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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운명론: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우리의 인격을 결정하는가?

그 태도가 태국 안팎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Christianity Today March 25, 2024
이미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이미지 출처: Unsplash / Getty

태국의 운명론은 주로 불교 세계관과 카르마(업보, karma)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태국 문화는 일반적으로 테라바다 불교에 영향을 받고 있다. 불교의 중심 교리는 “행동”이나 “행위”를 의미하는 “카르마“다. 그러나 보통은 우리 행동의 결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받을 것이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결과를 받을 것이다. 신의 용서는 없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한다.

이것은 태국의 사상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카르마의 결과다. 우리는 좋든 나쁘든 일어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 현재 생활의 주요 측면은 전생의 사건과 선택에 의해 미리 결정되는 것이다.

“카르마”라는 단어는 종종 욕설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들은 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는 의미로 캄(kaam, กรรม)이라고 말할 것이다.

매우 유능하고 성공적인 맹인 선교사 친구는 계속해서 태국에서 선교 비자를 거부당했다. 태국 정부는 맹인이 어떻게 하여 “거룩한” 사제가 될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실명은 그가 전생에 끔찍한 일을 했다는 증거였다. 그가 눈이 먼 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이것이 대부분의 보육원이나 성매매 여성을 돕는 봉사단체, 가난하거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재단 등이 대부분 기독교 단체인 이유다. 태국인들은 자비롭고 베풀고 배려하지만, 그들의 동기는 다음 생에 더 유리한 환경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덕을 쌓는 것이다.

기독교는 불교의 운명론적 견해와는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불교적 세계관은 고통과 수고의 연속된 일련의 생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제외하면 희망이 없다고 여긴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르면 복음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많은 사람은 카르마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카르마는 나쁜 소식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는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은 카르마에 의해 통제된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우주를 믿는 것은 카르마적 세계관을 버리는 만큼이나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하지만 운명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제자도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태국 사람들은 내가 신학교 수업에서 사용하는 예시에 공감한다. 서양인들은 할 수 없을 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서양인들은 항상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부자가 될 수도, 성공할 수도, 똑똑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조적으로, 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평가한 후에는 자신이 변화하거나 성장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태국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며 변화할 수 없다고 믿는다.

또 다른 어려움은 태국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방식에서 발견된다. 나의 연구에 따르면 태국 사람들은 매력과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오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남들과 다르고, 사랑하고, 포용하고, 정직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임을 본다. 개종자들은 또한 초자연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경험, 꿈, 환상, 또는 구원을 경험했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한 후에도 아직 자신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회심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평생 지속되는 제자도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태국 문화에서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기 위해, 나는 야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온전한 교훈이 담긴 시편 103편을 살펴본다. 운명론과 카르마는 자비가 없다. 사람은 희망도 해결책도 없이 자신의 상황에 갇혀 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우리는 희망, 구원, 그리고 미래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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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운명론: 미래에 대한 체념은 지혜의 징표인가?

그 태도가 일본의 교회 안팎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Christianity Today March 25, 2024
이미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이미지 출처: Unsplash / Getty

운명론적 사고는 일본 문화에서 자주 관찰된다. 실제로 세계 가치관 조사(WVS)에 따르면 64개 대상국 중 일본이 가장 운명론적인 나라 중 하나이다.

일본의 비속어 오야가챠(親ガチャ)는 그런 태도를 비관적 의미로 반영한다. 오야는 “부모”를 의미하고 가차는 캡슐 장난감 기계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를 나타낸다. 이 비속어는 캡슐 장난감 기계에서 어떤 장난감을 얻게 될지 모르는 것과 같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의 경제적, 교육적 격차가 커지면서 젊은 세대는 부모와 사회경제적 지위 간의 중요한 상관관계를 인식하고 이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선택할 수 없는 부모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운명론적 사고가 반영된 표현이다.

하지만 일본 문화는 종종 운명론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나니고토 모 아키라메가 칸진, ‘무슨 일이 있어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또는 ‘포기가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이다’라는 의미다. 이는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인들의 지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역사, 지리, 문화는 운명론적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운명론은 역사적으로 깊이 박혀있는데,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쿠가와 시대에 지배층들이 계급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운명론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지진, 태풍, 산사태 등 각종 자연재해에 직면해 지혜롭게 살아온 역사로 운명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운명론적 사고는 일본의 경제적 상황에서 문화를 강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Z세대들에게 중요한 요소로 인식된다.

일본이 고도의 경제 성장을 경험한 시기와는 달리, 그때의 베이비 붐 세대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종종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 젊은 세대들은 고령화 사회와 출생률의 감소로 인해 특히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심정을 품고 있다. 일본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17-19세 일본인 중 단 18.3%만이 자신의 나라와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인도인의 경우 83.4%, 한국인은 39.6%, 중국인은 65.6%, 영국인은 50.7%, 미국인은 54.7%이다).

결과적으로, 타고난 운명론적 태도가 일본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신학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자들은 소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과 관련해 믿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주도적으로 행동하거나 행동을 취하는 것과 관련해 믿음을 자주 표현한다. 현실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일본 기독교인들은 그런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동시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어떤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운명론적인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와 임재를 발견하기 때문에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운명론적 사고가 자신의 운명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기독교인들은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고통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한 신학의 대표적인 예는 기타모리 카조(Kazoh Kitamori)의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 일본에서 탄생한 최초의 독창적 신학>을 참조할 수 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해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다. 자유 의지가 옳고 운명론이 그르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두 가지 현실을 모두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구원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면 자신들이 운명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러한 비관적 생각을 고쳐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공감하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구원하신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에서 가시와 약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가시와 약점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들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운명에 따라 부담과 약점을 짊어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 짐과 약점을 짊어지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의 능력의 장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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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만으로 충분한가?

