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희년 소망

2022년 12월 8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8,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61:1-4과 누가복음 4:16-21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언하게 하셨다. 이사야 61:1-2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펴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실 때, 그분의 청중들은 약속된 분, 곧 공의와 자유를 가져올 평화의 왕을 여러 세대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전쟁, 계속된 제국의 점령, 그리고 믿음 가운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방향을 잡으려던 그들을 엉뚱한 길로 인도한 문화적 변혁을 보았습니다.

우리 역시 지정학적 혼돈, 폭력,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죽음과 통곡이 있는 곳에 최후의 부활과 회복을 가져다 주실 평강의 왕이 그의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갈망으로 채웁니다.

이사야 61:1-4은 빚으로 인해 노예로 팔려간 백성들과 토지의 회복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명령을 담은 레위기 25장의 희년을 언급합니다. 빚으로 인한 노예가 풀려나고, 집과 땅이 회복되는 희년은 주님의 은혜의 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딸과 아들이 회복되어 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61장은 하나님의 복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는 자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과 분열을 주러 왔다고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들 수 있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34-36).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사야가 평화의 왕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샬롬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폭력이나 악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선한 삶의 충만함 즉,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번영하게 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매주의 안식일은 쉼과 샬롬으로 일상의 리듬을 깨는 것이며, 희년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입니다. 희년은 샬롬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희년 샬롬의 도래를 선언하실 때, 그는 죽음 이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말한 것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금전적, 영적 부채의 노예 상태로부터 이생과 그 이후를 포괄하는 자유와 회복이라는 구원의 도래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는 십자가의 서곡 그 이상입니다. 오히려 그의 탄생, 그의 생애, 십자가, 그리고 부활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구원과 공급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역경과 전쟁, 정치적 혼란, 방황에 맞서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동적인 소망의 일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부름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어둠 속에서 희년을 시작하셨고,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희년 왕국에서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살아계시면서 자신의 부활의 능력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나기를 적극적으로 사모하고, 소망하며, 기다리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라 신(Sarah Shin)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에서 체계신학 박사 과정을 하고 있는 신학생이자 Beyond Colorblind: Redeeming Our Ethnic Journey의 저자입니다.

이사야 61:1-4, 누가복음 4:16-21, 레위기 25장을 묵상하십시오.


희년이라는 개념이 당신의 이사야 예언을 읽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 자신을 그 성취로 정의하신 것에 대해, 평화의 왕으로서의 예수님 이해에 대해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예수님의 치유의 평화

2022년 12월 7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7,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42:1-4, 마태복음 12:15-21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사야와 마태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이사야 42:1-4절을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할 때, 우리는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단어인 샬롬의 이미지를 봅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로의 평화라는 우리의 좁은 이해와 달리, 샬롬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을 바르게 만드시는 방법에 대한 넓은 계획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 샬롬은 혼돈에서 질서를, 불의한 곳에 정의를 가져다주는 평화입니다.

이사야 42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나의 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종의 노래들이라 부르는 것 중 첫 번째 노래입니다. 종의 노래의 다른 부분은 49:1–6, 50:4–9 그리고 52:13–53:12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들은 하나님의 종이 땅 끝까지 구원을 행하고(42, 49, 50장) 종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52-53장)를 전합니다.

여기 42:1-4에서 종은 하나님이 붙드시고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이 종은 하나님께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종 위에 머무셔서, 그는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풉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성령 충만한 종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선택받은 지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자랑스러워할 것으로 기대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겸손이 그의 특징입니다. 그는 거리에서 외치지 않고, 대신 상처 받은 사람들을 돌봅니다. 그는 갈대가 상한 것 즉 사람이 짓밟힌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갈대가 꺾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분입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촛불과 같은 사람을 안으시고, 그들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가까스로 버티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종의 정의에 대한 추구는 온유함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넘어지게 두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예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잠잠할 것을 당부하심으로(16절)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체 장을 보면, 마태는 뭔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으로서의 예수님은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15-21절 전후 맥락에서, 강조점은 예수께서 어떻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고(1-14절), 어떻게 “모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15절), 어떻게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치셔서 말을 하게 하고 보게 하셨는지”(22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우리의 가장 연약한 곳에서 우리를 만나서, 불의를 정의로 바꾸시고, 상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그의 사랑의 만져주심 즉 온유함으로 하셨습니다.

