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하마스에 대한 ‘양측주의’는 도덕적 실패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마스의 대량 학살 행위에는 도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축제에서 하마스에 의해 살해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과 친구들.

축제에서 하마스에 의해 살해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과 친구들.

Christianity Today January 2, 2024
Amir Levy / Stringer / Getty

본 기사는 러셀 무어의 뉴스레터에서 각색한 것이다. 구독은 여기를 클릭.

로는 짧은 순간에 수십 년간 감추어져 있던 역사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그러한 폭로의 순간에 “그렇긴 하지만…” 혹은 “그렇지만…”이라고 반문하는 말이 들리곤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 테러 공격의 여파는 위와 같은 폭로의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 누가 비난을 받을지 판단하는 것은 사실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다.

“양측주의(bothsidesism)”는 해체주의나 복음주의와 마찬가지로 부정확한 명칭이다. 현실에서 ‘중립’을 호소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양쪽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다. 우리는 서안지구, 가자지구 혹은 그 외 어느 지역에서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 이스라엘인의 목숨은 팔레스타인의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지 않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양측’은 또한 이 잔혹 행위로 인해 누가 피해를 당하였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뒤따를 것인지 정확히 나타낸다. 모나 샤렌이 기사에서 흉내 낼 수 없이 탁월하게 썼듯이 하마스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미래를 죽이고 파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번 전쟁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이스라엘이 정의한 그대로, 악랄하고 전례 없는 공격에 대응하는 하마스와의 전쟁이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하고 소망하는 측면에서도 ‘중립’을 지키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이는 현대국가인 이스라엘이 행하는 모든 것을 무심코 받아들이지 않도록 한다(하나님은 확실히 성경적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타임스퀘어에서 구호 ‘강에서 바다까지’를 외치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바라는 어떠한 견해나 계획도 배제한다. 우리는 ‘양측’(하마스가 아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칭하는 것)이 번창하고 공존하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은 하마스 공격의 도덕성에 대해 일부 대화에서 사용돼 온 ‘양측’ 언어와는 전혀 다르다. 하마스는 무고한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하마스는 음악 축제에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학살했다. 하마스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학적인 방법으로 노인들과 유아들과 아기들을 살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 (및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여기서 희생자로 인정하고, 하마스를 악행자로 인식하기 위해 이를 비난하는 데 필요한 ‘맥락화’는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말했듯이 ‘완전히 멈춰야’ 한다.

다음은 당신이 양심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파에 맡겼다는 것을 알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이다: 만약 명백한 부도덕이나 불의를 보는 것에 대한 당신의 첫 번째 반응이 다음과 같다면, 음,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고, 아무도 지지하지 않겠지만, 피해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도덕적으로 위험한 곳에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리석음으로 이어진다.

그게 당신이 될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철학자 존 롤스의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활용한 것 중 하나가 여기서 도움이 될 것이다.

‘무지의 베일’ 주장은 자신이 사회 시스템에서 어디에 있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고 싶은지 묻는다. 당신이 극도로 가난할 것인지, 엄청나게 부유할 것인지 모른다면 어떤 종류의 사회 안전망을 원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세금 정책을 원하는가?

물론, 이것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을 미리 계획하는 실체 없는 존재로 거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은 우리의 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선조의 시대에 살았다면 2023년에 남부연합을 위해 싸우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내가 1861년 미시시피에 살았다면 내 정신과 양심이 어떻게 형성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내가 1930년대 독일에 살았다면, 나는 도덕적, 신학적으로 타락한 ‘독일 기독교’ 운동에 맞서 고백교회와 함께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섰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내가 거기 있었다면 내 마음이 미혹되었을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의) 연습은 제한적이지만, 우리의 선택이 성경적 신념과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문화적 가정이나 정치적 이념에 의해 우리의 선택이 더 많이 형성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당신이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또는 그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상상해보라. 한 문장을 가지고 관련된 이름을 바꾸어 보아라. 당신은 다르게 대답할 것인가? 왜 그런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 잠깐이라도 멈추고 우리 자신의 동기를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도덕적 함의를 고려하지 않고(왕 22:1-28) 통치자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증언하는 ‘궁정 예언자’를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는 ‘예’를 ‘예’로 하고 ‘아니오’를 ‘아니오’로 말하던 선지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궁중 예언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양심에 따라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아모스 7:13)고 말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당신이 이를 어떻게 보든, 비무장 비전투원의 살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시체에 불을 붙이거나 영유아의 머리를 참수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양측주의의 왜곡된 버전에 무게를 두기 위해 명백한 도덕적 행위를 지나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도덕적 실패가 될 것이다.

