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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읽으신 성경을 우리도 읽어야 합니다

구약 성서는 신약 성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그 자체로도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3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구약 성서는 항상 기독교 비평가들에게 표적의 대상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가혹해 보이는 도덕 규범과 고대 문화 규범은 오늘날에 와서는 쓸모없고 심지어 야만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논지는 아니지만, 최근 저명한 목사인 앤디 스탠리 목사가 2018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에서 구약 성경을 ‘떼어내야’한다고 제안하며 구약 성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의견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서 전문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첫 번째 성서'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이미 2세기에 이단 사상가 마르키온은 이 질문을 제시했고, 그는 구약 성경이 기독교에게 거의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는 이 견해를 발표해 파면 당했습니다. 20세기에 나치는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에서 구약 성서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수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뒤따라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최근에는 소규모 모임에서 여러 지점이 있는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설교자들이 구약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성경의 두 성서를 ‘떼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 성서가 갖는 어려움은 신약의 모든 내용이 거의 온전히 구약 성서의 구절에 의존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첫 번째 구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입니다. 구약이 없으면 독자들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윗과 아브라함이 누구인지, 이 모든 인물들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원문은 훨씬 더 암시적입니다. “계보의 책”은 그리스어로 비블로스 기원 (biblos geneses)입니다. 이는 창세기부터 명백히 암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대한 신약의 의존은 단순한 정보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일부 구절에서 신약은 구약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지식이 충분하다고 시사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6:19-31)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31절)이기 때문에 자신의 제멋대로인 형제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누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16장과 같은 말씀은 신약 성서 어디에나 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 성서 없이는 신약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와 같은 선의의 표현을 만들어 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구약에서 새로운 거짓말은 감춰져 있고, 신약에서는 구약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진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서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구약 성서에 대해 계속 궁금해합니다. 그리하여 이 질문이 남습니다 “구약 성서는 대체 기독교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제 대답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아마도 모든 것을 알려준다, 입니다.

구약 성서가 기독교 신앙에 제공하는 중요한 선물은 적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은사가 구약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신약 성서보다 구약 성경에 훨씬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뜻 중에서 귀중한 일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정직

구약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합니다. 구약 성서의 종종 체포되거나 때로는 불쾌감을 주는 솔직한 표현은 현대의 감성으로 볼 때 자주 불쾌감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39편과 같이 많은 사랑을 받는 시편에서도 여러 시편에서 발견되는 적에 대한 악랄한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저의 시어머니는 (19-22절을 제외하면) 이 시편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이 정직함은 은사이며,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적들에게 비슷한 일이 생기길 생각하거나 바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항상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시편의 잔인한 정직함은 특히 어려운 시기에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편 만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하지만 구약 성서는 전체가 정직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종종 설교적 도덕화, 심지어는 구약 성서 (그리고 성경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적 비난도 그치지 않지만 이 기록이 정직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만 보존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이스라엘이 그것을 정직하게 전달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죄와 고통에 대한 정직함은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정직하고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정직하게 기록했음을 두 가지 방법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각하게 실패한 교회의 역사에 비해 실패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정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모방 되어야 할 은사입니다.

게리슨 캐일러가 말했듯이 구약 성서처럼 정직한 책 안에 시가 풍부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처럼 좋은 시는 “우리가 익숙해진 것을 벗어나 더 진실한 설명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3분의 1 이상은 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귀중한 시를 아주 적게 제공하는 신약과 대조해보면, 신약에서 발견되는 작은 것, 특히 요한 계시록에서 발견되는 것은 대부분 구약의 언어와 상징을 인용합니다.

구약의 시는 대부분 시편에 한정되어 있지만, 신약과 비교하면 번개와 반딧불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선지자들은 ‘거의 맞는 단어’가 아닌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시편 기도는 찬양과 고통의 시이자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시를 통해 바로 ‘주의 말씀’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10-11)

시는 삶의 지혜 (잠언), 고통 (욥), 죽음 (전도서), 심지어 사랑과 섹스 (아가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논하는 데 이상적인 매체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주제는 이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서나 주제가 까다로울 때 시의 형태를 채택하는 것이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방식보다 더 어려운 주제가 있을까요?

구약 성경의 대담한 이미지에 대해 월터 브루거만은 “하나님이 옳다고 말하는 쉬운 언어는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는 쉬운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평탄한 산문보다는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명제보다 확실히 우월한 방식입니다. 시는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암시합니다. 그것은 모호하고 침묵의 상태로 있어도 보이고 드러난다. 침묵과 표현하는 사이에서 시는 모든 언어의 주이자 모든 것 위의 주이신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달하고 보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가볍게 말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구약의 시적 성향에서 배웁니다.

신학

두 번째 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 번째 은사는 신학이며, 이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정의됩니다.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 웹사이트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검색은 신약에서는 1,109건, 구약에서는 3,189 건을 기록합니다. 이러한 통계는 놀랍지 않습니다. 구약 성서의 39권은 개신교 기독교 성경의 78%를 차지합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함). 그러나 세 번째 은사는 단순히 신약 성서와 구약 성서의 양의 차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성서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교리, 특히 삼위일체의 첫 번째 구성원의 성부 아버지에 관한 주요 자료의 기록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구약을 통해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로 더 쉽게 생각하지만, 복음서에 언급된 성육신과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주심에 비추어 볼 때 구약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성서의 하나님’을 신약에서 예수님께 대항하는 마르키온과 편승할 때마다 신성한 하나됨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한 감정은 구약 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서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냅니다. 특히 이러한 구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구약 성서 이상으로 신약 성서에도 풍부합니다. 선구자인 침례 요한이 그토록 분명하게 보았듯이 (마태복음 3:7-12) 예수님의 설교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7:22).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이 참으로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편 7:11)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러한 분노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시편 7:11)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한 마음입니다. 신성한 정의 기준이 있지만,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길을 돌이키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18:7-8, 에스겔 18:32, 요나 3:10). 구약과 신약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심판에는 죄와 불의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올바르게 잡히면 하나님의 분노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백성

구약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론에 대해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중 하나는 의로운 주님과 똑같이 의로운 행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편 11 :7).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목록이 구약 성경의 많은 페이지를 차지합니다. 요점은 그 모든 세부 사항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단순한 사실입니다.

물론 신약 성서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교회론’이라는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위해 사용된 그리스어 ekklsia에서 유래 했습니다 (마태복음 16:18의 예시). ekklsia는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도 등장하는데, 히브리어 qhl (‘연합’)이라는 단어를 반영합니다. 이 단어는 신앙 공동체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네 번째 은사는 가족과 백성, 영토가 있는 나라,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함께 서 있는 (출애굽기 19:8)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되고, 때로는 처벌까지도 함께 받는 하나의 단체로써 이스라엘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신약 성서 역시 때로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공동의 이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5:1-11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개인화되고 산업화된 서구에서 신약 성경을 대부분 개인적인 관점에서 (‘예수와 나’) 읽고 정치와 사회 정의를 배제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일을 왕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시며,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엄격한 기준을 세우시는 분이지만, 출애굽기 22장 21-24절에서 이민자, 과부, 고아를 돌보는 법을 정하신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시므로 성서의 통일성의 예시를 보여줍니다.

구약 성서의 이 네 번째 은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삶이 독방에서 개인화된 경건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대신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를 넘어서 확장되는 공동의 문제입니다. 확실히 주님의 말씀을 신명기 6장을 통해 마음에 새겨야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도 주님의 지시를 받아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항상 눈에 띄게 기록해야 합니다. (신명기 6:6-9).

구약의 표식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약 없이는 신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 자체가 기독교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에 이 말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도 정확하지만 불충분합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실제로 모든 구약 성서는 계시 되었으며,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이라고 언급한 것은 구약 성서를 의미한다.

그 구절과 다음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듯이 구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디모데후서 3:16-17) 하기에 대단히 유용하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로마서 15:4)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폐와 부정이 아니라 정직의 상징이 된 기독교를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신비가 모든 언어를 넘어 겸손하고 예술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기독교, 죄와 불의의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비와 심판으로 하나 되신 삼위일체의 신학이 조화된 기독교, 속박당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요한계시록 5:9)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로 통합된 기독교, 그것이 바로 구약이 가르치는 은사로 이루어진 진정한 기독교일 것입니다.

브렌트 스트론은 듀크 신학교의 구약 교수이자 <구약 성서의 사망: 진단과 추천 치료>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흑인 예언자 목소리의 근원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출애굽기가 갖는 중요성

Christianity Today August 28,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첫 번째 성서 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 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마지막 글입니다 . – 편집자 주

마틴 루터 킹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아이즈 온더 프라이즈(Eyes on the Prize)>라고 불리는 시민운동을 처음 접한 것은 제가 11살 때입니다. 버밍엄에서 소방 호스에서 나온 물을 맞고 땅에 쓰러진 흑인 여성의 이미지가 눈앞에서 번쩍였습니다. 경찰견이 사람들을 뒤쫓았습니다. 화가 난 얼굴로 백인들은 학교에 들어가려는 흑인 어린이들에게 인종 차별적인 말을 외쳤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테네시 남서부의 작은 흑인 교회인 해치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 삼은 이야기에 대해 주일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아이즈 온더 프라이즈>를 본 후,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입지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모세와 구약의 선지자들, 재판관들 (우리가 ”자유 투사”라고 부를 수 있는)의 전통과 마틴 루터 킹의 유산을 따르도록 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구약은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들이 겪는 고통과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번영 복음주의와 중산층의 안락함이 주는 유혹을 받는 흑인 교회는 바로 이 유산에 근원을 두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힘

출애굽기는 그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자주 강조되어 왔는데, 이는 성도들이 직면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대대로 억압받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에게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고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애굽기 37절–8)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권력자들을 용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내가 애굽에서 내 백성의 비참함을 참으로 보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자신들의 기도도 들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억압받는 백성들이 선택 받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택한 백성들의 지위와 존재 이유를 알고, 노예 제도를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고통을 보기만 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십니다. “나는 그들의 관리자들로 인해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보고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는 억압받는 백성들이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실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노예들의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탄압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구약 성서, 특히 출애굽기의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보고 듣고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이전 시대에 노예를 소유했던 자들은 출애굽기에 신성한 권리로써 노예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신학적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노예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고, 노예들을 개종하려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영국 서인도 제도하에서 흑인 노예 제도 지속을 위해 선택된 성경의 일부였던 소위 “노예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이 성경은 신약의 거의 50%와 구약의 90%를 제외했습니다. 당연히 출애굽기 전체가 거의 제외되었습니다.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된 유대인들과 쉽게 동일시되는 반면, 농장주에게 파라오와 동일한 역할 부여하는 것은 큰 도약이 아니었습니다. 백인 노예 소유자들은 이 성경 말씀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도들 사이에서 얼마나 강력한 말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유산

수많은 흑인이 모세처럼 여겼던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의 고통과 비참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 교육 시스템 내에서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킹은 해방시키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으로 인해 백인 남부의 잔인하고 위협적인 행위로부터 억압받는 백성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신다: 마틴 루터 킹의 기도 생활>에서 루이스 볼드윈은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이 끈질긴 기도를 통해 담대한 성경적 이상을 구현했다고 믿었던 킹에게 구약 성경이 미친 영향에 대해 주목합니다. 볼드윈은 “이 시민운동 지도자는 성경적으로 기도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으며, 기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과 그의 견해에 대한 근거를 다른 히브리어 성경 자료에서 발견했습니다. 볼드윈이 말했듯이, “마틴 루터 킹에게 기도의 명령은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유한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종교적 경험, 특히 흑인 교회의 전통에 기초한 깊은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구약의 예언적 전통에 깊이 몰두하면서도 백인 위주의 부의 제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많은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기 위해 스스로 예리하게 훈련하였습니다. 그는 백인 위주의 중산층 교육을 통해 가난으로 인해 불행과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으며, 지적 능력을 통해 내면의 힘과 선지자 정신을 발휘하여 그의 언어적 은사를 착취당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멘토이자 동료였던 하워드 서먼 역시 흑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공감합니다. 그의 저서 <예수와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에서 서먼은 어린 소년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핼리 혜성을 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뒷마당에 말없이 서 있던 그들은 하늘에 넓게 퍼지는 빛을 보았습니다. 하워드가 혜성이 지구를 강타할지도 모르니 두렵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하워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삶이 도가니 강철만큼이나 단단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빛나는 말씀의 장엄한 힘이 계속해서 상기되며 내 영혼의 리드미컬한 노래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노력하고, 성취하고 … 양보하지 않는 힘으로 변화시키는 믿음과 인식이 있습니다.”

