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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운명론: 세상이 그냥 불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태도가 필리핀의 교회 안팎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Christianity Today April 10, 2024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이미지: Unsplash

필리핀은 이슬람이나 기독교가 정착하기 전에 애니미즘 문화였다. 애니미즘 문화에서, 운명은 자비로운 정령들이나 악령들의 행동이나 반응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정령들을 기쁘게 하고 달래려고 노력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변덕은 추수와 강우와 같은 존재의 모든 면에서 운명을 결정한다.

비록 기독교가 이제 국가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애니미즘적 신념은 필리핀인들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박혀 있다. 사람들은현재 상황에 대해 체념하는 경향이 있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리핀인들이 어려운 시기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칭찬하지만, 이는 그들이 겪은 불행한 일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지방에서는 애니미즘적 관습이 여전히 필리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민간 기독교’라고부르는데,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믿으면서도 애니미즘적 의식에 참여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믿거나, 카톨릭과 애니미즘적 신앙이 결합하여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려주일에는 카톨릭 신자들이 교회로 잎을 가져오고, 사제가 거룩한 물을뿌린다. 사람들은 이 잎을 자신들의 집 문 근처에 두는데, 이는 그 잎이 악령과 불행을 쫓아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필리핀은 1521년부터 식민지였다. 처음에는 스페인, 그다음에는 미국, 그다음은 일본, 그리고 다시 미국의 식민지였다. 우리의 독립은 1946년에 선물로 주어졌고,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수 세기 동안 우리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직 더 높은 권력에 의해 강요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인들은 종종 ‘무엇이 될 것이든 될 것이다’라는 뜻의 “바하라 나(bahala na)”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다른 표현인 “바탈라 나(bathala na)”(바탈라는 애니미즘 필리핀 신앙의 최고신)에서 나왔는데,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문제가 된다. 모든 경험을 신성한 기원으로 보고, 따라서 신성한 계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기다리는 것은 개인의 적극성, 자기 지향성, 책임감을 앗아가는 것이다.

필리핀의 복음주의자들은 운명론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 책임감, 그리고 행동주의에 대한 복음적강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빈곤 완화, 지역사회 개발, 급식프로그램 등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공식적인 부서나 조직이 있지만, 대부분의 카톨릭 신자들은 참여하지 않고 성직자만이 목소리를 내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복음주의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 역설적인 변증법이 있다. 필리핀인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운명론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적으로는 아마도 사회 정의를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복음주의 목사들의 리더십 때문에, 교회 전체가 운명론적이지는 않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운명론적 사고와 관련된 잠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일부 복음주의 단체에서 전천년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이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이 지속해서 도덕적으로나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고 가르치므로, 믿는 자들은 모든 불행한 세상 사건을 신성한 계획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환경 보호, 사회 정의 및 연민의 사역에참여하는 시도를 신성한 시간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교회 내외에서 운명론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영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목회자들은 운명론을 개인의 경험과 공동체적인 태도로서 이야기해야 한다. 애통함 역시 현재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때문에 적절한 반응이다. 비판적인 슬픔은반성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내 맥락에서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는 한 가지 성경 구절은 5천 명을 먹이는 일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굶주리고있으니 그들을 모두 보내는 것이 최선의 대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4:15-16). 하나님은 현재 상황을 다루는 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상황이든 다른 사람의 상황이든 말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인 운명이 전부인가? 운명론이 아시아 전역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읽어보세요. (이 특별시리즈의 추가 기사는PC 버전은 오른쪽, 모바일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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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운명론: 그리스도인들도 ‘인샬라’라고 말하는가

그 태도가 인도네시아의 교회 안팎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Christianity Today April 10, 2024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이미지: Unsplash

인도네시아어로 인생에 대한 운명론적 태도를 반영하는 여러 표현이 있다.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그것이 운명이다”라는뜻의 “itu sudah takdir”, “그것은 인생의 길이다”라는 뜻의 “itu sudah jalan hidup”, 혹은 “이름이 운명이다”라는 뜻의“namanya nasib” 등이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종종 어떤 결과나 상황을 받아들이며 그것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수반된다. 또 다른 표현인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mau bagaimana lagi?”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감정을 전한다.

