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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성경을 읽는 10가지 새로운 방법, 복음주의 영혼의 분열, 목회자들이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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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저는 1990년대 부룬디 내전 기간에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을 위해 마련된 열악한 캠프에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삶의 변화로 인해 가장인 아버지들의 남성다움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한때 가족을 부양하던 이들은 이제 구호 식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평생 해온 일(농업이나 사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에 대처하기 위해 과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떠올랐습니다. 그 또한 안정된 환경을 버리고 좌절감을 안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요셉도 그 캠프의 아버지들처럼 될 수도 있었습니다. 정부가 선택권을 빼앗고 사람들을 지역 곳곳으로 떠돌아다니게 만든 것에 대해 분개할 수 있었습니다. 파혼해야 마땅한 여인과 결혼하고 도우라고 명하신 하나님을 충분히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에 낙담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협력하지 않거나, 율법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행동은 그렇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모로 택하신 그의 모습에서는 원망이 아니라 매 순간 예상 밖의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며 전심으로 하나님과 협력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습니다. 요셉의 행동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요셉에 대해 자세히 모릅니다. 그는 성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정치 지도자도, 위대한 선지자도 아닌 그의 이름은 메시아의 보호자가 아니었다면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본래의 가문을 지키며 명예로운 지위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했다는 누가복음의 기록에서 가브리엘은 예수님이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며 다윗의 왕위를 주고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누가복음 1:31-33).
복음서의 저자이자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가 요셉을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큽니다(1:20). 그것은 요셉을 메시아의 양아버지(육신의 아버지)로서 인류를 위한 신성한 계획에 주목하게 합니다.
외경에서는 신뢰할 수 없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는 요셉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야고보의 원 복음서와 목수 요셉의 역사를 기록한 글에서는 모두 요셉이 이전 결혼에서 자녀가 있는 홀아비였다고 주장합니다. 요셉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마리아가 온전한 처녀였다는 점을 뒷받침하지만, 요셉에게 이미 자녀가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록에는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여행한 사람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13-15).
외경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요셉은 어느 정도 종교 교육을 받은 평범한 유대인 청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랍비들의 기록에 따르면 요셉 시대의 평균적인 결혼을 하는 나이는 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따라서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말했을 때 요셉은 아마도 그의 부모나 친척과 함께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네 명의 남자아이와 정확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명의 여자아이도 태어났습니다(마태복음 13:55~56).
성경은 요셉이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 13:55). 미을 사람들은 요셉을 그저 목수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상은 아마도 고된 일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문화에서는 노동을 가치 있게 여겼지만 팔레스타인을 통치했던 로마가 식민 지배 세력인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로마의 관점에서 목공은 노예의 직업이었습니다. 요셉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지위 중 일부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만 일부는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기회주의자들이 로마인들과 협력하여 물질적으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험난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그는 전직 세리였던 마태가 선택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요셉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한 복음서의 저자로 타협의 유혹을 가장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불필요하게 로마인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예로, 그는 정부가 인구 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로마가 아닌 자신의 선조들의 본향인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단순하고 유용한 생활 방식에서 그는 불의, 폭력, 부패에 만연한 권력과 직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요셉의 영성은 더욱 뚜렷해졌으며, 하나님은 분명히 그와 함께 서 계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겸손하고 통회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이사야 66:2). ‘단순함’은 영적 훈련으로서 물질주의의 유혹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단순함을 실천하는 사람은 물질주의가 없어도 부자가 될 수 있고 헤롯과 경쟁하지 않고도 왕가의 후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영광보다 의로움이 낫습니다.