베스 스토벨(Beth Stovell) 앰브로즈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며, Theodicy and Hope in the Book of the Twelve의 공동 편집자이자 곧 출간되는 논평 Minor Prophets I & II의 저자입니다.

이사야 42:1-4과 마태복음 12:15-21, 12:1-14, 22-37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와 마태가 묘사한 예수님의 샬롬을 당신은 어떻게 경험하셨습니까? 복음서의 또 어떤 장면이 예수님의 평화의 사례로 떠오르십니까?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평화로운 안식

2022년 12월 6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6,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11:1-10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가 자주 느끼는 가장 큰 긴장 중 하나는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약속과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전쟁과 폭력 사이의 괴리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통치가 염려 없는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아이들이 독사 굴 옆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완벽한 안식을 취하는 어머니의 그림입니다. 다섯 아이의 아빠인 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위험한 상황에 접근할 때 압도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것처럼 메시아의 통치 기간 동안 그러한 감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토마스 하디의 거의 100년 전 시 “크리스마스: 1924”에서는 “이 땅에 평화를!” 이라 울부짖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노래합니다.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백만 명의 신부에게 헌금합니다.
2000년의 미사 끝에
우리는 독가스를 얻었을 따름입니다.

평화로운 안식의 약속과 독가스, 탄도 미사일의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답은 지금 그러나 아직의 긴장에 있습니다. 이사야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 왕에게 하신 약속, 즉 영원하고 축복받은 왕국에 대한 약속이 깨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의 가문은 쓰러진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른 그루터기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가지 곧 다윗의 자손 예수가 나셨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평화를 가져오며 적대적인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깃발로 서실 것입니다(이사야 11:10; 에베소서 2:15).

이것은 레위와 같은 세리와 시몬과 같은 열심당원이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누리는 교회를 통해 지금 부분적으로 실현됩니다. 전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살아있는 돌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이 사용하실 벽돌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에서 선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라고 말씀하시는 메시야 왕의 약속된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것입니다(이사야 11:4; 데살로니가후서 2:8).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에 나오는 정복당한 포학한 동물의 에덴 동산식 이미지에 의해 기대됩니다. 예수께서는 언젠가 피조물을 완벽하게 정복하셔서 치명적인 짐승들을 제압하시고, 뱀도 어린이의 장난감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새 창조로 영화롭게 된 세계는 궁극적으로 정의와 평화에 대한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주어진 영광스러운 안식을 상기시키고, 그분의 재림에 수반될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게 합니다. ‘지금 그러나 아직’이라는 이 긴장의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압제 가운데 정의를 추구하고,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은혜를 새기도록 부르십니다(이사야 11:9; 고린도후서 2:14). 지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안식을 받는 것은 이 지식을 통해서입니다.

아드리엘 산체스(Adriel Sanchez) 미국 샌디에이고 노스파크장로회 목사이자 Q&A 라디오 방송이자 팟캐스트인 Core Christianity 진행자입니다.

이사야 11:1-10을 묵상하십시오.