나와 같은 미국인 여러분 중에는 9.11테러에 대해 알 카에다 편을 들거나, ‘양측 모두’가 휴전을 선언해야 한다고 반응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진주만에 대해 미국 의회가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이를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대답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질문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내가 옳은 답조차 알지 못할 때는 윤리학과 학생들에게 사례연구를 제공한다. 정확히 똑같은 신학적 전통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인지 진정으로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모순된 선이 있고,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옳은 일을 하는 방법을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상황 중 하나가 아니다.

하마스는 대량 학살을 자행한다. 그들과 공모자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중동 정책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무엇이든, 군사 전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인간의 사악함을 이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러셀 무어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장이자 공공신학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하마스의 독초 시들게 하기

이번 주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비극을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의 시선과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방법

하마스, 이슬람 운동 지지자들

하마스, 이슬람 운동 지지자들

Christianity Today January 2, 2024
NurPhoto / Contributor / Getty

이 글은 저자의 안전을 위해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

스라엘은 ‘하마스’로 알려진 이슬람 저항 운동의 9/11 테러에 준하는 정도의 공격을 겪었고, 이 테러로 인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어떤 말로도 그 슬픔과 공포를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시야가 흐려지거나 민간인에 대한 복수로 치닫게 해서는 안된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이자 이스라엘 시민인 나에게 이 폭력을 비난하느냐고 묻는 것조차 모욕적인 일이다. 물론 나는 이를 규탄하며,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 뿐 아니라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정의, 안보,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에 대한 장기적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테러리즘을 뿌리부터 차단할 방법에 대한 나의 견해를 동료 기독교인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번 달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공격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성서공회 사역자 라미 아야드가 선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납치하여 살해된 지 16년 만에 발생했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지도부가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대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라미 살해 사건은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으며, 일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이 폭력으로 인해 가자지구를 떠났다. 납치와 살해는 급진주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이며, 하마스의 지도자들은 이들과 맞서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려 한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다른 폭력 사태에 직면해 있으며, 이번에는 더 치열하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마스의 공격은 전례 없는 규모의 잔학 행위이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있는 150여 명의 이스라엘 인질과 이스라엘 군이 이미 레바논(이란의 지원을 받고 하마스와 관련된) 헤즈볼라와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 북부의 두 번째 전쟁 전선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전투는 주로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남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녁에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북쪽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을 위한 특별 기도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갑자기 헤즈볼라의 드론 침투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전화 몇 통을 걸었고, 즉시 모임을 비대면 모임으로 전환했다. 약 50명의 기독교인이 참여하여 유혈 사태를 멈추게 해달라고 외쳤다. 나중에 사이렌이 오보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기 참사의 규모가 밝혀진 후, 나는 유대인 기독교인을 포함한 여러 유대인 친구에게 격려와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중 한 메시지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한 유대인 기독교인 친구는 하마스의 공격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대인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대응이 매우 강력할 것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와 하마스 대학살이라는 새로운 공포는 이스라엘이 “하마스가 숨어 활동하는 모든 장소를 폐허로 만들겠다”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약속을 이행할 것임을 의미하며, 이는 가자지구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영토가 폐허로 되고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보복 필요성과 하마스 정권을 무너뜨려야 하는 목소리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를 기도하며, 이러한 대응이 가자지구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을 연장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수많은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신중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현재의 폭력 사태가 종식된 후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마스가 했던 것과 같은 광신적 종교 집단이 행한 잔인한 행동을,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해 본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폭력이 이슬람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나 튀니지의 종교적 무슬림은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나? 아니, 이곳에서는 무언가 다르다. 하마스라는 독초가 우리 토양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잘못된 접근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일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세속적이고 비교적 온건한 ‘파타’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하마스를 강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전직 이스라엘 관리들은 뉴욕 타임스월스트리트 저널에 하마스가 파타에 대항하는 ‘균형추’가 되도록 도와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레츠는 2019년에 네타냐후가 당원들에게 “하마스를 강화하는 것”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들을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국가를 원하는 이유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가자지구의 상황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가자지구는 인구 밀도가 높고 매우 가난하다. 인구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실직 상태이다.

