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동성애 운동 후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치료’보다 ‘돌봄’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이전의 전통 복음주의 지도자들

Christianity Today January 14, 2022

“마이크, 나 예전에 게이였잖아.”

내가 이 말을 하자 마이크는 분주히 움직이던 붓을 멈췄다. 1997년 여름, 내가 역사신학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을 때였고, 이날 세인트루이스의 우리집을 마이크가 페인트칠을 하던 중이었다.

마이크가 나의 학교생활에 관해 물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마이크는 자신이 게이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심정에 대해 나에게 설명했다.

나는 게이였다는 폭탄선언을 한 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건 내 경험일 뿐이야.” 마이크는 페인트 통을 내려놓으며 붓을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놓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만남을 돌이켜보니 내가 한때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탈 동성애 운동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내가 탈 동성애자 문구를 사용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이 문구는 내가 이제는 게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동성애 이야기는 뒤로하고, 먼저 간증을 하고자 한다.

확실히, 그 당시 나의 성적 취향은 언제나 그랬듯이 오직 남성들에게만 끌렸다. 나는 1940년대 이후 연구자들이 성적 취향을 분류하는 데 사용한 킨제이 척도의 최상위에 있었다. 동성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되뇌어야 했다. 나는 동성애라고 불리는 치료 가능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성애자임을 스스로 납득시키려고 노력해야 했다. 나는 상태는 치유되고 있었다.

탈 동성애 문구 “나는 이제 동성애자가 아닙니다”를 사용한 나의 전략은 이성애자로의 전환 치료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엑소더스 인터내셔널 (Exodus International: 탈동성애를 돕는 단체)의 초대 전무이사인 앨런 메딩거는 탈동성애를 “개인이 더 이상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식별하지 않는 자기 인식의 변화”라고 설명했다. 이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스스로를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진술이 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탈동성애의 틀 안에서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현실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동성애자가 아니다.

1976년 엑소더스 인터내셔널(Exodus International)의 등장으로 복음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치료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설립자 프랭크 워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성애 탈출을 시작했을 때 전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뒤이어 수십만 명의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수십 년에 걸친 실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엑소더스 회장 앨런 챔버스의 2012년 성명을 통해 엑소더스 고객의 99% 이상이 성적 취향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비록 치료의 패러다임은 실패했지만, 주요 몇몇 교단이 이 접근 방식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 정신은 우리 주변에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함께하고 있다. 보수 성향의 영국 성공회와 장로교 사이에서 누가 ‘동성애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수년 동안 교회 회당에서 울려 퍼졌던 논쟁과 비슷하다. 결국 동성애적 자기 인식을 내려놓는 것이 전환 치료의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이다.

이 접근법의 한 가지 효과는 이성애자가 아닌 신자들이 가면 뒤에 숨어 동성애자가 아닌 척하도록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반복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 신학적 혁신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치료 사례가 있기 전에 이성애자가 아닌 신자를 돌보는 기독교의 더 오래된 정통이 있었다.

헨리 나우웬이 돌봄과 치료의 차이에 관해 쓰면서 동성애를 염두했는지 궁금했다. 나우웬의 전기 ‘상처 입은 예언자’에서 마이클 포드는 나우웬이 금욕적인 동성애자로서의 경험을 가까운 친구들과 어떻게 나누었는지 설명했다. 나우웬은 심리적, 종교적 방법으로 성적지향 전환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 때문에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외로움과 채워지지 않은 그리움, 그리고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혼의 양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돌봄은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울고, 함께 고통 받고,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돌봄은 연민이다. 이는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간이고 연약한 존재인 나의 형제자매라는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치료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돌봄은 가능하다.”라고 그는 말했다.

존 스토트를 포함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이 돌봄의 목회 패러다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BBC에서 ‘개신교의 교황’이라고 명명한 신학자이자 작가인 존 스토트는 성적 지향이 사람의 기질에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스토트는 1982년에 출간된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동성애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이 ‘성향’과 ‘실천’, 즉 한 개인의 정체성과 활동, 성적 선호, 성적 행위, 기질과 실천의 구분을 엄격히 해야 한다.”