운명론은 인도네시아 문화에서 다양한 출처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해석을 포함한 전통적인 신념, 문화적 관습 및 종교적가르침을 포함한 전통에 근거한다. 운명론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종교와 결부되어 있지 않지만, 문화적 혼합주의와 전통적신념과 종교적 신념의 혼합이 운명론의 확산에 기여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거주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문화에서 운명론을 이해하는 데에는이슬람이 주요한 종교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슬람은 운명적인 사고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 삶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사건을 모두 알라의 신성한 의지로 여기며, 알라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체념이나 정해진 운명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을 키울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들은 중동의 아랍 무슬림들이 하는 것처럼 ‘인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인도네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아랍어 문구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인 “kiranya kehendak Tuhan yang jadi” 를 사용한다. 이는 영어구문 “the Lord willing”, ‘주님의 뜻’과 유사한 의미이다.

운명이나 숙명에 대한 태도는 개인 및 공동체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농촌 지역에서는 전통적인문화 관습과 신앙이 이러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바 시골 공동체에서는 전통적인 신비주의(Kejawen)나 애니미즘적 신념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어, 이는 운명의 역할을 강조하는 세계관에 영향을 줄수 있다. 그러나 도시적 환경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문화와 함께 교육 및 정보에 노출되며, 보다 세속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관점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기 삶의 방향을 형성하는 데 있어 운명론적 신념에 대한 강조가 줄어들 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운명을 장려하지 않지만, 예정설과 같은 특정 신학적 개념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인도네시아의 일부기독교 공동체들 사이에서 운명론적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운명론은 무의식적으로 인도네시아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인 측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고통이나 자연재해에 직면할 때,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사건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운명론적 개념을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을수 있다.

운명론은 또한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방해할 수 있으며, 이는 인도네시아 교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운명론적인 태도가 팽배해지면 건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는 사회문제를 운명론적으로 보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정의, 연민 및 사회 변혁을 대변하는 교회의 역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회 변화에 대한 논의는 보통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교회들은 종교적 안녕이나 대규모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정부에 의견을 제공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교회 연합과 같이 법적으로 설립된 협의회를 통해 함께 참여한다.

운명론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개인 책임의 중요성,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의 힘을 강조할 수 있다. 또한,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침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의지를 모두 중요시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장려함으로써 운명론적 경향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기 위한 두 가지 관련 성경 구절은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개역 개정)”, 그리고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개역 개정)”가 있습니다. 이 두 성경 구절은 구약과신약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책임과 행동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긴장 또는 모순을 조화시킨다.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인 운명이 전부인가? 운명론이 아시아 전역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읽어보세요. (이 특별시리즈의 추가 기사는PC 버전은 오른쪽, 모바일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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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에게 130명이 사살된 이후 복수에 저항하는 러시아 복음주의자들

모스크바와 키예프가 ISIS 연계 단체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콘서트장 테러에 대해 비난이 오가는 가운데, 기독교 지도자들은 비난 대신 연민과 용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스크바 크로커스 시청 테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꽃과 장난감이 놓여 있다.

모스크바 크로커스 시청 테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꽃과 장난감이 놓여 있다.

Christianity Today April 3, 2024
올가 말트세바 / 게티

러시아 복음주의자들은 주일 설교를 통해 모스크바 콘서트홀에서 130여 명이 사망한 테러 공격을 규탄했다.

러시아 침례교 연합은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위해 기도했고, 오순절 연합은 "비통함과 슬픔"을 전했다. 러시아 복음주의 연맹의 비탈리 블라센코 사무총장은 이번 테러를 "고통스러운 충격"이라고 표현하며 테러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복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다: 테러리스트는 과연 누구일까?

6,200석 규모의 크로커스 시청에서의 공격으로 지난 금요일 최소 137명이 사망한 사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칼리프를 추구하는 아프가니스탄 코라산 주(ISIS-K)의 ISIS 연계 조직이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성명을 통해 기독교인을 겨냥한 것이며 이슬람의 적에 대한 전쟁의 '자연스러운 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달 초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은 대규모 집회를 피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미국 관리들은 러시아와 정보를 공유했다고 밝혔다. 3월 7일 러시아는 회당에 대한 공격을 저지했다고 밝혔으며, 며칠 전에는 보안군이 러시아 무슬림 코카서스 지역에서 총격전을 벌여 ISIS-K 테러리스트 6명을 사살했다.

이 단체는 2017년 15명의 사망자를 낸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폭탄 테러와도 관련이 있다.

ISIS-K는 파키스탄 탈레반보다 더 폭력적인 노선을 추구하는 극단주의자들이 2015년 러시아가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에 공식적으로 개입한 해에 결성되었다. 수니파 단체인 ISIS와 그 계열사는 아사드의 알라위파 신앙을 이단이라며 반대하고 시아파 무슬림을 배교자로 간주한다.

