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나는 그분

2022년 12월 17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7,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1:1-18

사도 요한은 그의 좋은 친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설명을 활력과 경이로움을 담아 서문에 담습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생명 그 자체이며 그 생명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 후 5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적어도 제가 가진 2011년 판 NIV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가진 NIV 이전 번역(1984년 판)은 다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나,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리스 단어로 “이기다(overcome)”와 “깨닫다(understood)”로 번갈아 번역되는 의미의 카탈람바노(katalambanó)는 “붙잡다” 또는 “납득하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바의 핵심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영어 단어가 필요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분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는 그분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는 그분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견뎌내고 다시 살아난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빛을 영원히 붙잡거나 물리칠 수 있는 어둠이 이 우주에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자기 계획대로 내버려 둔다면 성육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에서 드러난 사랑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압니다. 어둠은 빛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하나님의 빛나는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한 숨 막히는 묵상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기록합니다. 메시지 성경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 이웃으로 오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연약한 인간 아기의 형태로 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이 자신을 죄와 혼돈의 세계에 태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안을 수 있고, 상처 입을 수 있고, 입을 맞출 수 있고, 죽을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오직 세상의 빛만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작할 능력을 주십니다. 따라서 이번 대림절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유한 기도를 함께 드립시다.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에베소서 3:18).

캐롤린 아렌즈(Carolyn Arends) 레코딩 아티스트이자 작가이며 education for Renovaré의 책임자이며, 최근 In the Morning이라는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요한복음 1:1-18을 묵상하십시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점을 강조하나요? 예수님의 세상의 빛 되심에 대해? 성육신에 대해? 어떤 질문, 생각 또는 느낌이 드나요? 기도로 하나님에 대한 반응을 표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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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월드컵에서 선보인 기독교인 선수들과 그들의 활동들

선수들과 감독들, 팬들의 영웅적이며 선한 활동들을 기억하며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6, 2022
AP 통신

수백만의 기독교인들이 세 번째 대림 주일을 보내는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은 스크린 앞에서 긴장하며 아르헨티나 GOAT(the Greatest Of All Time) 메시가 마침내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35세의 주장 리오넬 메시(Lionel Messi)는 7골 4도움의 탁월한 모습을 선보이며 그의 다섯 번째 월드컵에서 드디어 골든볼을 수상했다.

오른팔에 가시관을 쓴 예수의 문신을 새긴 메시가 골을 넣은 뒤, 하늘을 가리킬 정도로만 세리머니를 하며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는 기독교 선수들의 귀한 고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프랑스의 자유분방한 공격을 이끈 선수는 오른팔에 라틴어로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문신을 새긴 36살의 스트라이커 올리비에 지루(Olivier Giroud)였다. 이번 월드컵에서 그는 멋진 네 골을 넣으며 프랑스 역대 월드컵 최다득점자가 되었다.

팀의 부적과도 같은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é)가 맹렬한 스피드와 치명적인 슈팅으로 사기 캐릭터 수준의 실력을 드러내는 동안, 지루는 공격에서 듬직한 구심점 역할을 했고, 그의 이타적인 플레이는 동료들에게 많은 찬스를 만들어주었다. “저는 가능할 때마다 제 믿음에 대해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라고 2018 월드컵에서 우승한 후 그는 말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저의 헌신을 알리기 위해 대중매체의 인지도를 활용해야 함을 느낍니다.”

런던의 두 팀에서 활동한 지난 10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지루는 영국 국교회 가운데 복음주의 계열에 속한 켄싱턴의 성바나바(St.Barnabas) 교회에 출석했다. 그가 헤딩골을 넣어 프랑스의 2대1 승리를 견인한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그는 기독교 은혜의 신앙에 충실한 잉글랜드 신세대 윙어들을 상대했다.

