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주: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소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보내는 강림절 묵상말씀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2, 2020
Illustration by Jared Bogg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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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 위대함과 은혜

오늘의 말씀: 마태복음 1:1–17

우리는 강림절에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경배하면서 빛나는 별 하나로 동방 박사를 구유까지 기적으로 인도했던 그분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금, 유향, 몰약의 선물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밤에 양 치는 목자들에게 노래하는 천상의 천사들에게서 그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의 계보를 통해 예수님을 묵상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용사이자 진정한 예배자인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보에는 인물들의 위대함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혈통에는 위대한 지도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압 사람 룻, 밤의 여인 라합과 같이 예상치 못한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이 계보는 훑어보고 건너뛰어도 되는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역설적 구절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혈통이나 명예만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범죄자나 버림받은 자들까지도 품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가장 보잘것없는 장소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은 또한 예언 한 바대로 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과 예언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계보는 이름을 나열한 단순한 목록 이상이며, “이새의 줄기에서 올라온”(이사야 11:1) 그리스도의 성취된 예언과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의 후손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창세기 22: 17-18)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계보에 의지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서 인내할 때 이 말씀이 여러분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보잘것없는 삶을 유익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소망 없는 세상을 유익하게 하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계보에 의지하여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을 떠올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을 열망하고 기대하며 소망으로 기다립시다.

—Rachel Kang

마태복음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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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음의 성경 말씀 속 인물들을 보십시오. 다말 (창세기 38장), 룻 (룻기 1:1-5, 4:13-22), 라합 (여호수아 2장), 다윗 (사무엘하 23:1-4), 그리고 아브라함 (창세기 22장, 로마서 4:1-3). 예수의 계보를 통해 깨닫는 그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집니까?

월요일: 기다려라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1:5–25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집 문 앞까지 빠르게 배송되는 매우 빠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유의 말처럼 “기대하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영적 삶의 기초입니다.”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누가복음 1:7).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면서 주님이 그를 잊은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5-25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아들을 주리라. 이 소식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어서 사가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응합니다. 사가랴는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습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가랴는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9개월 동안 천사의 후두염에 걸립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통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13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오랜 세월 동안 실망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인내하며 기도했습니다. 예상대로 일이 전개되지 않을 때도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수치와 실망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들도 완벽히 기다리지는 못했습니다. 20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다.” 사가랴의 믿음이 부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강림절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오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봅니다. 의심하거나, 우울하거나, 낙담하거나, 포기하고 싶을 수 있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좌절감을 줍니다. 오랜 기다림이 응답 된 기도로 끝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응답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좌절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강림절에는 이토록 인간의 고통과 신성한 은혜가 공존하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모두 견디며 기다립니다. 이 땅에서든 앞으로 다가올 생이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우리도 기다립니다.

—Rich Villodas

본 글은 Rich Villodas의 2019년 12월 8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누가복음

1:5-25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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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와 어떤 면에서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어떤 점을 보여줍니까? 고통에 대해, 기다림에 대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화요일: 역사의 일부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1:26–38

지금은 많은 사람이 마리아가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인구가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온 십 대 소녀였습니다. 당시 농민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도 아마 문맹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분에 맞게 가난한 노동 계급 남자와 결혼할 거라 예상했을 겁니다. 배고픈 날도 종종 있는 풍족하지 못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평범한 인생을 상상했을 겁니다.

만물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어머니를 선택하기로 할 때, 부와 지위를 가진 여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아주 작은 마을에서 사는 농민이며 문맹인 한 소녀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보 (마태복음 1:1-17)는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반드시 특출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택하신 것을 보면, 큰 도시에 사는 부자이거나, 고등 교육을 받았거나,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범한 우리도 이 영원한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 자격은 무엇입니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네가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이에 마리아는 마음을 열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역사의 일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할 일은 라고 대답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순종해야 합니다.

최근에 저는 성령님을 제 삶에 초대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님, 당신이 저를 통해 이루시는 사역에 순종하겠습니다. 안락함, 세상의 인정과 존경, 권력, 그리고 제 삶을 통제하려는 열망을 모두 버리겠습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결정에 순종했던 근본적인 마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안락함, 세상의 인정과 존경, 권력과 통제를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남은 생 동안 그녀의 명예에 오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구타 당한 후 로마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는 마리아는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5). 그러나 마리아는 라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성령 하나님, 당신의 사역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원한 역사 속에서 우리 또한 주어진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Ken Shigematsu

본 글은 Ken Shigematsu의 2019년 12월 25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누가복음

1:26-38

을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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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처럼 여러분을 통해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순종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초대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수요일: 미래가 무너질 때의 소망

오늘의 말씀: 마태복음 1:18–24

요셉에게 인생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오래전에 살았던 이 목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마태는 그가 의롭고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그가 동정심이 많았으며 자신의 미래가 무너져도 마리아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불안한 상황에서 마리아의 남편과 예수의 아버지가 되어 의무를 다하기 위해 희생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집, 직장을 뒤로하고 애굽으로 떠나 자기 자식이 아닌 아기를 보호했습니다 (마태복음 2:13-15).

성경에 기록된 그의 선택을 통해 요셉이 어떤 인물인지 엿볼 수 있지만,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천사의 놀라운 소식은 그에게 무슨 의미였으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요셉은 결혼과 가족을 갖길 갈망했을까요? 그는 마리아를 동경했을까요?, 아니면 부모가 중개한 약혼이었을까요? 요셉이 처음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상심했을까요? 아니면 화가 났을까요? 아니면 파혼으로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것이 두려웠을까요?

요셉이 인생에서 무엇을 소망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임신한 약혼자, 자기 자식이 아닌 곧 태어날 아이, 사람들의 비난과 중상모략을 겪는 인생을 분명 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천사의 이 놀라운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는 정말 믿었나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완전히 믿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도 완전히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남녀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같은 방식인데, 이러한 믿기 힘든 상황에서 아마도 요셉은 기도하면서 계속되는 의심과 씨름했을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마가복음 9:24).

요셉은 자신의 삶과 결혼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삶의 여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요셉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지금의 모든 고통과 어둠과 고된 실망을 반전시킬 위대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 예수에게 평범한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그의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처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탄생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과 가족, 미래를 신실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이 아기가 요셉의 삶에 큰 실망과 격변을 가져다주었지만, 이 아기는 세상의 참된 소망이었습니다.

—Catherine McNiel

마태복음

1:18-24

절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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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요셉의 이야기에 떠올려 보십시오. 요셉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요셉의 신실함과 소망에 통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목요일: 자비와 정의의 찬양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1:39–56

누가복음 1장 39-56절에서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과 함께 있기 위해 고향을 떠납니다. 마리아가 그곳에 도착하면 엘리사벳도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자 복 중에서 아기가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너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한 번 더 확증하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만남으로 인해 마리아가 기쁨으로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활기차게 기쁜 마음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집중합니다. 마리아는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고 말합니다 (50절). 그리고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54절)라고 찬양합니다.

우리는 자비라는 단어를 고통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제한하여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비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비는 동정심을 뜻하기도 하지만, 또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충성과 맹렬한 사랑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정의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1-53절). 마리아는 찬양을 통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정의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잘못된 모든 것을 취하여 바로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일이 거꾸로 행해집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고, 마지막이 첫 번째가 됩니다. 정의는 망가진 것을 취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간절함과 기대를 갖게 하는 강림절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을 바로잡으시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양의 핵심 주제입니다. 주님, 바로 잡으시옵소서.

마리아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가 덮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죄는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강림절이 전하는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성육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신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의 찬양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잡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우리는 찬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Rich Villodas

본 글은 Rich Villodas의 2019년 12월 5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누가복음

1:39-56

을 깊이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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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강조하는 마리아의 찬양이 오늘날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소망을 갖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금요일: 빛과 왕

오늘의 말씀: 이사야 9:2–7, 40:1–5; 누가복음 1:57–80, 3:1–6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으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가랴는 그의 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네가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누가복음 1:76-79).

세례 요한이 성인이 되어 정확히 그 예언대로 행하는 것을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3:3-6)

길을 준비하기 위해 계곡, 언덕, 도로를 닦는다는 이사야의 이러한 생각은 고대 시대에서 왕족을 맞이하기 위한 문화에서 행해지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한의 사역은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왕이 오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기의 탄생에 관한 사가랴의 예언에는 이사야의 구절을 인용한 말이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9:2). 사가랴의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이사야 말씀에 나온 오실 왕의 약속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6-7절)할 것이라는 구절은 이와 비슷한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싶지만, 침례 요한의 이야기와 사가랴와 이사야의 말씀은 왕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 땅에 인간이 갈망하는 평화와 기쁨이 없을 거라고 분명히 강조합니다. 침례 요한은 실제로 이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이 흑암을 뚫고 들어오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역했습니다.

—Jay Y. Kim

본 글은 Jay Y. Kim의 2018년 12월 9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누가복음

1:57-80,

이사야

9:2-7, 40:1-5,

누가복음

3:1-6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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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예언에서 당신에게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이 구절은 강림절의 소망을 어떻게 전달합니까?

토요일: 만질 수 있는 하나님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2:1–7

고대 세계의 신들은 우리의 필멸의 존재와는 다른 차원에서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에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신을 경험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고대 사람들은 신성한 나무 나 산, 거룩한 사원이나 도시와 같은 신성한 장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하늘로 향하는 문처럼 양쪽 영역을 연결하는 곳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날에 이 거룩한 곳으로 가서 경건한 순간에 신성과 평범함이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신에 관한 이야기와 신성과 인류의 결합은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창조주께서 진흙 투성이, 먼지 투성이이며, 육체적이고 감정적이며, 아름답지만 끔찍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누가는 출생 시간과 장소를 주의 깊게 기록하는 조산사처럼 하나님의 탄생이 특정 장소, 즉 베들레헴 마을, 특정 가족, 다윗의 집에서 특정 사건 (로마 인구 조사)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으로, 특정한 여성에게, 정확히 여기 그리고 정확히 지금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지역적 세부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만, 성경을 읽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누가의 말은 혼란을 야기시킬 것입니다.

성탄절 밤에 하나님께서는 옛 신들처럼 구름이나 폭풍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만질 수 없는 힘은 거룩한 거울을 통해 간신히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우리 모두가 왔던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어머니가 몇 달 동안 그를 품으셨고, 고통스럽게 몇 시간 동안 수고하여 연약하고, 주름지고, 젖은 상태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지쳐 지금은 잠들었지만 곧 깨어나고 배고프다고 울기도 할 겁니다.

