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의 매섭게 추운 날, 전지후 씨는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지후 씨는 학원에서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서둘러 지하철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직장에서 서울 국회의사당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 때문인지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역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지후 씨는 버스를 탔지만, 교통체증에 갇혀 거의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내려, 평소 자동차만 다니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따라 수천 명이 모여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지후 씨는 이 시위를 비롯해 이후 여러 시위에 참여하기 전 미가서 6장 8절의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지후 씨는 교회가 사회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4살의 숙명여대 학생이자 IVF 사역의 리더인 지후 씨는 주머니에 손난로를 꽉 쥐고 시린 손가락을 달래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습니다.
시위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자 밝은 초록색, 보라색, 분홍색으로 번쩍이는 야광봉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경쾌한 케이팝 음악 소리와 함께 “윤석열은 물러나라!”를 연신 외치는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지후 씨의 아버지 전재형 씨도 먼저 같은 시위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인파는 압도적으로 많았고, 핼러윈에 좁은 골목에서 150여 명이 사망한 2022년 서울 이태원 참사를 연상시키는 섬뜩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재형 씨는 지후 씨에게 많은 인파 속 안전을 위해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카카오톡의 서비스가 작동하지 않았고, 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불참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부결되고 시위 현장을 떠난 후에야 전화 통화가 가능해졌습니다.
7년 전인 2017년 3월 뇌물수수, 갈취 및 직권남용 혐의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반대하는 또 다른 시위에도 지후 씨 부녀는 참여했었습니다. 지후 씨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 몇 시간 동안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다가 목이 쉬어 피 맛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위도 비슷할 것이라고 지후 씨는 추측했습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시위는 “분노로 가득 찬” 엄숙한 분위기였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사당 주변은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기발한 의상을 입는 등 분위기가 밝았습니다.
일주일 후 윤 대통령에 대한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최대 41만 7천 명으로 추산되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국회 밖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면서 분위기는 환희로 바뀌었습니다.
불안과 기대감을 모두 안고 시위 현장에 도착한 50살 문찬 씨와 스무 살 딸 문혜인 씨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문찬 씨는 딸 혜인을 아이돌 콘서트까지 데려다준 적은 있지만 한 번도 함께 들어간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위 현장에서 그는 혜인 씨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야광봉을 함께 흔들었습니다.
한편, 혜인 씨는 소녀시대 노래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춤을 추는 한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중년 여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그 광경을 감상하다가 옆에 있던 젊은이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시위에 능숙하지만,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시위 레퍼토리에 없었던 케이팝 노래를 부르는 등 젊은 한국 문화의 낯선 요소를 따뜻하게 받아들였다고 혜인 씨는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의 유연함과 기꺼이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보다 훨씬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문 씨 부녀는 국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저녁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실패로 끝난 윤석열의 계엄령 시도 이후 서울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대전, 부산, 제주 등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거리, 시청 앞, 국민의힘 건물 앞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시위는 유튜브를 통해 지지자를 모으고 집회를 생중계하는 라이벌 정치 활동가들이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지후 씨와 아버지가 참여한 시위를 주최한 촛불행동과 같이 종교나 정당과 무관한 시민단체가 주도한 시위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집회는 분노한 시민들이 광장과 광장에서 만나게 되면서 유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2월 3일, 윤 대통령은 북한에 동조하는 ‘반국가’ 세력이 대한민국의 몰락을 위협한다며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계엄령이 발령된 것은 1979년 군사 독재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였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의원들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표결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계엄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이후 국회는 12월 14일 권력 남용을 이유로 윤 대통령 탄핵을 의결했고,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후 수만 명의 한국인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한국 사회는 세대와 성별에 따른 균열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국회 밖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국민의힘 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윤 대통령의 지지자와 반대자 수백 명은 서울 용산에 있는 윤 대통령의 자택 밖에서도 몇 주 동안 시위를 벌였습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장년층이나 젊은 남성인 반면, 윤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20~30대 여성입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어떤 부모들은 자녀의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일부 한국 젊은이들은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온라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한편, 서울 도심에서는 윤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인파가 모여 국회 표결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대통령의 복위를 촉구했습니다. 친윤 시위대는 성조기를 흔들며 “불법 탄핵 반대”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들고 영어로 “스톱 더 스틸(*트럼프 때 나온 구호로‘선거 결과를 훔친 것을 막아라.’라는 의미)”을 외쳤고, 행상인들은 “불법 탄핵 반대”라고 적힌 밝은 빨간색 마가 모자(Make American Great Again *트럼프 지지의 상징)를 팔기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두 차례 탄핵당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2024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 의석 300석 중 175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고 말합니다. 윤 대통령은 또한 선거 부정이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한 이유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도 비슷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복음주의 한국 교회는 친미적이고 공산주의의 영향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윤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가장 강하게 외치는 인물 중 한 명은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 전광훈입니다. 그는 1월 초 시위에서 “윤 대통령의 계엄령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북한에 넘어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설문조사에 참여한 목회자 중 3분의 2가 탄핵에 찬성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회자 700여 명은 여의도에서 윤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공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전지후 씨와 문찬 씨 가족은 이러한 균열을 크게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시위는 이들을 갈라놓기보다는 부모와 자식의 세대 간 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적 불안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지후 씨 가족은 서로를 찾았습니다. 지후 씨는 부모님에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습니다. 또한 최근에 읽은 흥미로운 책이나 국내 정치 상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도 이 가족은 계속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서로 나누곤 합니다.
시위에 참여한 이후 지후 씨의 부모님은 젊은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고 어떤 문제나 권력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시위를 할 만큼 용감하지 않다는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60세인 지후 씨의 아버지 전재형 씨는 70~80년대에 전두환의 권위주의 독재 아래 살면서 계엄령을 직접 경험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에게 시위하다 2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도 경험했습니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윤 대통령의 계엄령이 발표되자 전재형 씨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해 무관심하여 역사가 반복될까 봐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추운 12월의 어느 날, 국회에 도착한 전재형 씨는 수많은 대한민국 청년이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이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기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지후 씨는 부모님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고 자신의 정치 활동에 대한 지지를 받으면서 “매우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온누리교회 교인인 문찬 씨도 이전에는 한국 젊은이들이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를 선호한다고 생각하며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위 현장에서 목격한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의 고정관념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의 회복력과 창의성, 희망과 열망의 표현을 보며 “활기차고 혁신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시위 문화를 만들고 주도하면서 적극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뛰어넘는 많은 자질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혜인 씨는 아버지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많은 친구들은 윤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면서 부모의 견해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윤 대통령은 몇 주 동안 자신의 주거지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약 2주간 체포 시도에 저항하다가 1월 15일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은 나흘 뒤 윤 대통령을 정식으로 체포했습니다. 법원이 윤 씨의 구금 기간을 최대 20일 연장하자 윤 씨의 지지자들은 법원 건물을 습격해 사무기기와 가구를 부수고 40명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1월 21일, 윤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윤 대통령의 체포 소식을 들은 문찬 씨는 안도감과 기쁨으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찬양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18장 10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지후 씨는 윤 대통령이 체포되기 전날 대학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지후 씨는 다른 수천 명의 시위대와 함께 손수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시청을 향해 행진하는 동안 중고등학생들의 열정적인 연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 노인은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구한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노인은 빠른 리듬에 살짝 흔들며 케이팝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한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젊은 어머니는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행진에 동참했습니다.
지후 씨는 “시위 구호와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깃발에 박수를 보내고 함께 웃었습니다.”
한국에서 제니퍼 박이 추가 취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