가자지구는 현재 ‘완전 감금’ 상태이지만 사실 지난 16년 동안 봉쇄되어 왔다. 유엔에 따르면 가자 주민의 95%는 깨끗한 물조차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전기 공급도 불안정하다.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2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처한 상황이다. 그들은 국가도 없고 변화의 전망도 없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존엄성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파타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이 이끄는 서안지구 팔레스타인도 가자지구와 비슷하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이동을 점점 더 제한하고 분쟁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장하고 있다. 일부 정착민들은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로, 올해에만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정착민 공격이 700건 이상 보고되었다.

네타냐후가 미국이 주도하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 관계 정상화 협정(아브라함 협정의 열매로 가장 바라는 결과)에 거의 다가가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고립시키고 억압”하기 위한 것으로, 네타냐후는 이전에 중동의 “평화로 가는 길”이 팔레스타인을 “우회”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은 이 협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통해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이 요구한 최소한의 요구에도 미치지 못한 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종식하려 했다.

이 땅은 극악무도한 이슬람 이데올로기 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던 곳이다. 증오와 인종차별, 폭력이 난무하는 이 환경에서 하마스는 거짓 약속으로 젊은이들을 착취해 왔다. 희망의 지평이 보이지 않자,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지지자들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고, 하마스가 이스라엘인들을 희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꼭 이럴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구속의 능력을 믿는다. 이 땅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소망이 있다면 이러한 증오의 움직임은 쇠약해질 것이다.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야 한다.

이 문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요청은 무리한 것일까?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신 존엄성을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목표는 안전뿐만 아니라 함께 번영하는 것이지 서로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타미르 쿠리는 가명으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이자 갈릴리 지역 출신의 이스라엘 시민이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애통하는 자들을 위한 대림절

현재의 삶을 인내하게 하는 연합에 대한 소망.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7, 2023
Phil Schorr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 요한계시록 21:4-5

성탄절이 모두에게 항상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픔과 슬픔, 눈물, 고통으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제게도 그랬습니다. 2021년 6월 30일 이후로 우리 가족은 연휴마다 슬픔으로 눈물지었습니다. 그날 20살이던 딸이 휴가를 마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순식간에 첫째 아이를 잃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적입니다. 저는 죽음이 싫고 눈물이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6월의 그날이 제게 가장 큰 슬픔의 날이었다면, 요한계시록 21장은 제게 가장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원천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확보하신 영원한 승리에 대한 확신을 발견합니다. 사랑의 목자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죄와 죽음과 마귀를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래에 바라는 상급이며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범위는 우리 영혼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복음에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잃어버린 모든 것의 회복과 구속이 포함됩니다. 이 회복은 새 하늘과 새 예루살렘, 그리고 영광스러운 새 땅을 상속받기 위해 부활하는 온전한 몸의 회복을 뜻합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변화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묘사된 마지막 날에 대한 비전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보다 질적으로 새롭고 뛰어날 것입니다. 본문은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전부 사라질 것을 예언하고 곧바로 새롭고 장엄한 시작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새로운 땅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충만하게 드러날 곳이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유일한 왕으로서 그의 백성과 함께 평화와 권능 가운데 거하실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본질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이며, 끝이 없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함께 통치하고, 그분과 함께 청지기 역할을 하기 위해 함께 모일 것이므로 반대하는 정당과 교파는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목적이 있는 일을 성취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이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즐길 수 있으며, 배우고 발견하는 영원 속에 거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깊이 열망하는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간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비극과 연휴 기간의 슬픔이 압도적으로 느껴질 때도 그 위대한 날에 대한 소망을 떠올리면 오늘을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그 첫 번째 성탄절에 매우 낮은 자리에 오셨지만 절대적인 승리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강력한 환상은 주님께서 “그렇다, 내가 곧 가리라”고 말씀하시며 마무리됩니다. 이에 요한은 모든 마음이 슬픈 자들과 함께 응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묵상하기