지난 1월, ISIS-K는 2020년 미국에 의해 암살된 이슬람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의 추모식에서 케르만에서 이란인 95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2021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가운데 카불 공항에 대한 ISIS-K의 공격으로 미군 13명과 민간인 17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분석가들은 ISIS-K가 점점 더 러시아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11명의 용의자를 체포했으며 타지키스탄 출신의 총격범 4명이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3월 17일 서방 관측통들이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선언한 88%의 득표율로 재선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국가 애도의 날을 선포하면서 이슬람 테러를 언급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비난 성명은 모호했고, 러시아 안보리 부의장은 우크라이나가 연루되었다면 그 지도자들을 "자비 없이 추적하여 죽여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추측했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ISIS가 확실한가?"라고 물으며 이 단체가 단지 "겁주기용"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주미 러시아 대사는 미국으로부터 사전 정보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한 민족주의 언론 매체는 크렘린궁에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48시간 동안 주요 도시에서 대피할 시간을 달라고 촉구했다.

콘서트장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 불과 몇 시간 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민간 기반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최대 수력발전 댐을 공격해 100만 명이 넘는 주민이 전기 공급을 받지 못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우크라이나는 테러 공격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군 정보부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의 "고의적인 도발 행위"라고 주장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책임을 돌리기 위한 전형적인 "범죄자"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1999년 테러 공격이 거짓 깃발 작전이었으며 푸틴이 자국민을 "소모품"으로 여겼다는 입증되지 않은 비난을 암시하기도 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ISIS-K 단독으로 공격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복음주의 소식통은 상호 비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기도와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수의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해온 모스크바 신학교의 알렉세이 마르케비치 교무 부총장은 "전 세계로 악이 퍼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주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 중 누구도 악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막아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익명의 러시아 반전 단체인 Christian4Peace는 거의 동시에 발생한 테러와 우크라이나 민간 기반시설에 대한 공격을 규탄했다.

이 단체는 텔레그램 계정에 "적을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글을 올렸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옵소서."

보안상의 이유로 실명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복음주의 단체인 Faith2Share의 한 지도자는 이번 공격이 아직 "너무 생생해서" 많은 생각을 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감"을 이야기하면서 2000년대 초반의 테러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그는 ISIS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테러 용의자들의 출신지인 중앙아시아 이주민 커뮤니티에 대한 태도가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대 150만 명의 타지크인이 러시아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도 다른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러시아를 공격한 적이 있다. 2002년에는 러시아 코카서스 지역의 체첸 민족 무장 세력이 모스크바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보안 작전에서 테러리스트 41명과 민간인 129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2004년에는 베슬란의 한 러시아 학교에서 체첸 무장 세력의 포위 공격으로 330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절반이 학생이었다.

그러나 금요일의 공격 이후 한 복음주의 지도자는 사태 확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럽 러시아 루터교회의 세르게이 홀츠베르트 주교는 "모스크바에는 현명하고 신중한 리더십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아야 하며 공식적으로 발표 전에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연맹의 사무총장이자 로잔 무브먼트의 유라시아 지역 책임자인 파벨 콜레스니코프는 이번 공격이 무너진 세상의 또 다른 증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범인에 대한 추측을 자제했다.

그는 잠언 25장 2절을 인용하며 "비난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이 일은 왕의 몫임을 암시했다. "악은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나올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자존심을 채우는 것일 뿐입니다.“

모스크바 젤레노그라드 침례교회의 목사인 콜레스니코프는 주일 설교에서 테러리즘을 다루었다.

그는 아담 이래로 죄가 인간을 지배해 왔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미래를 이상화하며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버리라고 명령하셨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이 적극적인 연민과 용서로 이어지는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도와달라는 간구하는 기도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콜레스니코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거나 정의를 요구하거나 용서할 수 없다면 예수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분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은퇴한 교회 저널리스트이자 1978년부터 이 지역을 취재해온 미국과 러시아 공동 시민권자인 윌리엄 요더는 러시아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인보다 더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2001년부터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사는 그는 누구도 보복을 요구하지 않으며, 대신 테러를 자연재해의 범주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요더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현지인의 태도"라고 말했다.

그는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요더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도 대부분의 러시아 시민들처럼 비슷한 의구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ISIS-K의 책임이 없다고 반쯤 확신했다. 하지만 지하디스트 단체가 유죄라면 우크라이나 사람들과의 적대감이 더 불붙지 않을 것이다.

공격의 배후가 누구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러시아는 타지키스탄 무장 세력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우크라이나로 도주해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야당 매체 메두자는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210마일,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90마일 떨어진 브랸스크 지역으로 체포 지점을 지목했다. 친크렘린 성향의 언론은 구금된 무장 세력이 '이슬람 설교자'로부터 돈을 받고 공격을 수행했다는 자백을 방송했다.

