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보다 큰 사랑

대림절에 우리 마음속에 차오르는 소망.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1, 2023
Phil Schorr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3:16-17

저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 간의 관계를 좋아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질문할 시간을 갖기 위해 동료 바리새인들의 비판을 피해 늦은 밤에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유대 사람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며,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세상에 전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우주만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떤 사랑에 대해 말씀하나요?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음식을 좋아하고 직업을 좋아하거나 TV 프로그램을 좋아하거나 취미를 좋아할 때 우리는 쉽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물론 일종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의 종류와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도록 의도하셨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3:1).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부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과 깊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엄청난 대가를 치른 사랑입니다. 가장 큰 사랑에는 반드시 큰 대가가 따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애정이나 애틋한 호감 정도의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보다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라고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영혼 깊은 곳에 숨겨진 어둠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도 비추는 밝은 빛으로 어둠을 뚫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청사진만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기, 즉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매년 대림절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상상해봅니다. 이로 인해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차오릅니다.

묵상하기



1. 율법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답을 듣고 하나님의 심오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사역에서의 사랑은 오늘날 일반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개념과 어떻게 다릅니까?


2.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고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삶에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로니 마틴은 오하이오주 애쉬랜드에 있는 Substance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Harbor Network의 리더 리뉴얼 디렉터로 일하고 있으며 7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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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나쁜 소식들에 대한 좋은 소식

때때로, 고통을 단지 영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0, 2023
Phil Schorr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요한복음 16:33

당신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곧 나쁜 소식도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는 나쁜 소식들이 끼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마자 한 세대가 독재자의 손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고문과 처형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부활의 승리와 오순절 교회의 탄생 이후에도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제자들은 박해받고 추방되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지방에 흩어졌습니다.”(벧전 1:1) 결국 교회는 복음을 전 세계에 전했지만 사소한 신학적 의견 차이와 개인 숭배로 인해 고통과 분열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메시아 이야기도, 초대 교회의 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없애는 데 집착하는 문화, 즉 고통을 차단하는 기술, 고통을 덜어주는 약, 고통을 피하는 기술을 발명하여 판매하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인생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요 16:33)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깊은 고통을 경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고 준비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인생의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우리가 믿는 신학적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불일치가 삶에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나쁜 소식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고통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믿거나 어려움을 불성실의 탓으로 치부하는 얕은 영성으로부터 우리를 예방시켜 줍니다. 고통은 예외나 실패가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는 실체입니다. 노력이나 긍정적인 사고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실제로 충격적인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더 실존적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가르치시며 고난의 불가피성과 고난을 극복하셨다는 확신을 모두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자유함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극복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고통과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즉, 고통과 유혹을 단순히 제거하지 않고 충실히 통과하여 죽음이 온 우주에 구원을 제공하는 바로 그 수단이 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16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불안한 상황이 아닌 성령의 평안에 거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것이며, 때로는 영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아마도 그 고통을 직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놀라지 말고, 고통을 극복하여 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여러분의 몫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를 극복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이 여러분과 세상이 통과하고 있는 이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도록 허용하십시오. 이것이 대림절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 땅의 실체입니다. 할렐루야!

묵상하기



여러분에게 닥친 고통과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직면하고 있나요? 고통의 시기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며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스트라한 콜먼은 뉴질랜드 아오테아로아 출신의 작가, 음악가, 영성 지도자입니다. 최근 출간된 Beholding을 포함하여 세 권의 묵상 기도서를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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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망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Christianity Today December 7, 2023
Phil Schorr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 에베소서 1:18-20

