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로엘롭스(Kathryn Roelofs)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미혼인 어머니는 출산 직후 딸을 입양 보내기로 했다. 생후 4개월 반이 되었을 때, 로엘롭스는 홀트아동복지회 관계자 두 명과 다른 네 명의 아기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소속의 가정들이었다.
로엘롭스는 인구의 대부분이 백인인 덴버 지역에서 자라며 자신과 닮은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생모는 그에게 ‘태희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양부모는 ‘태(Tae)’를 미들네임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식 성을 쓰기 때문에 자신의 한국 이름을 설명하거나 발음하는 일조차 그에게는 쉽지 않았다.
가족은 로엘롭스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로엘롭스는 자신을 국제 입양의 성공 사례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물음이 남아 있다.
“입양인으로 산다는 건, 몸에 딱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에요.” 41세의 로엘롭스는 말했다. 그는 생부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생부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입양인들은 흔히 생부모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자신을 보냈다고 믿지만, 최근 조사 결과 많은 경우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2024년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과거 한국 정부는 해외 입양 수요를 맞추기 위해 입양기관들과 공모해 거리에서 아이를 납치하거나, 병원에서 부모에게 “아이가 죽었다”라거나 “너무 아파서 살 수 없다”라고 속여 신생아를 빼앗았다.
또 다른 AP 보도는, 제네바에 기반한 한 입양기관이 이미 1966년에 한국의 입양 관행이 금전적 이익에 의해 움직였다고 전했다. 1980년대 정부 감사에서는 입양기관이 병원에 불법적인 금전을 지급하며 아기를 ‘조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뉴스를 들은 로엘롭스는 “모든 입양인의 최악의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어떤 여성이 나를 낳았지만 빼앗겼고, 나는 누군가에 의해 돈을 받고 팔렸고, 그래서 지금의 제 삶이 있다는 건데, 그건 너무 끔찍해서 생각하기조차 힘들어요.”
한국의 입양인들과 입양 운동가들은 이번 입양 사기 사건이 교회의 역할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고 CT에 말했다.
1950년대 이후 한국은 약 20만 명의 아동을 미국, 유럽, 호주 등으로 보냈다. 한국전쟁 직후, 혼혈 전쟁고아들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입양이 급격히 늘었다. 정부는 입양을 복지 지출을 줄이는 방법으로 여겼다.
1980년대에는 해외 입양이 정점에 달해, 당시 전 세계 해외 입양아의 60%가 한국 출신이었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아기 수출국’이라는 국제적 비판이 일자, 정부는 1990년대부터 해외 입양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2000년대 초까지 수천 명의 아동이 여전히 해외로 입양되었다.
1970년대 이후 미국 내 아시아계 입양아의 3분의 2는 한국에서 왔다. 하지만 최근 베서니 크리스천 서비스 (Bethany Christian Services)와 같은 미국의 주요 기독교 입양기관들이 국제 입양을 중단하면서, 한국의 해외 입양은 급감했다.
2025년 10월 1일, 한국 정부는 새로운 입양 절차를 발표했다. 국내에서 적합한 가정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만 국제 입양이 허용되며, 모든 해외 입양 사례는 정부의 개별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치는 아동의 권리를 보호하고 납치나 인신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헤이그 국제입양협약’ 비준에 따른 것이다. 한국 정부는 올해 초, 입양기관들이 이윤을 위해 아동을 ‘대량 수출’했다고 공식 인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98건의 입양 사례를 조사한 결과, 56건에서 인권침해를 확인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위원 간의 의견 불일치와 시간 부족을 이유로 5월에 활동을 중단했다.
기독교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는 사기와 불법 입양 혐의를 부인했다. 홀트 인터내셔널의 전 부회장이자 1956년 홀트를 통해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 수전 콕스(Susan Cox)는 CT와의 인터뷰에서 입양기관들이 부당하게 나쁜 집단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홀트는 1977년, 미국에 기반을 둔 별도의 기관인 ‘홀트 인터내셔널’을 설립하며 분리되었다.
창립자 해리와 버사 홀트 부부는 오리건주 출신의 복음주의자였다. 1955년 12명의 한국 아동을 미국으로 데려오며 입양 운동을 시작했고, 그중 8명은 자신의 가족이 되었다. 한국 입양의 역사를 연구해 온 연구자 정수진은 당시 한국 언론이 해리를 ‘한국 입양의 아버지’ 버사를 ‘한국 고아의 사도’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
당시엔 아이들이 오면 우선 먹이고, 재우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했다고 콕스는 말했다.
“그때는 기록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몰랐기에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돌보는 게 우선이었어요. 시간이 지나 기록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일관성이 없는 경우들도 있었을 겁니다.”
