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말: 약자를 보호하십시오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이해해 온 것처럼, 신약에는 강력한 법 집행에 관한 신학이 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3, 2020
Source images:Library of Congress / Wikimedia Commons / Aijohn784 / Getty

나는 알라바마주 헌츠빌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16살이 되었을 때 나는 미식축구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코치들의 편지와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운동하고, 성적을 유지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건 내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찰에 의해 해를 당할까봐 두려웠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처하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어린 시절 로드니 킹 사건을 접하며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흑인들이 길에서 겪는 일들은 단순히 뉴스에서 본 문제가 아니었다. 나 또한 직접 경험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밤, 친구들과 나는 쇼핑몰에 갈 계획이었고, 같은 지역에서 파티를 열 계획이 있었다. 우리는 밤에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주유를 하고 간식을 사러 잠시 주유소에 들렀다. 기름을 넣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타서 떠나려고 할 때, 검은 색 SUV가 우리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차 한 대가 내 왼쪽으로 왔고, 다른 한 차는 내 앞에 정차했다. 순간 내가 강도를 당하는구나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누가 이 밝은 주유소에서 강도질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경찰이 차에서 나왔고,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볼 수 있게 손들어.” 한 경관이 말했다.

"우리가 왜 손을 들어야 합니까?" 내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때 내 미래가 눈앞에 번쩍였다. 내 모든 계획이 무산되면 어쩌지? 내 꿈을 겨우 과자 한 봉지와 몇 갤런의 기름과 바꾸어야 하는 걸까?

나는 친구에게 조용히 하고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고 우리는 따랐다. 나는 경찰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이 주유소가 유명한 마약 거래장소이며 우리가 마약 거래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곳에 주유를 하러 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분이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수색이 지속됐다. 물론 경찰은 수색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최소한의 사과를 기대했고, 왜 젊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수색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면허를 돌려주며 자유롭게 가도 된다는 말만 했다.

그러나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나는 무력했고 화가 났다. 장학금을 받고 빈곤에서 벗어나 가족을 부양할 기회를 잃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공포를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아무 죄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길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일곱 번 내지 열 번 정도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법적 정당성 없이 제지나 수색, 고발이나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경찰관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좋은 경찰관들도 많이 만났다. 경찰들이 업무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그 직업이 수반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해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 인종차별적 법 집행과 그들이 흑인의 몸에 가했던 위협과 같이 넓은 맥락에서 우리 나라에서 경찰이 행했던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

이 어두운 역사는 경찰의 손에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당한 최근의 사건으로 인해 표면 위로 드러났다.나라 곳곳에서 거리를 행진한 많은 시위자는 플로이드가 첫 번째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흑인 미국인들은 하루 이틀이 아닌 수 세기 동안 “무릎 아래에” 짓눌려 왔으며, 누적된 억압이 다시 한번 우리나라 전체의 화두이자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경찰의 활동에 대한 국가적 관점의 합의를 추구하기 위해 책, 팟 캐스트, 광장에서의 대화, 지역 사회의 프로젝트를 통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두 훌륭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단지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성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평신도나 목회자, 심지어 학자들까지도 종종 경시하지만, 신약은 국가 권력에 관한 신학을 분명히 언급한다. (CT의 9월호의 마이클 르페브레의 경찰과 구약 성서에 대한 글 참조)

놀랍게도 이 주제는 신약 윤리에 관한 표준 성경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었다. 하지만 협회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다. 국가가 시민에게 해야 할 대우는 신약 성서에서 벗어나는 주제가 아니며, 이러한 내용을 찾는 흑인들은 실제로 도움과 희망을 얻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구절들은 우리가 미국에서 경찰 권력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지에 관한 절대적 기초가 될 것이다.

신약의 두 구절에서 경찰 권력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시초가 되는 내용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로마서 13장 1-7절 말씀으로, 많이 비방 되거나 오해를 받는 구절이다. ‘칼’에 관한 바울의 말은 국가가 주민들을 어떻게 보호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언뜻 보기에 로마서 13장의 처음 몇 구절은 효과적인 접근으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적혀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이 구절의 초점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바울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거기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한다.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신도 독자와 학자들은 모두 이 구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말을 부적절하다고 여기며 우려했다. 그러나 린더 켁은 그의 주석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구절이 불분명해 해설자들을 괴롭게 하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료하게 설명한다.”

바울은 학대를 향한 적합한 기독교적 대응이 혁명이 아니라 순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이 땅의 반대편에 있는 잘못을 종말론적으로 바로 잡는 것뿐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종말론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더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권위에 대한 복종에 관한 그의 말은 훨씬 더 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바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연구를 살펴봐야 한다. 그가 바로 이야기를 인용할 것이 로마서 13장의 연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경시되지만, 그것은 성경적으로 정보에 근거해 경찰 권력에 관한 신학의 필수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바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로마서 9:17)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악한 왕들을 심판하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노예화하고, 가혹하게 처우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부당하고 폭군적 통치 때문에 결국 그를 멸하셨다.

바울이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법을 제정하셨다. 바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권위를 제거하신 예를 보여준다. 요컨대, 그 이야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항에 대한 금지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해야 한다. 성서 해설자들은 개인에 대한 바울의 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국가에 대한 그의 논평은 더 완전한 그림을 제공한다.

바울은 국가에 복종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설명한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로마서 13:3-4)

칼에 대한 이러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시대에 군인들이 경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푸어만은 "민간 환경에서 공공질서와 국가 통제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식 지휘하에 조직된 부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현대의 경찰과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군인의 역할이 경찰과 가장 가까웠다.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군인이 아닌 권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주민에 대한 군인의 태도가 대부분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인식하는 것 같다. 문제는 칼을 든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휘하는 자들에게 있다. 즉, 여기서 바울의 초점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권력 구조에 있다.

주의 깊게 구절을 읽은 사람은 3절의 해석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경찰을 통제하는) 다스리는 자들이 선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부패한 관료에 대해 국가와 통치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려한 이상적인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라”는 그의 명령은 통치자들이 올바른 행실과 잘못된 행실의 차이를 분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전제가 핵심이다.

분명히 바울은 일부 통치자들이 선한 사람들에게도 두려운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9장에서 바로에 대한 그의 기록이 이를 명백하게 설명한다. 13장에서 바울은 악한 통치자들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고 통치자들의 책임에 대해 설명한다. 더 큰 맥락에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더 넓은 성경적 설명으로 인해 여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 구조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할까? 적용은 꽤 분명하다. 미국에서 우리는 인종주의가 기업의 제도적 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국가의 경찰 권력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수십 년이 이상 수 세기 동안 우리 정부는 흑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국가가 칼을 휘두르며 시행하였다.

바울의 신학적 논리에 따르면, 사회 구조를 만드는 정부는 정의로운 것을 분별하고 불의를 없애고 제도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통치자나 선출된 공무원이 경찰이나 공무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할 시민의 의무가 있다.

경찰 권력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인간에 관한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이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며 국가는 청지기나 관리인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국가가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를 소유하거나 정의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 권력의 한계를 상기시키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종합하면 바울의 말은 분명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렇다, 그는 정부에 순종해야 할 기독교인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정부 상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정부가 잠재적으로 선하다고 여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종에 대한 이러한 구절은 더 큰 맥락에서 정부가 먼저 정당하게 권력을 관리하도록 요구한다.

그렇다면 경찰관은 어떤가? 국가를 대표하는 개인을 위한 성경적 모델이 있는가? 군인이 현대 경찰관과 가장 비슷한 존재라면 신약 성경에 나온 군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침례 요한의 사역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경찰의 행동에 대한 명확하고 강력한 비전을 제공한다.

첫째, 침례 요한이 전체 기독교 서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요한을 다가오는 메시아와 메시아 시대의 전령으로 임명하셨다. 모두는 그를 이사야에 묘사된 인물과 연관시킨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누가복음 3:4-6). 회개하라는 요한의 부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라는 명령이다. 귀 기울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요한은 여러 무리의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제안으로 응답한다. 그중 하나는 군인 또는 오늘날의 경찰관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사람들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누가복음 3:14)고 말한다.

로마서 13장 3-4절이 국가의 공동 책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위 누가복음의 구절은 법 집행관의 개별 책임에 대한 내용을 제공한다. 세례 요한은 강탈을 비난하지만 이 비판의 무게는 단순한 뇌물을 뛰어 넘는다. 갈취는 힘을 사용하여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며, 갈취를 당한 사람이 힘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요한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권력의 한 형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함께 가기 때문에 거짓 비난에 대한 비판과 갈취에 대한 비판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강탈당하는 사람이 따르기를 거부하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요한은 통치자의 변덕을 충족시키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군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는 바로 전형적인 예시이다. 예수님께서는 국가에 의해 살해된 진정으로 결백한 사람이었다.

사도 요한은 빌라도가 “이 사람이로다” (요한복음 19:5) 라고 한 말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긍정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품위 있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시다. 오늘날 흑인들은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양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를 모든 경우에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결백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끔찍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유대인도 조롱과 구타를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복음에 기록 된 대로, 요한은 모든 상황에서 군인들이 비인간적 행위를 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을 극복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관료 개인에 대한 요한의 권고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권고를 뒷받침한다. 모든 주민의 고유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칼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울은 통치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반면, 요한은 개별 병사들을 육체적 용감한 영웅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미덕을 요구한다. 따라서 종합해보면, 신약에서 언급된 경찰 권력에 관한 신학은 정부와 공무원 모두에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영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신학적 원리는 이론상으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이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꼭 필요하다면 신앙의 영역은 국가 문제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분명한 예시를 남겼다.

1963년 1월 16일, 8명의 성직자 (감리교 주교 2명, 감독 주교 2명, 로마 가톨릭 주교 1명, 랍비 1명, 장로교인 1명, 침례교인 1명)가 알라바마주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와 상식에 대한 호소”라는 편지를 썼다. 이를 통해 시민권 운동 시위를 둘러싼 폭력을 종식할 것을 촉구하고 양측 모두에게 법원 시스템을 신뢰하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차별에 대한 강한 입장을 피력하지 못했다.

3개월 후인 1963년 4월 12일, 8명으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또 다른 편지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마틴 루터킹과 그들이 ‘외부 선동자’라고 지칭한 남부 기독교 지도위원회 참가자들에 대한 비판도 실려 있었다.

그들은 마틴 루터킹과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증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방법론적으로 평화롭더라도 우리 지역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버밍엄에서 극단적인 조치가 정당화되는 오늘날이 새로운 희망의 시대라고 믿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킹의 업적에 대한 이 비판은 백인과 남부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적인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가톨릭교, 성공 회교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를 반대했다. 이에 관한 마틴 루터킹의 대답이었던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는 8명의 성직자뿐 아니라 복음의 요구보다 법과 질서에 초점을 맞춘 신앙에 대한 특별한 접근을 중요시했다.

그의 대답에서 마틴 루터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의가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버밍엄에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마을과 고향을 멀리 떠나 “주님이 말씀하시니”라고 말한 것처럼, 사도 바울이 고향 타르수스 마을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의 영향을 받은 세계의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했듯이, 저도 고향을 떠나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저 또한 바울처럼 마케도니아의 도움 요청에 지속해서 응하기로 했습니다.

이 편지가 출판된 지 거의 60년이 지났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광장에서 교회의 역할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마틴 루터킹이 했던 정의로운 사회 추구는 바울과 선지자들의 일과 유사했을까, 아니면 단지 당파 정치였을까? 권력 구조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비판은 그의 목회 사역의 핵심 요소였나?