요셉은 율법주의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가족을 잘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강력한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은 일반적으로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때로는 아내와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종종 자신이 가족을 이끄는 주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가장은 완고하고 관습을 어기는 행동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문화에서는 인권의 바람이 20년 이상 불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남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경직된 가부장적 태도와 행동을 없애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일부는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리아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 남자로서 요셉은 결혼하기 전에 성관계한 소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신명기 22:13-21). 임신은 성적 부정행위의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법적으로 그는 마리아를 비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사랑과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NIV해석에서는 요셉의 유대 종교 문화와 그의 개인적인 영성을 한 문장으로 아름답게 결합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 1:19-개역개정).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크리스마스 전설에 등장하는 심술궂고 무기력한 남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전에도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고 마리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그의 헌신은 그 어떤 율법주의도 압도했습니다. 요셉의 행동은 진정한 남성다움과 성경에서 증명하는 의로움을 나타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그가 처음 상상했던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꿈에서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은 그의 이전 계획을 무시하고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임신했음을 인정한 것처럼 빠르고 단순하게 순종하기로 동의했습니다(마태복음 1:24, 누가복음 1:38).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하려면 영적으로 둔하고 율법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사람은 천사의 메시지가 율법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천사의 메시지를 환각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의 영성은 율법 그 자체보다 법을 제정한 자의 뜻을 더 중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교양 있는 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마태복음 15:3-9)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꿈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가라고 명령했을 때 요셉은 순종하여 도망쳤습니다(마태복음 2:13-14). 요셉의 입장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그 명령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망치는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강력한 통치자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사도행전 1:6).
요셉이 꿈을 통해 상식적인 생각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성이 당시 사람들의 지배적인 종교적 생각보다 더 깊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과 협력하는 단순한 한 사람을 봅니다.
우리는 종종 성탄절을 그저 편안함과 성스러움을 추구하며 축하하는 날로 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주로 가족과의 아늑한 만남을 떠올리는 시기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는 어린이날과 같은 휴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대식 성탄절에 요셉이 어울릴까요? 요셉은 분명 예수님이 후에 칭찬하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으며(마태복음 18:4), 그의 단순함과 의로움은 천진함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격동의 시기에 예수님을 양육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안전한 곳에 껴안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가족을 위험 속에서 인도하기로 선택한 아버지의 순결함과 순종을 기억한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요셉은 로마 통치자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길에서 그는 자신의 가족처럼 정권에 위협이 되는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못 박힌 사람들을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황제의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아기 예수님은 요셉이 사는 곳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복잡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이는 요셉에게는 정말 곤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 부부는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가까이 있던 친척들과 함께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를 돌보는 일을 도운 친척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여관에 빈방이 없었을 때, 요셉은 더 좋은 곳으로 갈 돈이 없었습니다(누가복음 2:4-7). 후에 또 다른 정치적 상황과 다른 꿈의 메시지로 인해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와 함께 애굽으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왕좌에 위협이 될 아이가 자라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 아이를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요셉이 위협을 느꼈을 때, 두려움, 고뇌, 무력감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대규모 폭력(내전의 경우와 같이)을 겪은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가능성과 함께 그들을 보호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 요셉의 처지에 놓였다면 스스로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신앙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어떤 이들이 그렇듯 목숨을 끊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더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도 했을까요? 수동적이거나 운명이라고 포기해버리는 태도를 보일 유혹이 있었을까요? 실향민들은 위험이나 슬픔, 권태, 의미의 상실, 가중한 책임, 심지어 더 무거운 부담감 등의 감정이 결합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희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직면한 고난과 아름답게 조화된 요셉의 영성입니다. 그는 분명히 천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마태복음 2:13). 이는 명령이자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요셉과 그의 가족은 돌아갈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통치자들은 요셉이 받은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그의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결정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결정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천사는 요셉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했습니다(마태복음 2:19-20).
다시 한번, 요셉은 매우 위험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실향민이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입니다. 제가 살았던 실향민 수용소에서 일부 남성들은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서 일상생활을 재개하기 위해 떠났는데, 그들의 조급함은 결국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유대가 아닌 갈릴리에 살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안전도, 완전한 안도도 없었습니다. 헤롯은 죽었지만 그의 아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21-23절). 하나님은 그때 모든 악인을 멸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어떤 면에서 요셉 시대보다 더 나아졌습니다. 인권 단체는 약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여전히 타락했으며 여전히 완벽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강제 실향민 수가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전쟁, 지진, 화산 폭발, 허리케인, 전염병 및 통치자의 결정은 우리의 안전과 삶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는 것과 가장 힘든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시편 23:4-5). 또한, 지상에서 그분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로써 우리가 가야 할 길(시편 32:8)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 세대를 위한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교파적 전통과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초월하는 영성을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육신의 올무를 조심스럽게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하게 하듯이, 위험과 불안, 심지어 죽음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복잡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요셉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 하나님께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고, 쉽든 위험하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Acher Niyonizigiye는 Bujumbura International Community Church의 목사이자 리더십 비영리 단체 Greenland Alliance의 공동 창립자이자 Be Transformed and Gloryify God with your Life의 저자입니다.