복음의 진리는 전체 내용을 전할 것을 요구한다.

Christianity Today March 22, 2024
사라 고든의 일러스트레이션

나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친구는 구겨진 냅킨을 집어 들었다. 활발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목사인 친구가 자신의 설교 준비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똑똑하고 창의적이며, 신도들에게 성경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는 것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다. 그는 냅킨을 평평하게 펴서 한쪽 모서리에 성경 본문을 나타내는 X를 쓴다. 그런 다음 정사각형 한가운데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린다. 마지막으로 X에서 십자가를 가로지르는 화살표를 추가한다. 전도서나 빌레몬서를 설교할 때 그는 “한참 동안 본문을 보고 난 후에는 항상 십자가와 이것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묻곤 하지”라고 설명한다.

냅킨 십자가는 설교 작성에 유익한 접근 방식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분이 성경의 초점으로서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가장 확실한 부분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초점이라면 그 초점을 통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좋은 생각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만을 전한다고 말한다(고린도전서 2:1-2). 그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한다(갈라디아서 6:14). 따라서 우리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다면 무엇이 부족할까?

이 십자가 중심적인 관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약 성경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그의 장례에 대한 설명으로 끝내지 않는다. 대신 부활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십자가로만 해석을 제한하는 것은 골프 스윙에서 팔로우 스루가 없는 것과 같다: 공이 의도한 곳으로 가지 못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십자가보다 적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냅킨에 두 번째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지우고 싶지 않지만, 빈 무덤을 추가하고 싶다.

분명 북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우리가 부활의 지속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부활은 죽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부활의 의미를 경시하거나 심지어 이해하지 못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바울은 복음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고린도전서 15:14).

빈 무덤을 제외하면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 자체가 왜곡된다. 개인적 죄의 용서만이 복음의 유일한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 개인적 죄의 근절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게 만들 수 있다. 부활이 없는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살기에는 너무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북미로부터 수천 마일 거리가 있는 곳에, 20세기라는 시간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과거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예수를 남겨둔다. 우리는 너무 쉽게 “문제가 있었다. 그분이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제 우리 삶을 바로 세우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기 쉽다. 이렇게 되면 마치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약상자를 준비해 두었는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병에 맞는 약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은혜의 활동이 과거에만 머물게 된다.

냅킨에 빈 무덤을 그린 것은 단순히 두 번째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능력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신과 연합시키셨고, 우리는 그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었다(골로새서 3:1). 그분과 이러한 연결, 그분의 삶에 포함된 새로운 상태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감사는 필요하고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의 용서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능력을 실어주는 데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이 필요하며, 우리는 이 능력을 갖추고 있다. 부활은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주님이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죄의 심각성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을까?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삶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린도후서 5:14~17). 일반적으로 “회개”로 번역되는 신약성경의 메타노이아는 과거의 행위에 대해 슬퍼하는 것보다는, 죄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이킴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의 회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죽음의 것에서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의 것으로 끊임없이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단순히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먼 옛날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비록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요한일서 3:2).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부활이나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항상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개인과 교회의 삶에서 활발히 일하고 계심을 상기시켜 준다.

사도 바울에게 부활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알려준다. 그분은 빈 무덤에서 우리의 살아 있는 경험으로 이동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 .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로마서 6:4).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고, 그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신다(로마서 8:1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에베소서 2:5~6)가 되었으므로 이제 그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죽으심에 참여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다(빌레몬서 3:10). 그분의 생명을 주는 영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분의 부활의 삶을 살면서 그분을 본받도록 해방되었다.

바울은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골로새서 3:1)라고 선포한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 두 가지 삶의 패턴이 있다. “위에 있는 것”을 보거나 “땅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골로새서 3:2).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인 세계와 비물질적인 세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는 것”은 음행, 더러움, 탐욕, 우상 숭배와 같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반역의 패턴을 나타낸다(골로새서 3:5).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와 하나님, 서로, 그리고 온 세상 사이의 근본적인 평화(샬롬)를 반영한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씨름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승리한 과거의 기억으로만 무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패배한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분의 능력 안에서 살고 있다. 그분은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 그 영은 그분의 부재 시 그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의 능력과 방식으로 보내주셨다.

왕국

복음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따라서 카이사르(황제)는 어떤 형태로든 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그분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며,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는 소식이다(사도행전 2:32-36). 왕과 그의 왕국이 여기 있다. 좋은 소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거두신다는 선포에 국한된다면(물론 영광스러운 사실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죄에 대항하는 공식과 방법으로 축소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분은 생명이다!

반면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예수님을 중심에 둔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측면을 그분과 일치시키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이 이미 죄를 멸하셨다는 확신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선포된 말씀을 듣고 그분이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신실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분이 안식일의 주님이시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주님이심도 알고 기뻐하며 나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실제로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이것은 자조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조장되는 심리적 속임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영의 인도와 능력으로 온전한 열매를 맺는 삶을 경험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살아 있다. 이 새로운 사랑은 우리를 창조주, 이웃, 그리고 그분의 피조물 전체와 다시 연결할 수 있게 해준다.