평화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당신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지금 그러나 아직’ 가져오실 평화에 대한 당신의 갈망을 표현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평화의 왕

2022년 12월 5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5,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35장

약속된 이가 가져올 평화를 묘사하기 위해 이사야가 사용한 히브리어 단어는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온전함, 조화로움, 건강함을 포함하고 있는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불안한 휴전과 일회용 반창고 붙이는 정도를 영구적 평화의 대용품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샬롬은 훨씬 더 강건한 것을 대변합니다. 전쟁의 종식을 넘어 샬롬은 애초에 전쟁으로 이어지는 조건들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샬롬이 있으면, 모든 것이 원래 창조되었던 그 방식대로 작동합니다. 샬롬은 삶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동시에 포괄적으로 번영하는 것을 감히 상상합니다. 신학자 대럴 존슨은 샬롬이 “심리-신체-관계-인종-경제-영적 온전성”을 묘사한다고 설명합니다. 35장에서 이사야는 그 온전성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샬롬의 왕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심리적 온전성으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사야에 의하면 “우리의 두려워하는 마음”(4절)이 “즐거움과 기쁨”을 얻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10절) 때까지 그 평화는 제공될 것이라 말합니다.

신체적(또는 육체적) 온전함은 어떻습니까? 이사야는 일련의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육체적 치유를 묘사합니다. 눈먼 사람은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기쁨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5-6절). 더 나아가 피조물 자체도 치유될 것인데,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6절),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입니다(1-2절).

이사야 35장이 그 절정에 달할 때, 속량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길에서 함께 걷고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되면서, 관계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또한 영적 온전함에 대한 생생한 비전을 우리는 제시받습니다. 이사야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다른 사나운 짐승이나, 기회를 노리는 적들이 없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백성은 함께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의 면류관을 쓰고”(10절) 시온에 들어갑니다.

이 궁극적 샬롬이 우리의 미래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작가 조나단 마틴은 자신의 책 Prototype에서 평화의 왕이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미래에서 온 사람들"처럼 지금 여기에서 샬롬을 누리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다고 제안합니다.

이번 대림절에 평화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직면한다면, 주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어떤 행동이나 태도가 상황을 관련된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의 포괄적인 번영으로 이끌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샬롬의 왕이 여러분을 사막의 강으로 만들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캐롤린 아렌즈(Carolyn Arends) 레코딩 아티스트이자 작가이며 education for Renovaré의 책임자이며, 최근 In the Morning이라는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이사야 35장을 묵상하십시오.


이 구절에서 그리는 평화를 묘사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단어나 문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미래의 소망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그것은 평화의 왕이 오늘 우리 삶에서 하시는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평화의 비전

2022년 12월 4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4, 2022
Stephen Crotts

둘째 주: 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2:1-5, 9:6-7

아마도 약속된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가장 큰 증거는 이것입니다. 그분은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올 만큼 충분히 큰 권능을 가진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평화입니다. 그는 평화의 왕입니다.

물론 우리는 평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 익숙합니다. 저널리스트 크리스 헤지는 2003년, 인류 역사 상 평화가 지속된 기간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쟁을 “1,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분쟁 활동”으로 정의하고, 3,400년의 역사를 검토한 결과, 단 268년 동안만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록된 역사의 약 92% 기간이 실제 분쟁 기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류 자체가 전쟁과 전쟁의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존재라고 말해줄 저널리스트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갈등, 폭력, 억압 등을 포함한 직접적으로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미 그들의 기억에 깊게 새겨져 있는 끔찍한 이미지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평화의 비전을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들과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비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사야 2장의 이미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모든 열방이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곳은 그들이 평화와 정의 사이의 추정된 이분법이 항상 거짓이었음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정의를 통해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주님은 나라들 사이를 판단하고, 분쟁을 해결하여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십니다.

그런 다음 인간이 평화의 왕의 면전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산으로 가져온 오랫동안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무기인 칼과 창이 갑자기 설 자리를 잃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무기를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은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곧 사람들은 그들의 무기를 원예 도구로 바꾸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묘함은 구속함을 받고, 파괴적인 목적에서 창조적 마무리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이사야는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조건을 특징짓고, 지을 수 있는 잔인함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평화의 왕이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해 심어둔 푸릇푸릇하고 활기찬 평화가 넘치는 미래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친 예언자에게 소망을 주는 일종의 비전, 언젠가 천사들이 선포하게 될 왕에 대한 비전입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캐롤린 아렌즈(Carolyn Arends) 레코딩 아티스트이자 작가이며 education for Renovaré의 책임자이며, 최근 In the Morning이라는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이사야서 2:1-5과 9:6-7절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의 평화에 대한 비전에서 당신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이 오늘날 세상에 어떻게 전해지고 있습니까? 약속된 평화의 왕을 찬양하며 기도하십시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가장 큰 소망

