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2021년 12월 6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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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구속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아를 사람들이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요한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죄와 회개에 대한 요한의 가르침이 주님의 제자로 사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묵상합니다.

오늘의 말씀: 이사야 40:1-5

우리가 이 아름다운 구절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할 때, 이 구절이 유대인 공동체에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 주는 창을 통해 보면 이 구절의 맥락과 의의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유대인들은 기독교 성구집과 비슷한 주간 성경낭독 주기를 따릅니다. 한여름에 이 주기의 가장 어두운 몇 주간이 티샤베아브(Tisha B’Av)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날은 유대력에서 가장 슬픈 날입니다. 이날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1차 파괴와 2차 파괴를 기억합니다. 티샤베아브는 또 유대 역사 전반에 걸쳐 일어난 다른 수많은 비극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금식과 애도의 날입니다. 함께 모여 애가를 낭독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낱낱이 내려놓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티샤베아브가 끝나고 성경낭독 주기는 7주간의 위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의 새해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사야 40:1–26은 티샤베아브 이후 한 주간 동안 낭독되는 지정 본문으로, 심판이 최종의 말이 아님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꾸짖으시는 어두운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승리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들은 재와 절망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새로운 약속에 이릅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확장과 이스라엘 왕국(과 결국 유다 왕국)의 소멸 시기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동요와 비극의 이 시기를 이사야는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이사야는 이 시기가 이스라엘의 최종 운명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복에 대한 그의 묘사도 똑같이 생생한 이미지로 펼쳐지며,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여 전투에서 포위당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끈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이사야의 말은 또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과 세례 요한이 했던 역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사야의 바로 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마태복음 3:3). 예루살렘의 복역이 끝나고 죄를 지은 벌도 다 받았다는 말(2절)이 언젠가는, 예수님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이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초대되었다고 선포하셨듯이, 모든 민족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언약을 반영합니다. 죄의 영향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약속은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듯 갱신되고 또 갱신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계시를 기다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위로를 꼭 붙잡기를 바랍니다.

젠 로스너(JEN ROSNER) 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 부교수이자 Find Messiah: A Journey Into the Jewishness of the Gospel의 저자입니다.

이사야

40:1

5

을 묵상하십시오

.

(40:6-26도 묵상하십시오.) 유대인의 성경낭독 주기와 이사야 시대를 통해 보여지는 비극과 슬픔에 관한 내용은 당신이 이 본문을 묵상할 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이 본문은 세례 요한의 목적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어떻게 심화시킵니까?

잉태 약속

2021년 12월 22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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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성탄절


이번 주 우리는 성탄절 그날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영원하신 구세주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기적에 대해 묵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서 택하신 사람들을 통해 신앙의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1:29-55

마리아가 임신 중 처음 한 일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여성 모두 기적적인 임신을 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게 합니다. 이는 두 가정의 개인적 경험이 더 큰 하나의 구원 이야기 속에 담겨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은 사무엘하 6장의 잔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적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유대 땅으로 돌아와 3개월간 있을 때 다윗은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9절)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결국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오고 그 앞에서 뛰놀고 춤을 춥니다. (누가복음 1:39-41, 43, 56 참조) 이런 유사성 때문에 많은 교부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 얘기를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태에 품고 있는 마리아로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찬양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도로 받았습니다. 그녀의 찬송은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지만 (47-49절), 즉시 그 범위를 확장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묘사합니다. (50절) 마리아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이 거대한 성경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성경의 여러 주제를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여인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예언적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선언하면서, 섬세하게 과거 시제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권능을 행하셨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으며,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구원과 새 나라를 보장해주십니다.

마리아의 역할은 특별해 보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마리아가 순종적이고 희망적으로 반응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마리아가 선언한 바로 그 약속의 상징으로서 마리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48, 52절)라는 구절은 마리아를 높이신 얘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내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한 여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특권은 마리아로부터 시작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의로움에 목말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한나 킹(HANNAH KING) 북미 성공회 사제이자 작가이며,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그린빌에 있는 Village Church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9-56

을 묵상하십시오

(사무엘하 6장도 묵상하십시오) 마리아와 언약궤를 비교하면서 어떤 영감을 받았습니까? 이 사건들에 대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반응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마리아의 찬송을 묵상해 보고, 본인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해보십시오.

2021 강림절 오늘의 묵상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모든 묵상을 한 곳에서.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5, 2021

여기에서 이번 대림절 성탄절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영적 독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강림절 1주: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통치

강림절 2주: 죄와 구속

강림절 3주: 희생과 구원

강림절 4주: 성육신과 성탄절

하나님이 된다는 것의 의미

2021년 12월 19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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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성탄절


이번 주 우리는 성탄절 그날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영원하신 구세주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기적에 대해 묵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서 택하신 사람들을 통해 신앙의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오늘의 말씀: 빌립보서 2:5-11

빌립보서 2:5-11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이 아름다운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창조를 이루어내었고, 그 후에 스스로 인간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마치 막강한 군주가 한낱 벌레와 같은 수준이 되는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전에 가졌던 영광과 그가 지상 생애 동안 겪었던 수모의 모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 ‘-함에도 불구하고’ 라는 작은 표현이 예수님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6,7절, NRSV는 ‘철저히’ 라는 단어를 더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철저히’ 그 지위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바울의 말을 잘 해석한 것입니다. 원문은 다소 모호하게 기록되었고, 대조 접속사인 ‘..에도 불구하고를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뭔가 조금 다른 것을 의미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하셨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우셨습니다.