각각 세 골을 넣은 마커스 래쉬포드(Marcus Rashford)와 부카요 사카(Bukayo Saka)는 카타르의 빛나는 별들이었다. 그 둘은 블랙 오순절 교회(Black Pentecostal church)에서 양육 받았고, 25살의 래쉬포드는 이미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이자 노숙자에 대한 자선가로 유명하다. 21세의 사카는 ‘올해의 잉글랜드 남자 선수상’을 수상한 후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으며, “평화와 행복” 을 얻기 위해 매일 밤 성경을 읽는다고 밝혔다. 비록 래시포드와 사카는 유로 2020 결승전에서 페널티킥을 놓친 후 온라인에서 인종차별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두 선수 모두 그들의 회복력과 영국 선수단 안에서 건전한 동료애를 함양했다는 점에 대해서 찬사를 받았다.

잉글랜드는 조별 예선에서 미국 남자 국가대표팀을 만났는데, 목회자의 아들 워커 짐머만이 이끄는 굳건한 미국 수비는 절대 약세로 여겨지던 그들에게 약자들에게 강한 잉글랜드를 상대로 0대0이라는 괄목할만한 무승부를 안겨주었다. 한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연습장에 나서곤 한 조지아주 출신의 짐머만은 후방의 우뚝 솟은 리더이자 총기 규제와 인종 및 성 평등, 특히 미국 여자 국가대표팀의 동등한 임금을 위한 옹호자로 활동하고 있다.

짐머만에게는 동료 신자인 “캡틴 아메리카” 풀리식(Pulisic)이 있는데, 그는 이란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상대 골키퍼와 충돌 후 복부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결승골을 넣어 미국 국가대표팀을 16강 토너먼트 무대로 이끌었다. 풀리식은 지난해 GQ와의 인터뷰에서 첼시 FC로의 7300만 달러짜리 이적이 포지션 경쟁과 부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그는 시편 147:11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필드의 반대편 있던 브라질의 주전 골키퍼 알리송 베케르(Alisson Becker)는 놀라운 선방들을 펼치며 네 경기에서 단 두 골만을 허용하고 두 개의 무실점 경기를 만들어냈다. 비록 8강전에서 117분에 크로아티아의 공격이 우승 후보인 그들을 탈락시켰지만, 알리송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믿음을 가진 형제들이 있는 리버풀 FC로 복귀할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 위르겐 클롭(Jürgen Klopp)은 자신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크리스천이고, 알리송은 그의 집 수영장에서 자신의 팀 동료 로베르토 피르미누(Robert Firmino)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심지어 그들의 팀 동료인 버질 반 다이크(Virgil van Dijk)는 리버풀의 힐송 교회에 다니는 알리송을 “거룩한 골키퍼”라고 부른다.

8강 탈락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퇴임하는 브라질의 감독 티테(Tite)는 그의 팀이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남겼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티테는 로스터에 등록된 26명의 선수들 모두에게 카타르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브라질이 한국을 4대1로 격파하며 넣은 많은 골들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선수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2018년 월드컵 당시, 그는 러시아에서 미사에 참석했으며, 훈련하는 동안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독실한 팀은 에콰도르였을 것이다.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하루 전, 미드필더 카를로스 그루에조(Carlos Gruezo)는 그와 그의 팀이 기도하는 영상을 공유했다. 그는 자막에 “오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썼다. “주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우리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바칩니다.”