1. 요한계시록 21:1-6의 약속은 성탄절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망을 주나요?

2.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어려움에 대한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크레이그 스미스는 Vail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이 ‘주현절’이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이들을 위한 대림절의 특별한 계시.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6, 2023
Phil Schorr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마태복음 2:10-11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방박사’ 이야기는 특별한 신비와 기쁨을 담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주현절이라는 특별한 축일을 기념해 왔습니다. 그리스어 epipháneia는 ‘빛나다’ 또는 ‘드러난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은 위대한 하나님의 현현으로 즉 주현절 가득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가 모세를 돌이켜 하나님을 만나게 한 것도 하나님의 현현이었고,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주께서 들리셨다”는 이사야의 환상도 하나님의 현현이었으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린 것도 하나님의 현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이 특별한 순간을 어떻게 주현절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그 답은 원래 택한 백성인 유대 민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방인 혈통의 우리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과 연관 있습니다.

때때로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다른 사람의 오래된 가족사를 엿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과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갑자기 우리의 이름을 듣게 되고, 이것이 또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다가가는 순간을 통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오실 메시아이야기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갑자기 그리고 신비롭게도 세 명의 이방인이 예수님의 탄생이 그들에게도 좋은 소식임을 직감하고 선물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한 지역의 종교 안에서만 일어난 작은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위대한 도약이라는 하나님의 현현과 계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전통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를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세상이 동방박사들의 부지런함과 기쁨에 사로잡히는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동방박사들은 “부지런히” 찾고 “지극히 큰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저는 그 별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떠한 존재를 향해 인도하도록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따르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다음은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표현한 시입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특별한 왕이 선택받은 백성에게 나셨다는 소식 그들만의 영광으로 여길 수 있었다. 우리가 속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기에 하지만 세 사람이 도착하자 우리도 함께 속하였네. 우리와 같은 이방인인 그들의 지혜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으리 내면의 리듬을 찾는 꾸준한 발걸음으로 별 너머를 보는 순례자의 눈.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분을 향해 찾아갔다. 다른 곳에서 왔지만 그들은 발견했다. 성전에서 그들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분을 사고판 사람들을 발견했다, 더러운 마구간, 거룩한 땅에서. 그들의 용기는 우리의 의구심에 답을 가져다주네 구하고, 찾고, 경배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 시 ‘주현절’은 Sounding the Seasons(캔터베리 출판사, 2012)에 수록된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사용하였습니다.

묵상하기



동방박사들이 보여준 부지런함과 기쁨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본을 묵상할 때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를 때 부지런히 찾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요?

말콤 구이트는 케임브리지 거튼 칼리지의 전 교목이자 종신 교수입니다. 그는 신학과 문학에 대해 폭넓게 가르치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Books

크리스마스 사역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난제이다

어떤 이들은 성탄절이 탈북민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한국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자선단체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자선단체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하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5, 2023
이미지: 정성준 / 게티 이미지 / CT 편집

루 갈로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한국 부산에서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학교에서 갈로와 그의 아내 리사는 선물을 나누어주고, 아이들에게 진저브레드 집 장식 만드는 법을 알려주며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전에는 갈로 부부가 연극제를 열어 천사, 목자, 동방박사, 외양간의 동물들, 임신한 동정녀, 아기 예수님 등 성탄절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을 탈출한 사람 대부분은 성탄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공산주의 체제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산타클로스나 성탄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는 2016년에 성탄절 행사를 전면 금지하고 12월 24일을 김정은의 할머니 김정숙을 추모하는 날로 선포했다.