이 구절을 처음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와 스스로 비우신다는 것, 이 둘이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은 더 큰 진리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시기 위해 지불하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찬송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광채와 성육신의 자기희생 사이에 신비롭게 일치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발적인 자기희생은 성육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은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임이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의 형태로 옮겨질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마리아의 가슴에 안겨있었던 작은 아기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린 쓸쓸한 그 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첫 부활절 아침에 친구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상냥한 정원사 같은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며,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됨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웨슬리 힐(WESLEY HILL)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Trinity Episcopal Cathedral의 사제이며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Western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학 부교수입니다.

빌립보서

2:5-11

을 묵상하십시오

(요한복음 1:14도 묵상하십시오) 성육신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본성에 대한 깊은 진리로 이끕니까? 이 진리들이 어떻게 복음의 중심이 됩니까? 그것들이 여러분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하나님께 여러분의 응답을 표현하면서 기도해보십시오.

메시아의 사명

2021년 12월 16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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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구원


하나님은 구원의 소망을 묘사하기 위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시적인 단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하는 종, 빛,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키는 예언에 관해 묵상합니다.

오늘의 말씀: 이사야 61:1-4, 8-11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두고 자주 논쟁이 일어납니다. 복음을 전할 것인가, 정의를 위해 일할 것인가? 죄 사함이나 병자의 보살핌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이런 논쟁이 신학과 사명에 대한 오래된 분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말해서, 어떤 그룹은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는 확고하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안 쓸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그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한 쪽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다른 한 쪽은 사후 천국의 약속에 몰두합니다.

이렇게 갈라진 양쪽 모두를 예수님은 질책하실 것입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시면서 그는 그의 사명을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18-19).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용서와 자유, 치유와 희망을 어떻게 가져오는지, 곧 앞으로 이루어질 창조세계의 갱신의 모든 징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사야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사람이” 경배하려고 나오는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그 날을 고대했습니다(이사야 66:22–23). 이사야와 이스라엘은 그 날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상상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언젠가는 세상을 다시 만드심으로 절정에 이르게 될 통치를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곧 창조세계의 중심에 있던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관계와 더불어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오른편에 앉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일에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실 것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예수님은 또한 자신을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이라고 칭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사회 개선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세계와 그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으로 시작될 것입니다(요한복음 12:24). 메시아만이 그 나라를 출범시키십니다.

메시아, 곧 성령의 부음 받으신 이의 사명은 메시아의 사람들 곧 기름 부음 받은 작은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누가는 그의 두 번째 책에서 이 이야기를 성령이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어진 이야기와 나란히 놓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사명은 실제로는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시작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우리가 성령 안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완전한 통치를 이루실 분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글렌 팩키암(GLENN PACKIAM)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New Life Church의 부 담임목사이며, 저서로는 Worship and the World to Come 및 The Resilient Pastor(2022년 2월)가 있습니다.

이사야

61:1-4, 8-11

을 묵상하십시오

.

(누가복음 4: 14-21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의 원래 청중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약속은 어떤 희망을 주었습니까? 이 약속이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당신이 예수님과 복음의 빛에 비추어 이 약속을 읽을 때 당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새롭게

2021년 12월 1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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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통치


이번 주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품고 재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의로운 심판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영광스러운 새날을 기다리며 묵상합니다.

오늘의 말씀: 요한계시록 21:1-6

이 팬데믹을 어떻게 견디고 계십니까?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갔고 어려운 시간을 헤쳐나갈 힘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전 세계적 규모의 고통에 몸서리를 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 팬데믹이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내버려 두실 수 있을까? 이것은 적어도 욥기만큼이나 오래된 ‘고통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단 하나의 대답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몇 가지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맨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요한계시록 21:4). 하나님은 망가지고 상처 입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치유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별로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 팬데믹을 두고서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4절).

요한계시록은 분명 역사의 참상을 묘사하는 일만 하지 않습니다. 예언이 제시되는 이 마지막 환상에서 모든 참상을 뚫고 희망이 그 꽃을 활짝 피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로운 미래를 가지고 계십니다.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어디로 이어질지를 가장 많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의 창조물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모든 것을 바꾸시는 새롭고 유일하신 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바꾸어 놓으신 삶을 사는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미리 맛봅니다.