많은 흑인 기독교인들에게 대답은 자명하다. 바로 우리는 신앙과 정치적 행동을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사치를 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편지는 영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간의 긴밀한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신약학자 루이스 마틴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이 악한 영적 힘의 영역 아래에 있다고 믿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갈라디아서 1:3-4).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권세는 이 땅의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1:21). 구원받지 못한 통치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하나님이 반대하는 악한 세력을 나타낸다. 이 세력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보내 인간의 죄와 함께 멸하도록 명하신 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현대사회에서 영적 악과 정치적 악의 묘사를 바울의 생각에 비춘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이다. ‘악한 현대 시대’의 관점에서 로마 노예 제도의 사악함과 통치자들이 대중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부패한 로마 지도층의 정책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영적인 힘에 의해 통치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요점은 분명하다. 제도가 악하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평가를 넘어선 정치적 평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흑인 기독교인들이 경찰관, 정치 지도자, 정부의 행동을 보고 그들을 악하다고 선언한다면,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킹의 말처럼 우리는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의 항의는 비성경적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에 비추어 우리의 상황을 돌아봐야 한다. 그의 정한 때는 비록 더딜지라도 오고 있다 (하바국 2:1-4).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에게 이 진리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개인적인 영역의 일일 것이다. 경찰에 대한 나의 희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다. 경찰은 그동안 내 삶과 선조들의 삶, 그리고 우리 국민의 삶에서 공포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도로에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우면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버지로서 나의 아들과 딸들이 같은 공포를 경험할까 봐 염려스럽다. 이 공포는 우리의 피부색만으로 우리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국가 정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두려움이 부당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경찰이 그동안 흑인을 대우했던 사례에 대한 통계를 일일이 나열하고 싶다. 그러나 이 통계가 우리의 대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설득할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더욱이 이 나라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에게 통계는 쓸모가 없다.

미국은 지난 역사 속에서도, 현재에도 우리를 보호하는데 실패했다. 칼을 휘두르며 흑인 가정과 교회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두려움만 심화 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가장 마지막에 남는 단어는 아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에만 해를 가할 수 있는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왔다.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최고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자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가 우리의 피나 두려움의 대가가 되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경찰 권력에 관한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자유의 신학과 일치한다.

Esau McCaulley는 북미 성공회 교회의 신부이자 Wheaton College의 신약학 조교수이며 <Reading While Black : African American Biblical Interpretation as an Exercise in Hope] (IVP Academic)>의 저자이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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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합니까?

구약은 신약의 윤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확히 설명합니다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 첫 번째 성서 ' 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 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입니다 . —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때때로 성경은 우리가 간단히 생각하는 윤리적 문제에 관해서는 모호합니다.

하나의 예로 신약 성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지시합니다 (에베소서 6:5). 이와 같은 성경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비인간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침묵하지 않습니다. 6년이 지나면 석방된 노예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신약 성서는 이 규칙을 언급하지 않습니까? 우선 첫째로 신약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보다 더 큰 로마 제국의 편에서 인간의 무자비함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구약 성서는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실제 노예 제도를 배제하며 노예 신분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최근 번역에서 구약에서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구약은 일반적으로 일이 공동체 관계에 속한다고 가정하고, 예속에 명확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에게 ‘소유’되지 않으며, 모든 봉사는 일시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았으며, 외국인 종 (소유자)도 존중과 연민으로 대우받도록 보장하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인 말씀이라고 믿지만, 우리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약 말씀 중 일부가 불편하거나 심지어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지침을 얻기 위해 성경 말씀을 찾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따르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교정하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신약을 기록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이 영감을 받았다고 믿고, 이 사실이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유익이 있다고 약속된 성경을 윤리적 목적을 위해 더 많이 의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약은 그 자체로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토라 (현대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요구가 우리가 그 영을 따라 행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4). 이를 앞서 언급한 디모데후서의 내용과 함께 생각해보면,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려면 구약 성경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구약을 읽을 때 피하는 구절들이 있지만, 그러한 구절까지도 포함하여 구약 전반에 대한 이해와 친숙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기대와 우리의 가장 큰 윤리적 질문에 대해 성경이 주는 온전한 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구약과 윤리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구약이 어떻게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의나 창조의 보존, 동성 결혼 또는 이주민 구제와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찾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부다처제나 가나안 사람들의 멸망과 같은 구약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지 몰라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우, 우리는 틀을 미리 정하고 구약 성경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길 원합니다. (”봤지? 구약은 관련성이 있어!”) 두 번째로, 우리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이해에 맞지 않을 때 구약 말씀을 회피하려고 시도합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윤리를 다루는 구약 성서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구약 성경을 우리의 필요에 맞추기보다 이해하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어려운 일이지만, 충실히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고 필요한 일입니다.

토라 완전하게 하기

구약 성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한 번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천년에 걸쳐 많은 사람의 작업에 의해 다듬어지고 쓰였습니다. 서양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문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의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르게 말씀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만 구약 성경은 체계적이지 않으며,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구약이 어렵지만 풍요로운 이유는 다채로운 다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하나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내용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관한 몇 가지 조언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그가 토라와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완전하게 한다(fulfill)”는 것이 전문 용어처럼 들리지만 마태는 “채우다(fill)”를 의미하는 일상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채우고 또 채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네가 들었다…그러나 내가 또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채움에 관한 여러 예시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을 고수하고 분노에 대한 구약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잠언은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이 말하는 것과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토라와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의미를 분명히 하십니다.

또 다른 예로 토라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위기 19:18)라고 말합니다. 이 레위기의 구절에서는 당신과 맞지 않는 이웃, 당신의 적인 이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이 좋은 이웃은 사랑할 수 있지만, 당신의 원수인 이웃을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미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당신이 누구도 미워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른 유대인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자체는 당신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추론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채움’의 한 예시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토라를 성취하셨습니다. 이웃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정의와 의로움?

기독교 윤리는 주로 원칙에 관한 것인데, 제가 사랑, 정의, 해방과 함께 마치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감정에 휩쓸리고 있다고 친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 정의, 해방이 무엇인지 명백하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의 성과가 주로 다른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사람들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장려하는 데서 온다는 데에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우리의 사고와 삶이 우리의 문화, 사회적 맥락에 의해 실질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성경 말씀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 방식이 대체로 옳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직시하고 변경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정의가 무엇인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한다고 가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규정하는 특징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정의와 의로움’으로 번역되는 구약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의’에 대한 구약의 표현으로 올바르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 구절을 해석한 같은 의미의 사회 정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 두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가 영어로 그 단어에 붙인 의미와 함께 ‘정의’ 또는 ‘의’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정의 (mishpat)로 번역된 단어는 적합한 권위와 권력의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 (sedaqah)로 번역된 단어는 충실함을 의미하며, 자신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영어 단어 ‘의’는 명예로운 개인적 생활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주로 옳은 일을 옹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와 의로움’은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노력이 많이 드는 개인적인 영역의 일입니다. 주변 이웃들을 대신하여 할 수 있는 힘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의 경우, 가족의 자원을 외부의 궁핍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가족이 일을 제공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단순히 정부가 노숙자를 위해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숙자에게 필요한 쉼터와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환경보호를 위해 정부나 기업에 로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긴 비행을 더 적게 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기독교 윤리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을 광범위하게 읽는 것이 필요하지만, 한 가지로 요약해야 한다면 토라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무엇일까요? 이 핵심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성경적 윤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22:36-40). 유대인 율법사들은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정답에 대해서는 이미 확신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교 교사들이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토라의 다른 명령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명령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명령에 토라와 선지자 전체가 의존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주장이며, 구약의 윤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됩니다. 토라를 읽으며 개별 규칙의 요점이 궁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특정 명령이 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명령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인가 아니면 이웃에 대한 사랑인가 (또는 둘 다인가)?”

한 가지 예를 생각해봅시다. 구약은 사람들이 사망한 가족을 매장할 때 몸이 불결해지며, 또는 남성이 성관계에서 사정하면 불결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순결에 관한 이러한 성경적 규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이것이 죄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순결에 관한 규칙은 당신이 무시하지 않는다면 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장례식이나 올바른 사람과의 성관계에 있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순결에 관한 규칙의 한 가지 초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요한 구별이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성경이 거룩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규칙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죽음이나 성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섹스에 집착하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규칙은 죽음이 인간 경험의 규칙적인 부분이며 또한 타락으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을 상기시켜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섹스는 인간적 행위일 뿐이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윤리가 구약 성서에서 별개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된 마음을 축복하십니다

구약 성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 몇몇 바리새인들과 하신 토론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12). 그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토라는 어떻게 명하였느냐?” 그들은 토라가 이혼을 허용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고되기 때문에 이혼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 창조의 방식을 되돌아보면 이혼이 그림의 일부로 의도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칙을 도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남자들이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을 규제하는 규칙을 제공하고 아내에게 약간의 보호를 제공합니다. 노예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토라는 하나님의 창조 이상과 비전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허용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구약 성경과 성경에서 가르치는 윤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용하니” 소중히 여긴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지런히 구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어떻게 ‘채워져야’ 할까? 구약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은 창조 이상을 어디까지 규정하고, 우리의 고된 마음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있나?

확실히, 단순히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에는 중대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윤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본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주셨습니다. 구약이 예수님의 중심이었다면 진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구약의 윤리를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는 안되는가?”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지 않을 때에도 이미 우리를 감싸 주셨습니다.

존 골딩게이는 풀러신학교의 구약 교수입니다. 위 기사는 그의 저서 <구약 성서 윤리 안내> (Old Testament Ethics : A Guided Tour (IVP Academic))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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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예수님이 읽으신 성경을 우리도 읽어야 합니다

구약 성서는 신약 성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그 자체로도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3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구약 성서는 항상 기독교 비평가들에게 표적의 대상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가혹해 보이는 도덕 규범과 고대 문화 규범은 오늘날에 와서는 쓸모없고 심지어 야만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논지는 아니지만, 최근 저명한 목사인 앤디 스탠리 목사가 2018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에서 구약 성경을 ‘떼어내야’한다고 제안하며 구약 성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의견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서 전문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첫 번째 성서'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이미 2세기에 이단 사상가 마르키온은 이 질문을 제시했고, 그는 구약 성경이 기독교에게 거의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는 이 견해를 발표해 파면 당했습니다. 20세기에 나치는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에서 구약 성서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수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뒤따라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최근에는 소규모 모임에서 여러 지점이 있는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설교자들이 구약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성경의 두 성서를 ‘떼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 성서가 갖는 어려움은 신약의 모든 내용이 거의 온전히 구약 성서의 구절에 의존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첫 번째 구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입니다. 구약이 없으면 독자들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윗과 아브라함이 누구인지, 이 모든 인물들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원문은 훨씬 더 암시적입니다. “계보의 책”은 그리스어로 비블로스 기원 (biblos geneses)입니다. 이는 창세기부터 명백히 암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대한 신약의 의존은 단순한 정보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일부 구절에서 신약은 구약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지식이 충분하다고 시사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6:19-31)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31절)이기 때문에 자신의 제멋대로인 형제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누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16장과 같은 말씀은 신약 성서 어디에나 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 성서 없이는 신약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와 같은 선의의 표현을 만들어 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구약에서 새로운 거짓말은 감춰져 있고, 신약에서는 구약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진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서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구약 성서에 대해 계속 궁금해합니다. 그리하여 이 질문이 남습니다 “구약 성서는 대체 기독교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제 대답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아마도 모든 것을 알려준다, 입니다.

구약 성서가 기독교 신앙에 제공하는 중요한 선물은 적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은사가 구약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신약 성서보다 구약 성경에 훨씬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뜻 중에서 귀중한 일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정직

구약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합니다. 구약 성서의 종종 체포되거나 때로는 불쾌감을 주는 솔직한 표현은 현대의 감성으로 볼 때 자주 불쾌감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39편과 같이 많은 사랑을 받는 시편에서도 여러 시편에서 발견되는 적에 대한 악랄한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저의 시어머니는 (19-22절을 제외하면) 이 시편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이 정직함은 은사이며,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적들에게 비슷한 일이 생기길 생각하거나 바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항상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시편의 잔인한 정직함은 특히 어려운 시기에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편 만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하지만 구약 성서는 전체가 정직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종종 설교적 도덕화, 심지어는 구약 성서 (그리고 성경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적 비난도 그치지 않지만 이 기록이 정직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만 보존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이스라엘이 그것을 정직하게 전달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죄와 고통에 대한 정직함은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정직하고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정직하게 기록했음을 두 가지 방법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각하게 실패한 교회의 역사에 비해 실패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정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모방 되어야 할 은사입니다.

