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러셀 무어의 뉴스레터에서 각색한 것이다. 구독은 여기를 클릭.
때로는 짧은 순간에 수십 년간 감추어져 있던 역사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그러한 폭로의 순간에 “그렇긴 하지만…” 혹은 “그렇지만…”이라고 반문하는 말이 들리곤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 테러 공격의 여파는 위와 같은 폭로의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 누가 비난을 받을지 판단하는 것은 사실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다.
“양측주의(bothsidesism)”는 해체주의나 복음주의와 마찬가지로 부정확한 명칭이다. 현실에서 ‘중립’을 호소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양쪽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다. 우리는 서안지구, 가자지구 혹은 그 외 어느 지역에서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 이스라엘인의 목숨은 팔레스타인의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지 않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양측’은 또한 이 잔혹 행위로 인해 누가 피해를 당하였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뒤따를 것인지 정확히 나타낸다. 모나 샤렌이 기사에서 흉내 낼 수 없이 탁월하게 썼듯이 하마스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미래를 죽이고 파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번 전쟁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이스라엘이 정의한 그대로, 악랄하고 전례 없는 공격에 대응하는 하마스와의 전쟁이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하고 소망하는 측면에서도 ‘중립’을 지키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이는 현대국가인 이스라엘이 행하는 모든 것을 무심코 받아들이지 않도록 한다(하나님은 확실히 성경적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타임스퀘어에서 구호 ‘강에서 바다까지’를 외치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바라는 어떠한 견해나 계획도 배제한다. 우리는 ‘양측’(하마스가 아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칭하는 것)이 번창하고 공존하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은 하마스 공격의 도덕성에 대해 일부 대화에서 사용돼 온 ‘양측’ 언어와는 전혀 다르다. 하마스는 무고한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하마스는 음악 축제에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학살했다. 하마스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학적인 방법으로 노인들과 유아들과 아기들을 살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 (및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여기서 희생자로 인정하고, 하마스를 악행자로 인식하기 위해 이를 비난하는 데 필요한 ‘맥락화’는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말했듯이 ‘완전히 멈춰야’ 한다.
다음은 당신이 양심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파에 맡겼다는 것을 알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이다: 만약 명백한 부도덕이나 불의를 보는 것에 대한 당신의 첫 번째 반응이 다음과 같다면, 음,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고, 아무도 지지하지 않겠지만, 피해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도덕적으로 위험한 곳에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리석음으로 이어진다.
그게 당신이 될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철학자 존 롤스의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활용한 것 중 하나가 여기서 도움이 될 것이다.
‘무지의 베일’ 주장은 자신이 사회 시스템에서 어디에 있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고 싶은지 묻는다. 당신이 극도로 가난할 것인지, 엄청나게 부유할 것인지 모른다면 어떤 종류의 사회 안전망을 원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세금 정책을 원하는가?
물론, 이것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을 미리 계획하는 실체 없는 존재로 거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은 우리의 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선조의 시대에 살았다면 2023년에 남부연합을 위해 싸우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내가 1861년 미시시피에 살았다면 내 정신과 양심이 어떻게 형성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내가 1930년대 독일에 살았다면, 나는 도덕적, 신학적으로 타락한 ‘독일 기독교’ 운동에 맞서 고백교회와 함께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섰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내가 거기 있었다면 내 마음이 미혹되었을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의) 연습은 제한적이지만, 우리의 선택이 성경적 신념과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문화적 가정이나 정치적 이념에 의해 우리의 선택이 더 많이 형성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당신이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또는 그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상상해보라. 한 문장을 가지고 관련된 이름을 바꾸어 보아라. 당신은 다르게 대답할 것인가? 왜 그런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 잠깐이라도 멈추고 우리 자신의 동기를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도덕적 함의를 고려하지 않고(왕 22:1-28) 통치자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증언하는 ‘궁정 예언자’를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는 ‘예’를 ‘예’로 하고 ‘아니오’를 ‘아니오’로 말하던 선지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궁중 예언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양심에 따라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아모스 7:13)고 말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당신이 이를 어떻게 보든, 비무장 비전투원의 살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시체에 불을 붙이거나 영유아의 머리를 참수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양측주의의 왜곡된 버전에 무게를 두기 위해 명백한 도덕적 행위를 지나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도덕적 실패가 될 것이다.
나와 같은 미국인 여러분 중에는 9.11테러에 대해 알 카에다 편을 들거나, ‘양측 모두’가 휴전을 선언해야 한다고 반응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진주만에 대해 미국 의회가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이를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대답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질문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내가 옳은 답조차 알지 못할 때는 윤리학과 학생들에게 사례연구를 제공한다. 정확히 똑같은 신학적 전통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인지 진정으로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모순된 선이 있고,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옳은 일을 하는 방법을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상황 중 하나가 아니다.
하마스는 대량 학살을 자행한다. 그들과 공모자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중동 정책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무엇이든, 군사 전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인간의 사악함을 이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러셀 무어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장이자 공공신학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