분석가들은 고도로 군사화된 국경을 통해 침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그러나 두 명의 테러리스트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영상에는 심하게 멍든 모습도 담겨 있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종교 연구 센터장 로만 룬킨은 "이번 공격에는 종교적 동기가 없다"며 ISIS-K에 대한 광범위한 의구심을 전했다. "오히려 이번 공격으로 모든 종교 신자들이 단합했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무슬림, 유대교, 불교 단체들도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서방에서는 부활절(러시아 정교회는 5월 5일을 기념)이 다가오면서 콜레스니코프는 신자들에게 예수의 보혈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5,000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9시간 동안 줄을 서서 자신의 헌혈증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콜레스니코프는 "우리의 임무는 지역사회에 남아 선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악을 물리치셨지만, 악은 인간을 통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떤 국적에 귀속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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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무덤에서 만나다

예수님은 부활절 기간과 그 이후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더블 테이크. 패널에 유화. 24 x 26

더블 테이크. 패널에 유화. 24 x 26

Christianity Today March 31, 2024
체리스 런딘

이렇게 말하고 , 뒤로 돌아섰을 때에 ,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 “여자여 , 왜 울고 있느냐 ? 누구를 찾느냐 ?”
— 요한복음 20:14-15

이 세상을 살아가며 슬픔이 가득한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있는 영원한 고민이자 전형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주신 구원을 기뻐하지만, 이 세상에는 슬픔이 만연합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은혜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지만, 저의 오래된 상처가 떠오르곤 합니다. 딸과의 소원해진 관계, 개선해야 할 결혼 생활, 건강 진단,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일, 불에 타버린 집, 세상을 떠난 애완동물, 배신한 사랑, 나를 해하려는 사람들 등.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보지 못한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동산의 무덤에 나타나셨을 때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요한복음 20:15)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승리의 순간에도 마리아의 슬픔을 헤아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성육신을 연상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세를 버리시고 아기로 오신 그 헤아릴 수 없는 신비는 우리를 속죄하기 위함이지만, 우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질문으로 마리아의 슬픔을 함께 공감하십니다. 기적과 애도의 장소인 동산 무덤에서 마리아와 함께한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순간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우리를 아시며 선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단순히 구원을 받고 세우신 백성이 아니라(막 3:13-14), 그분과 함께 하도록 초대받은 백성입니다.

부활주일에 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되신 그분은 죽음에서 살아나셨지만 여전히 몸을 굽히고 낮은 자세를 유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고 식사하고 고난을 당하고 축하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마리아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무덤에서 재회한 첫 순간에 함께 머물러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태초의 동산에서 인간의 곁에 서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마리아는 마침내 자신의 랍오니(히브리 말로 선생)를 알아보고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요한복음 20:16).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분은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를 무덤으로부터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며, 지금 생명의 동산 무덤에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활절 기간과 그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모든 것을 상실할 때에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묵상 질문:



1. 이 세상에 슬픔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당신은 어떻게 기쁨을 붙잡고 있나요?

2. 예수님께서 “왜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레이첼 마리 강은 더 폴로우 하우스의 설립자이며 두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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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의 영광

삶이 견디기 힘들 때, 우리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작품명: 부엌. 구아슈. 2020

작품명: 부엌. 구아슈. 2020

Christianity Today March 30, 2024
클레어 워터맨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 고린도후서 12:9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주신다”는 진부한 말을 하는 기독교인을 본 적이 있나요? 이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통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릇된 해석일 것입니다.

몇 달 동안 식욕이 없어 몸이 쇠약해지고, 눈물이 비 오듯 계속 흘러 뺨이 타들어 가고, 혼자라는 생각에 매일 밤늦게까지 차가운 부엌 바닥에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납니다. 예상치 못한 상처로 가득 찬 삶의 시간에도 예수님은 그 밑바닥에서 화해와 구속, 회복을 위해 부르짖는 저를 지속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분은 저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낸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매 순간이 마라톤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으로 저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놀라운 은혜 속으로 저를 초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삶에서 주님의 음성을 느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

