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 화장실도요?’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이 2024년 올림픽에서 예수님을 알려주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July 20, 2024
Illustration by Blake Cale

파리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계 올림픽은 큰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제33회 파리올림픽 대회가 7월 말에 시작될 예정이지만, 파리 시민들은 이미 봄부터 대비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하철 티켓이 두 배로 오를 예정이며, 일부에서는 이 시스템이 1,600만 명에 달하는 인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직원들을 수용하기 위해 학생 기숙사가 징발되었다. 센 강, 건물, 패럴림픽 선수들이 도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작업, 심지어 테러 공격에 대한 취약성까지 우려하고 있다.

올림픽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도는 지난 2년 동안 11 퍼센트 포인트 하락했으며, 수도권 지역에서는 오직 다섯 명 중 한 명만이 파리에서의 올림픽 개최가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44%는 그것이 나쁘거나 매우 나쁘다고 말한다.

매튜 글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올림픽이 촉매제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30년 넘게 프랑스에 거주해 온 미국인 교회 개척자 글록이 말했다. “올림픽은 교회와 단체들이 도시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글록은 세계 최대 스포츠 행사 중 하나인 올림픽 기간,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데 앞장 서 왔다.

파리에는 가정에서 모이는 그룹을 포함하지 않은 70개 이상의 복음주의 교회가 있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약 1%만이 복음주의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45,000명 이상이 복음주의자이다.

앙상블 2024는 작년 말 이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출범했다. 이 복음주의 연합 단체는 스포츠 사역, 기독교 지원 사역, 전도 사역, 학생 사역, 음악 사역 등 약 20개 단체와 협력하고 있다. 프랑스 복음주의자의 약 70%를 대표하는 프랑스복음주의협회(CNEF)가 참여하고 있으며, 예수전도단, OM 선교단, 국제선교이사회, Greater Europe Mission 등 여러 국제 복음주의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글록은 C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도시에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현재 진행 중인 이니셔티브를 제공하는 프레임워크를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친선 지역 체육대회와 관람 파티부터 교회에서의 찬양 모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올림픽 참가 선수들을 위한 목사와 기독교 선수들이 간증을 나눌 수 있는 시간도 마련될 예정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전도는 없을 것이다. 앙상블 2024는 세속적인 프랑스에서 논란을 피하고자 개종을 강요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1902년 법이 제정될 당시 국가의 법적 세속화를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은, 때로는 가톨릭보다 더 열성적인 종교 활동을 의심하는 당국의 표적이 되어왔다. 몇 년 전, 한 주 지사는 복음주의자들이 외국 자금을 많이 받는다고 증거 없이 주장하면서, 정부가 복음주의자들을 면밀히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 지사는 복음주의자들이 결혼 전에 순결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복음주의협회는 복음 전파의 자유를 포함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유엔에 제기했다. 복음주의협회는 올림픽을 복음주의자들이 프랑스 사회에 해롭지 않음을 보여줄 기회로 보고 있다. 실제로 복음주의협회는 공식 성명에서 기독교인들은 우정, 존중, 우수성, 결단력, 평등, 영감, 용기와 같은 올림픽의 가치에 깊이 공감한다고 밝혔다.

앙상블 2024 조직위는 올림픽 기간 사람들을 섬기면서 이러한 공통의 가치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많이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자비로운 접근 방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앙상블 2024 웹사이트는 밝혔다.

이 단체는 노숙자를 돕고, 매춘과 성매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쓰레기 및 재활용 캠페인을 통해 환경을 보호하는 복음주의적 이니셔티브가 확산되기를 희망한다.

일부 교회에서는 프랑스나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관광객을 돕기 위해 "Je parle ____"("나는 ____어를 합니다")라고 적힌 이름표가 있는 번역가를 제공할 수 있다. 주요 보행로에 위치한 다른 교회는 도시의 많은 관광객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할 것이다.

“문을 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 화장실도요?” 한 앙상블 2024 자원 가이드는 말한다. “프랑스는 2024년 여름 올림픽 기간 동안 많은 방문객들이 화장실, 급수대, 선수들을 위한 교통편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물류 측면에서 실질적인 어려움에 부닥쳐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를 돕기 위해 그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정기적인 화장실 청소와 무료 여성 위생용품 제공은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지만, 다른 노력은 특히 프랑스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성서 동맹(French Bible Alliance)은 프랑스 핸드볼 챔피언 조엘 아바티와 미국 육상 선수 앨리슨 펠릭스 등 16명의 저명한 스포츠 인사의 간증을 담은 프랑스어판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신약성경이 여름이 아닌 4월에 출간된 것은 더 많은 프랑스인이 성경을 읽게 하려는 목표 때문이다. 연맹은 종교문학서점연합회(Union of Religious Literature Booksellers)와 협력하여 프랑스의 ‘성경의 달’인 3월과 4월에 여러 행사를 개최했다.

성서 동맹 프로젝트 리더인 니콜라스 푸케는 “우리는 동시대인 프랑스 국민을 대상으로 담론을 나누고 싶다”며 “외국인 관광객보다 이웃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로를 조율하고 방해하지 않으려는 복음주의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일부 사역은 다른 사역을 위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우리는 실제로 앙상블 2024와 함께 전적으로 참여하도록 회원 단체에게 권장했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1년간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라고 스포츠 부처인 GO+France에서 일하는 톰 호킨스는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것입니다.”

호킨스는 이번 올림픽이 앞으로 많은 사역 기회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기독교 단체들이 함께 모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프랑스에서 복음주의적 협력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GO+와 그 회원들은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파트너십의 유산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유산은 올림픽 주최 측의 화두 중 하나였다. 2024년 올림픽을 1924년 파리에서 열렸던 올림픽과 연결하고, 파리 시민들에게 올림픽 개최를 위한 노력과 불편한 생활이 장기적으로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고 싶어 한다.

파리에 사는 많은 사람은 이 주장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올림픽을 위해 함께 일하고 홍보 활동을 조정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올림픽이 분명 중요한 것을 남길 것으로 생각한다.

글록은 CT와의 인터뷰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유산이란 무엇인가’라는 관점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바라보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틴 폰노는 프랑스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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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수십 년 전에 주류가 되었지만 미국 교회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아시아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가져온 종교에 대해 배워야 하는 이유

Christianity Today July 17, 2024
말로리 렌취의 일러스트 / 소스 이미지: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 글은 불교의 다양한 측면과 기독교인이 불교도와 교류하고 사역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불교와 소통하기’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입니다.