북한 주민들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고 있다면 미국의 명절로 인식할 것이다. NK 미션의 설립자인 갈로 부부는 북한의 주민 중 일부는 '나 홀로 집에'와 같은 영화를 밀수하여 볼 기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버지니아 출신인 이 부부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또한 성탄절은 어릴 적부터 미국을 악한 존재로 배워온 북한 주민들의 미국에 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루 갈로는 "할 수만 있다면 미국 문화를 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갈로는 성탄절에 산타가 되어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미국과 선물 주는 관습에 관해 이야기하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1998년 이후 한국의 사역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은 성탄절을 약 33,000명의 탈북자를 위한 선교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서울 글로벌 선교교회 최성은 담임목사는 남한에 거주하는 탈북자('정착민'이라고도 함)들은 성탄절에 대해 깊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과 성탄절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들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최 목사의 말에 따르면 남한의 크리스마스 행사는 탈북자들에게 소비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종교적인 측면은 오히려 그들에게 기괴하고 미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기독교는 '악마의 종교'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자란 대학생 최수옥 씨는 처음에는 성탄절을 떠올리면 선물이 전부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야 성탄절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날이 예수님의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최수옥씨는 자신의 오빠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는데, "그래서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오빠가 반응했다고 한다.

글로벌선교회는 매년 정착민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크리스마스 전통과 새해 축하 행사를 함께 진행한다. 이 교회는 현재 가족과 헤어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약 100명의 탈북민을 돌보고 있다. 이 행사에서 남북한 주민들은 캐롤과 찬송가를 부르고 장기자랑도 한다. 최성은 목사는 이 행사를 통해 그들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은 에스겔 37장 17절 말씀에 기초한 통일 한국을 향한 교회 비전의 일환이다. 최 목사는 "분단된 남과 북의 간극을 우리가 직접 채우고 싶다"라고 말했다.

온누리교회 영어 사역 담당 스티븐 차 목사는 성탄절이 탈북민 전도의 기회인지 장애물인지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탄절에 탈북민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효과는 탈북민들의 개별적인 사연과 개인적인 관계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장로교이자 한국의 대형교회인 온누리교회는 20년 동안 탈북민을 위한 사역을 해왔다. 11개 캠퍼스 중 5개 캠퍼스에 탈북민과 남한 주민이 함께 모여 예배와 성경 공부하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한 캠퍼스에서는 대학생 탈북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캠퍼스에서는 한국어와 중국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들은 정착민들과 공감하기에는 다른 명절이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설날이나 추석에 사람들과 더 많이 마음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차 목사는 이 시기가 "가족이 매우 그리워지는 시기"라고 말했다. "이런 명절에 탈북민들은 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VOMK)의 에릭 폴리 대표는 성탄절 아웃리치의 문제 중 하나는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말구유에서 태어나 천사들이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하는 메시아 아기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신, 성탄절의 문화적 함정에 갇혀 북한 주민들에게 기독교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폴리 대표는 "우리는 북한 주민들이 기독교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남한의 문화적 요소가 아닌 북한 문화 고유의 요소로 기독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북한은 오픈 도어즈가 선정한 2023년 기독교인이 살기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국가 목록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인 곳이다. 하지만 북한은 한때 기독교 신앙이 번성했던 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한반도 기독교인의 90% 이상이 북한에 살았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북쪽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졌고, 선교사 존 로스가 한국에서 성경을 처음 번역했을 때 북한 방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폴리는 복음에 대한 문화적 장벽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는 정착민들을 만날 때면 로스 성경 인쇄본을 건네며 현대 독자들을 위해 번역을 업데이트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 경우 믿음의 여부에 상관없이 보통 그들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탈북민에게 다가갈 때는 그들이 극복해야 할 결핍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고유한 자산으로 접근합니다."