게리슨 캐일러가 말했듯이 구약 성서처럼 정직한 책 안에 시가 풍부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처럼 좋은 시는 “우리가 익숙해진 것을 벗어나 더 진실한 설명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3분의 1 이상은 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귀중한 시를 아주 적게 제공하는 신약과 대조해보면, 신약에서 발견되는 작은 것, 특히 요한 계시록에서 발견되는 것은 대부분 구약의 언어와 상징을 인용합니다.

구약의 시는 대부분 시편에 한정되어 있지만, 신약과 비교하면 번개와 반딧불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선지자들은 ‘거의 맞는 단어’가 아닌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시편 기도는 찬양과 고통의 시이자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시를 통해 바로 ‘주의 말씀’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10-11)

시는 삶의 지혜 (잠언), 고통 (욥), 죽음 (전도서), 심지어 사랑과 섹스 (아가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논하는 데 이상적인 매체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주제는 이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서나 주제가 까다로울 때 시의 형태를 채택하는 것이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방식보다 더 어려운 주제가 있을까요?

구약 성경의 대담한 이미지에 대해 월터 브루거만은 “하나님이 옳다고 말하는 쉬운 언어는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는 쉬운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평탄한 산문보다는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명제보다 확실히 우월한 방식입니다. 시는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암시합니다. 그것은 모호하고 침묵의 상태로 있어도 보이고 드러난다. 침묵과 표현하는 사이에서 시는 모든 언어의 주이자 모든 것 위의 주이신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달하고 보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가볍게 말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구약의 시적 성향에서 배웁니다.

신학

두 번째 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 번째 은사는 신학이며, 이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정의됩니다.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 웹사이트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검색은 신약에서는 1,109건, 구약에서는 3,189 건을 기록합니다. 이러한 통계는 놀랍지 않습니다. 구약 성서의 39권은 개신교 기독교 성경의 78%를 차지합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함). 그러나 세 번째 은사는 단순히 신약 성서와 구약 성서의 양의 차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성서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교리, 특히 삼위일체의 첫 번째 구성원의 성부 아버지에 관한 주요 자료의 기록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구약을 통해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로 더 쉽게 생각하지만, 복음서에 언급된 성육신과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주심에 비추어 볼 때 구약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성서의 하나님’을 신약에서 예수님께 대항하는 마르키온과 편승할 때마다 신성한 하나됨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한 감정은 구약 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서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냅니다. 특히 이러한 구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구약 성서 이상으로 신약 성서에도 풍부합니다. 선구자인 침례 요한이 그토록 분명하게 보았듯이 (마태복음 3:7-12) 예수님의 설교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7:22).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이 참으로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편 7:11)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러한 분노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시편 7:11)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한 마음입니다. 신성한 정의 기준이 있지만,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길을 돌이키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18:7-8, 에스겔 18:32, 요나 3:10). 구약과 신약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심판에는 죄와 불의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올바르게 잡히면 하나님의 분노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백성

구약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론에 대해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중 하나는 의로운 주님과 똑같이 의로운 행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편 11 :7).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목록이 구약 성경의 많은 페이지를 차지합니다. 요점은 그 모든 세부 사항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단순한 사실입니다.

물론 신약 성서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교회론’이라는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위해 사용된 그리스어 ekklsia에서 유래 했습니다 (마태복음 16:18의 예시). ekklsia는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도 등장하는데, 히브리어 qhl (‘연합’)이라는 단어를 반영합니다. 이 단어는 신앙 공동체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네 번째 은사는 가족과 백성, 영토가 있는 나라,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함께 서 있는 (출애굽기 19:8)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되고, 때로는 처벌까지도 함께 받는 하나의 단체로써 이스라엘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신약 성서 역시 때로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공동의 이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5:1-11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개인화되고 산업화된 서구에서 신약 성경을 대부분 개인적인 관점에서 (‘예수와 나’) 읽고 정치와 사회 정의를 배제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일을 왕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시며,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엄격한 기준을 세우시는 분이지만, 출애굽기 22장 21-24절에서 이민자, 과부, 고아를 돌보는 법을 정하신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시므로 성서의 통일성의 예시를 보여줍니다.

구약 성서의 이 네 번째 은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삶이 독방에서 개인화된 경건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대신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를 넘어서 확장되는 공동의 문제입니다. 확실히 주님의 말씀을 신명기 6장을 통해 마음에 새겨야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도 주님의 지시를 받아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항상 눈에 띄게 기록해야 합니다. (신명기 6:6-9).

구약의 표식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약 없이는 신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 자체가 기독교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에 이 말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도 정확하지만 불충분합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실제로 모든 구약 성서는 계시 되었으며,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이라고 언급한 것은 구약 성서를 의미한다.

그 구절과 다음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듯이 구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디모데후서 3:16-17) 하기에 대단히 유용하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로마서 15:4)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폐와 부정이 아니라 정직의 상징이 된 기독교를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신비가 모든 언어를 넘어 겸손하고 예술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기독교, 죄와 불의의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비와 심판으로 하나 되신 삼위일체의 신학이 조화된 기독교, 속박당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요한계시록 5:9)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로 통합된 기독교, 그것이 바로 구약이 가르치는 은사로 이루어진 진정한 기독교일 것입니다.

브렌트 스트론은 듀크 신학교의 구약 교수이자 <구약 성서의 사망: 진단과 추천 치료>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흑인 예언자 목소리의 근원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출애굽기가 갖는 중요성

Christianity Today August 28,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본 글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서 첫 번째 성서 의 입지를 재고하고자 주요 학자들이 기고한 6 부로 구성된 일련의 에세이 중 마지막 글입니다 . – 편집자 주

마틴 루터 킹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아이즈 온더 프라이즈(Eyes on the Prize)>라고 불리는 시민운동을 처음 접한 것은 제가 11살 때입니다. 버밍엄에서 소방 호스에서 나온 물을 맞고 땅에 쓰러진 흑인 여성의 이미지가 눈앞에서 번쩍였습니다. 경찰견이 사람들을 뒤쫓았습니다. 화가 난 얼굴로 백인들은 학교에 들어가려는 흑인 어린이들에게 인종 차별적인 말을 외쳤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테네시 남서부의 작은 흑인 교회인 해치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 삼은 이야기에 대해 주일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아이즈 온더 프라이즈>를 본 후,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입지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모세와 구약의 선지자들, 재판관들 (우리가 ”자유 투사”라고 부를 수 있는)의 전통과 마틴 루터 킹의 유산을 따르도록 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구약은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들이 겪는 고통과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번영 복음주의와 중산층의 안락함이 주는 유혹을 받는 흑인 교회는 바로 이 유산에 근원을 두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힘

출애굽기는 그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자주 강조되어 왔는데, 이는 성도들이 직면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대대로 억압받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에게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고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애굽기 37절–8)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권력자들을 용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내가 애굽에서 내 백성의 비참함을 참으로 보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자신들의 기도도 들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억압받는 백성들이 선택 받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택한 백성들의 지위와 존재 이유를 알고, 노예 제도를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고통을 보기만 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십니다. “나는 그들의 관리자들로 인해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보고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는 억압받는 백성들이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실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노예들의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탄압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구약 성서, 특히 출애굽기의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보고 듣고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이전 시대에 노예를 소유했던 자들은 출애굽기에 신성한 권리로써 노예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신학적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노예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고, 노예들을 개종하려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영국 서인도 제도하에서 흑인 노예 제도 지속을 위해 선택된 성경의 일부였던 소위 “노예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이 성경은 신약의 거의 50%와 구약의 90%를 제외했습니다. 당연히 출애굽기 전체가 거의 제외되었습니다.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된 유대인들과 쉽게 동일시되는 반면, 농장주에게 파라오와 동일한 역할 부여하는 것은 큰 도약이 아니었습니다. 백인 노예 소유자들은 이 성경 말씀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도들 사이에서 얼마나 강력한 말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유산

수많은 흑인이 모세처럼 여겼던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의 고통과 비참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 교육 시스템 내에서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킹은 해방시키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으로 인해 백인 남부의 잔인하고 위협적인 행위로부터 억압받는 백성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신다: 마틴 루터 킹의 기도 생활>에서 루이스 볼드윈은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이 끈질긴 기도를 통해 담대한 성경적 이상을 구현했다고 믿었던 킹에게 구약 성경이 미친 영향에 대해 주목합니다. 볼드윈은 “이 시민운동 지도자는 성경적으로 기도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으며, 기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과 그의 견해에 대한 근거를 다른 히브리어 성경 자료에서 발견했습니다. 볼드윈이 말했듯이, “마틴 루터 킹에게 기도의 명령은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유한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종교적 경험, 특히 흑인 교회의 전통에 기초한 깊은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구약의 예언적 전통에 깊이 몰두하면서도 백인 위주의 부의 제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많은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기 위해 스스로 예리하게 훈련하였습니다. 그는 백인 위주의 중산층 교육을 통해 가난으로 인해 불행과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으며, 지적 능력을 통해 내면의 힘과 선지자 정신을 발휘하여 그의 언어적 은사를 착취당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멘토이자 동료였던 하워드 서먼 역시 흑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공감합니다. 그의 저서 <예수와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에서 서먼은 어린 소년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핼리 혜성을 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뒷마당에 말없이 서 있던 그들은 하늘에 넓게 퍼지는 빛을 보았습니다. 하워드가 혜성이 지구를 강타할지도 모르니 두렵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하워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삶이 도가니 강철만큼이나 단단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빛나는 말씀의 장엄한 힘이 계속해서 상기되며 내 영혼의 리드미컬한 노래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노력하고, 성취하고 … 양보하지 않는 힘으로 변화시키는 믿음과 인식이 있습니다.”

하워드 서먼이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 중요한 신념은 출애굽기와 예언적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신념이었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호소할 다른 힘의 원천이 없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해방된 자들의 고통을 위해 오실 것이라는 암묵적인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집트인부터 백인 기독교인까지

