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주의’는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를 상호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이제 그 용어를 다시 정리해야 할 때이다.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24
사진: María Jesús Contreras의 일러스트

상호주의(complementarianism, 상호보완주의 혹은 상호보완론으로 부르기도 함. 역자주)에 미래가 있을까?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남성과 여성 간의 상호 보완 개념이 계속 유지될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과 구별의 원칙을 수용하는 것은 성경 자체의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오히려 나는 상호주의를 이 부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바탕을 둔 일관성 있는 특정 운동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는 성경이 교회와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믿으며, 나 자신을 상호주의자로 설명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상호주의라는 단어의 무효화, 다른 선택 가능성 그리고 자기잠식효과 개념의 확산은 나로 하여금 나의 신념을 계속 상호주의자로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1980년대 후반에 처음 사용된 상호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나 역시 내가 가진 신학적 신념으로 설명해왔지만, 이 개념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탐구를 두려워하지 말고, 건전하고 정중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우리의 생각을 검증하고, 가정을 확인하며,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성장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무효화는 다른 이야기다. 무효화는 단순히 ‘나는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효화는 ‘당신은 존재할 자격이 없다. 여기에 당신이 설 자리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상호주의의 반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뛰어넘어 무효화로 향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새로운 세대의 젊은 논평가들은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모든 상호주의적 표현을 본질적으로 모욕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한다.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표현한 애통함에 동감한다. 상호주의 신학이 자칭 지지자들 가운데서 오용되고 남용되어, 특히 여성들에게 깊은 해를 끼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런 태도에 대해 회개하고 남성과 여성의 상호보완성에 대한 성경적으로 신실하고 유익한 가르침을 다시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은 상호주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여성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으며, 현대 교회에는 이 개념을 위한 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 같은 상호주의 여성이 교회에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신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목회 사역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수많은 상호주의 남성 동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다. 상호주의가 여성을 높이고 존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나의 경험과 자격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상호주의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그래서 내가 실제로는 상호주의자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대자들이 상호주의가 현재에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상호주의가 의미 있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나 상호주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무효화만이 아니다. 신학적 틀 또는 젠더 관계와 역할에 대해 훨씬 더 제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주의와 가부장제(남성의 사회적 지배) 간의 차이를 완화하려는 사람들은 또 다른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주의 신학은 가부장제 이념과 다르다. 우리처럼 상호주의의 신학적 원리를 규정하는 데 전념한 사람들은 그 차이점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1987년에 작성된 상호주의의 창립 문서인 댄버스 성명서는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인격을 주장한다. 또한 성에 대한 성경에서 말하는 구분을 인정하며, 가정과 교회 내에서 그러한 구분이 경건하게 표현되는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다. 이는 여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발휘하고, 비굴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과 행동으로 알리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존재에 있어 불평등하고, 결혼 범주를 넘어 남성의 지도권을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고, 신학 연구(또는 더 포괄적으로 고등 교육)에서 여성의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남편이 아내가 읽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기독교 서적을 결정하도록 권장하며, 가정 외에서의 합법적 여성 사역은 정당하지 않다고 제안하는 사람들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된다. 이것은 상호주의가 아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 생각에는 상호주의가 너무 수동적이다. 상호주의는 충분히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상호주의는 점점 왜곡되어 가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점점 더 장악 당하고 있다.

이 대조적인 두 관점 사이에 모두가 인식할 수 있는 공적 구별이 없다면 상호주의가 어떻게 독자적으로 설 수 있을까? 상호주의가 미래에 진정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을까?

상호주의의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인에 의한 무효화, 다른 선택 가능성 뿐 아니라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위협인 자기잠식효과이다.

이러한 자기 잠식은 지지자들이 댄버스 성명서의 기본 신학 원칙을 넘어 상호주의를 재정의할 것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물론 개인, 교회, 사역에 따라 이러한 원칙의 적용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른 해석이 상호주의의 유일한 충실한 형태라고 정의 내려질 때, 자기 파괴의 위험이 나타난다. 이는 상호주의의 신학적 주장에 근거하면서도 일관성도 갖춘 다른 결론을 전혀 허용하려 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자칭 상호주의자들이 노골적인 여성 혐오는 간과하면서도 페미니즘 사상의 일부를 기꺼이 반박하려 할 경우에도 자기 잠식이 발생한다. 최근에 자칭 기독교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트위터가 특정 상호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합리적 사고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바이럴 영상은 같은 진영에서 거의 일관적으로 침묵 대응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상호주의자들이 성경적 원칙을 취사선택헤서 지키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멸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가 믿는 바를 포괄적이고 일관되게 지키지 않는다면, 상호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호주의에 미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상호주의에 미래가 있으려면, 상호주의 기독교인들이 일관성 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상호주의가 복음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틀렸음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에 대한 비성경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가르침을 가차 없이 비난하고, 우리의 신학적 원칙에 스스로 책임지며, 원칙을 넘어서지 않으며, 최소한 그 원칙을 지킨다면 말이다.

상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미래를 가지려면, 남성과 여성 모두 그 미래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실제 서로 상호보완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기회도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함께 지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누가복음 24:1-12). 또한 로마서 16장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과 여성 간의 훌륭한 사역 파트너십을 구현할 기회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들을 대단한 존엄과 존중으로 대하셨고, 여성들에게 자신 안에서 풍성한 삶을 찾으라고 부르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도록 권유하신 우리 구주를 본받고 영광을 올려드릴 기회가 있다.

다니엘 트리위크는 The Meaning of Singleness: Retrieving an Eschatological Vision for the Contemporary Church(국내 미번역)저자이자 시드니 성공회 교구의 연구 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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