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신념을 잃지 않으면서도 좋은 방식으로 동의하지 않는 방법

모든 상황을 성경적 관점으로 볼 수는 없지만 누가 결정하는가?

Christianity Today March 8, 2022
Illustration by Jared Boggess / Source Images: Ekely / Sanjeri / Mikroman6 / Getty

빌 클린턴 당선 며칠 후, 나(릭)는 소그룹 리더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리더 가운데 정치적 신념이 강성 공화당인 한 사람이, 최근의 선거를 반영해 우리 소그룹들이 애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여러 사람이 동의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리더들에게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듯, 복음주의자들의 약 80%가 공화당에 투표하지 않았냐고 언급했다. 그리고는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주면서, 혹시 자기 조원들 가운데 민주당에 투표한 것 같은 사람 2,3명을 적어 보라고 했다.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아무도 펜을 들지 못했다.

마침내, 한 지도자가 어떤 사람도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모임의 구성원이 복음주의적 교회의 전국 평균을 반영한다면, 12-14명으로 구성된 소그룹에 민주당원이 3명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저 우리가 애통의 시간을 염두에 둔 소그룹 모임을 연다면, 거기 누가 참여할 것이며, 그들의 기분은 어떨지 잠시 멈춰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 것에 불과했다. 그 순간은 매우 어색했다.

리더들은 애통의 시간들로 소그룹을 여는 것이 그룹의 특정 회원들에게는 환영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선거를 앞둔 지난 몇 주간의 기도회 시간들에 아마도 똑같은 어색함이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 그룹 내의 다양한 정치적 신념에 대해 그냥 단순하게 눈 감아 버렸던 것이다.

신념에 대한 표준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고정적이거나 확고하게 굳어진 믿음, 즉 우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확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셈을 할 때 적용하며, 우리는 보통 그것을 신념이라 부르지 않는다. 신념은 단지 흔해 빠진 사실들의 나열만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믿음의 종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신념이란 우리의 믿음들, 행동들, 선택들을 이끌어내는 굳은 도덕적 혹은 종교적 믿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입맛에 대한 믿음을 차단하고,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는(이런 것들은 우리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지 않는다) 믿음을 차단하다.

이런 정의는 우리가 절대적 신념과 개인적 신념이라 부를 수 있는 다른 두 종류의 신념을 만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절대적 신념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는 열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용하는 정의이다. 그것들은 보편적이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적용된다. 위대한 기독교 신조는 그러한 절대성의 예이다.

반면에, 개인적인 신념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믿는 것이고 개인적 행동을 이끄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를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음주 운전자에 의해 일가족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그 당사자는 아마도 그 신념을 꽤 확고히 유지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유명한 격언인 "근본적인 데에는 일치를, 지엽적인 데에는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17세기 초 독일 신학자 루퍼투스 멜데니우스의 말)을 반영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고 깊은 기독교 신념을 형성할 수 있을까? 신념 자체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자.

신념은 빛과 같다: 그것들은 스펙트럼을 통해 나오는 다양한 색깔과 형태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믿음-성경에 기초한 시대를 초월한 신학적 진리(창 1:26)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종류의 확신은 고백적 믿음, 즉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절대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9장 5-6절에서 이 진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도덕적 의무로 발전한다. 이러한 도덕적 의무는 인간의 생명을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일련의 적극적 주장으로 더 확대될 수 있다. 이 포장을 조금 벗겨보면, 인간의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낙태를 반대한다는 의미에서의 '낙태반대운동'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신에, 사람들은 조셉 베르나딘 추기경(Cardinal Joseph Bernardin)이 주창한 "일관된 생명 윤리"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윤리는 낙태와 안락사, 전쟁 그리고 폭력을 기피하게 한다. 이것은 개인의 양심에 따른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음식과 피난처 등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접근과 같은 긍정적 요소를 수반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점점 더 정확하게 규정짓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고백적 믿음의 내용를 점점 더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축적 의미는 "모든 인간은 생명을 위협하는 위해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풍요로운 인간의 삶에 필요한 기본 물품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와 같은 핵심 가치 진술에 요약될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는 것처럼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점점 더 구체화 되고 있다. 우리의 고백적 믿음과 도덕적 의무는 우리의 욕망과 추구를 만드는 우리 영혼의 핵심 가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핵심 가치들은 여전히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들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낙태와 사형을 모두 반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낙태만 반대하는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 스펙트럼을 넘나들면서 보게 되는 것은, 각 단계는 우리의 신념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지만, 그 신념들이 더 구체화 될수록, 그것들은 또한 더 경쟁적인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출발점에서는, 성경의 명시적인 말씀이나 보편적인 신앙고백은 모든 기독교인들 사이의 합의를 보장한다. 이러한 영역들에 대한 신념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을 구체화. 특정화 할수록 더 많은 문화적, 신중한, 역사적 상황 그리고 실천적 지혜의 고려 상황들이 우리의 결론에 영향을 미쳐 결국 우리의 의견은 더욱 다양해진다.