https://www.instagram.com/p/ClLWSLJvyvb/

그루에조의 팀 동료 에네르 발렌시아(Enner Valencia)가 개최국 카타르와의 월드컵 개막전에서 패널티킥을 성공시킨 뒤, 그와 그의 팀 동료들은 원을 만들고 무릎을 꿇은 후 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근래 월드컵들에서 많은 사람들은 유럽 팀들의 지배력 약화를 바랐기 때문에, 모로코의 왈리드 레그라귀(Walid Regragui) 감독이 아랍과 아프리카 국가들 중 최초로 자신의 나라를 준결승으로 이끈 것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의 신앙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는 카타르에서 무료로 지낼 수 있도록 선수들의 가족을 초대함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성경적 의무를 확실히 실천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는 모로코가 벨기에를 상대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뒤, 모로코의 오른쪽 수비수 아흐라프 하키미(Achraf Hakimi)가 관중석의 어머니에게 입맞춤을 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성공은 부모님의 행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레그라귀는 말했다.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 모로코의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팬들의 반열에 올랐지만, 가장 사랑받은 사람들은 일본 팬들이었다. 독일과 스페인에게 역전승을 거두고 나서 파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경기장을 청소하는 장면은 널리 퍼졌고 유사한 청소 행위를 이끌었다. 일본 대표팀(Samurai Blues)도 매 경기 후 그들의 라커룸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웠고, 이는 FIFA의 찬사를 받았다.

카타르 월드컵은 경기장을 건설한 수십만의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것은 종종 그들에게 상당한 댓가 지불을 안겼다. 2010년부터 카타르에서는 2,000명 이상의 네팔 노동자들이 폭염과 잔혹한 환경 속에서 지나치게 웅장한 경기장을 건설하던 중 사망했다. 그들의 가족이 부채와 빈곤에 계속 빠져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남은 생애 동안 만성적인 고통을 겪을 것이다.

2014년 월드컵 우승국의 일원이자 기독교인인 전 독일 주장 필립 람(Philipp Lahm)은 카타르 방문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 “그들[이주 노동자들]의 죽음은 묵인되고 필요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가족은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월드컵 기간 중 세상을 떠난 미국의 축구 기자 그랜트 월(Grant Wahl)의 마지막 말 중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통렬히 질책하는 것도 있었다.

“그들은 단지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라며, 대회 도중 팀 훈련 리조트 중 한 곳에서 발생한 다른 이주 노동자의 죽음을 그는 언급했다.

메시의 승리를 축하한 후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아마도 잠시 멈춰 월의 고발이 우리에게 적용되지는 않을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J. Y. Lee는 프린스턴 신학교 박사 과정 학생이자,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부터 프리랜스 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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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나 계신 그리스도

2022년 12월 16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6,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고린도후서 4:4-6, 에베소서 1:15-23; 5:8-11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뒤에는 빛을 뿜어내는 불이 있는 벽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뒤에 있는 인형과 움직이는 물체가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그림자가 실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밝은 햇빛이 비치는 바깥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대해 말해줘도 여전히 동굴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4).”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날 때 우리는 빛의 자녀, 빛을 받는 세상의 자녀가 됩니다(에베소서 5:8).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비추시어 그의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올바른 시각에 두십니다. 그 결과 교회와 함께, 교인들은 개별적으로 선과 악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 아름다움, 선함, 진리의 세부 사항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자랍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샬롬의 빛을 경험하기 위해, 즉 제대로 보고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은 빛의 열매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열매는 “선함, 의 그리고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우리 삶과 세상에서 점점 더 그분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수천 가지 방법으로, 때로는 예기치 않았던 모든 장소에서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봅니다. 우리는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존재하는 선과 의로움,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덕목이 우리 각자의 삶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 마음 가운데 밝혀 주시는 그 지식은 우리 마음을 넘치는 기쁨과 영원한 소망으로 충만케 합니다 (에베소서 1:8). 우리가 성령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능력”이 바로 현재에 대한 소망입니다 (1:19). 이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영원히 계신다는 지식으로 더욱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광스러운 유산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습니다.

실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깊은 수준에서 악이 가짜, 즉 그림자 세계라는 것을 압니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가 그의 시 <물총새에 불이 붙듯>에서 묘사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수만 곳을 다니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빛입니다.