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인 린우드에는 교회가 곳곳에 있습니다. Holy Spirit Church of Columbus교회와 Christ Centered Apostolic교회를 지나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라오스 건축 양식의 전형적인 뾰족한 지붕과 화려한 금색이 돋보이는 불교 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사 된 연못에 둘러싸인 쌍둥이 붉은 용이 빛으로 향하는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같은 건물에는 라오스 이민자들이2009년에 지은 와틀라오 부다마마카람 불교 사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프란 옷을 입은 승려들이 황금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불교 사원은 미국의 변화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랜드마크입니다.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에 따라 출신국 쿼터가 폐지된 이후 불교를 배경으로 한 국가의 이민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아시아계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인종 집단으로, 미국 인구의 7%인 2,200만 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등 교육이나 취업 기회를 얻기 위해, 또는 전쟁과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는 아시아인은 계속 늘어날 것이며, 인구학자들은 2060년까지 4,6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미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불교가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이므로 불교 신자이거나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서 온 이웃을 만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입니다. 약 5억 명의 사람들이 불교를 믿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시아 대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불교 신자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중국(약 2억 4,500만 명)이며, 동남아시아에서 7개국은 불교 신자가 대다수인 국가입니다.

미국 교회가 불교도를 대상으로 사역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불교도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휘튼 대학 빌리 그래함 센터의 글로벌 디아스포라 연구소 소장 샘 조지는 말합니다. 2019년 퓨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8%는 불교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별로 알지 못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힌두교 다음으로 가장 이해도가 낮은 종교입니다.

“불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 유입시키기 위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느 정도의 지식과 다문화적 사고방식을 갖고 편안하게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조지는 말합니다.

교회가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CT는 격주로 불교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고 기독교인이 불교도와 소통하고 사역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시리즈 ‘불교와 소통하기’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먼저 아시아를 거쳐 미국 해안으로 퍼져나간 불교와 미국 내 불교의 영향력에 관해 알아보고 교회가 불교 디아스포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살펴볼 것입니다.

‘지금 가서 방황하라’

불교의 신념은 국가와 전통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 몇 가지 기본 교리를 고수합니다: 불교는 법 또는 진리를 깨달은 부처라고도 알려진 싯다르타 고타마의 가르침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창조주 신을 믿지 않고 열반에 이르는 팔정도의 길을 따라 이생의 고통과 윤회의 순환을 끝내고자 합니다(불교 신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이드바 참조). 인간은 무상하며, 대신 업보, 즉 선과 악의 총합이 사후에도 남아 다음 생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짓는다고 믿습니다.

기원전 483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부처님은 “지금 가서 많은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떠돌아다니라”고 당부했습니다. …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라. 불교 경전인 팔리어 경전에 따르면… 완전무결한 자연상태 그대로(Dhamma) 선포하라"고 말했습니다.

최초의 불교도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고, 이를 수용하는 청중을 찾았습니다. 강력한 카스트 제도를 따르는 인도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불교는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과 여성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기원전 3세기 인도 황제 아쇼카는 불교로 개종하고 국가 자금을 사용하여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다른 세계로 불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불교가 다른 나라에 유입되었을 때, 불교의 탄력성 덕분에 현지 종교와 통합될 수 있었습니다. 불교는 대부분 현지 규범에 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존 신앙과 함께 불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의 관행으로 인해 불교는 국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 및 전통 조상 숭배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유령과 영혼, 조상, 브라만 신을 포함하는 우주론이 존재합니다.

불교는 현지 종교와 결합함으로써 캄보디아 국민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도를 대상으로 사역할 때 가장 큰 장벽은 “태국인(또는 다른 국적)이 된다는 것은 곧 불교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환멸을 느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아시아인들이 서부로 이주하는 추세에 따라 미국 전 지역으로 불교도들이 유입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처음 소개한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세계종교의회가 스리랑카와 일본의 불교도들을 초청해 그들의 신앙을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선승 소옌 샤쿠는 업보의 개념이 현대 과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불교 개혁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부처님의 관용과 온화함의 이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약 1,000개의 불교 센터가 있으며, 약 3백만 명의 미국인이 불교 신자로 자처하고 있습니다(불교를 실천하는 사람의 수는 이보다 더 많음). 조지는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환멸”을 가진 서양인들은 동양의 신비로운 경험에 쉽게 이끌린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불교 사상은 스타워즈부터 명상 수련회, 마음 챙김 자기계발 서적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스티브 잡스, 조지 루카스 같은 유명 인사들이 불교로 귀의했으며 달라이 라마가 존경을 받으며 그의 말이 인용되었습니다.

“물질주의 세상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합니다.”라고 조지는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신을 닮은 공허한 마음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무언가로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돈과 섹스가 더 깊은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불교도들이 제안하는 대안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 태국 선교사이자 노스파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폴 드 노이는 서양인들은 불교를 철학으로 보는 반면, 동양의 불교도들은 불교를 문화적 정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동양의 불교도들은 부모가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불교도라는 뜻입니다.

드 노이는 “서양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집단주의적 가치는 “서양의 독립적인 개인주의와 충돌합니다.”

대신 미국인들은 명상이나 채식주의와 같이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불교의 측면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독신주의나 금주 같은 사상은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 노이는 “불교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이 없는 한 동양의 불교도들은 이에 대해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통성이 없다는 점이 불교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찾아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행하라'고 명령하셨죠.”

디아스포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아시아 선교사들이 갖지 못한 방식으로 불교 디아스포라의 유입을 위해 사역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조지는 말합니다.

“그들은 고국보다 기독교 복음 증거에 더 개방적입니다.”라고 조지는 말합니다. "실향은 '이 땅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나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갈망과 투쟁을 야기합니다… 그 과정은 영성에 대한 갈망을 더 깊게 합니다."

아시아 문화는 또한 훨씬 더 공동체적인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영적 회심은 종종 가족, 공동체, 심지어 국적을 거스르는 것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지금은 개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인도나 다른 나라에서 직면할 수 있는 사회적, 공동체적 압력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조지는 말합니다.

조지는 불교도 이웃과 소통하는 데 관심이 있는 교회를 위해 몇 가지 실용적인 단계를 제안합니다:

1. 영적으로 준비하기: 이웃에 사는 불교도들 때문에 교회가 소명을 받았다고 느낀다면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불교도를 돌보는 마음과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불교에 대해 알아보기: 불교 신앙의 기본에 대해 읽고, 이웃이 속한 국가와 문화에서 불교가 어떤 모습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교회에서 핵심적인 사람들을 모아 불교에 대해 공부하세요.

3. 불교 사원 방문하기: 호기심을 갖고 해당 지역의 스님들에 대해 알아보세요. 그들의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를 쌓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며,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세요. 단순히 그들을 개종시키거나 프로젝트로 전환하는 데에만 집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불교를 믿는 이웃을 사랑하기: 이웃을 알아가면서 그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자격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의 신앙에서 가치 있는 것, 즉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보기 원합니다.