이것은 누가가 전한 정말 믿기 힘든 소식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육체를 갖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매년 기억할 수 있도록 성탄절 날 작은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밤에 마을을 깨우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다른 아기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장소나 특별한 영적 영역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흙을 밟고 이 땅에서, 우리 가족 안에서 성육신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아도 충격적인 방식입니다. 고대 세계와는 완전히 달리 더는 신성한 것과 평범한 사이의 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저분한 일상의 삶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Catherine McNiel

누가복음 2:1-7 묵상하기

. 누가는 이 사건의 공간과 시간에 기록하기 위해 세부 사항을 고려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강림절에 대해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기고자:

Rachel Kang은 산문, 시 및 여러 작품의 저자이며 온라인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 Indelible Ink Writers의 제작자입니다.

Jay Y. Kim은 WestGate Church의 담임 목사이자 Vintage Faith Church의 기숙사 교사이며, Analog Church의 저자입니다. 그는 실리콘 밸리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Catherine McNiel은 작가이자 설교자입니다. 그녀는 All Shall Be WellLong Days of Small Things의 저자입니다.

Ken Shigematsu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에 있는 Tenth Church의 담임 목사이며, My Everything and Survival Guide for the Soul의 저자입니다.

Rich Villodas는 뉴욕 퀸즈에 있는 다인종 교회 New Life Fellowship의 담임 목사이자 The Deeply Formed Life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둘째 주: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보내는 강림절 묵상말씀

Christianity Today December 5, 2020
Illustration by Jared Boggess

일일 묵상으로 이동: 일요일 | 월요일 | 화요일 | 수요일 | 목요일 | 금요일 | 토요일

일요일: 하나님이 보시는 것

오늘의 말씀: 출애굽기 1:1–3:10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야기는 수많은 세대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그 핵심은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야심 많고 탐욕스러운 바로왕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혹사시킨 노예로 살아가던 멸시받는 소수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용하면서도 이스라엘 남성들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키면서도 그들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이야기 속의 여성들, 즉 산파, 어머니, 딸, 시녀, 바로의 딸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바로의 잔인한 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협력하여 아기 모세를 구합니다. 그들은 소망을 갖고 행동하며 정권 앞에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여성들은 담대한 행동으로 한 생명을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모세의 어머니는 아기가 잘 생긴 것을 보고 그를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모든 자녀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대목입니다. 아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는 아기를 갈대 상자에 담았습니다. 상자 (또는‘바구니’)는 물로 인한 죽음에서 노아의 가족을 구출하신 하나님을 상기시켜줍니다. 즉, 살아남은 모세를 통해 바다 (또는‘홍해’)를 건너 탈출할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딸이 상자를 발견하고 아기가 우는 걸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위험에 처해있던 이 아이에게 순식간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염려하신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백성들을 헤아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것도 그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강림절의 핵심은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시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선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무관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한결같이 행하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7장). 이 언약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담한 구원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야기 속의 여성들은 하늘로부터 행동하라고 명하는 명확한 부르심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바라보고 그분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들은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Carmen Joy Imes

출애굽기

1:1

3:10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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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4:17, 13:17-14:31 읽기.) 1장과 2장에 나온 여성들은 어떻게 소망을 구현합니까? 출애굽기는 강림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돕습니까?

월요일: 폭풍 속의 평안

오늘의 말씀: 시편 46편, 112편

시편 46편은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2-3절)라고 확신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와 비슷하게 우리가 현재 사는 세상은 전염병, 경기 침체, 인종차별, 산불, 허리케인, 홍수, 팽팽한 선거 등 많은 것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갈피를 잃고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놀라운 대목은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절). 문제가 해결된 후에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국가의 소란과 자연재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동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구절은 폭풍이 치는 배 위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8:23-27). 대단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평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초월적 평안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아는 지식은 우리가 삶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마지막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7, 11절). 그는 폭풍 속에서 우리의 요새가 되십니다.

우리 자신에게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문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허둥대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우리는 소망을 품습니다.

이것이 강림절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으로 문제 많은 인류의 역사 속으로 오셨습니다. 로마가 불공정한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고, 우상 숭배가 가득했던 고통 많은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마지막 심판을 위해 여전히 수많은 문제로 백성들이 고통받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4, 7절) 시편 112편에서 이렇게 말하듯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확신을 갖고 폭풍을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Carmen Joy Imes

시편

46

, 112

편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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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에서 어려운 시기에 평안과 소망에 대해 어떻게 기대하게 합니까?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화요일: 놀라운 변화

오늘의 말씀: 이사야 2:1–5

이사야서 2장은 산 꼭대기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 환상 속의 산은 모든 산 위에 뛰어나 ‘만방’이 그리로 모여드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산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며, 사람들 간의 갈등을 종식 시킬 결정을 내리실 것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상한 장면입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전이 자리 잡은 시온산은 올리브 산과 같은 더 높은 고지 한가운데에 자리 위치한 낮은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환상이 현실적인 지리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예루살렘을 신실함도, 진실함도, 적합한 정부도 없고 취약한 자를 돌보지 않는 창기와 같은 도시로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1:21-23). 그러나 이사야는 도시가 회복되고 다시 ‘신실할 고을’, ‘의의 도시’ (26절)라고 다시 불린다는 약속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사야가 놀라운 두 번째 변화에 대한 비전을 언급합니다 (2:1-5). 첫 번째 변화를 감안할 때,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비전은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 기도 모임에서 동료 한 명이 현재 우리가 건강 관리 위기, 인종 위기, 정부 위기, 경제 위기라는 네 배에 달하는 거대한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현실에서 답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이사야의 환상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모습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약속에는 언제나 ‘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고후 1:20). 그곳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성취될 것이라고 보장했습니다. 이사야가 백성에게 격려한 것처럼 하나님의 비전과 약속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갑시다.”

—John Goldingay

이사야

2:1-5

깊이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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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깊은 갈망과 궁극적인 소망을 말합니까? 그리스도의 초림과 기다리는 재림을 떠올리며 강림절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십시오.

수요일: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오늘의 말씀: 이사야 40:1–11

지난 20-30년간 이스라엘 국도청은 전국에 엄청난 고속도로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외곽에서 예루살렘 도시 중심부까지 연결된 터널과 다리와 텔아비브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도시 계획이 진행되었습니다. 문제는 1,900년 전의 로마 무덤의 일부를 훼손시키는 공사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반대시위가 촉발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예루살렘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고속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3절).

기원전 587년 여름, 하나님께서는 결국 예루살렘 백성들을 떠나셨습니다. 백성들의 부정함으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에스겔 10장의 묘사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자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도시를 완전히 황폐화시켜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들었고, 미스바의 다른 곳에 지방 본부를 두었습니다.

그 이후 반세기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은 보좌관 중 누군가에게 고가도로와 지하도가 있는 고속도로를 세우고 흩어져있는 백성을 데리고 도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추방 되었던 사람들도 돌아와서 도시를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에스라서는 그들이 어떻게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돌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후 500년 동안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관계는 나아졌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들은 제국 세력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독립을 갈망했습니다.

서기 30년에 세례 요한이 와서 이사야 40장을 언급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 깨끗하게 씻겨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3). 요한은 이러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을 갖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라고 명 받았습니다.

결국, 매해 강림절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0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가 오고 계십니다.

—John Goldingay

이사야 40장 1-11절 묵상하기

. 먼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다음 세례 요한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비추어 다시 읽으십시오 (마태복음 3장). 다양한 관점으로 이 구절을 볼 때 눈에 띄는 점은 무엇입니까?

목요일: 대담하고 위험한 기도

오늘의 말씀: 이사야 64:1–9

우리는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 당신 앞에서 산이 진동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이사야 64장에 기록된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이 기도문은 페르시아인들이 중동의 바빌로니아 통제를 종식시킨 후의 시기임을 암시합니다. 문제는 유다가 이 권력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을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강대국을 이기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때가 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는 그 점을 강조합니다. 모든 상황이 변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서 해결해주십시오, 주님!

그러나 다음 이사야 6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노하시며 너에게 용기가 있구나! 라고 본질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4장에서 유다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분노로 응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하늘을 가르고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복음서는 성육신과 관련하여 그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침례 (마가복음 1:10), 예수님의 변형 (마가복음 9:7), 그리고 처형당하기 전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2:28-29)에서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임재와 관련하여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왜 모든 것이 여전히 똑같습니까? (베드로후서 3:4). 그들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길 바랍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도 대립적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그는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이 세상이 이전에 물로 멸망하였고, 언젠가 다시 불로 심판받을 거라고 상기시킵니다 (5-7절).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큰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보잘것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현재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권력의 편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64장처럼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권력을 정리하고 불의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어떤 일을 하실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내려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John Goldingay

이사야

64:1-9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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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12도 읽기.) 64장 1절에 표현된 간절함을 느껴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다스리시는 64장 1-9절 말씀에 대한 이해가 당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당신은 하나님께 어떻게 대답하고 싶습니까?

금요일: 빛과 생명

오늘의 말씀: 이사야 9:2; 요한복음 1:4–5, 9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흑암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항상 어딘가에 불이 켜져 있으므로 어딜 가더라도 시야가 확보됩니다. 그러나 우리 중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도시의 불빛 넘어 깜깜한 흑암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얼굴 앞에 있는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상태가 흑암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9장 2절에서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죄의 어둠은 너무 깊고 완전하여 당신을 무력화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은 확신을 갖고 그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길을 잃을 것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어둠은 죄에서 비롯되는 맹목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탄절에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어둠 속을 걸었던 바로 사람들이 “큰 빛을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빛을 밝힌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비추는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과 새 비전과 의로운 새 삶으로 어두운 죄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 설명하는 모든 복음서가 이사야의 이 예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의 예로, 요한이 예수님의 탄생, 즉 성육신에 대해 말할 때 이 빛에 관한 상징을 언급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한복음 1:4-5, 9).

예수님은 진정한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빛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저 나무에 조명을 걸고 집을 장식하는 날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준 훨씬 더 강력한 빛을 작게나마 상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700년 전에 그것을 보았습니다. 이천 년 전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나던 바로 그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빛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회개하고, 이 빛을 믿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전하는 빛의 메시지입니다.

