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국에서 열린 라이브 앨범 녹음에서 우리 팀은 콩고 예배곡 ‘예주 아잘리 아와‘를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예배팀이나 회중 중 콩고 출신은 없었고,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후렴구와 신나는 멜로디로 덕분에 모두가 쉽게 따라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링갈라어로“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를 반복해서 부르고 나중에는 한국어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새롭거나 특별하게 보이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이 곡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변함없는 신뢰를 전달하는 방식이 좋았기 때문에 이 곡을 부르고 싶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예배를 인도하고 찬양을 부르는 것은 제가 20년 넘게 해온 일입니다. 가정교회에서, 신학교와 선교 기관에서 주최하는 콘퍼런스에서, 그리고 서울과 남수단 와우 등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그렇게 해왔습니다.
예배 인도자로서 저는 모르는 언어로 효과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도 취약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종종 이런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단어를 잘못 발음해서 누군가에게 불명예를 안기면 어쩌지? 사람들이 문화적 도용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진정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면 어쩌지?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다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찬양을 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거나 교훈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단어의 발음을 모를 때는 찬양이 더 어려워지고, 무슨 노래인지 모를 때는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노래가 낯설게 느껴져서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드리는 것에는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외국어로 예배할 때 모든 문화와 언어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조명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소울풀한 아랍어 예배곡인 안타 아테문 (“ 놀라우신 주여”)을 들었을 때, 가사에 나오는 ‘알라’라는 단어가 이슬람과 연관되어 있어서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랍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풍성한 은혜가 제가 알지 못하는 언어와 음계로 오랫동안 찬양됐다는 사실에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조앤 리처드는 최근 이메일 대화에서 예배가 항상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을 부르고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공동 예배에서 형제자매들이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자메이카 비영리 단체인 CREW 40:4의 창립 이사는 전했습니다.
모르는 언어로 찬양하는 것도 교회의 폭과 깊이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인 학생 교류, 이민, 난민 유입, 노동 이주 등으로 서구의 많은 교회는 점점 더 다양성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 다른 지역의 신자들과 함께 예배할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예배에서 독특한 형태의 문화적 표현을 배울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난 몇 년간 예배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저에게 다가와 모국어로 찬양을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곤 했습니다. “우리 언어로 찬양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우리 언어로 예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깊이 감동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 흘리던 분들도 기억납니다.
교회는 지역적으로 존재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참석자 중 특정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찬양을 통해 세계 교회의 연합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외국어로 찬양하면서 공통 언어로 번역된 가사를 제공한다면 낯선 언어가 주는 거리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통받는 세계 다른 지역의 신자들과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는 구절의 구체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러 행사에서 인도하는 예배의 찬양 중 일부는 미얀마와 태국의 무국적자 집단인 카렌족의 언어인 카렌어로 되어 있습니다. 카렌족이 겪는 어려움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작년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카렌족의 노래 ‘ 씨–푸–나 ‘(“하나님은 선하시네”)를 인도했을 때 참석한 카렌족 난민들은 제가 그들의 언어로 된 찬양을 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또한 저는 북미의 여러 교회에서 주일 예배나 선교 행사를 위해 아바안 알라디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루홀 고도스 (‘하나님의 영’) 등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된 찬양을 소개했습니다. 이를 통해 복음주의 공간에서 종종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중동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언어로 노래하는 것은 대규모 집회에서는 특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올해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린 제4회 로잔 대회에는 200여 개국에서 5,000여 명의 기독교인이 직접 참석했고, 2,000여 명이 온라인을 통해 참여했습니다. 일주일간의 집회 기간 동안 한국 밴드 이사야 60원은 대부분의 찬양을 영어로 인도하며 스페인어와 한국어로 몇 구절을 부르고 중국어로 한 곡을 불렀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예배 인도자인 키스 게티와 크리스틴 게티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곡된 곡들 역시 주로 서양 또는 영어권 작곡가들이 작곡한 곡들이었습니다.
대회 행사 코디네이터인 에비 로데만은 이메일을 통해 “음악을 통해 예배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전했습니다. “물리적, 현실적인 사안을 감안하여 두 밴드가 리드하며 모두가 연합하여 음악적 경험을 함께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처럼 예배 인도자로서 대규모 국제 콘퍼런스에서 외국어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노래를 연습하고 회중이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기획이 필요합니다. 발음을 정확히 하고 노래의 문화적 기원을 존중하는 동시에 음악적 우수성을 목표로 하려면 더 많은 연습 시간이 필요합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차트, 녹음 또는 라이선스가 없는 노래의 경우도 많기 때문에 자료를 처음부터 만들어 기존 예배 기획 및 미디어 플랫폼에 통합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향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깊이 인식하게 하는 의미 있는 영적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회중들이 낯선 찬양을 잘 받아들이려면 겸손함과 호기심을 갖고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낯선 언어로 된 노래를 소개하기 전에 원어민에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제 발음이 완벽하지 않을 테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양해해 주시고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도록 알려주세요.”라고 부탁드리곤 합니다.
또한 공동 예배를 위해 선택하는 음악의 출처를 넓히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든 노래는 특정한 맥락에서 탄생합니다. 세계 다른 지역의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특정 문화의 언어를 회중에게 소개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이야기와 살아있는 신학을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호성을 연습하는 일입니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음악가이자 다문화 예배 트레이너인 이안 콜링은 그의 저서 ‘ 문화를 넘나드는 예술: 아시아에서 기독교 신앙의 재구상‘에서 “우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자세에서 벗어나 “서로의 노래를 부르자”는 개방적 자세로 나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제가 속한 단체인 프로스쿠네오 미니스트리(Proskuneo Ministries)와 송스투서브(Songs2Serve)는 아랍어, 한국어, 스페인어 등의 언어로 찬양을 제공합니다. 칼빈 기독교 예배 연구소에는 다국어 찬송가인 ‘ 모든 계절을 위한 시편‘과 스페인어와 영어 이중 언어 찬송가인 ‘ 산토, 산토, 산토‘가 있습니다. 글로벌 민족주의 네트워크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작곡한 기독교 노래의 방대한 컬렉션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국제 기독교 저작권 라이선싱 협회(CCLI)도 언어별로 노래를 검색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미국 조지아주 클락스턴에 있는 우리 다민족, 다문화 예배 공동체에는 미얀마, 시리아, 남수단에서 온 이민자와 난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랍어, 버마어, 한국어, 스페인어로 찬양을 부르고 성경 구절 한 구절씩 돌아가며 읽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각자의 모국어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예배 후에는 치킨 샤와르마, 잡채, 맥앤치즈 캐서롤을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번잡스럽거나 좋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해 상호 작용이 불편하고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전적으로 의도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적인 예배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비록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 교회는 전 세계에서 온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연합하여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하는 기쁨을 맛보고, 보고,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젊은이들에게도 이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배의 리듬 속에서 교회의 다양성이 형성될 때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만국이 새 예루살렘에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져올 것을 예감합니다(계 21:24, 26).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선언(빌 2:11)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찬양할 때 비록 더듬거리거나 불편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모든 인간적 능력, 특히 이해력과 언어 능력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비록 불일치하거나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한 목소리로 ‘ 예스 아잘리 아와’ 즉,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선언합니다.김재우 목사는 프로스쿠네오 미니스트리에서 홍보 및 사역 개발을 담당하고 있으며, Willingly Uncomfortable Worship의저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