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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사야 12:2-6; 52:7-10, 스바냐 3:14-20
‘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단어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대한 개념과 기억에 대해서 양면성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고, 어떤 사람은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물론 집을 편안하게 생각해 어서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집돌이, 집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이나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장소를 갈망하는 것은 인간 기본적인 욕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리고 우리가 집에 있다고 느끼는 곳, 집은 우리가 경계하는 장소가 아니라 편안히 지내는 평화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집은 안전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집순이, 집돌이’가 되고, 낯선 곳에 가면 낯섦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스바냐 3:20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하나님은 언젠가 전 세계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집으로 모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 이루신 모든 것(이사야 52:9. 10) 때문에, 이 집은 곧 잔치와 노래의 집입니다. 모두가 모여 자유롭게 잔치를 벌이는 순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잔치가 벌어집니다(스바냐 3:14–15). 이 집은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집은 피난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요 요새”이십니다(이사야 12:2). 이 집은 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사로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칭송과 영예를 받는 공평한 곳입니다(스바냐 3:19-20).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들은 또한 그들의 상황 너머까지 확장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 그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집에 대한 이러한 정서를 보여 주십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요한복음 14:23). 그리고 조금 앞 구절, 요한복음 14:3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처소,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 안에 우리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날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에서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천국과 닮은 집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52:7). 그런 집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를레나 그레이브스(MARLENA GRAVES) 박사 과정 학생이자 신학교 겸임 교수이며, Way Up Is Down: Becoming Yourself by Forgetting Yourself를 포함한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