청교도 존 오웬은 다른 사람들이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는 복음과 기독교인의 순종을 하나로 묶어 “복음주의적 거룩함”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종종 움찔한다. 순종은 우리에게 율법주의적이고 심지어 억압적으로 들리지만, 이는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할 임의의 규칙 목록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으시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랑에 관한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개요와 틀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항상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복음주의적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현재적 능력 안에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와 같은 모양이며 빈 무덤과 같은 해방이다. 죄의 위험과 왜곡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은혜와 용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거나 건설하거나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물로 주셨다(누가복음 12:32).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이자 그분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왕국에 살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연합된 우리는 고아와 과부의 유익을 구하고,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죄수나 외로운 영혼을 돌본다.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건설적이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사랑으로 자유로워졌다.

자유

부활을 외면하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선포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우리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문화는 복음을 외적인 행동 수정과 내적인 심리적 변화에 집중하는 죄 관리 치료로 쉽게 축소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다음 죄책감과 수치심을 다룰 방법을 찾는 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다고 느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우리를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첫째, 그분을 바라보는 습관은 우리의 생각과 삶의 패턴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은혜의 수단이 된다. 둘째, 그분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섬기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그들의 삶에 은혜의 말씀을 전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상처 입은 이웃의 유익을 구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만 번 되뇌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실제로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까?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부활 생명의 힘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8:36). 이 해방은 과거에 우리를 속박했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자,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 삶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유이다.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출하고 해방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방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이다! 이것이 예수의 반대자들에게는 없었던 자유이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만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란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사랑하는 자유임을 분명히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한복음 8:42, 요한일서 4:19~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 즉 죄와 죽음의 저주스러운 현실에서 생명과 희망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구원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장된 충만한 자유를 상기시켜 준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빈 십자가를 전체 이야기의 전부라고 말하겠지만,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시신을 어두운 동굴로 가져갔을 때 십자가는 비어 있었다.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십자가와 찬란함, 빈 무덤, 그리고 승천으로 절정에 달하는 우리 신앙의 완전한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세우신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삶과 번영을 위한 기초와 능력, 자유를 얻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셨으니, 그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셨다.

그리스도는 돌아가셨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

켈리 M. 카픽은 커비넌트 대학의 신학 교수이며, 최근에는 Becoming Whole: Why the Opposite of Poverty Isn’t the American Dream (Moody, 2019)를 브라이언 피커트와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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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Today March 17, 2024
커티스 뉴커크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9:25 (새번역)

고린도에서는 코린트 지협 경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올림픽처럼 4년마다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 대회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념하는 행사였습니다. 선수들은 기대감에 가득 찬 관중들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훈련하며 경기를 준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고전 9:24)고 도전할 때, 그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육상 선수에 비유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합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25절). 바울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훈련하고, 달리고, 싸우는 운동선수처럼 하라고 신도들을 도전했습니다.

서구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은사에 대해 자주 묵상합니다. 선물과 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물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상은 획득하여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언급하는 상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을 실천하는 방식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앞부분에서 집 짓기의 비유를 통해 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고전 3:11-13).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받습니다(엡 2:8). 받은 선물에 그치지 않고 그 위에 쌓아나가면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빌 2:12). 우리가 건초와 지푸라기, 즉 무가치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건축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 보여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세상을 위해 행한 선한 일을 통해 금, 은, 값비싼 보석으로 건축하면 마지막에 우리의 건축물은 견고히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게 건축하려면 우리는 강해져야 합니다. 경기를 위해 훈련하는 운동선수처럼, 율법주의나 수치심, 또는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몸을 단련하고 통제해야 합니다(고전 27장). 절제된 삶을 살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불건전한 충동을 거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더 깊은 관계, 더 나은 건강, 더 강한 믿음, 더 큰 증거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훈련된 삶은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삶입니다. 우리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는 상을 바라보며 주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훈련하기로 택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더 나은 것을 택하기 위해 어떤 것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어떤 것에는 “예”라고 말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이는 질 좋은 시간을 위해, 휴식을 위해, 관계를 위해, 제자도의 길을 가기 위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성장하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훨씬 더 깊고 충만한 “예”라고 답할 수 있도록 잠시 일시적인 것들에 “아니오”라고 말하도록 가르칩니다. 율법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성령님의 큰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코린트 지협 경기 대회의 월계관은 소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 소나무는 영생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우승한 선수가 받는 월계관은 불과 몇 주 만에 썩어버립니다. 그 월계관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우리의 상은 썩어 없어지지 않습니다(고전 9:24-25). 신실하고 훈련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받는 상은 영원할 것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쌓아 올린 열매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영광 받으시며 그분과 대면할 때, 그동안의 모든 노력, 힘겨운 시련, 고통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알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묵상 질문:



1. 사순절은 하나님께 더 순종하며 “예”라고 답하기 위해 절제하며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기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나요?

2. 바울은 깊은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운동선수의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에는 어떤 예시가 있나요?

필리시아 메이슨하이머는 ‘모든 여성 신학자’의 창립자이자 두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베리티 팟캐스트의 진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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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폭풍이 필요한 이유

사순절은 인생의 시련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줍니다.

폭풍 40 x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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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Today March 10, 2024
Joel Sheesley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야고보서 1:2-3

“너 거의 죽을 뻔했어.”