—Thabiti Anyabwile

본 글은 Thabiti Anyabwile의 2017년 12월 17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이사야

9:2,

요한복음

1:4-5, 9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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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둠과 빛과 삶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의 예언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된 소망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토요일: 우리를 위해 오신 분

오늘의 말씀: 이사야 7:14; 9:6–7

이사야 9장 6-7절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탄생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아들을 ‘기묘한 상담자’라고 묘사합니다. 기묘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기묘한’ 일과 같이 기적을 묘사하기 위해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상담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훌륭하고 기묘한 상담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이사야 7장 14절에서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일한 아이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강력하고 강하며 약점이 전혀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유에 있는 아기였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을 대변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이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을 초월한 시대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의 백성들을 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03편 13절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을 가졌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듣습니다. 그분은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가진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평강의 왕’입니다. 매튜 헨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평강의 왕으로서 그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과 양심에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의 나라가 완전히 세워지면 사람들은 더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입니다. 그분의 조언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해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왕의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성탄절에 태어난 한 아기가 아닙니다. 그분은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면 그분은 우리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지혜, 모든 능력, 아버지의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십니다. 바로 이 분이 세상이 기다리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Thabiti Anyabwile

본 글은 Thabiti Anyabwile의 2017년 12월 17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이사야

7:14, 9:6-7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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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에 띄는 구절이나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이사야의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당신에게는 어떤 소망을 줍니까?

기고자:

Thabiti Anyabwile은 워싱턴 DC에 있는 Anacostia River 교회의 목사이며, Exalting Jesus in Luke 등 다수의 저서의 저자입니다.

John Goldingay는 Fuller 신학교의 구약학 수석 교수이며, 구약 전체에 관한 The First Testament를 번역했습니다.

Carmen Joy Imes는 Prairie College의 구약 교수이자, Bearing God's Name: Why Sinai Still Matters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강림절 : 삶의 소망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보내는 일일 묵상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8, 2020
Jared Boggess

힘든 시간 속에 소망을 품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망은 단순히 영원히 낙관적이거나 ‘희망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감정을 넘어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에 대해 강력히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무겁고, 인내해야 하며, 목적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바로 그 근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15:13). 이러한 현실은 좋은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소망은 어둡고 어려운 시기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Jay Y Kim이 ‘소망: 기대되는 도약’에서 말했듯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품는 소망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두려움, 불안, 의심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합니다. 혼돈 속에서도 평화를 붙들며 평안함을 유지합니다…폭풍 같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이미 일어난 대단한 일과 앞으로 일어날 더 위대한 일로 인해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CT의 2020 강림절 프로젝트는 성경 말씀 전반에 걸쳐 소망이라는 주제를 탐구합니다. 매일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했던 소망을 되돌아봅니다. 첫 번째 재림, 즉 메시아의 도래를 가리키는 예언과 소망의 약속을 살펴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요한복음 1:14, 누가복음 2:12), 즉 성육신을 통해 소망의 기적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하든 일상 속에서 인내심, 확신과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미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되돌아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산 소망’ 또는 새생명성경에서 번역하듯 ‘큰 기대’입니다. 이천 년 전에 태어난 아이가 언젠가 다시 영광스럽게 돌아와 이 땅에서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것이고, 그의 나라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Kelli B. Trujillo, 편집자

첫째 주: 그가 영광스럽게 다시 올 것입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보내는 강림절 묵상말씀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8, 2020
Illustration by Jared Bogg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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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그 사이에서

오늘의 말씀: 요한계시록 1:4-9, 19:11-16, 21:1-5, 22:27, 22:1-5

요한계시록의 첫 장 시작부터 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완전히 초월하여 눈을 들어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1:8).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리라” (1:5, 7-8). 요한은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너무 놀라 “죽은 자 같이” (17절) 되었다고 언급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경이로운 비전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두 영광스러운 구절의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의 삶과 그의 서신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간략한 묘사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9절)라고 일컬었습니다. 요한은 수감 중에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더 악화할 압력과 박해에 직면한 고통받는 교회에 이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계시록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들은 두 개의 상반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거라는 언약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있었지만, 매일 일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 이 천년 후에 살아가는 우리도 여전히 이러한 이와 비슷한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 사이에서, 우리는 기다림과 고통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확신이 뒤섞인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고통과 인내와 영광스러운 비전 사이에서 고민하는 요한의 솔직한 고백은 놀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를 가능하게 하고 대담하게 무엇이 올지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장대한 피날레에서 묘사된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승리하시고, 백마를 타고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슬픔과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21:1·3)이 있고, 그리고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모이는 거룩한 도시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 궁극적이고 영원한 실재를 떠올리면, 아무리 힘들어도, 이 땅에서의 어떠한 상황도 이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인내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 여러 번 반복되는데, 종종 극복과 정복이라는 표현과 함께 묘사됩니다. 인내하기 위해서는 단지 참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고, 용감하고, 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사이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한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는 “오늘을 위한 힘과 내일을 위한 밝은 소망”을 찾습니다.

Kelli B. Trujillo

요한계시록

1:4

9,

19:11

16, 21:1

5, 22

27, 22:1

5

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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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미래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현재 상황에 대한 당신의 관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인내를 갖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되살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초대하며 기도하십시오.

월요일: 소망을 예언하라

오늘의 말씀: 스가랴 9:9–17; 로마서 5:3–5, 8:18–30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됩니다…” 앤 라모트가 저서 <Bird by Bird>에서 한 이 말을 항상 기억합니다. 희망에 관한 이 말은 최근 제 삶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행위와 분투, 헌신과 규율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예수님의 부활과 투쟁의 실천에 있어 소망의 언어를 기초로 삼았습니다. 때때로 소망은 절망에 맞서기에 충분히 강력하며 유일한 언어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라모트의 말처럼 일종의 ‘혁명적인 인내’ 일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소망이 무엇이든, 우리의 내면에는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속삭임처럼 잘 들리지 않지만, 그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영혼 깊은 곳에서 비롯되지만, 종종 그림자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소망은 혼돈 속에서 피어오릅니다.

어떨 때는 마치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땅 표면을 덮었던 그 구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속한 세상이 무너지고 무거운 삶의 무게가 느껴져,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다시 이야기하는 엘리 위젤의 말처럼 칠흑 같은 ‘밤’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실제 뿐만 아니라 소망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도 해야 합니다.

예전에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할머니의 지난 삶에 관해 이야기해달라고 제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할머니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0년 동안 영혼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인생은 고단했습니다. 흑인 여성으로 남부에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잔인한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은 그분의 사랑이라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아직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단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완전히 삶을 바꾸고,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사랑은 결국 예수님의 방식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온갖 질병과 고난을 고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위험을 감수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소망을 예언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 “최고의 힘은 정의의 요구를 구현하는 사랑이고, 최고의 정의는 사랑에 대항하는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사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권능과 정의의 선지자로서 세상에 맞서거나 스가랴의 말씀처럼 “소망을 품은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9:12). 누군가가 말했듯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내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오늘은 소망을 예언하겠습니다.

Dante Stewart

본 글은 ChristianityToday.com에 2019년 10월 21일에 게시 된 ‘Why We Still Prophesy Hope’라는 기사에서 발췌했습니다.

스가랴

9:9-17

및 로마서

5:3

5, 8:18

30

읽기

.

소망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고통 속에서 어떻게 소망과 사랑이 생겨납니까?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으로 어떻게 오늘날 소망을 예언할 수 있습니까?

화요일: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1:1–5, 14, 요한계시록 22:12–13, 2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14)라고 복음서에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오실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는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그가 오셨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좌절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가 돌아오면 의인이 옹호받을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면, 당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조롱당한 당신을 옹호하실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면 자신이 세력을 잡고 통치하려고 애쓰던 모든 인간은 바닥에 엎드러질 것이며, 통치자 위의 통치자이시며 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단 한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의 믿음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이야기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2-13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20절)라고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을 이 말로 마무리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0절).

미래를 바라보면, 우리나라가 우리가 원하지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경제가 형성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총에 맞거나 성매매나 마약 때문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으며, 손자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 예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옵소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을 직면하든 그가 돌아오실 것을 압니다. 언젠가는 하늘이 갈라지고 천사가 나팔 부며 내려오는 장면을 온 세상이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면 모든 피조물은 응답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Charlie Dates

본 글은 Charlie Dates의 2019년 12월 22일 설교 중에서 허락을 얻어 발췌했습니다.

요한복음

1:1–5, 14, 요한계시록 22:12–13, 20 묵상하기.

강림절의 두 핵심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입니다. “주 예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수요일: 강림절과 계시

오늘의 말씀: 마가복음 13:24–37, 누가복음 21:25–28

강림절에 우리는 어둠, 환난, 계시라는 단어가 포함된 성경 구절을 듣습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은 각각 최후의 날에 대해 계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절). 구절 뒷부분으로 갈수록 더 참담합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이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5 절).

왜 예수님은 양이나 목자, 천군에 대해 말하지 않고 죽음과 멸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나타난 계시의 기록은 재앙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은혜를 입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미래의 안전과 번영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강제로 추방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처한 위기는 “신학적 비상사태”였습니다. 이러한 비상사태에서 벗어나며 새로운 계시적 사고방식이 구체화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였던 바빌로니아 포로 기간을 기록한 이사야 후반부 (40-55장)에서 시작하여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당시에는 이러한 계시가 어디에나 존재했습니다.

계시 신학은 무엇보다도 소망의 신학입니다. 소망은 낙관주의와는 정반대입니다. 낙관주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지고 실패하게 됩니다. 반면에 소망은 인류의 역사를 넘어선 존재에서 발견됩니다. 성육신의 하나님에게서 발견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태양과 달과 별의 징조”와 “민족의 고통”에 대해 계시하시며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씀을 끝맺습니다 (21:25–27).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인류의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와는 무관한 주권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목적에 따라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강림절을 통해 우리는 이 어둠을 직접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Fleming Rutledge

본 글은 ChristianityToday.com에 2018년 12월 18일에 게시된 ‘재림에 계시가 필수적인 이유’라는 기사에서 발췌했습니다.

마가복음

13:24-37,

누가복음

21:25-28

읽기

.

당신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까? 어떤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역사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묵상하며 당신의 소망을 커집니까?

목요일: 더 중요한 질문

오늘의 말씀: 베드로후서 3:8–15

왜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왜 예수님은 약속대로 아직 재림하지 않으셨습니까?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뜻밖의 답변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때는 그분의 인내와 구원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며 (3:8-9), 둘째, 최후의 날은 무시무시하며 불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기록한 계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유사한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1장)은 우리를 잠시 멈칫하게 합니다. “불로 멸망”하고 “하늘을 불로 멸망”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할까요?

베드로후서 앞 장에서는 3장에서 언급된 멸망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합니다. 2장 5절은 하나님께서 물로 이 땅을 멸망시키신 노아의 시대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심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을 완전히 휩쓸어 버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에 의한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땅의 도래를 위해 땅에 있는 것을 모두 태워 버리실 거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묘사했듯이,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바 만물이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3:21). 우리가 지금 속한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회복되고 재정립되면서 신세계가 올 것입니다.