폴리 대표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새터민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탈북자분들의 집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김치 등의 봉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베푸는 입장에서만 북한 주민과 교류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성탄절을 선물을 주는 명절로 강조한 아웃리치 프로그램은 남한 사람들은 잘 보지 못하지만, 정착민들이 이미 겪고 있는 불평등을 오히려 강조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탈북민을 매번 명절 때만 챙깁니다."라고 폴리가 말했다. "그런데 왜 탈북민들이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높은 비율로 자살을 하는 걸까요? 그들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서울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들의 자살 충동은 한국인의 두 배 이상에 달한다.

폴리 대표는 성탄절을 단순히 탈북민들을 돕는 기회로 여기지 않으면 베푸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약간의 문화적 인식과 창의성만 있으면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타인의 집에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을 무례한 행동으로 여긴다. 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예고 없이 방문해도 주인이 친절하게 환대하는 문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당신을 초대할 수도 있다.

그래서 폴리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시즌에 정착민들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고 없이 나타나 "당신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하며" 정착민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인정한다.

"그것이 성탄절의 의미입니다."라고 순교자의 소리 디렉터는 CT에게 말했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셨습니다."

Isabel Ong CT의 아시아 담당 부편집장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빛이 있습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선물.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5, 2023
Phil Schorr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사야서 9:6

성탄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성탄절은 선물 받는 날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아마도 12월 26일부터 다음 해에 받을 선물 목록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몇 달 동안 다음에 받을 선물에 대해 기대하며 이야기합니다.

드디어 선물이 도착하면 아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데,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흥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는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아이들은 일 년 내내 기대했던 선물은 잊어버리고 다른 일에 몰두합니다. 세속적인 선물은 받을 때는 기쁘지만 누구에게나 궁극적인 만족감을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쉬움을 남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선물은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결코,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고, 우리를 지탱해 주며,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할 아기에 대해 예언합니다. 이 놀라운 소식은 암울한 시기에 반항심에 빠져 있는 백성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전쟁과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평화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둠은 끝이 없는 듯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한 상황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어둠은 영적인 어둠이기도 했습니다. 구세주를 알기 전에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어둠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9:2의 빛에 대한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복음에 대한 약속이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전해집니다. 세상의 빛이 이 땅에 왔으며,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일 1:7,;, 요 8:12). 우리는 빛과 진리를 믿기 때문에 더는 어둠 속에 걷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멸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직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기에, 빛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숨을 필요가 없으며,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빛을 넘어 승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광스러운 삶과 큰 기쁨을 주셨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사 9:3-5).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셨으니” (6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반역, 전쟁, 분노, 분쟁 등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빛의 선물과 아름다움이 훨씬 더 밝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탄절의 희망, 즉 큰 빛을 가져다주기 위해 태어난 아기가 가져다주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인류가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때와 똑같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그분이 주시는 것들을 온전히 누리기 원합니다. 여러분이 빛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길 간구합니다.

묵상하기



1. 이 땅에서 받는 선물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만족과 성취감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2. 우리 일상에서 어떻게 성탄의 희망과 예수님의 임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트릴리아 뉴벨은 52주 말씀 묵상 등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Living By Faith 라디오 진행자이자 무디 출판사의 인수 담당 이사입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하나님의 놀라운 선포 방식

영광스러운 도래에 관한 다른 관점.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4, 2023
Phil Schorr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 누가복음 2:8-10

그리스도의 탄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들의 탄생 자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기로 택하신 방식도 놀랍습니다. 슈퍼볼 기간처럼 대규모 마케팅이나 소셜 미디어 캠페인, 유료 TV 광고 하나 없이 주님께서는 목자들을 택해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하는 수많은 천사가 나타났을 때 이 가난한 목자들이 얼마나 압도당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회적 영향력이 낮은 목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엄청난 광경을 생각하면 우리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생각하면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구유, 그리고 몇몇 동물들을 떠올립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이해하기 힘든 탄생의 순간이라니, 어떤 부모라도 원치 않을 탄생의 장면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상상해 보면 아들의 신성한 탄생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 화려하지 않았음을 기억합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경건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하기를 원하시는 방식은 바로 낮은 자의 모습입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빌 2:6-7).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방식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더 많은 팔로워를 확보하고, 플랫폼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리더십 서적이나 전략 세미나 또는 인플루언서 동영상에서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거룩한 방식으로 일하시고 우리의 가치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다루시며 세상의 리듬이나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수천 년이 지난 후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 탄생을 소중히 여기고 깊이 생각하며, 이 목자들처럼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갈 수 있도록, 이와 같은 특별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이 목자들처럼 인도함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고, 평범한 삶의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놀라운 방식으로 보시겠습니까?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큰 평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두려움 대신 큰 빛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낮은 위치의 목자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 파격적인 방식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영향력이나 권력에 대한 사회적 관념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2.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성공에 대한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삶의 평범한 순간에도 하나님이 일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인식하고 감사하도록 어떻게 관점을 바꿀 수 있을까요?