2022년 12월 3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3, 2022
Stephen Crotts

첫째 주: 전능하신 하나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영광스러운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보존자이십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그의 권능과 능력에 대해 듣습니다. 약속된 주의 재림과 그의 영원한 통치를 기대합니다. 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1:1–6, 21:22–22:5

놀이터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을 상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조롱하고 바닥으로 밀쳐버립니다. 소년은 눈물을 꾹 참고 있지만 그들을 당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소년이 겪고 있는 공포와 고통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 갑자기 앞에 차 한 대가 나타납니다. 바로 그 소년의 아버지입니다. “아들아 차에 타.” 아빠가 소리칩니다.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에서 벗어 난 소년은 급히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차에 탔습니다. 차는 속도를 냅니다. 소년은 창밖을 잠시 바라보며 괴롭히던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소년은 이제 안전하지만, 그들을 이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도망가는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계시록의 끝, 즉 성경의 끝은 우리가 피하거나 도망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30). 여기 요한계시록에서도 보좌에 앉으신 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말씀은 완성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승리는 그의 부활을 통해 명백히 드러났지만, 이는 그가 재림하실 때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림절은 이러한 두 시기 사이에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또한 두 번의 승리 사이의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예수께서 이기셨고 전능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시는 날에 그는 거하실 것입니다. 계시록이 설명하는 종말의 이상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나로 연합하시고 그의 임재와 빛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거하심과 함께 오는 승리입니다. 이것은 희소식이며 세계를 향한 최고의 소식일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자기 피조물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오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완성되어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놀이터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를 창의적으로 상상해보세요. 아버지가 아이에게 차에 타라고 소리치는 대신, 차를 주차하고 나서서 천천히 아이들에게 걸어갑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권위를 나타내어 괴롭히는 아이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습니다. 아버지가 숨어서 괴롭힌 다른 아이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외칩니다. 더 나은 장비를 가져다 놓고, 놀이터를 더 밝게 아이들이 다같이 즐겁게 뛰어놀 수 있게 개조하기로 합니다. 맛있는 음식과 음료수가 도착합니다. 신나는 음악이 나옵니다. 아이스크림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이 넘칩니다. 이제 고통이 가득했던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글렌 패키암(Glenn Packiam) 캘리포니아주 코스타메사에 있는 록하버교회의 담임목사이며, The Resilient Pastor의 저자이자 The Intentional Year의 공동 저자입니다.

요한계시록 21:1~6과 21:22~22:5를 묵상하십시오.


전능하신 자의 궁극적인 통치에 대한 이 묘사에서 당신의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그 구절이 어떤 희망과 위로를 줍니까? 당신은 예수님께 어떻게 응답하시길 원하십니까?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Books

‘두 조각의 떡’과 동아시아 다른 이단들

예수, 성경 그리고 구원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널리 퍼지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 2022
Illustration by Christianity Today / Source Images: Aaron Burden / Unsplash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정통적인 이해에서 멀어지고 있다. 올해의 신학신조(The State of Theology)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다섯 가지 신학적 오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예수만이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 예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 성령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가 없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중국, 홍콩, 일본, 한국 그리고 대만의 기독교 지도자들 5명을 대상으로 이러한 오늘날의 이단들이 그들 국가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신자들이 어떻게 이단들을 적절히 다룰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국가에서 어떤 이단들이 보다 더 많이 퍼져 있는지 알아보았다.