형이 제 병상 옆으로 다가오며 했던 말입니다. 그 외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끔찍한 수술 후유증으로 감염이 전신으로 퍼져서 저는 며칠 동안 기진맥진했습니다. 일반외과 의사인 형은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죽을 뻔했다는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형은 며칠 동안 의료 차트를 뒤적이며 저를 죽일 뻔했던 박테리아의 원인을 진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사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마지막 수술까지 하며 제 생명을 구한 사람은 바로 형이었습니다. “넌 분명 나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날 저녁, 제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을 때 커다란 폭풍우가 도시를 덮쳤습니다. 거센 빗소리에 저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났고, 빗방울이 창턱으로 투두둑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힘없이 비틀거리며 창문 옆 의자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성경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시련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야고보서 1:2-4).

고통을 기쁨으로 생각한다니, 이전에는 이 구절이 억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평생 장애를 갖게 되더라도 이겨내기로 다짐하고 있는 저에게 고난을 기쁨으로 삼는다는 개념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도대체 어떻게 시련의 고통과 아픔을 순수한 기쁨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1980년대에 바이오스피어 2라는 연구 시설에서는 우주 정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실험하기 위해 폐쇄형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모든 환경이 정교하게 관리되고 통제되었고 내부에 심은 나무들이 싹이 트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무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식물학자들은 내부에서 어떠한 병이나 진드기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습니다. 나무를 죽게 할 만한 원인이 없었고 조건은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그 폐쇄형 내부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바람입니다.

바람 한 점 없이 멈춰있는 공기는 결국 나무를 말라 죽게 했습니다. 나무를 튼튼하게 하고 뿌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바로 바람의 압력과 변화입니다. 폐쇄형 생태계 내부에는 태양, 토양, 물 등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지만 변화무쌍한 바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무는 스스로 회복력을 키우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기쁨보다는 고난이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고난은 절박함을 통해 풍요로운 삶의 유일한 원천인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다시 인도합니다. 로마서 5:3-5은 다음과 같이 격려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밤새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창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고, 마치 따뜻한 포옹처럼 하나님의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문턱 앞까지 갔던 모든 여정에서 저와 함께하셨고, 제 생명을 구한 형의 손길을 인도하셨으며, 성령께서 저를 떠나지 않고 곁에 계셨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난으로 가득 찬 사순절을 지나면서 우리는 시련과 폭풍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고통에 사로잡힐지라도,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영적 뿌리가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묵상 질문:



1. 시련을 견디는 동안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인식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볼 때, 힘든 경험이 어떻게 여러분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나요? 무엇을 배웠나요?

2.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셨나요? 어떻게 여러분을 위로하고 도와주셨나요? 친구나 가족 등 여러분의 삶에서 오늘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로버트 L. 풀러는 아내와 십 대 자녀 셋과 함께 텍사스주 와코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이며, 곧 출간 예정인 공상 과학 소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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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이 없는 시기를 견디는 법

비탄 속에서도 조용히 소망을 갖는 법 배우기.

저녁 로맨스. 패널에 유화. 30 x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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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Today March 3, 2024
체리스 룬딘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 예례미야 애가 3:25-26

올해 저는 조용히 소망을 갖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 여덟 살짜리 딸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끊임없는 발작으로 뇌와 신체에 영향을 주었고, 딸의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발작 후 발생한 장애와 지연으로 인해 딸은 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딸의 병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순례길을 느리게 지속해서 걸어왔습니다. 남편과 저는 매주 딸과 함께 물리 치료를 받는 매트에 앉아 딸의 근육이 깨어나고 뇌파가 진정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딸이 투병하는 동안 친구들과 가족들은 선한 의도로 딸이 언제 첫걸음을 떼고 첫 단어를 말할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병세는 진전이 없었고 때로는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VR 치료 방식으로 전환하여, 딸이 호전될 유일한 생명줄인 컴퓨터 화면에 매달렸습니다. 고립이 깊어지고 불확실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 마음도 딸의 몸처럼 연약해져 조금만 건드려도 멍이 들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낙담하고 있을 때 남편은 인내했습니다. VR 치료를 하던 화면이 끝나면 저는 희망을 잃고 노트북을 닫았지만, 남편은 VR 치료에 계속 몰두했습니다. 제가 절망하며 무너질 뻔할 때도 남편은 희망의 불씨를 키워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세상이 다시 회복되자, 우리 가족은 매주 병원과 진료소를 찾아다니며 미니밴을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 주차했습니다. 현재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여전히 자립하지 못하지만, 부축을 받거나 보행 보조기의 도움을 받으면 발을 땅에 딛고 설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딸의 발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제 눈앞에 소망이 펼쳐집니다.

저의 친구, 가족, 심지어 지인들까지도 우리 딸이 걷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처음 이 꿈을 꿨을 때는 너무 헛된 상상을 한 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하며 잠에서 깼습니다. 품었던 작은 소망을 마치 갑옷처럼 여러 겹으로 감싸고 숨겼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지켜온 마음의 방패가 최근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배시간에 저는 앞에 선 딸의 손을 잡고 찬양팀 밴드의 선율에 맞춰 몸을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딸은 다리 보호대와 분홍색 운동화를 신고 저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성소 앞쪽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딸을 품에 안았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 즉 딸이 우리를 돌보시는 구세주의 사랑의 품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목격했습니다.