나를 완전히 끝까지 내려놓아야만 하나님께서 제 안에 들어오실 수 있었고, 그분은 자비로 씻어 주시고 그분의 힘과 능력으로 저를 입혀 주셨습니다. 나의 완전한 연약함으로 인해 그분의 영광이 머무는 거처가 마련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9절)라고 선언한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본 타락한 인간으로서, 저는 우리가 인생에서 고난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면 우리 자신 외에는 구원자가 필요 없을 것이고, 예수님의 피 흘리신 죽음도 불필요할 것입니다.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깨어진 관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질병,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알 수 없는 일들을 헤쳐 나가는 동안 세상의 깨어진 무게는 고스란히 우리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을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과분한 선물은 바로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우리의 절대적인 무능력함은 구세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분도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셨기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우리의 아픔을 향한 그분의 마음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백함은 그분만이 우리 죄를 위해 희생양이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무죄한 사람이 모든 죄의 무게와 형벌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힘겨운 진리이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실 때 이를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힘과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는 제가 부엌 바닥에서 간절히 기도했던 상황에서 저를 화해시키거나, 구속하거나, 새롭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중요하거나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결국 한낱 먼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 뜻대로 고통이 억누르고 관계를 지키려던 삶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스스로 해내려던 의지를 버리자 제가 갇힌 상황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화해와 구속과 새로움을 통해 안식을 찾았습니다.

부엌 바닥을 기며 보내던 밤의 어둠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부인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깊고 높은 곳에 거하시는 구주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명하는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약할 때 우리는 강해지므로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묵상 질문:



1. 여러분의 삶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끝났다고 느꼈던 순간이나 시기에 예수님께서 은혜와 능력과 힘으로 여러분을 만나주셨던 때가 있나요? 이 경험에 대해 나누고, 그 경험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지 나눠보세요.

2.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의 연약함과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정직한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요?

케이틀린 로즈 레벤탈은 전문 추상화가이며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남편과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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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못할 만찬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 드러나지 않은 희망과 불안

식탁으로 오라. 리넨에 유채. 56 x 83

식탁으로 오라. 리넨에 유채. 56 x 83

Christianity Today March 28, 2024
카리 던햄

저녁때가 되어서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 너희 가운데 한 사람 ,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 — 마가복음 14:17-18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아침에 베이글을 먹었거나 점심에 부리또를 먹었을 수도 있고, 어떤 음식이었든 그 음식으로 하루 동안 활동할 힘을 얻었을 겁니다. 식사하는 건 배를 채우기 위한 당연한 행위이지만, 어떤 식사는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고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기도 합니다. 1993년 11월 20일에 먹었던 한 끼는 제 영혼을 채워주었기에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밴쿠버에 살고 있었고, 쌀쌀하고 이슬비가 내리는 저녁이었습니다. 하루를 잘 마무리한 후 저는 준비한 대로 토니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녀는 제 청혼을 승낙했고, 우리는 맛있는 연어 요리를 함께 먹으며 그날을 기념했습니다. 식사하면서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진 날과 그 이유를 기억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이자 약속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한 영원한 의미를 지닌 저녁 식사를 주최하셨습니다. 마가의 성만찬에 대한 기록은 “유월절 양을 희생하는 관습이 있던 무교절의 첫날”(막 14:12)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행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며, 결국 기대감으로 바뀌었고, 이날을 기념했습니다. 유월절 양을 희생하는 행위는 매년 성전에서 새롭게 행해졌고, 예수님의 만찬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기대감에서 불안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곧 나와 함께 식사하는 자가 나를 배반하리라”(18절)고 말씀하시며 대화를 중단하셨습니다. 식탁에서 나누던 즐거운 이야기가 순식간에 모두 멈췄을 것입니다. 이 엄중한 선포는 함께하는 만찬의 상징인 평화를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함께하는 만찬은 서로 언약하며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적도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배신은 언제나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러한 환대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느낀 배신감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22-2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저녁이었다면 빵을 나누는 행위도 단순히 만찬 중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을 겁니다. 즉 축복하며 빵을 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구속에 대한 기대와 개인적인 염려로 가득 차 있었고, 식탁에 모인 제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의식화했습니다. 구원의 열매는 볼품없는 나무, 즉 그리스도의 몸이 달려 있던 낡고 투박한 십자가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고전 11:26)입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에게 고요히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빌 2:10-11).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환상은 그분을 경외하고 경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찬에서 기억되고, 상하고 매맞으시며, 배신당한 구세주가 기꺼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치유되고 그분의 보혈로 우리는 온전해집니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마다 구세주의 슬픔을 통해 얻은 엄청난 기쁨이라는 신성한 선물을 천천히 음미합니다.

묵상 질문:



1. 여러분의 삶에서 기억에 남는 식사가 있었나요? 그 식사가 의미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2. 예수님의 만찬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측면과 그리스도의 희생의 구속적 본질을 어떻게 상징하나요?