조지는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름길이나 마법 같은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부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더 매력적이지 않으면 그들은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아시아에서 불교의 영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실제적이며 삶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 불교와 소통하기시리즈에서는 카르마의 의미와 오해 및 그리스도인이 카르마의 의미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불교에 관한 411

일반적으로 부처로 알려진 싯다르타 고타마는 기원전 564년 지금의 네팔에 있는 부유한 왕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보호받으며 살던 그는 29살에 궁전 밖으로 나가 세상의 죽음과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는 부를 포기하고 금식, 구걸, 구타, 명상 등 고행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을 찾지 못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오늘날 인도 비하르에 있는 보리수(깨달음의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전생과 업보 그리고 고통을 끝내는 방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방종과 고행의 박탈 사이의'중간 길'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인도강역 평원에 법을 전했습니다. 고타마가 죽은 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인도 북부와 그 너머에 그의 가르침을 계속 전파했습니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고통은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2) 고통은 욕망과 열정에 의해 발생한다. (3) 욕망을 제거하면 윤회와 고통,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멈출 수 있다. (4)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지혜, 도덕, 명상을 포함하는 고귀한 팔정도를 따라야 합니다.

불교도들은 창조주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처는 고통과 윤회의 순환인 삼사라의 끝인 깨달음을 향해 사람들을 인도한 인간이었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유일한 부분은 업보입니다. 업보는 다음 생의 질을 결정합니다.

인간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좋은 삶을 살면서 공덕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님에게 보시할 때 공덕이 전이되기도 합니다. 또한 살아 있는 가족이나 죽은 가족에게 공덕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목표는 욕망과 고통, 윤회의 순환이 끝나는 ‘소멸’ 또는 ‘소멸됨’을 의미하는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에는 세 가지 주요 유파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스리랑카에서 행해지는 소승불교는 가장 오래된 유파이며 진정한 신자, 즉 승려만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승불교는 보살은 다른 사람들이 열반에 도달하도록 돕는 더 높은 수준의 존재라고 믿습니다. 세 번째 학파는 티베트 불교로 널리 알려진 대승불교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탄트라 수행을 혼합한 불교입니다.

이 넓은 범주 안에는 다양한 유형의 불교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에는 마음 챙김 명상에 중점을 둔 선불교와 아미타불의 이름을 반복하면 깨달음에 도달하기 쉬운 정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정토불교가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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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사방에 물: 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태국의 물 축제

송끄란 기간 그리스도인들은 노인을 공경하는 것과 생명수에서 유사점을 발견합니다.

Christianity Today July 16, 2024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 Source Images: Getty

이 글은 불교의 다양한 측면과 기독교인이 불교도와 교류하고 그들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불교와 소통하기’ 시리즈의 세 번째 기사입니다 .

데믹이 종식된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물 축제 송끄란이 태국의 거리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중 가장 더운 주에 열리는 이 행사에서 어린이와 어른들은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물총으로 서로에게 물을 뿌립니다. 사람들은 트럭 침대 뒤에 서서 양동이를 이용해 옆 트럭에 물과 얼음을 던집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여러 방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뚫고 지나가고, 뒤에 탄 사람은 사람을 향해 물을 뿌립니다.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태국의 새해 축제인 송끄란에서는 불꽃놀이 대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집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스리랑카 및 불교 달력을 따르는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이날을 기념합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물은 의식적인 정화의 기능을 하며 작년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새해를 깨끗하게 맞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송끄란 기간 태국의 불교도들은 거리에서 시끄러운 물싸움을 벌일 뿐만 아니라 사원을 방문해 불상과 스님들의 손에도 물을 뿌립니다. 이 상징적인 행위는 죄를 속죄하고 정화를 가져오며 공덕(선행을 통해 좋은 업보를 쌓음)을 쌓는다고 믿습니다. 참배객들은 공덕을 쌓기 위해 스님들을 위해 음식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송끄란 축제 기간에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태국인들은 연휴 기간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가족과 친지들을 방문하며 새해를 맞이하면서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또한 어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손에 물을 부어 축복을 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재스민, 장미, 흰색 참파카(목련과 비슷한 꽃)로 만든 꽃 화환을 주고받습니다.

태국 기독교인들은 송끄란의 불교적 뿌리와 연관된 음주와 파티를 벌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송끄란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태국 목회자들은 송끄란을 특정 불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들도 어른을 공경한다는 것을 태국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치앙마이 창조교회의 추캇 차이분시리 목사는 “아버지, 어머니, 어르신 등 가족에게 존경을 표하며, 이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CT는 태국 북부 치앙마이 지역의 차이분시리, 항동 지역의 창조교회 목사 고이 마나사쿨퐁, 전직 선교사인 드림 와이왕과 함께 이 축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이 축제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태국의 거대한 물싸움

송끄란은 새로운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는 인도의 힌두교 축제에서 유래했습니다. 태양이 황도대에서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산크란티에서 유래한 이 축제는 태양력에 따라 새해를 맞이합니다. 1888년부터 1940년까지 송끄란은 1월 1일로 변경되기 전까지 태국의 공식 새해였습니다.

부처님, 승려, 장로에게 물을 뿌리는 전통 풍습은 이후 더위를 식히고 존경의 표시로 친구와 가족에게 양동이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렌남, 즉 물놀이와 물 던지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제의 한 부분이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태국의 물 축제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 관광객들이 물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태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48세의 차이분시리는 기독교인들은 신체적, 영적 안전을 위해 송끄란 기간 동안 번잡한 지역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끄란 기간에는 음주 운전, 과속, 난폭 운전으로 인해 오토바이와 자동차 사고가 급증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는 등 축제 분위기가 기독교인들에게 유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유혹을 받고 목숨이 위협받는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대학 시절부터 태국 북부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한 35세의 와이왕은 조심만 한다면 물싸움을 즐기고 물놀이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제가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전하는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마나사쿨퐁(35세)도 동의하며, 기독교인들도 물싸움이나 장로 공경과 같은 신앙을 훼손하지 않는 전통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물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지역사회에 계속 존재감을 드러내고 불신자들에게 증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싸움은 종교의식과는 별개의 행위이므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인들은 ‘적절하고 예의 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폭력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나사쿨퐁은 불상에 물을 붓거나 승려의 축복을 구하는 행위에는 선을 그으며, 기독교인은 오직 유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많은 태국 기독교인들이 축제의 의미나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축제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태국 명절의 기원을 연구하여 신도들이 축하할 때 참여해야 할 것과 참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해하도록 도울 것을 촉구합니다.

