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정의하는 것은 여성성이 아닌 인간성에서 시작된다

‘두 번째 성’에 대한 논쟁은 우리를 생물학, 겸손, 그리고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게 한다.

Christianity Today June 7, 2024
Rakah Miftah / Pexels

대법원 후보자 켄탄지 브라운 잭슨은 ‘여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거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잭슨은 상원 의원 마샤 블랙번의 질문에 “저는 생물학자가 아닙니다.”라고 답하여 질문을 회피했다. 테드 크루즈 상원 의원은 잭슨에게 성차별 소송에 누구를 포함할 것인지 묻자, 잭슨은 이런 소송이 현재 하급 법원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다시 한번 답변을 회피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재빨리 잭슨의 답변을 밈으로 삼아 그녀의 답변 거부를 진보적인 난센스의 명백한 증거로 묘사했다. 결국 누구나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유일한 문제는 수천 년 동안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여성을 ‘훼손된 남성’으로 보았든,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지 않는 교회의 아버지들이든, 역사는 사람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몰랐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과거에도 여성들은 표면적으로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자 ‘창조주가 부여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해 왔다.

기독교 옹호자이자 학자인 도로시 세이어즈는 1947년 에세이 ‘인간이 아닌 인간(The Human-Not-Quite-Human)’에서 여성에 대한 우리의 실제 정의가 부적절하다고 다음과 같이 성찰한다.

어떤 현상을 연구할 때 첫 번째 과제는 그 현상의 가장 분명한 특징을 관찰하는 것이다. … 대부분의 ‘여성문제’ 연구자들이 실패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교회는 대부분의 경우보다 더 애석하고 변명의 여지도 적다. … 어떤 논증을 사용하더라도 논의는 무효화 되는데 남자는 항상 호모[인간]와 비르[남성]로 다루어지지만, 여자는 페미나[여성]로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이어즈에게 여성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정의에는 여성성과 인간성을 모두 포함해야 하며, 인간이 명사 역할을 하고 여성이 형용사 역할을 해야 한다. 결국, 고양이, 새, 심지어 몇몇 나무들까지 많은 것들이 암컷이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와 책임은 그녀의 성별이 아니라, 그녀의 공통된 인간성에 기인한다. 암컷 고양이들은 시민 평등권이 없다. 암컷 나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자 인간에게는 시민으로서의 평등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을 단순히 남성과 반대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형상을 지닌 존재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대로 내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세이어즈가 강조하는 딜레마는 우리 사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는 다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블랙번 상원의원의 질문 뒤에는 트랜스젠더 여성 운동선수가 여성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지가 있다.

트렌스젠더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여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들은 성차별로부터 보호받는 계층에 속하는가? 여성 개인의 인격을 주장하는 세이어즈와 달리, 우리는 누가 여성이라는 계급에 속할 수 있는지 규정하려 데 애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이어즈의 기본 공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정치적 차원을 띠게 되는 맥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homo)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기 때문에 여성(Femina)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 세기 동안 여성들은 인권을 위해 여성성에 기반한 연대를 구축해 왔다. 그래서 현재의 순간에, 브라운 잭슨 판사의 지적대로, ‘여성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깊은 법적,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특히 까다롭다. 여성성에 중점을 두고 남성과의 공유된 인간성을 강조하지 않는 여성성의 정의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시민 평등의 근원이 되는 범주 자체를 축소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자들은 현재의 논쟁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성희롱과 학대를 남성들만의 ‘라커룸 대화’로 치부하고, 성별을 기준으로 여성 보호 법적 범주에 반대해 온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경우에 더욱 그렇다.

지난 100년 동안 여성을 성별에 기반한 특별 이익 집단이 아닌 생물학적 인간 현실로 정의하는 법적 선례를 마련했다면 오늘의 대화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우리가 여성들을 그들이 가진 형상 그대로 바라봤다면 오늘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 펼쳐질까.

그러나 만약의 상황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것에 대해 합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혼란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우리의 여성 정의의 결함을 인정해야 한다. 얼마나 빈번하게 그 정의가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하지 않고 ‘남성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는지 말이다. 여성을 인간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이러한 범주는 서로 다르며 하나가 서로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확고한 이해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여기서 권리와 책임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이론을 창세기 2장이나 에베소서 5장에서 시작하는 대신, 창세기 1장에 뿌리를 두고 우리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맥락으로서 공유된 인간성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의 차이점은 실제적이고 사실이지만, 성적 차별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리고 남성이 우리의 하위문화에서 기본 정의가 된 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둘째, 현재의 취약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들이 성별, 심지어 생물학적 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너무 빠르게 변화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압도될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 순간은 확실히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젠더뿐만 아니라 인간성과 자기 창조의 한계에 관한 현대 범주의 약점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대화는 마치 파도가 정점에 도달하고 부서지려고 할 때 급변하게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이서즈는 1942년 에세이 ‘왜 일하는가?(Why Work?)’에서 이 현상을 다루면서 사회가 내재한 자기 수정 주기가 종종 파국적인 방식으로 끝난다고 언급했다.

자기 생각을 자발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가져온 사건의 순전한 압력으로 인해 수정할 수밖에 없다. … 갈등의 근본 원인은 일반적으로 모든 당사자가 동의한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발견되며, 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원칙 있는 지도자들은 이 순간에 어떻게 대응할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논쟁의 진정한 핵심을 확인하고, 여성의 인간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을 포함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 조건이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화 상대와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추구해야 한다. ‘여성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이웃은 점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그러한 차이를 은혜와 진리로 탐색하며, 우리와 동의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서 이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부터 단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인간성을 구속하고 성취하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자세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한나 앤더슨은 ‘Made for More’, ‘All That’s Good’, ‘Humble Roots: How Humility Grounds and Nourishes Your Soul.’의 저자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람을 받으려면, 페이스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Our Latest

News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아프가니스탄 기독교인들

탈레반이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진취적인 사역자들이 교회가 없는 곳에서 신학교와 설교를 제공하며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선교 성공이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20세기의 특별한 교회 이야기는 현재 인구학적 위기와 기독교에 대한 환멸, 그리고 2007년 탈레반 피랍 사건으로 고전하고 있다.

북한을 포기하지 않은 기독교인들

전문가와 실무자들이 폐쇄적인 북한을 섬기는 데 있어 가장 큰 도전과 격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필요 사항: 비자 문제없음, 빠른 Wi-Fi,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경험하는 공간

글로벌 기독교 단체들은 최고의 콘퍼런스 장소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샅샅이 뒤졌다.

Apple PodcastsDown ArrowDown ArrowDown Arrowarrow_left_altLeft ArrowLeft ArrowRight ArrowRight ArrowRight Arrowarrow_up_altUp ArrowUp ArrowAvailable at Amazoncaret-downCloseCloseEmailEmailExpandExpandExternalExternalFacebookfacebook-squareGiftGiftGooglegoogleGoogle KeephamburgerInstagraminstagram-squareLinkLinklinkedin-squareListenListenListenChristianity TodayCT Creative Studio Logologo_orgMegaphoneMenuMenupausePinterestPlayPlayPocketPodcastRSSRSSSaveSaveSaveSearchSearchsearchSpotifyStitcherTelegramTable of ContentsTable of Contentstwitter-squareWhatsAppXYouTub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