중국 후베이성의 가정교회 목사 아론 차우(보안상 가명 사용)

중국의 이단들은 미국과 상당히 다르다. 본 연구를 바탕으로 보면, 미국의 복음주의 이단들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이단들은 근본주의와 미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대부분의 중국 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겠지만, 일부 교인들은 종교개혁의 모토인 sola Scriptura(오직 성경)에서 ‘성경만 읽으라’로 요점을 바꿔 받아들일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과 달리, 중국의 일부 교인들은 성경이 실제 정확한 사실이라는 믿음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미국의 이단들은 기독교인들이 높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중국 이단들은 신학 교육의 부족 현상으로 일어나는데, 이 때문에 도시보다는 농촌 지역에 이단들이 더 널리 퍼져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 기독교 이단은 그리스도가 중국에서 태어났고, 그의 재림이 문자 그대로 이미 일어났다는 믿음이다. 동방번개(Eastern Lightning)는 마태복음 24:27을 기반으로 일어난 이단이다. 또 다른 유명한 이단인 “두 냥의 빵”(빵 두 조각)은 요한복음 6:1과 열왕기상 17:1-16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은 기독교인의 집에는 매일 먹더라도 쌀이나 밀가루가 고갈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홍콩 중국신학대학원 신학과 교수 Kin Yip Louie

홍콩에 있는 대부분의 중국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신조에 동의하지만, 종종 그 교리들의 실제적인 적용을 왜곡한다.

홍콩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적용으로 넘어가면, 그들은 종종 특정 구절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그 구절을 도덕적 가르침이나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비유 정도로 바꿔 버린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이야기를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는 개인적인 여정으로 읽으며, 거기 나오는 정의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무시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그 책에서 언급한 정치적, 경제적 착취에 대한 비판은 인식하지 않은 채, 순전히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 정도로 읽는다.

따라서 개인적 도덕주의는 홍콩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이단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비록 대부분의 신자들이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동의하겠지만, 그들은 종종 영성에 대한 이해를 흡연이나 도박과 같은 특정한 행위를 억제하고, 주일 예배에 정시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다른 실천에 헌신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사실상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두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선한 행동에 두는지 불분명하다.

일본 지바현, 교회 개척 네트워크 City to City의 번역 책임자 Asako Hirohashi

‘예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유일한 길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일본 복음주의 교회내에서 가장 흔한 이단이다. 하지만, 그 이단의 존재와 영향력은 매우 교묘하다.

대부분이 복음주의의 공적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온다는 데 동의하는 반면, 꽤 많은 교회 참석자들은 그들의 구원이 명확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섬기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적용하기도 한다. 일부 교회들은 이 땅의 다른 모든 직업들이 “세속적”이거나 “거룩하지 않은” 일로 여길 정도로, 전임 사역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

이러한 이단적인 믿음에 넘어가기 쉬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주의가 일본에서는 종교적인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강조하는 그들을 둘러싼 일본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그들의 믿음을 사회 분위기에 적응시켜야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교인들은 종종 교회 리더가 강단에서 가르치는 것을 큰 고민이나 질문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한국 서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 교수 정미현

체코의 개혁가 얀 후스나 이탈리아의 발데시안(12세기 프랑스, 스위스에서 시작된 로마 가톨릭에 저항한 운동, 사도들이 전해 준 순수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함, 역자주)처럼 기독교 발전 과정에서 특정 지도자들이나 운동이 낙인찍히고 부당한 재판을 받았기에, 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나는 조심스럽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복음주의와 비슷한 현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흔한 이단은 영과 육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을 주장하는 영지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무속신앙은 이러한 이원론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당은 자신의 영혼이 영계에 들어가거나, 자신의 육신이 영계나 신의 ‘숙주’가 됨으로써, 영계와 인간계 사이의 ‘채널’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더 최근의 한국의 흐름은, 인공지능(AI) 분야처럼, 욱신의 중요성을 점점 평가절하해 영지주의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관점은 신도들이 사회와 분리된 삶을 사는 풍조에 영향을 미쳐, 한국의 많은 신도들에게 사회와 어떻게 견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지는 중요 관심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이단들은 종종 그들의 창시자나 리더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는 사이비 종교로 발전한 종교적인 종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대만 타이중 충 샤오로 장로교회 목사 Tim Wang

비록 미국 복음주의 상위 다섯 개 이단들이 대만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될 가능성이 가장 많지만, 내가 대만 교회에서 7년 동안 목회하면서 본, 더 널리 퍼져 있는 이단적 믿음은 이원론과 기독교 신앙의 사유화이다.