노인에게 존경심 표시하기

일부 태국인들은 물싸움이 명절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다른 전통이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한탄합니다. 과거에는 물싸움이 지금처럼 격렬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작은 물통을 사용했으며 물총도 흔하지 않았습니다.

마나사쿨퐁은 “역사를 연구해 보면 송끄란 축제가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좋은 시간이며,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축복하고 지혜를 전수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꼽았습니다. 가족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지난해의 잘못을 바로잡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두 목회자는 기독교인들이 태국 사회에 노인을 공경하는 것과 기독교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태국에서는 기독교가 반문화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부모와 주변 공동체의 신앙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불교 신앙과 관련된 관습과 의식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나이 든 가족 구성원은 자신과 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하면 가족들은 전통적으로 시신에 성수를 붓고, 사원에 돈을 기부하여 망자를 대신하여 공덕을 쌓고, 시신을 염불하는 승려를 위해 다과와 선물을 사기도 합니다. 태국 기독교인이 장례식의 일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장로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송끄란은 기독교인들도 원로를 존경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마나사쿨퐁의 교회에서는 직원과 교인들이 세면도구, 비누, 샴푸, 과일, 간식 등의 물품이 담긴 선물 바구니를 구입하여 송끄란 기간 동안 나이든 교인들에게 선물합니다.

차이분시리 교회에서는 교회 앞의 직사각형 테이블에 노인들이 일렬로 앉아 있습니다. 젊은 교인들은 줄을 따라 내려가 축복을 구하고, 존경과 공경의 상징으로 그릇에 담긴 물을 어르신들의 손에 붓습니다. 이 활동은 태국 문화와 기독교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차이분시리는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장로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태국 기독교인들이 최선을 다해 해야 할 일입니다.”

마나사쿨퐁은 기독교인과 불교도는 노인을 공경하는 동기가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불교도들은 사원 활동에 참여하거나 장로의 손에 물을 부을 때 공덕을 쌓고 나쁜 업보를 없애 다음 생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태국 기독교인들에게 은사, 명예, 존경은 행위 중심의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마나사쿨퐁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 공로를 쌓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행을 베풀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수 나누기

설 연휴의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만큼, 차이분시리는 태국 크리스천들이 가족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증인이 되라고 격려합니다. 와이왕은 또한 가족과의 시간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믿습니다. 그녀는 젊은이들이 시간을 내어 노인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잘못했거나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와이왕은 말했습니다.

치앙마이 거리에 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차이분시리는 신도들과 믿지 않는 태국인들에게 생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번 주일에는 예수님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을 설교할 예정입니다.

태국 불교도들은 매년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사원에 가는데, 그 수는 끝이 없고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리지의 유명한 시구 “물, 물, 어디에나 있고 마실 물 한 방울도 없다”처럼 송끄란에는 실제로 물이 어디에나 있지만, 쉽게 얽히는 죄를 씻기에는 한 방울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자신의 죄를 씻을 만큼의 공덕을 쌓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병에 걸리거나 절에 갈 수 없다면 어떻게 죄를 속죄할 수 있을까요? 인생은 사람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짧으며, ‘우물’을 찾아 해매는 끝없는 속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고 차이분시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차이분시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수이시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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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소통하기

본 시리즈에서는 불교의 다양한 측면과 기독교인이 불교도와 교류하고 사역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기사를 모았습니다.

Christianity Today July 16, 2024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 Source Images: Unsplash / Pexels

약 2,5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신도의 대부분은 아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아시아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함께 이 동양 종교는 명상과 마음 챙김 개념을 통해 인기를 얻어 미국, 캐나다, 호주, 일부 유럽 국가까지 점점 더 서양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교회는 여전히 불교를 믿는 이웃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2019년 퓨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8%가 불교에 대해 전혀 또는 거의 알지 못한다고 답했으며, 이는 힌두교 다음으로 가장 이해도가 낮은 종교입니다.

교회가 이 복잡한 종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CT는 ‘불교와 소통하는 법’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격주로 불교의 다양한 측면과 기독교인이 불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교류하고 그들을 섬길 수 있는지 논의해 봅니다. 본 섹션에서 지금까지 연재된 다양한 이야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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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는 ‘편안한 생각’을 줄까? 불교의 개념은 다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믿는 것이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

Christianity Today July 16, 2024
이미지: 말로리 렌치의 일러스트레이션 / 소스 이미지: 위키미디어 커먼즈 / 게티 / 언스플래시

이 글은 불교의 다양한 측면과 기독교인이 불교도와 교류하고 그들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불교와 소통하기’ 시리즈의 두 번째 글입니다.

보(카르마)란 무엇인가요?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물어보면 “카르마는 내 남자 친구 / 카르마는 신 / 카르마는 주말에 내 머리에 부는 바람 / 카르마는 편안한 생각”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내 길’을 깨끗하게 유지한 덕에 얻는 모든 좋은 것들이 업보라고 말합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무정한 전 애인을 향해 “돌고 도는 것은 돌고 돌아 / 다시 돌아오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수녀에서 유모가 된 마리아도 게오르그 폰 트랩 대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어린 시절이나 유년 시절 어딘가에서 / 내가 좋은 일을 해야 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업보라는 개념은 미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두고, 분노하여 휘두르던 막대기는 기세가 꺾인다”라고 말한 잠언 22장 8절과 같은 성경 구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인과응보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보에 대한 믿음과 세계관은 ‘편안한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승 불교 불교도에게 “업보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모두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방콕 성경 신학교의 선교사이자 불교 전문가인 켈리 힐더브랜드는 말합니다.

‘불교와 소통하기’ 시리즈에서는 업보라는 동일한 개념이 태국 소승 불교와 대만 인본주의 불교의 두 불교 세계관을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끝없는 노력으로부터의 구원, 무거운 결과에 직면한 희망, 무너진 세상에서 진정한 정의를 이야기하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불교의 믿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존재는 자기 행동의 주인이다’

업보의 개념은 인도의 철학과 종교에서 비롯되었으며 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도교에서 채택했습니다. 종교와 상황에 따라 카르마에 대한 믿음은 다르지만, 카르마라는 단어는 ‘행위’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카르만에서 유래한 것으로, 행위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베푸는 기독교와 달리, 불교학자들은 업보를 ‘물리 법칙처럼’ 자연의 일부로 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처럼 업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라고 힐더브랜드는 말합니다.

불교에서 업보는 사람의 행동보다 의도에 더 관심을 두며, 우리의 업보는 마음의 동기에 대한 결과입니다. 업보는 현생에서뿐만 아니라 미래의 환생에서도 거둘 수 있습니다. 팔정도를 준수하는 선행을 하면 좋은 업보를 얻게 되고, 그 규칙을 어기면 나쁜 업보를 얻게 됩니다.