말레나 그레이브스(Marlena Graves) 노스이스턴 신학교의 영성 형성 교수이자 The Way Up Is Down 외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

고린도후서 4:4-6, 에베소서 1:15-23; 5:8-11을 묵상하십시오.
본문은 영적 비춤이 어떤 모습인지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일깨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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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불러내심

2022년 12월 15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5,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고린도전서 1:9-14, 베드로전서 2:9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우리는 나쁜 일들이 주로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적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 열매 없는 행실과 경건치 아니함과 악이 거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에베소서 5:8-12). 우리가 흑암의 지배 아래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1:5-7).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으로 인해 눈먼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빛에 거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합당한 길을 걷기 위해 힘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은 위대한 유산에 감사하며 경건하게 그 길을 걷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심으로, 낮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3). 하나님은 또한 우리 각자의 삶에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우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는 우리 마음에 있는 복음의 빛을 가리킵니다(고린도후서 4:6). 세상의 빛이 친히 이 세상의 어둠, 우리 마음의 어둠 속으로 내려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셨고, 우리를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업적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 빛에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빛의 나라 시민으로서 우리는 구속과 용서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합니다. 한때 어둠에 속했던 우리를 자신의 귀중한 소유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것이 되어 그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낼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가족의 아름다운 다양성 안에서 그를 찬양하면서 민족적 차이를 포용하고 초월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사장의 완전한 특권과 축복, 즉 하나님의 존재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기 위해 한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하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히브리서 10:20). 그분은 그의 임재를 항상 기뻐할 한 사람, 즉, 하나님께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제물을 바칠 때 그의 찬양을 선포할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번 대림절에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고, 그의 놀라운 빛으로 부르셔서 아들 안에서 그의 찬양을 선포하게 하신 약속된 분을 축하합시다.

크리스티 안야빌(Kristie Anyabwile) Literarily: How Understanding Bible Genres Transforms Bible Study의 저자이자 His Testimonies, My Heritage의 편집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9-14, 베드로전서 2:9을 묵상하십시오.


빛의 왕국의 일원으로 산다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빛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떻게 이해와 목적을 가져다 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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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자유의 빛

2022년 12월 14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4,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마도 여러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이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틀림없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지만 홀로 떨어져 있는 문장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에 있는 나머지 구절은 훨씬 덜 화려하지만, 우리에게 진지하고 희망적인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3:19, 21).”

인간의 경험은 어둠에 대한 사랑과 빛에 대한 필요가 모순적으로 섞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은 단지 죄 많은 대중들 사이 즉 저기에서만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여기, 즉 나와 여러분의 마음, 생각, 영혼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보편적인 긴장을 적절하게 묘사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서 7:15).” 우리 모두 거기 있었거나, 지금도 있을지 모릅니다.

빛은 노출하면서도 조명하기에 공포와 자유로움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제 1원칙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속기 쉬운 사람 역시 자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옳았다면 (전 그가 옳았다고 믿습니다) 이 무섭고도 자유로운 빛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빛입니다. 이 빛은 인간사의 시작부터 우리를 괴롭힌 우리의 교만을 노출하고 수치심을 조명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이 땅이 가져야 할 선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창세기 3:5)” 될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필연적으로 어디로 이어질까요? 바로 ‘수치심’을 향해 직진합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3:10)라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교만과 수치심의 어두움에서 우리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이 빛은 우리는 용서받았고, 받아들여졌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빛은 타락으로 인한 재앙을 되돌리고, 우리가 속할 수 있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제이 Y. 킴 (Jay Y. Kim) 웨스트게이트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Analog ChurchAnalog Christian의 저자이며, 가족과 함께 실리콘밸리에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2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빛은 왜 두렵나요? 그리고 어떻게 자유를 가져다주나요? 더 넓은 맥락에서 16절을 보면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목적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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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으로 인도하는 빛

2022년 12월 13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3,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8:12

19세기의 영국 화가 J.M.W. 터너는 ‘빛의 화가’로 유명합니다. <눈보라(Snow Storm)>, <서리가 내린 아침(Frosty Morning)>,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바다 위의 어부들(Fishermen at Sea)>과 같은 작품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터너가 물감뿐만 아니라 불꽃으로도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목사이자 예술가인 마이클 밀턴은 “감상자로 하여금 의미를 찾도록 인도하는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거장의 작품에서 빛은 끝이 아니라 희망, 아름다움, 의미 그 자체로의 초대입니다.