출애굽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독교인들이 억압의 역사와 경험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던 백인 억압자들의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종 백인 기독교인들은 흑인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백인 기독교인들은 노예와 착취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백인 기독교인이 흑인 억압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그러고자 하는 의도적인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흑인 교회에게 백인 기독교인 형제자매가 마치 모세처럼 상속자의 특권을 누리며 파라오의 집에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만남 이전에는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이집트 왕자의 교육에는 이집트의 궁전과 피라미드를 지은 노예에 관한 내용은 없었을 겁니다. 모세가 자기 민족의 고통을 무시하도록 교육받은 것처럼, 많은 백인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무시하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최상의 백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조차 흑인 억압의 오랜 역사에 대해 눈이 먼 것과 같은 “색맹”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출애굽기 (그리고 예언서, 유배기 문학, 유배 후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은 하나님은 결코 색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시고 행동하십니다. 모세는 백성의 고통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진정한 동정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행동하게 만들고,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까지 가기도 합니다. 아마도 백인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고, 다른 백인들의 애정이나 수용, 사랑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흑인 자매와 형제들의 고통을 고의로 무시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구약의 이야기에 빠져 시민권 운동 전반에 걸쳐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흑인 교회와 그들의 고통을 백인 기독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는 억압 속에서 흑인들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 가장 영향력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시민권 운동 중 마틴 루터 킹이라는 영적 지도자를 잃은 후, 다음 세대는 백인 지배하에 있는 그 억압 시스템으로의 정치적 진입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억압 체제와 맞서며 예언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의 죽음 이후 흑인 교회는 이전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많은 제자들은 이전보다는 더 나은 위치에 있었지만 킹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속적으로 흑인 교회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왕의 안일한 왕정 정치처럼 흑인 교회를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고 물질적 부와 타협함으로써 마틴 루터 킹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정치적 억압 시스템에 저항하여 목숨을 걸었던 신성한 영적 힘과 흑인 교회와의 완전한 연결고리를 끊어뜨렸습니다. 흑인 설교자들은 지배적인 정치 통제 시스템을 향해 대담한 진실을 말하는 선지자보다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선지자인 척 하는 이 정치인들은 백인 권력이 흑인의 고통을 덜어 줄 연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흑인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선지자보다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반기는 백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민권 운동을 탄생시킨 잠재적인 흑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백인 신학교에 겨우 은화 30냥 정도의 가치인 소수민족 장학금에 팔아 넘기며 변질되었습니다. 한때 흑인 교회에서 용기 있는 지도자를 양성했던 예언적 설교의 전통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백인 중산층 위주의 교육 기관에서 훈련된 목회자들로 인해 많은 흑인 성도들이 흑인 중산층 교회로 이동했습니다. 일부 교회는 흑인 중산층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자를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흑인 중산층 교회는 흑인 하위계층과 점차 분리되었습니다. 점차적으로 흑인 중산층 교회는 백인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을 적게 하였고, 변모하며 백인 우월주의 주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산층 흑인 기독교인들은 빈곤층 흑인들의 해방을 위해 영향력 있는 위치를 지켰습니다. 당연히 이 교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속박에서 억압받는 자들을 구출하신 구약의 방대한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흑인 아이들은 민족을 노예화하고 억압하는 제도를 향해 싸우는 모세, 에스더, 여호수아, 삼손, 드보라, 다니엘, 느헤미야, 다윗, 바쉬 티, 기드온, 룻,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한때 구약 성경에 근거해 설교하고 기도하는 풍요로운 전통에 뿌리를 둔 흑인 교회는 흑인 중산층과 흑인 하위계층 사이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는 조짐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20여 년 전에 PBS의 특별 프로그램 <미국 흑인의 두 나라(The Two Nations of Black America)>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오늘날 역사상 가장 거대한 흑인 중산층과 역사상 가장 거대한 흑인 하위계층이 존재합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제 백인 인종주의의 반대쪽에 생겨난 흑인 계급주의 현상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빈 맥믹클은 그의 저서 <흑인 중산층을 향한 설교>에서 흑인 교회의 설교자에게 가장 큰 도전과제는 흑인 중산층과 하위층 사이의 분열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흑인 중산층 교회는 흑인 하위계층과 소통하기보다는 백인들의 부의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고자 더 노력했습니다. 맥믹클은 아모스 6장 1절을 인용하면서 “시온에서 편안한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흑인 중산층 교회가 세상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흑인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물론 마틴 루터 킹은 필요할 때마다 설교단에 서서 출애굽기, 이사야, 아모스서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설교자들의 역사를 따르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흑인 중산층 교회가 억압받는 흑인 하층 계층의 고통을 위해 다시 헌신할 것인가? 중산층이 억압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받는 형제자매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을 것인가?

구약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이 나라에서 고통받는 흑인들을 바라볼 때 신성한 연민으로 공감하도록 만듭니다. 흑인 중산층 교회는 예언적인 목소리를 되찾고 속박의 장소로 돌아가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유의 신이시며 여전히 억압 체제에 들어가 억압받는 희생자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의 해방된 마음과 입을 통해 폭정의 근간을 흔들고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체계를 바로 잡을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흑인 교회가 여전히 노예화를 옹호하는 불의한 체제 내에서 다시 한번 제 임무를 수행하려면 신성한 주제를 추구하며 영향력 있는 기관으로써 구약 성서의 상속된 유산을 유지해야 합니다.

제리 타일러는 성경, 선교 및 사역의 부교수이며 애블린 크리스챤 대학교의 칼 스페인 인종 연구 및 영적 행동 센터의 창립 이사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교회가 결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결혼율이 하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1, 2020
Illustration by Keith Negley

레이첼이 인생에서 배운 것은 헌신이 아니라 자유와 독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20대에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진지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여자들과 데이트하는 법을 잘 알지도 못해요.” 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오스틴으로 이사한 후 레이첼은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 큐피드’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는 싼 여자라서 무료였어요”라고 웃으며 그녀가 농담했습니다. 레이첼은 개종하기 전에 결혼을 먼저 했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은 마치 하나의 거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성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동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혼은 나라에서 발행해주는 하나의 종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신앙이 생기고 남부 침례 교회에 가입한 후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며 성스러운 관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결혼 이후 자녀의 출생으로 인해 레이첼과 남편 사이의 사랑은 더 커졌습니다. 가족의 탄생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많은 남성이 여성과는 달리 직장, 결혼 및 가족을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그녀는 확신합니다. “저는 남성이 공급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레이첼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레이첼은 결혼의 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실제로 레이첼의 남편처럼 결혼과 가족을 선택하는 남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8년 인구 통계 조사에 따르면 25세에서 34세 남성 중 35%만이 결혼했으며, 2005년 50%와 비교했을 때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 숫자들은 명확하고 무서운 궤적을 향해 갑니다.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사랑 또는 경제적 실용성의 이유로 지난 수천 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결혼에 관해 전통적,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여성보다 남성이 결혼에 더 관심이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념적이며 단기적 관계 안에서의 새로운 규범을 따르며 ‘선택권을 계속 열어두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우리 시대 결혼의 또 다른 새로운 방해물은 바로 전염병입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경험으로 몇 달간, 많은 결혼식이 지연되고 있으며, 모든 새로운 관계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결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기 훨씬 전에, 저는 사회학자로서 특히 교회 안에서 결혼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퍼져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결혼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결혼을 장려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제에 대해 예외적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길 권하는 전반적인 문화적 메시지에 어떻게 저항하고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 학문 분야에서 제가 생각하는 결혼의 개념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후기 윤리학자 돈 브라우닝은 학계에서 결혼은 이제 다른 단어와 같은 범주에 있는 기피단어로 간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점까지 추가되면 동료들 사이에서 유행에 뒤처졌다는 낙인이 찍히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계속 조사를 밀고 나갔습니다. 1년 동안 글로벌 리서치 팀과 멕시코,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 레바논, 나이지리아, 미국 등 7개국에 걸쳐 약 200명의 교회 청년들과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이름은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습니다) 레이첼과 같은 일부 인터뷰 대상자는 최근 결혼했거나 약혼했지만 대다수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27세였습니다.

연구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회의론은 서구를 넘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멕시코 시티에서 모스크바, 베이루트에서 라고스까지도 퍼져 있었습니다. 자료를 연구하고 흩어진 퍼즐 조각을 모으면서 전 세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결혼과 관련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선택, 더 많은 선택, 더 큰 유혹, 더 높은 기대, 지속적 불안 및 고질적인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결혼 과정에 관한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점을 충분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제도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직면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의대를 다니는 25세 안데르는 곧 결혼합니다. 의사인 동료와 6년 동안 교제한 후 결혼하는 이 남자가 결혼 전에 확신이 넘칠 거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 두려운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구속되고 타협해야 하니까요.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르는 것들이 있겠죠.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문제가 될 겁니다.” 그에게 정확히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지 묻자 “부부 사이에는 분명 다른 점이 발생합니다. 배우자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를 겁니다.” 6년간 교제했으면 누군가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않냐고 내가 그에게 묻자 “전 그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안데르는 자신의 신앙을 지지해주는 성도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배경이 자신의 고민에 관한 충분한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결혼 전에 느끼는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불안을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불안이 자신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병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좋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 섭니다.”

안데르는 결혼율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 남자 중 한 사람입니다. 세계 가치관 조사의 자료에 따르면, 조사한 7개국의 교회 성도들은 거의 모든 연령대에 거쳐 결혼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예측 결과는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폴란드 여성의 76%는 30세에 결혼하고, 35세는 88% 결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미국과 스페인에서 같은 연령의 여성보다 약 10% 높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교회 성도들과 비성도들 사이의 결혼 격차는 특히 두드러집니다. 미국에서는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남성의 72%가 35세에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미국 남성은 50%만이 결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관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014년 제가 연구원으로 재직하는 오스틴 연구소가 한 전국적 설문 조사에 따르면 20세에서 39세 사이의 자칭 복음주의자 중 56%가 현재 결혼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수치는 같은 연령 인구가 기록한 42%를 훨씬 상회합니다. 4년 후에 실시된 조사에서 수치는 명백히 하락했습니다. 2018년 후반에 복음주의자 20~39명 중 51%가 결혼했으며, 전체 인구의 40%가 결혼했습니다. 숫자는 여전히 높지만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거하고 있다고 말한 복음주의자들은 같은 기간에 3.9%에서 6.7%로 증가했습니다. 동거를 지지한다고 밝힌 이들은 2014년 인구의 16%에서 2018년 말까지 27%로 증가했습니다. 설문에 응한 복음주의자들 중 소수만이 결혼이 ‘낡은 인식’이라고 말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은 결혼을 대체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공식 교회 통계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백한 감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간행물인 교회 통계연감을 살펴보면 미국의 가톨릭 결혼은 1965년 이래로 10개의 장례식마다 9개의 결혼식이 있었으며, 59%가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7년에는 이 비율이 10대 3.7로 감소했습니다. 평균 연령이 40세 미만인 젊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는 한, 참석해야 할 장례식이 결혼식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요인 중 하나는 안데르와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적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부부가 서로 더 헌신할 수록 의심은 줄어들며, 특히 재정과 관련된 경우에 그러합니다. 결국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으로 함께 좋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전도서 4:9~12).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더는 이런 식으로 결혼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국가를 불문하고 물질적, 사회적 또는 심리적 불확실성을 종식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서 만난 29세의 정통 기독교인 빅터를 포함해 인터뷰한에 응한 많은 사람에게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을 갖고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복잡 해집니다. 아내가 불안정하거나 불행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야 할까? 작고 후진 집에 살 수 있을까? 현대 대도시의 상황에서 가족을 만든다면 여러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겁니다.”라고 빅터가 말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라는 전염병이 어떻게 퍼졌는지에 관한 것은 성 혁명, 축소된 경제 또는 표준 이하의 남성 등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면, 결혼 생활에서 얻게 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 기대하는 것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결혼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이제 성인이 되는 기본적인 관문이 아닌 성공적인 삶을 증명하는 하나의 주춧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구조물을 마무리하려면 주춧돌이 필요한데, 결혼이 바로 그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초가 있어야 건물이 세워지며, 이 과정에서 마모는 반드시 발생합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봤을 때, 재정이 가난한 상태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면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만, 이는 젊은 시절에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고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아직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신호로 여겨집니다.

러셀 무어는 그의 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폭풍 속의 가정>에서 탄식하면서, 결혼이 자기희생이 아닌 ‘자아실현의 도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미시간 출신의 27세의 클로이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설명했습니다. “20대 때에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되죠.”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만연한 이 관점으로 본다면 결혼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희생은 30번째 생일 즈음에 자연스레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닌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제도의 위기는 발전된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라고스 출신의 28세 미혼 오순절파 교인 디디는 분명한 결혼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을 때”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목표한 모든 것을 성취한 다음 결혼을 할 거예요.” 라고스 출신의 또 다른 24세 미혼 여성도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오 제발! 결혼으로 인해 고통받을 수 없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희생에 대한 낮은 관용을 나타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희생하고 싶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이야기에 주저했지만, 실은 이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따르지 않은 한 부부는 미래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연구 중인 폴란드인 가족의 사례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24세 파웨와 29세 마르타는 현재 크라쿠프에 거주하는 부부입니다. 마르타는 한 살짜리 딸을 키우는 주부이며 파웰은 인근 대학의 철학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크라쿠프의 이 부부는 여러 방법으로 현실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르타는 결혼식이 온 동네 사람들의 축제로 여겨지는 작은 마을 출신인데, 두 사람은 작은 결혼식을 하기로 결정해 돈을 절약했지만 그로 인해 사회적 유대를 시험 당하기도 했습니다. 파웨는 “우리가 큰 피로연을 열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파웨 부부는 친구와 이웃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결혼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이 이전과 바뀌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마르타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20-30년 전과 비교해 현재의 결혼은 위안을 찾기 위한 목적이 더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가족과 부모 때를 생각해보면 그때는 돈이나 집이 없이도 시작했죠.”