일부 불교 전통에 따르면, 우리가 행한 업의 균형에 따라 천사나 신으로 더 높은 영역에 태어날지, 굶주린 귀신으로 더 낮은 영역에 태어날지, 아니면 지옥에 태어날지 결정된다고 합니다. 목표는 고통과 윤회의 순환이 끝나는 열반에 도달할 때까지 다양한 삶의 주기를 거쳐 올라가는 것입니다.

불교 경전인 팔리어 경전에서 부처님은 업을 “단명으로 이끄는 길…장수로 이끄는 길…병들게 하는 길…건강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존재는 자기 행동의 소유자이자 행동의 상속인입니다. …존재를 열등하거나 우월한 존재로 구별하는 것은 행동입니다.”

불교가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하고 전파되면서 다양한 종파가 생겨났고, 불자들은 업을 다르게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윤회를 믿지 않으면서도 현생의 업에 대한 믿음을 유지합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전통 종교와 불교를 통합하기 때문에 업보의 개념과 방식도 나라마다 다릅니다.

태국에서의 업보의 개념

태국인의 약 95%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강조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전통인 소승 불교를 신봉합니다.

1999년 방콕으로 이주한 힐더브란트는 불교 경전에 얼마나 익숙한지에 관계없이 업의 개념이 일상생활에 녹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교통사고, 자연재해, 질병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업보’를 중얼거리며 현생이나 전생에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라고 체념합니다.

힐더브랜드는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외모가 못나거나 불구이거나 또는 가난하게 태어났다면 업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차로 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가난한 사람은 과거에 뭔가 잘못했고 그런 일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받아들인다고 힐더브랜드는 말했습니다. 기독교와 달리 사람은 평등하고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업보를 감당하면서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입니다. 태국 선교사로 사역했고 현재 노스파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폴 드뇌이는 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난 자녀가 수술을 받으면 “이생에서 짊어져야 할 업보가 사라져 다음 생에 공덕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수술을 허락하지 않는 부모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드뇌이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기쁘게 삶을 살아가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전생에서 물려받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합니다.

힐더브랜드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배워온 서양인들과 달리 태국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 절실히 자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힐더브랜드는 말합니다. 예를 들어,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승려는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장애가 없고 선천적 결함이 없는 등 신체적으로 완벽해야 하는데, 이는 전생의 업보가 좋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힐더브란트의 친구이자 동료 선교사가 태국에 왔을 때, 태국 정부는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시각장애인은 전생에서 나쁜 행실을 했기 때문에 종교적 교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도들은 나쁜 업보에서 벗어나 공덕을 쌓기 위해 사원에 시주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등 선행을 실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이 악을 능가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힐더브랜드는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죄의 개념은 없으며, 오히려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도들과 대화할 때 힐더브랜드는 죄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빚을 갚을 방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당신이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업보를 없애주기 위해 누군가 대신 죽었습니다”라고 힐더브란트는 말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뻐합니다.” 선교사들이 직면한 더 큰 장애물은 불교가 태국인의 정체성에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더 자비로운 불교

중국 대승불교 세계의 중심지인 대만에서는 업보에 대한 인식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공산당 정부가 모든 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중국 본토와 달리 대만에서는 불교, 특히 인본주의 불교로 알려진 철학이 방해받지 않고 성장해 왔습니다. 불교 신자는 대만 인구의 약 35%를 차지합니다.

인본주의 불교는 불교 신앙을 일상생활에 통합하고 세상의 문제를 돌보는 것을 강조합니다. 인본주의 불교는 불교자선재단에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1966년 대만에서 한 불교 수녀와 30명의 주부들이 가난한 가정에 기부하기 위해 돈을 모아 설립한 이 단체는 현재 전 세계 100개 국가와 지역에서 활동하는 국제 인도주의 구호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쯔치 자원봉사자들은 의료 지원, 환경 보호, 재난 구호 활동에 참여하며 때로는 정부보다 먼저 재난 현장에 출동하기도 합니다.

대승불교도들은 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연민으로 열반을 연기하는 고귀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업보와 윤회는 여전히 핵심 교리이지만 교리에서 강조하는 바는 다릅니다. 모든 불교도는 고통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지만 소승 불교도는 평생을 거쳐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대승 불교도들은 현세에서의 고통 완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전생에 나쁜 짓을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업보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이와 상관없이 항상 좋은 업보를 쌓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돕는 것”이라고 해외사역연구센터의 이스텐 법은 말합니다. “깨달음이 우선이라면 항상 좋은 것은 자비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업보에도 좋고, 그들의 업보에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홍콩중문대학교의 종교학 교수인 라이 판추우는 19세기 후반에 중국 불교도들은 종교를 개혁하고 장례 의식을 넘어서고 싶어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우고,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청년회와 주일학교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개혁가들이 중국 불교를 “오직 장례를 위한 종교에서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종교”로 변화시키면서 점점 더 많은 대만인들이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인본주의 불교도들은 업을 사회적 또는 집단적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어떤 행동을 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라고 라이 스님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감옥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지만 가족, 친구, 더 큰 사회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고립된 상태에서 해방을 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과관계 또는 업보의 그물망 속에서 살고 있으며, 상호 의존적입니다.”

오랜 불교학자이자 목회자,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해 온 라이는 기독교인들이 같은 종교에 속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 동물과 환경에 대한 불교의 연민을 배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또한 불교도들은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삶의 고난과 고통에 직면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지만, 중국 불교에서 정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사랑과 연민에 대한 이해가 정의의 일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라이는 말합니다. “불교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미움이 생긴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욕망과 미움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증오는 나쁜 업보를 일으키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불교는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명상 기술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이는 이것이 잘못을 해결하거나 미래의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없다면 화해는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정의는…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업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누구든지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갈라디아서 6장 8절과 같은 구절은 업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을 제시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는 자연의 법칙과 같으며, 신이 움직이거나 통제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우리에게 행위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권자라고 가르칩니다. 힐더브랜드는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와 자비로운 궁극적인 행위로 대신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모든 나쁜 사건은 이전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생각을 반박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직면하지만 때로는 고통이 마땅하지 않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힐더브란트는 하나님과 사탄의 우주적 논쟁을 통해 욥의 고통이 그의 행동으로 인한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욥기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죽인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누가복음 13:2~4을 두 가지 예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들은 업보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고통에 대한 보다 복잡한 이해, 즉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넘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3절).