크리스마스 묵상에서 어려운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제 말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소망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주셨지만 다른 많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처럼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갈릴리 바다의 화창한 날 같을 수도 있지만, 그 바탕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솔직히 그 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의 바탕이 되고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몇 가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교회에 소망의 실체와 교회가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것과는 무관한 소망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약간의 안도감을 줍니다. 소망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은 교회가 스스로 해내려는 노력을 멈추고 대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권위에 소망을 둘 때 비로소 무대에 올라오게 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자”는 말은 간단해 보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업무 프로젝트, 육아, 심지어 자신의 사역까지,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려는 노력을 멈추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해 보세요. 이 정도의 신뢰와 통제력 내려놓음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소망을 둔다고 말하지만, 우리 자신의 기술과 능력에 소망을 두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에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 노력은 통제력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의 한계를 깨닫는 것은 내 인생의 소망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의 헤아릴 수 없는 강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스꽝스럽게도 저는 매일 아침 49세의 몸으로 일어나 절뚝거립니다. 이제는 잠을 자며 뒤척이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도 있고, 체육관에 갈 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스트레칭 해야지 다짐합니다. 제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의 능력은 헤아릴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의 위대하심과 강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 소망을 둘 수 있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전능하신 왕의 권위는 실제로 은혜의 풍성함을 통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며, 그리스도인인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창조주의 권위를 기억하며 그분의 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면 절기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오직 그분의 힘과 권위 안에서 소망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묵상하기



1. 소망의 개념을 묵상하면서, 소망은 통제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여러분의 신앙에 어떤 도움을 주나요? 삶의 어떤 영역에서 통제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나요?

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전능하신 왕의 권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쁘고 피곤한 성탄절에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힘과 권위를 느낄 수 있을까요?

카를로스 휘태커는 스토리텔러이자 연사이며, Moment Maker, Kill the Spider, Enter Wild및 최근 출간한 How to Human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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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의 시대에서 전쟁의 흉악함에 대하여

‘최후의 적은 죽음’이며, 그 적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반란군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파괴된 한 주택에 시신이 천으로 덮여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파괴된 한 주택에 시신이 천으로 덮여 있다.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 2023
사진 동맹 / 기고자 / 게티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사상자 수는 이미 수천 명에 달한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약 1,300명이 사망했으며,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1,300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9,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시신의 수는 너무 많아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사망자 중 일부가 어린이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충격적인 보도는 하마스가 영유아를 참수했다는 주장으로, 이스라엘 군과 백악관이 이를 반박했다가 <예루살렘 포스트>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보이는 주장이다.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가 거짓으로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사실일 수도 있으며, 이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다.

어느 쪽이든, 이 전쟁에는 부인할 수 없는 수많은 악이 존재한다. 타락 이후 우리의 세상은 죄와 죽음, 악마에 감염되어 있다. 안전하고 부유한 서구에 사는 운이 좋은 소수의 사람은 이러한 질병과 고통을 잊거나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 전쟁은 우리의 질병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새롭게 가져다주었다.

1755년, 스페인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끔찍한 지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구심을 품게 할 정도였다. 전쟁은 이와 비슷한 충격을 사람들에게 안겨준다.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대체 누가 아기를 참수할 수 있을까? 전쟁과 죽음이 아닌 보살핌과 위로만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영유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영혼은 얼마나 타락한 걸까? 우리집 막내아이가 생후 5개월이다. 그렇게 겨우 옹알이하는 아기들이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처한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아마도 시편 구절 중 가장 어두운 시편인 시편 137편이 떠오른다: “멸망할 딸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하며 시편 기자는 분노한다. “네 어린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8-9). 악행을 저지르는 자와 당하는 자, 그토록 더럽고 썩은 악의 능력은 이 땅에서 모두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보복은 신속하고 가혹했다. 공습은 테러리스트들을 표적으로 삼았고, 어떤 경우에는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무고한 사람들과 납치된 이스라엘인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했다. 가자지구는 너무 좁고 국경이 봉쇄되어 있어 민간인이 도망칠 곳이 없다 (14세 이하 어린이가 44%에 달한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집, 학교, 병원, 모스크, 시장, 심지어 난민 캠프까지 공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산물 직판장, 벼룩시장, 크리스마스 마켓 등의 ‘시장’이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시장’에 가지 않는다. 현대 미국인들에게 시장은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기보다는 종종 특별한 날 이벤트를 위해 가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폭탄이 터진 시장은 그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식료품점이 있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채소, 빵, 고기 등 일상적인 생필품과 식재료를 사기 위해 그곳에 간다. 코스트코나 알디, H-E-B에 폭탄이 떨어지거나, 퍼블릭스, 타겟, 탑스의 유제품 통로에서 파편이 당신과 자녀들에게 날아든다고 생각해보면 이 상황에 가까울 것이다.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시편 기자가 정직하게 말하고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증오의 기도를 기록한 성경은 또한 그 기도가 상상하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도 기록하고 있다. 시편 137편은 인간의 죄의 폐해를 폭로하고 있으며, 폭력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대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다.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죄와 악의 저항을 보여준다.”라고 신학자 J. 데오티스 로버츠는 해방과 화해에 썼다. “죄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뒤틀리고 왜곡되었지만” 십자가는 “죄와 악의 깊숙한 곳을 파헤치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에 부여하신 무한한 가치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신속한 종전과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며칠이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빠른 휴전이 온다고 해도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거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최후에 멸망할 원수는 사망”(고전 15:26)이며, 그 원수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쓴 편지처럼 끈질긴 희망으로 이야기할 수는 있다(1:3-4):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보니 크리스티안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아이디어 및 서적 편집 디렉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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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16개 복음주의 연합이 가자 지구의 휴전을 촉구하며 하마스를 규탄하다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하는 지역 및 국가 연합체들이 발표한 성명서는 유사한 인도주의적 호소보다 성경적으로 더 깊이가 있다.