스토트에게 동성애 지향은 신앙인의 정체성, 즉 타락의 일부지만 복음이 낮은 곳에 흘러가는 만큼 결코 없애버릴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스토트의 주장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C.S. 루이스는 1954년 셸던 베노켄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실한 남성 동성애자’에 대해 분명히 언급했다. 루이스의 평생 가장 친한 친구 아서 그리브스는 동성애자였다. 루이스는 그를 ‘첫 번째 친구’라고 불렀고 그의 성적 취향이 그들의 우정에서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명백하게 말했다. 그들은 함께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서 있다(They Stand Together)’라는 제목으로 엮은 그리브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은 무려 592페이지에 달한다.

미국에서 1969년 뉴욕의 스톤월 폭동이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탄생을 알렸을 때 정통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동성애자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는지 묻고 있었다. 1970년 IVP에서 출간된 책 ‘사랑의 귀환: 그리스도인 동성애자의 편지(The Returns of Love: Letters of a Christian Homosexual’는 돌봄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이는 스토트에 의해 더 많이 알려졌다. 이 책의 저자는 성공회 독신주의자 동성애자였는데, 이 책을 쓸 당시 자신이 아직 성 경험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복음주의의 지도자들은 그동안 교회 안에 재고해봐야 할 폭력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68년 유럽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란시스 쉐퍼는 동성애자들을 소외시키는 교회의 공모를 한탄했다. 편지를 보낸 목사는 무려 6명의 동성애자가 자살하는 것을 보고 쉐퍼에게 조언을 구했다. “동성애자는 동성애적 행위를 실천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특히 정통 교회 생활)에서 쫓겨나는 일이 줄곧 있어왔습니다.”라고 쉐퍼는 한탄했다. “이것은 잔인하고도 잘못된 것입니다.” 실로 쉐퍼의 사역은 기독교와 씨름하는 동성애자들을 교회로 부르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지도자들로 인해 폭력적인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덜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제리 폴웰이 개인적으로 쉐퍼와 함께 동성애자들의 도전을 제기했을 때 쉐퍼는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쉐퍼의 아들 프랭크는 NPR과의 인터뷰와 그의 책 ‘크레이지 포 갓(Crazy For God)’에서 언급한 것처럼 폴웰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들(동성애자)이 하는 짓을 내 개가 한다면 나는 총으로 쏘아버릴 것입니다.” 폴웰의 어조는 꽤나 진지했다.

이후 프란시스 쉐퍼는 아들에게 “저 사람은 정말 거북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토트는 이슈지(Issues)에서 “성적인 죄는 유일한 죄가 아닙니다. 또한 가장 큰 죄도 아닙니다. 교만과 위선은 확실히 더 나쁜 죄입니다.”라고 언급했다.

1980년에 스토트는 동성애에 대한 목회적 접근을 계획하기 위해 성공회 복음주의자 모임을 소집했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향한 자신들의 죄에 대한 공적인 회개를 끌어냈다. 성명서에서 지도자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동성애자를 향한 ‘동성애 혐오’의 태도를 회개하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와 같은 회개를 촉구합니다.”

대중적 여론이 여전히 동성애자에 대해 강하게 편파적이었던 상황에서 이는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포용하며 멋지게 대하는 문화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21세기의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토트와 이러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과 형제들이 상처를 입은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성명서를 통해 특히 자격을 갖춘 동성애자들을 목회자 안수 후보자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5년 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그중 일부는 1975년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Atlanta Journal-Constitution)에 보도되었다. 그레이엄은 동성애 목회자의 기독교 사역을 지지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레이엄은 특정 자격을 기반으로 ‘개인적인 장점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그 기사는 ‘그들은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한 후 그리스도와 사역에 헌신하며 그 직업에 대한 적절한 훈련을 받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성애자들에게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루이스는 베노켄에게 “다른 모든 환난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모든 어려움에는 감추어진 소명이 있으며, ‘필요를 영광으로 바꿀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동성애자의 긍정적인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를 믿게 된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하는 질문일 것이다.