힐더브란트는 태국인 선교사 친구도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비록 앞을 보지 못했지만 훌륭한 전도자였고, 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수많은 장애를 극복한 것을 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께는 아버지에게 속한 사람들의 고통을 선하게 사용하신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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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주의’는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를 상호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이제 그 용어를 다시 정리해야 할 때이다.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24
사진: María Jesús Contreras의 일러스트

상호주의(complementarianism, 상호보완주의 혹은 상호보완론으로 부르기도 함. 역자주)에 미래가 있을까?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남성과 여성 간의 상호 보완 개념이 계속 유지될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과 구별의 원칙을 수용하는 것은 성경 자체의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오히려 나는 상호주의를 이 부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바탕을 둔 일관성 있는 특정 운동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는 성경이 교회와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믿으며, 나 자신을 상호주의자로 설명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상호주의라는 단어의 무효화, 다른 선택 가능성 그리고 자기잠식효과 개념의 확산은 나로 하여금 나의 신념을 계속 상호주의자로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1980년대 후반에 처음 사용된 상호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나 역시 내가 가진 신학적 신념으로 설명해왔지만, 이 개념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탐구를 두려워하지 말고, 건전하고 정중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우리의 생각을 검증하고, 가정을 확인하며,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성장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무효화는 다른 이야기다. 무효화는 단순히 ‘나는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효화는 ‘당신은 존재할 자격이 없다. 여기에 당신이 설 자리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상호주의의 반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뛰어넘어 무효화로 향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새로운 세대의 젊은 논평가들은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모든 상호주의적 표현을 본질적으로 모욕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한다.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표현한 애통함에 동감한다. 상호주의 신학이 자칭 지지자들 가운데서 오용되고 남용되어, 특히 여성들에게 깊은 해를 끼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런 태도에 대해 회개하고 남성과 여성의 상호보완성에 대한 성경적으로 신실하고 유익한 가르침을 다시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은 상호주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여성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으며, 현대 교회에는 이 개념을 위한 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 같은 상호주의 여성이 교회에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신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목회 사역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수많은 상호주의 남성 동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다. 상호주의가 여성을 높이고 존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나의 경험과 자격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상호주의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그래서 내가 실제로는 상호주의자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대자들이 상호주의가 현재에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상호주의가 의미 있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나 상호주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무효화만이 아니다. 신학적 틀 또는 젠더 관계와 역할에 대해 훨씬 더 제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주의와 가부장제(남성의 사회적 지배) 간의 차이를 완화하려는 사람들은 또 다른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주의 신학은 가부장제 이념과 다르다. 우리처럼 상호주의의 신학적 원리를 규정하는 데 전념한 사람들은 그 차이점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1987년에 작성된 상호주의의 창립 문서인 댄버스 성명서는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인격을 주장한다. 또한 성에 대한 성경에서 말하는 구분을 인정하며, 가정과 교회 내에서 그러한 구분이 경건하게 표현되는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다. 이는 여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발휘하고, 비굴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과 행동으로 알리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존재에 있어 불평등하고, 결혼 범주를 넘어 남성의 지도권을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고, 신학 연구(또는 더 포괄적으로 고등 교육)에서 여성의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남편이 아내가 읽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기독교 서적을 결정하도록 권장하며, 가정 외에서의 합법적 여성 사역은 정당하지 않다고 제안하는 사람들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된다. 이것은 상호주의가 아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 생각에는 상호주의가 너무 수동적이다. 상호주의는 충분히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상호주의는 점점 왜곡되어 가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점점 더 장악 당하고 있다.

이 대조적인 두 관점 사이에 모두가 인식할 수 있는 공적 구별이 없다면 상호주의가 어떻게 독자적으로 설 수 있을까? 상호주의가 미래에 진정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을까?

상호주의의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인에 의한 무효화, 다른 선택 가능성 뿐 아니라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위협인 자기잠식효과이다.

이러한 자기 잠식은 지지자들이 댄버스 성명서의 기본 신학 원칙을 넘어 상호주의를 재정의할 것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물론 개인, 교회, 사역에 따라 이러한 원칙의 적용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른 해석이 상호주의의 유일한 충실한 형태라고 정의 내려질 때, 자기 파괴의 위험이 나타난다. 이는 상호주의의 신학적 주장에 근거하면서도 일관성도 갖춘 다른 결론을 전혀 허용하려 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자칭 상호주의자들이 노골적인 여성 혐오는 간과하면서도 페미니즘 사상의 일부를 기꺼이 반박하려 할 경우에도 자기 잠식이 발생한다. 최근에 자칭 기독교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트위터가 특정 상호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합리적 사고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바이럴 영상은 같은 진영에서 거의 일관적으로 침묵 대응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상호주의자들이 성경적 원칙을 취사선택헤서 지키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멸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가 믿는 바를 포괄적이고 일관되게 지키지 않는다면, 상호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호주의에 미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상호주의에 미래가 있으려면, 상호주의 기독교인들이 일관성 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상호주의가 복음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틀렸음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에 대한 비성경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가르침을 가차 없이 비난하고, 우리의 신학적 원칙에 스스로 책임지며, 원칙을 넘어서지 않으며, 최소한 그 원칙을 지킨다면 말이다.

상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미래를 가지려면, 남성과 여성 모두 그 미래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실제 서로 상호보완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기회도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함께 지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누가복음 24:1-12). 또한 로마서 16장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과 여성 간의 훌륭한 사역 파트너십을 구현할 기회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들을 대단한 존엄과 존중으로 대하셨고, 여성들에게 자신 안에서 풍성한 삶을 찾으라고 부르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도록 권유하신 우리 구주를 본받고 영광을 올려드릴 기회가 있다.

다니엘 트리위크는 The Meaning of Singleness: Retrieving an Eschatological Vision for the Contemporary Church(국내 미번역)저자이자 시드니 성공회 교구의 연구 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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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도 경계를 정해야 한다

역기능 문제가 있는 교회 문화에 건강한 리듬을 가져오기 위한 전략들

Christianity Today July 10, 2024
Illustration by Anson Chan

“제가 만약 이런 변화를 꾀한다면, 전 아마도 직장을 잃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목사가 말했다.

최대한 솔직히 나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상담하는 목회자들과 이런 류의 대화를 여러 번 나눴다. 많은 목회자들이 좌절하고 지쳐서 그만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휴가를 가지지 못했다. 다른 목회자들은 공황 발작이나 극심한 스트레스의 다른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의 결혼, 자녀, 신체 건강, 개인적인 취미는 모두 무시되고 있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60시간, 70시간, 심지어 80시간씩 사역하기도 했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목회자 상담 전문가로 일했고, 특히 지난 10년은 목회자와 사역 리더를 위한 리트릿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목회자 중 많은 분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사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건강하게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실제로 그들의 교회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아픈 현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사실, 이런 시도는 그들의 해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떠나기 전에

목회자들이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며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 문제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 이슈에는 목회자와 교인이라는 두 당사자가 있다. 교인들이 목사의 건강한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교인들이 계속해서 목회자가 주중 매일, 모든 시간에 연락 가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교인들의 모든 결혼식과 장례식을 집례해 주길 원한다면? 모든 프로그램을 인도해 주길 원한다면?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내 카리와 내가 개인 상담 실습을 할 때, 역기능 가정, 예를 들면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님과 아직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청년들을 케어한 적이 있다. 젊은이들은 건강하기를 원했다. 나는 그들에게 네 가지 가능한 길이 있음을 제시했다.

