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도 이미 경기도 평택 시골 마을에 있는 조부모님의 집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문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알았다. 여름마다 조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기억이 배어 있는 집의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부엌을 지나 조금 어두운 안방의 옷장으로 향하면 따뜻한 나무와 오래된 서랍의 향이 났고, 그곳에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바깥의 여름 더위와 함께 습기와 풀냄새, 희미한 신맛이 뒤섞인 논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창문을 통해 흙으로 다져진 따뜻한 마룻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이런 향으로 조부모님의 집을 떠올리듯, 성경의 한 장면도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어 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는 몸을 굽혀 항아리를 깨뜨리고 부었다. 그녀는 예수를 ‘주님’이나 ‘랍비’ 라고 부르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이렇게 기록한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이 그 향이 집에 ‘가득했다’고 기록할 때, 그 세부 묘사는 우리의 상상 속에 오래 머무른다.
왜 이 장면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고 감정적으로 충만하게 다가올까? 요한은 이렇게 주장한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났고, 그 인식이 공간 자체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 향은 예수님의 신적 존재를 물리적이고 후각적이며 분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향은 구약 성막의 분향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언한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그분을 만나 그분의 현존에 의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로 가득 차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어디서든지 풍기게”(고후 2:14)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이 장면에서는 하늘의 음성이나 기적의 표징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하늘에서 구름도 내려오지 않으며, 비둘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의 소리도 없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도 없으며, 기록할 만한 치유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압도적으로 풍성한 향기가 있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향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된다. 향은 교리적 계시가 아닌, 인식의 통로가 된다.
나드는 라벤더나 감귤류처럼 가볍게 퍼지는 향이 아니었다. 더 무거웠다. 달콤한 흙, 따뜻한 나무와 생강이나 갈랑갈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향신료가 뒤섞인 향이였다.
로마 작가 플리니우스는 나드를 “비 온 뒤의 젖은 나무처럼 달콤하면서도 퀴퀴한 향”이라고 묘사했다. 그리스 의사 디오스코리데스는 최고의 나드는 피부에 달라붙어 병이 비워진 뒤에도 오래도록 남는 향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모든 나드가 이렇게 향기로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갠지스강 저지대에서 자란 종류는 신내가 나고 거의 썩은 듯한 냄새를 풍겼다고 디오스코리데스는 관찰했다. 상인들은 염소 냄새 같은 잡초가 섞인 나드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가의 나드는 고산지대에서 자란 것이었다. 그곳에서 식물은 더디지만 강하게 자라며, 뿌리가 태양과 희박한 공기를 흡수한다.
요한이 “집이 가득 찼다”(헬라어 eplērōthē)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을 가득 채웠음을 묘사할 때 사용된 언어(출 40:34; 왕상 8:10–11)와 같다. 미국 신학자 크레이그 키너는 이 향이 집을 가득 채우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헌할 때 영광으로 가득 찬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설명했다.
요한이 이러한 구약 성전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 구절들을 통해 공간 전체가 어떻게 신성한 임재를 드러내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솔로몬 성전 봉헌식에서 비슷한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분향이 공기를 가득 메우며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장면이다.
“엄청난 양의 향을 피우니, 사방의 공기 자체가 이 냄새로 가득하여 먼 거리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였고, 하나님이 새로 지어진 성소에 거하신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다가 성전에 이르렀다.”
요한복음 12장에서 향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진리를 선포한다. 거룩한 무엇인가가 이제 이 공간을 채운 것이다.
따라서 요한이 나사로의 집이 향기로 가득했다고 기록할 때, 그는 단순히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향기를 통해 인식되고, 영광 받으시는 장면을 목격한다. 나드의 향은 공기 중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져, 이 결정적인 순간과 예수님을 평생 기억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향기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그 가치를 문제 삼는다. 유다는 그 향을 낭비라 여기며 비용만 따진다.
유다는 반문한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복음서는 유다가 가난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탐욕에서 이 말을 했음을 분명히 한다(6절). 그의 반응은, 신앙의 행위를 단순히 효용으로만 평가하는 사고가 어떻게 본질을 놓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1세기 당시 마리아는 예수를 장례와 존귀를 동시에 상징하는 향으로 표지했다. 그 행위는 요한복음의 서사와 맞닿아 있다. 죽음이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고, 향은 이미 그분의 가치를 증언했다.
브라운대학교의 역사·종교학 교수 수잔 애시브룩 하비는 저서 ‘구원의 향기 (Scenting Salvation)’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지식을 얻는 것이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향은 단순한 감각 이상의 것이었다. 향은 한 사람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비의 말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냄새를 단순한 분위기가 아니라, 인식을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이해했다. 어떤 경우 향기를 경험하는 것은 곧 현존을 경험하는 것이었고, 그 현존은 다시금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냈다.
오늘날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 명확하고 논리적이며 진술된 것을 신뢰한다. 우리는 범주화할 수 있는 교리와 명명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정복해야 할 개념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인격이다.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에 대해 무엇을 알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그분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만 기록한다. 어쩌면 이것이 이 본문이 강조하려는 요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본문이 전하려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말하면서도, 그 앎이 변화, 겸손, 값비싼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앎이라 할 수 있을까?
초대교회처럼 우리도 후각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교회에서 가장 값비싼 향수를 깨뜨리거나, 주일 예배 전용 향을 준비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고후 2:15).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의 현존은 그들 안에 남아, 의식적 연기가 아니라, 삶의 흔적을 통해 향기가 된다.
그러한 향기는 요란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하다. 그것은 도덕적 우월감이 아닌 자비의 냄새, 자기 의가 아닌 겸손의 냄새, 말뿐인 사랑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의 냄새다. 종교적 허위를 경계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논쟁이 아니라 증언이다. 조용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은혜가 지나간 자리임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참된 증언은 항상 설교나 삼단논법의 형태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집안을 가득 채워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던 그 향기처럼 예수님을 아는 이의 조용히 풍기는 삶을 통해서 온다. 그리스도의 향기처럼 조용하고 끈질기며, 언어 이전에 말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은혜이다.
기독교 공적 생활 센터의 크리스 버틀러는 C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다른 신자들과의 온라인 대화에서 모든 논쟁을 이겨야 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확신과 자비로 우리의 신념을 붙들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는다” 라고 말했다. 또는 “내가 이 신앙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멈추고, “나는 어떤 이야기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그 향기를 경험한다. 복음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신학자 앤드류 토런스는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돋보이려는 욕심이나 신앙 안에서 이기려 애쓰는 것을 내려놓고, 이 이야기가 누구에 관한 것인지 반복적으로 되새길 때 드러날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 있는 조부모님 집의 냄새는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내게 되살아난다. 따뜻한 나무, 햇살 머문 논, 흙마루의 냄새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너는 안전하단다. 네 집에 머물고 있다.”
작지만 거룩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그렇다. 그 향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김보혜는 폴 퀸 칼리지에서 성서학을 강의하는 겸임교수이며, H. 밀턴 해거드 신약본문연구센터의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