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2022년 12월 25일 묵상본문.

이사야 9:6–7

이사야 9:6–7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5, 2022
Stephen Crotts

이사야 7:14과 9:1-7을 묵상하십시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사야 9:6-7

기쁨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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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보는 순간, 그들은 알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 2022년 12월 24일 묵상본문.

누가복음 2:30–31

누가복음 2:30–31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4,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누가복음 2:22-40

육아는 힘든 일이며, 첫아기 육아는 그 어려움의 무게가 더합니다. 복중의 첫 꿈틀거림을 느끼는 것부터, 아기를 처음 만나는 순간, 첫 목욕, 첫 수유, 첫 번째 말을 하는 것과 첫 번째 걸음마까지,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처음들이 참 많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여행은 도보로 몇 시간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신실한 순종 가운데, 그들은 초보 부모로서 자신들과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율법에 참여하기 위해 첫 번째 여행을 떠났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도착할 때까지 모든 것은 율법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며, 성전에 들어간 그 역시 처음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시므온이 메시아를 볼 때까지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시므온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단지 그를 본 것만이 아니라 그를 안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시므온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이 규모 면에서 범세계적일 뿐 아니라 개인적이며, 인격적이라는 것 또한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구원 그 자체가 그의 팔에 안긴 옹알거리고 꼼지락거리는 아기 안에 배어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경배하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할 때, 마리아와 요셉은 그들의 아기 이름을 하나님의 구원을 뜻하는 예수로 지으라 했던 천사의 지시를 기억하며, 놀랐습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을 하는 동안, 안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자신 역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시므온의 예언적 경배의 노래를 확증시켜 주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안나의 모든 삶의 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안나는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 아기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위해 기다리던 바로 그 아기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그녀는 이 아기 예수에 대해 이 사실을 듣기 원하는 모두에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열방을 위한 약속된 빛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시므온과 안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스냅샷을 봅니다. 우리는 순종과 믿음, 훈련과 헌신, 기대와 예배를 봅니다. 그들은 임마누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임마누엘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임마누엘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임마누엘을 말했습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 임마누엘을 축하하며, 마리아와 요셉처럼 신실한 순종의 길을 걸읍시다.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안나처럼 기도하며, 금식하고,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합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티 안야빌(Kristie Anyabwile) Literarily: How Understanding Bible Genres Transforms Bible Study의 저자이자 His Testimonies, My Heritage의 편집자입니다.

누가복음 2:22-40을 묵상하십시오.


시므온과 안나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과 마리아, 요셉의 모범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신에게 어떤 격려와 영감을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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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떼가 된 목자들

2022년 12월 23일 묵상본문.

누가복음 2:8

누가복음 2:8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3,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누가복음 2:1-21

제 아내 케린은 유치원에 다닐 때, 살아있는 성탄절 모형에서 마리아 역을 맡았습니다. 그것은 깜찍한 아이디어였지만, 살아있는 동물들이 세 살배기 옆에 서 있는 현실은 그녀에게는 끔찍했습니다. 그녀는 어느 것에도 참여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히스테릭하게 울었습니다. 그녀를 다독거리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현장에 들어와 그녀와 짐승들 사이의 바닥에 누워 딸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인간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성탄절 모형 방문자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자신의 몸을 짚으로 완전히 덮었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놀라운 이미지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목자들은 “밤에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어둠의 진정한 위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밤은 도둑들과 포식 동물들이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양 떼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에 관한 누가의 기록에서, 목자 역시 양 떼가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성탄절에, 하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계시하여 자신의 양 떼의 일부인 목자들을 돌보셨습니다.

목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한 것과 얼마나 유사한지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목자들이 분명하게 특정하지 못한 필요까지 채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천사의 말로 그들의 영혼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곧장 구유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구유 안의 아기가 되심으로, 가장 겸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들은 바로 그 메시지 즉 “그들이 들은 대로”라는 희망과 소속감의 메시지로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찬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을 뿐 아니라, 기쁨의 기름을 그들의 머리에 바르셨습니다. 그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평생 동안 그들과 함께 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도 그런 돌보심을 필요로 합니다. 목사로서 저는 목자들도 양 떼의 일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자신의 겁 많은 양들을 잘 알고 계시며, 자신의 삶을 우리들과 모든 위험 사이 건초에 두신 우리의 구주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한 영혼이 돌봄을 필요로 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선한 목자의 음성으로 땅에 있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이라는 말씀을 여전히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모든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J.D. 피바디(J. D. Peabody) 워싱턴의 Federal Way에 있는 New Day 교회의 목사이며, Perfectly Suited: The Armor of God for the Anxious Mind의 저자입니다.

