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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들은 삼위일체를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이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같은 삼위일체 교리를 고수했다. 우리는 어쩌다 길을 잃은 것일까?

Christianity Today February 8, 2022
Illustration by Jared Boggess / Source Images: Fotograzia / Digitalhallway / Laurence Monneret / Leo Patrizi / Gett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반복해서 읽는 스크루지 영감님 이야기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우리 삶에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과거에 사로잡혀 후회막심으로 끝나 버리는 삶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과거 크리스마스 유령 덕분에 스크루지는 겁을 먹었지만, 그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변화했다.

그러나 과거에 시달리는 것은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사조들과 역사적 시대 또한 그럴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근시안적이어서,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볼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래서, 만약 스쿠루지처럼 다행히도 유령이 우리를 겁주더라도, 괴로움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날 삼위일체론의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인 루이스 에어스는 니케아 신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성경적, 정통적 삼위일체 교리와, 지난 백여 년의 현대적 삼위일체 이해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모습이 거의 없어질 때까지 스스로 정통 삼위일체론인척 하던 현대 삼위일체론은 결국 성경적,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제거해 버렸다. 에어스는 "현대 삼위일체론이 친니케아 신학의 영향을 나쁘게 받았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오히려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 문제다. 그 결과 니케아의 유산은 역설적으로 현대의 삼위일체 축제에서 눈에 띄지 않는 유령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유령이 삼위일체축제에서 존재감이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고, 그 신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고, 그것의 숨겨진 빛은 어떤 촛불끄개로도 끌 수 없을 정도로 밝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대 기독교라고 부르는 이 유령의 방들, 즉 최근의 흐름들을 설명하고 드러내는 방들을 거닐어야 한다.

하지만 속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최근 과거이며, 나 자신의 최근 과거이기도 하다. 나 역시 삼위일체에 대한 현대적 관점이 성경적 삼위일체 관점인 것처럼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과거 정교회 유령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내가 이 유령의 방에서 발견한 것은 보기에 두려운 것들일 수 있다. 성경의 삼위일체, 우리의 삼위일체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조작되어 있다. 삼위일체 축제의 주인공은 성경적, 정통적 삼위일체가 전혀 아니다. 삼위일체 표류는 진짜이고 우린 피해자다.

사회적 의제가 된 삼위일체

지난 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 한 명-이것은 과장이 아니다-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고통받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잘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이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칼 라너와 칼 바르트가 학생인 그에게 삼위일체를 가르쳤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의 멘토들이 삼위일체를 잘못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유일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시작하여, 삼위일체를 오직 그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 양식' 또는 '세 가지 실존 양식'으로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이 자신을 주권자로 드러내는 방식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몰트만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주되심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오직 하나의 신성한 실체와 군주론에 대한 서구적이고 개인주의적 집착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심지어 그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기준인 니케아 신조를 "하나님의 하나됨과 관련된 질문에 있어서는 양면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자가 성부와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가 되는 것과 모든 영원성에서부터 온 성부의 본질에서 성자가 유래했다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본질적 하나됨을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주되심에 대한 서구의 이러한 강조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몰트만의 견해로는 가장 끔찍한 단어인 유일신론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 주체의 하나됨은 삼위가 하나의 주체의 단순한 양태로 분해될 정도로 강조된다"; 하나됨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유일신교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대조적으로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도 삼위일체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몰트만은 정확히 뭘 말하려 하는가? "나는 삼위일체의 사회적 교리 측면을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라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그 하나됨은 서로 가운데 거하는 것과 호혜적 상호 침투에 의해 이루어진다.

몰트만과 같이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론 즉 공동체로 정의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는 각자의 의식과 의지가 반영된 세 위의 공동체사회(communityorsociety)이다. 왜냐하면 세 위는 각자 동등하기 때문에, 평등이 분배되고, 위계질서가 없다.

삼위일체를 사회적 의제로 재정의함으로써, 몰트만은 이제 사회를 전염시키는 악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길이라면 ”우리는 신성한 사회성의 이 땅에서의 반영 즉 단일 통치자의 독재가 아니라, 자유인의 민주적 공동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 강요가 아니라 서로의 동등한 관계, 위계질서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동등하게 친교하는 교회를 발견할 수 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가 인격체들간의 평등한 사회를 보여주기에, 여권주의 신학자들(feminist theologians)이 성의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다 – 하나님 자신이 하나의 성이 아니라 양성이며, 모권제에 신적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격려한다.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 공동체의 위계질서가 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단일신교'에 대항하여 사회의 억압받는 자들의 동기를 옹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몰트만 혼자 사회적 의제를 제기했나?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제자이자, 오늘날 가장 유명한 사상가 중 한 명인 미로슬라프 볼프에 의해 사회적 십자군 운동을 이어나갔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사회적 제도이다