인간성의 깊이를 이해하시는 분, 우리의 지치고 아픈 마음을 잘 아시는 그분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부르시고, 사랑하시며, 의심하고 냉소적이며 때로는 소망이라는 단어만 작게 속삭이는 부족한 어머니인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놀라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욕망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고요와 폭풍 속에서도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소망을 붙드시고, 애가서 3장에서 기다리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딸이 하늘나라에서 병을 떨치고 달려갈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은 그분께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25절). 이번 사순절에 우리의 연약함을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소망에 대한 기대조차도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선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만 느껴질 때, 기다리는 동안 보여주시는 작은 소망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요청하는 희미한 외침조차 헛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이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잠히 소망을 갖고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3:25-26)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조용한 소망으로 가득 차길 바랍니다. 이 소망으로 인한 희미한 메아리가 우리가 기다림과 어둠, 미지의 세계로 하나님과 함께 발걸음을 디딜 때 우리를 지탱해 줄 것입니다.

묵상 질문:



1. 여러분의 삶에서 소망의 속삭임이 있었던 때가 언제였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2. 예수님의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을 고려할 때 소망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바뀌나요?

케일라 크레이그는 작가이자 “부모를 위한 예배”의 창립자입니다. 카일라는 아이오와에서 남편과 네 자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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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부활절

CT와 함께 부활절을 기다리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Christianity Today March 1, 2024
Zatelepina / Getty

부활절과 이어지는 이 기간에 우리의 마음을 함께 준비합시다. 2000여 년 전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널리 울려 퍼집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사건이며, 우리는 여전히 그 진리를 일상에서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능력, 위기와 극복, 절망과 넘치는 기쁨을 통해 드러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결과인지 기억하고 성찰하며 그 안에 매일 거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그분은 죽으셨다가 참으로 부활하셨고, 그것은 우리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마음을 준비하도록, 이 묵상은 사순절과 부활절에 일어난 여러 단계의 고통스러운 여정과 죽음, 삶, 그 사이의 사건에 대한 신학적 진리를 통해 접근하며, 여러분을 사순절과 부활절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일상 속의 부활절’은 세 개의 단계로 나뉘며, 각 단계는 부활절 여정을 따라 각기 다른 감정적 현실을 반영합니다. 첫 번째 사순절이라는 교회력의 시기를 통해 우리 인간의 겸손함을 마주하고, 육신의 한계를 살펴보고, 희생적인 삶과 금식, 자기 부인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여정을 안내합니다. 두 번째 고난주간에는 희망찬 기대감을 안고 부활절을 준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배신, 십자가, 부활, 재회의 격동과 강렬함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여정을 통해 영원한 무대에서의 슬픔과 죽음, 그리고 언젠가 영광에 사로잡힐 우리의 작은 삶에서 사랑과 경외심이 슬픔과 죽음의 아픔을 이겨냈습니다.

이 글은 개인, 소그룹, 가족들이 사순절과 부활절 기간을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묵상집인 ‘일상 속의 부활절’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이번 특별호 전체를 자세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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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 인기있는 설날에 전할 축복 묵상

시편 65편과 민수기 6장 등 공유할 만한 성경 구절 세 개를 소개합니다.

설에 전하는 성경 구절과 축복의 말씀

설에 전하는 성경 구절과 축복의 말씀

Christianity Today February 29, 2024
엑소리안 / 게티 이미지 / 릭 슈에크스 편집

음력 설은 중국인들에게 재회, 기쁨과 축복, 따뜻함을 나누는 축제이며 중국과 해외에 있는 그리스도인 동포들과도 신앙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시기입니다.

매년 명절이 되면 많은 중국 그리스도인이 위챗과 기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축복의 말과 성경 구절을 담은 이미지를 보내 친구와 친척들에게 새해 복을 기원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간증을 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게시물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특별히 주목해 본 결과, 2022년에는 시편 65:11과 민수기 6:24-26의 축복 구절이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설에 나눌 수 있는 다른 성경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성경 구절을 통해 축복을 나누고 새해에 이러한 구절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 재회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전 세계 기독교 형제자매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력 설날에 복음과 성경 구절을 나누는 중국인들의 열정은 1월 1일을 기념하는 새해 행사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날을 맞아 선정한 성경 구절 묵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새해 연휴에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구절을 잘 활용하여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시편 65:11

주님께서 큰 복을 내리시어, 한 해를 이렇듯 영광스럽게 꾸미시니, 주님께서 지나시는 자취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풍성함은 히브리어 원어로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땅의 소출을 가리킵니다. "기름이 떨어진다"라는 것은 땅의 풍성한 수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농사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땅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과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춘절 만찬은 한 해의 풍요를 상징합니다. 음식이 가득한 식탁과 가족의 재회, 물질의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관계의 정서적 만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요에 대한 이해입니다. 춘절을 맞아 고향에 가는 것은 이러한 갈망의 진정한 표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설 연휴에 고향에 가서 가족들과 재회하고 풍성한 음식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햇빛과 공기처럼 실재하시며, 일 년 내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풍성한 은혜로 우리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과 인간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65편의 첫 몇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죄는 용서받으며, 우리의 영혼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시 65:1-5).