누가복음 2:1–21을 묵상하십시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2-4, 11, 14도 읽으면 좋습니다.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점을 강조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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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빠진 성탄절

2022년 12월 22일 묵상본문.

마태복음 1:25

마태복음 1:25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2,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1:18-25

요셉의 명성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그가 누가 아니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임신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 선정, 가족의 이집트로의 도피를 유발하게 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구속 사건과 요셉이 얼마나 관련이 없었는지 강조합니다.

성경은 또한 요셉의 눈에 띄는 침묵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록된 단 하나의 단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종종 해석이나 추측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요셉의 기여 없음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가장 의미 있는 역할은 명백하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런 적은 기여는 복음의 핵심 교리를 요약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조를 위한 설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니, 자 이제 가서 그것을 이루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본질적으로 “여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고, 여기 이 진리를 받아들일 방법이 있다.” 라고만 말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기대대로 삶이 전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만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포기하도록 요청 받은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 아이는 약속된 분이며 온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히든카드라는 더 큰 실체를 위해 여지를 남겨뒀습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면, 그 모든 사람에는 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 더 큰 계획은 또한 그의 개인적 구원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침묵이 단 하나의 단어로 깨어졌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가 직접 말한 것으로 인용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가 이 말을 했다고 들었으며, 그것은 예수였습니다. 요셉만이 아이에게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붙여주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마태는 이 이름을 이사야에 나오는, 메시아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의미의 단어인 임마누엘로 정의한 구절과 연결시켰습니다. 예수임마누엘은 실질적으로 상호 교환 가능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의 구원은 우리로 그의 임재 앞에 설 수 있게 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천사의 명령을 따르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선언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요셉은 여기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그가 속한 세상이 곁길로 가고 있을 때, 그의 무력감 속에서도, 요셉의 반응은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자신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요셉은 선지자의 말씀을 개인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곧 그와 그의 가족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하는 그런 시련에 직면했을 때, 요셉은 바로 그 진리를 품에 안고 이동했습니다. 예수.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가십니다.

비록 이 이야기에서 요셉에게 할당된 공간은 작아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좋은 점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음을 볼 수 있고, 구원은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주께 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J.D. 피바디(J. D. Peabody) 워싱턴의 Federal Way에 있는 New Day 교회의 목사이며, Perfectly Suited: The Armor of God for the Anxious Mind의 저자입니다.

마태복음 1:18-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라는 이름을 지은 요셉의 행동은 당신에게 어떤 점을 말하고 있습니까? 요셉이 아기 예수를 돌보고 있을 때 그 이름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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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권세의 하나님

2022년 12월 21일 묵상본문.

누가복음 1:68

누가복음 1:68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1,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누가복음 1:57-80

우리 인간은 자비와 권세의 균형을 잘 유지하지 못합니다. 권력을 얻은 사람은 종종 그것을 즐기고 더 많이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은혜의 사람은 권력을 포기하는(또는 빼앗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이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쉽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가장 권세 있으시고, 가장 자비로우시며, 이 둘을 각각 보여주시는 부분에서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여러 면에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사실, 이 자비라는 주제는 영어권 독자들은 이해하기 힘들도록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가브리엘이 스가랴에게 전한 메시지(누가복음 1:13)에 따라 엘리사벳이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기를 원했다는 것을 봅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것이 가족 중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신생아의 이름을 짓는 관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히브리어로 Yohanan)일까요? 이 이름은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뜻으로, 이 아이가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역을 선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이름을 쓰자 마자 그의 언어 능력은 회복되고 그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이 표징을 통해, 백성들은 이 소년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묻습니다. 이 아이가 대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러나 스가랴는 올바른 방향으로 그들의 시선을 돌립니다. 스가랴는 말합니다. 예, 이 아이는 특별한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찬양 받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보다 능력 있으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 과시는 압제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해서입니다. 야웨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구원의 뿔을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 가운데 있다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사한 예언을 받은 조상들처럼(사무엘상 2:10; 미가 7:20; 에스겔 16:60), 그들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쏟아 부어지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그래야 우리가 그를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선물입니다. 스가랴의 찬양은 우리의 죄 사함과,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할 빛을 약속합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여러 번 이 주제를 언급하면서, 메시아의 오심이 어떻게 회복과 정의 즉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올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매디슨 N. 피어스(Madison N. Pierce) 미국 웨스턴신학대학의 신약학 부교수이자 Divine Discourse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7-80을 묵상하십시오.