Saint Porphyrius Greek Orthodox Church in Gaza

Saint Porphyrius Greek Orthodox Church in Gaza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9, 2023
Anadolu Agency / Contributor / Getty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으로 가자 지구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16개의 복음주의 연합과 단체들이 즉각적인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11월 1일에 발표한 애도, 회개, 정죄의 성명서는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이 지역에서 회복적 정의에 기반한 정의로운 평화 만들기를 확대하고 강화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를 위해 공감과 겸손을 실천할 것을 요청합니다.”라고 단체는 명시했다. “평화는 폭력의 악순환이 끊어지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복수에 대한 죄악 된 욕망에서 벗어날 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중동,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지역 협회가 서명한 이번 지지서에는 알제리, 이집트, 에티오피아, 인도, 이라크, 요르단, 케냐, 쿠르디스탄, 네팔, 카타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의 대표 기관과 유럽의 아랍어권 연합이 참여했다.

성명서는 지정학적 복잡성과 하나님의 종말론적 목적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인정하면서도, 비극적인 인명 손실을 애도하고, 평화 조성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던 것을 회개하며, 국제 인도법을 ‘존중’하지 않은 국제 사회를 규탄했다.

그러나 인도와 라틴 아메리카의 WEA가 발표한 공동 성명서는 전쟁에 대한 다른 기독교인들의 성명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아온 지역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동맹국들은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고 하마스에게 모든 인질을 석방할 것을 촉구했으며, “홀로코스트 이후 하루 동안 발생한 최대 규모의 유대인 민간인 학살”을 “개탄스럽고 비열한 일”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추격하면서, 더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초래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폭력은 “성지를 모든 사람에게 정의, 평등, 번영을 보장하지 않고서는 어떤 민족 집단도 안보를 달성할 수 없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분쟁 속에 놓여 있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메시지 때문에 다른 성명서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세계 복음주의 공동체 내의 다양한 관점에 주목하기 위해 이러한 노력에 동참했습니다”라고 WEA 창립 회원인 인도 복음주의 펠로우십의 사무총장 비제이시 랄이 말했다. “포괄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도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입장’으로 분류되는 것 이외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남아프리카 동맹은 과거의 죄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 복음주의 연맹의 모스 은틀라 사무총장은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한창일 때 전 세계에서 복음주의의 목소리는 거의 없거나 기껏해야 우리의 고통 앞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려고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전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였습니다.”