저 미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환상은 우리를 데리고 가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워진 저 높은 산(10절)을 보여 줍니다. 그의 눈으로 우리는 보통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3-4절). 바로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창조를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변화를 이루어 낼 것입니다.

요한의 환상을 함께 보는 것은 그저 경건한 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살아갈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는 것을 바라며 사는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신약학 명예 교수이자 요한계시록 신학을 비롯한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

요한계시록

21:1-6

을 묵상하십시오

.

이 본문이 당신의 삶 가운데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어떤 말씀을 전합니까? 세상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는? 이 본문은 당신의 영적 시각에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예배와 신뢰의 기도로 하나님께 응답하십시오.

복음주의 영혼의 분열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와 다시 모일 방법

Christianity Today October 6, 2021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 Source Images: Kimson Doan / Unsplash / imtmphoto / Getty Images

미국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 새로운 균열이 형성되고 있으며, 통상적인 지역적, 교파적, 민족적, 정치적 노선을 따르지 않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한때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으로 연합했던 부부, 가족, 친구, 성도들이 이제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세상의 관점을 놓고 분열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단순히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최근 건강한 복음주의 가정에서 자라고 양육된 대학 친구들과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모였다. 한 사람은 부모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그렇게 갑작스럽고 안타깝게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자신의 친구들이 한때는 같은 견해를 나누었지만, 이제는 친구들이 충격적일 정도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성도들 간에 의심과 오해로 인해 해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겠고, 그들 또한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짓된 세상으로 인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있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도 당신과 똑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이 복음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성도들은 이제 구조적 변화로 인해 분열되고, 다른 세계로 나뉘고 있으며, 협력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까지 그렇게 극적으로 갈릴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함께 이룰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타당성 곡선과 정보 곡선

개인적으로 나의 가장 끈질긴 학문적 관심사 중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완성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비전에서 형성하도록 요구되는 믿음이 아니라 공동체와 문화에 속한 구체적인 실체적 믿음을 형성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피터 버거의 이론의 일부 영향을 받은 간단한 개념 도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로 휘어 그릇 모양이 되었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 수평이 되는 수평면을 상상해보라. 그릇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의 곡선은 개인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장의 범위를 나타낸다. 그것을 타당성 곡선이라고 부르자. 곡선의 중심에 떨어진다는 주장은 가장 타당하게 인식될 것이다. 개인이 이미 믿고 있는 사안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증거나 논증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장자리 근처에서 떨어지는 주장은 중앙에서 벗어나면서 점점 더 설득력이 떨어진다. 타당성 곡선을 완전히 벗어나는 주장은 그 시점에서 한 사람이 믿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며, 많은 양의 증거나 논리를 제공한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믿고 있거나 믿고 싶어 하는 개인의 경험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에 따라 주어진 주장의 타당성이 결정된다. 사람의 믿음의 전체 범위는 오히려 광모사상(photomosic)과 같다 (예시 참조). 현실에서 습득한 수천 개의 경험과 인식이 함께 결합하여 있고, 그 수천 개의 믿음 중에서 더 큰 패턴과 인상, 현실의 본질에 대한 고차원적인 믿음, 역사의 원대한 서술, 옳고 그름의 본질, 선과 악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수많은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 내재하여 있을 때 하나의 믿음을 바꾸려는 시도는 헛수고가 될 수 있다. 결합한 수천 개의 의견 불일치를 어디서부터 해결하기 시작해야 하는가? 대부분 반대가 되는 증거는 주장이 신념을 강화하는 전체 네트워크와 "맞는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지속적인 강도와 변화에 대해 저항하는 타당성 곡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욕망은 타당성 곡선에서 특히 복잡한 역할을 한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에 직면하고, 행동에 변화를 요구하고, 사회적 비용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주장을 믿지 않기를 원할 수도 있다. 이는 유행을 따르는 것이고, 우리의 편견을 확인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 부모님, 또는 수많은 다른 이유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주장을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고 싶지 않은 주장에 대해 더 설득력을 요구할 것이고, 우리가 믿고 싶은 주장에 대해서는 더 적은 설득력을 요구할 것이다.

정치이론의 오버톤 윈도우와 마찬가지로 타당성 곡선은 확장, 수축, 변화할 수 있다. 타당성 곡선은 한때 생각이 동일했던 친구들이나 가족 구성원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즉각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 부분이 바로 정보 곡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타당성 곡선 위에 있는 거울의 이미지 그릇을 상상해보라. 이는 정보 곡선이며, 공동체, 권력기관 및 미디어와 같은 세계에 대한 개인의 외부 정보 출처를 뜻한다. 정보 곡선의 중심에 있는 출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출처에서 나오는 주장은 거의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릇의 바깥쪽 끝에 있는 정보의 출처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할 때 받아들여 질 것이다. 곡선 밖의 출처는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손쓸 수 없이 즉각적으로 거부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보 곡선의 중심은 타당성 곡선의 중심과 나란히 정렬된다. 둘은 상호적으로 강화되는 관계이다. 우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전달할 때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주장이 우리가 신뢰하는 출처에서 나왔을 때 더 타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타당성 곡선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주장을 전달하는 정보의 출처는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타당성 곡선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도 한 개인이 종교 공동체에 가입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사랑이 넘치고 합리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 모든 종교 공동체가 비이성적이고 편견이 있다고 주장할 때 더는 그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점점 더 신뢰할 수 있다는 정보 곡선에 가깝게 생각을 바꿀 것이다. 또는 만약 어떤 사람이 아이를 잃는 경험을 했다면, 절대 죽음이 의식의 끝이라고 믿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주장에 더 개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의 출처를 확장하며, 서서히 믿음이 바뀔 수 있다.