이 구절 어디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한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어느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기도로 하나님께 반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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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에 대한 세 가지 흔한 오해

브라질, 콜롬비아, 프랑스, 필리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림절 시즌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대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0, 2022

예전(禮典, 성찬식, 세례식과 절기 행사 때 드리는 특별한 예배의 형태-역자주)을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대림절은 소망과 기다림의 자세로 특징지어지는 기대의 기간이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교회력에 대한 생소함 때문이든, 가톨릭 전통에 대한 냉소주의 때문이든, 대림절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지키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일 수 있다.

대림(Advent)은 “도착” 또는 “나타남”을 의미하며 라틴어 단어인 adventus에서 유래한다. 매년, 대림절은 크리스마스 4주 전 주일에 시작하여 12월 25일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맞춘 기간과 그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기간으로 나뉘어진다. (정교회 교인들은 12월 25일 예수 탄생 축일 전인 11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비슷한 행사인 예수 탄생 금식기간을 지킨다.)

대림절은 4, 5세기 갈리아와 스페인에서 성탄절이 아닌 주현절(1월 6일)를 앞두고 신자들의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행사 기간으로 시작됐다. 주현절(공현 대축일)은 서방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후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의 요단강에서의 세례(혹은 침례)를 기념하는 날을 가리킨다.

오늘날, 대림절 관습은 매주일마다 대림절 헌신 본문을 읽고 기도하는 것과 소망, 사랑, 기쁨 그리고 평화라는 대림절 4주간의 주제를 상징하는 4개의 화환 촛불 가운데 하나를 켜는 것을 포함한다. 모든 화환 중앙에는 초를 두는데, 그것은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계와 가톨릭이 지배 종교인 국가의 복음주의 교회는 일반적으로 대림절을 지키지 않는다.

프랑스 복음주의 교회들은 대림절을 “예전적인 것에 대한 핵심 행사로, 가톨릭의 독특함이 담겨져 있기에” 무시한다고 노장쉬르마른 성서 연구소(Nogent-sur-Marne Bible Institute)의 침례교 교수로서 파리 외곽 지역에 살고 있는 고흐든 마흐즈(Gordon Marge) 교수는 주장한다.

콜롬비아의 디오니시오 오르헤아 목사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복음주의, 오순절 교회 그리고 신오순절 교회” 가운데 대림절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루터교, 성공회, 미국 성공회 등이 가톨릭과 함께 대림절을 지킵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브라질, 콜롬비아, 프랑스 그리고 필리핀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특히 가톨릭교회가 다수인 지역에서 이러한 오해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오해 1: 대림절은 로마 가톨릭 교회만의 독특한 관습이다.

“대부분의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은 지난 천여 년 동안 교회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확신합니다. 전근대 시대에 일어난 일들은 오늘 우리 시대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기독교를 타락시킬 수 있을 뿐이다.”라고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의 매튜 배럿 교수는 올해 초 지적했다.

전반적으로, 교회력은 가톨릭의 발명품으로 여겨졌다. 쇄신을 의심하고, 신약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개신교도들은 그것을 없애 버렸다.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았고, 대림절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정서는 대림절 기간을 개인의 영적 삶에 대한 목표나 관련성이 거의 없는 가톨릭 의식으로만 간주하는 복음주의 교회의 많은 교인들의 인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전세계의 많은 복음주의 교회는 대림절을 지키고 있다.