위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하나님의 때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보다 훨씬 더 집중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다가오는 주님의 날에 비추어 베드로는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묻습니다 (베드로후서 3:11).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면서 소망을 품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독려합니다 (11-14 절). 베드로가 이러한 내용을 첫 번째 서신에서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환희의 확신으로 깨어 있고,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벧전 1:3-5,13).

우여곡절과 반전으로 가득 찬 소설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야기의 끝을 알기에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놀라운 결말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사건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끝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과 상급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면 두렵기보다는 격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방식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심판과 상급, 그리고 변화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Vincent Bacote

베드로후서

3:8 -15

생각하기

. (

베드로전서

1:3-5, 13

도 읽기

)

. 이 구절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제기합니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나요? 다가올 ‘주님의 날’에 대한 여러분의 소망은 일상적인 제자훈련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금요일: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오늘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3–5:11

교수로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수업에서 ‘종말론적 영화’라고 분류할 수 있는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영화 중 다수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의 해석인 휴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끌어 올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의 백성을 하늘로 데려가려고 오시는 보이지 않는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종말론적 영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재림할 수 있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됩니다.

휴거나 종말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5장을 묵상하며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당시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격려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이 뒤에 남게 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죽은 자들을 잊으실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죽음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오는 신세계에 참여하는 데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든 죽었든, 주님의 날이 올 때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는 팡파르가 울리고 웅장한 입구가 열릴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4:16)도 더해질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재림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다른 나팔 소리와는 달리,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일으켜 그리스도를 환영하기 위해 산 자와 함께 하도록 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실 “마지막 원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비슷한 주제를 볼 수 있습니다 (15:26). 바울은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확신합니다 (15:52). 죽음의 ‘장벽’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데살로니가전서 5:8) 준비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도둑같은’ 재림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축제가 열릴 것입니다.

Vincent Bacote

데살로니가전서

4:13-5:11

을 묵상하기

. (

고린도전서

15:51-58

도 읽기

.)

여기서 바울이 어떤 어조로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소망은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재림이 ‘밤의 도둑처럼’ 올 것이라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토요일: 문제적 공동체의 소망

오늘의 말씀: 고린도전서 1:1–9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읽을 때 바울의 서신이 쓰여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의 교회는 매우 문제적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에 다른 지도자에게 헌신한 교회의 파벌, 추악한 성행위,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한 논쟁 등이 등장합니다. 이 기독교 공동체는 온갖 문제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고린도전서 1:1–9에서 바울은 그들을 성화된 사람들 (‘성도‘)이라고 구분지어 불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영적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4절)를 강조하며 그들에게 헌신하라고 말합니다. “주께서…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8절). 그들의 죄 많은 행동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돕는 헌신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린도인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강조하는 반면,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명하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형제들아 건실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15:58).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성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수많은 잘못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변화하고 결단하라고 격려합니다.

또 다른 바울의 서신에서도 비슷한 단호함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디도서 2:11-14).”

고린도전서나 다른 서신에서 바울이 죄의 문제점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8-9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날 위대한 소망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실 때 우리의 몫을 하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삶의 모습이자 격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문제를 겪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지만, 실패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다시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우리가 흠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헌신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당신의 신실함이 우리의 문제보다 큽니다.

Vincent Bacote

이 교회의 문제점을 떠올리며 고린도전서

1:1-9

정독하기

. (

고린도전서

15:51-58

다시 읽기

,

디도서

2:11-14

읽기

.)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점을 강조해서 말합니까? 영적 형성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강조합니까? 이 말씀이 당신에게 어떤 소망을 주나요?

기고자:

Vincent Bacote는 Wheaton College 신학교의 부교수이며, The Political Disciple: A Theology of Public Life의 저자입니다.

Charlie Dates는 Chicago Progressive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Trinity Evangelical Divinity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Fleming Rutledge는 성공회 사제이며, 강사, 작가, 설교자들을 교육하는 강사가 되기 전까지 21년 간 교구사역을 했으며, The Crucifixion의 저자입니다.

Danté Stewart는 Emory 대학의 Candler School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작가이자 설교자입니다.

희망은 기대되는 도약

지난날과 다시 올 날에 기독교의 희망 있다는 것을 강림절을 통해 기억합니다.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4, 2020
Fabrizio Conti / Unsplash

제 어머니 김영은 1948년 한국이 내전의 위기에 처했을 때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나라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었습니다. 한때 부자였던 그녀의 가족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그녀가 십 대였을 때 돌아가셨고, 불과 몇 년 후 두 오빠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결국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졌고 30대 초반에 옷 가방과 손에 몇 달러를 쥔 채 당시 아기였던 저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싱글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투쟁, 슬픔, 상실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제가 아는 가장 희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녀에게 희망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머니는 예수님이 희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조금도 의심하거나 망설임 없이 말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약 40년 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로 불변의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을 지지해주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생각이나 환상으로 가득 찬 순수하고 완벽한 유토피아나 동화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희망이란 그보다는 씁쓸하지만 훨씬 더 실질적인 것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하는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리스어 원어에서 ‘경고’(anadzonumi)로 번역된 단어는 신체적 준비를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이는 고대 근동 지역의 일반적인 관행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긴 겉옷을 안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농부들이 들판으로 나가거나 군인이 전투에 나가거나 뛰러 나가기 전에 방해 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하도록 허리띠를 졸라매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첫 서신에 이 말씀을 썼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초기 만남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물고기를 낚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가에서 예수님께서 부르는 것을 들은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21:7)”. 그는 겉옷을 둘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 나온 것과 같은 단어와 이미지가 여기에서도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기슭에 오신 것을 보고, 즉시 옷을 두르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수십 년 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초기 추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당신에게 주어질 은혜”로 인한 희망에 대해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권고합니다.

기대와 행동

일부 언어 학자들은 희망이라는 단어가 도약(hop)이라는 단어와 어원학적 뿌리가 같다고 주장하면서, 무언가에 대한 희망은 기대를 뛰어넘어 가능성을 향해 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는 흥미로운 점을 보여줍니다. 우리 시대에서 희망이라는 개념은 본래 의도된 행동 지향적 특성이 있었지만, 수동적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좋은 상황을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이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희망을 소원의 한 종류라고 종종 착각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너무 비현실적이면 그것을 ‘희망 사항’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희망은 그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품는 희망은 기대되는 도약입니다. 우리는 행동하며, 우리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세지 성경,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서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즉, 기독교의 희망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이 수반되는 희망이며, 우리는 손을 더럽히더라도 기대와 약속을 향해 노력하고 수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꺼이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근본적으로 반 직관적인 특성을 갖는 기독교 희망의 본질은 대중문화에서 희망을 표현하며 외면하고 있는 특징인 회복과 인내심에서 비롯됩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고통을 향해 나아 갑니다. 팀 켈러는 “다른 세계관은 우리를 삶의 기쁨 한가운데 놓고 다가오는 슬픔을 예견하는 반면, 기독교는 사람들이 세상의 슬픔 한가운데서 맞이할 기쁨을 맛 보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이 땅에서 위안과 편안함을 주겠다는 세상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저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기독교의 희망은 힘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 투쟁에 함께 참여합니다. 물론 이 땅에는 아픔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희망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가지고 우뚝 설 수 있도록 합니다.

얼마 전 제 친구인 란던과 사라 베이커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을 우리 공동체에 공유했을 때 우리는 모두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부부의 아기는 심각한 병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전 세계적인 유행병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지 3일도 채 안 된 예쁜 아기를 하늘나라로 보내기 위해 저도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병원의 장례식장에 들어갔습니다. 젊은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갓 태어난 딸을 위해 기도하고, 아기가 마지막 숨을 쉬고 하늘나라로 떠나자 시편을 읽으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실직한 상태로 일 년 넘게 버텨낸 제 친구 대런 존슨도 생각납니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청구서를 지불하지 못하는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대런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실업자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용기를 갖고 가족을 부양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세밀한 요청도 들으시며, 여전히 일하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방법은 몰랐습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그는 가장 확실한 믿음을 삶의 지표로 삼았습니다. 그의 희망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0대 초반의 재능있는 작곡가 크리스티나 탕은 음악 앨범 작업을 하고 있던 시기에 위장암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슬픔과 혼란이 도처에 있었지만 그녀는 결심했습니다. 몸이 약해졌지만 크리스티나는 계속 음악을 만들고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교회 예배에서 찬양 인도를 할 정도로 강인했습니다. 손에 힘이 없어 더는 기타를 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함께 연주할 뮤지션 친구들을 모집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하늘나라로 가고 몇 주 후, 저희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그녀의 새 앨범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마지막까지 공들여 만들고 녹음한 여섯 곡이 앨범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의 희망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희망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두려움, 불안, 의심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마주합니다. 혼돈 속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며 안정을 유지합니다. 전염병, 정치적 분열, 사회적 불안, 개인적인 투쟁 등 폭풍 같은 삶의 어려움을 통해 이미 일어난 큰 일과 다시 일어날 더 대단한 일로 인해 더 증폭되는 것이 기독교의 희망입니다.

그분이 오실 것이니, 소매를 걷어붙이자

강림절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11월 말 무렵부터는 집마다 앞뜰이 성탄절 장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역사 속의 여정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여정입니다.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는 길고 지속적인 미래를 향한 시선이며 역사를 밝힌다는 뜻입니다. 성탄절 이야기를 통해 빛이 과거의 죄책감, 현재의 고통, 미래의 불안과 같은 어둠을 비추어 주며 우리에게 더 밝은 날이 앞으로 올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추종자들이 그의 승천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희망의 기반이 되는 우리가 강림절 동안 축하하고 기억해야 하는 약속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기독교의 희망을 알리는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강림절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회복, 불굴의 용기, 인내로 무엇이든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므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18, 24-25)

저희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칠순을 맞이하셨습니다. 하와이를 방문하는 것이 오랫동안 어머니의 버킷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에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 근처에 머물렀는데, 호텔 창에서 섬에서 가장 유명하고 힘든 하이킹 중 하나인 다이아몬드 헤드가 보였습니다. 어머니에게 하이킹을 시도하고 싶으신지 여쭤보자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이아몬드 헤드 트레일은 왕복 1.6 마일이며 가파른 경사를 직선으로 올라가며 트레일 헤드에서 정상까지 거의 600 피트에 이릅니다. 저는 질문을 던진 것을 곧바로 후회했습니다. 어머니 연세에 가능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트레일 시작점까지 차를 몰고 갔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이게 정말 하고 싶으신지 다시 물었고, 대신 해변에 가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 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반쯤 올라간 후 피로와 지친 모습이 역력한 어머니를 보고 저는 돌아가고 싶은지 다시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보고 웃으며 소매를 걷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고, 결국 정상까지 올라가 멋진 경치를 만끽했습니다. 어머니는 결국 해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께서 실천하는 희망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희망이 실현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착할 때까지 한 걸음씩 험난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휴식을 위해 호텔로 돌아온 후에는 영상통화로 제 아이들(어머니의 손자)에게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갓 태어난 손자에게 다이아몬드 헤드를 정복한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니는 빛이 났습니다. 석 달 전에 태어난 제 아들에게 어머니는 희망을 뜻하는 ‘소망’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역시 우리 어머니.

