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종형’이 아니라면?

복음의 렌즈를 통해 바울의 가르침을 배운다.

Christianity Today June 30, 2024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CT 올해의 아름다운 정통 도서의 발췌문. CT의 2020년 도서상 수상자 전체목록.

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에베소서 5:22)’는 에베소서의 바울의 가르침과 처음으로 씨름했을 때, 나는 케임브리지대학의 학부생이었다. 나는 학구적이고 평등 지향적이며 전교생이 여학생인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나는 당시 남자가 대다수인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

이 구절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아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성이 남성만큼 유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 문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주의 왕이시며 자기희생적인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다르게, 실수하기 쉽고 죄 많은 인간에게 그런 종류의 복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세 번째 문제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지위에 체계가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은 문화에 반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바울은 여성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복음의 역할

처음에는 충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에 ‘복종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앞 구절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5:21)’에만 나타나므로, 나머지 구절은 상호 복종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신약성경에 세 번이나 나온다(골로새서 3:18, 베드로전서 3:1 참조).

하지만 남편에게 주어진 명령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에베소서의 구절이 명확해졌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셨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벌거벗고 피 흘리며 교회를 위해 고통받음으로써, 교회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우선시 함으로써, 모든 것을 희생함으로써 사랑하셨다. 이 명령이 아내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 보았다. 에베소서 5장 22절은 때때로 배우자 학대의 명령으로 비판을 받는다. 비극적으로도, 이것이 악용된 적도 있다. 그러나 남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그러한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학대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을 위해 고통받고,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위해 죽으라고 하는 구절을 얼마나 더 쉽게 왜곡할 수 있겠는가?

이 가르침의 시각이 바로 복음 자체의 렌즈임을 알았을 때, 그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진실이라면, 아무도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나아올 수 없다. 이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려 한다면 우리는예수님을 거부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복종하라고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 렌즈를 통해 나는 하나님이 성과 결혼을 우리와의 친밀함에 대한, 별과 같이 큰 소망을 엿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이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위대한 결혼에서 우리의 역할은 서로 바꿀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우리는 남녀의 구별 없이 그의 인도를 따른다. 궁극적으로 나의 결혼은 나와 내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 관한 것이아니듯 말이다.

결혼이 훨씬 더 큰 현실을 가리킨다는 것을 인식하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부담이 줄어든다. 첫째, 미혼자들의 부담을 줄여준다. 우리는 성적 및 로맨틱한 충족감을 궁극적인 선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결혼을 놓치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어릴 때 인형 놀이를 놓치고 자라서 진짜 아기를 갖는 것과 같다. 우리가 궁극적인 관계를 충분히 누릴 때, 아무도 인형 놀이를 아쉬워하지않을 것이다.

또한 결혼한 사람들의 부담도 덜어준다. 물론, 우리는 연극에서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사람과결혼했는지, 왜 우리의 결혼이 지속적인 행복(열반의 상태)을 제공하지 않는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결혼은 실망하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하며, 그 갈망은 최고의 결혼이 축소된 모형인 최후의 현실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5장은 나를 거부하곤 했다. 이제 이것은 나에게 확신을 주고 예수님께로 나를 부른다.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참된 남편이시며, 진정으로 나의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젠더 심리학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하나님의 명령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결혼의 이 그림을 젠더 심리학에 기초하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자연스러운 추종자이고 남성은 자연스러운 리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성에게 주어진 주요 명령은 사랑하는 것이지,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성이 사랑에 더 능숙하다는 주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일부는 남성에게 인정이 필요하고 여성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거나, 우리가 타고난 결핍에 대응하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성은 사랑에 더 능숙하고 남성은 인정에 더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면 남성이 자연스럽게 여성을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은 눈가리개를 한 채 모래에 머리를 묻는 것과 같다!

기껏해야 이러한 주장들은 남성과 여성의 심리학에 대한 일반화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불필요한 공격을 하고 예외를 초래한다. 아내가 천성적으로 더 복종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주어지고 내가 남편보다 더 자연스러운 리더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역할을바꿀 수 있다는 의미일까? 에베소서 5장은 결혼 생활에서 우리의 역할을 젠더 심리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는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천성적으로 복종하는 성격은 아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리더십이 있다. 나는 박사 학위와 신학교 학위를 받았고, 가족 중에서 훈련된 토론가이다. 나는 이를 열렬히 지지하는 남편과 결혼했다! 그러니 이 연극에서 내 역할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나를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 복종하는 것은 매일의 도전이다. 이는 내가 본래 더 복종적이거나 덜 복종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 더 사랑이 많거나 사랑이 적기 때문도 아니다.

신랄한 비판

에베소서 5장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전통적인’ 성 역할이 아내가 남편의 필요에 맞춰 자신을 누르고, 남편은 지배력을 펼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남편의 필요가 먼저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리더십에 재능이 덜 있다고도,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바울의 주요 사역 동역자 중 한 명은 바로 그런 일을 했던 여성이었고(사도행전 16:14), 이상적인 아내로 묘사된잠언 31장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보다 적게 벌어야 한다거나 가족이 남편의 경력을 아내의 경력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바울은 남성이 자신의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다른 곳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남편이 주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적 용어로, 일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봉사로 측정된다. 실제로, 전형적인 지도자이신 예수 자신도 돈을 벌지못했고, 그는 일부 여성 제자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다(누가복음 8:2-3).

면밀히 살펴보면, 에베소서 5장은 남성을 특권화하고 여성을 깔보는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결혼이라는 극에서 아내의필요가 먼저 오며, 남편의 자신을 우선시하려는 욕망은 복음의 도끼로 가차 없이 잘려 나간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성품에 주목하라는 부름이다.

최고의 인간

우리는 예수님을 최고의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이 남성과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폭풍을 잠잠하게 하고, 천사 군대를 소집하며, 죽음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팔은 어린아이들을 안았고, 그의 말은 여성을 높였으며, 그의 손은 병자를치유하기 위해 내밀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지만 소외된 자와 약한 자를 다정하게 환영하셨다.

예수님은 조롱당하고, 구타탕하고, 경비병들에게 학대당하신 후, 가시 면류관과 자색 옷을 입고 자신의 왕권을 비웃는 군중 앞에 나타나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한복음 19:5)’라고 외쳤다. 이 말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해서 매를 맞고 굴욕을 겪으셨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용해 우월주의, 학대 또는여성 비하를 정당화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를 쳐다보지 않는다.

레베카 맥클러플린 저,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에서 각색된 콘텐츠, ©2019. Good News Publishers의 출판 사역인 Crossway의허가를 받아 사용되었습니다. Wheaton, IL 60187. www.crosswa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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