필리핀의 페비아스 성경 대학(FEBIAS College of Bible) 학장 티모테오 제너 교수는 “이 복음주의자들은 예배의 역사적 발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예배를 지역과 시대에 맞춰 상황화하는 성경적 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려 하면서, 그들의 실천에서 역사적 조건들을 고려하는 교단들(예를 들면 성공회, 개혁교회, 루터회, 감리교)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브라질에서 대림절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받아들여진 예전 행사라고 성구집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다니엘 비에이라는 말한다.

비에이라의 의견에 따르면, 예전력을 제대로 경험하는 것은 종교 소비주의에 맞서고 영성 형성과 제자도를 다시 강조하는 ‘현실의 거룩한 비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자들이 대림절과 크리스마스를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지금 브라질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필요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대림절과 크리스마스의 차이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관습과 우리가 브라질에서 추진해온 도구인 성구집의 도움으로 대림절을 적절한 방식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오해 2: 대림절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언급된 곳이 없기에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대림절이 성경적인 절기가 아니라는 인식을 취할 수도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종종 교회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이혼한” 자신들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순서를 짜기 위해 역사적인 교회력을 따르거나, 공동 기도문의 사회자의 부름과 회중의 응답 기도를 사용하는 것보다 주제 설교와 개인적인 경건을 더 강조하는 저교회파(Low-Church, 영국 성공회에는 저교회파(Low-Church)와 고교회파(High-Church)가 있다. 고교회파는 예전과 전통적 형식에 따른 예배를 드리는 반면, 저교회파는 말씀과 복음송,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드리는 예배를 선호한다-역자주) 배경을 가진 교회 출신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전통에 대한 이해를 회복하는 것은 왜 대림절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따라 신앙을 형성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되는 절기인지를 밝힐 수 있다.

“우리가 신학의 어려운 질문들과 문제점들에 대한 답을 찾는 첫 번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은 (교회) 전통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전통을 침범할 수 없고, 권위적인 위치로 끌어올려서도 안 됩니다.”라고 침례교 신학자 로저 E. 올슨은 썼다.

미국 성공회 플레밍 러틀리지 사제는 대림절이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그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는 성경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러틀리지 사제는 말하기를 “대림절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거기 ‘그러나’가 있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대림절의 메시지입니다: 깊은 어둠과 고통, 만연한 죄와 악의 세계에서, 우리는 오직 유일하고 진정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봅니다.”

필리핀 신학자 제너 교수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전적 예배가 신약 성경 시대 이후에나 예배 양식이 되었고, 이후 수세기에 동안 역사적 발전이 없었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림절을 포함한 기독교 예전 연도의 형성은 초기 교회가 어떻게 그들 주변의 문화적 삶을 그들의 예배적 삶과 통합했는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대교 회당 관행과 축제를 예수와 제자들이 받아들이고 공유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그리스도 구속 사건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재구성됐고, 이후 역사 속에서 기독교 예배로 발전했다.”라고 제너 교수는 주장했다.

프랑스의 침례교 룰라 드후(Lula Derœux) 목사는 성경이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림절을 지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언제, 어떻게 축하해야 할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와의 관계를 더 굳건히 세워야 함을 독려하고 있다.”

기다리는 기간(대림)동안 우리의 축하 필요성과 우리의 갈망하는 마음과 주님을 향한 찬양의 준비는 모든 문화와 모든 세대를 초월한다.”

오해 3: 대림절은 오직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대림절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전에 지키기 때문에, 단순히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행 행사 기간일 뿐이라는 가정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처음 대림절을 지킬 때 그들은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했다. 이것은 중세 때, 대림절에 대한 “전통적” 접근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성육신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시간으로 대림절의 의미가 바뀌었다.

“대림절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을 묵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전통에 따르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림절은 구유에 누워 있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시간이 아니라 구주의 오심을 갈망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로버트 E. 웨버는 Ancient-Future Time에서 언급하였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테드 올슨 편집장은 대림절은 본래 금식과 자기 성찰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비에이라 목사에게, 대림절은 신자들에게 제자도와 의도적인 회개의 시간을 제공하는 “참회”의 기간이다.

그는 “예전 전통에 대한 깊은 반영은 대림절이 옛 언약 백성들의 구속에 대한 기대와 새 언약 백성들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올 완성에 대한 기대 사이의 긴장감이 배어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대림절 기간 동안의 전통적인 찬송가와 성구 낭독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고 있다고 마흐즈 목사는 말한다.