또한, 정보 곡선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부모나 목회자 등 권위가 확실한 특정 공동체에서 자란 개인이 대학에 진학하며 새로운 지역사회와 공동체를 경험하게 된다. 만약 그것이 믿을 만한 정보의 출처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정보 곡선의 타당성 곡선이 바뀔 것이다. 신념이 변화함에 따라, 한때 자신에게 정보 대부분을 공급했던 출처가 더는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지지 않는 지점에 도달할 수도 있다. 또는 평생을 극좌파 매체를 소비하며 살아온 사람을 상상해보라. 어느 날 그가 보수적인 언론 매체의 말을 듣기 시작하고 그러한 주장이 그의 경험에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처음에는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더 보수적인 미디어를 소비하며 정보 곡선과 타당성 곡선이 확장되거나 이동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역사 속에서 사회와 경제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나 세상의 선과 악 등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완전히 뒤집히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9/11 Truth 운동과 QAnon 운동을 생각해 보라. 많은 미국인들은 부시 행정부가 중동을 침략하고 석유 산업에서 자신들의 수익을 위해 대규모 테러 공격을 계획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는 세계적인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타당성 곡선의 범위를 넘어 소아성애와 식인을 목적으로 국제 아동 인신매매 작전을 구성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음모가 타당성 곡선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거나 정보 곡선이 타당성 곡선을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주장이 그럴듯하며,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자명하게 다음과 같은 생각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보수집단은 "석유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천명의 무고한 목숨을 희생할 것이다. 보수는 욕심이 많고 그것이 보수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건강과 권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천명의 아이들을 희생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은 삐뚤어지고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정의로서 전체 구조, 타당성 곡선 및 정보 곡선, 정보 세계가 있다. 정보 세계는 개인 또는 개인 공동체가 어떻게 정보를 받고 처리하는지를 포함한다. 다른 정보 세계에는 또다른 사실과 출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도전과제는 나뉜 집단 간의 공통점이 거의 없고 큰 적대감을 가진 여러 정보 세계가 사람들의 인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복음주의 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복음주의 위기들

미국 복음주의 운동은 결코 단일 공동체로 구성된 적이 없다. 기준에 따라 추정치는 일반적으로 미국 복음주의자의 수를 8천만에서 1억으로 추정한다. 그 차이를 9천만으로 나누더라도 미국 복음주의 인구는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보다 많을 것이다. 또한 모든 지역, 인종 및 사회 경제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이 운동을 단일화 시킨 것은 공유된 일련의 도덕적, 신학적 약속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광범위하게 유사한 관점과 정보의 공통 출처였다. 타당성 곡선과 정보 곡선이 거의 일치했고, 서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공유한 지점이 상호 이해와 친교의 토대가 되었다.

이전에는 복음주의로 확인되지 않았던 집단들이 뭉치면서 신학적 관점에서 '복음주의'라는 범주를 더 적은 범위로 규정하고 사회·문화·정치적 용어로 규정하면서 이런 공통의식은 점점 더 커졌다. 오늘날 이 방대한 복음주의 운동은 여전히 공통적으로 도덕적, 신학적 헌신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지만 정보의 출처와 넓은 세계관에 대해서는 극적으로 다른 별개의 집단으로 나뉘고 있다. 서로 다른 집단의 정보 세계는 거의 겹치지 않으며, 고통과 분노를 품은 채로 의견 충돌을 피하며 한정된 범위의 주제에 관해서만 논의하려고 한다.

