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다면 다음 주일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약 하나님의 영이 성경을 밝혀 주시지 않는다면, 성경이 읽혀지고 설교 될 때 설교가 여전히 영혼을 만지고 진리가 선포될 수 있을까? 손을 높이 들었으나 성령께서 풍성히 거하시는 찬양이 없고 평소의 울림이 부족한 예배를 상상해 보라. 회중들이 떠날 때 주목할만한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예배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하나님이 부재하신다는 위협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다.
나의 목회 여정은 1999년 작은 아파트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실향민 신자 집단으로서 우리는 영적으로는 노숙자였으며 소위 “진정한 영성”이라 부르는 것을 추구했다. 그 단순한 모임은 내 인생에서 영적으로 가장 풍성한 경험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한 믿음, 의심, 외로움, 슬픔, 정신 건강에 관해 정형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고 찬송가, 합창곡, 시편을 찬양했다. 공적 교육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도울 방법을 찾았다.
그 후, 우리는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도다”(창 28:16, 새번역)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박한 출발에서 교회 개척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아파트가 너무 낡아서 결국 우리는 오래된 교회 지하실로 옮겼다.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모임은 조금 더 형식을 갖추게 되었지만, 간절함과 단순함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우리는 기도했고, 찬양했으며, 진로 결정, 관계, 유산, 이사 문제 등에 대해 서로를 격려했다.
몇 년 후, 교회는 대형 기관과 유사해졌다. 5년 사이, 세 번째 재정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사역자들은 분열되고 지쳤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반 수면 상태에서 이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없는 상태에서도 교인들을 진정한 예배로 초청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배후의 혼란을 능숙하게 가리면서도, 우리가 나름 준비한 예배가 초기 모임만큼 교인들을 영적으로 충만하게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러한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아파트 교회 시절과 더 큰 교회의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단지 더 젊었다는 것과 이상주의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공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명백하게 느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조직화된 교회와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뚜렷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의문이 종종 나를 괴롭혔다. 나는 우리 초기의 단순함과 큰 규모 모임의 복잡성 모두가 우리 신앙 여정의 진정한 과정이었다고 믿지만, 내 자신의 기대와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의 이유는 탈주술화였다.
믿음이 기능으로 변화되었을 때
20세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성의 효과를 탈주술화로 묘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베버가 보았듯이 계몽주의 이후, 과학혁명 이후의 세계는 신비로움으로부터의 탈피였다. 베버는 전차를 타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현대인에게는 도서관에 가거나(그의 시대에는) 빠른 구글 검색만으로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요점은 이 기본 설정이 매 순간의 초월성을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신비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베버의 주장에 더해서 현대성이 특히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만연한 회의론을 확산시켰다고 주장한다. 한때 초월성에 대한 믿음과 대부분의 개인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신비와 힘의 존재를 인정하던 믿음이 일상생활을 뒷받침했던 시대 정신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바뀌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지적 담론의 대부분은 모든 것이 물질적 수단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즉 신 없는 현실의 가정 하에서 운영된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많은 신비로운 현상을 비신화화 했다. 전염병은 더 이상 신령한 영이나 저주의 산물이 아니라 세균과 바이러스의 결과이며, 악천후는 신의 행위가 아니라 기압 시스템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베버의 전차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작동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논리적인 설명이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 특히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은 비슷한 렌즈를 통해 영적인 삶을 보는 공통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종종 종교적 체험을 우리가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과정의 결과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주일 예배든,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든, 목회 사역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에는 특히 강한 매력이 있다.