번역: Juhyun Park
개인, 소모임 및 가족이 함께 대림절에 묵상할 수 있는 재림의 복음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자들과 저자들이 제공합니다.
2021년 11월 29일 묵상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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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21:25-36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조용히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에서부터 아래로는 성난 바다에 이르기까지 피조물 전체가 경련을 일으킬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보고 절망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숨을 곳도, 마침내 정의를 이루실 분에게서 벗어나 찾을 만한 안전은 없을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분 안에서 말고는 아무 데도 없을 것입니다. 열국이 고뇌하는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숨지 말고 서서 머리를 들라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그가 이 땅에 돌아오실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사건이 속히 그리고 확실히 임할 것을 잘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세대”가 누구인지 큰 논쟁이 있습니다(누가복음 21:32). “이 세대”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몰락은 다가오는 종말의 신호이자 전형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아마도 다가오는 징조를 보게 될 사람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나무에 잎이 돋으면 벌써 여름이 온 것을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징조를 보게 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이 자연의 이치보다 더 확실하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동안, 곧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교회 배경에 속해 있는 이들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재난에 대해 알아야 하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 삼아야 한다는 부르심을 기대할 것입니다. 예,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또 다른 어떤 교회 배경에 속한 이들은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정의를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기대할 것입니다. 예,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1장의 이 특별한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심하고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결말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강렬합니다. 그래서 스프링 덫 같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누가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요? 광란의 파티든 과도한 불안이든, 세상의 충동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짓눌려 있는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것,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그 길에서 속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실도피도 걱정도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현실도피는 현실을 사라지게 하지 못합니다. 걱정만으로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조심하려면, 참으로 오고 계시는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때 당신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레이첼 길손(RACHEL GILSON) 신학 개발과 문화를 위한 Cru의 리더십 팀에서 일하고 있으며, Born Again This Way: Coming Out, Coming to Faith, and What Comes Next 의 저자입니다.
2021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제공하는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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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누가복음 2장 10절
이 말씀으로 천사는 놀라운 복음 선포를 시작했습니다. 구주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이신 주님이 마침내 탄생하셨습니다!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희생,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영생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절을 단순히 휴일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이 묵상을 통해 대림절이 우리에게 복음에 관한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많은 핵심 교리들은 대림절에 관한 전통적인 본문과 주제들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이번 대림절 주간에 성육신의 신비를 되새기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되새기며, 죄와 회개의 필요성을 되새기며, 구원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기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되새기길 바랍니다. 찰스 웨슬리가 좋아했던 찬양처럼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는 '새로 나신 왕'을 축하하기 위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기에 (누가복음 2:10) 대림절 주간을 통해 주변의 이웃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나눕시다.
4주간의 대림절 동안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처음 본 목자들처럼,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임을 믿습니다.
켈리 B. 트루이요, 편집인
2021년 12월 4일 묵상본문
오늘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3:9-13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고 다시 보고 싶어 한 적이 있습니까? 이처럼 오랫동안, 끝 모르는 이 팬데믹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직접 보고, 인사하고, 껴안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줌과 페이스타임으로는 이 기나긴 시간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방, 같은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그들을 보게 될 날을 갈망합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직접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주님 안에 굳게 서“(3:8) 복음을 구현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디모데의 확신 있는 소식을 듣고서 매우 기뻐합니다. 그는 직접 방문하기를 원하지만, 당분간은 이 편지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마주 볼 때까지 복음을 몸소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12절).
우리의 이 갈라진 세상에서 이런 사랑을 구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속의 가치들이 숨어들어 와서 기독교의 사랑과 복음의 증언을 대체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열된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을 넘치도록 사랑하라는 바울의 이 시의적절한 권고는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12절).
복음의 영향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범주에 넣어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통해서 살아남습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보기 싫어한다면, 우리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너무나 고대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돌아오심을 기다릴 때, 바울은 신자들에게 타협과 죄를 찬양하는 사회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하라(13절)고 촉구합니다. 재림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거룩한 삶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도전합니다. 서로 참아 주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내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돌아오심을 생각하며 이렇게 살라고, 곧 그들의 제자로서의 현재의 삶이 미래의 소망 때문에 빚어지게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얼굴을 마주하고 뵙게 될 날을 갈망합니다. 그리스도 강림은 언젠가 우리가 그렇게 될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사랑과 거룩함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속히 오십시오, 주 예수님!