볼프는 크로아티아 출신이지만 미국에서의 영향력이 크다. 그의 경력의 대부분은 정치적, 공공신학에로의 헌신이었기에, 볼프가 삼위일체 및 사회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의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삼위일체와 교회>

볼프는 삼위일체가 적어도 교회와 사회의 모델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역사적 삼위일체 교리가 수정되거나 심지어 거부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삼위일체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사회적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의 적용을 위해 볼프는 우리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 유형과 삼위일체 사이에 직접적인 대응점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볼프가 어떤 점에 반응하고 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일부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일체의 비밀은 친교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위일체의 '존재'를 세 실존의 유형의 본질로 보는 위대한 전통(the Great Tradition)이 정의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존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상호간 사랑의 관계나 친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위일체에서도 성부가 제일 위에 있는 위계질서가 있듯이, 교회에도 위계, 즉 맨 위에 주교가 있다고 이 단체는 주장한다는 것이다.

볼프 역시 사회적 삼위일체주의자이다. 그는 서로 간의, 사회 관계 속의 사랑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한다. 그는 공동체의 친교에 대해서도 "아멘!"이라고 말한다. 다만 삼위일체주의자들의 친교는 위계질서가 아닌 평등이며, 삼위일체교리가 교회와 사회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교회의 조직도 그런 평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는 한 명의 교황이나 주교가 아닌 전체의 의견을 모으는 데 있다. 한마디로 교회는 삼위일체처럼 회중적이어야 하고, 삼위일체 역시 교회에서처럼 회중적이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이 모든 논의와 함께, 진정한 이슈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의제에 부응하기 위해 삼위일체 교리가 재정의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부분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위계질서를 원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평등을 원한다.

그러한 수정주의를 명료하게 보기 위해, 우연히 미로슬라프 볼프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신학자를 만나러 브라질로 가보자.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보프이다. 보프의 독특한 점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삼위일체가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의 원형이라고 믿는다. 보프는 특별히 남미에서, 오랜 시간 해방 신학을 외쳐왔다.

해방신학자들은 성경의 주된 메시지는 사회에서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자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약속과 희망이라고 결론짓는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 즉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영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은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이들을 권력자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사회적 정치적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왜 죽었나? "성육신하신 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과된 노예제에 대한 항의로 죽었다"고 보프는 <삼위일체와 사회>에서 주장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재정의는 확실히 삼위일체의 재정의로 연결된다.

삼위일체를 재정의하는 것은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정의를 현대의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대적인 인간 개념은 기본적으로 관계로서의 존재 개념이다; 사람은 자율성의 중심에 있는 주체로서 존재하며, 의식과 자유를 부여받은 주체이다." 이 한 문장으로 보프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요약한다. 그러나 보프는 여러 반대에 직면했다. 만약 이 현대적 인간 재정의가 삼위일체에 적용된다면, 이것은 어떻게 삼신론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프는 "관계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완전한 개방성의 강조”가 이런 반대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서 사람을 재정의하면서, 보프는 삼위일체를 사회와 공동체로 재정의한다. 보프는 인간 사회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사회는 단순히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 기능 그리고 제도 간의 관계의 실타래로 엮여져 있는 그들만의 뭔가로 구성되어 있다." 그 결과: "모두들 간의 협동과 협력이 공공재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가 그렇게 하듯, 각 위가 협동하고 협력하는 신들의 사회다. 인간 사회는 삼위일체에 대한 "지시봉"이며, 삼위일체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모델"이다.