많은 대만 기독교인들은 영혼을 구원하고, 성화하며, 천국에서의 영원한 소망을 강조한다. 이렇게 비물질적인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신자들로 하여금 육체와 물질적인 세계를 회피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해야 할 것 정도로 취급하게 만든다.

대만 기독교인들은 또한 일반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사회와 문화내에 존재하는 불의, 인종차별, 기타 제도적 악에 관한 이슈에 대해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사유화한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꺼이 기도하려 하지만, 직접 행동을 취하거나 이러한 이슈들에 개인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게 건전한 신학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놓치고 있는 소명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신도들을 또한 주님의 제자로 훈련 시켜야 한다. 디모데후서 3:16이 말씀하는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많은 목회자, 지도자들이 가르치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신도들을 의의 길로 훈련하는 사역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신실하고 참된 재판관

2022년 12월 2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 2022
Stephen Crotts

첫째 주: 전능하신 하나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영광스러운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보존자이십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그의 권능과 능력에 대해 듣습니다. 약속된 주의 재림과 그의 영원한 통치를 기대합니다. 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9:4–21

저와 얼마 전 대화를 나눈 대학원생 한 명은 불가지론자 친구들이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던진 질문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불타는 고통의 모습과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최후의 심판이 어떨지에 대한 정통 기독교적 견해가 많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신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제서야 학생은 안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통적 기독교 또는 중세의 미신적 이미지로 인한 것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대학살이나 멀리서 날아오는 폭탄처럼 비인격적이고 냉정하게 임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의도적으로 열방의 심판에 참여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정의와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려면 심판을 집행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세상을 바로잡기를 원한다면 불의와 악은 함께 다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공의와 심판은 1세기의 방식 같은 생생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을 탄 전사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유는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공의와 심판을 집행하는 분으로 나타나신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재림하실 때까지 그분의 정체성에 변화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서 13:8). 이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공의를 제정하시고 심판을 집행하시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과 고통받는 자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와 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그에게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의가 이루어지고 즉,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에 젖은 옷을 입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는 그 피는 바로 그분의 피입니다. 결국,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왕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전에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권능과 능력을 구현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이 구절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방식, 자신의 통치, 자신의 제국을 주장하며 전능하신 왕에게 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끝장날 것입니다. 삼켜지고 있는 섬뜩한 이미지는 삶의 끝을 묘사합니다.

만왕의 왕은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에 저항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고집한다면 생명 대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과 정의는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루실 분은 신실하시고 참되십니다. 당신은 정의와 심판을 집행하는 그분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글렌 패키암(Glenn Packiam) 캘리포니아주 코스타메사에 있는 록하버교회의 담임목사이며, The Resilient Pastor의 저자이자 The Intentional Year의 공동 저자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4~21절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과 그분의 초림에 대한 지식이 예수님의 재림을 잘 이해하도록 돕습니까? 만왕의 왕의 정의와 심판에 대하여 이해하십니까?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예수께서 다스리실 것이다

2022년 12월 1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 2022
Stephen Crotts

첫째 주: 전능하신 하나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영광스러운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보존자이십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그의 권능과 능력에 대해 듣습니다. 약속된 주의 재림과 그의 영원한 통치를 기대합니다. 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4:29–44