중국인의 새해 축하 잔치에는 항상 생선이 나오는데, 이는 중국어로 생선(yu)이 풍요와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따라서 "nian nian you yu", 즉 "매년 생선을 먹는다"는 것은 매년 풍요를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축복을 받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명절에 기뻐하고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2) 민수기 6:22-2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 때에는 다음과 같이 빌라고 하여라.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들을 지켜 주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하면, 내가 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

설 명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향에 가는 것입니다. 집은 우리가 돌아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입니다. 춘절(구정) 기간 집은 행복, 축하, 평화를 주는 곳입니다. 따라서 춘절에는 중국인들의 삶에 대한 이상과 기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을 샬롬(평화)으로 표현합니다. 샬롬은 전통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삶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었으며, 서로를 만날 때 전하는 인사말이기도 했습니다.

민수기 6장은 구약성경의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축복입니다.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평화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안위하시는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완결, 조화와 평화, 건강과 힘, 축복과 이익 등을 의미하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춘절 연휴 기간에 중국인들의 가장 깊은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친숙한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에베소서 1:3, 9).

중국인들은 춘절에 대해 고향, 축복과 기쁨, 평화와 같은 멋진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샬롬, 즉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충만함을 나타내는 축복은 생명의 창조주이신 분과 연결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샬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졌고 앞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진리가 바로 복음입니다.

3) 출애굽기 12:1-2,1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라. 유월절은 주 앞에서 이렇게 지켜야 한다…."

중국인들에게 춘절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중국 속담에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성장하는 계절로, 사람들이 미래의 수확을 기대하며 씨앗을 뿌리는 시기입니다.

설날은 가족들과 재회하고 수확을 축하하며, 서로의 새해 복을 기원하는 따뜻한 정이 넘치는 시기입니다. 사람들은 춘절에 희망과 축복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는 고대 농경 사회에서 서민들의 소박한 정서에 불과했지만, 근면한 국가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로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시키는 절기였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삶을 조직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감사하고 신뢰하는 백성을 형성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은 한 해의 시작을 그레고리력의 첫 달이 아닌 대림절로 표시하곤 했습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성탄절 네 주일을 앞두고 시작되며, 교회는 약 4주 동안 주 예수의 탄생을 준비합니다. 대림절 기간 우리는 삶과 주변의 상처와 절망을 묵상하며, 세상의 희망이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는 주 예수의 교회가 여전히 기다리는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4) 신명기 31:7-8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서,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내시오. 그대는, 주님께서 그대의 조상에게 주시기로 맹세하신 땅으로 이 백성과 함께 가서, 그들이 그 땅을 유산으로 얻게 하시오. 주님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 그대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시오."

새해를 맞아 고향에 갈 생각을 하면 정말 설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긴장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결혼 적령기가 지났지만, 아직 미혼인 경우(특히 여성 그리스도인인 경우), 고향으로 돌아가면 온갖 질문과 비난이 쏟아지거나, 심지어는 소개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올해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고향에서 동창들을 만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결혼 생활에 위기가 닥쳐서 부모님이나 친척, 친구들을 마주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과거 춘절에 고향에 갔다가 받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세대 차이 때문에 부모님과 대화가 잘 통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살얼음판일 수도 있고, 형제자매가 다투고 서로 미워하는 등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괜찮아 보이지만 설 명절 모임에서 상처가 드러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스트레스와 상처만 생각하면 사람들은 설날에 집에 가고 싶지 않고 도피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싫은 마음을 안고 고향에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격려와 힘이 필요합니다. 이 구절은 모세가 죽기 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여호수아에게 남긴 권고입니다. 모세의 업적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것은 위대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한 마디의 격려를 전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 팁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약속을 주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가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리라는 것.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가셨고, 이미 우리 가정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발견하고 놀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압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5)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일 년 중 가장 기쁘고 상서로운 시기인 춘절에 특히 "화합이 가장 소중하다"는 지혜를 항상 소중히 여겼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작은 마을에서는 설 명절이 되면 서로 원한이 있어 말을 하지 않던 사람들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서로 정중하게 인사하며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기원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사 9:6)으로 불리며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합니다(고후 5:18). 그리스도인은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설날 고향에 가는 것은 갈등을 마주하고 진리를 위해 싸우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판단하는 옛 동창들, 때로는 내면의 양심을 시험하고 우리를 조롱하는 친구들, 때로는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선택을 반대하는 가족들, 때로는 신앙을 지키려는 용기를 공격하는 지역 우상 숭배의 강력한 전통 관습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갈등과 전쟁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진리를 위해 선한 싸움을 하려는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지만, 때로는 친구와 친척에 대해 호전적으로 되거나 도리어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히 12:14)라고 권면합니다. 이 구절의 후반부에서는 거룩함을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화평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시기에 기록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는 중국어 새번역에서는 "힘쓰십시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우호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모든 힘과 지혜를 다해 모든 사람과 조화를 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춘절에는 하나님의 평화의 자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YESHURUN LIN 목사는 칼빈신학대학원(CTS)에서 신학과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리프레임 선교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베이징에서 미디어 선교와 신학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더 나은 집: 중국 명절 묵상, 리프레임 선교 발행>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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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과는 정반대의 ‘패스트 라이브즈’

우리는 그동안 정절을 저버리는 운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그렸다.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이 드라마는 한계가 주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유태오, 그레타 리, 존 마가로 주연의,  패스트 라이브즈

유태오, 그레타 리, 존 마가로 주연의, 패스트 라이브즈

Christianity Today February 29, 2024
A24 Courtesy 제공

나는 작년에 영화 <노트북>을 처음으로 봤다. 거의 25년 동안 이 영화에서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와 노아(라이언 고슬링)가 얼굴을 비비며 빗속에서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사랑과 운명을 상징하는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로맨스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노트북>은 불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 시점에서 노년의 노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앨리를 위로하는 장면과 앨리가 바람을 피우고 결국 약혼자를 떠나 노아와 몇 년 만에 재결합하는 1940년대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현대의 장면에서는 노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앨리를 향한 충실함을 보여주는 반면,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앨리의 불륜이 로맨스의 절정으로 표현된다.