Jay Y. Kim은 WestGate Church의 담임 목사이며, Vintage Faith Church 기숙사의 교사이며, <Analog Church>의 저자입니다. 현재 실리콘 밸리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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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목사의 아내였고 남편의 자살로 인해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정신 건강과 사역에 대해 배운 점

Christianity Today November 3, 2020
Courtesy of Kayla Stoecklein

저는 19살에 앤드루를 만났고 금세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목회자의 부름을 받은 목사의 아들이었고 그와 함께하는 삶이 목사의 아내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앤드루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는 목회자의 삶이 어떤지 전혀 몰랐습니다. 실제로 사역을 통해 봉사하는 삶은 분명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실망하고 낙담하기도 하며 외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 앤드루는 그의 부모님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고, 저는 담임 목사의 아내로서 새로운 역할을 감당하는 법을 재빨리 습득했습니다. 저는 여전도회에서 봉사했고, 매주 수요일에는 어머니들을 위한 모임을 준비했고, 주일마다 빠짐없이 1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장 먼저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사역이 전부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하나님이 앤드루의 삶에 주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부름은 곧 저의 부름이었습니다. 그의 열정이 곧 저의 열정이며, 그의 목적이 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번아웃과 우울증, 불안의 시기를 겪었던 사랑하는 남편 앤드루는 2018년 8월 25일, 비극적으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제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미망인이자 어린 세 아이의 미혼모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갑자기 우리의 이야기가 인터넷상에서 불행한 이야기로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 사진이 전 세계의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원하지 않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며 가까이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기 원했기에, 저는 당당하게 말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저는 자살이 우리 가족을 정의하는 말이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천국으로 떠난 지 사흘 후에 저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 가족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세상에 강렬히 남을 것입니다.”라고 저는 다짐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생명을 구하고,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교회가 목회자들을 지원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편지로 인해 처음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실이 회복되고 심지어 자살로부터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사람들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 선물, 기부, 책, 담요 및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앤드루의 이야기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지난 몇 년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는 전국 자살 예방 교육 주간이며, 안타깝게도 미국 교회는 매년 더 많은 지도자를 자살로 잃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와 사역 직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정신 건강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동료나 성도들과 자신의 어려움을 나눌 수 없다고 느낍니다. 직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설 곳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할 기회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모두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합니다. 남편 앤드루를 통해 목회자가 피할 수 없는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을 때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습니다.

모든 목회자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지원자가 필요합니다. 경계를 풀고 목사의 역할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가까운 친구와 신뢰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합니다. 앤드루는 종종 “정상에서 외롭다”라고 말했지만, 리더라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사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외로움은 무거운 책임에서 비롯되는 부담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앤드루는 종종 자신이 모든 것을 하나로 지탱하는 ‘중심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지속해서 상기시켜 주곤 했습니다. 사역 직책을 맡을 때 팀으로 리더십 업무를 함께 감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짐을 분담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압박감으로 인해 무너질 것입니다.

사역의 요구가 끝이 없다고 느낄 때 특히 모든 것이 소모적으로 느껴지고 부담감이 커집니다. 앤드루가 목사로서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기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다. 쉬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공허한 상태로 사역을 지속하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휴대전화를 끄거나, 이메일을 로그오프 하거나, 하루 동안 컴퓨터에서 떨어져 있어야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휴식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목사 아내의 역할을 통해 제가 깨달은 진실은 목회자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초인적인 능력이 없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목회자들도 무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밝은 빛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깨진 그릇일 뿐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밝게 빛나고 성도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도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일을 진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공동체에 속해 무거운 마음의 짐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하며, 치유와 휴식을 스스로 허락하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와 하나님 앞에 봉사하겠다고 약속한 지도자들에게 개인적 요구를 말하는 일은 어렵거나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과 건강이 당신의 사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사역이 당신을 괴롭게 하거나 가정을 망가뜨리고 우울증을 악화시킨다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휴식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을 돌보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목회자로 평생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에게는 특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인도하실 것이기에 우리 목회자들이 예수님이 되어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궁극적인 희생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카일라 스토클라인은 정신 질환을 겪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어린 세 아들의 엄마입니다. 홈페이지(kaylastoecklein.com)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kaylasteck) 그녀를 만나보세요. 그녀의 첫 번째 책인 <Fear Gone Wild>가 최근 출간되었습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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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과 함께 불안으로부터 싸우는 법

구약 성경은 스트레스와 싸우는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Christianity Today October 2,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첫 번째 성서'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 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세 번째 글입니다 . — 편집자 주

는 밀레니엄 세대입니다. “불안한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 대부분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평균보다 두 배 이상으로 일을 방해할 정도의 불안을 경험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이 증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정신 건강 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저는 스스로 불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시간제 일을 하다가 무릎인대가 찢어졌고 (당시 아내는 임신 36주였음), 아버지가 되었고, 일자리를 얻어 취업 비자를 받아 대서양을 건너 이사해 집을 구하고, 1학기를 마치고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는데, 이 모든 것이 일 년 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결코 이 모든 일이 나쁘다거나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은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지치고 불안해졌습니다.

제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재택근무가 점점 더 늘어나며 우리 모두에게 고립과 과로의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젊은이들에게 어디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이었지만, 오늘날은 실제로 그들의 정신 건강이 혹사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 학대, 만성 질환, 실직, 노숙자 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른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웰빙 산업이 번창하며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치료사, 반려견을 위한 웰빙, 스트레스 해소 장난감 등이 만들어지며 발맞추어 성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의사나 자기 계발서의 조언이 성경을 읽는 것보다 정신 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고 느끼며, 심지어 죄책감 마저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적인 도움을 구해 본 사람으로서, 저는 항상 성경을 통해 그중에서도 특히 구약 성서의 한 구절을 통해 회복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여러분이 미디어를 통한 조언이나 기독교 리더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익숙하다면, 오래된 먼지투성이의 구약 성서가 주는 도움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적용하는 것처럼 저 또한 성경이 제 삶에 적용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행히도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 찬양하세”와 "주 이름 찬양” 등의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치유해주는 찬양 대부분은 구약 성서의 구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상 경력에 빛나는 플레밍 러틀리지의 책 <그리스도 수난도>에서는 소외당한 여러 세대의 공동체가 구약의 출애굽기에서 위안을 찾는 방법을 언급합니다.

마틴 루터킹의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킹은 불안한 청중을 위로하기 위해 시편 30편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구약의 주제를 연설에서 사용합니다.

성경 구절 중 특히 구약 성경은 고대에 쓰인 글이며, 우리가 정신 건강의 문제를 겪기 훨씬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신약 성서의 배경 이야기로서만 유용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다양한 개인의 인생사와 그들의 가장 힘든 경험을 들려주는 구약 성경은 그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며 이를 통해 특별한 형태의 집단 치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경험에서 배우기

불안의 대처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 구성에서 시작됩니다. 구약 성서는 천년에 걸쳐 수십 명의 작가가 만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벨의 살해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의 억압에서부터 겁탈당한 다말과 바빌론으로의 유배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숫자의 충격적인 사건을 다룹니다. 이것은 매우 집약되어 있고 짧은 신약 성서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1세기에 성전이 무너지거나 폼페이에서 화산이 분출해 수십 명의 초기 기독교인이 사망한 것과 같은 유사한 1세기 사건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2001년 9월 11일에 세계무역센터 근처에 서 있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은 어떤 생각과 느낌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테러공격 당시 살아있던 거의 모든 미국인들은 그 운명의 날에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으며, 뉴스에서 건물이 붕괴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던 느낌이 어땠는지 기억합니다. 구약 성경의 바탕이 되는 경험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재해나 군사적 침략에서 국가 망명 또는 정치적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불안한 사건이 거의 모든 구약 성서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과 비교해 구약 성경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강렬한 말씀이 기록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기록은 수 세기 동안의 지혜를 압축시켜 우리를 현명한 현자들의 조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게 합니다.

연대 보여주기

구약이 불안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의 하나는 다음의 두 개인적인 문학 장르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나 여호수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이야기입니다.

의도적으로 타인의 가장 흥미롭고 성공적인 면만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일부 소셜 미디어 프로필과는 달리 이러한 이야기는 더욱 완전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인물들은 그들의 생을 통해 업적과 약점을 모두 보여줍니다.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세가 있었고 (출애굽기 4:10), 절망에 빠진 왕 아하스가 있고 (열왕기하 16:7), 그리고 괴로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습니다 (룻기 1:20-21). 이 인물들은 불안의 오명을 제하시고 하나님이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만드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시편은 불안에 대응하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단순히 회상하며 나누기 위해 간단히 줄여서 보여주기보다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편 13:1)라는 다윗의 예리한 질문을 통해 우리를 그의 적극적인 고통에 초대하고 우리의 고통도 끝내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아삽은 표현하기 힘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눈물의 양식”을 주셨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시편 80:5).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모여 신학적 해결책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편 118:6). 특히 시편의 위안은 그들이 부를 찬양과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하면서 느껴집니다. 이것은 존 칼빈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시련 중에 시편을 보면, 마치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통해 노래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구약의 말씀이 항상 불안과 싸우는 데 좋은 내용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미가의 심판의 약속 (미가 2:3 -5),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 (창세기 22:1-18)과 같은 가혹한 시험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문학적으로 충격이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말씀은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불안감은 순간적이고,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므로 각 이야기가 구원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의 두려움을 통해 끊임없이 괴롭게 하거나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빼앗는 것은 성경 저자들의 의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실존적 질문의 제기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안심하도록 한 후, 구약 성경 본문은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고백하는 신앙을 실천하시겠습니까? 진부해 보일 수 있지만 불안이 우리 마음에 어느 정도라도 남아있다면 마음의 습관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상담을 위해 전문가를 방문했을 때 이것이 계속 논의한 문제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살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것이 당신의 불안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비기독교인이 나의 정통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을 강요하는 것은 불편했지만 그가 옳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라는 문구가 말이 아니라 명령이 될 때까지 평온을 비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위안에서 명령에 이르기까지 위 방식과 잘 들어맞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 1:18). 잠언은 악인과 경건한 사람이 두려움과 불안과 대응하는지에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잠언 28:1). 이사야에서 선지자는 군사 침략의 위협을 걱정하면서 아하스에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히리라”(이사야 7:9).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공포 속에 던져질 때 뒤로 물러서며 비난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그분에게서 나온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존하시고, 심지어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미 우리와 함께 걷고 있고, 우리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시편 23편 4절의 말씀으로, 일부 번역에서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는 구절에 강조체를 추가했습니다. 이 번역은 우리가 죽음에 가까워질 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힘든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여 보여줍니다. 그분은 항상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항상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하고 용감해지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불안에 대처하는 놀라운 패러다임을 발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해야 하기 때문의 믿음의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삶은 두려움에 굴복하고 계속되는 공황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의심이 믿음을 몰아붙이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닙니다. 의심은 두려움에 대해 질문하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불안은 그 자체로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킵니다. 성도로서 우리의 소명은 우리의 불안한 마음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얼마나 어긋나는지 느끼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기술이나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불안과 싸울 수 있습니다.