케냐 동맹은 이스라엘 시민에 대한 잔학 행위를 분명하게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사망자 수가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하마스가 인간 방패 사용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모두에게 “인도주의적 사고방식”을 호소하면서 가자 지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바로 복음주의 동역자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높인다: 고통받는 민간인들의 곤경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케냐 복음주의 연맹의 사무총장 넬슨 마칸다가 말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이 성명서는 최근 국제적으로 싸움을 멈추라는 요구가 쇄도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휴전, 휴전. 형제자매 여러분 멈추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다, “전쟁은 언제나 패배입니다. 언제나.”

세계 교회 협의회와 중동 평화를 위한 교회도 휴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는 내부적으로 표현 방식에 대해 이견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성 포르피리우스 정교회 옆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후,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영국 성공회 수장, 역자주)는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및 교회 수장들과 함께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했다.

성직자들은 마태복음 25: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을 인용하며, 구호 단체를 포함한 구호 기관에 필수 물자를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자선 기관에 대해 예배당에서 대피하라는 군부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적 임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웰비의 영국 교회는 약간 다른 성명을 발표했다.

이사야 2:4(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을 인용하며 즉각적인 인도주의적 “일시 휴전”을 촉구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했다.

국제 외교에서 의미론은 중요하며, 이러한 문구는 유엔을 분열시켰다.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안보리에서 한 번은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한 번은 러시아-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네 번이나 실패한 후, 총회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이며 인도주의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구속력 없는 세 번째 문구를 승인했다. 이 결의안은 120대 14의 표결로 통과되었다.

영국은 45개의 기권표 가운데 하나였다. 하마스 규탄에 대한 캐나다의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미국은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일지 휴전”을 지지했지만 “현재로서는” 휴전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비난 받지 않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왜 가자인들의 인도주의적 필요라는 한 가지 요구에만 집중하는가?” 유엔 대사가 되물었다.

가족 연구 위원회 토니 퍼킨스 회장은 이스라엘이 지상전을 시작할 준비가 되자마자 유엔 결의안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자 지구로 진격하는 것은 유엔과 전 세계 팔레스타인 동조자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필로스 프로젝트는 휴전이 “잘못된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하마스 헌장 13조를 인용하며 “원칙적으로 평화를 거부하는 당사자와는 평화 협상을 할 수 없습니다”고 밝혔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정당방위로 보복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죽어가고, 전 세계는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폭력적인 악순환이 계속될 것입니다. 하마스를 근절하는 것이 두 국가 해법을 향한 유일한 길이며, 휴전은 유혈 사태를 영속화 할 뿐입니다.”

하마스도 이를 인정한다.

“알 아크사 사태는 이번이 처음일 뿐이며, 우리에게는 싸울 의지와 결단력, 능력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충돌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정치국 위원 가지 하마드가 말했다. “대가를 치러야 할까요? 네, 우리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인용했다.

“평화를 위한 때와 전쟁을 위한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공동의 미래를 위한 전쟁의 시기입니다”라고 그는 전도서 3:8을 인용하며 말했다. “지금은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복음주의 공동 성명서의 유일한 직접적인 성경 언급은 사실 변절 선지자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중동을 위해 기도할 때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를 구합니다”며 “요나처럼 무감각해지고 모든 사람을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단절되지 않도록 말입니다”이라고 밝혔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 복음주의 연맹의 사무총장 잭 사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케냐의 동맹이 주도하는 아랍권 밖에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동맹들이 전 세계 청중 앞에서 “자신들의 이름과 증언을 분명히 하고 싶어 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전 세계적인 지지를 원했다.

사라는 WEA 내에서 합의를 모색하면서 이 단체의 공식적인 지지는 이스라엘의 동맹국들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WEA의 국제 변호 담당 이사인 자넷 엡 버킹엄은 “WEA는 이 지역의 국가 연합체들과 협력하여 우리가 처음 발표한 성명서에 뒤따를 공동 성명서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며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복음주의 연맹의 사무총장 대니 콥은 이 성명서에 “동의할 부분이 많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서명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공동 성명서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 성명서에 서명한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는 예레미야 6:14을 인용하며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싸매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말한다.

콥은 세 가지 이유로 이 성명서를 비판했다.