미국 복음주의 내의 어떤 집단은 우리의 종교적 자유가 확고하게 확립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집단은 큰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집단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여전히 체계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지만 다른 집단은 "체계적인 인종차별"이 성난 급진주의자들에게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는 진보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의사당 폭동에 관심이 있고 다른 이는 조지 플로이드 살해 이후 일어난 폭동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누군가는 트럼프 정부가 기독교에게 세대를 걸쳐 피해를 주고 있다고 믿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가 엄청나게 유익을 끼쳤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믿고, 다른 누군가는 민주당이 부당한 선거를 했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마스크와 백신이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믿지만 다른 누군가는 같은 사안에 대한 거부하는 것이 기독교적 용기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 사이에는 수많은 집단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예는 집단 간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지만, 한편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다시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따라서 지금이 우리가 행동을 취해야 할 중요한 순간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위 모델이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정보 곡선을 공통의 중심으로 옮기면, 타당성 곡선이 뒤따를 것이다. 정보는 미디어, 권력기관, 공동체라는 세 가지 출처를 통해 제공된다. 우리의 분열이 야기된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이 복음주의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 요점들의 간략한 개요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로, 미디어 위기가 심각하다. 오늘날 미디어가 더욱 강력하게 널리 퍼지면서도 사회는 더욱 분열되고 양극화되고 있다. 즉각적이며, 화를 표출하는 과장된 현대 미디어 콘텐츠의 역동성이 경멸스럽고 악한 미디어 판매자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시장으로 만들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과 진보적 원인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오래된 대중매체 정보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보수적인 목소리와 극우 정보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한마디로 디지털 미디어 지형은 미덕보다 악덕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진화했고, 관객들의 불안과 괴리감을 확인하는 정보와 논평만 전달하는 폐쇄된 미디어 영역으로 나누는 데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제자 양성의 관점에서 큰 도전과제를 제시한다. 미디어 소비는 몇 년 동안 증가해 왔고, 팬데믹 상황 속에서 더욱 더 증가했다. 우리 교인들은 일주일에 겨우 몇 시간만을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정보와 권위의 출처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만, 적대감을 집대성하는 미디어 매체를 보며 40시간 이상을 보낼 것이다. 정보 곡선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디지털 미디어의 알고리즘과 정치인들의 조작으로 부당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행위는 가속화된다. 한때 거대한 세계관을 공유했던 기독교 공동체는 오직 믿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동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미디어 소비를 분별력 있게 하지 않으면 정보 곡선의 다른 부분에 닿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분리된 미디어 세계가 더 오래 지속될수록, 우리의 분열은 더 깊고 광범위해질 것이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는 더 깊은 자양분을 공급하지 못한 채 미디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우리의 공통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디어 위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지만, 복음주의 운동은 또한 그 자체의 권위적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큰 존경을 받았던 복음주의 지도자 세대가 세상을 떠났다. 현재 세대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다양해 졌지만 우리 시대의 만연한 이념적 차별을 넘어서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도자들이 파괴적인 방법으로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우리는 유명인 목사의 추락을 보았다. 영적 권위와 더불어 지속적인 순종으로 겸손한 섬김의 삶을 보여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오늘날 기독교 연예인 시장에서 자신을 홍보하며 부와 인기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환멸과 분열이다. 젊은 세대들이 빠져나가는 동안 교회에 남아 있는 이들은 그들만의 이념 진영에 갇혀 더욱 고착화 되었다. 존경받는 권력기관 공유된 정보 곡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유명인이 된 리더십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성화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태복음 20:2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치적 차이를 따지지 않고 남녀나 리더쉽은 물론 이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다.

정보 곡선을 바꾸는 세 번째 방법은 우리의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이다. 말씀에 대한 지식을 깊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공유된 정체성을 구축하며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함양하고 젊은이들을 제자로 삼는다. 그러나 현대 삶의 압박과 유혹, 번잡함은 우리의 유대감을 깨고, 공동체의 따뜻함과 깊은 교제를 차가운 디지털 문화로 대체했다. 게다가 팬데믹은 고립을 심화 시키며 많은 사람들이 목적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교회 공동체 밖의 정치적 집단이나 음모론자들이 모인 공동체를 찾았다. 나아가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과격한 정치화를 통해 정치적 분열이 이어지고 있다. 목회자들의 정치적 입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성도들은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이 같은 다른 교회로 떠난다. 그러나 정보 세계가 거의 비슷한 개인들로 구성된 성도들은 남아 더욱 경직되고 급진주의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혐오의 공동체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나 분열과 양극화로부터 안식처를 제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정치적 문제에서 우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델로 삼고,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우리의 정체성을 긍정해야 한다.

미국 일리노이대 사회학자이자 미국 종교학자인 마이클 에머슨은 최근 30년간 종교 집단을 연구했지만 이처럼 "다른 수준의 갈등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은 무엇이 다른가?" 그가 물었다. "이 갈등은 정치, 인종,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 심지어 종교와 믿음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등 전반적인 세계관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한 모델이며, 우리 앞에 놓인 세대적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단순한 제안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결국 거짓말은 공허함 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증오는 목적의 빈약한 모방이고, 유명인사는 지혜를 가리는 빈약한 존재일 뿐이며, 정치적 결핍은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의 약함으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정의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를 구원자이자 화해자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 세계를 가로질러 새로운 다리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균형 잡힌 세계관과 이에 대한 아낌없는 대화를 제공하는 건강한 미디어 생태계를 육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는 겸손과 영향력을 갖춘 진실한 리더십 문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정치적 결핍으로 인한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더 부유하고 더 견고한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함께 이해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재구축하는 데 필수적일 것이다.