이 도전은 저에게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는 미리 수요를 예상하고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인내하는 등 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를 정시마다 계획하고 (때로는 훨씬 더 자세하게) 아내나 동료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집과 직장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순간, 특히 피곤할 때는 결국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불안해합니다. 비행기 추락이나 암, 심지어 낯선 사람들과의 교제에 대해서도 걱정합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이러한 생각은 제 삶의 배경을 둘러싸는 방해물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이 착각을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습니다.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게 불안과 씨름했던 신학자 마틴 루터의 말에 따르면, 불안은 사탄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 18:10).

삼위일체 치료법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신앙과 불안으로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불완전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한 조언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목소리를 모여, 하나님이 주시는 권고를 통해 도약합니다. 하나님은 재앙으로 모세를 도우셨고,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을 아하스에게 전했고, 나오미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신성한 해결책을 얻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우리 사이에 중재할 판결자가 없다”(욥기 9:33)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신약이 들어오는 지점입니다. 신약은 역사상 가장 큰 대격변이었던 하나님 아들의 죽음과 구약의 대격변이 어떻게 그에게서 해결을 찾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구약의 구속 패턴, 특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그 운명적인 밤에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 심지어 우리의 정신 질환까지도 관여하십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 도착하셨을 때 그는 죽게 되었으니 마음이 “매우 슬프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38). 이 표현은 그리스어 용어 lýp (loo-pay로 발음됨)에서 파생되었으며, 아마도 고대에 가장 두려웠던 감정일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우울증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스토아는 치료법이 없다고 믿었기에, 이는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정신 상태였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몸을 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있을 때, 그는 우리가 짐작하듯이 구약 성경을 향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시편 22:1)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표현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그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그가 암송하고 있는 시편의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31절).

시편 22편의 희망과 기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는데, 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인간의 마음으로 가장 어두운 정신적 장소까지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심을 입증하셨다면, 우리도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새 생명과 새로운 심리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불안한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불안은 저에게 항상 임박한 파멸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늘 흔들리고 재난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상담 치료도 없었고, 완전히 이겨내도록 하는 현명한 조언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의 치료에는 우리의 불안이 결국 끝날 것이라는 약속이 있으며,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자주 불안함을 느끼는 삶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됩니다. 더 좋은 소식은, 우리가 새로운 육체를 받고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일어날 때, 불안과 모든 정신 질환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8).

화이트는 뉴욕에 있는 킹스칼리지의 성경 연구 조교수이며 Center for Pastor Theologians의 일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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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성애

구약에서 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24,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첫 번째 성서'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저는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지만 제가 자란 교회는 개척자 부흥에 전통을 두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부흥 설교자들은 종종 죄인들을 보고 분노하시는 '구약의 하나님'과 은혜롭고 사랑 많으신 '신약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능숙한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이 강렬한 대조는 어린 시절 제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구약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이 대조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마크 트웨인의 유작 <지구로부터의 편지>에서 그는 “지옥을 만드신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보다 천억 배나 더 잔인할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정확히 깨달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G.K. 체스터트는 <영원한 인간>에서 벳새다를 소돔보다 더 깊은 구덩이에 떨어뜨리신 예수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과 동정심을 얻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실제 더 가혹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새롭게 깨닫게 된 '구약의 하나님'은 제가 어린 시절의 교사와 설교자들에게서 들었던 것보다 더 사랑이 많고 자비롭고 동정심이 많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연민의 하나님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지 않으면 술, 성행위, 폭력 등 중요한 주제에 관한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중요한 신학적 자료인 '구약의 하나님'의 인격과 성격을 반영하는 단어를 우리는 놓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장 중 하나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있었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6-7).

이 말씀이 있기 얼마 전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신을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을 위반했음은 물론이며,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산에서 오래 지낸 모세를 향한 참을성이 없어졌고, 여정을 계속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동안, 아론은 모세의 분노를 만류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레위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3,000명의 이스라엘 동료들을 쳤습니다. (출애굽기 32장).

엉망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여파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 가지 않겠다고 위협하셨습니다. 모세의 확신도 흔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친밀한 친구와 이야기하듯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안심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요청합니다. (출애굽기 33장).

여호와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시며, 이 모든 것이 출애굽기 34장 6-7장의 선포로 이어집니다. 이 선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다른 것보다 먼저 언급된 말, 바로 여호와는 자비롭다는 것입니다. 베스 테너가 공동 저술한 <시편의 서>에서 지적했듯이, 동정심이라는 영어 단어보다 히브리어 단어는 의미가 더 풍부합니다. 따라서 더 나은 번역은 “모성의 연민”일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죗값을 치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애굽기 33:13)라고 한 모세의 말로 인해 모성의 동정심으로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응답은 먼저 모성의 동정심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어머니가 자녀에게 화를 내더라도 자녀를 버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며, 중대한 죄를 저지르고 실패한 우리에게 실패를 넘어선 미래를 약속하시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한 연민의 하나님이십니다. 분노의 관점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의 한 부분만을 반영하며, 출애굽기 34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이 모성의 연민 때문에 시작된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세대를 향한 연민

애굽을 탈출한 모세의 시대를 지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온 한참 후의 세대와 느헤미야 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버렸다는 생각에 출애굽기 34장 6-7절과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느헤미야 9:17). 안타깝게도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바사 통치하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9:36-37).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더 견딜 수 없게 되자, 서기관 에스라가 그들 목전에서 율법을 읽고 백성들은 귀를 기울였는데, 그들은 죄를 모두 예리하게 깨닫고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8장).

기도하는 레위인들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아브라함을 택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신”(느헤미야 9:17) 하나님이시므로 그들을 용서하신다고 상기시킵니다.

포로 후에도 수많은 고난과 사람들의 죄를 겪은 레위인들은 과거에 큰 모성의 연민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었습니다. (9:19). 백성들은 토라를 등지고 사사 시대에 선지자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모성의 연민으로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고 (9:27), 여러 번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9:28). 군주제하에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모성의 연민 때문에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9:31).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인해 오하이오에서 처음으로 목회했던 저의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아들은 마약에 푹 빠졌고 수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러 재활센터를 찾고, 법 제정을 시도하고, 때로는 거친 사랑을 보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시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을 알고도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그녀는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지자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은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녀들을 (그리고 우리도!) 모성의 연민으로 변함없이 환대하십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

요나서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의 적들 사이에서도 확장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연민에 대해 묵상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이 대부분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 압제자들의 수도인 앗수르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요나를 배에서 내던져 큰 물고기의 뱃속에 던져 넣으셨습니다. 그의 삶의 선택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고, 요나는 기도했고, 물고기는 그를 다시 마른 땅으로 토해냈습니다. 요나는 마침내 원래의 임무를 완수하고 니느웨에게 임박한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니느웨는 회개했고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했을 때 아마 요나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내용 중 요나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모세와 제사장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요나 4:2)이신 줄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상대로 하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을 갖고 니느웨 사람들이 첫 회개를 하기만 하면 그들을 용서하실 작정이셨습니다.

결국 앗수르인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오하이오에 있는 교회에서 한 장로가 일본의 경제적 능력이 미국의 산업 안정을 위협한다며 일본인을 비하하는 가혹한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 이웃들에게 분노를 표하며 그들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그들이 우리 나라를 점령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무슬림 이웃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방에 적들이 가득했던 것처럼, 우리 나라와 우리 삶에서도 수많은 적들이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품으신 모성의 연민이 적에게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물론, 실제로 우리 삶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우리의 잘못을 항상 용서만 해주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보호해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이쪽에 더 가까우셨습니다. 언니와 제가 어렸을 때 은행에서 신분증 없이 크리스마스 저축 계좌에 돈을 입금하려고 시도했다가 창피를 당했던 상황이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은행 부지점장 사무실로 들어가 내 자녀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로 인해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시편 86편에서 기도하는 시편 기자는 모성의 연민을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시편 기자가 직면한 문제는 제가 은행에서 겪은 작은 사건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을 알고 있지만 (시편 86:5), “나를 치려고 하는…포악한 자의 무리”(14절)로부터 보호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2절),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신다고 믿었습니다(7절). 그리고 시편 기자는 포악한 적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이스라엘 안팎에서 울려 퍼지는 강력한 주장을 기억합니다.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15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모성의 연민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시고 불타는 집에서 아이를 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모성의 연민은 자식이 적과 싸우며 삶을 살아내야 하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안전한 방패막을 제공합니다. 이 역시 모성의 연민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16절).

이와 같이 살고 사랑하는 것

제임스 스트롱의 성경 용어 색인에서 히브리어를 살펴보면, 구약 성경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성의 연민”이 약 150번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하는 바와 같이 분노하고 복수심에 찬 옛 언약의 하나님을 보고 모성의 연민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무시하는 대신, 우리 교회가 긴 시간동안 이 150개의 사건을 들여다보며 모성의 연민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꾸준한 자양분으로 받는다면 어떨까요?

바라건대, 우리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께 더 큰 감사를 표하며 예배와 기도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의 표현이 에덴 동산에서 태어난 자녀부터 사랑하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모성적 연민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빵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 몇 번이고 제정하신 구원의 정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건대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곳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모성의 연민을 표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도 쉽게 독선적으로 적을 폄하했던 것을 우리도 행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민으로 환영합니까? 우리 도시와 지역 사회에서 죽음으로부터 위협받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합니까?

