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합니까?

구약은 신약의 윤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확히 설명합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 첫 번째 성서 ' 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 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입니다 . —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때때로 성경은 우리가 간단히 생각하는 윤리적 문제에 관해서는 모호합니다.

하나의 예로 신약 성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지시합니다 (에베소서 6:5). 이와 같은 성경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비인간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침묵하지 않습니다. 6년이 지나면 석방된 노예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신약 성서는 이 규칙을 언급하지 않습니까? 우선 첫째로 신약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보다 더 큰 로마 제국의 편에서 인간의 무자비함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구약 성서는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실제 노예 제도를 배제하며 노예 신분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최근 번역에서 구약에서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구약은 일반적으로 일이 공동체 관계에 속한다고 가정하고, 예속에 명확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에게 ‘소유’되지 않으며, 모든 봉사는 일시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았으며, 외국인 종 (소유자)도 존중과 연민으로 대우받도록 보장하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인 말씀이라고 믿지만, 우리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약 말씀 중 일부가 불편하거나 심지어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지침을 얻기 위해 성경 말씀을 찾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따르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교정하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신약을 기록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이 영감을 받았다고 믿고, 이 사실이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유익이 있다고 약속된 성경을 윤리적 목적을 위해 더 많이 의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약은 그 자체로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토라 (현대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요구가 우리가 그 영을 따라 행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4). 이를 앞서 언급한 디모데후서의 내용과 함께 생각해보면,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려면 구약 성경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구약을 읽을 때 피하는 구절들이 있지만, 그러한 구절까지도 포함하여 구약 전반에 대한 이해와 친숙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기대와 우리의 가장 큰 윤리적 질문에 대해 성경이 주는 온전한 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구약과 윤리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구약이 어떻게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의나 창조의 보존, 동성 결혼 또는 이주민 구제와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찾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부다처제나 가나안 사람들의 멸망과 같은 구약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지 몰라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우, 우리는 틀을 미리 정하고 구약 성경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길 원합니다. (”봤지? 구약은 관련성이 있어!”) 두 번째로, 우리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이해에 맞지 않을 때 구약 말씀을 회피하려고 시도합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윤리를 다루는 구약 성서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구약 성경을 우리의 필요에 맞추기보다 이해하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어려운 일이지만, 충실히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고 필요한 일입니다.

토라 완전하게 하기

구약 성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한 번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천년에 걸쳐 많은 사람의 작업에 의해 다듬어지고 쓰였습니다. 서양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문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의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르게 말씀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만 구약 성경은 체계적이지 않으며,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구약이 어렵지만 풍요로운 이유는 다채로운 다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하나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내용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관한 몇 가지 조언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그가 토라와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완전하게 한다(fulfill)”는 것이 전문 용어처럼 들리지만 마태는 “채우다(fill)”를 의미하는 일상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채우고 또 채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네가 들었다…그러나 내가 또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채움에 관한 여러 예시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을 고수하고 분노에 대한 구약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잠언은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이 말하는 것과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토라와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의미를 분명히 하십니다.

또 다른 예로 토라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위기 19:18)라고 말합니다. 이 레위기의 구절에서는 당신과 맞지 않는 이웃, 당신의 적인 이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이 좋은 이웃은 사랑할 수 있지만, 당신의 원수인 이웃을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미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당신이 누구도 미워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른 유대인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자체는 당신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추론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채움’의 한 예시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토라를 성취하셨습니다. 이웃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정의와 의로움?

기독교 윤리는 주로 원칙에 관한 것인데, 제가 사랑, 정의, 해방과 함께 마치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감정에 휩쓸리고 있다고 친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 정의, 해방이 무엇인지 명백하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의 성과가 주로 다른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사람들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장려하는 데서 온다는 데에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우리의 사고와 삶이 우리의 문화, 사회적 맥락에 의해 실질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성경 말씀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 방식이 대체로 옳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직시하고 변경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정의가 무엇인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한다고 가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규정하는 특징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정의와 의로움’으로 번역되는 구약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의’에 대한 구약의 표현으로 올바르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 구절을 해석한 같은 의미의 사회 정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 두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가 영어로 그 단어에 붙인 의미와 함께 ‘정의’ 또는 ‘의’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정의 (mishpat)로 번역된 단어는 적합한 권위와 권력의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 (sedaqah)로 번역된 단어는 충실함을 의미하며, 자신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영어 단어 ‘의’는 명예로운 개인적 생활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주로 옳은 일을 옹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와 의로움’은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노력이 많이 드는 개인적인 영역의 일입니다. 주변 이웃들을 대신하여 할 수 있는 힘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의 경우, 가족의 자원을 외부의 궁핍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가족이 일을 제공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단순히 정부가 노숙자를 위해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숙자에게 필요한 쉼터와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환경보호를 위해 정부나 기업에 로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긴 비행을 더 적게 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기독교 윤리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을 광범위하게 읽는 것이 필요하지만, 한 가지로 요약해야 한다면 토라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무엇일까요? 이 핵심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성경적 윤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22:36-40). 유대인 율법사들은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정답에 대해서는 이미 확신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교 교사들이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토라의 다른 명령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명령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명령에 토라와 선지자 전체가 의존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주장이며, 구약의 윤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됩니다. 토라를 읽으며 개별 규칙의 요점이 궁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특정 명령이 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명령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인가 아니면 이웃에 대한 사랑인가 (또는 둘 다인가)?”

한 가지 예를 생각해봅시다. 구약은 사람들이 사망한 가족을 매장할 때 몸이 불결해지며, 또는 남성이 성관계에서 사정하면 불결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순결에 관한 이러한 성경적 규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이것이 죄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순결에 관한 규칙은 당신이 무시하지 않는다면 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장례식이나 올바른 사람과의 성관계에 있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순결에 관한 규칙의 한 가지 초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요한 구별이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성경이 거룩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규칙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죽음이나 성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섹스에 집착하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규칙은 죽음이 인간 경험의 규칙적인 부분이며 또한 타락으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을 상기시켜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섹스는 인간적 행위일 뿐이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윤리가 구약 성서에서 별개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된 마음을 축복하십니다

구약 성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 몇몇 바리새인들과 하신 토론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12). 그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토라는 어떻게 명하였느냐?” 그들은 토라가 이혼을 허용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고되기 때문에 이혼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 창조의 방식을 되돌아보면 이혼이 그림의 일부로 의도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칙을 도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남자들이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을 규제하는 규칙을 제공하고 아내에게 약간의 보호를 제공합니다. 노예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토라는 하나님의 창조 이상과 비전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허용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구약 성경과 성경에서 가르치는 윤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용하니” 소중히 여긴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지런히 구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어떻게 ‘채워져야’ 할까? 구약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은 창조 이상을 어디까지 규정하고, 우리의 고된 마음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있나?

확실히, 단순히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에는 중대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윤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본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주셨습니다. 구약이 예수님의 중심이었다면 진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구약의 윤리를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는 안되는가?”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지 않을 때에도 이미 우리를 감싸 주셨습니다.

존 골딩게이는 풀러신학교의 구약 교수입니다. 위 기사는 그의 저서 <구약 성서 윤리 안내> (Old Testament Ethics : A Guided Tour (IVP Academic))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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