그녀와 파웨는 현대의 트랜드를 따라가지 않고 결혼에 대한 전통적이며 기본적 관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하는 삶은 쉽지는 않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이 외면하는 ‘창조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들처럼 현실적이고 기본에 충실하며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접근하는 부부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은 점점 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지고, 더 이상 전 세계 성인 대다수가 선택하고 누리는 관행으로 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 특권층만이 선택하는 자발적이며 소비 지향적인 행위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결혼을 통한 이점은 두 사람의 부와 소득을 통합한다는 점이 있는 반면에, 서로에게 경제적 도움이 못 되는 경우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을 통해 사회 정의를 이룬다고 생각할까요?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물론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 반드시 문제는 아니며 강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점은 결혼을 늦게 할수록 결혼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더 적은 수의 사람들만 결혼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결혼율이 줄거나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여성들이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다리기 지쳤다”라는 말을 자매들에게서 자주 듣습니다. 대부분의 성도 중에는 결혼에 관심이 있는 여자의 비율이 남자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 학자들은 종종 이러한 추세에 대해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이는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들은 능력이 적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며, 그 힘은 섹스를 포함하여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자매들에게 이러한 역동적인 상황은 그들을 이중적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나는 결혼을 약속할 만한 상대와 혼전에 잠자리를 가져도 될까? 아니면 혼전순결을 지키고 그가 날 떠날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 등의 고민을 자매들은 하게 됩니다.

유엔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25세의 레바논 여성 파라는 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지만 배우자를 마냥 기다리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파라와 같이 레바논에서 대부분의 미혼 성인 자녀들은 결혼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성직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 사는 아파트의 많은 부부에게 조언을 해주는 분입니다.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그녀도 대화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녀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구혼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독실한 레바논 여성들이 시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 베이루트시에서 살기 위해 월급을 초과하는 엄청난 생활비가 들기 때문에 레바논의 기혼 여성들은 미혼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곤 합니다. 또한, 여가 시간에는 가사를 돌봐야 할 책임까지 있습니다.

“두 배우자가 모두 일하고 귀가하면 피곤한 상태죠. 아이들을 갖기 전에도 부부는 함께 앉을 시간이 없어서 미루게 되는 것 같아요. 토요일이나 주말까지 밀린 일을 하느라 과부하가 걸리고 매우 피곤합니다.”라고 파라가 말했습니다.

따라서, 파라는 분명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결혼의 모습이 바뀌고 있어요”라고 파라가 말했습니다.

이러한 역동적 변화는 레바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배우자들은 서로의 커리어를 지원하고 평등한 부모로 양육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많은 영역에서 희생하기를 서로에게 기대합니다. 이러한 조건 중 일부는 경제적 부담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지만 내부적으로 생성되고 선택적으로 적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고자 한다면 사회 심리학자인 엘리 핀켈이 이름 붙인 결혼의 “숨 막히는 구조”에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결혼을 말하다>의 저자인 팀 켈러도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은 결혼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한 관점을 생각할 때, 결혼 생활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할 때 애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상호 제공하는 공식화된 성관계의 결합이라는 차원에서 결혼에 여전히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이지 않고 구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결혼은 오랫동안 배우자들 사이의 불평등한 교류에 의존해 왔습니다. 남녀는 서로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 개념에 많은 사람들이 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결혼의 기본이 전문화와 교환의 의미라면 결혼은 점점 시대착오적인 사회적 형태로 보입니다.”라고 UCLA의 인구 학자 발레리 오펜하이머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습니다. 결혼율의 감소가 그녀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실망할 일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법적 노력은 결합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혼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택권, 기술, 성 평등, ‘저렴함’ 성행위, 세속화가 증가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연구자로서 결혼의 소멸을 연구하는 것은 파고든 곰팡이가 서서히 오래된 참나무를 천천히 파괴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좋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습니다. 참나무는 멸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결혼은 점점 더 ‘기독교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미래가 불확실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연구 조교와 함께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성스러운 용어로 묘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레이첼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가정 교회, 독창적인 연합, 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연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답변에 만족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저서 <결혼론>에서 그는 결혼을 인간 사회의 첫 번째 자연적 유대라고 확언합니다. 실제로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가지 선함’ (신실함, 후손, 성례)의 일부를 참조하여 결혼을 정의했습니다.

이 세 가지 선함은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관행이 무시되거나 훼손될 때마다 결혼제도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세속적 동료들보다 이 선함을 위해 더 헌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이 결혼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결혼제도가 서서히 ‘기독교적’인 일이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 서구 국가의 세계 가치관 조사의 수치는 이를 상당히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위 표 참조]. 결혼 패턴에서 보여지는 성도들과 비성도간의 차이가 수십 년 후에는 훨씬 더 큰 차이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 결혼은 세계적으로 종교적인 이슬람교도, 정통 유대인,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점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념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설문 조사는 동시에 좋은 결과와 안 좋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결혼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 결혼에 더 많이 실패하기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행인 점은 여러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결혼에 대한 중대한 사회적 지원과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고되고 희망적인 공간에는 결혼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이 놓여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지. 그러나 무언가를 바꾸어 나가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어.” 나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가 현명한 말을 했습니다.

서구의 세속화가 결혼 생활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믿음이 우리 삶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결혼의 수호자가 된다면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교회를 보호하고 장려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연구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유사교회(parachurch) 조직의 역할 또한 중요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의 결혼을 장려하기 위한 목회적인 노력에 대한 설교는 종종 들었지만 일관된 성공담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특히 미국에서)은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짝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지만(그 중 그리스도인을 선호) 사람들은 알고리즘을 통한 짝짓기 보다는 실제 사람을 통해 소개받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중매인은 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지 않은가). 활기 넘치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과정을 겪으면 만족도가 컸습니다. 교회의 회중은 종종 규모가 너무 크고, 소규모 그룹은 너무 작고 선택권이 없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중간 규모의 공동체가 가장 적합합니다. 기독교적 공동체가 갖고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때로는 문화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또래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연령이 늦어짐에 따라 대학 졸업 후 사회에서 생성되는 중간 규모의 공동체 모임이 결혼의 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크라쿠프에서 결혼한 부부인 파웨와 마르타는 두 가톨릭 단체가 결혼 전후에 그들의 결혼을 도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인근 도미니카 공화국의 청소년 단체였으며, 다른 하나는 폴란드, 레바논 및 스페인에서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이 언급한 최대 50명으로 구성된 교회 기반 공동체의 운동인 신교리교육운동(Neocatechumenal Way)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본국의 기독교학생회 및 감리교 학생선교회와 같은 대학 조직에 대해 들었습니다.

즉, 젊은 그리스도인이 외로움이 아닌 거룩함에 초점을 맞췄을 때 배우자를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간단하고 생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CS 루이스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을 겨냥하면 땅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를 정하는 사람이 모두 결혼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비 불균형은 지속적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신앙과 제자 훈련에 집중한다면 결혼 생활에 유익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결혼의 시작은 개인적 방식과 축적된 경험을 통해 생겨납니다. 한 러시아 인터뷰 대상자가 언급한 것처럼 타인의 나쁜 사례는 ‘결혼에 대한 일종의 백신 역할’을 합니다. 대조적으로, 좋은 예는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범적인 이야기만 하며 결혼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하거나 포장할 수 없으며 우리의 노력이 성공하기를 기대합니다. 어떻게 정의하든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것은 전통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공동체 훈련을 통해 전통을 강화하는 것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달 만에 결혼하는 과달라하라 출신의 34세의 학교 상담사인 토마스는 이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하는지는 강한 인상을 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부부관계가 아름답다면, 정말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나도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열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결혼을 우상화 하거나 지나치게 이상화 시키는 함정을 피해야 합니다. C.S.루이스의 “천국을 향한 목표”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결혼의 본질을 생각하고 결혼에 대한 오늘날 만연한 세상의 물질적, 심리적 기대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 결혼은 부활의 때 하늘에서는 없을 지상에서의 일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2:30).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번영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일상에서(또는 매 순간) 희생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나타낼 기회가 되며, 영적 진보를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제 서구에서는 젊은이들은 남편과 아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수많은 희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결혼 생활이 건강한 사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 여러 면에서 배우자와 자녀 뿐만 아니라 가정 밖의 세상을 향해 실질적(그리고 영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서구사회의 성공은 가족의 사회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를 해체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결혼이 무엇인지 설교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에 대한 영원하며 탁월한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멋진 과업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실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마크 러그너러스 (Mark Regnerus)는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 (University of Texas)의 사회학 교수이며 오스틴 가족 및 문화 연구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이다. 그의 새 저서, <기독교 결혼의 미래>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91일에 출간된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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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모든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내적 투쟁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영적 훈련에 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1, 2020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저는 구약 신학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구약을 사모해왔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 묵상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 시간 동안 저는 자연스럽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구약 성경에 이끌렸습니다. 성경과 묵상노트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성경공부 교제나 시집을 읽으며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히 시편은 놀라웠습니다. 시편은 분노와 슬픔, 외로움과 의문, 그리움과 열정, 예배와 경외감 같은 제가 청소년기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편에 몰두했을 때 마치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준 것처럼 위로를 느꼈습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고백이나 적들에 대한 그의 고백을 읽을 때, 저는 하나님의 앞에서 고백할 수 없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계를 벗어난 것은 없었습니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열정적이지만 우울한 소녀이며 목사의 자녀인 저에게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은 저에게 숨 쉴 곳이 되어 주었고,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약의 가르침(역시 중요하지만)이 아닌 구약의 위대한 기도자들과 실제로 함께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시편 필자들을 통해 공허할 때 말씀을 얻었고, 덕분에 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의해 제 영성이 형성되는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형성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성’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문화에서 다소 모호하고 아주 흔한 용어입니다.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명상에서 등산에 이르기까지, 농구 코트에서 운동선수가 느끼는 ‘흐름’이나 자신의 예술에 휩싸인 예술가의 무의식 상태, 대성당에서 드리는 조용한 예배 뿐만 아니라 요가 연습에서 단순히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까지도 모두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성의 언어는 불분명하고 무정형적이며 중심이 단단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성이나 종교적인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신비로운 비현실적인 감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를 우리가 되찾아서 잘 활용해봅시다. 간단히 말해서, 영성은 인간이 하나님, 진리, 개인적 중요성 및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도달하는 모든 방법을 뜻합니다. 모든 인간은 몸과 영혼과 영을 가지고 있으며 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영성의 개념이 기독교라는 단어와 결합되면 더 명확한 관점이 나타납니다. 브래들리 홀트는 그의 저서 <기독교 영성사>에서 기독교 전통적으로 이 용어는 “인생 경험을 위한 첫 단계”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시작점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홀트가 말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과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령’,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옹호자이자 조언자가 되시고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보내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인격을 의미합니다. 필립 쉘드레이크가 그의 저서 <영성의 역사>에서 주장했듯이, 바울의 편지에서 말한 “영적인 사람”(고전 2:14-15)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서 하나님의 영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성을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영과 신성한 영을 모두 의미하는 넓은 성경적 개념인 영의 어원의 중요성에 집착합니다. 신성한 영이란 구약 성경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며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분명히 기독교인의 영성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활성화되고 인도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어가 일반적이고 부정확하게 사용되어 의미가 누락 될 수 있는 상황에도 특정한 힘을 부여합니다.

구약으로 함께 하는 기도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영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발점은 각각의 그리스도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지만, 우리는 각자 특정한 방식의 그리스도인 제자도를 갖고 있습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듯이 “그와 함께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와 함께” 합니다.