우리는 그동안 오도했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활기차고, 또한 모성애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 대신 ‘우리 하나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Robert L. Foster는 조지아 대학의 신약과 종교학 강사이며, <We Have Heard, O Lord :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the Psalter>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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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말: 약자를 보호하십시오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이해해 온 것처럼, 신약에는 강력한 법 집행에 관한 신학이 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3, 2020
Source images:Library of Congress / Wikimedia Commons / Aijohn784 / Getty

나는 알라바마주 헌츠빌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16살이 되었을 때 나는 미식축구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코치들의 편지와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운동하고, 성적을 유지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건 내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찰에 의해 해를 당할까봐 두려웠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처하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어린 시절 로드니 킹 사건을 접하며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흑인들이 길에서 겪는 일들은 단순히 뉴스에서 본 문제가 아니었다. 나 또한 직접 경험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밤, 친구들과 나는 쇼핑몰에 갈 계획이었고, 같은 지역에서 파티를 열 계획이 있었다. 우리는 밤에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주유를 하고 간식을 사러 잠시 주유소에 들렀다. 기름을 넣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타서 떠나려고 할 때, 검은 색 SUV가 우리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차 한 대가 내 왼쪽으로 왔고, 다른 한 차는 내 앞에 정차했다. 순간 내가 강도를 당하는구나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누가 이 밝은 주유소에서 강도질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경찰이 차에서 나왔고,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볼 수 있게 손들어.” 한 경관이 말했다.

"우리가 왜 손을 들어야 합니까?" 내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때 내 미래가 눈앞에 번쩍였다. 내 모든 계획이 무산되면 어쩌지? 내 꿈을 겨우 과자 한 봉지와 몇 갤런의 기름과 바꾸어야 하는 걸까?

나는 친구에게 조용히 하고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고 우리는 따랐다. 나는 경찰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이 주유소가 유명한 마약 거래장소이며 우리가 마약 거래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곳에 주유를 하러 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분이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수색이 지속됐다. 물론 경찰은 수색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최소한의 사과를 기대했고, 왜 젊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수색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면허를 돌려주며 자유롭게 가도 된다는 말만 했다.

그러나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나는 무력했고 화가 났다. 장학금을 받고 빈곤에서 벗어나 가족을 부양할 기회를 잃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공포를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아무 죄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길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일곱 번 내지 열 번 정도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법적 정당성 없이 제지나 수색, 고발이나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경찰관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좋은 경찰관들도 많이 만났다. 경찰들이 업무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그 직업이 수반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해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 인종차별적 법 집행과 그들이 흑인의 몸에 가했던 위협과 같이 넓은 맥락에서 우리 나라에서 경찰이 행했던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

이 어두운 역사는 경찰의 손에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당한 최근의 사건으로 인해 표면 위로 드러났다.나라 곳곳에서 거리를 행진한 많은 시위자는 플로이드가 첫 번째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흑인 미국인들은 하루 이틀이 아닌 수 세기 동안 “무릎 아래에” 짓눌려 왔으며, 누적된 억압이 다시 한번 우리나라 전체의 화두이자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경찰의 활동에 대한 국가적 관점의 합의를 추구하기 위해 책, 팟 캐스트, 광장에서의 대화, 지역 사회의 프로젝트를 통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두 훌륭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단지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성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평신도나 목회자, 심지어 학자들까지도 종종 경시하지만, 신약은 국가 권력에 관한 신학을 분명히 언급한다. (CT의 9월호의 마이클 르페브레의 경찰과 구약 성서에 대한 글 참조)

놀랍게도 이 주제는 신약 윤리에 관한 표준 성경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었다. 하지만 협회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다. 국가가 시민에게 해야 할 대우는 신약 성서에서 벗어나는 주제가 아니며, 이러한 내용을 찾는 흑인들은 실제로 도움과 희망을 얻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구절들은 우리가 미국에서 경찰 권력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지에 관한 절대적 기초가 될 것이다.

신약의 두 구절에서 경찰 권력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시초가 되는 내용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로마서 13장 1-7절 말씀으로, 많이 비방 되거나 오해를 받는 구절이다. ‘칼’에 관한 바울의 말은 국가가 주민들을 어떻게 보호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언뜻 보기에 로마서 13장의 처음 몇 구절은 효과적인 접근으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적혀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이 구절의 초점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바울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거기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한다.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신도 독자와 학자들은 모두 이 구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말을 부적절하다고 여기며 우려했다. 그러나 린더 켁은 그의 주석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구절이 불분명해 해설자들을 괴롭게 하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료하게 설명한다.”

바울은 학대를 향한 적합한 기독교적 대응이 혁명이 아니라 순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이 땅의 반대편에 있는 잘못을 종말론적으로 바로 잡는 것뿐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종말론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더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권위에 대한 복종에 관한 그의 말은 훨씬 더 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바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연구를 살펴봐야 한다. 그가 바로 이야기를 인용할 것이 로마서 13장의 연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경시되지만, 그것은 성경적으로 정보에 근거해 경찰 권력에 관한 신학의 필수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바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로마서 9:17)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악한 왕들을 심판하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노예화하고, 가혹하게 처우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부당하고 폭군적 통치 때문에 결국 그를 멸하셨다.

바울이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법을 제정하셨다. 바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권위를 제거하신 예를 보여준다. 요컨대, 그 이야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항에 대한 금지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해야 한다. 성서 해설자들은 개인에 대한 바울의 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국가에 대한 그의 논평은 더 완전한 그림을 제공한다.

바울은 국가에 복종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설명한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로마서 13:3-4)

칼에 대한 이러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시대에 군인들이 경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푸어만은 "민간 환경에서 공공질서와 국가 통제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식 지휘하에 조직된 부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현대의 경찰과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군인의 역할이 경찰과 가장 가까웠다.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군인이 아닌 권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주민에 대한 군인의 태도가 대부분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인식하는 것 같다. 문제는 칼을 든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휘하는 자들에게 있다. 즉, 여기서 바울의 초점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권력 구조에 있다.

주의 깊게 구절을 읽은 사람은 3절의 해석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경찰을 통제하는) 다스리는 자들이 선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부패한 관료에 대해 국가와 통치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려한 이상적인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라”는 그의 명령은 통치자들이 올바른 행실과 잘못된 행실의 차이를 분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전제가 핵심이다.

분명히 바울은 일부 통치자들이 선한 사람들에게도 두려운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9장에서 바로에 대한 그의 기록이 이를 명백하게 설명한다. 13장에서 바울은 악한 통치자들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고 통치자들의 책임에 대해 설명한다. 더 큰 맥락에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더 넓은 성경적 설명으로 인해 여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 구조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할까? 적용은 꽤 분명하다. 미국에서 우리는 인종주의가 기업의 제도적 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국가의 경찰 권력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수십 년이 이상 수 세기 동안 우리 정부는 흑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국가가 칼을 휘두르며 시행하였다.

바울의 신학적 논리에 따르면, 사회 구조를 만드는 정부는 정의로운 것을 분별하고 불의를 없애고 제도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통치자나 선출된 공무원이 경찰이나 공무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할 시민의 의무가 있다.

경찰 권력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인간에 관한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이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며 국가는 청지기나 관리인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국가가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를 소유하거나 정의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 권력의 한계를 상기시키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종합하면 바울의 말은 분명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렇다, 그는 정부에 순종해야 할 기독교인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정부 상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정부가 잠재적으로 선하다고 여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종에 대한 이러한 구절은 더 큰 맥락에서 정부가 먼저 정당하게 권력을 관리하도록 요구한다.

그렇다면 경찰관은 어떤가? 국가를 대표하는 개인을 위한 성경적 모델이 있는가? 군인이 현대 경찰관과 가장 비슷한 존재라면 신약 성경에 나온 군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침례 요한의 사역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경찰의 행동에 대한 명확하고 강력한 비전을 제공한다.

첫째, 침례 요한이 전체 기독교 서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요한을 다가오는 메시아와 메시아 시대의 전령으로 임명하셨다. 모두는 그를 이사야에 묘사된 인물과 연관시킨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누가복음 3:4-6). 회개하라는 요한의 부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라는 명령이다. 귀 기울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요한은 여러 무리의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제안으로 응답한다. 그중 하나는 군인 또는 오늘날의 경찰관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사람들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누가복음 3:14)고 말한다.

로마서 13장 3-4절이 국가의 공동 책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위 누가복음의 구절은 법 집행관의 개별 책임에 대한 내용을 제공한다. 세례 요한은 강탈을 비난하지만 이 비판의 무게는 단순한 뇌물을 뛰어 넘는다. 갈취는 힘을 사용하여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며, 갈취를 당한 사람이 힘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요한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권력의 한 형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함께 가기 때문에 거짓 비난에 대한 비판과 갈취에 대한 비판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강탈당하는 사람이 따르기를 거부하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요한은 통치자의 변덕을 충족시키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군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는 바로 전형적인 예시이다. 예수님께서는 국가에 의해 살해된 진정으로 결백한 사람이었다.

사도 요한은 빌라도가 “이 사람이로다” (요한복음 19:5) 라고 한 말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긍정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품위 있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시다. 오늘날 흑인들은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양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를 모든 경우에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결백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끔찍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유대인도 조롱과 구타를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복음에 기록 된 대로, 요한은 모든 상황에서 군인들이 비인간적 행위를 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을 극복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관료 개인에 대한 요한의 권고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권고를 뒷받침한다. 모든 주민의 고유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칼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울은 통치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반면, 요한은 개별 병사들을 육체적 용감한 영웅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미덕을 요구한다. 따라서 종합해보면, 신약에서 언급된 경찰 권력에 관한 신학은 정부와 공무원 모두에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영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신학적 원리는 이론상으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이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꼭 필요하다면 신앙의 영역은 국가 문제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분명한 예시를 남겼다.

1963년 1월 16일, 8명의 성직자 (감리교 주교 2명, 감독 주교 2명, 로마 가톨릭 주교 1명, 랍비 1명, 장로교인 1명, 침례교인 1명)가 알라바마주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와 상식에 대한 호소”라는 편지를 썼다. 이를 통해 시민권 운동 시위를 둘러싼 폭력을 종식할 것을 촉구하고 양측 모두에게 법원 시스템을 신뢰하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차별에 대한 강한 입장을 피력하지 못했다.

3개월 후인 1963년 4월 12일, 8명으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또 다른 편지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마틴 루터킹과 그들이 ‘외부 선동자’라고 지칭한 남부 기독교 지도위원회 참가자들에 대한 비판도 실려 있었다.