월터 김은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의 회장이며 이전에는 목사로서 캠퍼스 교목으로 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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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움의 크레센도

성금요일 예배가 예수의 장례식이나 죄책감을 연습하는 자리가 아닌 이유

Christianity Today March 28, 2024
cdgrunewald / Lightstock

화려한 성금요일의 행사가 열린다. 우리는 어떤 것보다도 이날을 기념하며 축하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여기서 우리는 우주의 근본에 대해 논하고 있다. 우주적 구속, 존재론적 치유, 형이상학적 화해, 성경의 스타워즈 버전, 또는 가장 크고 궁극적인 실재, 가장 중요한 "진정한 진실"에 대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평화를 이루었다"는 말은 핵미사일이 올리브 가지가 되고, 관타나모가 치유의 정원이 되고, 칼이 쟁기로 바뀌고, 탱크가 트랙터로 바뀌었다는 말과도 같다. 생각만 해도 무릎을 치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역설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날은 생수가 "나는 목마르다"라고 말하는 날이다. 생명의 떡이 굶주리고, 부활과 생명이 죽고, 제사장이 희생 제물이 되고, 유대인의 왕이 범죄자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다. 이 미스터리 앞에서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고한 한 사람의 수치스러운 죽음이 죄의 대가, 포로된 자의 대속, 악의 정복, 치유의 원천, 모든 희생을 끝내는 제물이 될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어떤 곳인지 상상해 보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모든 상호보완적인 성경적 이미지-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부채가 더 많은 부채를 낳고, 폭력이 더 많은 폭력을 낳는 문화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런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정의와 자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는" 세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 우주의 도덕적 토대를 재질서화하는 세상, 성경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면 대단한 상상력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신비는 우리가 눈을 돌려 주님의 성전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찾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할 때 비로소 커진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을 때, 우리는 선하신 예수님과 분노하신 아버지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대신 웅장한 삼위일체의 화합이 펼쳐진다.

우리는 또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궁금해한다. 신학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한다"와 같은 소리도 듣는다. 이 말은 논리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홀로코스트와 자살, 아동 학대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할 때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성금요일의 사건은 우리의 세계관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영광"과 "힘"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그 문제와 관련하여 "신"에 대한 정의를 저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영광"이나 "능력"을 정의하거나 신이 어떤 존재인지 상상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들이 예수님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또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만약 여러분의 교회가 "교회는 세상을 여러분 앞에서, 또한 여러분을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심판받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너무 많은 역설, 너무 많은 은유와 과도한 선함, 과도한 희망이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위험할 정도로 다가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또는 극심한 산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회심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성금요일을 지키며 어두운 면을 강조하지만, 이는 죄책감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수 있으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구속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금요일에 모이는 것은 죄책감에 시달리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하늘과 땅에서 죄와 죄책이 속죄되고, 정복되고, 치유되고, 해결되고, 단번에 처리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이다.

이 빛의 데크레센도는 슬픔의 크레센도를 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슬픔과 수치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예식은 예수의 장례식이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알고 있다. 성도는 1년 365일 부활절 희망 속에 살고 있으며, 오늘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는 부활절 드라마의 한 장면이므로 세상에 들려줄 가치가 있다.

그런데 왜 어둠과 그림자와 엄숙함을 강조할까?

각박한 세상에서, 갈망하는 교회에서, 정신없이 바쁜 학문 공동체에서 기쁨을 수반한 엄숙함과 고요하고 경이로운 어둠과 그림자는 우리가 상황을 진지하게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마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비유하신 것처럼. 이 빛의 데크레센도는 경이로움의 크레센도로의 초대이다.

아마도 성금요일 예배의 부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림자가 삶에 빛과 진리를 가져다준 "백부장의 전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그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17세기 시인 리처드 크래쇼의 말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12월은 우리가 그 의미에 가장 집중하는 시기이다: "모든 경이를 한 눈에 환영하라. 영원은 한 시대에 닫힌다. 겨울 속의 여름. 낮과 밤. 땅속의 천국. 그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하지만 이 노래는 크리스마스에만 울려 퍼지는 노래가 아니다.

정오가 되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성전 휘장이 둘로 찢어진 이날, 이 땅의 시간이 멈춰버린 이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던 이 날에 우리는 큰 기쁨으로 속삭인다: "모든 경이를 한 눈에 환영하라. 영원은 한 시대에 닫힌다. 겨울 속의 여름. 낮과 밤. 땅속의 천국. 그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존 위트블리엣은 칼빈대학교의 칼빈 기독교 예배 연구소 소장이다. 이 글은 그가 칼빈대학교의 2009년 테네브래 예배에서 한 설교를 각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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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환상

유다의 배신이 어떻게 잘못된 희망을 드러냈는지.