로니 마틴은 오하이오주 애쉬랜드에 있는 Substance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Harbor Network의 리더 리뉴얼 디렉터로 일하고 있으며 7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구원의 교향곡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천사들의 축제.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3, 2023
Phil Schorr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 누가복음 2:13-14

누가복음 2:13에서 사람들은 밤하늘을 행진하는 천사들의 행렬을 목격하며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축하의 함성을 들으며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영예롭게 찬양하는 모습은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밤하늘을 가득 채운 천상의 소리가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상상해 보십시오. 헨델의 메시아에 나오는 유명한 합창곡 “할렐루야” 같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합창단이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환영하며 찬양한 것을, 수 세기 동안 이어온 지상에서의 거룩한 저녁, 교향곡으로 표현한 찬양입니다.

2,000여 년 전 그날 밤의 축하 행사는 눈처럼 하얀 어린 양이 식탁의 높은 곳에 앉아 신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펼쳐질 잔치의 예표입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선포하는 장면과 헨델의 메시아가 울려 퍼지는 음악,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완성을 찬양하는 “큰 무리의 소리” 사이에서 유사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계 19:6-8)

이 구절에서 요한은 하늘나라에서 벌어질 혼인잔치를 예고하고 천상의 의식에 어울리는 빛나는 옷으로 장식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도착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누가복음 2장과 요한계시록 19장이 교차하는 장면에서는 지상에서 어린아이로 태어나신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만왕의 왕으로 열렬히 찬양받고 환호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두 장면 모두 그리스도가 최고의 주권자로 인정받는 하늘의 위엄을 보여 주며, 각 장면마다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헌신하는 하늘의 무리를 드러냅니다. 두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을 선포하는 구원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거룩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그분의 영원한 통치의 영광을 묵상합니다. 그날처럼 우리 또한 구원의 교향곡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묵상하기



1. 이 장면들을 묵상하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교회와의 연합에 대한 경외심이 어떻게 더 깊어지나요?

2. 그리스도의 겸손한 지상 강림과 하늘에서의 영광스러운 통치 사이의 유사성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목적에 대해 무엇을 깨달았나요?

알렉시스 래건은 창의적인 작가이자 ESL 강사로, 세계 선교에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오신 세상의 빛.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2, 2023
Phil Schorr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 이사야서 60:1-3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는 어둠을 두려워합니다. 어렸을 때 침대에 누워 라디오에서 나오는 LA 다저스 경기를 듣다가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고 어두운 벽장을 노려보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자라면서는 두려움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괴물이나 악몽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어둠 그 자체입니다. 미지의 세계로 가득 찬 어둠 속의 경험은 우리의 영혼에 깊이 각인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신, 의도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반역적인 결정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어둠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둠은 단순히 “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은 우리 안에 있었고 우리를 향해 밀고 들어왔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같은 유대 문헌에서 어둠은 불안정한 방향 감각 상실, 사람을 덮치는 두려움에 대한 은유로 표현됩니다. 또한, 어둠은 방향과 정체성이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고군분투하게 만드는 악과 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9장에서는 ‘어둠’이라는 단어 tzalmavet를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묘사합니다.