티모시 달림플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회장이자 CEO이다.

Translated by: Juhy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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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다음 세대와 북한의 부흥을 위해 모인 한국 선교사들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지난 한인세계선교사대회에 700명 이상이 참여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6, 2021
Courtesy of HGU

케이팝이 전 세계를 휩쓸기 훨씬 이전에 한국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나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한인세계선교사대회가 지난달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한인세계선교사회(KWMF)에는 20,0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소속되어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4년마다 열리는 행사를 한해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구 도시 포항에서 기독교 학교인 한동대학교와 한인세계선교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 대회에는 75개국에서 선교사 300여 명이 직접 참가했고 온라인으로 선교사 400여 명이 참석했다.

한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던 한국의 선교 운동이 쇠퇴 조짐을 보이며 선교사들 사이에서 긴박한 목소리가 나왔다. 28년 동안 키르키즈스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KWMF의 최근봉 대표회장은 CTS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선교사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보다 다양한 접근으로 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를 하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 수 있다.”

사흘간의 대회에서는 300여 명의 한동대 학생 자원봉사자가 섬겼고, 한국 선교에 관한 다양한 패널토의와 워크숍, 교제의 시간이 있었다. 참여자들은 새벽 6시 30분에 부흥기도회를 시작으로 오후 10시에 예배를 마치며 긴 일정을 소화했다.

이번 대회의 핵심 주제는 선교환경변화와 차세대 선교, 교육기관과 협력 및 북한 등 이였다. 이들 주제가 다같이 담긴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 포항 선언문(KWMF Pohang Statment) 을 총회에서 채택 했고,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로도 명시됐다.

KWMF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교사 윤리강령과 함께 지난 4년에서 8년 간 북한에 억류 중인 6명의 남한 기독교인을 북한에서 석방시키라는 공개 호소문을 발표했다 [아래 사이드바 참조/].

“우리는 한국 선교사로서 한반도의 화해와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의무와 소명이 있음을 선언한다.”고 선언했다. “북한에 부당하게 억류된 기독교 사역자들의 보호와 석방을 촉구한다.”

과거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명성 회복을 기대하며 한동대학교는 본 대회에서 억류된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집트 콥트 기독교인 사업가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오라스콤의 나기브 사위리스 (CEO Naguib Sawiris) 대표는 로마서 8장 31절(“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을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꼽았고, 현재까지 북한에 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하여 600만 시민들에게 통신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는 한동대와의 인터뷰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용기의 원천”이라며 억류된 기독교인 6명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KWMF 한동대 크리스천 리더십 행사에서 한동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또 다른 수상자는 동아시아에서 4대에 걸쳐 선교 활동을 한 것을 인정받은 미국인 선교사 르우벤 토리 4세 였다. 르우벤 토리 1세는 1900년대 초반에 중국과 일본에서 부흥을 이끌었고 무디 (D.L. Moody)부흥사의 동역자이자 무디성서학원 (무디 대학교 전신)의 설립 학장이셨다. 그의 아들 르우벤 토리 2세는 중국 선교사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장애인사역을 하였다. 토리 3세 (대천덕 신부)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평양에서 선교사 기숙학교를 다녔고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대천덕 신부는 전쟁 후 한국에 성공회 신학교를 재건했으며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 (Jesus Abbey)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를 이어받아 벤 루빈 토리 4세는 부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매년 약 10,000명의 기독교인이 방문하는 초교파적 공동체인 예수원사역과 통일한국을 준비하며 북한청소년을 섬기는 예수원 네번째강 삼수령 센터 에서 활발히 사역하고 있다.

이번 대회 준비위원인 원재천 한동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우리 한국 선교사님들도 여러 세대를 이어 대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소망하는 바람으로 토리 집안을 명예박사 수여자로 선정했습니다. 현재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50, 60대이고, 40세 미만 선교사의 수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선교사님들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는 1900년에 기독교인이 인구의 1%도 되지 않았던 5,200만 명의 국가가 세운 인상적인 업적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브라질과 중국 등 더 큰 나라에서 더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며 이 기록을 추월했다. KWMF 대회에서 한국 선교 역사의 이러한 “변곡점”에 대해 신중하게 논의했다.

장순흥 한동대학교 총장은 CTS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동대에는 1,000 명의 사역자 (선교사 및 목회자)의 자녀가 있다. 이 대회를 통해 젊은이들이 선교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는 한동대학교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5년 이상 선교 경력있는 선교사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는 선교지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찬양대에 자원했던 장호진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HILS) 대학원생은 “마지막 저녁 예배를 드리는 동안 성령의 임재를 느꼈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대회를 선교의 새 시대를 여는 변곡점으로 삼으시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은 무대에서 찬양에 맞춰 춤을 추었고, 다양한 연령대의 선교사님들이 함께 찬양하고 춤을 추며 하나됨을 체험하였다.”라고 말했다.

