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자란 어린 시절, 나는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읽었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식민 경찰에 체포되어 감금과 고문을 당한 뒤 목숨을 잃은 10대 소녀였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의 군사 확장기에 강제로 성 노예가 된 한국인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TV 드라마를 보았다. 역사 시간에는 일본 식민 정부가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며, 일본 천황에게 절하게 하는 등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저질렀던 일들을 배웠다.
교회에서는 목사님과 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점령을 성경 속 출애굽기와 종종 비교했다. “일본은 이집트 같았다”라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같았다. 억압받았지만 결국 해방되었다”고 말했다.
일본을 잔혹한 지배자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은, 당시 한 번도 일본인을 만나본 적 없던 내 마음속에 일본인에 대한 깊은 불편함과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우리 조상이 그런 악한 대우를 받았다면, 나 역시 국가적 적을 향한 조상들의 적개심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한국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의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 날인 8월 15일을 앞두고,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자주 고조된다. 특히 올해는 한국 해방 80주년이라 이러한 분위기가 더 두드러진다. 전국에서 역사적 억압의 기억을 되새기는 전시와 글짓기 대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나는 이후 일본인 친구들이 생기고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한일 양국의 복잡한 역사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다. 이제 나는 일본을 이집트, 한국을 이스라엘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로 두 나라의 관계를 바라본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은 절망 속에 집으로 돌아온다. 거절당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이 비유는 타락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은혜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그를 거절하거나 종으로 취급하지 않고,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나는 더 많은 한국 복음주의자가 일본을 그렇게 바라보길 바란다. 바울이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권면하듯, 친절과 긍휼, 용서로 서로를 대하기를 바란다.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내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계기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1924년 한국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만주(오늘날 중국 동북부)에서 살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만주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일본인과 조선인을 함께 이주시켜 경작하게 했다.
열 살 무렵, 나는 할머니에게 만주 시절과 일본인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적대와 학대받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할머니는 마을에 살던 친절한 일본인 이웃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오빠처럼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어. 여자라서 부모님이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으셨거든. 그런데 그 일본인 아주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늘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일본어로 이야기해 주셨어.”
이것이 할머니가 일본인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준 유일한 이야기였다. 내가 책에서 읽고 들었던 일본인은 폭력적이고 잔혹하기만 했는데, 일본인이 친절하고 온화하다니 어린 나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5년 뒤, 우리 가족은 인도네시아로 이사했다. 국제학교 입학을 위한 영어 시험을 보던 날, 나와 같은 나이의 일본인 소녀를 만났다. “안녕, 반가워. 내 이름은 카요야. 우리 친구 할래?” 그녀는 또박또박 천천히 영어로 내게 말했다.
처음엔 조금 불편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그녀는 일본인인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서로 좋아하는 일본·한국 노래를 주고받고, 인도네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일본과 한국에서 서로의 집을 방문했다. 일본에 갈 때마다 카요의 가족은 나를 가족처럼 친절히 맞이해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와 카요와의 우정을 통해, 나는 우리 민족의 집단 기억에서 물려받은 불편함과 두려움을 극복했다. 친절과 긍휼에 기초한 진정한 우정이 편견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허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비유 속 큰아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탕자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며 함께 기뻐하기를 거부한다(눅 15:28).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본이 과거의 잔혹 행위에 대해 한국에 사과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비슷한 분노와 원망을 가질 수 있다.
히로히토 일왕과 일부 일본 총리 등 주요 지도자들이 전쟁에 대해 유감과 반성을 표한 적은 있지만, 여기에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과거 잘못에 대한 직접적인 인정이 빠져 있다. 게다가 일부 일본 지도자들은 여전히 A급 전범을 신으로 모시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이런 행위를 무색하게 만든다.
20대에 일본어 연수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축소되거나 완전히 누락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일본인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 점령기 동안 겪은 고통을 알지 못한다.
나의 일본인 복음주의자 친구 이시자카 쇼는 10대 시절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조상들의 죄에 대해 한국인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사과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몇 번이고 사과할 것입니다.”