너무 자주 우리가 듣는 대답은 그저 ‘No’라는 답이다.

성관계 금지. 데이트 금지. 연애 금지. 종종 리더의 역할을 주는 것까지도 금지.

이브 투쉬넷이 아메리칸 컨저버티브(American Conservative)의 2012년 기고에서 설명했듯이 ‘노(No)의 사명’ 이라는 말을 나와 같은 사람들이 듣게 된다.

그렇다면 ‘Yes의 사명’은 무엇인가? 복음이 동성애자들에게 주는 긍정적인 기독교적 비전은 무엇인가?

루이스, 쉐퍼, 그레이엄, 스토트의 삶과 사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구원의 능력 안에 있는 예수님의 비전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우리를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신 예수님.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으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 우리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여전히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우리를 도전하시는 예수님. 모든 기쁨과 함께 새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기에 마땅한 영광의 예수님.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영화로우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시다.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 어마어마한 방식으로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놀라운 계획하심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예수님이 이성애의 기능과 안락한 가족중심의 삶을 끝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진 목적이신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이 진리의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성애가 있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구세주 앞에 서게 될 다가오는 시대의 자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구세주와의 교제가 없다면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성경적 성 윤리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윤리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동한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자발적이며 열정적으로 따르게 될 수밖에 없다.

쉐퍼, 스토트와 그레이엄 모두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했다. 또한 이 세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성 윤리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고수했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창조 계획, 즉 하나님의 설계를 따르는 충실한 삶을 의미한다. 그들 중 누구도 성별이 다른 두 사람 간의 일부일처 결혼 이외 그리스도인들의 성적 결합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낮은 마음으로 동성애자들을 대했다.

그들의 비전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성적 충동으로 몰아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동성 지향적인 신자의 가장 큰 투쟁이 성적인 죄가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에 있음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공동체의 필요성과 함께 깊고 장기적인 우정을, 독신생활의 형제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독신주의자였던 스토트는 이렇게 설명했다. “동성애의 핵심에는 사랑에 대해 깊고 자연스러운 갈망, 정체성에 대한 추구,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다. 동성애자들이 지역 ‘교회 가족(공동체)’에서 이런 것들을 찾을 수 없다면 그들에게 교회는 필요 없을 것이다.”

루이스, 쉐퍼, 그레이엄, 그리고 스토트도 동성애자들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성적 지향과 삶의 변화에 대한 확신이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의 정서적, 관계적 필요에 큰 관심을 보였다. 쉐퍼는 1968년 편지에서 교회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가능한 모든 면에서 개인을 도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NPR과의 인터뷰에서 프랭크 쉐퍼는 본인의 아버지가 스위스에서 했던 사역 라브리 공동체를 ‘동성애자들(레즈비언과 게이 남성 모두)을 환영하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는 “아무도 그들에게 변해야 한다거나 그들이 끔찍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연민을 베푸는 것을 느끼고 돌아갑니다.”라고 말했다.

