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계시록’은 표면적인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를 향해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 영화는 대형 교회를 꿈꾸는 위선적인 젊은 목사의 몰락을 극화한다.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특별한 허락’을 받았다고 믿는 성민찬 목사는, 온갖 끔찍하고 교활한 일들을 서슴지 않는다. 는 믿음이란 정신분석과 약간의 상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설득하려 든다.
그러나 성 목사의 직업적 정체성과 그가 자주 외쳐대는 의로움을 조롱하고 깎아내리는 과정에서, 영화는 뜻하지 않게 한 가지 진실을 드러낸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이런 ‘우연한 진리 전달’은 드문 일이 아니다.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시인 퍼시 셸리,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처럼 기독교 회의적 작품에서도 교회를 벽돌 하나하나 허물기 위해 집요하게 시도할수록, 오히려 그 토대의 견고함이 드러나곤 한다.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
계시록은 교회가 아닌 정신과 진료실에서 그 결론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몇 달 전, 정신과 의사 이낙성은 범죄자 권양래를 피해자로 보이게끔 증언했다. 권양래는 한 젊은 여성을 납치하고 성폭행했지만, 그의 증언 덕분에 법정에서 풀려났다. 그 젊은 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제 그 여성의 언니이자 형사인 인물은 권양래의 새로운 피해자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동시에 권양래의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에 대한 단서를 더 알아내려 한다. 그녀는 마지못해, 동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이후 후반부 장면에서 영화는 이낙성을 진실을 말하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다. 광기에 휩싸인 종교인들과 제정신이 아닌 생존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처럼 보이게 말이다. 불안에 찬 형사를 마주한 그는, 그녀가 대화 중에도 보고 있는 죽은 동생의 환영은, 권양래가 자신의 범죄를 의붓아버지인 ‘외눈박이 괴물’ 탓으로 돌리며 그에게 집착했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냉정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집착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결국 수감된 성 목사의 환상과 동일하다. 이 박사는 말한다. ‘대부분의 비극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의 조합으로 인해 인생에서 일어납니다. 악마나 괴물 같은 것들은 인간에게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이 정신과 의사는 악마나 죄 모두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다루기 위한 인간의 상상 속 장치, 즉 환상으로 환원한다. 그의 말은 악명 높은 심리학자 B.F 스키너(행동주의자)의 결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인간의 행동이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전제 아래, 자유 의지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러나 이낙성 박사는 스키너가 결코 인정하지 않을 도덕적 틀을 받아들이며, 인간이 자기 정당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성 목사의 위선은 바로 그 자기정당화에서 비롯된다. 계시록의 앞부분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겸손한 복음주의 목사의 모습은 지역 세워지는 호화로운 새 건물에서 대형 교회를 이끌고자 하는 은밀한 열망과 연결된다. 하지만 상관 목사가 자신이 지역사회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교회 후보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성 목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회를 달라고 간구한다.
며칠 후, 그의 기도는 응답된 듯 보인다. 새 교회에 부임할 예정이었던 젊은 목사가 간통 혐의로, 공개적으로 고발당한 것이다. 성 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 믿고, 폭풍 속에서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는 환상을 보고, 범죄를 승인하는 초자연적인 표시로 해석하는 등, 새 직책을 지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일이 완전히 꼬이기 전에 성 목사는 잠시나마 관객의 공감을 자아낸다. 낡은 교회 사무실의 썩어가는 벽과 새는 천장, 그리고 예배당에 들어온 낯선 남자에게 친절히 다가가며 애쓰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는 담는다. 성 목사는 최근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흔들리고도, GPS 추적기가 채워진 낯선 남자에게 환영의 말을 중얼거린다. “교회는 죄인을 위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취약한 순간들조차 성 목사의 몰락을 예고한다. 늘어나는 교인 수를 보고하고 싶은 욕망은 진심 어린 환대 못지않게 그의 동기를 움직인다. 나중에 보석으로 풀려난 권양래임이 밝혀진 그 낯선 이가 갓 세탁한 교회 재킷을 선물 받고도 교인 등록을 하지 않자, 성 목사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성 목사가 불륜한 배우자와 대면하는 장면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녀에게 숨겨진 죄를 고백하라고 다그치지만, 동시에 스스로 ‘모든 것을 회개했다’는 주장하는 모습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계시록은 형편없는 대사, 비현실적인 캐릭터 묘사, 믿기 어려운 상황들을 보여주는 격정으로 휘몰아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욕망과 이기심이 결합해 어떻게 죄를 잉태하는지에 대한 통찰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성 목사는 신앙 공동체에서 대중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집착이 결합한 인물이다. 교만과 기만, 공격성이 만연한 인물이다. 목사는 확신한다. 하나님이 새로운 설교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권양래를 살해하는 것도 허락하셨다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성 목사가 몇 번의 자백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의 몰락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잘못을 외면하며 합리화하는 기도로 아내를 괴롭히는 대신, 숨기고 있던 비밀들을 아내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범죄를 언급하는 구절을 설교하면서, 교회에 고백할 수도 있었다.
계시록은 은 성 목사를 허수아비로 설정한다. 영화는 기독교인에게 일련의 소위 ‘계시’들을 제시하지만, 이는 결국 그가 얼마나 깊이 자기 이익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만약 그가 언덕 위에 매달린 십자가의 그리스도 실루엣이나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날개 달린 천사의 형상을 보고 눈물 흘리며 참회했다면, 그러한 이미지는 시의적절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비전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지가 아닌 그것들은 자기 정당화의 망상에 대한 실증적 증거가 되어버린다.
영화의 제작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성 목사의 터무니없는 위선이 그가 지키지 못하는 바로 그 기준을 확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류 누구나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상처와 깨어짐은 결국 은혜의 필요성을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그 깨어짐을 겸손히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보혈은 살인을 포함한 그 어떤 죄라도 덮을 수 있다.
폴 마치뱅크스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의 영문학 교수이며, 유튜브 채널 ‘Digging in the Dirt’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