하워드 서먼이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 중요한 신념은 출애굽기와 예언적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신념이었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호소할 다른 힘의 원천이 없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해방된 자들의 고통을 위해 오실 것이라는 암묵적인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집트인부터 백인 기독교인까지

출애굽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독교인들이 억압의 역사와 경험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던 백인 억압자들의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종 백인 기독교인들은 흑인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백인 기독교인들은 노예와 착취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백인 기독교인이 흑인 억압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그러고자 하는 의도적인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흑인 교회에게 백인 기독교인 형제자매가 마치 모세처럼 상속자의 특권을 누리며 파라오의 집에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만남 이전에는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이집트 왕자의 교육에는 이집트의 궁전과 피라미드를 지은 노예에 관한 내용은 없었을 겁니다. 모세가 자기 민족의 고통을 무시하도록 교육받은 것처럼, 많은 백인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무시하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최상의 백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조차 흑인 억압의 오랜 역사에 대해 눈이 먼 것과 같은 “색맹”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출애굽기 (그리고 예언서, 유배기 문학, 유배 후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은 하나님은 결코 색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시고 행동하십니다. 모세는 백성의 고통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진정한 동정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행동하게 만들고,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까지 가기도 합니다. 아마도 백인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고, 다른 백인들의 애정이나 수용, 사랑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흑인 자매와 형제들의 고통을 고의로 무시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구약의 이야기에 빠져 시민권 운동 전반에 걸쳐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흑인 교회와 그들의 고통을 백인 기독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는 억압 속에서 흑인들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 가장 영향력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시민권 운동 중 마틴 루터 킹이라는 영적 지도자를 잃은 후, 다음 세대는 백인 지배하에 있는 그 억압 시스템으로의 정치적 진입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억압 체제와 맞서며 예언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의 죽음 이후 흑인 교회는 이전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많은 제자들은 이전보다는 더 나은 위치에 있었지만 킹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속적으로 흑인 교회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왕의 안일한 왕정 정치처럼 흑인 교회를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고 물질적 부와 타협함으로써 마틴 루터 킹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정치적 억압 시스템에 저항하여 목숨을 걸었던 신성한 영적 힘과 흑인 교회와의 완전한 연결고리를 끊어뜨렸습니다. 흑인 설교자들은 지배적인 정치 통제 시스템을 향해 대담한 진실을 말하는 선지자보다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선지자인 척 하는 이 정치인들은 백인 권력이 흑인의 고통을 덜어 줄 연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흑인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선지자보다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반기는 백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민권 운동을 탄생시킨 잠재적인 흑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백인 신학교에 겨우 은화 30냥 정도의 가치인 소수민족 장학금에 팔아 넘기며 변질되었습니다. 한때 흑인 교회에서 용기 있는 지도자를 양성했던 예언적 설교의 전통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백인 중산층 위주의 교육 기관에서 훈련된 목회자들로 인해 많은 흑인 성도들이 흑인 중산층 교회로 이동했습니다. 일부 교회는 흑인 중산층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자를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흑인 중산층 교회는 흑인 하위계층과 점차 분리되었습니다. 점차적으로 흑인 중산층 교회는 백인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을 적게 하였고, 변모하며 백인 우월주의 주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산층 흑인 기독교인들은 빈곤층 흑인들의 해방을 위해 영향력 있는 위치를 지켰습니다. 당연히 이 교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속박에서 억압받는 자들을 구출하신 구약의 방대한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흑인 아이들은 민족을 노예화하고 억압하는 제도를 향해 싸우는 모세, 에스더, 여호수아, 삼손, 드보라, 다니엘, 느헤미야, 다윗, 바쉬 티, 기드온, 룻,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한때 구약 성경에 근거해 설교하고 기도하는 풍요로운 전통에 뿌리를 둔 흑인 교회는 흑인 중산층과 흑인 하위계층 사이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는 조짐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20여 년 전에 PBS의 특별 프로그램 <미국 흑인의 두 나라(The Two Nations of Black America)>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오늘날 역사상 가장 거대한 흑인 중산층과 역사상 가장 거대한 흑인 하위계층이 존재합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제 백인 인종주의의 반대쪽에 생겨난 흑인 계급주의 현상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빈 맥믹클은 그의 저서 <흑인 중산층을 향한 설교>에서 흑인 교회의 설교자에게 가장 큰 도전과제는 흑인 중산층과 하위층 사이의 분열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흑인 중산층 교회는 흑인 하위계층과 소통하기보다는 백인들의 부의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고자 더 노력했습니다. 맥믹클은 아모스 6장 1절을 인용하면서 “시온에서 편안한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흑인 중산층 교회가 세상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흑인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물론 마틴 루터 킹은 필요할 때마다 설교단에 서서 출애굽기, 이사야, 아모스서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설교자들의 역사를 따르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흑인 중산층 교회가 억압받는 흑인 하층 계층의 고통을 위해 다시 헌신할 것인가? 중산층이 억압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받는 형제자매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을 것인가?

구약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이 나라에서 고통받는 흑인들을 바라볼 때 신성한 연민으로 공감하도록 만듭니다. 흑인 중산층 교회는 예언적인 목소리를 되찾고 속박의 장소로 돌아가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유의 신이시며 여전히 억압 체제에 들어가 억압받는 희생자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의 해방된 마음과 입을 통해 폭정의 근간을 흔들고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체계를 바로 잡을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흑인 교회가 여전히 노예화를 옹호하는 불의한 체제 내에서 다시 한번 제 임무를 수행하려면 신성한 주제를 추구하며 영향력 있는 기관으로써 구약 성서의 상속된 유산을 유지해야 합니다.

제리 타일러는 성경, 선교 및 사역의 부교수이며 애블린 크리스챤 대학교의 칼 스페인 인종 연구 및 영적 행동 센터의 창립 이사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교회가 결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결혼율이 하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1, 2020
Illustration by Keith Negley

레이첼이 인생에서 배운 것은 헌신이 아니라 자유와 독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20대에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진지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여자들과 데이트하는 법을 잘 알지도 못해요.” 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오스틴으로 이사한 후 레이첼은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 큐피드’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는 싼 여자라서 무료였어요”라고 웃으며 그녀가 농담했습니다. 레이첼은 개종하기 전에 결혼을 먼저 했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은 마치 하나의 거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성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동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혼은 나라에서 발행해주는 하나의 종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신앙이 생기고 남부 침례 교회에 가입한 후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며 성스러운 관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결혼 이후 자녀의 출생으로 인해 레이첼과 남편 사이의 사랑은 더 커졌습니다. 가족의 탄생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많은 남성이 여성과는 달리 직장, 결혼 및 가족을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그녀는 확신합니다. “저는 남성이 공급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레이첼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레이첼은 결혼의 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실제로 레이첼의 남편처럼 결혼과 가족을 선택하는 남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8년 인구 통계 조사에 따르면 25세에서 34세 남성 중 35%만이 결혼했으며, 2005년 50%와 비교했을 때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 숫자들은 명확하고 무서운 궤적을 향해 갑니다.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사랑 또는 경제적 실용성의 이유로 지난 수천 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결혼에 관해 전통적,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여성보다 남성이 결혼에 더 관심이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념적이며 단기적 관계 안에서의 새로운 규범을 따르며 ‘선택권을 계속 열어두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우리 시대 결혼의 또 다른 새로운 방해물은 바로 전염병입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경험으로 몇 달간, 많은 결혼식이 지연되고 있으며, 모든 새로운 관계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결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기 훨씬 전에, 저는 사회학자로서 특히 교회 안에서 결혼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퍼져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결혼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결혼을 장려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제에 대해 예외적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길 권하는 전반적인 문화적 메시지에 어떻게 저항하고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 학문 분야에서 제가 생각하는 결혼의 개념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후기 윤리학자 돈 브라우닝은 학계에서 결혼은 이제 다른 단어와 같은 범주에 있는 기피단어로 간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점까지 추가되면 동료들 사이에서 유행에 뒤처졌다는 낙인이 찍히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계속 조사를 밀고 나갔습니다. 1년 동안 글로벌 리서치 팀과 멕시코,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 레바논, 나이지리아, 미국 등 7개국에 걸쳐 약 200명의 교회 청년들과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이름은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습니다) 레이첼과 같은 일부 인터뷰 대상자는 최근 결혼했거나 약혼했지만 대다수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27세였습니다.

연구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회의론은 서구를 넘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멕시코 시티에서 모스크바, 베이루트에서 라고스까지도 퍼져 있었습니다. 자료를 연구하고 흩어진 퍼즐 조각을 모으면서 전 세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결혼과 관련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선택, 더 많은 선택, 더 큰 유혹, 더 높은 기대, 지속적 불안 및 고질적인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결혼 과정에 관한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점을 충분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제도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직면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의대를 다니는 25세 안데르는 곧 결혼합니다. 의사인 동료와 6년 동안 교제한 후 결혼하는 이 남자가 결혼 전에 확신이 넘칠 거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 두려운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구속되고 타협해야 하니까요.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르는 것들이 있겠죠.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문제가 될 겁니다.” 그에게 정확히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지 묻자 “부부 사이에는 분명 다른 점이 발생합니다. 배우자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를 겁니다.” 6년간 교제했으면 누군가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않냐고 내가 그에게 묻자 “전 그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안데르는 자신의 신앙을 지지해주는 성도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배경이 자신의 고민에 관한 충분한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결혼 전에 느끼는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불안을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불안이 자신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병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좋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 섭니다.”

안데르는 결혼율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 남자 중 한 사람입니다. 세계 가치관 조사의 자료에 따르면, 조사한 7개국의 교회 성도들은 거의 모든 연령대에 거쳐 결혼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예측 결과는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폴란드 여성의 76%는 30세에 결혼하고, 35세는 88% 결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미국과 스페인에서 같은 연령의 여성보다 약 10% 높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교회 성도들과 비성도들 사이의 결혼 격차는 특히 두드러집니다. 미국에서는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남성의 72%가 35세에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미국 남성은 50%만이 결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관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014년 제가 연구원으로 재직하는 오스틴 연구소가 한 전국적 설문 조사에 따르면 20세에서 39세 사이의 자칭 복음주의자 중 56%가 현재 결혼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수치는 같은 연령 인구가 기록한 42%를 훨씬 상회합니다. 4년 후에 실시된 조사에서 수치는 명백히 하락했습니다. 2018년 후반에 복음주의자 20~39명 중 51%가 결혼했으며, 전체 인구의 40%가 결혼했습니다. 숫자는 여전히 높지만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거하고 있다고 말한 복음주의자들은 같은 기간에 3.9%에서 6.7%로 증가했습니다. 동거를 지지한다고 밝힌 이들은 2014년 인구의 16%에서 2018년 말까지 27%로 증가했습니다. 설문에 응한 복음주의자들 중 소수만이 결혼이 ‘낡은 인식’이라고 말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은 결혼을 대체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공식 교회 통계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백한 감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간행물인 교회 통계연감을 살펴보면 미국의 가톨릭 결혼은 1965년 이래로 10개의 장례식마다 9개의 결혼식이 있었으며, 59%가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7년에는 이 비율이 10대 3.7로 감소했습니다. 평균 연령이 40세 미만인 젊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는 한, 참석해야 할 장례식이 결혼식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요인 중 하나는 안데르와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적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부부가 서로 더 헌신할 수록 의심은 줄어들며, 특히 재정과 관련된 경우에 그러합니다. 결국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으로 함께 좋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전도서 4:9~12).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더는 이런 식으로 결혼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국가를 불문하고 물질적, 사회적 또는 심리적 불확실성을 종식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서 만난 29세의 정통 기독교인 빅터를 포함해 인터뷰한에 응한 많은 사람에게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을 갖고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복잡 해집니다. 아내가 불안정하거나 불행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야 할까? 작고 후진 집에 살 수 있을까? 현대 대도시의 상황에서 가족을 만든다면 여러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겁니다.”라고 빅터가 말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라는 전염병이 어떻게 퍼졌는지에 관한 것은 성 혁명, 축소된 경제 또는 표준 이하의 남성 등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면, 결혼 생활에서 얻게 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 기대하는 것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결혼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이제 성인이 되는 기본적인 관문이 아닌 성공적인 삶을 증명하는 하나의 주춧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구조물을 마무리하려면 주춧돌이 필요한데, 결혼이 바로 그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초가 있어야 건물이 세워지며, 이 과정에서 마모는 반드시 발생합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봤을 때, 재정이 가난한 상태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면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만, 이는 젊은 시절에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고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아직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신호로 여겨집니다.