그들은 마틴 루터킹과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증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방법론적으로 평화롭더라도 우리 지역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버밍엄에서 극단적인 조치가 정당화되는 오늘날이 새로운 희망의 시대라고 믿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킹의 업적에 대한 이 비판은 백인과 남부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적인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가톨릭교, 성공 회교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를 반대했다. 이에 관한 마틴 루터킹의 대답이었던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는 8명의 성직자뿐 아니라 복음의 요구보다 법과 질서에 초점을 맞춘 신앙에 대한 특별한 접근을 중요시했다.

그의 대답에서 마틴 루터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의가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버밍엄에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마을과 고향을 멀리 떠나 “주님이 말씀하시니”라고 말한 것처럼, 사도 바울이 고향 타르수스 마을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의 영향을 받은 세계의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했듯이, 저도 고향을 떠나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저 또한 바울처럼 마케도니아의 도움 요청에 지속해서 응하기로 했습니다.

이 편지가 출판된 지 거의 60년이 지났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광장에서 교회의 역할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마틴 루터킹이 했던 정의로운 사회 추구는 바울과 선지자들의 일과 유사했을까, 아니면 단지 당파 정치였을까? 권력 구조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비판은 그의 목회 사역의 핵심 요소였나?

많은 흑인 기독교인들에게 대답은 자명하다. 바로 우리는 신앙과 정치적 행동을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사치를 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편지는 영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간의 긴밀한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신약학자 루이스 마틴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이 악한 영적 힘의 영역 아래에 있다고 믿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갈라디아서 1:3-4).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권세는 이 땅의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1:21). 구원받지 못한 통치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하나님이 반대하는 악한 세력을 나타낸다. 이 세력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보내 인간의 죄와 함께 멸하도록 명하신 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현대사회에서 영적 악과 정치적 악의 묘사를 바울의 생각에 비춘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이다. ‘악한 현대 시대’의 관점에서 로마 노예 제도의 사악함과 통치자들이 대중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부패한 로마 지도층의 정책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영적인 힘에 의해 통치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요점은 분명하다. 제도가 악하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평가를 넘어선 정치적 평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흑인 기독교인들이 경찰관, 정치 지도자, 정부의 행동을 보고 그들을 악하다고 선언한다면,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킹의 말처럼 우리는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의 항의는 비성경적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에 비추어 우리의 상황을 돌아봐야 한다. 그의 정한 때는 비록 더딜지라도 오고 있다 (하바국 2:1-4).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에게 이 진리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개인적인 영역의 일일 것이다. 경찰에 대한 나의 희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다. 경찰은 그동안 내 삶과 선조들의 삶, 그리고 우리 국민의 삶에서 공포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도로에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우면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버지로서 나의 아들과 딸들이 같은 공포를 경험할까 봐 염려스럽다. 이 공포는 우리의 피부색만으로 우리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국가 정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두려움이 부당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경찰이 그동안 흑인을 대우했던 사례에 대한 통계를 일일이 나열하고 싶다. 그러나 이 통계가 우리의 대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설득할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더욱이 이 나라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에게 통계는 쓸모가 없다.

미국은 지난 역사 속에서도, 현재에도 우리를 보호하는데 실패했다. 칼을 휘두르며 흑인 가정과 교회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두려움만 심화 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가장 마지막에 남는 단어는 아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에만 해를 가할 수 있는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왔다.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최고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자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가 우리의 피나 두려움의 대가가 되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경찰 권력에 관한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자유의 신학과 일치한다.

Esau McCaulley는 북미 성공회 교회의 신부이자 Wheaton College의 신약학 조교수이며 <Reading While Black : African American Biblical Interpretation as an Exercise in Hope] (IVP Academic)>의 저자이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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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합니까?

구약은 신약의 윤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확히 설명합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 첫 번째 성서 ' 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 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입니다 . —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때때로 성경은 우리가 간단히 생각하는 윤리적 문제에 관해서는 모호합니다.

하나의 예로 신약 성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지시합니다 (에베소서 6:5). 이와 같은 성경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비인간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침묵하지 않습니다. 6년이 지나면 석방된 노예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신약 성서는 이 규칙을 언급하지 않습니까? 우선 첫째로 신약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보다 더 큰 로마 제국의 편에서 인간의 무자비함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구약 성서는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실제 노예 제도를 배제하며 노예 신분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최근 번역에서 구약에서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구약은 일반적으로 일이 공동체 관계에 속한다고 가정하고, 예속에 명확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에게 ‘소유’되지 않으며, 모든 봉사는 일시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았으며, 외국인 종 (소유자)도 존중과 연민으로 대우받도록 보장하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인 말씀이라고 믿지만, 우리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약 말씀 중 일부가 불편하거나 심지어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지침을 얻기 위해 성경 말씀을 찾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따르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교정하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신약을 기록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이 영감을 받았다고 믿고, 이 사실이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유익이 있다고 약속된 성경을 윤리적 목적을 위해 더 많이 의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약은 그 자체로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토라 (현대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요구가 우리가 그 영을 따라 행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4). 이를 앞서 언급한 디모데후서의 내용과 함께 생각해보면,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려면 구약 성경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구약을 읽을 때 피하는 구절들이 있지만, 그러한 구절까지도 포함하여 구약 전반에 대한 이해와 친숙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기대와 우리의 가장 큰 윤리적 질문에 대해 성경이 주는 온전한 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구약과 윤리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구약이 어떻게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의나 창조의 보존, 동성 결혼 또는 이주민 구제와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찾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부다처제나 가나안 사람들의 멸망과 같은 구약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지 몰라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우, 우리는 틀을 미리 정하고 구약 성경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길 원합니다. (”봤지? 구약은 관련성이 있어!”) 두 번째로, 우리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이해에 맞지 않을 때 구약 말씀을 회피하려고 시도합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윤리를 다루는 구약 성서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구약 성경을 우리의 필요에 맞추기보다 이해하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어려운 일이지만, 충실히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고 필요한 일입니다.

토라 완전하게 하기

구약 성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한 번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천년에 걸쳐 많은 사람의 작업에 의해 다듬어지고 쓰였습니다. 서양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문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의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르게 말씀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만 구약 성경은 체계적이지 않으며,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구약이 어렵지만 풍요로운 이유는 다채로운 다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하나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내용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관한 몇 가지 조언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그가 토라와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완전하게 한다(fulfill)”는 것이 전문 용어처럼 들리지만 마태는 “채우다(fill)”를 의미하는 일상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채우고 또 채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네가 들었다…그러나 내가 또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채움에 관한 여러 예시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을 고수하고 분노에 대한 구약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잠언은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이 말하는 것과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토라와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의미를 분명히 하십니다.

또 다른 예로 토라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위기 19:18)라고 말합니다. 이 레위기의 구절에서는 당신과 맞지 않는 이웃, 당신의 적인 이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이 좋은 이웃은 사랑할 수 있지만, 당신의 원수인 이웃을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미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당신이 누구도 미워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른 유대인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자체는 당신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추론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채움’의 한 예시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토라를 성취하셨습니다. 이웃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정의와 의로움?

기독교 윤리는 주로 원칙에 관한 것인데, 제가 사랑, 정의, 해방과 함께 마치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감정에 휩쓸리고 있다고 친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 정의, 해방이 무엇인지 명백하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의 성과가 주로 다른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사람들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장려하는 데서 온다는 데에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우리의 사고와 삶이 우리의 문화, 사회적 맥락에 의해 실질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성경 말씀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 방식이 대체로 옳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직시하고 변경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정의가 무엇인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한다고 가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규정하는 특징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정의와 의로움’으로 번역되는 구약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의’에 대한 구약의 표현으로 올바르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 구절을 해석한 같은 의미의 사회 정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 두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가 영어로 그 단어에 붙인 의미와 함께 ‘정의’ 또는 ‘의’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정의 (mishpat)로 번역된 단어는 적합한 권위와 권력의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 (sedaqah)로 번역된 단어는 충실함을 의미하며, 자신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영어 단어 ‘의’는 명예로운 개인적 생활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주로 옳은 일을 옹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와 의로움’은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노력이 많이 드는 개인적인 영역의 일입니다. 주변 이웃들을 대신하여 할 수 있는 힘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의 경우, 가족의 자원을 외부의 궁핍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가족이 일을 제공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단순히 정부가 노숙자를 위해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숙자에게 필요한 쉼터와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환경보호를 위해 정부나 기업에 로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긴 비행을 더 적게 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기독교 윤리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을 광범위하게 읽는 것이 필요하지만, 한 가지로 요약해야 한다면 토라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무엇일까요? 이 핵심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성경적 윤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22:36-40). 유대인 율법사들은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정답에 대해서는 이미 확신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교 교사들이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토라의 다른 명령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명령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명령에 토라와 선지자 전체가 의존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주장이며, 구약의 윤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됩니다. 토라를 읽으며 개별 규칙의 요점이 궁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특정 명령이 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명령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인가 아니면 이웃에 대한 사랑인가 (또는 둘 다인가)?”

한 가지 예를 생각해봅시다. 구약은 사람들이 사망한 가족을 매장할 때 몸이 불결해지며, 또는 남성이 성관계에서 사정하면 불결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순결에 관한 이러한 성경적 규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이것이 죄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순결에 관한 규칙은 당신이 무시하지 않는다면 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장례식이나 올바른 사람과의 성관계에 있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순결에 관한 규칙의 한 가지 초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요한 구별이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성경이 거룩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규칙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죽음이나 성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섹스에 집착하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규칙은 죽음이 인간 경험의 규칙적인 부분이며 또한 타락으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을 상기시켜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섹스는 인간적 행위일 뿐이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윤리가 구약 성서에서 별개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된 마음을 축복하십니다

구약 성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 몇몇 바리새인들과 하신 토론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12). 그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토라는 어떻게 명하였느냐?” 그들은 토라가 이혼을 허용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고되기 때문에 이혼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 창조의 방식을 되돌아보면 이혼이 그림의 일부로 의도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칙을 도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남자들이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을 규제하는 규칙을 제공하고 아내에게 약간의 보호를 제공합니다. 노예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토라는 하나님의 창조 이상과 비전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허용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구약 성경과 성경에서 가르치는 윤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용하니” 소중히 여긴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지런히 구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어떻게 ‘채워져야’ 할까? 구약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은 창조 이상을 어디까지 규정하고, 우리의 고된 마음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있나?

확실히, 단순히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에는 중대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윤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본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주셨습니다. 구약이 예수님의 중심이었다면 진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구약의 윤리를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는 안되는가?”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지 않을 때에도 이미 우리를 감싸 주셨습니다.

존 골딩게이는 풀러신학교의 구약 교수입니다. 위 기사는 그의 저서 <구약 성서 윤리 안내> (Old Testament Ethics : A Guided Tour (IVP Academic))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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