1. 변화 가능성이 없는 역기능 시스템 속에서도 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2. 모두가 더 건강해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꿔보라.

3. 가정을 떠나서 건강을 찾으라.

4. 포기하고 역기능을 받아들이라.

목회자들도 매우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데, 내 경험상 많은 목회자들이 3번이나 4번을 택한다. 그들은 아마도 첫 번째를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건강한 경계를 세우려는 시도와 그러지 말라는 압박이 뒤섞이는 가운데, 결국 비현실적인 기대에 단순히 굴복하는 것 이상으로 지쳐버릴 수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기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아니면 자신들이 원했던 변화를 포기하고 이것이 사역의 방식 가운데 하나이기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체념하기도 한다.

목회자들은 떠나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둘 다 아니다. 많은 경우, 떠날 필요성이 현실화 되기 전에, 혹은 해고되기 전에, 2번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것은 건강을 되찾고 교회가 함께 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좋은 경계선을 가진 삶으로 성숙하고, 이 과정에서 교회를 전략적으로 도울 수도 있다.

누가 나설 수 있나?

종종 목회자들은 부재 기간 동안의 목회 사역을 다 해놓기 위해, 리트릿 센터 도착하기 전날 늦은 밤까지 해야 할 일들을 다 마무리 한 후, 리트릿 센터에 도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일반적인 현실을 드러낸다. 목회자의 다양한 역할을 대신 맡도록 훈련된 사람이 아직 없기에, 목회자들은 이런 사역자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좋은 소식은 함께 일할 수 있는 사역자들을 보통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는 "사람이 자신을 제한할수록, 그는 더욱 지략이 많게 된다"고 말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일을 하는데 능숙하다. 교회 문화의 변화는 목회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솔직히 던져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음 주에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누가 이 일을 할까? 나만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일이며, 나는 어떤 일에 집중해야 할까?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하면 성장이 아닌 깊이에 집중할 수 있을까?

목회자의 다양한 책무를 기꺼이 수행할 다른 사역자를 찾아서 훈련시키는 것은 건강한 경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교에 은사가 있는 장로에게 지침서를 제공하라. 목회 마인드를 가진 교인과 병원 심방을 함께 하라. 목회자가 없는 동안 회의를 주재할 사람을 훈련시켜라. 이렇게 하면 목사가 부재 중이거나 다른 업무에 집중할 때에도 사역을 계속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평신도 사역을 정기적으로 강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목회적 책임을 함께 맡도록 의도적으로 준비시키는 것은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된다. 이는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에서 몇 가지를 떼어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목회자의 입장에 대해 더 큰 이해와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목회자의 경계에 대한 일차적인 저항에 맞서는 직접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경계에 저항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경계가 자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아니요,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뭔가를 잃고 있다고 생각하여 반발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두려움, 불안감, 게으름, 주인의식, 심지어는 목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주어진 사역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교인들은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면으로 작성하기

목회자의 건강한 경계를 존중하는 교회의 핵심 구성 요소는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교회의 기대를 명확하게 적시한 현실적인 서면 직무 기술서를 갖는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 리더들과 만나 직무 기술서를 평가하고 조정할 수 있으며, 가능하다면 구체적인 내용을 추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상 주간 근무 시간, 목회자가 설교할 것으로 예상되는 연간 주일 수 또는 목회자가 1년 동안 주관할 것으로 기대하는 결혼 예식의 최대 횟수 등을 자세히 명시할 수 있다.

목회자가 직면할 수 있는 큰 장애물 중 하나는 교회의 다른 리더들(예를 들어 장로나 집사)이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할 때이다. 이 상황에서 목회자는 한 달 동안의 업무일지를 작성하여 사역에 소요된 모든 시간(교인들과의 문자 메시지 등 포함)을 기록할 수 있다. 이 업무 일지는 다른 리더들이 목회자가 주당 근무 시간을 제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설교 준비와 같은 목회자의 주요 업무에 우선 순위를 정하는 방법에 대한 유익한 토론을 촉발할 수 있다.

목회자의 목회 책임이 제한적이고 구체적이며 교인들의 지지를 받을 때, 교인들은 신선하고 열정적이며 집중적이고 열성적인 목회자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목회자가 집중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의 유익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목회자들이 특히 경계를 책정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성장과 건강 측면에서 성숙해지고 깊어지게 되면, 그들은 강단에서 교인들에게 이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잘 전달할 수 있다. 이는 목회자 자신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가르침을 듣는 모든 이, 평신도와 교회 리더들 모두에게 현명한 속도와 그리스도처럼 우선순위를 책정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에 유익하다.

좋은 경계선을 긋는 성경적 가치에 대한 설교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목회자들은 생명의 원천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스도 몸의 각 지체는 손이나 발, 또는 눈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에 경계선이라는 것이 성도들의 소명 가운데 잘 머물 수 있도록 도울 지 있는 지와 같은 성경적 주제에 대해 설교할 수 있다. 설교에서는 안식 하는 날의 휴식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주변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 주는 지에 대해 마음껏 탐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교회 구성원과 목회 직원 모두에게 건강한 기대치를 설정하는 교회 문화를 조성할 수 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교인에게 보다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의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설교(특히 외부 설교자의 설교)가 효과적일 수 있다. 교회 업무 회의 에서 목사가 아닌 리더가 목회자 직무의 주요 구성 요소를 회중과 공유하도록 하는 것도 현명할 것이다.

가치 있는 리스크

교인들이 자신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을까 목회자가 두려워할 때, 나는 목회자가 조용히 교회를 떠나거나 해고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현재의 시간 분배가 효과가 없다는 것과 상황이 변화될 수 있도록 교회의 리더들과 논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리더들과 교인들의 지지를 요청하고, 역할을 위임하는 것이 비록 실패하더라도 취해야 할 올바른 조치이다.