첫째, 이스라엘이 자국을 방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하마스가 인간 방패로 사용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 이스라엘을 비난한다. 셋째, 이스라엘이 피할 수 없는 불균형적인 사상자 비율에 대한 책임을 이스라엘에 전가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스라엘은 살상할 수 있는 ‘종합 면허’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폭력적인 무력”을 사용할 의무는 있다. 이 공동 계획이 이러한 우려 사항들을 해결했다면, 그는 기꺼이 참여할 의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공식화된 성명서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라고 콥은 말한다. “이는 도덕적이지도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대량 학살에 대한 평화주의자의 항복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사상자는 증가하고 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는 즉각적인 인도주의적 휴전이 이제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말했다. 150만 명에 육박하는 이재민이 발생했고, 병원의 3분의 1이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남부 지역의 우물과 담수처리 공장은 연료 부족으로 거의 멈췄다. 필립 라자리니 유엔 팔레스타인 구호기구 대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집단적 처벌”을 가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소수의 호송대”의 입국이 허용된다고 해서 200만 명의 필요를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리타스, 크리스천 에이드,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옥스팜과 같은 인도주의 단체들은 휴전을 지지했다. 월드비전은 “모든 당사자에게 필수적인 원조 전달을 긴급히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으며 ‘사마리아인의 지갑’은 “현재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은 불가능하다”면서도 이스라엘 당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나라에 많은 원조가 필요하지만, 복음주의 연합의 공동 성명서는 독자들의 관심을 다른 곳의 글로벌 이슈로 넓히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수단,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예멘, 우크라이나-러시아,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력 투쟁과 그 여파에 대해 상기시켰다.

“평화, 정의, 치유, 화해”를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군사적 증가와 민간인 폭격은 결코 평화를 촉진할 수 없습니다”라고 랄은 말한다. “묘지의 평화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일까요?”

인도의 복음주의 지도자는 평화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역사적 문제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동 성명서는 단순히 중동과 서구의 관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뛰어넘어”, 문화적, 지역적 고려를 포함하는 뉘앙스를 추구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복음주의자들은 분쟁을 이해하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공감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랄은 말한다. “이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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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는 분

믿음을 구체화하는 어려운 일.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1, 2023
Phil Schorr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이사야서 35:5-7

인간의 몸으로 살면서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질병, 장애나 학대와 같은 어려움은 우리 현실에 항상 존재하며, 우리의 주의를 온통 잡아끕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종종 어지럽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을 비하하며 우리의 주의를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는 메마른 영혼이 물을 찾을 수 있는 곳,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안식을 원합니다. 우리는 구조해달라고 부르짖으며 우리 안의 불의에 대한 복수를 꿈꾸기도 합니다. 거품이 일렁이는 샘물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라지만 발밑의 불타는 모래에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치유의 언어로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는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이지만 구속 받은 자들의 상처 입은 몸도 간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시온으로 노래하면서 올라가게 하고, 소망의 밝은 새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을 알면서도 불신의 길을 따라 방황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종종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에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다른 왕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합니다. 우리가 엉뚱한 사람에게 소망을 둔 것은 아닐까요?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나요? 우리는 구원이 오기를, 그리고 그 구원이 우리의 현실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를 갈망합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 11:4-5).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자이십니다. 그의 손에서 나오는 치유를 통해 그의 신성이 증거됩니다. 이스라엘은 영적, 육체적 아픔을 치유해 주실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희망은 아기의 탄생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기적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치유의 첫 신호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찢기고 연약한 모습으로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헌신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우리는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을 향한 기대의 눈을 들어봅니다. 이번 절기 동안, 우리는 “오 오소서, 임마누엘”을 부르며 고대 이스라엘의 소망을 되새길 것입니다. 이 예언이 우리의 현실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거룩한 길을 걸을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환희가 머리 위에 가득할 것이며 모든 슬픔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아기를 기억합니다. 그분은 잘못에 대한 신성한 보복과 우리의 상처에 대한 치유를 가져올 것이며, 우리는 온전해질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사 35:4).