삼위일체는 공동체 비전이다. 하나님은 각 위의 공동체이지 단순히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의 하나됨은 친교(공동-결합)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완벽한 상호주의“ 즉 ”사랑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잠깐, 정교회 과거의 유령은 끝나지 않았다. 복음주의자들 역시 삼위일체 표류에 기여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삼신론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사회적 관점을 수용했다. 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지식, 의지, 사랑, 행동이 뚜렷한 중심"인 사회적 삼위일체를 제안한다. 위격이 인격체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코넬리우스 플랜팅가(Cornelius Plantinga)는 그것들은 "의식의 뚜렷한 중심"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함께 "공동체" 또는 "사회"를 형성하여 "성 삼위일체는 셋의 온전한 인격체이자, 온전히 신성한 세 실체가 있는 신적이고 초월적인 “사회" 또는 ”공동체“이다. 이와 같이 확고한 의지와 의식의 중심성을 강조하면서, 역사적 니케아 신조의 확언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대담하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와 모어랜드(J. P. Moreland)는 사회적 삼위일체주의의 "핵심 책무"는 다음과 같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안에는 자의식의 뚜렷한 세 중심이 있는데, 각각은 적절한 지성과 의지를 갖고 있다. 세 개의 의지, 세 개의 자의식 중심, 이것이 바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DNA이다. 다른 것으로는 삼위일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신적 단순성에 대한 고전적인 확언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은 각각 인격에 충분한 세 세트의 인지 능력을 부여받은 비실존적 물질 또는 영혼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의식, 의도성, 의지라는 세 개의 중심을 가진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왜 세 개의 의지와 의식의 중심이 삼신론이 아닌지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견해가 아타나시시우스 신조를 포함한 교회의 많은 신조와 모순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성경으로에 호소하는 것에서 위안을 찾는다.

복음주의 신학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난 세기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인 스탠리 그렌츠(Stanley Grenz)를 예로 들어보자. 그렌츠는 삼위일체가 사회적 현실이며 이 공동체의 상징은 사랑이라고 정의내린다.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묶는 속성이며,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사회를 정의하는 표시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특히 성령으로 구속된 그들의 자비로운 교제가 사람들을 하나의 존재로 묶어준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 헌신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사회적, 협동적인 사랑의 관계에 헌신해야 한다. 그렌츠는 위대한 전통(the Great Tradition)이 하나님의 존재, 즉 세 가지 실존의 양식을 가진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을 질책한다. 그렌츠에 따르면, 그것은 네 번째 인격을 창조한다. 대신, 우리는 그 인격들이 서로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는 인격들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칼빈주의 운동도 생각만큼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과 브루스 웨어(Bruce Ware)와 같은 복음주의자들 또한 삼위일체를 서로간의 뚜렷한 주체로서 협동하는 사회적 "역할"과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위격들의 사회로 재정의했다.

20세기 사회적 삼위일체주의자들은 위격을 특히 양성 간의 평등을 지지하기 위한 상호성과 자기애의 관계로 재정의했다.

그러나 그루뎀과 웨어는 삼위일체 속에서의 관계적 사회가 기능적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성자는 한 소설의 관점에서 알려진 EFS(영원한 기능적 종속)처럼, 삼위일체 내에서 성부의 최고, 절대 권위에 복종한다. 그들의 사회적 의제는 삼위일체내에서, 아내들이 가정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듯, 영원한 하나님의 머리되심 가운데, 사회의 위계질서 가운데 범주이자 원형으로, 삼위일체 속에서의 권위 복속으로, 사회적 삼위일체론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부흥인가 이륙인가?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의 부활을 경험한 많은 이들은 삼위일체 사상의 부흥이 있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구식 개신교 자유주의의 경멸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는 결국 중요하다. 교리적 심폐소생술을 통해 삼위일체가 소생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그들이 소생시킨 삼위일체는 정통적인 것도 아니고 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정통 삼위일체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의 비누상자에 맞게 성형하거나 어쩌면 조작할 수 있는 다른 삼위일체-사회적 삼위일체론-로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 그것을 죽여 버렸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현대 신학자들 수만큼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주장이 많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각각의 새로운 삼위일체는 새로운 사회 프로그램에 도달하고 있다.

삼위일체를 향한 탐구는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나의 사회적 의제에 관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카렌 킬비(Karen Kilby)가 지적하듯, 삼위일체는 현재 핑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주장하지만, 오직 "그것을 사회적, 정치적 또는 교회 체제를 홍보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것을 직접 경험했다. 강단과 교회라는 복음주의 그룹 내에서, 삼위일체를 숙고하고 찬양하는 것이 이제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나 혼자만 이런 결론을 내린 게 아니다. 현대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함께 스테판 홈즈(Stephen Holmes)는 비통한 목소리를 토로하고 있다.: "최근 수십 년간 우리가 목격한 삼위일체 교리를 다시 찾으려는 신학적 작업은 전통적인 교리를 너무 심각하게 오해하고 왜곡하여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하였다 … 이런 접근들은 오래된 전통을 부흥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전통에서 이륙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표류는 실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의 정통 삼위일체로부터 멀어졌을 뿐 아니라 사회적 의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삼위일체를 조작했다.

이 기사는 매튜 바렛의 <순전한 삼위일체: 조작되지 않은 성부, 성자, 성령> (Baker Books, a division of Baker Publishing Group, 2021)에서 허락 하에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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