이사야 60:1-3은 창세기 1장의 익숙한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빛과 어둠이 대조되고 분리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이야기에서 어둠은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가 아니라 그분의 충만하심이 임하실 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빛이 되시는 왕의 오심, 즉 대림절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번 대림절 기간에 첫 번째 대림절을 기억하라는 초대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빛이 겸손하게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의 어둠에 맞선 그 사건은 극적이지 않지만 숭고합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축하의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너희 빛이 왔음이니라” (1절). 빛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죄의 깊이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완성하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도 깨닫게 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우리의 소명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이 빛을 우리 안에 탐욕스럽게 보관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빛은 열방과 이웃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분명히 볼 수 있도록 찬란하게 빛나야 합니다(요 8:12). 예수님이 주신 빛의 복음이 우리 안에서 더 빛날 때, 예배의 빛과 복음을 이웃들에게 나누고 세상 밖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묵상하기



1. 창세기와 이사야서에서 어둠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 빛의 부재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죄와 방향 감각 상실을 어떻게 상징하나요?

2. 이번 대림절에 어떻게 이사야의 예언을 이해하고 예배와 복음 전파를 통해 예수님의 빛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까요?

존 니타는 인디애나주 발파라이소에 있는 Calvary 교회의 영성 형성, 제자 훈련 및 소그룹 담당 목사입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이집트에서 영원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울려 퍼지는 마리아와 요셉의 역경.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1, 2023
Phil Schorr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 마태복음 2:13-15

어머니가 저를 임신한 지 9개월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갑자기 고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했고 두 분이 살던 수도까지 위험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직업 때문에 게릴라 전사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무고한 생명을 잉태한 배를 움켜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시 어머니의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해집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고, 새 가족을 꾸리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부모님은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셨을 것입니다.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난민이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2:13-23의 이야기는 제 가족이 겪은 이야기와 비슷하기에, 제게 점점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아기를 두 팔로 감싸 안은 마리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하며 두려움, 혼란, 절망에 빠졌을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누구도 갓난아기를 안고 난민 생활을 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 속에서 심오한 예언으로 가득 찬 호세아 11:1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결코 좌절되지 않을 완벽한 계획과 목적이 있었습니다. 살인마 독재자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가족이 이집트 땅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나오는 경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일이 성취된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백성이 했던 경험을 묘사하던 단어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제 부모님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하며 잠언의 지혜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 16:9). 우리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이 어떻게 움직이실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취할 발걸음은 오직 그분만이 진정으로 아십니다. 때로는 그 발걸음이 우리를 편안하고 익숙한 곳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고향에서 벗어나 참되고 유일한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할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부모님은 낯선 땅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두 딸을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직접 양육하며 오랫동안 기다려 온 예언을 성취하고, 그 머나먼 땅에서 새롭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림절 시기에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대대로 펼쳐지는 계획의 실타래를 엮어 가시는 방식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묵상하기



1. 마리아와 요셉의 여정을 묵상해 보면 그들이 겪어야 했던 두려움과 불확실성, 예상치 못한 길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더 깊어지나요?

2. 호세아 11:1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피난가셨다가 다시 나오신 것을 통해 결코 좌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과 목적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삶에 어떠한 희망과 확신을 주나요?.

크리스텔 에이스베도는 작가이자 성경 교사이며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외곽에 위치한 Transformation 교회의 영성 담당 디렉터입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Apple PodcastsDown ArrowDown ArrowDown Arrowarrow_left_altLeft ArrowLeft ArrowRight ArrowRight ArrowRight Arrowarrow_up_altUp ArrowUp ArrowAvailable at Amazoncaret-downCloseCloseEmailEmailExpandExpandExternalExternalFacebookfacebook-squareGiftGiftGooglegoogleGoogle KeephamburgerInstagraminstagram-squareLinkLinklinkedin-squareListenListenListenChristianity TodayCT Creative Studio Logologo_orgMegaphoneMenuMenupausePinterestPlayPlayPocketPodcastRSSRSSSaveSaveSaveSearchSearchsearchSpotifyStitcherTelegramTable of ContentsTable of Contentstwitter-squareWhatsAppXYouTub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