다양한 전통, 교파 및 종교적 질서가 이러한 방식을 구현하고 성문화합니다. 홀트는 “예시로 예수회, 루터교도, 페미니스트들은 각각의 주제와 관행의 특별한 조합으로 인해 독특한 특징을 갖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영성에 있어서 우리는 가정, 회중 또는 민족 집단에서 이미 친숙한 전통에만 단순히 머물지 않고 그 전통과 전 세계 기독교인에 대해 폭넓은 견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전통을 살펴보면 더 큰 범위의 영성에 눈을 떠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 지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양한 부차적 자료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구약 성서 (성서의 대부분)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재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가 우리 영성의 주된 표현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웨스트민스터 그리스도인 영성 사전에 의하면 “기도는 간청이나 청원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부를 의미합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저에게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모든 방법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라는 행위를 함으로써 기도를 통해 형성됩니다. 시편에 대한 저의 초기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것이 정확히 수행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그의 유대인 제자들이 수련했던 기도를 통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순전히 포괄적 장르의 관점에서 기도를 살펴본다면, 시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기도, 슬픔의 기도와 감사의 기도, 깊은 겸손을 표현하는 참회의 기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담대하게 부르는 기도, 즉흥적인 기도와 성전 전례,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나 친밀함을 표현한 짧은 찬가 등 깊은 질문과 의심을 표하는 기도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대-기독교 관습에서 매일 시편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성 성장을 위한 구약 성경의 유일한 역할이었다고 하더라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시편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저는 구약 성서를 통해 신학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영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30대 초반 즈음 말씀과 체계적인 신학만으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저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게다가 저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찾고 있었으며 신약 말씀 역시 예전처럼 제 마음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복음적 양육의 특징이었던 자유로운 행동주의로 인해 저는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는 확신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확실한 것 한가지는 전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그리고 그때 제 이야기가 열왕기상 19장 엘리야의 이야기와 교차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영적 지도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큰 성공을 거둔 엘리야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버리고 고독히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이것은 가장 깊은 고독이자 내면이며, 엘리야는 알지 못했지만 그 고독을 통해 선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를 접했을 때 자세한 사항은 다르지만 저도 내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복음주의 어느 누구도 저에게 고독과 침묵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저를 이 길로 인도하기 시작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정통 기독교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싶었는데, 구약 성경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 (그의 경건한 이야기가 아님)는 고독과 고요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안식처로 삼으며 고독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간은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하나님의 질문을 들을 수 있는 곳, 내면의 혼돈이 안정되기 시작하는 평화의 장소, 그리고 마침내 다음 단계를 위해 하나님의 인도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집중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없이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간과 그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엘리야의 경험을 통한 인간성 그대로에 대한 무언가가 저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다시 역동적인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리더십의 요구와 도전이 강화됨에 따라 저는 성경에 있는 인물 중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리더에게 일어나는 일은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장기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모세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리더십에 대한 자세하고 깊은 영적 관점을 발견했습니다. 어쩐지 모세의 이야기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간적 요소를 더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았고, 그의 사투와 그 과정의 모든 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려움과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그는 어떻게 오랜 사역을 견뎌냈을까?” 모세가 리더십으로서 훌륭한 전략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를 끌리게 한 그의 신성한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이는 고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정확히 행하는 신성한 변화였습니다. 모세에게 리더십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고, 이것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한 접근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의 동반자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인생에서 리더로 살아온 과정에서도 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삶에 대한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 제 리더십의 경험을 뒤집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지속적으로 영적 수준에서 강화되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어라

제 경험상 구약의 이야기는 내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신비롭기까지 한 영적 삶을 보여줍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응답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노래, 시, 기도문에 담겨있는 찬양과 하나님과의 격렬한 씨름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도 받아들이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엘리야가 평생동안 지속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 고독의 강력한 결과를 조명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순간에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이자 재판관이었던 드보라를 통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사기 4장). 사역에 부름을 받은 청년으로서 저는 이 점을 배워야 했습니다. 또한 여성 지도자와의 협력의 가치를 알고 힘든 영역으로 함께 걸어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따른 위험과 보상을 기꺼이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락과 같은 남성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능력이 자라면서 엘리가 사무엘을 도운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 이것은 새로운 영적 지도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방향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중요한 짤막한 성경적 묘사입니다. 한밤중에 어린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엘리가 사무엘이 다시 깼을 때 인도한 방식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완벽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바로 영적 감독관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인 경험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이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저 우리 안에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경험을 내면에서 비추어 우리에게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통해 이러한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기대하도록 초대합니다. 추후에 우리가 지식이나 선견지명이 부족해 어떠한 어려움에 빠진다면, 구약 성서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게 바로 그 순간이군요. 저도 경험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루스 헤일리 바톤은 경험이 많은 영적 지도자이며 트랜스포밍 센터의 창립자이며, <리더십의 영혼 강화: 사역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 찾기 (IVP Books)>의 저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코로나19 이후 소울메이트를 결혼 상대로 찾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미국을 위한 희망 : 더 많은 부부가 가족을 우선시할 것입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21, 2020
Illustration by Keith Negley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과 이로 인한 경제적 낙진은 미국 가정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부모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그중 많은 이들은 누군가의 조부모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들 가정과 자녀의 삶을 바꾸어 놓을 불안정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실직으로 인한 이혼으로 미국의 여러 부부가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남편이 실직한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정규 직장이 없는 남성은 이혼할 확률이 약 33% 더 높지만, 여성의 실업으로 인한 가정 분열의 위험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경제적 불확실성과 격리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로 인해 가정에서의 갈등과 폭력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개의 대도시를 조사한 잡지 이코노미스트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대부분 범죄는 감소했지만, 가정 폭력에 대한 보고는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회 학자 마크 리그너러스가 지적했듯이, 결혼율은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떨어지고 있었으며 2018년에 기록적인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현재의 불황과 같은 경제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결혼하기를 꺼릴 것이며 결혼율은 더욱 떨어질 것입니다. 결혼율의 감소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사람들은 불안정한 경제적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젊은이들 중 최소 3분의 1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 위기와 출산율의 감소와 함께 결혼율의 지속적인 감소로 인해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수백만의 미국인은 중국인이 소위 말하는 '헐벗은 가지' 즉 친족이 없는 남성과 여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헐벗은 가지'에 속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전염병, 사회 불안, 개인 채무 변제 또는 경제 위기와 같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힘듭니다. 부정적 변화에 직면할 때, 이들은 중년과 특히 노년기에 필요한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서적 지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남성과 여성은 결혼과 가족의 의미, 방향 및 행복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많은 미국인이 특히 그러할 것입니다.

이는 미국 가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위기 가운데서도 한 줄기의 희망이 있습니다. ‘소울메이트’와 같은 결혼의 개념은 희미해지고 ‘가족 우선적인’ 결혼 모델이 부각 될 것입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가족 우선적인 결혼 환경은 어린이들에게 안전한 가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소울메이트 결혼 모델은 결혼이 두 사람 사이의 강렬한 정서적 또는 낭만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는 소울메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수많은 노래, 할리우드 영화 및 많은 자기계발 서적을 통해 늘 듣습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또는 댄앤셰이와 저스틴 비버의 노래 <10,000 Hours>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이 만연한 신화적인 개념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극도로 비현실적인 기대하고 결혼하게 되며,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으로 인해 종종 이혼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소울메이트 모델은 특정 경제 및 정치 조건에 따라 예측되기도 합니다. 50년 전, 심리학자인 엘리 핀켈은 아브라함 매슬로가 정의한 욕구단계설에 따른 ‘마운트 매슬로 (Mount Maslow)’라는 가설을 통해 세우고 부부가 이를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개념은 정부와 시장이 음식과 주거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을 책임져준다면 미국인들이 단지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결혼한 부부가 정서적 연결, 개인적 성취, 결혼의 행복과 같은 '자아실현'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 불안, 지속적인 질병 및 무능한 정부 등의 침울하고 힘든 세상에서 소울메이트의 신화는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에게 더는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와 시장이 자녀 양육 및 교육, 가사, 가족 사업 또는 노부모를 책임져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 교회의 지원 등의 헌신과 지역 사회 지원이 필수적인 자녀 양육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재발견할 것입니다. 즉, 부부는 결혼에서 둘 사이의 감정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 대부분의 가정은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질 것입니다. 최근의 조사는 우리에게 그 기준점을 제공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대불황 동안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미국인들이 결혼 약속을 더 굳건히 했으며, 많은 경우 이혼이나 별거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인들이 결혼 생활에 더욱 헌신하고 집중하면서 이혼율은 지난 경기 침체 이후 20 % 이상 떨어졌습니다.

가족 우선 모델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중요시합니다.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가족연구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윤리를 받아들인 부부는 별거가 가능한 선택이라고 믿는 사람들보다 이혼할 가능성이 적다고 합니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적인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캘리포니아의 부부 중 “사랑이 존재하는 한, 이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 ”고 약속을 한 사람들의 77%가 결혼 생활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이혼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라고 답한 사람 중 82%가 결혼 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결혼에 대한 보다 헌신적인 접근 방식은 부부에게 더 큰 신뢰, 정서적 안정 및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어 행복하게 결혼을 지속할 확률을 높입니다.

결혼이 더 중요해지고 자녀 출산의 선택권이 생김에 따라 온전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비율이 증가하여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대불황의 결과가 이런 일을 초래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혼의 감소와 혼외 출생한 아기의 비율 감소로 인해 결혼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비율이 증가했습니다. 대유행 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가족 우선적 결혼에 대한 개념이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결혼한 미국인이 독신이나 이혼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감정적, 재정적 상태로 이 유행성 시대를 버틸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연구결과, 일반적으로 결혼한 성인이 독신 성인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미국 기업 연구소의 페이튼 로스와 함께 진행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결혼한 미국인은 독신인 미국인보다 외로움을 느낄 확률이 약 30% 적습니다. 또한, 결혼한 부부는 경제적으로 더 나은 안정성을 누리며 독신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으며, 미혼인 미국인보다 더 많은 돈을 절약하고 친족에게 더 쉽게 경제적 지원을 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가족 우선적 구조의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정서적 교제는 결혼 생활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안정된 가정을 제공하고, 이를 유지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돕고, 서약을 지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교회는 결혼부터 장례식 때까지 지역 사회에서 가정의 구성원을 지지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가족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기적으로 함께 기도하는 부부는 활기찬 결혼 생활을 즐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합니다. 리그너러스가 언급한 것처럼,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미국인들보다 결혼할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비록 세상에서 많은 것이 황폐해지고 한동안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지만, 전염병의 시대 속에서도 결혼한 가정의 장래는 밝아 보이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하기 위해 결혼 또한 더욱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될 거로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특히 그리스도인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W. 브래드 포드 윌콕스는 버지니아 대학교의 국가 결혼 프로젝트 책임자이며 가족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입니다. 알리세 앨헤이지는 가족연구소 블로그의 편집자입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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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인터뷰: 끊임없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겸손하게 전염병에 대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막을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과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10, 2020
Illustration by Rick Szuecs / Source images: RealPeopleGroup / Getty / Andre Ouellet / Unsplash / Cynoclub / Envato

24시간 뉴스 보도, 공중 보건 전문가들의 인터뷰, 그리고 다양한 전염병 퇴치 전략을 논의하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조언 등 우리는 코로나 19 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의견의 홍수 속에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대답을 듣고 싶은 많은 질문에 대한 확답을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속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 하나님과 팬데믹: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저자이자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성경이 우리의 혼란과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설명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솔라스 공공 기독교 센터의 앤디 배니스터 소장이 톰 라이트와 그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존 레녹스에서 존 파이퍼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독교인이 이미 대유행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책을 기고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지난 3월, 타임지가 저에게 전염병에 관한 기사를 쓰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기독교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됩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헤드라인으로 제안했죠. 저는 이 주제를 로마서 8장으로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로마 8장에서는 성령이 신음하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26절). 그리고 이 구절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지, 우리가 모든 답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가 게시된 후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이메일을 받았고, 트위터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는 사람들이 성경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인용하는 것을 계속 들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의 전체 이야기와 서술에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실제로 말하는지 탐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 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서구 교회가 어둠과 고통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편안함과 안전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몇 주 전 교회의 한 선임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톰, 우리는 애통할 줄 모른다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축하를 아주 잘하는 편도 아니야. 우리는 주로 안일한 태도로 살아왔다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러다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 아닐까?”라고 말하는 것을 계속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이런 일은 그동안에도 몇 번이고 일어났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1917년-1918년에는 스페인독감이 대유행하면서 세계 여러 지역 교회가 1년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잊습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을 겪은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경제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그 위기를 어느 정도 견뎌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그럭저럭 계속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종종 잊습니다.

저는 최근에 마틴 루터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매료되었는데, 그중 하나를 제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루터는 몇 년마다 이런 일에 대응해야만 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전염병이 유행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며 자신의 마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루터는 약을 먹는 규칙을 준수하고, 실질적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당신이 감염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질병을 옮기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매우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이 일에 대해 신학적 논란을 만들지 맙시다.