“저는 특히 ‘곧 오소서 임마누엘’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간청으로 이 노래를 부르며, 그의 오심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성도들의 자리에 자신을 둡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요한계시록(22:20,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의 반향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대림절이 내포하고 있는 종말론적 갈망은 간과할 수 없는 대림절의 핵심 요소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인쇄 관리 편집자인 켈리 트루힐로(Kelli Trujillo)는 크리스체너티 투데이의 2022 대림절 묵상 서론에서 “성경의 약속된 이에 대한 예언은 종종 여러 겹의 의미와 여러 가지 성취를 가리킨다”고 언급했다.

“그 예언들은 종종 예언자 자신의 시대의 성취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메시아로, 또한 첫 번째 오심으로, 더 나아가 우리가 기다리는 두 번째 대림절로 우리의 시선을 인도한다.”

드후(Derœux) 목사는 “대림절을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이미/그러나 아직’에 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림절은 주님의 약속과 그가 우리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인류에게 구세주를 주기 위해 필요했던 인내와 준비는 숨이 막힐 정도이며, 이 특정한 기간을 기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대림절과 새로운 시작의 여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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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Today December 20, 2022
Illustration by Christianity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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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초대

2022년 12월 20일 묵상본문.

누가복음 1:45

누가복음 1:45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0,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누가복음 1:39-56을 묵상하십시오.

여행만큼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가운데 몇 가지는, 특히 임신 초기에 흔히 동반되는 피로감과 입덧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유대 산지로 향하는 마리아의 여정은 쉽지도, 안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용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이 필요했던 마리아는 임신 가운데, 가난하고, 아마도 난감한 여정을 담대하게 걸었습니다. 왜 가기로 선택했을까요?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도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 나이의 여성에게는 기적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그녀가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임을 인지한 마리아는 그녀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필요로 했던 정확한 확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의 반응을 칭찬했습니다. 저는 그 확언을 들으면서, 예기치 못한 임신과 그로 인해 그녀의 삶에 주어질 알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마리아의 두려움이 더 견고한 믿음으로 사라졌다고 상상해 봅니다.

엘리사벳의 격려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중단시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을 잉태하고 낳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라는 공동체의 더 깊은 의미에 참여하라는 초대였음을 상기시켜 줬습니다. 엘리사벳의 축복에 격려받은 마리아는 찬양의 노래로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찬가를 맺는 부분에서 상호의존으로의 초대를 반영했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기쁨의 찬가에서 마리아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그녀와 엘리사벳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묵상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고, 가브리엘이 나타나자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성육신은 마리아의 삶의 결정적 중단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준비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지원과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신실한 엘리사벳에게로 향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을 듣고 얼마나 힘이 났을지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사실, 엘리사벳의 격려가 없었다면 우리는 마리아의 찬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의존의 힘, 믿음의 힘입니다. 작금의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축복을 받기 위해 마음을 여는 것은 종종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잠재적인 도움보다 해의 가능성을 더 많이 고려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마리아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엘리사벳과 같은 격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또한 “우리 모두가 함께” 껴안으라는 중단이자 초대입니다.

라술 베리(Rasool Berry)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브릿지교회의 담임목사이며 Where Ya From? 팟캐스트의 진행자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39-56을 묵상하십시오.


이 구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예수님에 대해 어떤 진리들을 찾을 수 있습니까? 마리아의 삶에 주어졌던 엘리사벳의 격려와 그녀의 역할은, 믿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모두 함께”라는 속성에 대해 당신에게 또한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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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역설

2022년 12월 19일 묵상본문.

누가복음 1:31-32

누가복음 1:31-32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9,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누가복음 1:26-38

권능의 추상적인 개념은 지진과 천둥 혹은 대통령들과 억만장자들을 떠올리게 할 지도 모릅니다. 살아있는 권력은 우리의 길을 막기도 하고,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그가 제기한 안건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능을 태와 연관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복중에는 어둠 속에 감춰져 있고, 보이지 않으며,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진정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역설 중 하나를 접합니다. 성령은 이 여성의 태 안에 작은 남자 아기 즉 그녀의 살과 뼈 가운데, 그녀의 첫 번째 아기 한 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인간입니까? 신입니까? 예! 한 존재인 이 남자 아기에게는 둘 다 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고, 혁명적인 일을 하는 영웅적인 인간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의 고귀함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인 한 존재가 가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역설, 즉 인간 구원의 중심에 있는 역설입니다.