2023년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등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러한 한시적인 관점이 삶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 반대로 보여준다. 노라(그레타 리)는 남편 아서(존 마가로)와 함께 침대에 누워 아내의 옛 연인이었던 해성(유태오)의 방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다:

아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지 많이 생각했어.

노라: 해성과 내 이야기?

아서: 응, 난 경쟁이 안 되네.

노라: 무슨 말이야?

아서: 어릴 적 연인이 20년 만에 다시 만나 서로에게 운명임을 깨닫는 이야기.

노라: 우린 서로의 운명이 아니야.

아서: 이 이야기에서 나는 운명을 가로막는 사악한 미국인 백인 남편일 거야.

아서는 나중에 “전 애인이 당신을 데리러 온다면, 난 당신이 떠날 사람”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아서의 고백은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의 내면을 울리는 대사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노트북>과 같은 영화를 통해 주인공들이 주어진 한계에 거부하기를 기대하도록 길들어 있다. 우리는 안정된 삶을 살던 인물들이 가능성을 확장하고 평화와 깨달음을 얻거나 자신의 운명을 찾기 위해 신뢰를 깨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주인공이 이러한 것들을 찾는 여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가 발생해도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런 피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약속을 지키고, 가능성을 좁혀나간다면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묻는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노라는 타인의 선택과 자신이 내린 여러 선택의 조합이 이루어낸 삶을 살고 있다. 서울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 그녀는 같은 반 친구 해성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가족이 캐나다에 이민을 가면서 둘은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노라는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다가 성인이 되어 해성과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역동적인 관계로 인해 노라는 잠시 행복했지만, 결국 그녀는 헤어짐을 말한다. 그녀는 뉴욕에서 삶을 꾸리고 싶은데, 이 화상 통화로 이어진 관계가 그녀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노라는 해성에게 잠시 헤어지는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곧 아서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한다.

시간이 지난 후, 해성이 뉴욕에 오겠다고 말했을 때 노라는 극작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서와의 관계가 나오고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의 캐릭터를 동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노트북>의 패턴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 시작해도 노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아서에게 “이게 내 인생이야. 난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라고 말하며 확신한다. 노라는 선택의 폭을 제한하면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행동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노라의 반문화적인 한계와 자기 부인의 수용은 창조 이야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는 성경의 모티브(창세기 2-3장)를 연상시킨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직후부터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은 선택권을 얻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하나님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가 후회하게 되는 이러한 패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왕을 간청하는 모습(사무엘상 8장)부터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를 취하는 모습(에스라 10장)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풍성한 왕실 음식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했던 것처럼(다니엘 1장), 이 패턴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번성했다.

우리 삶에서 선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바벨론의 길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라고 베스 무어는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결단이란 미리 내린 결정, 이미 내린 결정, 결정의 순간에 그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의미한다. 그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이다. 결단이 내려졌다. 나는 이미 내가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다. …그 순간의 열기에 휩싸인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일과 유혹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탈출할 길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결단은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결국 도착한 곳은 여기야.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노라는 불안해하는 남편에게 말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선택한 결혼 생활의 한계를 지키며 충실하기로 결단했다. 어쩌면 노라에게는 아서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해라'와 같은 말들을 들으며 자란 우리는 이미 내린 충실한 선택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

따라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관객에게 운명에 가려진 결단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노라는 아서와의 첫 만남에서 한국인에게 인연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한다. 인연은 섭리 또는 운명 같은 것으로,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노라는 그 개념은 한국식 유혹법일 뿐이라고 농담을 던지고 아서에게 키스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해성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데 이 방법을 사용한다. 해성이 뉴욕을 떠나기 직전 술집에서 두 사람이 한국어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클로즈업 샷과 어두운 조명, 서로를 향해 기대는 자세는 그들이 여전히 <노트북>의 불륜을 따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노라는 어린 시절의 사랑을 거절하고 남편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인연을 운명적 언어로 받아들여 반대로 해성과 아름다운 연결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말하는 인연은 불교적 개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는 적용이 제한적일 수 있다. 하지만 해성과의 관계가 아서에 대한 헌신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노라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가치 있는 점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단은 운명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Morgan Lee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글로벌 편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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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다윗의 광야 영성이 우리를 인도하게 하소서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힘과 노래가 되신다.