매튜 D.킴(MATTHEW D. KIM)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의 George F. Bennett Professor of Preaching and Practical Theology의 교수이며, Preaching to People in Pain의 저자입니다.
2021년 11월 30일 묵상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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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4-25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돌아오심에 대해 가르치시고, 여러 비유를 들어 “천국이 어떨지”(25:1) 설명하십니다. 25:31-46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마도 가장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심판을 받는 두 집단 모두를 놀라게 한 예상 밖의 판결일 것입니다. 두 집단 모두 심판받는 것 자체는 항의하지 않습니다. 결국, 인자는 영광에 둘러싸여 오셨습니다. 모든 천사가 그의 시중을 듭니다. 그의 보좌조차도 영광스럽습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심판하시는 이의 권위를 여실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자기 앞에 모든 민족을 불러 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와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심판의 사실에 관한 것도, 재판관의 권리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도, 왼쪽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심판의 증거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양들은 영광의 왕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를 섬겼다면 틀림없이 알았을 거야. 그는 틀림이 없으신 분이시잖아. 염소들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양들과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를 거절했지? 그렇게 헸던 기억이 도무지 없습니다.
이제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의문을 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항상 당신의 형제들, 자매들과 당신을 일치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결연 이상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동일시입니다. 누가 주님의 형제자매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복음 12:50). 지위, 민족, 성별, 국적에 상관없이 그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면,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여 보상이나 처벌을 받는 ‘행위-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임금 예수’에 대한 충성 또는 반역의 드러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게 될 곳은 둘 뿐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란 쉬울 것입니다. 그의 권능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것이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성탄절에 그는 거의 변장을 하고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심지어 오늘도 주님은 허약하고 어리석은 당신의 사람들과 동일시하십니다.
립 서비스는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내어 맡기는 참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충성하게 만들고 또한 그 결과로 그에게 순종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그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더 나은 증거는 심지어 기적과 예언(7:21-23)보다 낮고 천한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신 분을 우리가 믿습니까? 두 번째 계명 없이는 대계명도 없으며, 첫 번째 계명 없이는 두 번째 계명도 없다고 하신(22:37-40) 분을 믿습니까? 진정한 충성은 결국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께 우리의 믿음을 내어 맡깁시다.
레이첼 길손(RACHEL GILSON) 신학 개발과 문화를 위한 Cru의 리더십 팀에서 일하고 있으며, Born Again This Way: Coming Out, Coming to Faith, and What Comes Next 의 저자입니다.
2021년 12월 3일 묵상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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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한계시록 22:12-20
성경은 이 기도로 끝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이것은 여러 성탄 찬송에서 들리는 기도입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 강림하셔서….”
가장 초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를 셈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바울이 이 기도의 아람어 원어, 마라나타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 주님, 오십시오!”(고전 16:22)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고린도의 수신자들이 이 아람어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바울이 기대한 것은, 이것이 초기 기독교 예배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에서 이것은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입니다. 12절에서, 그리고 다시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곧 가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나오며(2:5, 16, 3:11, 16:15, 22:7, 12, 20, 20을 보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약속은 응답을 불러일으킵니다. “오십시오!”
우리는 17절에서 이 응답을 처음으로 듣습니다. 이것은 ‘성령과 신부’의 기도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을 통해 예배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영일 것입니다. 신부는 성령의 기도에 동참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신랑의 도착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신부는 단장하고 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19:7-8). 신부는 그냥 교회가 아니라,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교회, 주님을 고대하고 준비하는 교회입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큰 소리로 낭독하는 요한계시록을 상상해야 합니다. 낭독자가 그[“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문장을 읽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22:17). 이어 온 회중이 이 기도에 동참하여 큰소리로 외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그들의 진심 어린 기도를 통해 그들도 어린 양의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17절 후반부의 “오십시오”라는 단어의 용법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제 ‘와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수 샘물’을 받으라고 초대받은 사람은 바로 듣는 사람, ‘목마른 사람’입니다. 생명의 물은 새 하늘과 새 땅(21:6)에, 새 예루살렘(22:1)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샘물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도 이미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의 마지막 오심에 앞서 그가 이미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맛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를 만났기 때문에 그를 기다립니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신약학 명예 교수이자 요한계시록 신학을 비롯한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
2021년 12월 2일 묵상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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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말씀: 요한계시록 21:9-22:5.