작품명: 죽음은 밤의 행성처럼 광대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20 x 25

작품명: 죽음은 밤의 행성처럼 광대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20 x 25

Christianity Today March 27, 2024
캐서린 프레스콧

그때 열두 제자 중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 이렇게 말하였다 . “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 “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 마태복음 26:14-15

“우리는 [예수]가 단순한 도덕적 스승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그분을 만난 어떤 사람들에게도 그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로 증오-공포심-경배라는 세 가지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온화한 동의를 표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 C. S. 루이스, 부두의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경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우상 숭배입니다. 다른 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다른 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풀려났고, 맡겨진 자원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를 따라 3년간의 여정 중 어느 순간, 그는 능력을 잃는 병에 걸렸습니다. 아켈다마, 즉 “피의 땅”(행 1:19)에서 끝을 맺은 그의 삶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완전한 신뢰에 대한 예수님의 초대를 모두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분위기를 관찰해 봅시다. 모든 희망, 모든 아름다움, 모든 기쁨의 근원에 근접한 삶이 어떻게 그런 고뇌와 절망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요? 비교의 독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을까요? 억압적인 제국을 무너뜨릴 영웅적인 군주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상상력을 발휘했을까요? 베다니의 마리아가 귀한 향유를 부어 발에 기름을 부었을 때 예수님의 은혜로운 반응에서 혼란스러운 모순을 보았을까요?

환상은 사람을 거짓된 환상에 묶어 둡니다. 그것은 믿음과 희망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일이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 때 환멸과 실망의 소용돌이가 펼쳐집니다. 누군가를 탓하게 됩니다. 우리가 상상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탓하고 싶지만, 거울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면 환상의 유혹에 굴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현실을 마주한 유다는 자신의 목표에 충실한 나머지 결국 눈이 멀어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이야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비둘기 구멍이나 마술 상자와는 거리가 먼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대를 끊임없이 깨뜨리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은혜 안에서 확립됩니다. 그분은 모든 발걸음과 모든 결정에 의도와 목표,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슬픔, 고통, 혼란, 충족되지 않은 기대,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우리 마음의 깊은 곳, 즉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하는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억압적인 제국을 무너뜨린 왕이었지만,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제국은 로마가 아니라 죄와 증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가 기대했던 흥미진진한 꿈을 산산조각 내고 가능성, 믿음, 기쁨이 가득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왕입니다.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육신의 거짓 약속과 세속적 이득에 대한 욕망을 슬퍼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든 환상으로부터 눈을 들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하고, 더 아름답고, 더 진실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을 갈망하도록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께로 향합니다.

우리의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 실체가 드러날 때, 우리는 실망하여 돌아설 수도 있지만 우리의연약함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것이 허상을 삼키고 우리를 살아 숨 쉬고 부활하도록, 희망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묵상 질문:



1. 예수님의 말씀 중에 동의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분의 본성에 관해 어떤 측면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나요?

2.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 보세요. 그분을 진정으로 포용하고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일상적인 경험과 전반적인 관점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에니올라 아비오예는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작곡가, 시인으로 Upper Room, Bethel, Maverick City 등의 그룹과 콜라보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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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태국의 운명론: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우리의 인격을 결정하는가?

그 태도가 태국 안팎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Christianity Today March 25, 2024
이미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이미지 출처: Unsplash / Getty

태국의 운명론은 주로 불교 세계관과 카르마(업보, karma)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태국 문화는 일반적으로 테라바다 불교에 영향을 받고 있다. 불교의 중심 교리는 “행동”이나 “행위”를 의미하는 “카르마“다. 그러나 보통은 우리 행동의 결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받을 것이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결과를 받을 것이다. 신의 용서는 없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한다.

이것은 태국의 사상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카르마의 결과다. 우리는 좋든 나쁘든 일어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 현재 생활의 주요 측면은 전생의 사건과 선택에 의해 미리 결정되는 것이다.

“카르마”라는 단어는 종종 욕설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들은 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는 의미로 캄(kaam, กรรม)이라고 말할 것이다.

매우 유능하고 성공적인 맹인 선교사 친구는 계속해서 태국에서 선교 비자를 거부당했다. 태국 정부는 맹인이 어떻게 하여 “거룩한” 사제가 될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실명은 그가 전생에 끔찍한 일을 했다는 증거였다. 그가 눈이 먼 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이것이 대부분의 보육원이나 성매매 여성을 돕는 봉사단체, 가난하거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재단 등이 대부분 기독교 단체인 이유다. 태국인들은 자비롭고 베풀고 배려하지만, 그들의 동기는 다음 생에 더 유리한 환경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덕을 쌓는 것이다.