1980년대 당시 입양기관에는 아동의 출생 배경을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다고 일했던 직원들은 증언했다. 어떤 기관들은 부모에게 “서구에서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겠다”라며 아이를 맡기게 했다. 많은 입양인은 훗날 자신들의 서류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기’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족이 있거나 부모에게서 강제로 분리된 경우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가 정부의 책임을 지적한 후,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은 10월 “이러한 학대를 막지 못한 정부의 실패”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의 복음주의자 김도현(뿌리의집 설립자) 목사는 C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입양 사기는 국가가 주도한 행위, 명백한 범죄입니다. 조작된 기록은 한 사람의 출생에 관한 진실을 지워버렸고, 학대와 소외, 절망을 낳았습니다. 기록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슬픔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해외로 입양을 보내 이득을 얻으려는 압력과, 국내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동시에 존재했다.
한국인들은 유교적 혈통 중심 문화 속에서 혈연관계가 아닌 자녀를 가정에 들이길 꺼렸다. 유교적 전통은 조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시하며, 가문은 대대로 자신의 혈통을 기록으로 남긴다.
입양인 캠 리 스몰(Cam Lee Small)은 그 낙인이 수십 년간 지속되는 것을 보았다. 세 살 반이던 그는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백인 부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비행기로 뛰어올라 “엄마!”라고 외쳤다.
위스콘신에서 자라 현재 미네소타에 사는 그는 2011년 한국을 방문해 생모를 찾았다. 그러나 첫 만남이 취소되자, 그는 택시 안에서 울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여기가 내 집이 되어야 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선택해야 했어요.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믿어요. 그리고 이 일 속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음 날, 입양기관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생모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스몰은 한국 사회에서 미혼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수치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의 고통을 조금은 알게 됐어요. 더 공감하게 되었죠. 엄마도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있었어요.”
스몰은 현재 미국에서 입양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다. 아동복지 전문가, 상담가, 교회, 기관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며 입양 문화를 바로잡고자 한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들 또한 정부와 교회가 입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는“한국 교회는 전도에만 집중했고, 미혼모나 약자를 돌보는 데에는 무관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미혼모들이 가족과 사회의 압박,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녀를 포기한다. “여성과 약자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한 교회의 실패는, 약자를 품으신 그리스도의 본보기와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라고 김 목사는 말했다.
뿌리의집은 한국미혼모가족협회(KUMFA) 등과 협력해 긴급 보호소와 정신건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1990년대 초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UNCRC)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뿌리의집은 입양인 지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367건의 해외 입양 조사를 요청하는 입양인 성명서에 공동 서명했고, 20년간 서울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며 해외 입양인과 가족들이 친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운영하던 게스트 하우스에는 공동 부엌과 남녀 도미토리, 가족실이 있었고, 그동안 5,000가족 이상이 이곳을 거쳐 갔다. 2023년 이 단체는 부지를 원소유자에게 반환하며 게스트 하우스 운영을 종료했다.
“입양은 개인의 자선 행위가 아니라, 교회와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선교적 과제입니다.”라고 김 목사는 말했다.
온누리교회의 입양 사역 ‘제이홈’을 이끄는 오창화 집사도 입양 가정을 돕는 역할을 한다. 이 사역은 국내 입양 가정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입양을 희망하는 가정을 지원한다.
그는 “한국의 국내 입양률은 정말 낮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이야기합니다. 가족의 본질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이라고.”
오창화 집사는 2011년 쌍둥이 딸을 입양했다. 그 계기는 야고보서 1장 27절, “고아와 과부를 그들의 환난 중에 돌보라”는 말씀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낙태 합법화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계기로 기독교 입양 가정과 교회 안에 새로운 움직임을 일어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오 집사는 한국입양가족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며, 서울의 베이비박스에 남겨진 아기들을 직접 위탁 양육했다. 주사랑공동체교회는 2009년 베이비박스를 설치했고, 지금까지 2,000명 넘는 아기의 생명을 구했다.
오 집사는 “2012년‘입양특례법’이 개정된 이후,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기 수가 급격히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전에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도 입양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이의 출생을 공식적으로 신고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 여성들은 이런 과정을 감당하기보다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로엘롭스는 예배사역 컨설턴트로 일하며, 기독교 내에서 흔히 사용되는 입양을 설명하는 미화된 은유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입양인이 떠나온 본래의 정체성은 악하고 죄 된 것으로 여겨지고, 양부모는 구원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성경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구절을 찾던 중 로마서 8장 18-25절을 발견했다. 그 구절은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안다”라고 말한다.
“예수님도 입양인들이 느끼는 그 고통과 트라우마를 아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위로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한국 이름의 뜻을 알게 되었다. ‘태희’는 ‘기쁨을 누리기를’이라는 뜻이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엄마가 저에게 희망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걸 알았어요. 마치 저를 위한 기도 같아요.”
2006년, 그는 생모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직원이 파일을 보여줬는데 거기에는 덴버 양부모의 사진이 있었다. 생부모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마무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매년 생일이 다가올 때면, 그는 생모가 자신을 떠올리고 있을지 생각한다.
로엘옵스는 자신의 입양 기록 파일에 자신의 대학 시절 사진과 연락처를 남겼다. “이건 엄마에게 전하는 인사예요.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엄마가 지어준 이름처럼, 저는 정말 기쁨을 누리고 있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