묵상하기



이사야의 예언과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묵상할 때, 이 구절이 신체적 한계, 질병 또는 불의와 싸우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직면하는 시련과 도전을 넘어 굳건하고 강한 믿음을 유지하도록 서로를 어떻게 격려할 수 있을까요?

베카 브루더는 Comment 매거진의 편집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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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바꾼 회당 방문

우리의 불안함을 덜어주는 예수님의 도래.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1, 2023
Phil Schorr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4:18-21

얼마 전 제 친구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제 딸을 데리고 쇼핑몰에 갔습니다. 저는 아침부터 쉴 틈 없이 일하다가 딸을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제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쇼핑몰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어요. 아내와 통화했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무사하지만 갇혀서 나올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저는 정신없이 급하게 쇼핑몰에 도착했고, 긴박한 마음에 현기증이 났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기다림을 해야만 했습니다. 경찰의 현 상황에 대해 보고를 기다렸고, 친구와 통화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딸을 품에 안고,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딸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그 시간을 견디며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나 전쟁, 질병, 부패, 폭력을 마주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긴박한 두려움이 우리를 급습합니다.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데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저는 고대 유대인 공동체가 구원과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지 400년이 지났고, 그들은 엄청난 억압과 참혹한 식민 생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으신 건 아닌지, 구세주가 정말 오실지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라는 사람이 회당에 들어와 이사야 선지자의 두루마리를 읽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18-19, 새번역)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청중들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를 알려주시는 데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는 청중들의 입이 딱 벌어질 만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오늘 이루어졌다”(21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안내하는 공식적인 선포입니다. 그분을 따를 때 우리는 더는 세상의 나쁜 소식에 절망하며 살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쇼핑몰에서 딸을 기다리던 날처럼 우리 삶에서 끔찍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시겠다는 약속 위에 설 수 있습니다. 마침내 딸의 얼굴을 보고 딸을 끌어안았을 때, 제가 느낀 안도감과 기쁨은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왕이 여기 계시며 영원한 희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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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긴박한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이나 소망을 기다리며 갈망했던 본인의 경험이 상기되나요?

예수님이 이사야를 통해 메시아의 성취를 선포하셨을 때, 이미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를 따르는 우리에게 이 선포는 세상의 도전과 어둠 속에서 어떻게 소망 가운데 행동할 힘을 주나요?

크리스텔 에이스베도는 작가이자 성경 교사이며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외곽에 위치한 Transformation 교회의 영성 담당 디렉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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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던 약속

시므온의 오랜 기다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1, 2023
Phil Schorr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누가복음 2:25-26

대기실에서 기다려 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겁니다. 저는 몇 주 전에 병원에 갔을 때 대기실에 있었는데 그 공간은 밝고 따뜻하며 편안했습니다. 접수 후, 쌓여 있는 잡지를 읽거나 텔레비전으로 쇼를 보거나 휴대전화로 소셜 미디어를 살펴보고,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기다림은 의무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대기실에 있는 그 누구도 이 상황을 피할 수 없었고, 대기 시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길어졌습니다. 우리는 인생이 우리의 계획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종종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가 만든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 초조해집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과 약속이 잡혀 있는데 달력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면 어떨까요? 만왕의 왕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날짜나 시간은 알려주지 않고 죽기 전 ‘언젠가’라는 말만 들었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시므온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눅 2:25-26).

이처럼 대기한다고 생각해 보면 어떠신가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오늘일까’ 궁금해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성령께서 계시하신 약속은 분명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온도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근원인 그분을 기다리는 일의 무게를 느낀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알지만 기다리는 시간 동안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야 하는 불안감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저는 시므온의 헌신이 계획 그 자체보다 계획을 세운 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시간이나 세부 사항에 관해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 약속을 신성한 주권의 영역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 모든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약속하신 분이 말씀하신 대로 완벽한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딤후 4:8)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시기에 시므온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저도 시므온처럼 왕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그날에 우리는 증인으로 합류하여 우리의 구원을 직접 대면하고 평화롭게 떠날 것입니다(계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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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오늘 만왕의 왕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우리 삶에서 그분의 약속에 대해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2. 시므온의 헌신은 계획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계획을 세운 분에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확신이 있습니까?