당신의 책은 특히 시편과 욥기에 나온 구약성서의 주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 특히 욥기에 대해서는 “욥기의 핵심은 정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구약성서에 대한 확고한 근거가 부족하여서 기독교인들이 모호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신약성서도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생략되거나 물음표로 끝나는 구절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저는 지난 200년에서 300년 동안 교회에 스며든 합리주의가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합리주의 비평가들이 “이것 보십시오,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합리주의 기독교인들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어떻게 완벽히 이성적으로 옳은지 그들에게 증명해 보입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의 접근으로 인해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니,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하셨거나 적어도 허락하신 데에는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권리를 부여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노예 오네시무스에 관한 편지입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빌레몬서 1:15). 다시 말해, 바울은 아마도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겸손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잘못된 태도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세부 사항을 아는 것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영역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실 때, 그의 인도하심을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서서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를 강조하셨습니다. . .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고통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울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울 수 있고 인간은 누구나 울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해결되길 바랍니다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 이야기 속에 많은 행동 중 어떤 행동은 눈물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종종 그렇듯이, 사실 복음서의 눈물은 때때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사렛의 예수께서는 어딘가에 높은 곳에 앉아 당신이 만드신 세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좋아, 너희가 만든 난장판을 내가 해결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친히 우리가 있는 곳에 임재해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와서 양손에 못이 박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로마 8장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슬퍼할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슬퍼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어떤 세계관과도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나머지 부분, 특히 성령의 역할은 전염병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 대해 어떠한 가르침을 주십니까?

제가 방금 언급한 로마 8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면접을 할 때 저는 종종 다음과 같이 묻곤 했습니다. "당신에게 위안을 주는 성경 구절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더 어렵게 하려고, 저는 덧붙이곤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과 로마서 8장은 말하지 마십시오. 그건 너무 뻔합니다.”

로마서 8장은 영광과 구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단 로마서 7장의 어려운 부분을 통과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바울의 확언처럼 하늘로 항해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로마서 8:38–39). 그러나 먼저 로마서 8장 18절에서 30절, 특히 26절과 27절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시간은 약할 때 우리를 위해 중재하는 성령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지금과 같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교회가 뒤로 물러서서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 자신조차도—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아들과 딸로 우리가 양자 될 것을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3).

교회는 혼란스러운 세상에 속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할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알고 있는 거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한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위대한 시편 중 하나인 애통하는 시편 44편을 언급하면서,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7).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마음은 지금의 끔찍한 상황에 관해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의 인격으로 친히 오셔서 죄의 무게를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셔서 교회에서 간구하는 분이자 세상이 고통스러워 하는 곳에 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산고를 통해 이 세상의 공포와 수치심을 구원으로 바꾸시어 우리가 약속한 완전한 새로운 창조물로 태어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성령이 슬퍼하고 신음한다는 것이 아까 언급하신 것 즉 애통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 책 전체에서 당신은 우리가 ""애통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이것이 현대 교회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재발견할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 잊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을 항상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주 애통하는 것이 고통의 극복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시편을 묵상할 때는 자주 애통의 시편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이 제 인생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묵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기쁠 때도 애통의 시편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적인 훈련으로 제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친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 끔찍하고 누추한 난민 캠프에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건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그들을 끌어안으려는 애통의 시편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애통이 사순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재림절에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우리가 시편 22편, 42편, 88편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져올 수 있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라고 십자가에 기도하신 것처럼 예견될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그 기도들은 어두움의 터널 끝에서 빛이 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시편 88편처럼, 그렇지 않고 어둠 속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책 끝부분에서 교회와 다양한 폐쇄 명령 대응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 온라인 모임을 중단하고 예배를 재개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신앙이 사적인 활동이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우리도 모르게 심화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셨습니다예배에 대한 요구와 공중 보건의 중요성 사이에 충돌하는 생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저는 루터가 감염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점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교회 건물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화를 당할 것입니다. 사실, 영국 대부분의 교회들은 오래된 건물들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소독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라인 예배로 인해 “이제 우리는 직접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영적인’ 영역이니까요.”라고 생각하며 쉽게 유혹 당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팀 스포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서 연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빨리 현명하게 다시 모일수록 좋습니다.

성찬식을 받는 것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화면을 통해서 성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몸, 즉 하나님의 백성인 더 큰 가족이 우리와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금식, 결핍, 고립의 감정 또한 수반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죄와 고통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응이 ‘행위’이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렇다면 수고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그렇다면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안디옥의 제자들이 예언자로부터 큰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사도행전 11장의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가 나신 것일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뜻인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가 가장 위험에 처했는가? 우리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보내야 할까?”와 같은 현실적인 질문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를 실행하여 가난한 교회를 위한 부조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29–30절).

맹인으로 태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요한복음 9장의 시작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가차없이 실용적인 방식으로,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 묻는 제자들을 단념시키십니다(3절).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도록 원하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 친구, 가족들로부터 시작해서 음식이나 생활용품, 의료용품을 누구에게 가져다 주어 도울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푸드뱅크를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일에 관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의 질문은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톰 라이트의 저서 <점령: 기독교 혁명이 세상을 어떻게 재구성했는가>에서 역사가 톰 홀랜드는 교회가 수행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더 넓은 세속 사회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도 중대하고 긴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그런 일을 한 것은 기독교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 기독교적 사상이 세상으로 전해졌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예전부터 의료지원,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과 교육 등의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방식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유행병이 일어나는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아야 하며, 기독교인들은 그 전통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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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졌다는 아픔 경험을 가진 입양아들

우리는 아이들을 섬기려고 하는가, 아니면 섬김을 받으려 하는가?

Christianity Today July 29, 2020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 Source Images: ChatchaiWA / Jessica Peterson / Getty Images / WikiMedia Commons

입양아를 어느 가정에 보낼 때 ‘영원한 가족’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는데, 이는 아이가 이제 법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새로운 가정에 속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출생 가정으로부터 버려진 후에 어떤 아이들은 그다음 첫 번째로 입양된 가족과 계속 생활한다. 하지만, 출생한 가정에서 어떤 사연에서든 버려진 아이는 새로운 가정에 입양하여 안정을 찾게 되고,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원래 가족이나 문화를 ‘영원히 못 볼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보다 극단적인 결말을 이야기해 보겠다. 최근 소송에 따르면, 캔자스 위탁 보호소의 일부 아이들은 100개가 넘는 가정을 떠돌았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거쳐 간 여러 보호자를 ‘영원히 못 볼 가족’이라고 말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입양된 한 아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유명한 소셜 미디어 인플루엔서인 마이카 스타우퍼(Myka Stauffer)는 입양한 헉슬리가 그녀의 가족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파양에 대한 사과 영상을 게시했다.

“입양 절차를 시작할 때 제가 너무 미성숙했던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저는 신중한 선택을 하지 못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겨우 하루 동안 온라인 비디오 교육을 받고 헤이그 입양 인증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대중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의 진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때도 있고, 그 의도한 목적이 달성된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입양이 하나의 제도로서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경험으로써 이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떤 아이가 나에게 “중국놈, 일본놈, 더러운 무릎 좀 봐!”라고 말하며 눈과 손가락으로 동시에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아이들 앞에서 자기 옷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남자아이가 운동장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만 다른 인종의 입양아로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이질적이고, 열등하고,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고 내가 그곳에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께 그날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학교의 모든 선생님은 백인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그런 사건들을 혼자 간직했다. 그런 사건들은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고 결국 나중에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입양은, 어쩌면 개혁과 구원이 필요한 제도일 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의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통해 누군가는 더 나은 인생을 얻게 되고 다른 누군가는 더 힘든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스타우퍼 가족의 이야기로 인해 더 중요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자. 국내 입양이든, 국제 입양이든, 같은 인종 입양이든 다른 인종 입양이든, 입양은 애초에 ‘관계의 해체’이다.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준비의 필요성을 알아야 하며, 더 나은 어떤 인생과 누군가를 위한 길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TED 강연에서 성인이 된 입양아 사라 존스는 세 살 때 한국에서 입양되었을 당시, 인생에서 엄청난 경험을 하며 6개월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회상했다. 다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존스가 영어로 처음 한 말은 “사라 슬퍼”였다.

관련 연구 결과를 보면, 정신적 지지가 입양 경험에 본질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성인이 된 입양아들은 제도를 바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입양아를 보는 시각과 다루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간곡히 요청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관심이 있는 가족들을 위해 내 블로그에 그 목록을 올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현재의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며, 관계의 망가짐이 전혀 없는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 그러나 아직”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일을 하시는 분은 그분이시다. 우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의 일꾼, 대사로 보냄 받았다.

우리가 제도적으로 타락한 세상을 방관한다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구주의 손과 발을 보여주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부름을 받을 수 있을까? 의도적이든 부차적인 영향 때문이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제도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이자 성인이 된 입양아인 내가 갖고 있는 직업적 소명은 이러한 질문들을 양부모와 입양 공동체 안으로 가져가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양아의 정신건강

우선, 입양과 관련된 필요는 종종 다른 정신건강의 필요를 동반한다(comorbid). 이것은 입양 부모를 위한 단순한 건강 검진이 아니라, 입양 부모의 돈을 사용하는 시스템에 대한 기관 평가이며, 궁극적으로는, 출생과 포기, 비영구적 입양을 경험하면서 충격을 받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요구다.

Comobid라는 용어에서 Co는 연결, 상호, 또는 공통을 의미한다. Morbid는 질병을 나타낸다. 정신건강 용어로서의 동반이환(Comorbidity)은 한 사람에게 두 개 이상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은 여러 증상을 진단(PTSD, 우울증, 불안, 반응성 애착 장애 등)하여 분류하는 데 사용된다. 모든 임상의는 통계 매뉴얼 라벨을 실제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데 의미를 두지는 않으므로, 마치 그것이 어떻게든 고쳐져야 할 문제인 것처럼 일종의 병리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용문에 ‘증상’이라는 용어를 넣었다. 이는 보험에 가입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도움이 될까? 가끔은 그럴 것이다. 또한, 독특한 경험, 일련의 증상과 투병을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유명한 정신과 의사 베셀 반 데르 콜크는 이렇게 말한다. “20대가 되기 전에 많은 환자에게 이런 인상적이면서도 의미 없는 라벨이 4개, 5개, 6개 또는 그 이상 붙었다. 그들이 치료를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들은 약물, 행동 수정 또는 노출 치료와 같은 관리 방법으로 알려진 모든 치료를 하게 된다. 그러나 효과가 거의 없고 종종 증상이 더 심해졌다."

양쪽 입장에서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위탁 자녀와 입양아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겪을 수 있는 몇 가지 흔한 병명을 나열한 DSM-5이다.

불안 장애

조정 장애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아동기 강박 장애

행동 장애

반대 반항 장애

반응성 부착 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입양아이자 임상의로서, 지금도 누군가가 이 증상들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상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병명 중 하나만 골라 보라. 일부 연구에 따르면 ADHD는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입양아 사이에서 더 높은 확률로 발병한다고 한다. 이는 신생아가 처한 열악한 상태, 간병인과의 분리 또는 위탁, 입양 과정에서의 방치로 인한 스트레스가 증가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인생의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요인도 추가된다. 만약 신생아나 영아가 의미 형성에 몰두한다면, 정서적‧인지적‧신체적 발달과 관련된 다른 부분의 발달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ADHD는 유전적 구성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입양 부모의 중독, 우울증, 학대 및 기타 요인의 유전적 영향 또한 고려해야 한다.

관련 모든 진단 결과에서 보이는 중요한 교훈은 위탁과 입양 배치가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거나 보호의 요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가끔은 둘 다 작용하기도 한다.

임상 진단 결과에 상관없이 일부 입양아들은 생물학적 부모의 죽음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언어에 대한 논의를 위해 캐나다 오리진스의 전무인 발레리 앤드류스의 글 참조).