대림절 기간의 추운 저녁에 우리 동네를 걷다 보면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에 눈이 부십니다. 나이가 들면서 미묘한 냉소주의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던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두 어린 자녀들의 관점으로 아이들을 보면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제 속에서 깨어남을 느꼈습니다. 바로 갈망입니다. 빛은 그 빛을 펼치기 직전에, 어둠 뒤에 가려진 채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생명력을 내뿜고 있기에 경이롭습니다.

요한복음 8:12의 “예수께서 다시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시적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은유만이 아닙니다. 이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기에 자신을 빛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어둠 뒤에 가려진, 더 중요하게는 우리를 그 빛으로 인도하려는 자신의 능력과 의지에 대한, 대담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출애굽을 기념하는 일주일 동안의 유대인 축제인 초막절 기간 동안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광야의 긴 여정 동안 야웨는 백성에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출애굽기 13:21-22, 40:38).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해 초막절 기간 동안 성전 뜰에는 출애굽 때의 두 불꽃 기둥을 상징하는 75피트(약 23m) 높이의 기둥 두 개 위에 두 불꽃이 켜져 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성전 뜰 두 기둥 빛 아래 서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절망,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실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는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불안감, 우리의 불확실성의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위대한 빛이시며 우리를 안전한 본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제이 Y. 킴 (Jay Y. Kim) 웨스트게이트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Analog ChurchAnalog Christian의 저자이며, 가족과 함께 실리콘밸리에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12, 9:5, 12:46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최초의 청자들이 가졌을 궁금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막절의 맥락은 그분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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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사랑

2022년 12월 12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2,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이사야 42:1-14, 49:1-15, 60:1-3

우리 모두는 깊은 밤 어둠 속에서 깨어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은 우리가 주변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빛을 움켜잡고 있는 순간입니다. 아마도 저처럼 여러분도 어둠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둠은 공간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두려움이 될 수 있지만, 반면에 빛은 우리를 안전으로 인도합니다. 특히 전등이 발명되기 전에는 어둠은 사람이 적이나 위험한 동물의 공격을 받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에서 이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종을 묘사할 때 빛이 안전과 구원에 대한 강력한 은유가 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 9:5))으로 묘사한 것을 봅니다. 이사야 42, 49, 60장에서도 하나님의 종을 반복적으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빛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을 묘사하면서 두 가지 개념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온 세상 구원’과 ‘하나님의 깊은 친밀감’입니다. 이 종은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것입니다. 태양 빛이 끝에서 끝까지 닿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은 모든 민족, 모든 지파, 모든 족속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것입니다(이사야 42:6, 49:6, 60:3). 이 구원은 다 민족적, 다 문화적이며 모든 인류에게 유효합니다.

다른 한편, 이사야가 구원, 즉 종의 전 세계적 빛을 묘사할 때 이 광대한 비전은 하나님의 깊은 친밀감에 기반을 둡니다. 하나님은 종이 모친의 복중에 있을 때부터 종으로 삼으시고(49:5),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일하시며(42:14), 자기 젖먹이를 기억하는 어머니와 같이 자기 백성을 기억하십니다(49:15).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온 세상의 구원과 개인적인 친밀함이 결합한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리는 빛을 가져오신 분입니다(42:6). 이 빛은 포로 된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42:7), 나라와 왕들을 어둠에서 예수님의 빛으로 이끌어줍니다(60:2-3).

예수님의 빛은 또한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석방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에게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희망을 줍니다(42:7). 이 빛은 전 세계의 광활한 공간을 비추기도 하고, 각자의 가정의 가장 작은 틈새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림절 기간 동안 기다리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일깨워주는, 전 세계를 비추고 격려하는 빛이며, 각자의 삶에서 빛나는 촛불입니다.