러셀 무어는 그의 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폭풍 속의 가정>에서 탄식하면서, 결혼이 자기희생이 아닌 ‘자아실현의 도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미시간 출신의 27세의 클로이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설명했습니다. “20대 때에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되죠.”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만연한 이 관점으로 본다면 결혼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희생은 30번째 생일 즈음에 자연스레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닌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제도의 위기는 발전된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라고스 출신의 28세 미혼 오순절파 교인 디디는 분명한 결혼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을 때”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목표한 모든 것을 성취한 다음 결혼을 할 거예요.” 라고스 출신의 또 다른 24세 미혼 여성도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오 제발! 결혼으로 인해 고통받을 수 없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희생에 대한 낮은 관용을 나타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희생하고 싶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이야기에 주저했지만, 실은 이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따르지 않은 한 부부는 미래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연구 중인 폴란드인 가족의 사례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24세 파웨와 29세 마르타는 현재 크라쿠프에 거주하는 부부입니다. 마르타는 한 살짜리 딸을 키우는 주부이며 파웰은 인근 대학의 철학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크라쿠프의 이 부부는 여러 방법으로 현실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르타는 결혼식이 온 동네 사람들의 축제로 여겨지는 작은 마을 출신인데, 두 사람은 작은 결혼식을 하기로 결정해 돈을 절약했지만 그로 인해 사회적 유대를 시험 당하기도 했습니다. 파웨는 “우리가 큰 피로연을 열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파웨 부부는 친구와 이웃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결혼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이 이전과 바뀌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마르타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20-30년 전과 비교해 현재의 결혼은 위안을 찾기 위한 목적이 더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가족과 부모 때를 생각해보면 그때는 돈이나 집이 없이도 시작했죠.”

그녀와 파웨는 현대의 트랜드를 따라가지 않고 결혼에 대한 전통적이며 기본적 관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하는 삶은 쉽지는 않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이 외면하는 ‘창조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들처럼 현실적이고 기본에 충실하며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접근하는 부부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은 점점 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지고, 더 이상 전 세계 성인 대다수가 선택하고 누리는 관행으로 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 특권층만이 선택하는 자발적이며 소비 지향적인 행위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결혼을 통한 이점은 두 사람의 부와 소득을 통합한다는 점이 있는 반면에, 서로에게 경제적 도움이 못 되는 경우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을 통해 사회 정의를 이룬다고 생각할까요?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물론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 반드시 문제는 아니며 강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점은 결혼을 늦게 할수록 결혼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더 적은 수의 사람들만 결혼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결혼율이 줄거나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여성들이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다리기 지쳤다”라는 말을 자매들에게서 자주 듣습니다. 대부분의 성도 중에는 결혼에 관심이 있는 여자의 비율이 남자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 학자들은 종종 이러한 추세에 대해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이는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들은 능력이 적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며, 그 힘은 섹스를 포함하여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자매들에게 이러한 역동적인 상황은 그들을 이중적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나는 결혼을 약속할 만한 상대와 혼전에 잠자리를 가져도 될까? 아니면 혼전순결을 지키고 그가 날 떠날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 등의 고민을 자매들은 하게 됩니다.

유엔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25세의 레바논 여성 파라는 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지만 배우자를 마냥 기다리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파라와 같이 레바논에서 대부분의 미혼 성인 자녀들은 결혼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성직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 사는 아파트의 많은 부부에게 조언을 해주는 분입니다.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그녀도 대화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녀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구혼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독실한 레바논 여성들이 시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 베이루트시에서 살기 위해 월급을 초과하는 엄청난 생활비가 들기 때문에 레바논의 기혼 여성들은 미혼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곤 합니다. 또한, 여가 시간에는 가사를 돌봐야 할 책임까지 있습니다.

“두 배우자가 모두 일하고 귀가하면 피곤한 상태죠. 아이들을 갖기 전에도 부부는 함께 앉을 시간이 없어서 미루게 되는 것 같아요. 토요일이나 주말까지 밀린 일을 하느라 과부하가 걸리고 매우 피곤합니다.”라고 파라가 말했습니다.

따라서, 파라는 분명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결혼의 모습이 바뀌고 있어요”라고 파라가 말했습니다.

이러한 역동적 변화는 레바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배우자들은 서로의 커리어를 지원하고 평등한 부모로 양육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많은 영역에서 희생하기를 서로에게 기대합니다. 이러한 조건 중 일부는 경제적 부담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지만 내부적으로 생성되고 선택적으로 적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고자 한다면 사회 심리학자인 엘리 핀켈이 이름 붙인 결혼의 “숨 막히는 구조”에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결혼을 말하다>의 저자인 팀 켈러도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은 결혼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한 관점을 생각할 때, 결혼 생활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할 때 애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상호 제공하는 공식화된 성관계의 결합이라는 차원에서 결혼에 여전히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이지 않고 구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결혼은 오랫동안 배우자들 사이의 불평등한 교류에 의존해 왔습니다. 남녀는 서로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 개념에 많은 사람들이 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결혼의 기본이 전문화와 교환의 의미라면 결혼은 점점 시대착오적인 사회적 형태로 보입니다.”라고 UCLA의 인구 학자 발레리 오펜하이머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습니다. 결혼율의 감소가 그녀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실망할 일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법적 노력은 결합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혼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택권, 기술, 성 평등, ‘저렴함’ 성행위, 세속화가 증가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연구자로서 결혼의 소멸을 연구하는 것은 파고든 곰팡이가 서서히 오래된 참나무를 천천히 파괴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좋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습니다. 참나무는 멸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결혼은 점점 더 ‘기독교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미래가 불확실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연구 조교와 함께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성스러운 용어로 묘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레이첼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가정 교회, 독창적인 연합, 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연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답변에 만족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저서 <결혼론>에서 그는 결혼을 인간 사회의 첫 번째 자연적 유대라고 확언합니다. 실제로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가지 선함’ (신실함, 후손, 성례)의 일부를 참조하여 결혼을 정의했습니다.

이 세 가지 선함은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관행이 무시되거나 훼손될 때마다 결혼제도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세속적 동료들보다 이 선함을 위해 더 헌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이 결혼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결혼제도가 서서히 ‘기독교적’인 일이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 서구 국가의 세계 가치관 조사의 수치는 이를 상당히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위 표 참조]. 결혼 패턴에서 보여지는 성도들과 비성도간의 차이가 수십 년 후에는 훨씬 더 큰 차이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 결혼은 세계적으로 종교적인 이슬람교도, 정통 유대인,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점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념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설문 조사는 동시에 좋은 결과와 안 좋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결혼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 결혼에 더 많이 실패하기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행인 점은 여러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결혼에 대한 중대한 사회적 지원과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고되고 희망적인 공간에는 결혼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이 놓여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지. 그러나 무언가를 바꾸어 나가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어.” 나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가 현명한 말을 했습니다.

서구의 세속화가 결혼 생활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믿음이 우리 삶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결혼의 수호자가 된다면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교회를 보호하고 장려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연구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유사교회(parachurch) 조직의 역할 또한 중요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의 결혼을 장려하기 위한 목회적인 노력에 대한 설교는 종종 들었지만 일관된 성공담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특히 미국에서)은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짝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지만(그 중 그리스도인을 선호) 사람들은 알고리즘을 통한 짝짓기 보다는 실제 사람을 통해 소개받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중매인은 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지 않은가). 활기 넘치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과정을 겪으면 만족도가 컸습니다. 교회의 회중은 종종 규모가 너무 크고, 소규모 그룹은 너무 작고 선택권이 없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중간 규모의 공동체가 가장 적합합니다. 기독교적 공동체가 갖고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때로는 문화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또래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연령이 늦어짐에 따라 대학 졸업 후 사회에서 생성되는 중간 규모의 공동체 모임이 결혼의 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크라쿠프에서 결혼한 부부인 파웨와 마르타는 두 가톨릭 단체가 결혼 전후에 그들의 결혼을 도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인근 도미니카 공화국의 청소년 단체였으며, 다른 하나는 폴란드, 레바논 및 스페인에서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이 언급한 최대 50명으로 구성된 교회 기반 공동체의 운동인 신교리교육운동(Neocatechumenal Way)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본국의 기독교학생회 및 감리교 학생선교회와 같은 대학 조직에 대해 들었습니다.