대회를 앞두고 4개월 동안 한동대 연구진은 한국 선교사들이 직면한 여러 어려움을 조사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했다. 300명의 응답자 중 약 60%가 심리 치료나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70%는 선교지에서 법적 문제에 직면했다. 그리고 90%는 은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없다는 것이 조사됐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동대는 대회 기간 내내 상담과 법률 지원 부스를 마련했고, 추후 캠퍼스 옆에 은퇴한 선교사들을 위한 주거 커뮤니티를 건설할 계획도 수립하기로 했다.

KWMF 한인세계선교사대회는 1988년부터 일리노이주 휘튼 칼리지에서 처음 7차례의 대회가 열린 후 2016년 대회에서는 캘리포니아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에서 971명의 선교사와 4,500명의 사역자 및 평신도 참가자가 모였다. 다음 대회 장소는 아직 미정이다.

원재천 교수는 “KWMF 대회 개최는 보석 같은 기회이며 학교에 축복이므로 한동대는 물론, 제가 휘튼대 총장이나 아주사 대학 관계자였다면 다음 대회를 꼭 주최하고 싶을 것 같다. 특히 이번 대회는 우리가 ‘서방으로부터’의 전도에서 ‘[비서방에서 비서방으로] 남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나가며 협력하여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것을 계승하며 혁신함을 지향했기에 본 대회는 한국 선교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에도 시사점이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목회자들과 유수한 신학교 총장들도 KWMF 대회를 환영했다. 세계 최대의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와 100여 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숭실대학교와 장로교 신학대학원 총장 등 2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 축하영상을 보내왔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담임목사는 “지난 세기 동안 한국교회는 복음을 통해 서방교회에 빚을 졌다. 다음 세기에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1994년 설립된 한동대학교를 초창기부터 후원했던 온누리교회의 이재훈 담임목사는 “팬데믹 이후에도 선교 활동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한인세계선교사회

(KWMF)

가 옹호하는 북한에 억류된 한국 기독교인

6

명의 프로필

(

한동대학교 제공):



세 명의 한국 선교사:

1) 김국기 목사는 2003년부터 다양한 의료용품, 의류, 농기구로 _북한주민, 꽃제비, 조선족을 돕는 사역을 했다는 이유로 2014년 10월부터 구금되었다.

2) 최춘길 목사는 2014년 12월부터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고 2015년 6월에 ‘무한/종신 노동’을 선고 받았다. 구금된 공식적 이유는 “미국과 꼭두각시 남조선이 조종하는 반북 간첩 활동”이다.

3) 김정욱 목사는 인도적 구호 사업을 하는 국수 회사를 설립하고 중국 단둥에서 북한 사역을 위해 음식, 의약품, 피난처를 제공한 혐의로 2013년 10월부터 구금되어 2014년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각각 구금된 공식적 이유는 “미국과 꼭두각시 남조선이 조종하는 반북 간첩 활동”이다.

탈북자 출신 한국 기독교인 3명:

4) 고현철: 2016년 5월 압록강을 근처에서 탈북하려는 고아 소녀들을 도우려다 체포되었다. 현재 상태를 알 수 없다.

5) 김원호: 2016년 3월 중국 국경에서 납치됐다. 현재 상태를 알 수 없다.

6) 함진우: 2017년 5월 산허와 룽진의 북중 접경 지역에서 중국 측을 취재하던 중 납치됐다. 북한을 탈출하기 전에는 정찰총국에서 한국과 일본을 표적으로 하는 정보작전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2011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북한 뉴스 전문 매체인 데일리NK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는 북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을 도왔다. 현재 상태를 알 수 없다.

번역: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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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고 마스크가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경쟁적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행동은 상반되지만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Christianity Today May 12, 2021
Illustration by Rick Szuecs / Source images: Envato

코로나 19와의 전쟁에 관해 우리가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을 통해 인간의 천재성과 근면성의 위업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발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첫 번째 백신을 투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많은 사람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의료 연구진, 보건 공무원, 의사, 간호사, 구급대원들이 모두 함께 밤낮으로 영웅적인 노동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 19와의 전쟁에 대해 두 번째로 언급해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백신, 산소호흡기, 손 씻기, 마스크뿐만 아니라 고통과 질병의 치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코로나 19에 맞선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인간의 업적과 하나님의 축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공개적인 토론에서, 우리는 종종 인간과 신성한 인과관계, 즉 하나님의 노력과 우리의 인과관계를 서로 충돌시킨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 4월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는 코로나바이러스 속도 감소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노력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았습니다. 신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은 것이 아닙니다."

필자의 최근 저서에서, 이러한 생각을 "경쟁 기관"이라고 명칭했다: 만약 이 일이 인간의 책임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하나님은 책임이 없을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 견해는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만연하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전 하원의원 후보인 디애나 로레인이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논리는 안전띠를 착용하거나 속도 제한을 운전하거나 밤에 문을 잠그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금융계의 권위자 데이브 램지는 마스크를 쓰거나 다른 코로나 19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은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도자들도 이 생각에 동조했다. 그 의미는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공중 보건 권고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인간의 전문지식이나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임재한다.

