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장에서는 여러 사건 목록을 보여주며 각 상황별로 성도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을 적용하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실의 상황을 ‘슬퍼할 때’(4절)로 여길 것이다. 놀이터에서 좋아하는 옷이 찢어지면 ‘꿰맬 때’(7절)가 찾아온다.
그러나 ‘심은 것을 뽑을 때’(2절)는 식물의 종류나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결혼 상담가들은 ‘안을 때’(5절)나 ‘잠잠할 때’(7절)에 대해 지나친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서 갈등이 확장되어 ‘전쟁할 때’(8절)라고 여기면 그 대가는 더욱 치명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마 5:44)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평화할 때’(8절)를 선포할 기회를 찾으려 할 것이나, 세계 정세를 보면 그러한 갈등의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웃을 때’(4절)는 어떨까? 이것이야말로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항목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모든 상황에서 웃음을 찾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다. 출산의 고통에 뒤에 찾아오는 기쁨의 웃음(2절)이 있을 것이다. 죽음에 직면한 평안한 웃음(2절)도 아일랜드식 장례 문화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춤 레슨을 받아보니 웃음은 춤출 때 함께 오는 것이 확실하다(4절).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며양식의 맨 위
비웃고(8절), 웃으며 살인하고(3절), 다른 사람의 눈물을 보고 킥킥거리는(4절) 사람들은 더 견디기 어렵다. 점점 더 공공연히 고통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스토리텔링에도 침투했다. ‘슬퍼할 때’는 보편적이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시사한다.
나는 그 책임을 셰익스피어에게 돌리고 싶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과 같은 정연한 비극이나 <오셀로>와 같은 소란스러운 희극의 분류에 저항하며 어리석음과 파국을 혼합한 무대극인 <눈에는 눈>과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등 몇 편의 ‘문제적’ 희곡을 썼다. 이런 혼합은 동시대 관객에게 혼란을 주었고,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평단은 이러한 장르 혼합을 높이 평가했고, 오늘날에는 테마적으로 불일치하는 퍼즐 같은 이야기들이 비평가들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아온 한국 영화감독 봉준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자. 그는 수십 년 동안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감독이다. 5년 전 <기생충>은 영어가 아닌 언어로 제작된 최초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 되었다.
경제적·정치적 시스템이 소수의 손에 다수의 생계를 맡기는 구조에 불편함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에게, 봉 감독의 권력 남용에 대한 집요한 고발은 반가운 일이다. 그는 이야기 초반에 평범해 보이는 노동자 계층 인물을 보여주고, 탐욕과 잔혹함을 가진 제도권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설국열차>(2013)에서는 감정적으로 고립되고 화려하게 치장한 엘리트 계층이 종말 후 생존자들을 냉혹하게 통치하며, 저항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가기도 한다. <옥자>(2017)에서는 미란도 기업이 지능적이고 감정이 있는 슈퍼돼지를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낸 뒤, 그것들이 인간과 맺은 유대감을 무시한 채 오로지 이윤을 위해 도축한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에서는 악당과 영웅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봉 감독은 때때로 순수한 희생자 대신, 범죄에 가까운 실수를 저지르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관객이 처음 가졌던 반감을 재고하게 만든다.
영화가 사실적일수록 이러한 전환은 더 어렵다. <살인의 추억>(2003)의 형사들은 성폭행 및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을 고문하며, <마더>(2010)의 어머니는 유죄가 분명한 자식을 위해 증거를 숨기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기생충>(2019)에서는 노동자 계층과 부자 모두에게 거짓말과 절도, 폭력을 저지르며 살아남는 가족을 응원하게 만든다.
많은 관객은 봉 감독의 이런 톤의 복합성을 삶의 부조리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인생엔 쉬운 해답이 없고, 부정의에는 깔끔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죄가 우리의 시각과 행동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불완전한 노력은 중요하다고 믿는다(약 2:26). 세상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지만, 예수님은 나를 다시금 그 싸움으로 부르신다(마 5:6–16). 내가 진리를 단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보지 않고, ‘이루어져야 할 상태’로 이해한다면, 고통에 대한 나의 반응은 정의와 명예(빌 4:8)와 같은 개념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계급 투쟁, 폭력, 살인을 다룬 이야기 속에 웃음을 가미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부정의를 그저 삶의 부조리한 산물로 치부하게 만들 수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억압과 싸우지 않게 만들며, 비록 작동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속 가능한 세계에 대한 희망을 무디게 한다. 이런 영화들은 우리에게 애도하기보다는 웃으라고, 절망 앞에서도 웃으라고 강요한다. 결국 이는 희망에 대한 공격이다.
이러한 비관주의적 시선은 <미키 17>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봉 감독의 초기작 <괴물>(2006)과 비슷해 보인다. 두 영화 모두 자기중심적인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초래할 해악을 고려하지 않는다. <괴물>에서는 화학물질을 한강에 투기하여 괴물을 낳고, <미키 17>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디지털로 저장된 육체와 정신을 기반으로 복제하는 장치를 개발한다. 두 영화 모두 과학자들과 정치인들이 피해자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두 영화의 핵심 차이는 웃음의 방향성에 있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에게 납치된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봉 감독이 인터뷰에서 표현한 대로)’루저’ 가족이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성장한다. 전반부의 웃음은 후반부에 죽은 이들을 위한 슬픔과 살아남은 이들의 사랑으로 바뀐다.
반면 <미키 17>에는 슬퍼할 시간도, 사랑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미키의 죽음을 밑바탕에서 지탱하는 희극성, 그 내면이 결코 드러나지 않는 연인, 그리고 끊임없이 허둥대는 새로운 ‘루저'(영화 속에서 그렇게 불린다)를 향해 쏟아지는 우스꽝스러운 위협들은, 관객이 이 인물의 운명에 마음을 쓰려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킨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유쾌한 소동극에 봉준호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종교에 대한 무거운 비판을 끼워 넣는다. 그 비판은 기독교인들에게 수많은 부정적 고정관념을 짐처럼 지운다. 지구를 떠나 ‘순수의 행성’을 만들고자 하는 정치인은 성경적 언어를 거리낌 없이 남발하고, 자신이 이끄는 기업을 교회와 동일시하며, 우주여행 중 칼로리 섭취를 줄이기 위해 성관계를 금지하고, 복제를 ‘거듭남’이라 칭한다.
영화는 말한다. 과학의 오만과 정치적 타락을 비웃으라고.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도 함께 비웃으라. ‘심을 때’(전 3:2), ‘찾을 때’(6절), ‘세울 때’(3절), ‘치료할 때’(3절)조차도 조롱하라. 인간의 노력이나 탐구는 결국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16번의 실험 끝에도 여전히 공포의 실체로 남아 있는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오직 웃음뿐이다.
그러나 나는 고통을 마주할 때 울기를 택한다. 그리고 그다음, 사랑하려 애쓴다.
폴 마치뱅크스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의 영문학 교수이며,유튜브 채널 ‘Digging in the Dirt’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