즉, 젊은 그리스도인이 외로움이 아닌 거룩함에 초점을 맞췄을 때 배우자를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간단하고 생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CS 루이스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을 겨냥하면 땅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를 정하는 사람이 모두 결혼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비 불균형은 지속적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신앙과 제자 훈련에 집중한다면 결혼 생활에 유익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결혼의 시작은 개인적 방식과 축적된 경험을 통해 생겨납니다. 한 러시아 인터뷰 대상자가 언급한 것처럼 타인의 나쁜 사례는 ‘결혼에 대한 일종의 백신 역할’을 합니다. 대조적으로, 좋은 예는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범적인 이야기만 하며 결혼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하거나 포장할 수 없으며 우리의 노력이 성공하기를 기대합니다. 어떻게 정의하든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것은 전통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공동체 훈련을 통해 전통을 강화하는 것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달 만에 결혼하는 과달라하라 출신의 34세의 학교 상담사인 토마스는 이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하는지는 강한 인상을 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부부관계가 아름답다면, 정말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나도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열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결혼을 우상화 하거나 지나치게 이상화 시키는 함정을 피해야 합니다. C.S.루이스의 “천국을 향한 목표”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결혼의 본질을 생각하고 결혼에 대한 오늘날 만연한 세상의 물질적, 심리적 기대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 결혼은 부활의 때 하늘에서는 없을 지상에서의 일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2:30).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번영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일상에서(또는 매 순간) 희생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나타낼 기회가 되며, 영적 진보를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제 서구에서는 젊은이들은 남편과 아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수많은 희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결혼 생활이 건강한 사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 여러 면에서 배우자와 자녀 뿐만 아니라 가정 밖의 세상을 향해 실질적(그리고 영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서구사회의 성공은 가족의 사회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를 해체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결혼이 무엇인지 설교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에 대한 영원하며 탁월한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멋진 과업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실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마크 러그너러스 (Mark Regnerus)는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 (University of Texas)의 사회학 교수이며 오스틴 가족 및 문화 연구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이다. 그의 새 저서, <기독교 결혼의 미래>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91일에 출간된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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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모든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내적 투쟁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영적 훈련에 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저는 구약 신학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구약을 사모해왔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 묵상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 시간 동안 저는 자연스럽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구약 성경에 이끌렸습니다. 성경과 묵상노트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성경공부 교제나 시집을 읽으며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히 시편은 놀라웠습니다. 시편은 분노와 슬픔, 외로움과 의문, 그리움과 열정, 예배와 경외감 같은 제가 청소년기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편에 몰두했을 때 마치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준 것처럼 위로를 느꼈습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고백이나 적들에 대한 그의 고백을 읽을 때, 저는 하나님의 앞에서 고백할 수 없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계를 벗어난 것은 없었습니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열정적이지만 우울한 소녀이며 목사의 자녀인 저에게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은 저에게 숨 쉴 곳이 되어 주었고,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약의 가르침(역시 중요하지만)이 아닌 구약의 위대한 기도자들과 실제로 함께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시편 필자들을 통해 공허할 때 말씀을 얻었고, 덕분에 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의해 제 영성이 형성되는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형성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성’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문화에서 다소 모호하고 아주 흔한 용어입니다.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명상에서 등산에 이르기까지, 농구 코트에서 운동선수가 느끼는 ‘흐름’이나 자신의 예술에 휩싸인 예술가의 무의식 상태, 대성당에서 드리는 조용한 예배 뿐만 아니라 요가 연습에서 단순히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까지도 모두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성의 언어는 불분명하고 무정형적이며 중심이 단단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성이나 종교적인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신비로운 비현실적인 감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를 우리가 되찾아서 잘 활용해봅시다. 간단히 말해서, 영성은 인간이 하나님, 진리, 개인적 중요성 및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도달하는 모든 방법을 뜻합니다. 모든 인간은 몸과 영혼과 영을 가지고 있으며 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영성의 개념이 기독교라는 단어와 결합되면 더 명확한 관점이 나타납니다. 브래들리 홀트는 그의 저서 <기독교 영성사>에서 기독교 전통적으로 이 용어는 “인생 경험을 위한 첫 단계”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시작점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홀트가 말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과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령’,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옹호자이자 조언자가 되시고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보내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인격을 의미합니다. 필립 쉘드레이크가 그의 저서 <영성의 역사>에서 주장했듯이, 바울의 편지에서 말한 “영적인 사람”(고전 2:14-15)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서 하나님의 영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성을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영과 신성한 영을 모두 의미하는 넓은 성경적 개념인 영의 어원의 중요성에 집착합니다. 신성한 영이란 구약 성경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며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분명히 기독교인의 영성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활성화되고 인도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어가 일반적이고 부정확하게 사용되어 의미가 누락 될 수 있는 상황에도 특정한 힘을 부여합니다.

구약으로 함께 하는 기도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영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발점은 각각의 그리스도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지만, 우리는 각자 특정한 방식의 그리스도인 제자도를 갖고 있습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듯이 “그와 함께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와 함께” 합니다.

다양한 전통, 교파 및 종교적 질서가 이러한 방식을 구현하고 성문화합니다. 홀트는 “예시로 예수회, 루터교도, 페미니스트들은 각각의 주제와 관행의 특별한 조합으로 인해 독특한 특징을 갖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영성에 있어서 우리는 가정, 회중 또는 민족 집단에서 이미 친숙한 전통에만 단순히 머물지 않고 그 전통과 전 세계 기독교인에 대해 폭넓은 견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전통을 살펴보면 더 큰 범위의 영성에 눈을 떠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 지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양한 부차적 자료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구약 성서 (성서의 대부분)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재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가 우리 영성의 주된 표현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웨스트민스터 그리스도인 영성 사전에 의하면 “기도는 간청이나 청원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부를 의미합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저에게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모든 방법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라는 행위를 함으로써 기도를 통해 형성됩니다. 시편에 대한 저의 초기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것이 정확히 수행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그의 유대인 제자들이 수련했던 기도를 통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순전히 포괄적 장르의 관점에서 기도를 살펴본다면, 시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기도, 슬픔의 기도와 감사의 기도, 깊은 겸손을 표현하는 참회의 기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담대하게 부르는 기도, 즉흥적인 기도와 성전 전례,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나 친밀함을 표현한 짧은 찬가 등 깊은 질문과 의심을 표하는 기도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대-기독교 관습에서 매일 시편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성 성장을 위한 구약 성경의 유일한 역할이었다고 하더라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시편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저는 구약 성서를 통해 신학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영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30대 초반 즈음 말씀과 체계적인 신학만으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저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게다가 저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찾고 있었으며 신약 말씀 역시 예전처럼 제 마음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복음적 양육의 특징이었던 자유로운 행동주의로 인해 저는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는 확신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확실한 것 한가지는 전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그리고 그때 제 이야기가 열왕기상 19장 엘리야의 이야기와 교차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영적 지도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큰 성공을 거둔 엘리야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버리고 고독히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이것은 가장 깊은 고독이자 내면이며, 엘리야는 알지 못했지만 그 고독을 통해 선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를 접했을 때 자세한 사항은 다르지만 저도 내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복음주의 어느 누구도 저에게 고독과 침묵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저를 이 길로 인도하기 시작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정통 기독교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싶었는데, 구약 성경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 (그의 경건한 이야기가 아님)는 고독과 고요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안식처로 삼으며 고독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간은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하나님의 질문을 들을 수 있는 곳, 내면의 혼돈이 안정되기 시작하는 평화의 장소, 그리고 마침내 다음 단계를 위해 하나님의 인도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집중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없이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간과 그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엘리야의 경험을 통한 인간성 그대로에 대한 무언가가 저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다시 역동적인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리더십의 요구와 도전이 강화됨에 따라 저는 성경에 있는 인물 중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리더에게 일어나는 일은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장기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모세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리더십에 대한 자세하고 깊은 영적 관점을 발견했습니다. 어쩐지 모세의 이야기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간적 요소를 더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았고, 그의 사투와 그 과정의 모든 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려움과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그는 어떻게 오랜 사역을 견뎌냈을까?” 모세가 리더십으로서 훌륭한 전략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를 끌리게 한 그의 신성한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이는 고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정확히 행하는 신성한 변화였습니다. 모세에게 리더십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고, 이것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한 접근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의 동반자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인생에서 리더로 살아온 과정에서도 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삶에 대한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 제 리더십의 경험을 뒤집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지속적으로 영적 수준에서 강화되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어라

제 경험상 구약의 이야기는 내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신비롭기까지 한 영적 삶을 보여줍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응답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노래, 시, 기도문에 담겨있는 찬양과 하나님과의 격렬한 씨름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도 받아들이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엘리야가 평생동안 지속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 고독의 강력한 결과를 조명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순간에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이자 재판관이었던 드보라를 통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사기 4장). 사역에 부름을 받은 청년으로서 저는 이 점을 배워야 했습니다. 또한 여성 지도자와의 협력의 가치를 알고 힘든 영역으로 함께 걸어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따른 위험과 보상을 기꺼이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락과 같은 남성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능력이 자라면서 엘리가 사무엘을 도운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 이것은 새로운 영적 지도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방향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중요한 짤막한 성경적 묘사입니다. 한밤중에 어린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엘리가 사무엘이 다시 깼을 때 인도한 방식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완벽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바로 영적 감독관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인 경험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이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저 우리 안에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경험을 내면에서 비추어 우리에게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통해 이러한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기대하도록 초대합니다. 추후에 우리가 지식이나 선견지명이 부족해 어떠한 어려움에 빠진다면, 구약 성서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게 바로 그 순간이군요. 저도 경험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루스 헤일리 바톤은 경험이 많은 영적 지도자이며 트랜스포밍 센터의 창립자이며, <리더십의 영혼 강화: 사역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 찾기 (IVP Books)>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코로나19 이후 소울메이트를 결혼 상대로 찾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미국을 위한 희망 : 더 많은 부부가 가족을 우선시할 것입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1, 2020
Illustration by Keith Negley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과 이로 인한 경제적 낙진은 미국 가정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부모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그중 많은 이들은 누군가의 조부모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들 가정과 자녀의 삶을 바꾸어 놓을 불안정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실직으로 인한 이혼으로 미국의 여러 부부가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남편이 실직한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정규 직장이 없는 남성은 이혼할 확률이 약 33% 더 높지만, 여성의 실업으로 인한 가정 분열의 위험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경제적 불확실성과 격리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로 인해 가정에서의 갈등과 폭력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개의 대도시를 조사한 잡지 이코노미스트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대부분 범죄는 감소했지만, 가정 폭력에 대한 보고는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회 학자 마크 리그너러스가 지적했듯이, 결혼율은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떨어지고 있었으며 2018년에 기록적인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현재의 불황과 같은 경제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결혼하기를 꺼릴 것이며 결혼율은 더욱 떨어질 것입니다. 결혼율의 감소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사람들은 불안정한 경제적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젊은이들 중 최소 3분의 1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 위기와 출산율의 감소와 함께 결혼율의 지속적인 감소로 인해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수백만의 미국인은 중국인이 소위 말하는 '헐벗은 가지' 즉 친족이 없는 남성과 여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헐벗은 가지'에 속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전염병, 사회 불안, 개인 채무 변제 또는 경제 위기와 같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힘듭니다. 부정적 변화에 직면할 때, 이들은 중년과 특히 노년기에 필요한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서적 지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남성과 여성은 결혼과 가족의 의미, 방향 및 행복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많은 미국인이 특히 그러할 것입니다.

이는 미국 가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위기 가운데서도 한 줄기의 희망이 있습니다. ‘소울메이트’와 같은 결혼의 개념은 희미해지고 ‘가족 우선적인’ 결혼 모델이 부각 될 것입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가족 우선적인 결혼 환경은 어린이들에게 안전한 가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소울메이트 결혼 모델은 결혼이 두 사람 사이의 강렬한 정서적 또는 낭만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는 소울메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수많은 노래, 할리우드 영화 및 많은 자기계발 서적을 통해 늘 듣습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또는 댄앤셰이와 저스틴 비버의 노래 <10,000 Hours>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이 만연한 신화적인 개념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극도로 비현실적인 기대하고 결혼하게 되며,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으로 인해 종종 이혼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소울메이트 모델은 특정 경제 및 정치 조건에 따라 예측되기도 합니다. 50년 전, 심리학자인 엘리 핀켈은 아브라함 매슬로가 정의한 욕구단계설에 따른 ‘마운트 매슬로 (Mount Maslow)’라는 가설을 통해 세우고 부부가 이를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개념은 정부와 시장이 음식과 주거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을 책임져준다면 미국인들이 단지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결혼한 부부가 정서적 연결, 개인적 성취, 결혼의 행복과 같은 '자아실현'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 불안, 지속적인 질병 및 무능한 정부 등의 침울하고 힘든 세상에서 소울메이트의 신화는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에게 더는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와 시장이 자녀 양육 및 교육, 가사, 가족 사업 또는 노부모를 책임져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 교회의 지원 등의 헌신과 지역 사회 지원이 필수적인 자녀 양육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재발견할 것입니다. 즉, 부부는 결혼에서 둘 사이의 감정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 대부분의 가정은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질 것입니다. 최근의 조사는 우리에게 그 기준점을 제공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대불황 동안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미국인들이 결혼 약속을 더 굳건히 했으며, 많은 경우 이혼이나 별거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인들이 결혼 생활에 더욱 헌신하고 집중하면서 이혼율은 지난 경기 침체 이후 20 % 이상 떨어졌습니다.

가족 우선 모델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중요시합니다.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가족연구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윤리를 받아들인 부부는 별거가 가능한 선택이라고 믿는 사람들보다 이혼할 가능성이 적다고 합니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적인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캘리포니아의 부부 중 “사랑이 존재하는 한, 이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 ”고 약속을 한 사람들의 77%가 결혼 생활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이혼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라고 답한 사람 중 82%가 결혼 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결혼에 대한 보다 헌신적인 접근 방식은 부부에게 더 큰 신뢰, 정서적 안정 및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어 행복하게 결혼을 지속할 확률을 높입니다.