베스 스토벨(Beth Stovell) 앰브로즈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며, Theodicy and Hope in the Book of the Twelve의 공동 편집자이자 곧 출간되는 논평 Minor Prophets I & II의 저자입니다.

이사야 42:1-14, 49:1-15, 60:1-3을 묵상하십시오


본문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빛의 세계적 특성을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빛의 친밀함은 어떤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까? 이 두 가지 개념을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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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비쳤다

2022년 12월 11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1, 2022
Stephen Crotts

셋째 주: 세상의 빛


성경은 ‘약속된 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둠과 빛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이 예언된 빛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신령한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빛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이사야 8:21-9:7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어둠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한겨울에 비추는 하루 가운데 단 몇 시간의 햇빛은 길고 힘든 밤으로 빠르게 자리를 내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인위적인 가로등 불빛 아래 눈 덮인 차도를 삽으로 파야 하는 불편함을 넘어섰습니다. 빛이 사라지자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알래스카의 긴 겨울은 고립, 우울, 그리고 때로는 절망을 낳았습니다. 어둠 속에는 어떤 비전도 방향도 목적도 없습니다.

이사야 8장은 이스라엘이 어둠에 익숙했던 시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 세계의 초대강국인 앗수르의 침략 위협 아래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음모에 가담하며… 신접한 자와 무당에게 물어보았고(이사야 9:12,19)”, 이것은 그들을 짙은 어둠 속으로 더 깊게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이사야는 이 고난 가운데서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고 선언합니다. 어둠에서 탈출하려는 자신들의 헛된 시도가 무색하게 빛이 그들을 비추었습니다. 이 빛은 무엇입니까? 완전한 어둠 속에서 누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이 아이는 앗수르 군대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바로 아이는 다릅니다. 이 아들은 장성하여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는 왕이 될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왕좌에서 통치할 것이지만, 그의 왕국은 땅끝까지 확장될 것이며 영원토록 세워질 것입니다. 이 기름 부음 받은 아이를 통해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칠 뿐만 아니라, 빛이 어둠을 이길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수백 년 후 또 다른 초강대국의 위협 아래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이 여전히 완전한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동안 복음의 빛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납니다. 이 왕은 은혜로 다스리고 사랑으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왕국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알래스카의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아직 알래스카의 여름에 관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알래스카의 한여름에는 24시간 동안 햇빛이 있습니다. 그곳에 어둠은 없습니다. 완전한 빛, 큰 기쁨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시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 세계에서는 “다시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하지 않을 것(요한계시록 22:5)”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걸으며 그리스도 왕국의 완전한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레미 트리트(Jeremy Treat) Reality LA의 목사이자 바이올라 대학의 겸임교수이며, Seek Firstand The Crucified King의 저자입니다.

이사야 8:21-9:7을 묵상하십시오.


이 위대한 약속의 역사적 배경은 당신의 본문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이 배경은 당신의 오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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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의 평화

2022년 12월 10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0,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요한복음 14:27, 16:33; 에베소서 2:14-18

두 가지 진리가 충돌할 수 있지만, 만약 둘 다 진리라면, 우리는 둘 다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은 진짜배기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경고한 바와 같이,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뒤틀어 놓습니다.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좋은 말로 하면 순진한 것이며, 나쁜 말로 하면 완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어려움에 대해 거짓말 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싸구려거나 하찮은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지식과 우주를 바꾸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분만이 이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완전하고 참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평화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우리의 파괴된 세상에 침투하여, 고대 예언자들의 소망을 이루는 새롭게 된 세상을 시작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몸으로” 죄인과 하나님 사이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 하늘과 땅 사이의 “둘로 가르는 적대의 벽”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골로새서 1:15-22).