몬티 월드론은 결혼하여 슬하에 네 자녀가 있으며 2000년에 Fellowship Bible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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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끈질긴 사랑

우리가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돌보십니다.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1, 2023
Phil Schorr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 7:10-14

저는 매일 어린 아들에게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줍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아들이 걱정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들도 학교 총격 사건, 폭동, 팬데믹, 정치적 긴장에 관한 뉴스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두려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들에게 자주 “킹스턴, 넌 사랑받고 있어. 우린 안전해. 네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단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제 아들도 이 사실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고된 세상에서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사야 7장 10-14절에는 임박한 정치적 위험과 분쟁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 왕이 등장합니다. 적들이 유다 나라를 향해 바짝 다가오고 있고, 아하스의 마음속에는 다른 곳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우상을 숭배했고, 심지어 아들을 제물로 바칠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왕하 16장).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하스가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주의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사 10-11장).

하나님께서 유다 왕을 끈질기게 살피신 것은 아하스의 회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인 것처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임시적인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방식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거부하는 아하스에게도 이사야는 한 가지 표징을 줍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사 7:14).

놀라운 구원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도래할 것입니다. 소망은 이제 여기에 있습니다(마 1:20-22). 하나님은 우리의 혼란과 다가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은 순간적이며,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을 주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듣고 믿으라고 간청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앙 속에서도 이것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저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처럼 아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다독여 주었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의 소망이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이 시기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들 위에 끊임없이 풍성하게 임하십니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사 66:13)라고 약속하신 그분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대속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위대한 이정표 된 자기 죽음을 대가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하신 왕이십니다. 오늘날에도 아하스처럼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 있고, 그분의 임재가 여러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약속이 여러분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묵상하기



아하스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을 끈질기게 살피시며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나요? 우리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소망과 위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알렉산드라 후버는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 연사, 사역 리더이자 베스트셀러 Eyes Up: How to Trust God’s Heart by Tracing His Hand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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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통치자에 대한 예언

권력의 완전성에 대한 놀라운 약속.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1, 2023
Phil Schorr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예레미야서 23:5-6

예레미야는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앞에 나타난 예언자였습니다. 오랫동안 탐욕과 우상 숭배, 불의로 가득 찬 사악한 왕들이 유다를 통치해 왔습니다. 당시 왕들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억압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왕들에게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라고 권유했습니다. 또한, 주변 국가들을 본받지 말고 분별 되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을 열방에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왕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죄를 지었고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혼돈의 시기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부적절함과 실패를 지적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최종적인 권위가 아니라 오직 한 분, 진정한 주권자로부터 나온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의 범죄 혐의를 제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왕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돌보도록 임명된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23장 5-6절에서 예언자는 놀라운 약속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국의 신정 체제를 없애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가문에서 왕위를 계승할 정당한 상속자인 “의로운 가지”를 세우실 것이다. 이 왕은 유다의 왕들이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하는 길로 나라를 이끌 것이다. 그의 통치 아래, 백성들은 번영할 것이고,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이 왕은 모든 압제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왕은 인간 왕이 아닙니다. 이 왕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소망으로 가득 찬 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끝날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유다의 왕들을 근본적인 문제, 즉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통치 아래서 더이상 죄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악을 처벌하며 모두를 평등하게 하실 것입니다. 인류는 공의로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의를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방해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샬롬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을 돌보지 않고 탐욕과 우상 숭배, 불의를 선택하는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적 혼란의 무게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픔을 보셨던 것처럼 우리의 아픔도 보실 것이며, 약속하신 메시아의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을 축하하며 아울러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우리에게는 “의로우신 주님”의 통치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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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들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반영하는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점들을 알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 삶과 영향력 부분에서 어떤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의로운 가지”로서의 예수님의 통치는 어떻게 샬롬의 회복과 죄의 패배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엘리자베스 우드슨은 성경 교사, 신학자, 작가이자 신자들이 신앙을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인 Woodson Institute의 설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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