결혼이 더 중요해지고 자녀 출산의 선택권이 생김에 따라 온전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비율이 증가하여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대불황의 결과가 이런 일을 초래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혼의 감소와 혼외 출생한 아기의 비율 감소로 인해 결혼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비율이 증가했습니다. 대유행 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가족 우선적 결혼에 대한 개념이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결혼한 미국인이 독신이나 이혼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감정적, 재정적 상태로 이 유행성 시대를 버틸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연구결과, 일반적으로 결혼한 성인이 독신 성인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미국 기업 연구소의 페이튼 로스와 함께 진행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결혼한 미국인은 독신인 미국인보다 외로움을 느낄 확률이 약 30% 적습니다. 또한, 결혼한 부부는 경제적으로 더 나은 안정성을 누리며 독신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으며, 미혼인 미국인보다 더 많은 돈을 절약하고 친족에게 더 쉽게 경제적 지원을 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가족 우선적 구조의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정서적 교제는 결혼 생활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안정된 가정을 제공하고, 이를 유지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돕고, 서약을 지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교회는 결혼부터 장례식 때까지 지역 사회에서 가정의 구성원을 지지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가족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기적으로 함께 기도하는 부부는 활기찬 결혼 생활을 즐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합니다. 리그너러스가 언급한 것처럼,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미국인들보다 결혼할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비록 세상에서 많은 것이 황폐해지고 한동안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지만, 전염병의 시대 속에서도 결혼한 가정의 장래는 밝아 보이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하기 위해 결혼 또한 더욱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될 거로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특히 그리스도인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W. 브래드 포드 윌콕스는 버지니아 대학교의 국가 결혼 프로젝트 책임자이며 가족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입니다. 알리세 앨헤이지는 가족연구소 블로그의 편집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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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인터뷰: 끊임없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겸손하게 전염병에 대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막을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과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10, 2020
Illustration by Rick Szuecs / Source images: RealPeopleGroup / Getty / Andre Ouellet / Unsplash / Cynoclub / Envato

24시간 뉴스 보도, 공중 보건 전문가들의 인터뷰, 그리고 다양한 전염병 퇴치 전략을 논의하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조언 등 우리는 코로나 19 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의견의 홍수 속에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대답을 듣고 싶은 많은 질문에 대한 확답을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속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 하나님과 팬데믹: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저자이자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성경이 우리의 혼란과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설명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솔라스 공공 기독교 센터의 앤디 배니스터 소장이 톰 라이트와 그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존 레녹스에서 존 파이퍼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독교인이 이미 대유행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책을 기고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지난 3월, 타임지가 저에게 전염병에 관한 기사를 쓰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기독교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됩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헤드라인으로 제안했죠. 저는 이 주제를 로마서 8장으로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로마 8장에서는 성령이 신음하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26절). 그리고 이 구절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지, 우리가 모든 답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가 게시된 후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이메일을 받았고, 트위터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는 사람들이 성경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인용하는 것을 계속 들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의 전체 이야기와 서술에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실제로 말하는지 탐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 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서구 교회가 어둠과 고통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편안함과 안전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몇 주 전 교회의 한 선임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톰, 우리는 애통할 줄 모른다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축하를 아주 잘하는 편도 아니야. 우리는 주로 안일한 태도로 살아왔다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러다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 아닐까?”라고 말하는 것을 계속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이런 일은 그동안에도 몇 번이고 일어났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1917년-1918년에는 스페인독감이 대유행하면서 세계 여러 지역 교회가 1년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잊습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을 겪은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경제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그 위기를 어느 정도 견뎌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그럭저럭 계속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종종 잊습니다.

저는 최근에 마틴 루터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매료되었는데, 그중 하나를 제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루터는 몇 년마다 이런 일에 대응해야만 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전염병이 유행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며 자신의 마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루터는 약을 먹는 규칙을 준수하고, 실질적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당신이 감염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질병을 옮기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매우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이 일에 대해 신학적 논란을 만들지 맙시다.

당신의 책은 특히 시편과 욥기에 나온 구약성서의 주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 특히 욥기에 대해서는 “욥기의 핵심은 정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구약성서에 대한 확고한 근거가 부족하여서 기독교인들이 모호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신약성서도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생략되거나 물음표로 끝나는 구절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저는 지난 200년에서 300년 동안 교회에 스며든 합리주의가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합리주의 비평가들이 “이것 보십시오,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합리주의 기독교인들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어떻게 완벽히 이성적으로 옳은지 그들에게 증명해 보입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의 접근으로 인해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니,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하셨거나 적어도 허락하신 데에는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권리를 부여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노예 오네시무스에 관한 편지입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빌레몬서 1:15). 다시 말해, 바울은 아마도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겸손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잘못된 태도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세부 사항을 아는 것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영역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실 때, 그의 인도하심을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서서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를 강조하셨습니다. . .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고통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울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울 수 있고 인간은 누구나 울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해결되길 바랍니다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 이야기 속에 많은 행동 중 어떤 행동은 눈물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종종 그렇듯이, 사실 복음서의 눈물은 때때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사렛의 예수께서는 어딘가에 높은 곳에 앉아 당신이 만드신 세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좋아, 너희가 만든 난장판을 내가 해결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친히 우리가 있는 곳에 임재해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와서 양손에 못이 박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로마 8장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슬퍼할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슬퍼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어떤 세계관과도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나머지 부분, 특히 성령의 역할은 전염병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 대해 어떠한 가르침을 주십니까?

제가 방금 언급한 로마 8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면접을 할 때 저는 종종 다음과 같이 묻곤 했습니다. "당신에게 위안을 주는 성경 구절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더 어렵게 하려고, 저는 덧붙이곤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과 로마서 8장은 말하지 마십시오. 그건 너무 뻔합니다.”

로마서 8장은 영광과 구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단 로마서 7장의 어려운 부분을 통과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바울의 확언처럼 하늘로 항해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로마서 8:38–39). 그러나 먼저 로마서 8장 18절에서 30절, 특히 26절과 27절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시간은 약할 때 우리를 위해 중재하는 성령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지금과 같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교회가 뒤로 물러서서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 자신조차도—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아들과 딸로 우리가 양자 될 것을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3).

교회는 혼란스러운 세상에 속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할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알고 있는 거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한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위대한 시편 중 하나인 애통하는 시편 44편을 언급하면서,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7).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마음은 지금의 끔찍한 상황에 관해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의 인격으로 친히 오셔서 죄의 무게를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셔서 교회에서 간구하는 분이자 세상이 고통스러워 하는 곳에 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산고를 통해 이 세상의 공포와 수치심을 구원으로 바꾸시어 우리가 약속한 완전한 새로운 창조물로 태어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성령이 슬퍼하고 신음한다는 것이 아까 언급하신 것 즉 애통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 책 전체에서 당신은 우리가 ""애통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이것이 현대 교회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재발견할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 잊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을 항상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주 애통하는 것이 고통의 극복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시편을 묵상할 때는 자주 애통의 시편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이 제 인생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묵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기쁠 때도 애통의 시편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적인 훈련으로 제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친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 끔찍하고 누추한 난민 캠프에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건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그들을 끌어안으려는 애통의 시편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애통이 사순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재림절에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우리가 시편 22편, 42편, 88편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져올 수 있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라고 십자가에 기도하신 것처럼 예견될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그 기도들은 어두움의 터널 끝에서 빛이 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시편 88편처럼, 그렇지 않고 어둠 속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책 끝부분에서 교회와 다양한 폐쇄 명령 대응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 온라인 모임을 중단하고 예배를 재개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신앙이 사적인 활동이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우리도 모르게 심화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셨습니다예배에 대한 요구와 공중 보건의 중요성 사이에 충돌하는 생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저는 루터가 감염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점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교회 건물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화를 당할 것입니다. 사실, 영국 대부분의 교회들은 오래된 건물들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소독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라인 예배로 인해 “이제 우리는 직접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영적인’ 영역이니까요.”라고 생각하며 쉽게 유혹 당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팀 스포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서 연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빨리 현명하게 다시 모일수록 좋습니다.

성찬식을 받는 것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화면을 통해서 성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몸, 즉 하나님의 백성인 더 큰 가족이 우리와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금식, 결핍, 고립의 감정 또한 수반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죄와 고통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응이 ‘행위’이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렇다면 수고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그렇다면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안디옥의 제자들이 예언자로부터 큰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사도행전 11장의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가 나신 것일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뜻인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가 가장 위험에 처했는가? 우리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보내야 할까?”와 같은 현실적인 질문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를 실행하여 가난한 교회를 위한 부조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29–30절).

맹인으로 태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요한복음 9장의 시작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가차없이 실용적인 방식으로,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 묻는 제자들을 단념시키십니다(3절).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도록 원하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 친구, 가족들로부터 시작해서 음식이나 생활용품, 의료용품을 누구에게 가져다 주어 도울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푸드뱅크를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일에 관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의 질문은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톰 라이트의 저서 <점령: 기독교 혁명이 세상을 어떻게 재구성했는가>에서 역사가 톰 홀랜드는 교회가 수행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더 넓은 세속 사회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도 중대하고 긴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그런 일을 한 것은 기독교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 기독교적 사상이 세상으로 전해졌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예전부터 의료지원,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과 교육 등의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방식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유행병이 일어나는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아야 하며, 기독교인들은 그 전통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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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졌다는 아픔 경험을 가진 입양아들

우리는 아이들을 섬기려고 하는가, 아니면 섬김을 받으려 하는가?

Christianity Today July 29, 2020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 Source Images: ChatchaiWA / Jessica Peterson / Getty Images / WikiMedia Commons

입양아를 어느 가정에 보낼 때 ‘영원한 가족’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는데, 이는 아이가 이제 법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새로운 가정에 속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출생 가정으로부터 버려진 후에 어떤 아이들은 그다음 첫 번째로 입양된 가족과 계속 생활한다. 하지만, 출생한 가정에서 어떤 사연에서든 버려진 아이는 새로운 가정에 입양하여 안정을 찾게 되고,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원래 가족이나 문화를 ‘영원히 못 볼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보다 극단적인 결말을 이야기해 보겠다. 최근 소송에 따르면, 캔자스 위탁 보호소의 일부 아이들은 100개가 넘는 가정을 떠돌았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거쳐 간 여러 보호자를 ‘영원히 못 볼 가족’이라고 말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입양된 한 아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유명한 소셜 미디어 인플루엔서인 마이카 스타우퍼(Myka Stauffer)는 입양한 헉슬리가 그녀의 가족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파양에 대한 사과 영상을 게시했다.

“입양 절차를 시작할 때 제가 너무 미성숙했던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저는 신중한 선택을 하지 못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겨우 하루 동안 온라인 비디오 교육을 받고 헤이그 입양 인증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대중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의 진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때도 있고, 그 의도한 목적이 달성된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입양이 하나의 제도로서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경험으로써 이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떤 아이가 나에게 “중국놈, 일본놈, 더러운 무릎 좀 봐!”라고 말하며 눈과 손가락으로 동시에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아이들 앞에서 자기 옷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남자아이가 운동장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만 다른 인종의 입양아로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이질적이고, 열등하고,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고 내가 그곳에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께 그날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학교의 모든 선생님은 백인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그런 사건들을 혼자 간직했다. 그런 사건들은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고 결국 나중에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입양은, 어쩌면 개혁과 구원이 필요한 제도일 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의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통해 누군가는 더 나은 인생을 얻게 되고 다른 누군가는 더 힘든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스타우퍼 가족의 이야기로 인해 더 중요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자. 국내 입양이든, 국제 입양이든, 같은 인종 입양이든 다른 인종 입양이든, 입양은 애초에 ‘관계의 해체’이다.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준비의 필요성을 알아야 하며, 더 나은 어떤 인생과 누군가를 위한 길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TED 강연에서 성인이 된 입양아 사라 존스는 세 살 때 한국에서 입양되었을 당시, 인생에서 엄청난 경험을 하며 6개월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회상했다. 다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존스가 영어로 처음 한 말은 “사라 슬퍼”였다.