그리고 이 두 가지 진실은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심리적인 면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심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고 치유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생명 안에 우리를 감싸 안으심으로서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캄캄한 밤 즉 혼란과 의심과 혼돈이 소용돌이 칠 때도 예수님은 여전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깨어짐을 고통스럽고 문제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샬롬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샬롬은 조화, 선함과 번영의 세상을 가져오는 반면, 우리는 전쟁, 배신 그리고 숨 막히는 자기 몰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역과 혼돈에 대한 대응으로, 예수님은 그의 평화, 그의 샬롬을 가져오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분은 우리의 샬롬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따라서 세상의 소망이십니다.

이것이 진짜 문제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를 가지는 방법입니다. 우리 세상 너머에서 오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의 평화로 주셨습니다. 온전한 신이시며, 온전한 사람이신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널뛰는 감정과 상황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고통과 어려운 문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선하심과 임재에 대해 거짓말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어려움 와중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며, 우리에게 피난처, 힘과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그의 평화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4

켈리 M. 캐픽(Kelly M. Kapic) Covenant College의 신학자이며, Embodied HopeYou’re Only Human 등 여러 책의 저자 또는 편집자입니다.

요한복음 14:27; 16:33, 에베소서 2:14-1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은 진짜 어려운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전 생애를 통하여 당신의 구체적인 평화가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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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기 위해 태어나셨다

2022년 12월 9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9,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52:13–53:12

우리가 지금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역시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대치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 나오는 이 네 번째 종의 노래는 출생 선포라기보다 추도사에 더 가깝습니다. 이 구절은 오실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분을 말합니다. 종의 일대기의 각 부분은 뚜렷한 목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노래는 약속된 종의 승리와 높여지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리고 노래의 중간 부분은 그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 구체화적으로 말하는데, 한 마디로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육체적으로 그 종은 상하고 찔리고 짓밟히고 훼손될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그의 영혼은 슬픔과 고통과 고뇌로 짓눌릴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그는 거부당하고 멸시를 받고 압제를 당할 것입니다. 그의 몸과 영과 관계 모두 깨어질 것입니다. 이 측량할 수 없지만 부럽지도 않은 삶은 짧게 언급되고, 저평가되고, 보독을 당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를 상하게 하고, 고통받게 한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무슨 목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그 형벌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슬픔에 잠긴 어깨는 세상의 슬픔을 짊어지는 것이며,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책감을 제거할 것이며, 그가 맞은 채찍은 우리의 치유를 가져올 것이며, 그가 배척당하고 재판받은 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메시아적 예언으로서의 이 노래들은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제물을 바칠 예비된 왕-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 빌립과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이 노래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빌립은 이 구절을 사용하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사도행전 8:26-40). 베드로는 이 노래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다 핍박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고난의 길을 구주께서 먼저 잘 걸어가셨기에 그들도 잘 견딜 것을 권면합니다(베드로전서 2:22-24).

우리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이 구절은 우리 마음 가운데 불러낼 수 있는 평온하고 목가적인 평화의 이미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예수님에 대한 끔찍한 폭력, 즉 그분을 평생 동안 슬픔과 오해와 거절을 당하도록 한 그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고통이 우리의 캐롤 속의 아기가 가져온,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평화입니다.

그의 부모가 포근하게 안고 있는 아기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는 이 종의 노래의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 즉 아버지가 아들을 일찌감치 죽음으로 내모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대부분의 인간 부모가 자녀들의 밝은 미래를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에 반해,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살리기 위해 사랑이 이끄는 죽음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이 노래는 고난을 받도록 보냄 받은 종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심지어 한 사람의 죽음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리시아 아킨스(Alicia Akins)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리폼드신학교에서 성서학을 전공 중인 신학생이며, Invitations to Abundance의 저자입니다.

이사야 52:13–53:12과 이사야 50:4-9을 묵상하십시오.


여기에 묘사된 고통은 평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어떻게 대조됩니까? 어떻게 당신의 비전을 변화시키거나 풍요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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