다른 일본 복음주의자들도 진심 어린 회개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97년, 일본교회 500곳을 대표하는 ‘일본부흥협의회’는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8월 15일과 12월 8일(진주만 공격일)을 ‘금식과 회개의 날’로 선포했다.
일본 목사 오야마 레이지는 1960년대부터 2023년 별세할 때까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한국 기독교인과 생존 위안부에게 사과했다. 2019년에는 일본 교회 지도자 16명과 함께 1919년 3·1 운동 직후 일본 경찰이 교회를 불태워 29명의 한국인을 학살한 제암리 교회 터를 찾아 사과했다.
쇼와 마찬가지로, 오야마는 “한국인이 ‘이제 됐다’고 말할 때까지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아직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서사로 두 나라를 계속 바라본다면, 용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성경 속 이집트도, 한국의 압제자도 아니다. 우리는 일본을 잃어버린 형제로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억압과 고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오래된 원한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할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하는 완벽한 사과를 일본으로부터 결코 받지 못하더라도, 오늘날 용서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베풀고 받는 용서는 한일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8월 15일은 일본에게는 해방의 날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자신들이 무적의 신이라 믿었던 천황이 사실은 한낱 인간임을 드러낸 ‘파멸의 날’이었다.
천황 숭배는 일본 국가 신도의 핵심 교리였으며, 전시 선전에 적극 활용됐다. 이는 군부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며 국민에게 시간과 자원,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도록 요구했다. 일본 군 지도자들은 가미카제(자살 공격) 등 천황을 위한 전사야말로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예를 얻게 된다고 장담했다.
전쟁 패배 후, 일본인은 자신들을 속였던 군부와 정부에 실망했고, 천황의 신격화가 거짓임을 깨달았다. 쇼는 “패배는 일본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이 영적 환멸은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에서 신도를 비롯한 전통 종교 전반의 쇠퇴로 이어졌다. 일본 교회는 서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잠시 성장했지만, 1970년대 이후 성장이 정체됐다.
반면 한국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고, 결국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우리 역시 한때 잃어버린 백성이었음을 겸손히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일본 복음주의자는 인구의 1%도 안 되지만, 한국인은 5명 중 1명이 개신교인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복음화가 되지 않은 민족 집단이다.
19세기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일본인 신자들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현지에서 목회자를 양성함으로써 한국에서 기독교 성장에 기여했다. 최근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은 두 일본인 선교사의 삶을 조명한다. 그들은 수원 동신교회를 세운 노리마쓰 마사야스와 한국에서 강제된 천황 숭배에 반대한 오다 나라지 선교사이다. 한국인을 향한 그들의 연민을 일본 동포들은 배신행위로 여겼지만, 두 사람은 한국인을 섬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한일 양국 간 문화 교류가 케이팝, 한국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늘어나는 지금, 한국 교회는 이런 개방적 시기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2023년 한국 선교 조사에 따르면, 현재 약 1,200명의 한국인이 일본에서 장기 선교사로 활동 중이다. 일본이 오랫동안 ‘선교의 무덤’으로 불리며 기피됐던 것에서 변화한 모습이다.
일본에서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국내 거주 일본인이나 방문객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교 사찰이 운영하는 템플스테이처럼, 일본인들에게 숙박과 환대를 제공하는 교회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또는 온누리교회가 일본에서 ‘러브 소나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해온 것처럼, 복음과 케이팝 콘서트에 초대할 수도 있다.
주 안에서 용서받고 용서한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다음 세대에 원망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올해 나는 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내년 여름 카요와 그 가족을 한국과 일본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카요는 한국어를 독학하고 있다고 하며 내게 말했다. “네가 나와 소통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듯이 나도 너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
결국 두 민족 사이의 ‘원수 된 담’을 허무실 분은 그리스도뿐이다(엡 2:14).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새롭게 하고, 한때 우리를 억압했던 나라로부터 온전한 용서와 화해를 주고받음으로써 이 담을 허물어갈 수 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하나가 된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로 서로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 유아름씨는 댈러스 신학교에서 구약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