비록 경건의 언어를 마스크를 썼지만 (실제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지만), 이 논리는 주로 세상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쿠오모, 로레인, 램지 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인간의 행동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기능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이신론은 인간의 일과 노력, 선택에서 하나님을 배제한다. 브래드 S. 그레고리는 저서 의도하지 않은 종교개혁에서 이 "하나님과 창조 사이의 경쟁적인 관계"가 어떻게 기독교 신학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기독교의 성관이 거짓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진짜라면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 행동하지 않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쟁 기관은 우리를 마법사처럼 세상을 보호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수동적인 주체 또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행위자로 만든다.

경쟁 기관에 대한 생각은 한동안 믿음과 과학의 논쟁을 형성해왔지만, 우리가 일상과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도 스며든다. 우리는 하나님께 치유, 보호 또는 축복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일상적인 업무, 정치, 과학 연구, 가계 또는 집안일 등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세계와는 멀게 느낀다. 하나님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 사이의 이런 잘못된 이분법은 '생각과 기도'라는 말로 수동적이며 비활동적이라고 표현하는 문화적 밈이 된 이유를 설명한다.

경쟁 기관은 우리의 신학과 영적 실천을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감사함을 볼 수 없도록 만든다. 대조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성찬적 시각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의 물건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 비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 질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도록 과학계의 통찰력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질서로 우주를 만드시고, 이 일에 목숨을 바친 인간이 인류를 위해 세상을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과학, 입법, 교육, 그리고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의 인간의 구속 작업은 하나님의 보호와 자비의 표현이다. 우리의 일은 그의 선택 의지와 활동에 참여한다. 삼위일체적 사랑은 모든 선하고 의미있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창조적인 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그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응답한다.

티시 해리슨 워렌은 북미 성공회 소속 신부이며 '일상의 예배와 밤의 기도'(IVP, 2021)의 저자이다.

번역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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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은 참선보다 더 나은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비주의나 반복적 명상을 통한 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Christianity Today April 12, 2021
Jurica Koletic / Unsplash / Edits by Rick Szuecs

명상 수행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많은 사람이 연꽃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손을 뻗고 “옴” 소리를 지속적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반감을 갖는 모습 또한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명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는 상관없는 신비주의자와 수행자를 위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상은 사실 기독교 훈련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레깅스를 입고 조용한 시간 동안 연꽃 자세를 취하기 전에 신비주의 명상 수행과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을 분별해 봅시다. 기독교 묵상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을 연습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1편에서 축복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는 밤낮으로 묵상합니다(2절). 시편 기자가 묵상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성찰의 대상은 하나님의 법 (토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길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지금 구약이라고 부르는 거룩한 기록에서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단 하나의 참된 하나님을 따르는 현대의 제자들에게 명상의 대상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명상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묵상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명상과는 대조적입니다. 신비주의 명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명상의 이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나 불안 또는 다른 형태의 정신적 고통이나 혼란을 해소할 목적으로 호흡에 집중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반면, 기독교 묵상은 행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생각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수단이며, 연구와 반성 및 반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비주의 명상과는 달리 기독교 명상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덕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8). 기독교 묵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밤낮으로 이 율법책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렇다면 기독교 묵상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신비주의 명상 방법을 기독교 묵상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며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 구절을 읽고 조용히 마음을 모으고 가만히 있으면 성령께서 내 마음 한구석에 통찰력을 주실 거야.” 의도는 좋지만 이러한 방식은 성경을 매우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각 구절에 대한 이해를 건너뛰고 적용이나 위안을 받는 형태로 성경 말씀을 가볍게 여길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을 통해 명백한 의미를 전달하지만, 우리가 반복해서 생각하고 묵상할 때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묵상은 성령의 말씀을 비춥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묵상할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통찰력과 지혜와 이해력을 주실 것입니다.

기독교 명상은 반복이 배움의 어머니라는 낡은 격언을 고수합니다. 우리는 읽고 다시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번역으로 성경을 읽은 다음 다른 번역으로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앱을 통해 성경 구절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찬양을 듣고 따라 하며 새로운 찬양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한 줄씩 필사하면서 읽고, 동시에 기도하며 읽을 수 있습니다. 읽고 있는 내용을 여백에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모임에서 또는 가족과 함께 소리 내 함께 읽을 수도 있고, “집에 앉아있을 때나 길을 따라 걸을 때, 누워있을 때, 일어날 때” 항상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신명기 6:7).

생각하고, 공부하고, 되새겨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언약과 그 길을 묵상하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이 정해집니다. 그것은 참선과 같은 상태를 약속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나은 것을 약속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찾아오는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Jen Wilkin은 작가이자 성경 교사입니다. 성경 읽기를 지지하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되기를 소망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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