관련 연구 결과를 보면, 정신적 지지가 입양 경험에 본질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성인이 된 입양아들은 제도를 바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입양아를 보는 시각과 다루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간곡히 요청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관심이 있는 가족들을 위해 내 블로그에 그 목록을 올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현재의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며, 관계의 망가짐이 전혀 없는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 그러나 아직”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일을 하시는 분은 그분이시다. 우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의 일꾼, 대사로 보냄 받았다.

우리가 제도적으로 타락한 세상을 방관한다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구주의 손과 발을 보여주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부름을 받을 수 있을까? 의도적이든 부차적인 영향 때문이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제도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이자 성인이 된 입양아인 내가 갖고 있는 직업적 소명은 이러한 질문들을 양부모와 입양 공동체 안으로 가져가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양아의 정신건강

우선, 입양과 관련된 필요는 종종 다른 정신건강의 필요를 동반한다(comorbid). 이것은 입양 부모를 위한 단순한 건강 검진이 아니라, 입양 부모의 돈을 사용하는 시스템에 대한 기관 평가이며, 궁극적으로는, 출생과 포기, 비영구적 입양을 경험하면서 충격을 받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요구다.

Comobid라는 용어에서 Co는 연결, 상호, 또는 공통을 의미한다. Morbid는 질병을 나타낸다. 정신건강 용어로서의 동반이환(Comorbidity)은 한 사람에게 두 개 이상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은 여러 증상을 진단(PTSD, 우울증, 불안, 반응성 애착 장애 등)하여 분류하는 데 사용된다. 모든 임상의는 통계 매뉴얼 라벨을 실제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데 의미를 두지는 않으므로, 마치 그것이 어떻게든 고쳐져야 할 문제인 것처럼 일종의 병리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용문에 ‘증상’이라는 용어를 넣었다. 이는 보험에 가입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도움이 될까? 가끔은 그럴 것이다. 또한, 독특한 경험, 일련의 증상과 투병을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유명한 정신과 의사 베셀 반 데르 콜크는 이렇게 말한다. “20대가 되기 전에 많은 환자에게 이런 인상적이면서도 의미 없는 라벨이 4개, 5개, 6개 또는 그 이상 붙었다. 그들이 치료를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들은 약물, 행동 수정 또는 노출 치료와 같은 관리 방법으로 알려진 모든 치료를 하게 된다. 그러나 효과가 거의 없고 종종 증상이 더 심해졌다."

양쪽 입장에서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위탁 자녀와 입양아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겪을 수 있는 몇 가지 흔한 병명을 나열한 DSM-5이다.

불안 장애

조정 장애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아동기 강박 장애

행동 장애

반대 반항 장애

반응성 부착 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입양아이자 임상의로서, 지금도 누군가가 이 증상들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상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병명 중 하나만 골라 보라. 일부 연구에 따르면 ADHD는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입양아 사이에서 더 높은 확률로 발병한다고 한다. 이는 신생아가 처한 열악한 상태, 간병인과의 분리 또는 위탁, 입양 과정에서의 방치로 인한 스트레스가 증가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인생의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요인도 추가된다. 만약 신생아나 영아가 의미 형성에 몰두한다면, 정서적‧인지적‧신체적 발달과 관련된 다른 부분의 발달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ADHD는 유전적 구성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입양 부모의 중독, 우울증, 학대 및 기타 요인의 유전적 영향 또한 고려해야 한다.

관련 모든 진단 결과에서 보이는 중요한 교훈은 위탁과 입양 배치가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거나 보호의 요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가끔은 둘 다 작용하기도 한다.

임상 진단 결과에 상관없이 일부 입양아들은 생물학적 부모의 죽음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언어에 대한 논의를 위해 캐나다 오리진스의 전무인 발레리 앤드류스의 글 참조).

가장 처음 애착 관계를 형성한 생물학적 부모는 심리적으로는 잔재하지만 육체적으로는 부재한 상태인데, 사회복지사이자 교수이며 입양아인 김재란은 이러한 규정되지 않은 상실에 관한 생각을 글에서 밝혔다. 그리고 입양아가 그 상실을 이겨내기 위한 사회적 인정이나 문화적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치유는 더 어려워진다. 이 무효화는 박탈된 슬픔이라고 불린다. 나는 불임으로 고생하는 부부에게 “왜 감사할 수 없습니까?”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입양과 위탁 가정을 떠도는 어린이들을 민감하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하지 못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타인종 입양과 백인 우월주의가 공존하는 이 나라의 복잡한 상황들을, 인종 집단들 사이에 불평등을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조장하거나 유지하는 법률과 정책들을, 개인적(내면화된, 대인관계의) 인종차별과 체계적(제도적, 구조적) 인종차별을, 인종적 학대(미시 폭력)를, 그밖에 다양한 형태의 인종적 억압을 고려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아기를 가정에 입양하라고 허용하면서도 그들의 동료와 부모들에 반하는 장벽과 규칙과 태도를 부과하는 모순이 존재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아이들도 이것을 알아차린다.

동반이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입양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입양아가 임상적으로 심각하게 정신건강의 필요성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입양을 통해 영원한 것을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을 병리학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 주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싶다. “우리 부모님은 최고였어요. 감사하는 마음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입양아들의 말만 귀 기울여 듣는다면, 당신은 가족을 위해 해야 할 충분한 필수적인 학습을 놓치게 될 것이다.

입양은 당연하게 여겨 온 일상을 흔들어 놓는 일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러 상황을 입양, 위탁 관리, 재가정화, 해체, 붕괴, 혼란 등의 단어로 부를 수 있지만, 우리가 뭐라고 부르건, 실제 경험을 하는 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입양(또는 “재가정화”)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며 판단하려는 사람이 아니며 어떠한 기관에 속한 사람도 아니다.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는 그곳에 없었잖아.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일 뿐이야.”라고 내 친구가 최근에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징벌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입양에 관한 현재의 법률, 정책 및 신념이 왜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지 생각하여 공동체로써 재정립이 필요하다. 현재와 다음 세대의 입양아를 고려한다면, 결정권이 있는 권력자와 관련 지도자, 정책 입법자와 중재자들에게 더 제대로 일하라고 요청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무엇(또는 누군가)으로 대체한 것은 아닌가? 작가이자 신학자인 폴 트립은 그의 책에서 부모가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한 목적으로 자녀를 이용하는 경향을 명시하고, 이는 자신들의 욕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강탈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입양은 가족과 기관을 대신하려는 왜곡된 욕망을 가진 자들이 인류의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인도주의 노력을 가장해 번성을 꾀하는 기회라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입양은 거래적 속성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학자 엘레나 김은 사회학자 새라 도로우의 말을 인용하면서, 입양아들은 상품화에 취약하다고 기술한다. “국제입양아들은 사고 팔리는 것이 아니지만 자유롭게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그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기관들은 교환, 의미, 가치가 뒤섞인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돌봄이자 소비다.”

엘레나 김은 이렇게 상품화와 보살핌이 밀접하게 겹쳐지면 ‘양육 부모’와 ‘소비자 부모’를 구분하거나 인도주의적 동기와 자기중심적 동기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인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대사로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신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아이들을 신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그리고 입양아들은 언제부터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닌 우리와 우리의 욕망 사이의 장벽처럼 보이기 시작했을까?

일반적으로 입양기관은 혼외 출생한 아이들의 사회적 낙인, 정신건강 인식과 훈련 부족, 교육의 장벽, 수치심에 기초한 가족의 가치, 가난, 자존심, 민족주의, 능력주의, 인종차별, 종교, 강압, 성폭력 등 더 큰 문화 및 제도적 힘의 체계 안에서 공생적인 역할을 한다. 사후 관리가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관이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필요한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행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입양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섬기려 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그가 구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고통을 받았다. 그는 고난을 직면했다. 입양부모(입양아뿐만 아니라)도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인간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야고보서 1:27)처럼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우리 능력 이상의 일이므로 그리스도께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왜곡된 동기를 따라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영역이나 분야의 숙련된 전문가에게 우리의 필요를 맡길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단계에서 이치에 맞는 시간과 상황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입양의 대가를 측정하고 기관들이 잘못을 숨길 때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겨야 하는 영역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과 희망을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분명히 느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향해,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도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카메론 리 스몰은 한국에서 친모를 만난 뒤 2012년부터 신앙, 아동복지, 정신건강에 대한 의식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 아내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온라인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Books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저자, 93세로 소천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가 교회를 위한 마지막 교훈을 남겼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시오.”

J. I. Packer

J. I. Packer

Christianity Today July 18, 2020
Courtesy of Cross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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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제임스 패커로 더 잘 알려진 제임스 인넬 패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7월 17일 금요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제임스 패커는 1926년 7월 2일 영국 글로스터 외곽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잘것없는 하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말했다. 당시 그의 가정과 교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복음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명목상 성공회에 가까웠으며, 패커는 그의 가정 교회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패커의 인생을 꾼 어린 시절의 경험은 7살 때,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로부터 학교운동장부터 글로스터의 번화한 런던 도로까지 도망치다 차에 부닥쳐 머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머리 쪽에 눈에 띄는 움푹 들어간 흉터를 갖고 살았다. 그런데도, 패커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사고보다 패커의 인생에서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은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으로 입학한 지 2주 만에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것이었다. 패커는 1944년 10월 22일 캠퍼스 IVF 지부가 후원하는 복음주의 봉사에 참석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제임스 패커는 학업에 열중하는 진중한 학생이었지만, 옥스퍼드에서의 그의 삶의 핵심은 영성이었다. 패커가 C.S.루이스의 강의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옥스퍼드에서였다. C.S.루이스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지만 C.S.루이스는 패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커는 1952년 리처드 백스터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를 떠난 후 학자로서의 경력을 즉시 시작하지 않고, 버밍엄 교외의 교구 목사로 3년의 임기를 지냈다.

제임스 패커는 다양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직장생활의 처음 절반은 영국에서 했고, 후에는 캐나다로 갔다. 영국에서 패커는 브리스틀의 신학교에서 다양한 교수직에서 재직했으며, 그 기간에 그는 옥스퍼드에서 영국 교회의 복음적 연구를 위해 설립한 정보센터 라티머하우스의 소장이자 감독으로서 10년간 일했다. 이를 통해 패커는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패커가 1979년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대학으로 이주하면서 복음주의 교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영향력을 확대했다.

제임스 패커는 성공 윤리를 거부한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성공담이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1958년 초판)은 첫해에 2만 부가 팔렸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인쇄되었다. 2005년 타임스 잡지는 패커를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

CT가 복음주의에 영향을 끼친 상위 50권의 책을 설문 조사했을 때, 제임스 패커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5위에 올랐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가 이루고자 목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공을 좇는 일을 지속해서 거부했다. 대신, 그는 타자기로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그는 평생 글과 책을 집필할 때 타자기를 사용했다).

제임스 패커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교직을 생업으로 삼았고 학생들은 그를 교수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제임스 패커를 작가이자 연사로 알고 있다.

연사로서의 패커의 명성은 작가로서 그의 위상과 맞먹었다. 두 분야 모두에서 그의 관용은 탁월했다. 패커에게 너무 작은 청중이나 장소는 없었고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의 출판 경력은 사실상 그가 모든 글 청탁을 받아준 결과였다. 그의 저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100만 부 판매)은 한 작은 복음 잡지의 편집자가 요청한 일련의 격월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한 그룹 학생들과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발행자가 소책자 제작을 요청했지만, 패커는 책을 썼다). 아마도 역사상 누구도 패커보다 다른 책에 많은 추천서와 서문을 더 많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출판물과 연설을 통해 알려진 대로 패커는 청교도 학자로 유명했지만, 그는 헌신적인 성도였으며, 기본적으로 미래의 목회자 교육 양성을 가르침에 힘썼고, 교회위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 25년간, 패커는 CT를 통해 종종 문화 비평 주제를 다루는 수필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패커가 직접 말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력을 가졌지만, 일관되게 신학자로 자신을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본 소명이 신학자라고 여긴다.

