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아침에 베이글을 먹었거나 점심에 부리또를 먹었을 수도 있고, 어떤 음식이었든 그 음식으로 하루 동안 활동할 힘을 얻었을 겁니다. 식사하는 건 배를 채우기 위한 당연한 행위이지만, 어떤 식사는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고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기도 합니다. 1993년 11월 20일에 먹었던 한 끼는 제 영혼을 채워주었기에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밴쿠버에 살고 있었고, 쌀쌀하고 이슬비가 내리는 저녁이었습니다. 하루를 잘 마무리한 후 저는 준비한 대로 토니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녀는 제 청혼을 승낙했고, 우리는 맛있는 연어 요리를 함께 먹으며 그날을 기념했습니다. 식사하면서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진 날과 그 이유를 기억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이자 약속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한 영원한 의미를 지닌 저녁 식사를 주최하셨습니다. 마가의 성만찬에 대한 기록은 “유월절 양을 희생하는 관습이 있던 무교절의 첫날”(막 14:12)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행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며, 결국 기대감으로 바뀌었고, 이날을 기념했습니다. 유월절 양을 희생하는 행위는 매년 성전에서 새롭게 행해졌고, 예수님의 만찬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기대감에서 불안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곧 나와 함께 식사하는 자가 나를 배반하리라”(18절)고 말씀하시며 대화를 중단하셨습니다. 식탁에서 나누던 즐거운 이야기가 순식간에 모두 멈췄을 것입니다. 이 엄중한 선포는 함께하는 만찬의 상징인 평화를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함께하는 만찬은 서로 언약하며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적도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배신은 언제나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러한 환대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느낀 배신감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22-2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저녁이었다면 빵을 나누는 행위도 단순히 만찬 중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을 겁니다. 즉 축복하며 빵을 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구속에 대한 기대와 개인적인 염려로 가득 차 있었고, 식탁에 모인 제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의식화했습니다. 구원의 열매는 볼품없는 나무, 즉 그리스도의 몸이 달려 있던 낡고 투박한 십자가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고전 11:26)입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에게 고요히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빌 2:10-11).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환상은 그분을 경외하고 경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찬에서 기억되고, 상하고 매맞으시며, 배신당한 구세주가 기꺼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치유되고 그분의 보혈로 우리는 온전해집니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마다 구세주의 슬픔을 통해 얻은 엄청난 기쁨이라는 신성한 선물을 천천히 음미합니다.
월터 김은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의 회장이며 이전에는 목사로서 캠퍼스 교목으로 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