가장 처음 애착 관계를 형성한 생물학적 부모는 심리적으로는 잔재하지만 육체적으로는 부재한 상태인데, 사회복지사이자 교수이며 입양아인 김재란은 이러한 규정되지 않은 상실에 관한 생각을 글에서 밝혔다. 그리고 입양아가 그 상실을 이겨내기 위한 사회적 인정이나 문화적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치유는 더 어려워진다. 이 무효화는 박탈된 슬픔이라고 불린다. 나는 불임으로 고생하는 부부에게 “왜 감사할 수 없습니까?”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입양과 위탁 가정을 떠도는 어린이들을 민감하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하지 못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타인종 입양과 백인 우월주의가 공존하는 이 나라의 복잡한 상황들을, 인종 집단들 사이에 불평등을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조장하거나 유지하는 법률과 정책들을, 개인적(내면화된, 대인관계의) 인종차별과 체계적(제도적, 구조적) 인종차별을, 인종적 학대(미시 폭력)를, 그밖에 다양한 형태의 인종적 억압을 고려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아기를 가정에 입양하라고 허용하면서도 그들의 동료와 부모들에 반하는 장벽과 규칙과 태도를 부과하는 모순이 존재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아이들도 이것을 알아차린다.

동반이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입양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입양아가 임상적으로 심각하게 정신건강의 필요성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입양을 통해 영원한 것을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을 병리학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 주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싶다. “우리 부모님은 최고였어요. 감사하는 마음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입양아들의 말만 귀 기울여 듣는다면, 당신은 가족을 위해 해야 할 충분한 필수적인 학습을 놓치게 될 것이다.

입양은 당연하게 여겨 온 일상을 흔들어 놓는 일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러 상황을 입양, 위탁 관리, 재가정화, 해체, 붕괴, 혼란 등의 단어로 부를 수 있지만, 우리가 뭐라고 부르건, 실제 경험을 하는 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입양(또는 “재가정화”)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며 판단하려는 사람이 아니며 어떠한 기관에 속한 사람도 아니다.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는 그곳에 없었잖아.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일 뿐이야.”라고 내 친구가 최근에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징벌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입양에 관한 현재의 법률, 정책 및 신념이 왜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지 생각하여 공동체로써 재정립이 필요하다. 현재와 다음 세대의 입양아를 고려한다면, 결정권이 있는 권력자와 관련 지도자, 정책 입법자와 중재자들에게 더 제대로 일하라고 요청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무엇(또는 누군가)으로 대체한 것은 아닌가? 작가이자 신학자인 폴 트립은 그의 책에서 부모가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한 목적으로 자녀를 이용하는 경향을 명시하고, 이는 자신들의 욕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강탈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입양은 가족과 기관을 대신하려는 왜곡된 욕망을 가진 자들이 인류의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인도주의 노력을 가장해 번성을 꾀하는 기회라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입양은 거래적 속성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학자 엘레나 김은 사회학자 새라 도로우의 말을 인용하면서, 입양아들은 상품화에 취약하다고 기술한다. “국제입양아들은 사고 팔리는 것이 아니지만 자유롭게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그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기관들은 교환, 의미, 가치가 뒤섞인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돌봄이자 소비다.”

엘레나 김은 이렇게 상품화와 보살핌이 밀접하게 겹쳐지면 ‘양육 부모’와 ‘소비자 부모’를 구분하거나 인도주의적 동기와 자기중심적 동기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인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대사로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신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아이들을 신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그리고 입양아들은 언제부터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닌 우리와 우리의 욕망 사이의 장벽처럼 보이기 시작했을까?

일반적으로 입양기관은 혼외 출생한 아이들의 사회적 낙인, 정신건강 인식과 훈련 부족, 교육의 장벽, 수치심에 기초한 가족의 가치, 가난, 자존심, 민족주의, 능력주의, 인종차별, 종교, 강압, 성폭력 등 더 큰 문화 및 제도적 힘의 체계 안에서 공생적인 역할을 한다. 사후 관리가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관이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필요한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행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입양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섬기려 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그가 구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고통을 받았다. 그는 고난을 직면했다. 입양부모(입양아뿐만 아니라)도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인간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야고보서 1:27)처럼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우리 능력 이상의 일이므로 그리스도께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왜곡된 동기를 따라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영역이나 분야의 숙련된 전문가에게 우리의 필요를 맡길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단계에서 이치에 맞는 시간과 상황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입양의 대가를 측정하고 기관들이 잘못을 숨길 때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겨야 하는 영역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과 희망을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분명히 느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향해,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도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카메론 리 스몰은 한국에서 친모를 만난 뒤 2012년부터 신앙, 아동복지, 정신건강에 대한 의식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 아내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온라인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Books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저자, 93세로 소천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가 교회를 위한 마지막 교훈을 남겼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시오.”

J. I. Packer

J. I. Packer

Christianity Today July 18, 2020
Courtesy of Cross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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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제임스 패커로 더 잘 알려진 제임스 인넬 패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7월 17일 금요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제임스 패커는 1926년 7월 2일 영국 글로스터 외곽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잘것없는 하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말했다. 당시 그의 가정과 교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복음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명목상 성공회에 가까웠으며, 패커는 그의 가정 교회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패커의 인생을 꾼 어린 시절의 경험은 7살 때,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로부터 학교운동장부터 글로스터의 번화한 런던 도로까지 도망치다 차에 부닥쳐 머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머리 쪽에 눈에 띄는 움푹 들어간 흉터를 갖고 살았다. 그런데도, 패커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사고보다 패커의 인생에서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은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으로 입학한 지 2주 만에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것이었다. 패커는 1944년 10월 22일 캠퍼스 IVF 지부가 후원하는 복음주의 봉사에 참석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제임스 패커는 학업에 열중하는 진중한 학생이었지만, 옥스퍼드에서의 그의 삶의 핵심은 영성이었다. 패커가 C.S.루이스의 강의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옥스퍼드에서였다. C.S.루이스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지만 C.S.루이스는 패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커는 1952년 리처드 백스터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를 떠난 후 학자로서의 경력을 즉시 시작하지 않고, 버밍엄 교외의 교구 목사로 3년의 임기를 지냈다.

제임스 패커는 다양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직장생활의 처음 절반은 영국에서 했고, 후에는 캐나다로 갔다. 영국에서 패커는 브리스틀의 신학교에서 다양한 교수직에서 재직했으며, 그 기간에 그는 옥스퍼드에서 영국 교회의 복음적 연구를 위해 설립한 정보센터 라티머하우스의 소장이자 감독으로서 10년간 일했다. 이를 통해 패커는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패커가 1979년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대학으로 이주하면서 복음주의 교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영향력을 확대했다.

제임스 패커는 성공 윤리를 거부한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성공담이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1958년 초판)은 첫해에 2만 부가 팔렸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인쇄되었다. 2005년 타임스 잡지는 패커를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

CT가 복음주의에 영향을 끼친 상위 50권의 책을 설문 조사했을 때, 제임스 패커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5위에 올랐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가 이루고자 목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공을 좇는 일을 지속해서 거부했다. 대신, 그는 타자기로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그는 평생 글과 책을 집필할 때 타자기를 사용했다).

제임스 패커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교직을 생업으로 삼았고 학생들은 그를 교수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제임스 패커를 작가이자 연사로 알고 있다.

연사로서의 패커의 명성은 작가로서 그의 위상과 맞먹었다. 두 분야 모두에서 그의 관용은 탁월했다. 패커에게 너무 작은 청중이나 장소는 없었고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의 출판 경력은 사실상 그가 모든 글 청탁을 받아준 결과였다. 그의 저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100만 부 판매)은 한 작은 복음 잡지의 편집자가 요청한 일련의 격월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한 그룹 학생들과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발행자가 소책자 제작을 요청했지만, 패커는 책을 썼다). 아마도 역사상 누구도 패커보다 다른 책에 많은 추천서와 서문을 더 많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출판물과 연설을 통해 알려진 대로 패커는 청교도 학자로 유명했지만, 그는 헌신적인 성도였으며, 기본적으로 미래의 목회자 교육 양성을 가르침에 힘썼고, 교회위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 25년간, 패커는 CT를 통해 종종 문화 비평 주제를 다루는 수필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패커가 직접 말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력을 가졌지만, 일관되게 신학자로 자신을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본 소명이 신학자라고 여긴다.

고인이 된 분이 남긴 유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예측 불가능한 추론적 사후의 유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패커의 주요 유산은 그가 평생 전 세계 기독교도들과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패커가 그의 생애 동안 기독교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강조하려고 한다.

패커의 첫 번째 책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변호였으며, 이것은 평생의 열정이자 복음주의 교회에 대한 패커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남았다. 패커는 성서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믿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오래된 교리를 옹호했고, 성서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영어 표준판 성경 작업의 편집장으로 봉사하면서 그 프로젝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로 여겼다.

제임스 패커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논의할 기회를 주었다.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큰 패커의 유산은 고향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대학생으로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의 서적을 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자유주의 추세와 공격에 직면하며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대변인으로서 패커의 행보는 일생 했던 그가 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일이다. 패커는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에서의 10년간의 리더십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보며, “무오에 대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은유는 패커가 최선을 다했던 여러 이유를 설명해준다. 패커는 성경의 본질과 해석,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같은 수많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선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를 바라본 전통주의자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는 예레미야 6:16을 인용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책을 통해 그 오래된 길을 따르라는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패커의 삶에서 일관된 또 다른 주제는 평범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 또한 그의 유산 일부이다. 패커는 자신이 어린 시절 평범함 사람들에게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았으며, 후일 이 정신으로 청교도로서의 정체성을 키웠다. 그는 최고 수준의 전문 학자들을 위한 학문을 집필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소명은 평신도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에게 출세 제일주의는 전혀 없었다. 제임스 패커에게 헌정하기 위해 출판된 논문집의 제목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신학>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패커를 신학자가 아닌 신학 연구가라고 불렀을 때 패커는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인정하며 스스로 일반 기독교인을 위한 체계적인 교리를 연구하는 “전도사”라고 결론을 내렸다. 패커는 평신도를 위한 비공식 신학적 저술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자신만의 체계적인 신학을 완성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다른 학자들처럼 괴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생 제임스 패커의 유산 중 하나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감을 주는 패커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이었다. 매 순간 그의 경건함이 드러났으며, 그의 존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의 말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가 사모한 청교도들처럼, 패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분명한 사고에 근거하고 동시에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제임스 패커는 최고의 영국 신사적 매너로 정확하게 이야기했지만, 영적인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운 좋게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 안에서 마음이 맞는 신앙의 협력자로서의 면모를 가진 패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진정한 영적 기록을 그의 삶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제임스 패커의 글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점과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을 나타낸다. 그의 유산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주제를 정하고, 올바른 것에 관심을 두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의 우선순위 목록에는 성경, 교회, 올바른 신학, 삶의 거룩함, 소명이 있었다. 패커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던 이유는 그가 적극적이고 넓은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삶과 관련된 모든 주제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에 관한 열정을 모든 분야에 갖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 패커는 역설적인 사람이었다. 평생 헌신적인 성공회의 일원이었지만, 복음주의 개혁주의자 사이에서도 똑같이 수월하게 일했기 때문에 아마도 개혁주의 영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국인이었지만 캐나다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며, 게다가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은 미국이었다. 패커는 당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주요 대학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지 않았으며, 교단에서도 단 한 번도 주목받는 높은 자리를 오래 맡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성향이 있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논쟁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자신을 주장했으며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조용한 사람이 어떻게 유명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책이 수단이 되어 그의 생각이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기록되고 출판된 그의 힘 있는 글을 통해 기억될 것이다. 제임스 패커는 책의 영향으로 인해 유명한 연사가 되었다. 글을 쓰고 말하면서, 그 내용은 항상 사려 깊고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명확하며 실용적이었다.

제임스 패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으며, 이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는 유명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 앞에 놓인 임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다. 패커는 거실에서 십 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화려한 강단에 서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다.

2016년 그가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 더는 글을 읽거나 자유롭게 거동하거나 공식 석상에서 말할 수 없게 되면서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제임스 패커에게 교회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그가 일생을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묘비명에 새길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Leland Ryken은 50년간 재직한 Wheaton College의 영어학과 명예 교수이다. 그는 <제임스 패커: 복음생활>[JI Packer : Evangelical Life]라는 제목의 제임스 패커의 전기를 작성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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