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3일,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최대 규모 청중인 110만 명 앞에서 설교했다. 이 행사는 미국의 심장부나 로스앤젤레스나 뉴욕과 같은 미국의 주요 대도시 중심지에서 열린 것이 아니었다. 대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열렸다.
단상에 오른 그레이엄 목사 옆에는 부흥강사이자, 밥 존스 대학과 인연이 깊은 한국인 목사 빌리 김(김장환)이 통역을 맡고 있었다. 설교가 끝날 때까지, 73,000명의 사람이 통로를 걸어 나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렸다.
그레이엄의 서울 집회는 전후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과 한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다양한 연결고리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보다 20년 전인 1950년, 현재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복음주의 자선 단체인 월드비전이 한국에 설립되었다. 1년 후, 대학생선교회(CCC)는 태평양 건너 복음주의 신학의 요새로 자리 잡은 한국에서 첫 국제 지부를 출범하게 된다.
헬렌 진 킴의 저서 ‘부흥을 위한 경주: 냉전 한국이 미국 복음주의 제국을 형성한 방법’은 미국의 백인 복음주의와 한국의 복음주의라는 두 그룹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에모리 대학교의 종교사 교수인 김 교수는 전후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본국의 종교 주류에서 인정받았는지에 대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소개한다.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군국주의, 민족 정체성, 종교 이데올로기의 타락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환태평양 고속도로’
대서양 횡단 연결에 대한 언급 없이 미국 초기 복음주의, 특히 대각성 운동을 둘러싼 시기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연결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점에서 김 교수의 현대 복음주의 운동 역사는 미국 종교가 서유럽 이외의 지역과 신앙을 중심으로 한 상호작용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새로운 관점의 장점은 미국 종교, 특히 복음주의가 세계적인 맥락에 놓인다는 점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인물과 대학생 선교회와 같은 기관의 부상과 성공은 국내 현실 뿐 아니라 특히 한국을 관통하는 ‘환태평양 고속도로’를 따라 존재했던 상호 연결된 관계망 덕분이었다.
고속도로는 일방통행로와 다르며, ‘부흥을 위한 경주’는 이러한 발전의 과정에서 한쪽을 다른 쪽의 볼모로 보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국내외에서 존경과 정당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지만, 때로는 그 관계가 한국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기도 한다. 월드비전 한국 고아 합창단은 이런 이야기의 효과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고아가 아닌 아이들도 포함된 이 합창단은 월드비전과 미국 복음주의 운동이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와 거리를 두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 어린이들은 전도와 신앙에 대한 미국 복음주의의 색안경을 벗은 접근법을 보여주는 빛나는 사례가 되었으며, 미국 주류 내에서 복음주의가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리는 홍보 대사가 되었다. 또한 많은 아이들이 디즈니랜드 여행과 노르웨이 국왕과 같은 외국 인사들 앞에서 노래할 기회에 대한 흥분을 표현하는 등 합창단원들 역시 합창단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합창단의 전 단원이었던 김상용(별명 ‘땅콩’)이 19살에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어두운 이면이 드러났다. 월드비전 직원들의 편지에 따르면 ‘땅콩’은 합창단의 일원이었던 여러 위기 아동들 중 한 명이었다. 일부에서는 순회공연이 어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이 주목받고 사랑을 받다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게 되면 순회공연에서 배제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우려했다.
합창단의 기부금으로 인해 한국의 가정과 어린이들에게 실제 도움이 전달된 것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양측의 불평등한 관계와 각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다. 양측 모두 이득을 얻었지만, 김 교수에 따르면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짐 크로우 차별에 얽힌 평판을 회복할 기회에서 훨씬 더 큰 보상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판 향상은 도움이 필요한 한국 고아와 과부들이 애초에 그렇게 많았던 한 가지 이유를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반도에서 두드러졌던 냉전이었다. ‘예수와 존 웨인’을 쓴 역사학자 크리스틴 코베스 뒤 메즈처럼, 김 교수는 군사주의와 현대 복음주의의 부상 사이에 존재했던 강력한 연관성을 묘사한다. 그리고 조나단 허자그는 그의 초기 냉전 시대 연구인 The Spiritual-Industrial Complex에서, 김 교수가 미국이 부흥에 박차를 가하고 봉쇄 정책을 위한 영적 안정기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했음을 묘사한다.
김 교수는 1973년 그레이엄의 순회 전도가 양국의 국내 복음주의 운동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 반면, 미국과 한국 간의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지적한다(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는 독재 정권과 협력해야 했다). 교회와 국가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공산주의 확산에 맞서 싸우는 더 큰 미국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된 부분이었다.
이 시대의 부흥 운동은 김 교수의 책이 묘사하는 대로 가장 흥미로운 변화의 맥락을 형성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가 남부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임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인들은 미국에서 벗어나 자국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란히 고려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사건은 이러한 역학 관계를 잘 보여준다. 1972년, 대학생 선교회의 리더 빌 브라이트는 약 8만 명의 사람을 텍사스로 불러 모아 세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대학생들이 모인 엑스폴로 ‘72라는 집회를 열었다. 2년 후, 대학생 선교회 한국 지부의 리더인 김준곤은 서울에서 130만 명이 모인 엑스폴로 ‘74를 조직했다(그레이엄의 순회 전도단도 그렇게 많은 인원을 모으지는 못했다). 그는 이 행사를 발표하면서 참석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독특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상징적인 기독교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완전한 회심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담대하게 요청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만이 대담한 기독교적 헌신을 보여줌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부흥을 미국 예외주의의 틀 안에 가두는 메시지에 맞서 한국이 진짜배기 신앙의 새로운 중심지라고 주장했다.
필수적인 수정 사항
부흥을 위한 경주는 미국 복음주의의 부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잘 전달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파라처치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고, 힘을 실어주는 데 있어 한국 복음주의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혀낸 김 교수의 연구는 미국 백인 인물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역사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독자들은 김 교수의 결론 중 일부, 특히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단순히 복음 전도와 고아 돌봄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기보다는, 의식적으로 남부 인종주의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는 그녀의 확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녀의 주장이 인종에 대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접근 방식, 즉 개인의 마음 쇄신을 강조하는 동시에 광범위한 사회 및 정치적 개혁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접근 방식을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김 교수는 신학적 헌신을 다른 관심사와 분리하는 것의 위험성, 즉 권위주의 정부가 자국에서 대규모 기독교 집회를 허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권 유린을 간과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어쨌든 김 교수의 결론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해서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상호 연결된 관계망과 이러한 관계가 어떻게 두 그룹의 지위를 다른 방식으로 강화했는지에 대한 그녀의 더 큰 주장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2024년 로잔 운동의 제4차 세계 복음화대회 개최지로서 서울의 위상은 한국이 복음주의 세력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그녀의 주장을 입증한다. 한국이 한동안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국가들 중 하나였고, 일부 선교사들은 미국으로 파송되기도 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것은 그 환태평양 고속도로가 여전히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렉스 워드는 윤리 및 종교 자유 위원회의 연구원이자 프로젝트 매니저이다.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