고인이 된 분이 남긴 유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예측 불가능한 추론적 사후의 유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패커의 주요 유산은 그가 평생 전 세계 기독교도들과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패커가 그의 생애 동안 기독교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강조하려고 한다.

패커의 첫 번째 책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변호였으며, 이것은 평생의 열정이자 복음주의 교회에 대한 패커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남았다. 패커는 성서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믿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오래된 교리를 옹호했고, 성서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영어 표준판 성경 작업의 편집장으로 봉사하면서 그 프로젝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로 여겼다.

제임스 패커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논의할 기회를 주었다.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큰 패커의 유산은 고향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대학생으로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의 서적을 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자유주의 추세와 공격에 직면하며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대변인으로서 패커의 행보는 일생 했던 그가 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일이다. 패커는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에서의 10년간의 리더십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보며, “무오에 대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은유는 패커가 최선을 다했던 여러 이유를 설명해준다. 패커는 성경의 본질과 해석,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같은 수많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선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를 바라본 전통주의자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는 예레미야 6:16을 인용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책을 통해 그 오래된 길을 따르라는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패커의 삶에서 일관된 또 다른 주제는 평범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 또한 그의 유산 일부이다. 패커는 자신이 어린 시절 평범함 사람들에게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았으며, 후일 이 정신으로 청교도로서의 정체성을 키웠다. 그는 최고 수준의 전문 학자들을 위한 학문을 집필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소명은 평신도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에게 출세 제일주의는 전혀 없었다. 제임스 패커에게 헌정하기 위해 출판된 논문집의 제목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신학>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패커를 신학자가 아닌 신학 연구가라고 불렀을 때 패커는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인정하며 스스로 일반 기독교인을 위한 체계적인 교리를 연구하는 “전도사”라고 결론을 내렸다. 패커는 평신도를 위한 비공식 신학적 저술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자신만의 체계적인 신학을 완성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다른 학자들처럼 괴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생 제임스 패커의 유산 중 하나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감을 주는 패커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이었다. 매 순간 그의 경건함이 드러났으며, 그의 존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의 말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가 사모한 청교도들처럼, 패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분명한 사고에 근거하고 동시에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제임스 패커는 최고의 영국 신사적 매너로 정확하게 이야기했지만, 영적인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운 좋게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 안에서 마음이 맞는 신앙의 협력자로서의 면모를 가진 패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진정한 영적 기록을 그의 삶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제임스 패커의 글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점과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을 나타낸다. 그의 유산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주제를 정하고, 올바른 것에 관심을 두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의 우선순위 목록에는 성경, 교회, 올바른 신학, 삶의 거룩함, 소명이 있었다. 패커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던 이유는 그가 적극적이고 넓은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삶과 관련된 모든 주제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에 관한 열정을 모든 분야에 갖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 패커는 역설적인 사람이었다. 평생 헌신적인 성공회의 일원이었지만, 복음주의 개혁주의자 사이에서도 똑같이 수월하게 일했기 때문에 아마도 개혁주의 영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국인이었지만 캐나다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며, 게다가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은 미국이었다. 패커는 당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주요 대학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지 않았으며, 교단에서도 단 한 번도 주목받는 높은 자리를 오래 맡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성향이 있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논쟁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자신을 주장했으며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조용한 사람이 어떻게 유명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책이 수단이 되어 그의 생각이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기록되고 출판된 그의 힘 있는 글을 통해 기억될 것이다. 제임스 패커는 책의 영향으로 인해 유명한 연사가 되었다. 글을 쓰고 말하면서, 그 내용은 항상 사려 깊고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명확하며 실용적이었다.

제임스 패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으며, 이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는 유명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 앞에 놓인 임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다. 패커는 거실에서 십 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화려한 강단에 서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다.

2016년 그가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 더는 글을 읽거나 자유롭게 거동하거나 공식 석상에서 말할 수 없게 되면서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제임스 패커에게 교회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그가 일생을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묘비명에 새길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Leland Ryken은 50년간 재직한 Wheaton College의 영어학과 명예 교수이다. 그는 <제임스 패커: 복음생활>[JI Packer : Evangelical Life]라는 제목의 제임스 패커의 전기를 작성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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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포옹을 해야 하는 이유

세균에 대한 혐오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을까? 한 심리학자가 팬데믹 시대에 접촉의 위험과 이점을 논한다.

Christianity Today July 9, 2020
Ocamproductions / Lightstock

신선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라. 하지만 주스 속에 바퀴벌레를 떨어뜨리고, 이리저리 휘젓고, 바퀴벌레를 제거한 후, 잔을 건네 준다. 당신은 그것을 마실 것인가? 물론 마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실험자가 같은 주스 잔을 가져가서 수돗물을 정수하는 데 사용하는 필터로 그 주스를 거르고, 끓여서 살균하고, 다시 한 번 더 여과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제 주스를 마실 것인가? 그래도 당신은, 이 실험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마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적으로 주스가 ‘깨끗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떤 본능적인 이유로는 그것을 마실 수 없을 것이다. 이 본능적인 반응은 심리학자들이 혐오라고 정의하는 것이며, 이 반응을 감염 심리라고 한다. 역겨움에 관한 한 우리의 이성과 감염 심리는 서로 상충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가 주스와 바퀴벌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라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누군가와 접촉한다. 이 바이러스가 치명적일 수 있다면? 이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악수를 하거나 그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할 용의가 있는가?

전염병 전문가인 앤서니 파우치는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이후에도 미국인들이 다시는 악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파우치는 악수를 제거함으로써 인플루엔자와 같은 전염병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고든 칼리지 생물학 교수 크레이그 스토리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교회에서의 더 나은 위생 관행이 질병의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감염 심리학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과민반응을 일으켜 우리의 정신 건강에 필요한 인간적 접촉의 결핍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감염의 첫 번째 고비를 넘기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교회에서 포옹과 악수를 하는 것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평화의 통과’ 즉 손을 얹는 것, 기름으로 기름을 부는 것은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소모임, 교제, 사적 모임, 예배를 어떤 형태로든 다시 재개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는 온라인 예배가 드려지는 이 시기에 교회 출석과 심지어 재정적인 기부조차도 실제로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 소강 상태에서 온라인 예배를 고수하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없을까? 이 대유행이 공식적으로 종식되면,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 우리는 모든 신체적 접촉과 근접을 제거한 채 안전을 선호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안전을 위해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여하기를 원할까? 감염 사례, 입원, 사망수의 증감에 따라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혐오의 숨겨진 논리

무엇이 안전한 행동인지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공중보건 전문가 다니엘 진은 지역 보건 자료를 바탕으로 교회에서 직접 만나는 것을 엄격히 수정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파우치처럼, 일부 역학자들은 안전과 보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활동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주, 뉴욕 타임스는 511명의 역학자들에게 언제부터 사람들이 포옹하거나, 저녁 파티를 하거나, 활동을 하며 다시 휴가를 갈 수 있는지 예상하는지 물었다. 답변은 광범위하게 나뉘었지만 42퍼센트는 1년 이상 포옹과 악수를 포기할 것으로 예상하는 반면 39퍼센트는 3-12개월의 기다림을 예상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긴밀한 접촉을 감시해야 하며, 새로운 온라인 세계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의견이 위험을 과대평가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또 다른 최근의 기사에서 공중 질병 전염 전문가에게 포옹이 얼마나 위험한지 물었다. 공중 입자를 연구하는 과학자 린지 마르는 바이러스를 잡는 데 필요한 복용량을 고려한 수학적 모델을 기준으로 측정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할 때의 위험은 실제로 상당히 낮지만, 마스크를 쓰고, 울거나 기침을 하거나 말을 하지 않고, 그 후에 손을 씻는 등 더 안전하게 포옹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예방 조치를 제공했다.

일반 대중의 의견에 따르면 파우치와 다른 전문가들이 신체 접촉을 걱정하는 견해를 존중한다면, 그것은 ‘혐오의 심리학’에서 발견되는 더 깊은 무의식적 동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TV에서 보는 작고 울긋불긋하고 뾰족한 코로나바이러스 단백질이 우리 모두에게 혐오감을 유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혐오는 인간에게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핵심 혐오는 인간들이 위험한 물질을 섭취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자신의 몸에 무엇을 섭취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 경계 체계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가면 위축과 회피를 거쳐 거부, 퇴치, 제거까지 이어질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불편함과 죽음을 피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혐오감은 또한 도덕적(예: 역겨운 행동), 사회적(예: 역겨운 사람), 종교적 상황(예: 역겨운 부도덕함을 피해야 한다)을 포함한 다양한 다른 자극과 연결되는 "혼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혐오는 일종의 비이성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아빌렌 크리스천 대학의 리처드 벡은 그것을 ‘주술적 사고’라 부른다. 그가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우리는 혐오스러운 것이 우리를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감염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접촉’의 논리가 적용되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적용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핵심 혐오는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시작되지만, 혐오의 비이성적인 논리는 세균에서 사람으로 빠르게 퍼질 수 있다. 폴 로진과 동료들은 이 주술적 사고가 어떻게 혐오의 논리와 감염의 네 가지 원리를 초래하는지 설명했다. 첫째, 접촉은 항상 감염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감염된 원소의 미세한 양조차도 해롭다. 이것을 최소량 무분별(dose insensitivity)이라고 한다. 셋째, 영구성, 곧 일단 어떤 것(또는 누군가)이 감염되면 정화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부정성 우세, 곧 감염 물질과 순수한 물체가 접촉할 때 감염 물질이 더 강해지고 순수한 물체를 파괴한다는 믿음. 감염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합리적인 지식에도 불구하고(주스는 살균되었다), 감염의 논리는 우리가 떨칠 수 없는 본능적인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리 멀지 않은 예가 에이즈 전염병의 시작이다. 에이즈가 처음 등장하고 대중이 그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감염을 두려워하여 그 환자들은 피하고 외면했다. 전파 방법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워했다. 에이즈 환자들은 자신을 향한 혐오감을 느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잠재적인 보유자들을 역겹다고 규정하는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발병 초기에 보이는 아시아인 혐오 정서를 기억하면 된다. 그러한 반응들은 분명히 인종차별이고 정당하지 않았지만, 감염의 논리와 결합된 바이러스에 관한 혼란스럽고 잘못된 정보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잠재적인 감염 물질로 보기 시작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혐오의 논리를 가진 사람은 멀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가상 세계가 ‘충분히 좋다’고, 타인과의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똑똑하고 안전하며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야 하지만 혐오라는 주술적 사고 논리는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위험을 과대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접촉의 중요성

혐오감이 서로를 밀어내게 할 수도 있지만, 심리학 보고서에는 접촉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고아원에서 자란 루마니아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그곳에서 아기들은 규칙적인 일정에 따라 먹고 기저귀를 차고 목욕을 했지만, 흔들어주거나 껴안아주거나 하는 사랑의 접촉은 받지 못했다. 14년 동안 이 아이들을 지켜본 연구원들은 아이들이 언어, 인지 기능, 운동 발달, 사회-정서 기능에서 큰 지체를 보였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일부는 정신과 진단을 받을 만큼 심각했다. 아니면 대부분의 입문 심리학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사례 연구인 지니를 생각해 보라. 지니는 정신질환자 아버지가 길렀는데 아버지는 이 아이를 화분 의자에 묶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자극으로부터 차단했다. 13살에 구조되었을 때, 지니는 걷거나 말을 할 수 없었고 자폐증처럼 보였다. 지니의 결핍은 지능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상호작용의 부족이 원인이었다.