쉐퍼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정교회 장로교 신자들이 교회의 행동 강령을 위반한 동성애자 직원을 석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했을 때 상당한 문화적 변화를 예견했다.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에서 쉐퍼는 다른 교회들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쉐퍼와 그레이엄은 ‘우리 대(vs) 그들’을 나누는 대결 구도를 권장하지 않는다. 1964년 대선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동성애 추문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최고 보좌관인 월터 젠킨스가 YMCA 화장실에서 동성애 행위를 한 혐의로 두 번째로 체포되었다. 그레이엄은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젠킨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존슨과의 전화 통화의 녹음본을 들어보면 그레이엄은 젠킨스에 대한 동정심을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애에 관해 묻자 그레이엄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죄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 죄가 가장 큰 죄인 양 달려드는 것일까요?” 그는 “저는 게이 친구들이 너무 많고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날 밤 카우 펠리스에서 만 명의 군중 앞에서 그레이엄은 “당신의 배경, 성적 취향이 무엇이든, 우리는 오늘 밤 당신을 환영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스토트가 이슈지(Issues)에서 열정적으로 강조했듯이, 예수를 따르는 동성애자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믿음. 현재의 투쟁의 삶을 넘어 미래의 영광까지 바라보는 소망. 그리스도의 영적 가족인 교회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바로 그 교회의 사랑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학자 리처드 러블레이스의 1978년 책 ‘동성애와 교회(Homosexuality and the Church)’는 복음주의 저명한 캔 칸처(전 CT 편집자), 엘리자베스 엘리엇, 척 콜슨, 해럴드 오켄가 및 칼 헨리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책은 오늘날의 분위기에서는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1970년대에는 대서양 연안국가의 신복음주의적 비전을 대표했다. 우편의 동성애혐오증과 좌편의 성적인 타협과 대조적으로 러블레이스는 복음적 도전을 제시했다.

동성애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은 교회와 동성애자 신자 모두에게 더 건강하고 세상에 매우 중요한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접근 방식은 교회와 동성애자 구성원 모두에게 이중적 회개를 요구합니다. 첫째, 동성애자라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인 동성애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성경의 분명한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 둘째, 교회가 동성애자 신학생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양육하고 이들에게 목회를 위해 필요한 안수를 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가 지도자의 자리에서 공적으로 공언했지만 회심한 동성애자들을 지지하는 것은 동성애 혐오증으로부터 교회를, 죄책감과 속박에서 동성애자를 해방하는 복음의 능력에 관한 세상의 엄청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그러한 이중적 회개에 대한 겸손함의 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러블레이스와 헨리, 오켄가와 엘리엇, 칸터와 콜슨, 루이스와 그레이엄, 쉐퍼와 스토트, 그리고 자신이 아직 성관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 어느 젊은 동성애자 성공회 복음주의자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이었다.

신앙의 선배들은 옳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여정을 함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한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쉽지 않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북미의 탈동성애자 사역이 성적 지향 변화에 대한 기대로 배가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희망을 품었다. 1980년대 에이즈 위기가 게이 커뮤니티를 황폐화하자 복음주의자들은 이성애의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세속적 회복 치료사들은 임상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면모를 더했다. 새로운 치료의 길은 오래된 길을 대체했다.

그리고 문화 전쟁에서 보수 쪽은 우리와 같은 탈동성애가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게이들이 정말로 원한다면 이성애자가 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의 증거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성애자가 될 수 있다면 교회가 동성애 혐오증을 회개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단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변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서구의 급진적 성적 관습으로 인해 변해버린 우리의 문화 속에서 결혼관계를 거래 관계로 생각하는 관습, 단기간에 끝나버리는 결혼, 성과 젠더의 붕괴 등 그리스도인들이 안타까워해야 할 일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보수 교회들은 여전히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와 교단들이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실패한 탈동성애자 운동의 언어와 범주를 강요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한 전투를 놓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자들을 싫어한다고 확신하게 만들고 말았다.

우리의 소명은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이 보고 있다. 그들은 이미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자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게이일 수 없다는 사실에 이미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은 동성에게 매력적인 사람을 향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드문 일이며, 그것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

나는 우리가 동성에게 끌리는 그리스도인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우리가 다음 세대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우리를 이해하고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신앙의 선배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Greg Johnson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메모리얼 장로교회(Memorial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 목사이며 '여전한 돌봄의 시간, 교회의 동성애 치유의 실패로 배울 수 있는 것(Still Time to Care: What We Can Learn from the Church’s Failed Attempt to Cure Homosexuality)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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