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rch Life

북한을 탈출하다

중국 교회의 큰 도움을 받다.

Christianity Today June 6, 2022
Peter Murphy

어떤 면에서는 북한에서 자란다는 것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나에게는 항상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고, 나를 끊임없이 돌봐주던 누나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잠자리를 잡기도 했고, 텔레비전 만화를 보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던 1995년, 전무후무한 대기근이 북한을 덮쳤고, 내 어린 시절의 달콤한 특권은 사라졌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굶주림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빚을 갚느라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 해, 어머니는 식량과 돈을 구하기 위해 누나와 함께 중국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어머니는 혼자 돌아오셨다. 어머니가 누나를 노예와도 같은 어린 신부로 팔아넘기셨던 것이다. 젊은 탈북 여성에게 흔히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기다리는 나보다 중국에 있는 누나가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성매매가 무엇인지조차 모르셨던 것 같다. 중개인 대부분은 중국 남성과 결혼하면 얻게 될 혜택에 대해서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많은 탈북 난민들이 이처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해야만 했다. 이후 어머니는 몰래 중국과 북한을 오갔고, 그러다가 북한 정부에 잡혀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는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내가 정의를 내리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나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노숙자, 고아, 그리고 거지. 내가 장마당에서 음식을 파는 곳으로 다가갔을 때 그들은 나를 마치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대했다.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지치고 절망적인지 안단다.”

눈을 들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버지처럼 굶어서 죽거나 아니면 나은 삶을 찾아 도망치거나. 남으면 죽음을 맞을게 분명하고 떠나면 살아남을 기회라도 갖게 되는 갈림길에서, 나는 살아남기로 선택했다.

나는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밤에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낮에 북한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2006년 2월 어느 날. 나는 두만강 둑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모랫구멍에 발이 빠져 신발이 모래범벅이 되었지만, 얼음으로 덮인 강 위를 달려 반대쪽 강가에 도착했다. 나는 기적을 만들었다.

나는 희망을 가득 품고 탈출했다. 먹을 걸 찾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내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장면은 중국 사람들이 먹고 남은 밥을 나에게 흔쾌히 주는 것이었다. 남은 밥 한 공기는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 내가 맞닥뜨린 건 차디찬 현실이었다. 중국 사람들 대부분이 나에게 남은 음식을 나눠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은 내 부탁에 짜증을 냈다.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몇 주 동안 나는 살아남기 위한 구걸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나이가 지긋한 조선족 여자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네. 하지만 꼭 교회에 가 봐라.” 이렇게 말하면서 십자가가 있는 건물을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북한에서 어느 병원 문에 달려 있던 붉은 십자가를 본 적 있었다. 나는 십자가가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분이 설명해준 대로 십자가를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많은 건물들을 찾아가 봤지만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없었다.

나는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물었다. “어디에 가면 십자가를 찾을 수 있나요?” “위를 봐라.” 그곳에 십자가가 있었다.

교회를 방문한 생애 첫 순간이었다. 늦은 저녁 즈음이었는데 남자 몇명이 그 허름한 건물 안에 모여 있었다.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한 남자가 나에게 20위안(약 3달러)을 주면서 그 돈이 그들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전부라고 말했다.

중국의 가장 북쪽에 있는 그 마을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는 연길까지, 그 다음에는 도문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또 다른 교회를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를 헤맸다. 마침내 발견한 두 번째 교회 벽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지쳤는지 이해한단다. 너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도. 이제 네 손을 나에게 건네지 않겠니? 지금부터 내가 너의 보호자란다.”

그때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여성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 분은 몇 주 동안 씻지 못했던 나를 개의치 않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질문에 나는 긴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거짓말을 했다. 나는 다른 도시에 있는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며 그곳에 가기 위해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분은 로비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시 돌아와 50위안(8달러)을 주었다. 그리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50위안.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내 손으로 쥐게 된 가장 큰 액수의 돈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그 교회에 다시 돌아갔다. 내가 다시 50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때 교회 사람들이 나에게 잠깐 머무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들의 호의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겨울에 문이 하나도 없는 버려진 집에서 자곤 했기 때문에, 담요가 있는 방에서 잔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머무르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나에게 50위안을 주었던 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목사님의 부인이었다. 나는 사모님이 내가 한 거짓말 때문에 나를 혼내고 쫓아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사모님은 내가 교회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어느 날 오후, 교회 사람들이 몇몇 모여서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목사님의 치아가 어떻게 나빠졌는지, 하지만 치과 치료를 받을 돈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사모님이 나에게 50위안을 준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로소 그때 나는 50위안이 목사님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사모님의 호의는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사모님은 남은 밥을 나눠주기를 거절했던 다른 중국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사모님이 믿는 것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과는 달리 나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단어, 개념이 무엇인지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사모님의 믿음이 궁금했다.

중국에서 탈북 난민을 머무르게 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벌써 2주 이상이나 나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 교회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교회 성도 한 분이 기꺼이 나를 받아주겠다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조선족 여자 성도를 소개시켜주었다. 그 분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에게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도록 했다. 나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할머니는 내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고 찬송가를 부르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이름,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는 첫 번째 기도를 중국어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날 밤, 할머니는 나에게 찬송가 한 곡을 가르쳐주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할머니의 집으로 옮겨간 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탈북 난민들을 위한 지하 쉼터를 운영하는 한 중국인을 만났다. 같은 해 말, 나는 한 사회운동가를 만났고 그는 내가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2007년, 나는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도착했고 리치먼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장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수업 내용도, 친구들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충격이었고 나는 그 문화의 흐름을 거의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어렸기 때문에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4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현재 뉴욕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더 배우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할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준 찬송가는 내 마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글로 표현해 준 것과도 같았다. 나는 세상에서 혼자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북한 정부는 나를 체포할 수 있었고, 나는 굶주림에 고통 받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나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멀리하시면 어떻게 될까? 나를 머무르게 해 주었던 교회들, 나누어 줄 수 없었던 50위안을 건네 준 사모님,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주어진 할머니까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중국으로 도망친 이후, 나는 인간의 선함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 나서 희망을 되찾았다. 이방인들을 돌보고,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요 복음의 본질이다.

요셉 김 「같은 하늘 아래 (Under the Same Sky: From Starvation in North Korea to Salvation in Americay ) 」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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