우리는 이 스펙트럼을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이슈와 연결할 수 있다: 절대적인 스펙트럼, 스펙트럼 자체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의 스펙트럼, 마지막으로 둘 다에 해당하지 않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 스펙트럼은 절대적인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점점 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다루게 된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결국 취향의 문제만 남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신념을 형성하는 문제가 아니기에 포함조차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네 가지 유형의 신념들

신앙고백적 믿음. 고백 신앙은 기독교의 경계를 정의하고, 교회와 개인 신자들의 믿음과 실천을 정립시킨다. 그것들은 종종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처럼 교리적 진술로 표현된다. 교리적 진술은 보통 교회 공예배 시간에 암송된다. 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나는 믿습니다" 문장보다는 "우리는 믿습니다" 문장 형태로 표현된다.

분명히 함축된 것은 회중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도록 기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진술을 부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기독교 신앙의 진위를 의심하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고백적 신앙이 각자가 가진 신념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들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이자, 그 자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개인적인 신념과 구분되는 기독교적 신념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것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고백적 믿음은 행동이 아닌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들은 크게 하나님의 본질, 인간, 구원에 대한 시대를 초월하는 신학적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발견하는 특정한 시대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며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 도덕적, 영적 의무들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고백적 믿음들을 "효율적으로 운영"(operationalizing)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고백적 믿음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영적 의무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이거나 거의 보편적이다. 고백적 믿음이 성경의 신학적 주장에서 파생되는 것처럼, 도덕적 의무 역시 고백적 진술과 교리와 성경의 명령에서 파생된 신학적 믿음에 대한 행동으로의 대응물이다.

"의무"는 이러한 높은 수준의 행동 지침 원칙을 포함하는 편리한 방법이지만, 이 용어는 광범위한 행동들을 포함한다는 점 또한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들 중 일부는 적절한 예배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관련된 영적 문제들을 다룬다. 다른 명령들은 우리가 주변의 이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들을 다룬다. 우리는 “도덕적 의무”라는 말을 윤리적 문제와 영적 문제를 포함하는 포괄적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핵심 가치. 도덕적, 영적 의무는 거의 즉시 추가적인 구체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신념 스펙트럼을 따라 이 다음 단계를 "핵심 가치"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 즉 우리가 실제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가리킨다.

가치라는 용어는 도덕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동기를 정의하기 위해 보통 사용한다. 가치들은 우리의 선택을 안내하고 정책들,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바람직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최근, 사회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는 여섯 가지 인간의 기본 가치들을 정의하는 “도덕적 기초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돌봄, 공정, 충성, 권위, 존엄 그리고 자유이다.

어떻게 공통의 가치들이 이렇게 다른 행동 지침으로 귀결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사람들은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가치에 대한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논쟁적 이슈는 한 가지 가치 이상과 엇갈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자유를 더 강조하는 정책이 공정성을 떨어뜨리거나 인간의 기본권 배려에 실패하는 경우에서 드러난다.

또한, 이민에 대해 논의할 때, 누구나 시민들은 권력 당국에 복종해야 하고 또한 이민자들을 사랑과 존엄성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들은 개별 특정 케이스에 있어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가치 계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치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정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시리아 난민 케이스와 중앙 아메리카인들이 우리 남쪽 국경을 넘어오는 경우에 대해 다른 가치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가치는 공통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전혀 다른 끝지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행동 지침. 신념 스펙트럼의 마지막 단계는 행동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개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의무들과 핵심 가치들은 실제 정책 결정들,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반응들 및 특정 문화적 맥락 내에서 행동에 대한 계획에서 그 표현이 발견된다. 행동 지침들은 시간 계획, 장소, 청중을 염두에 두고 있다. 행동 지침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심으신 바로 그 시간, 장소와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를 가장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실천적 지혜와 지식은 행동 지침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팀 켈러(Tim Keller)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분명한 성경적 가르침이자 도덕적 의무지만,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 민간 기업이나 정부의 재분배인지 아니면 둘의 어떤 결합을 통해서인지는 실제적인 지혜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생명 보호는 인간의 고통을 완화시키고 고통받는 자를 돌보도록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단 한 가지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옵션들을 단번에 추구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도덕적이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강하고 본능적인 직관을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다. 우리의 양심은 종종 우리의 직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원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직관적으로 작용한다. 다만 직관 즉 타인의 지혜에 대해 이성적인 반영으로 비춰지는 직관을 다듬고 깊게 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우리는 모든 진리의 자체적 원천이 아니다.

예일 신학교의 기독교 윤리학자 제니퍼 허드(Jennifer Herdt)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의존이 "약점과 강점, 무능과 능력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의 성격과 가능성과 관련된 신실성"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진실을 찾아간다. 야고보서 저자가 말했듯 이 과정의 필수적 부분은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이다. 그리고 이런 미덕들은 결과적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야고보서 3:17-18. 개역개정).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열린 마음과 신실함으로 들으면, 우리는 바울의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로마서 14:5)에서 언급한 신념에 훨씬 가까이 도달하게 될 것이다.

Tim Muehlhoff와 Richard Langer의 저서 <Winsome Conviction>에서 부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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