영국에서 스코틀랜드로 이사했을 때, 내가 알게 된 한 가지 어려움은 겨울철 햇살이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중충한 날이면 전혀 빛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약간 우울한 정도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날씨에 심각한 영향을 받아서 햇빛과 비슷한 램프라도 켜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신체와 정신 건강을 위해 햇빛에 의지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해를, 그리고 때로는 달을 숭배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왜 화창한 날씨는 우리의 기분을 북돋아 줄까요? 왜 많은 사람이 햇볕 쬐는 것을 좋아할까요? 과학은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곧 그 거리 때문에 가능해진 빛과 열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에게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 창조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피조물을 매개로, 피조물 중에 있는 햇빛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새로운 창조세계에서는 지금 우리가 대낮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 한가운데 살 것입니다. 그리하여 밤은 없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빛으로 가득 찬 도성을.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은 도시를 상상해 보십시오(11절). 19-20절에 열거된 수많은 색상의 온갖 보석에 반사되는 빛을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할 수 있다면,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된 도성으로 들어오는 빛줄기를 상상해 보십시오(18, 21절). 멀리서 이 도성을 바라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도성은 높은 산 위에 서 있고(10절) 사방에 빛을 비춥니다. 이 도성은 세상의 빛입니다. 이 도성은 사람들이 기대어 사는 빛입니다.
이제, 성경의 인물이나 다른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 넣은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창문 그대로도 늘 아름답지만, 태양이 그 창문을 비추면, 그 창문은 영롱하게 빛납니다. 그 창문의 강렬한 색깔이 빛을 발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의 사랑스러움이 모두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진정한 빛깔들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빛이 그것들의 모양과 색깔, 창조된 현실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밝혀서 변모시킬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빛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상징입니다(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이 세상에서 우리 삶에 이미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밝혀 주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그 빛 속에서 걸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그 빛을 보면, 그것이 우리가 빛의 도시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 가져다드릴 수 있을까요? 저 영원한 도성의 삶에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24, 26절)?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신약학 명예 교수이자 요한계시록 신학을 비롯한 여러 책의 저자입니다.
2021년 11월 28일 묵상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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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디도서 2:11-14; 요한계시록 1:7-8
우리는 끝에서 시작합니다. 구유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경배의 예물을 드리는 동방박사나 놀라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자들과 함께 시작하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를 방문한 엘리사벳과도, 꿈속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난 요셉과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합니다.
순서가 뒤죽박죽인 이야기책처럼, 그리스도 강림은―그리고 사실 기독교 교회력 전체는―끝에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강림은 익숙하고, 즐겁고, “그 뒤로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나는 결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강림은 아름답고 두려우며, 멋지고 무섭습니다. 그리스도 강림의 결말은 우리 인간 이해의 한계 저 너머까지 확장됩니다. 그는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강림은 종말과 함께 시작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 그의 의로운 심판, 그의 궁극적 승리와 영원한 통치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강림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우리의 감상적 정서에 충격을 안겨 주며, 우주의 훨씬 웅대하고 더욱 광대한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구유에 누워 계셨고 십자가로 걸어가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장차 보좌에 앉으실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그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빌립보서 2:6-11).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환상으로 본 이사야의 반응처럼, 그리스도 재림의 경이로움과 영광을 고대하는 우리의 유일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이사야 6:5).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회개와 겸손함으로 무릎 꿇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도마처럼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한복음 20:28).
그리스도의 재림은 예수를 따르는 것은 곧 복종과 예배로 주님이신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약속된 다시 오심―“복된 소망”―에 대해 고대와 열망으로 반응합니다. 이 고대와 열망이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을 빚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맞서 “아니요”라고 말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살아갑니다(디도서 2:11-14).
우리가 끝에서 시작할 때, 그리스도 강림은 우리를 올바른 방법으로 일깨웁니다. 안일한 기독교와 익숙한 제자도에서 벗어나라고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깊은 회개와 경건과 소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이러한 종말론적 전망을 갖고서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유에 올바르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신 분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실로 우리의 소망,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켈리 B.트루이요(Kelli B. Trujillo)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프로젝트의 편집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