마태복음 24장 29-31절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이사야서 13:10과 34:4은 시적인 언어로 재림을 우주적 격변으로 묘사한 것으로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서기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멸망을 통한 심판으로 보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택함받은 자들이 한 곳에만 모였다는 구절을 볼 때 이 해석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 다시 오십니까?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 것인지 물었습니다 (마태복음 24:3).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재림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할 일들을 알려주시고(4-26절),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아는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서기 70년에 발생했기 때문에 모든 세대의 교회는 그 이후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과정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4절의 “이 모든 일”은 33절의 “이 모든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으나” 아직 오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재림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그의 재림을 준비하는 징조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는 “문 앞에 가까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오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항상 대비해야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을 갑작스럽게 맞이하여 놀라고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 있으면 깊은 밤에 도둑이 들어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무엇을 훔치러 오시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는 의외성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의 고난 직후”는 어떻습니까?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두 번의 재림 사이의 기간을 뜻하는 고통일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주는 많은 순간 가운데서도).

우리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든,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완벽한 때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믿음의 소명을 따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 질병, 자연재해, 부상과 장애, 빈곤, 깨어진 관계 등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회복을 영원토록 얻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거대한 계획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실제로 우리 모두의 바로 앞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크레이그 L. 블롬버그(Craig L. Blomberg) 덴버신학교 신약 명예교수이자 마태복음 해설과 은유 해석 등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44절을 묵상하십시오.


이 구절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게 하나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나요? 예수님의 권능과 능력을 어떻게 깨닫게 하는지 생각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주목받기에 합당하신 주님

2022년 11월 30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30, 2022
Stephen Crotts

첫째 주: 전능하신 하나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영광스러운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보존자이십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그의 권능과 능력에 대해 듣습니다. 약속된 주의 재림과 그의 영원한 통치를 기대합니다. 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9–34, 3:22–30

“그분은 더운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KJV). 저는 어렸을 때 이 구절을 듣고 세례 요한이 줄어들면서 예수님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상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문맥은 요한의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예수께로 간다”라고 말하자 요한은 선언합니다.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사역을 먼저 시작하였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 자신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요한을 보기 위해 광야로 갔기 때문에(마가복음 1:5) 돌변한 상황이 아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일관되게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신분과 위대함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구절은 요한이 자신이 누구이고 예수가 누구신지 설명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에게 정체를 묻자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세례의 사역을 하고 있지만 다음 오실 분보다 훨씬 낮은 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자 세상 죄를 사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보이실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 후에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더 늘어났을 때, 요한은 이는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신랑이신 결혼식에서 곁에 서 있는 절친한 친구로 비유합니다.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설명한 요한복음 3장 29절의 비유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관습에서는 신랑 신부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신랑의 절친한 친구는 침실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신랑은 결혼생활을 시작하며 기쁜 마음으로 소리쳐 외쳤고 신랑의 절친한 친구는 그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한 세대 후에 바울은 빌립보서 1:1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최근에 은퇴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이 교훈을 새기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주목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듯이 겸손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크레이그 L. 블롬버그(Craig L. Blomberg) 덴버신학교 신약 명예교수이자 마태복음 해설과 은유 해석 등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9-34절과 3장 22-30절을 묵상하십시오.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인지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태도가 당신의 영성에 어떤 교훈을 줍니까? 당신은 어떻게 “작아질 수” 있습니까?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Apple PodcastsDown ArrowDown ArrowDown Arrowarrow_left_altLeft ArrowLeft ArrowRight ArrowRight ArrowRight Arrowarrow_up_altUp ArrowUp ArrowAvailable at Amazoncaret-downCloseCloseEmailEmailExpandExpandExternalExternalFacebookfacebook-squareGiftGiftGooglegoogleGoogle KeephamburgerInstagraminstagram-squareLinkLinklinkedin-squareListenListenListenChristianity TodayCT Creative Studio Logologo_orgMegaphoneMenuMenupausePinterestPlayPlayPocketPodcastRSSRSSSaveSaveSaveSearchSearchsearchSpotifyStitcherTelegramTable of ContentsTable of Contentstwitter-squareWhatsAppXYouTub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