들은 종종 ‘무엇이 될 것이든 될 것이다’라는 뜻의 “바하라 나(bahala na)”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다른 표현인 “바탈라 나(bathala na)”(바탈라는 애니미즘 필리핀 신앙의 최고신)에서 나왔는데,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문제가 된다. 모든 경험을 신성한 기원으로 보고, 따라서 신성한 계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기다리는 것은 개인의 적극성, 자기 지향성, 책임감을 앗아가는 것이다.
필리핀의 복음주의자들은 운명론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 책임감, 그리고 행동주의에 대한 복음적강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빈곤 완화, 지역사회 개발, 급식프로그램 등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공식적인 부서나 조직이 있지만, 대부분의 카톨릭 신자들은 참여하지 않고 성직자만이 목소리를 내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복음주의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 역설적인 변증법이 있다. 필리핀인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운명론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적으로는 아마도 사회 정의를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복음주의 목사들의 리더십 때문에, 교회 전체가 운명론적이지는 않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운명론적 사고와 관련된 잠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일부 복음주의 단체에서 전천년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이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이 지속해서 도덕적으로나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고 가르치므로, 믿는 자들은 모든 불행한 세상 사건을 신성한 계획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환경 보호, 사회 정의 및 연민의 사역에참여하는 시도를 신성한 시간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교회 내외에서 운명론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영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목회자들은 운명론을 개인의 경험과 공동체적인 태도로서 이야기해야 한다. 애통함 역시 현재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때문에 적절한 반응이다. 비판적인 슬픔은반성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내 맥락에서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는 한 가지 성경 구절은 5천 명을 먹이는 일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굶주리고있으니 그들을 모두 보내는 것이 최선의 대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4:15-16). 하나님은 현재 상황을 다루는 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상황이든 다른 사람의 상황이든 말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인 운명이 전부인가? 운명론이 아시아 전역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읽어보세요. (이 특별시리즈의 추가 기사는PC 버전은 오른쪽, 모바일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