인간은 단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인간으로 성장한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가깝게 접촉을 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유아의 뇌는 출생 후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엄청난 양의 발달을 거친다. 유대감 형성은 피부와 피부의 접촉을 통해 시작되며, 유대감을 통해 아기와 부모 모두 신경 전달 물질 옥시토신을 방출한다. 유아-부모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초기 경험들이 애착 스타일을 형성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분명한 성인기로 연결되는 방식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경우는 어떨까? 확실히, 우리의 뇌가 완전히 발달했을 때, 접촉은 덜 중요할 하지 않을까? UC 버클리 대학교 그레이터굿센터의 교수 겸 전무인 다허 켈트너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켈트너는 인간의 손길이 의사소통, 건강, 유대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한 실험에서 켈트너는 두 피험자를 벽으로 물리적으로 분리하여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한 피실험자에게 한쪽 팔을 벽에 난 구멍에 꽂게 했다. 두번째 피험자에게는 팔뚝만 만져보고 의사소통을 시도하라는 감정 목록이 주어졌습니다. 정확한 감정을 정확하게 추측할 확률은 8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켈트너의 연구에서 피실험자들은 연민의 감정을 60퍼센트 확인할 수 있었다.

접촉은 관대함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 켈트너는 참가자들이 “죄수의 딜레마”를 연기하는 관련 연구를 언급하는데, 피실험자들은 제한된 금액의 돈을 위해 협력하거나 파트너와 경쟁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등을 두드린 피험자들은 파트너와 돈을 나눌 가능성이 더 높았다.

접촉은 심지어 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부모나 유아와 마찬가지로 성인 간의 접촉도 옥시토신을 분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부르며 유대감과 신뢰감을 증가시킨다. 연구에 따르면 터치의 진정 효과는 심혈관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과 관련이 있고, 포옹은 심박수와 혈압을 낮추어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접촉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접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professional toucher) 즉 지압사, 물리치료사, 마사지 치료사, 무술 강사 등을 찾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병원에서 유기적인 원인이 없는 질병에 대한 신체 검사를 기다리며 의사의 접촉을 기다린다”고 수잔 K. 파버가 <사이콜로지 투데이 (Psychology Today)>에 기고했다.

성경에서 본 혐오의 시각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핵심 혐오가 도덕적, 사회적, 영적 상황과 연결될 수 있다면,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의 행동 중 일부는 이치에 맞는다. 바리새인들은 단순히 고압적인 법학자가 아니라 감염(즉, 도덕적 불순물)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핵심 혐오는 비합리적인 감염 논리를 통해 특정 행동과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그 후 근접과 접촉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전염병을 겪은 이후 사람들은 혐오감을 숨긴 채 온라인 예배에 만족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감염의 ‘주술적 사고’와 혼잡한 성격에 대해서만 아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다 알려주신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은 병들거나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을 환영하신다(마태복음 14:34–36, 마가복음 3:7–12, 누가복음 4:40). 예수님은 말씀으로 부정한 사람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셨고 때로는 치유하기도 하셨지만, 그들을 만지는 것을 더 선호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마가복음 1:40-44)를 만지시고, 자신의 입에서 나온 침으로 맹인과 벙어리를 치유하시고(마가복음 7:31-37, 요한복음 9:1-7), 죽은 자에게 손을 뻗어 만지시어 살아나게 하셨다(누가복음 8:40-56).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는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치유된다(누가복음 8:43-48). 예수님에게 접촉은 중요하며, 그는 손댈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셨다. 어쩌면 손길로 인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이전에 이 사람들을 보고 혐오감을 가지고 대했던 공동체를 화해시키신다.

복음서에서 기록된 예수님의 행동은 로진이 개략적으로 설명한 전염의 네 가지 원칙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예수께서는 아주 작은 감염 물질이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근접성과 감지불능에 대한 두려움을 깨뜨린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차별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 논리를 부인하신다(누가복음 19:1-10). 영속성 이론은 "한 번 감염되면 항상 감염된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는 누구나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증명했다 (누가복음 7:36-50, 요한복음8:1-11).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정성 지배의 논리, 즉 부정한 것이 깨끗한 것을 지배한다는 생각에 맞서서 예수께서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질병이나 죄가 다른 사람들을 불결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는 감염을 극복하고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감염과 혐오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신다. 예컨대, 예수님은 접촉을 통해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부정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신다. 사람들은 용서받고 치유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의 공동체로 돌아간다. 예수님은 본능적 혐오, 회피, 수치심 등의 충동을 따르지 않으시고 따뜻한 환대로 이웃을 사랑하신다. 그는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신다. 물론 의식의 부정과 바이러스 전염은 같지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혐오감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질병의 가장 큰 위험은 혐오감이 단순히 생물학적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사람들에게 남아 타인을 피하고, 잘못된 것에 몰두하며, 결국 접촉, 근접성, 그리고 교회가 주는 이익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위험할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

물론, 우리는 현명하고 안전하게 대처해야 한다. 당연히 현장 전문가들의 말을 듣고 지도자들이 제시한 관행을 따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유를 가장해 일부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규칙을 과시하려는 요구가 아니다. 즉, 공동의 책임보다 개인의 권리를 더 많이 준다는 얄팍한 은폐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교회 예배에 돌아가거나 어떤 형태로든 모이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지역사회에 다시 완전히 참여하기 위해 대처할 수 있을까? 예견된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접촉에 대한 연구와 성경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그것이 맞다고 말한다. 혐오는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전략이다. 하지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는 언젠가 두려움과 연약함을 극복하고 실천하도록 소명을 받아 평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식사를 나누고, 함께 예배하고, 삶을 영위할 것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나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약함, 우리를 향한 뜨거운 환대, 망가진 사람들, 부정한 사람들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셨다.”(히브리서 2:15).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위기가 다가왔을 때,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동네로 대담하게 이동하여 뜨거운 환대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러니 언젠가 서로에게 거룩한 악수나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고 손을 얹고 기름을 부어 인사를 나누기를 기대해 보자. 그것은 분명히 가치가 있다.

브래드 스트론(Brad D. Strawn)은 풀러 신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심리학자이며 나사렛 교회의 장로이다. 워렌 브라운과 공동 집필한 Enhancing Christian Life: How Embodied Cognition Augments Religious Community가 InterVarsity Press에서 출판되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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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새로운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사중복음 교회

인구 통계학적 변화와 외국인 선교사 증가의 관점에서 오순절주의는 ‘하나님께서 미국에서 하시는 일’을 환영한다.

Christianity Today July 9, 2020
Delphine Lee

마우리시오 로드리게스(Mauricio Rodriguez)는 안젤루스 성전(Angelus Temple) 국제사중복음교회에 속해 있는 오순절 교회)의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는 1988년에 니카라과에서 내전을 피해 이민자의 신분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이 교회에 온 그와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에게 이 교회 교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미소와 포옹을 기억한다. 그날 그의 가족들이 이 교회에 간 이유는 음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국제사중복음교회를 설립한 유명한 부흥운동가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은 대공황 중에 시작한 사역의 일환으로 안젤루스 성전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설립 초기부터 다국어 사역을 했고 오랫동안 다문화 리더십을 옹호해 온 사중복음교회가 이제 교단 차원에서 일할 다문화 옹호 활동가를 처음으로 채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 시점에, 그는 지난 날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로드리게스는 2019년 1년 임기로 이 사역을 시작했다.

로드리게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로드리게스가 말했다. “제가 영어도 모르는 3살짜리 이민자 소년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언어 장벽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떠한 것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사중복음교회들을 시작하는 타언어 및 인종의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목격했다.

이 미국 교단에는 33개국의 주요 언어를 사용하는 74개국 출신의 사역자들이 있다. 또한 477개의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지역 교회들이 교단의 공식 사역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 교단 지도부는 2020년에 200개를 더 시작할 것으로 기대한다.

“행정의 관점에서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쉽습니다.” 로드리게스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관점이 바뀝니다. 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교회의 관리자나 구역장 또는 직원과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으로 가서 현장 사역자들의 관점으로 보고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역 프로세스를 평가할 때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한 가지는, 대부분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9월에 로드리게스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댄 조(Dan Cho)는 다른 문화에서 온 목회자들에게는 이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박해 때문에 개인 정보를 웹 사이트에 올리거나 정부가 정보를 아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 국가에서 왔습니다.” 조가 말했다.

그들은 ‘자기 주도적’ 온라인 프로세스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온 문화의 많은 부분이 미국의 개인주의와 효율성의 가치보다 공동체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된 일부 단어와 개념은 정확히 번역되지도 않는다. 이중 직업을 가지고 있는 네팔인 목회자는 사역하는 데 몇 시간을 소요했는지에 질문을 받자 당황했다. 보건 의료인이기도 한 그 목회자는 직업과 사역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개념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로드리게스에게 보건 분야에서 하는 자신의 역할을 사역의 일부로 본다고 말했다.

로드리게스 또한 이야기한다, “저도 그런 질문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로드리게스는 지난 12월에 1년간 임기를 마쳤다. 그와 조는 1월 첫째 주에 사중복음교단 집행부에 조사 결과와 제안을 발표했으며, 교단은 다양성 옹호 직무를 영구 직무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조가 임명됐다.

로드리게스의 임명은 미국의 역사‧인구학적 변화―미국 통계청은 2044년이 되면 미국 인구의 과반수가 백인이 아닐 것으로 예측했다―에 대한 이 교단의 사역 대응의 일환이자 언어와 문화와 민족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고 환대하는 이 교단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오순절 교단은 다문화주의를 지향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925년부터 스페인어, 일본어, 독일어로 주일학교 수업을 제공하고 있다.

작년에 미국의 다문화 사역을 포함한 북미 선교를 감독하도록 임명된 에밀리 플래터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다문화 사역이 우리의 중요한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단이 생긴 이래로 계속 말입니다.”

2018년 9월에 이 교단은 “사중복음교회의 다양성 서밋”을 주최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이 교단 중앙 사무국에 약 70명의 교단 지도자들이 모여 다양성에 대한 신학적 중요성과 다양한 공동체 지원에 대한 교단의 노력에 대해 논의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폭넓은 문화적 대화가 오가고 있지만, 교회는 사실상 고대의 성서적 수준의 대화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플래터가 말했다. “우리가 교회나 교단으로서 하는 일의 맥락 속에서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복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절대적 헌신을 토론하고 평가하는 것은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일입니다.”

이민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의도적인 조치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환대하고 인종 및 문화적 다양성을 장려할 필요성을 강조하기만 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미국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 민족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미국에서 하시는 일에 동참시킬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앨라배마 주 매디슨에 있는 회복사중복음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이 교단 이사회 회장인 휴이 허드슨이 말했다.

이 교단은 또한 이민 변호사 데브라 바야다레스를 파견하여 교회 내 이민자들이 미국의 복잡한 법적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국제사중복음교회는 변화의 시기에 들어섰다. 올가을에 랜디 레밍턴을 이어 이 교단의 지도자로 글렌 버리스 주니어가 임명될 예정이다. 그러나 리더십이 바뀌더라도 계속해서 다양성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된다.

“이 교단의 고위 리더십은 항상 새롭게 이러한 프로젝트를 뒷받침해 왔습니다.” 조가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성도들을 이끌어온 교단이 ‘못할 얘기는 없다. 무엇이든 볼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꿀 수 있다’라고 기꺼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드리게스는 이것이 사람들을 마치 가족처럼 돌보는 것이 의미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는 1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을 떠나 니카라과로 돌아가 ‘트리오브 라이프 84(Tree of Life ’84)라는 젊은 어머니들을 위한 비영리 사역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알젤루스 템플의 성도들이 30년 전에 그의 가족을 환대했던 것처럼, 이 교단이 앞으로도 모든 민족과 언아와 나라의 사람들을 계속 환대하고 섬길 것이라고 희망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로드리게스는 말했다. “이 교단에 속해 있는 우리는 이 나라에 찾아든 사람들을 만나러 나아갈 것입니다.”

레니 앤더슨(Lanie Anderson)은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신학생이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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