기독교는 불교의 운명론적 견해와는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불교적 세계관은 고통과 수고의 연속된 일련의 생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제외하면 희망이 없다고 여긴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르면 복음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많은 사람은 카르마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카르마는 나쁜 소식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는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은 카르마에 의해 통제된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우주를 믿는 것은 카르마적 세계관을 버리는 만큼이나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하지만 운명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제자도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태국 사람들은 내가 신학교 수업에서 사용하는 예시에 공감한다. 서양인들은 할 수 없을 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서양인들은 항상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부자가 될 수도, 성공할 수도, 똑똑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조적으로, 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평가한 후에는 자신이 변화하거나 성장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태국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며 변화할 수 없다고 믿는다.

또 다른 어려움은 태국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방식에서 발견된다. 나의 연구에 따르면 태국 사람들은 매력과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오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남들과 다르고, 사랑하고, 포용하고, 정직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임을 본다. 개종자들은 또한 초자연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경험, 꿈, 환상, 또는 구원을 경험했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한 후에도 아직 자신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회심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평생 지속되는 제자도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태국 문화에서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기 위해, 나는 야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온전한 교훈이 담긴 시편 103편을 살펴본다. 운명론과 카르마는 자비가 없다. 사람은 희망도 해결책도 없이 자신의 상황에 갇혀 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우리는 희망, 구원, 그리고 미래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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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운명론: 미래에 대한 체념은 지혜의 징표인가?

그 태도가 일본의 교회 안팎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Christianity Today March 25, 2024
이미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이미지 출처: Unsplash / Getty

운명론적 사고는 일본 문화에서 자주 관찰된다. 실제로 세계 가치관 조사(WVS)에 따르면 64개 대상국 중 일본이 가장 운명론적인 나라 중 하나이다.

일본의 비속어 오야가챠(親ガチャ)는 그런 태도를 비관적 의미로 반영한다. 오야는 “부모”를 의미하고 가차는 캡슐 장난감 기계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를 나타낸다. 이 비속어는 캡슐 장난감 기계에서 어떤 장난감을 얻게 될지 모르는 것과 같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의 경제적, 교육적 격차가 커지면서 젊은 세대는 부모와 사회경제적 지위 간의 중요한 상관관계를 인식하고 이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선택할 수 없는 부모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운명론적 사고가 반영된 표현이다.

하지만 일본 문화는 종종 운명론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나니고토 모 아키라메가 칸진, ‘무슨 일이 있어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또는 ‘포기가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이다’라는 의미다. 이는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인들의 지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역사, 지리, 문화는 운명론적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운명론은 역사적으로 깊이 박혀있는데,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쿠가와 시대에 지배층들이 계급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운명론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지진, 태풍, 산사태 등 각종 자연재해에 직면해 지혜롭게 살아온 역사로 운명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운명론적 사고는 일본의 경제적 상황에서 문화를 강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Z세대들에게 중요한 요소로 인식된다.

일본이 고도의 경제 성장을 경험한 시기와는 달리, 그때의 베이비 붐 세대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종종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 젊은 세대들은 고령화 사회와 출생률의 감소로 인해 특히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심정을 품고 있다. 일본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17-19세 일본인 중 단 18.3%만이 자신의 나라와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인도인의 경우 83.4%, 한국인은 39.6%, 중국인은 65.6%, 영국인은 50.7%, 미국인은 54.7%이다).

결과적으로, 타고난 운명론적 태도가 일본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신학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자들은 소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과 관련해 믿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주도적으로 행동하거나 행동을 취하는 것과 관련해 믿음을 자주 표현한다. 현실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일본 기독교인들은 그런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동시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어떤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운명론적인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와 임재를 발견하기 때문에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운명론적 사고가 자신의 운명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기독교인들은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고통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한 신학의 대표적인 예는 기타모리 카조(Kazoh Kitamori)의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 일본에서 탄생한 최초의 독창적 신학>을 참조할 수 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해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다. 자유 의지가 옳고 운명론이 그르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두 가지 현실을 모두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구원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면 자신들이 운명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러한 비관적 생각을 고쳐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공감하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구원하신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에서 가시와 약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가시와 약점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들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운명에 따라 부담과 약점을 짊어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 짐과 약점을 짊어지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의 능력의 장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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