Christianity Today February 28, 2024
일러스트레이션: Rick Szuecs / 소스 이미지: 위키미디어 커먼즈 / Acy Valan / Robinson Greig / Vlad Tchompalov / Unsplash / Halfpoint / Envato

당신은 누구에게 투표하는가 ? 마스크가 필요한가 ? 이러한 질문은 지난 한 해 동안 알려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극했다. 친구와 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치 시즌과 세계적인 팬데믹 등 그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 두 가지 현실을 겪으면서도 극심한 분열과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킨 교회를 이끄는 것에 대해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인간들이 서로 등을 돌리는 가운데 하늘이 설명할 수 없는 회색으로 변하는 종말론적 영화에 본의 아니게 캐스팅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웃음을 지었다. 우리 목회자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우리의 경험에서 봤을 때, 종말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250 만명 이상을 죽음으로 이끈 치명적인 팬데믹이 발생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백신 접종이 확산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코로나19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교회도 다른 많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마스크 착용 여부, 교회 출석 시기, 심지어 질병 자체의 진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 교회 교인 대부분은 대면 예배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가 격리를 하고 있다. 일부는 본인 또는 함께 사는 사람이 코로나19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기저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에 자가 격리를 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주정부의 코로나 지침을 따르기 때문에 화를 내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질병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

온라인 예배 시청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걱정스럽게도 온라인 예배 참석자는 크게 늘지 않고 제한된 대면 예배 참석자만 크게 줄었다. 우리는 궁금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와 연결되어 있을까? 우리는 이전에도 정치에 대한 분노의 변동을 극복해 왔지만,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의 새로운 편안함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습관은 극복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우리는 궁금하다: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와 연결되어 있을까?

교회 출석률은 팬데믹 이전에도 감소했다. 이동 제한 조치가 시작되기 전인 2월에 발표된 Barna 2020 교회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 교회에만 헌신하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많은 미국인이 교회의 가치, 관련성 또는 지역사회에서의 효과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7월에 실시한 또 다른 Barna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인 중 32%가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교회 출석을 완전히 중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Barna는 2021년에는 교회 5곳 중 1곳이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예측한다.

목회자들에게 전 세계적인 팬데믹은 성경에 나오는 광야가 되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광야를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불평하고 다투고 주님께 질문하며 반응하고 있다. 필자에게도 팬데믹 광야는 낙담을 불러왔다. 성경은 모세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의 고난에 대한 수많은 그림을 제시하지만, 필자에게는 사무엘상 21-23장에 나오는 다윗이 필자의 길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살인적이고 무자비한 사울 왕을 피해 유대 광야로 도망친다. 다윗은 사울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주님이 다윗을 번영시켰다는 사실이 사울의 편집증을 자극했고, 사울은 다윗의 목숨을 빼앗기로 결심했다. 당황한 다윗은 생존을 위해 광야로 도망쳤다. 사람들이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까 걱정되어 주변 마을로도 피신할 수 없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윗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울의 친아들인 요나단조차도 아버지의 분노를 무릅써야만 했다.

다윗의 광야에서 경험은 불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 다윗의 광야에서 경험은 선조들처럼 불평과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경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광야에서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1절, 새번역)라고 노래했다. 다윗은 위험 속에서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3절)라며 위로를 얻었다. 다윗은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는 “나를 죽이려고 노리는 자는 땅 아래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9절)라고 노래했다.

다윗의 광야 경험이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시편 64편은 다윗의 두려움과 좌절을 보여준다. “하나님, 내가 탄식할 때에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원수들의 위협에서 내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1절). 다윗은 자신을 향해 은밀한 올무를 놓은 자들의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분으로 주님을 선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활을 쏘실 것이니, 그들이 화살을 맞고서 순식간에 쓰러질 것이다”(7절). 다윗은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넘어설 수 없으며, 광야는 구원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편 65편은 구원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그 기름이 광야의 목장에도 여울져 흐르고, 언덕들도 즐거워합니다. …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즐거운 노랫소리 그치지 않습니다”(12-13절). 다윗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기쁨을 발견했다.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고립될지, 구출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자신을 구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윗은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성경에서 광야는 현실이자 은유로 작용한다. 물리적으로 광야는 사막으로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문명이 없는 곳이다. 상징적으로 광야는 불확실성을 의미하며 투쟁과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출애굽기 내내 광야에서는 방황과 불평, 그리고 기적의 순환이 일어났다. 광야는 우리를 시험하고 안락함에서 벗어나 고난의 시기에 도움이 되시는 주님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사순절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광야 경험과 관련이 있으며, 인내와 순종, 영적 훈련을 요구한다. 우리는 개인적인 희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실천한다. 사순절 광야에서 우리는 주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며, 더 큰 평화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추구하기 위해 몸으로 자신을 단련한다. 사순절은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초대하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에서 가공되지 않은 것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이 팬데믹의 비참함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그분 안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이끈다.

코로나19 광야에서 목회자들을 낙담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으나, 다윗처럼 기쁨이 우리의 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이 팬데믹의 비참함에 빠져 교회 출석률 감소를 걱정하기보다는 그분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도록 이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있지만, 다윗처럼 사기가 떨어지거나 낙담하는 대신 주님이 우리와 그의 교회에 약속하신 것을 기대하며 활력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을과 도시에서 행하시는 일의 일부이다. 주님이 일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기쁨을 품을 수 있다. 과거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억과 시기를 떠올려 보자. 하나님께서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여러분의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셨을까? 주님께서 다시 한번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자.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코로나19와 싸우는 분이시며 우리를 지켜 주실 분임을 확인한다.

우리의 스트레스는 하나님의 스트레스가 아니다. 백신 접종이 확산되고 세상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더라도 우리가 알던 예배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교인들이 편안함과 새로 배운 습관에서 벗어나 다시 모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광야는 목회자들에게 우리가 더 잘 훈련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교인들을 교회라는 새로운 가정으로 불러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지역사회의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다윗처럼 우리도 주님의 약속 안에서 살면 광야에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에게만 묶여 이전보다 더 번영하고 강하게 광야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스티브 드래그스울프는 뉴멕시코 앨버커키에 있는 뉴라이프시티의 제자훈련 담당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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