통제에 대한 이러한 욕구는 이해는 가지만, 결국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실용주의와 슬프게도 냉소주의의 길로 인도한다. 진정한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교회 모임은 연상을 불러 일으키는 찬양이나 이벤트적 설교에 의존함으로써 "의미 있는 순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 나쁜 것은 초월성에 굶주린 교인들이 이러한 조작적이고 감정적으로 흐르는 모임을 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반응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생산, 성과 및 에너지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건강의 몇 가지 중요한 지표인 영적 성숙, 지혜, 성품 및 사랑이 부족한 공허한 사역을 초래할 수 있다. 많은 대형 교회와 교단이 리더십 실패의 여파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탈주술화가 지도자의 성품과 영적 발전을 도외시하게 만들었는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번아웃된 파수꾼들
대안적인 접근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탈주술화로 인한 본질적인 의심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항복이 아니라 도전으로서 맞서고 씨름해야 할 과제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령의 적극적인 임재에 진정으로 의지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다.
이는 활동에서 존재로 전환하라는 초대이다. 설교, 기도, 예배 인도, 심방과 같은 실제적인 사역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에 열린 마음으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좋은 소식은 이 길이 어둠에 가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갈망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시편 기자는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시편 42:3~4).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은 지나간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것이다.
시편 기자가 연약한 순간에 쇄신을 추구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이전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탐구는 개인과 공동체를 막론하고 탈주술화에 빠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예배의 핵심이다.
다른 이들을 경이로움으로 이끄는 것은, 전체 회중을 위해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부담은 목회자들이 영적 쇄신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을 개척하고, 안내자의 역할을 벗고 대신 구도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거룩한 장소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안전한 공간은 웅장한 교회당이 아니라 소그룹, 우정, 심지어는 교회 지하실에서의 조용한 순간일 수도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교회 지도자들도 영적 피로감에 취약하다. 이러한 감정은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예언자와 성도들이 직면한 고난을 반영한다. 이 상태를 인식하는 것은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은 용감한 영혼의 역사에 여러분을 맞추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의 회중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피곤함과 탈주술화는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영적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도자와 성도 모두에게 이해와 쇄신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마법적인 공식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는 것이 신앙의 생명선이다. 냉소주의와 정체에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기회를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열린 마음과 연약한 영혼은 우리가 갈망하는 기쁨을 재발견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추구를 통해, 마법의 불씨가 다시 점화되는 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끌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영웅의 죽음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 멘토, 동료들에 의해 교회 서사의 영웅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들은 영감 있는 설교를 하고, 지혜로운 상담을 제공하며,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잠시나마 감정적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지만, 결국에는 희미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당신을 영웅으로 여길 때 왜 당신이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할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압박감은 당신의 영혼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
대신, 목회자들은 서사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예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중요한 영웅이지만, 그것을 신학적인 프레임에서만 구성하는 것은 교회가 냉소주의와 탈주술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핵심은 영웅 패러다임을 버리고, 교인들이 영적 여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주인공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다. 목사, 지도자, 멘토는 이 여정의 아름다움을 조명하고 종종 장애물과 도전을 통해 그들을 인도할 수 있지만, 천국을 향해 개인이 밟아야 할 발걸음을 대신 내딛거나 밟을 수는 없다.
실제로 이는 교회를 실제적이고 생생한 영성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한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영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영적인 훈련을 갖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게 도구를 제공하여 광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의심과 탈주술화의 감정을 포용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로서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자존심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시에 복음으로 나아간다', 혹은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비전을 추구하는 대신, 임재의 조용한 순간을 맞도록 독려한다면 어떨까? 병상 옆에 있는 것, 삶의 희로애락을 받아들이는 것, 교인들이 실제적인 방법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격려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행동이다. 자리를 채우고 헌금을 모으는 것보다, 눈물을 흘리고 음식를 제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요점의 일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 임재하시는 것을 의존하는 훈련을 통해 자라나야 한다.
깨어지고 상처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만 우리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 자신 이외의 것에 굶주린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한 공동체로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그 간증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
어두운 아파트에서 함께 조용히 드리는 기도를 기립 박수와 맞바꾼다면 어떨까? 연기를 뿜는 기계와 세련된 설교로 조율된 연극과 같은 기도가 아니라, 초창기를 연상케 하는 연약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는 기도 말이다. 우리의 불씨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으로 점화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