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부활절 설교에서 빼야 할 다섯 가지 오류들

사람들이 바른 시각으로 성 주간을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돕고 싶다면, 이런 익숙한 오류들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Mihaly Munkacsy (1880)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Mihaly Munkacsy (1880)

Christianity Today April 13, 2022
브리그만 아트 도서관

1. 예수가 33 세에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예수가 “서른 살쯤에 사역을 시작했다”(누가복음 3:23)고, 3년간의 사역(세 번의 유월절과 네 번째 유월절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요한의 언급)을 하셨다고 한다면, 그가 죽었을 때 33세였다고 하는 대부분의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학자도 예수가 죽었을 때 실제 33세였다고 믿지는 않는다. 예수는 헤롯 대왕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마태복음 2:16)을 학살하기 전과 BC 4년 봄, 헤롯 대왕이 죽기 전에 태어났다. 만약 예수가 BC 5, 6년경 가을에 태어났고, 우리가 BC와 AD 사이의 ‘0’을 세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예수가 AD 33년 봄에 죽었을 때는 37세나 38세였을 것이다(가장 그럴 듯 하다고 믿는 대로). 더 나아가, 예수가 AD 30년(유일하게 고려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년도)에 죽었다 하더라도, 그는 33세가 아니라 34세나 35세였을 것이다. 어떠한 주요 교리도 이 흔한 오해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강단에서 “사실들”이 아닌 내용들을 확신하고 선포함으로써 당신의 신뢰성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라.

2. 최후의 만찬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어린 양의 부재를 예수가 궁극적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하려 하지 말라.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이라는 것은 영광스러운 사실이지만, 이것이 실제주의 만찬에 유월절 어린 양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거기에 어린 양이 있었던 것은 명백하다: “유월절 양(pascha)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면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pascha)을 준비하여 우리로 그것을〔다른 말로 the pascha〕 먹게 하라’”(누가복음 22:7-8; 마가복음 14:12)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복음서 기사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유월절 양을 먹는 것은 모든 유대인의 유월절에서 중요한 부분이다(출애굽기 12:3). 제자들이 밤에 빵을 나누고, 찬양을 하기 전에 포도주를 먹었던 성내에서 함께 식사를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켰으며, 그 기회를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희생양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한 날을 기념하는 그 전통의 범주하에서 자신을 봤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봐야 한다.

3. 종려나무 주일에 주님을 찬양했던 바로 그 군중들이 성금요일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아우성쳤던 군중들과 같은 군중들이라 말하지 말라.

이런 종류의 진술은 메시아 예수에 관한 인간 마음의 변덕을 설명하기 위한 강력한 설교 주제로 제시된다. 하지만 몇 가지 전제조건이 덧붙여져야 한다. 첫째, 예수의 승리의 입성을 찬양하던 “호산나!” 군중이 본디오 빌라도 앞에 모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쳤던 군중과 동일한 군중이라는 것은 전체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후자가 예루살렘 출신의 군중들로 보이는 반면, 전자는 주로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온 순례자들인 것 같다. 둘째, 두 군중 다 오해에 근거해서 열광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친 사람들의 열광은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민족주의적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와 함께 예루살렘 유대인들 앞에 서 계실 때, 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신성 모독죄라는 거짓된 혐의로 고발하고 있었기에, 후자의 비난도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정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두 군중 사이의 공통점은 인간 마음의 변덕이 아니라, 겸손한 메시아와 고난받는 종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과 경배의 부족이다.

4.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간과하지 말라.

부활 기사 속 여성들의 수와 그녀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은 정확히 말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The Final Days of Jesus(필자들의 저서:역주)에 용어 해설을 제공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혼동하는 것들 중 하나는, 적어도 네 명의 여성들이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 막달라 마리아; (2)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3) 작은 야고보와 요세/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4) 글로바(나사렛 사람 요셉의 형제였을 수 있는 사람)의 아내 마리아. 거기에 더해서, 요안나(헤롯 안디바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그리고 살로메(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추정)도 십자가 곁에 있었던 여인들이다.

이번 부활절 설교 시간에, 부차적인 세부 사항으로서의 여성들의 증언을 무시하지 말라. 1세기에는 여성들에게 유대 법정에서는 증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그녀들의 성에 대한 경솔함과 무모함 때문에” 복수 여성들의 증언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2세기 기독교 비평가 셀수스는 막달라 마리아를 “마법에 현혹된…병적인 여성”으로 지칭하면서, 그녀를 부활의 목격자로 추정하는 아이디어를 조롱했다.

이 배경은 두 가지 결정적 진리를 가리키기에 의미 있다. 첫째, 메시아 왕국은 이 땅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는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상기시킨다. 이 문화에서, 예수는 여성의 온전한 존엄성과 그들의 증언의 결정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확인했다. 둘째, 그것은 부활 기사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강력한 변증이다. 만일 이것이 “교묘히 만든 신화”(베드로후서 1:16)였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목격자로 여성들이 제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5.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십자가의 영광을 무시함으로 야기되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

특정 기독교 전통은 거의 전적으로 십자가 상에서 겪은 예수의 고통, 그가 견뎌야 했던 믿을 수 없는 아픔, 그리고 그의 굴욕과 하나님과의 분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접근은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같은 영화 속 묘사에서, 로마 가톨릭의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위에서 일어나는 십자가 못 박히러 가는 길의 재연,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출석하는 복음적인 교회에서의 꽤 많은 설교들(우리가 잘 부르는 찬양은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에서 보고 들을 수 있다. 물론 성경의 사복음서, 특히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그의 목숨을 우리 구원을 위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들이 용서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었음에 동의한다.

그러나, 부활절 스토리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요한복음에 가장 잘 드러나 있듯이, 예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발을 씻기시는 장면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고난 기사에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13:3-4; 14:28과 비교)

다른 말로 하면, 요한은 십자가가 막다른 길이 아니라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시는 길의 중간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십자가 기사를 시작할 때, 이미 승리의 나팔을 울린 이유이다: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것을 예수의 손에 주셨고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이전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17:5,24)!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한 것처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12:2) 이번 부활절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설교할 때, ‘영광’ 부분을 빠뜨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십자가는 예수의 온전한 순종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한 대속의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일은 참으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하지만 통치하고 다스리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영광스러운 사역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Andreas Köstenberger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 포레스트에 있는 사우스이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의 신약성서와 성경신학의 수석 연구 교수이다. Justin Taylor는 크로스웨이 수석 부사장 겸 출간인이다. 그들은 The Final Days of Jesus: The Most Important Week of the Most Important Person Who Ever Lived(크로스웨이) 공동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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