이 권능은 다른 모든 정의에서 추출할 수 있는 맨손의 무한한 힘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입은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인간과의 신성한 연대에서 오는 약함의 형태를 취하며, 그분의 거룩한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이끕니다.

천사는 마리아와 우리에게 공히 영광스러운 사건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온전한 인성을 얻으셔서 죄가 없으신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4:15).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은 마리아보다 먼저 존재했습니다. 이는 니케아 신경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을 가지신 아들은 성부로부터 성령을 통해 오시며,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기를 그치지 않으시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아니었던 존재 즉 겸비한 인간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레오 1세(400-461)는 자신의 편지에서 그 아들의 성육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하신 일은 신성의 축소가 아니라 인성의 고양이다. 보이지 않는 분이 자신을 보이게 드러내시고, 만물의 창조주요 주이신 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도록 선택된 것 즉 자신을 비우심은 능력의 실패가 아니라 자비에 훨씬 가깝다.”

마리아의 태에서 자신의 “왕국은 결코 끝나지 않을” 구세주 왕이 오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라 반응했던 것처럼, 사람이 되어 그 안에 거하심으로 자신의 피조물을 충분히 사랑하시고, 이 땅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꺼이 신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이 그의 권능을 선포하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켈리 M. 캐픽(Kelly M. Kapic) Covenant College의 신학자이며, Embodied HopeYou’re Only Human 등 여러 책의 저자 또는 편집자입니다.

누가복음 1:26-38을 묵상하십시오.


가브리엘의 메시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예수님과 그의 성육신의 아름다운 역설에 어떻게 반응하기를 갈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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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기다리다

2022년 12월 18일 묵상본문.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8, 2022
Stephen Crotts

넷째 주: 임마누엘


성탄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입니다.

누가복음 1:5-25

구약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과 화목하게 해주실 분에 대한 약속으로 끝맺습니다. 말라기서를 끝맺는 그 약속의 말씀은 수 세기 동안의 침묵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 기다림의 시대에,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평화의 왕의 오심을 위해 떠들썩한 이 땅의 무대를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며, 누가복음 1장은 하나님의 약속의 얽히고 설킨 직조 장식입니다. 그 배경은 역사 속의 정해진 시간, 즉 헤롯의 통치 기간입니다. 스가랴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제사장 직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엘리사벳의 오랜 불임은 세례(혹은 침례) 요한의 기적적인 잉태를 위한 불가능한 상황의 설정이었습니다. 이 부부의 제사장 혈통 역시 기름 부음 받은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지정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세례 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선포하기 위해 지정된 사자였습니다.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젊은 시절, 그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찬 기대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임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자, 그들은 “부끄러움”(누가복음 1:25)의 짐을 진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부 이야기를 처음 접할 때, 그들은 이제 “아주 늙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실함은 스가랴의 잠시의 불신의 순간에 대한 비판보다 우리의 칭송을 받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결국, 이 정도 나이를 먹은 노인은 실망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어두운 침묵의 시간으로 보이는 기간 동안 기도 가운데 인내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며 분향을 하고 있을 때, 가브리엘이 나타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늘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스가랴와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의 빛은 잊지 않고 있었고, 그분은 정하신 때를 위하여 주권적으로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유효기간이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부부의 신실함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이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면서 생명을 주는 기쁨의 시간으로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면, 수십 년 동안의 불임의 시간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삶의 이 고통스러운 부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긴 슬픔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봅니다.

엘리사벳은 이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많은 성경의 영웅들은 그들이 바랐던 것과 이 땅에서 그들에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히브리서 11:39).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믿음의 궁극적인 성취는 이 땅 너머에 있었습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 즉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하나님의 정해진 때라는 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은 오늘날에도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도레나 윌리엄슨 Dorena Williamson) 교회 설립자이자 설교자이며, ColorFull, The Celebration Place, Crowned with GloryBrown Baby Jesus의 저자입니다.

누가복음 1:5-25을 묵상하십시오.


이 이야기에서 당신은 신실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신실함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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