나는 목회자들이 교회 리더들과 교인들이 경계선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환호하는 장면을 본 적도 있지만, 슬프게도 일이 그렇게 되지 않는 장면도 본 적이 있다. 이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비록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목회자의 경계를 포함하여 건강한 경계가 존중되도록 교회 문화를 바꾸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전략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리스크는 감수할 가치가 있다. 목회자는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교제함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메켄지는 라이선스를 갖춘 상담사이자 안수 받은 목사이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목회자들과 다른 기독교 리더들을 상담해 왔으며 현재는 Marble Retreat의 책임자이다. 그는 Don’t Blow Up Your Ministry(국내 미번역)의 저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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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길이다: 도를 통해 중국인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도록 돕는 방법

고대 철학자 장자의 가르침은 전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장자의 가장 유명한 비유 중 하나: 나비의 꿈

장자의 가장 유명한 비유 중 하나: 나비의 꿈

Christianity Today July 3, 2024
위키미디어 커먼즈 / CT 편집

한복음의 첫대목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는 그리스어 로고스의 번역어인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중국어 성경의 많은 번역본(중국어 연합판 포함)에서는 이 개념을 “도(道)”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는 일반적으로 “길”로 번역됩니다. 중국어에서 도(道)는 하늘과 일치하는 가르침 또는 삶의 방식을 나타냅니다. 또한 도교에서는 모든 만물의 편재하는 본질을 의미하기도 하며, 추종자들이 불멸을 추구하고 상황에 대한 올바른 대응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도록 장려하는 사상 및 종교적 수행의 전통입니다.

하나님의 도, 즉 말씀은 도교의 도(道)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중국에서 생활하고 가르치면서 저는 영적인 문제에 열려 있는 예민한 마음과 호기심 많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자들은 기독교 복음을 고려하기 전에 조상들의 전통에서 답을 찾으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중국 종교와 철학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교, 도교, 불교의 전통을 진지하게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동방 법가 편찬

현재 중국 기독교와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저는 중국 철학과 종교가 기독교 사상과 어떻게 수렴하고 갈라질 수 있는지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계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유산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과 학자들은 다른 종교 및 철학적 전통과 진지하게 대화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7장에서 바울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미지의 신에 대한 비문을 관찰하고 그리스 전통의 일부 표현이자 성취로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후 오리건과 오거스틴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그리스-로마 철학을 활용하여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이교도 유럽 전역으로 복음의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문화를 복음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교가로 활용하는 이러한 패턴은 중국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6세기 당나라 시대에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수도사들은 중국의 철학적 용어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16세기 명나라 황실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유교적 사고방식과 담론을 도입했습니다.

도교는 유교와 함께 수 세기 동안 중국의 영성을 형성해 왔으며,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은 철학자 장자였습니다.

장자에 대해서는 중국 맹(지금의 상추 지역)의 하급 관리였으며 유가 학자 맹자와 동시대 인물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롭고 쉬운' 사색과 단순함이 이끄는 삶을 위해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철저하게 거부한 유명한 도가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도에 대한 장자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은 중국 문화와 복음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장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수 있는 신성한 인물은 아니며 그의 가르침이 성경처럼 신성한 것도 아니지만, 그의 말은 중국인들이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예수를 길과 진리, 생명으로 바라보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 전역에 퍼진 방법

장자의 가장 지속적인 사상 중 하나는 ‘참된 사람’(真人)의 모습입니다. 장자가 말하는 참된 사람은 도(道)와 완전히 일치하여 모든 상황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장자는 이러한 사람을 ‘내적 성스러움과 외적 왕권’(内圣外王)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그 영적 힘은 무력으로 다스리는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서기 220년 한나라가 멸망했을 때 학자들은 유교가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교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장자의 참된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가와 도가의 가르침을 혼합하여 신도학 또는 “신비한 학문”(玄学)으로 알려진 새로운 지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학파의 지도자들은 신 도가 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불교 사상에 눈을 돌렸습니다. 불교는 한나라 시대에 중국에 들어왔지만 당시 중국인의 정서에 반하는 수도원 생활을 위해 가족과 사회를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중국 엘리트층은 장자의 사상으로 인해 불교를 더욱 매력적으로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추종자들에게 불교의 명상 수행과 공명하는 언어인 '마음과 정신의 단식'(心斋)을 실천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자의 가르침은 도교와 불교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여 후자가 중국 전역에서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학자들이 불교 사상을 중국 문화에 소개하기 위해 장자의 가르침을 사용했다면, 그리스도인들도 장자를 사용하여 우리의 신앙을 위해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도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 구도자들은 이 렌즈를 통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장자의 가장 유명한 명언 세 가지를 신약성경의 세 구절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영의 탄생

장자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가르침 중 하나는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비가 사람으로 변하는 꿈을 꾸면서 자신이 그 반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통해 자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현재의 현실 너머에는 우리가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합니다. 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깨어나는 역동적인 경험은 우리 자신의 노력 없이도 예고 없이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이 생겨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세계관을 가진 중국인에게 변화의 신비에 대한 장자의 관점은 신자가 되는 것이 자기 주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주도적인 노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영원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은 비논리적이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거듭남은 육체가 아닌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은 니고데모가 생각했던 자연적인 탄생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원하는 곳으로 불고(8절), 그분의 역사는 우리 자신의 힘과 지성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열매 가꾸기

장자에게 있어 행동은 도에 연결되어 있을 때 거의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생명을 돌보는 비결”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한 정육점 주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3년이 지나자 더 이상 소 전체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정육점 주인은 말합니다.“이제 저는 눈으로 보지 않고 영으로 소를 봅니다. 지각과 이해가 멈추고 영이 원하는 곳으로 움직입니다.”

장자에게는 노력으로 시작된 것이 천천히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집니다. 그 결과 소명 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생겨납니다.

중국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소개할 때 장자의 무위(无为) 개념은 갈라디아서 5:22-25에서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육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우리는 영으로 살기 때문에 영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중국 세계관에서 어떻게 맥락화할 수 있을까요?

성령과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에 거할 때 성령께서 매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자가 말한 것처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및 기타 열매를 삶에서 쉽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가치 평가하기

장자의 시선으로 보면, 하찮아 보이는 것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롭고 쉬운 방랑’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한 사람이 못생긴 나무에 대해 불평하며 장자의 가르침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의 말 역시 어렵고 쓸모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모두 싫어합니다!”

장자는 재치 있게 대답합니다. “[나무를]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나 넓고 한없는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거나 그 아래 누워 자유롭고 편안하게 잠을 청하지 않겠는가? …아무 쓸모가 없다면 어떻게 슬픔이나 고통이 올 수 있겠는가?”

장자가 보기에 ‘쓸모없는’ 나무의 아름다움은 뻗어나가 세상에 선을 베풀 수 있는 자연스러운 능력입니다. 장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의 성향을 비판하며 모든 피조물에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국 문화에서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장자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는 데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의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완전히 자라면 “동산 식물 중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어 …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앉는”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에게 작은 겨자씨의 아름다움은 새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은 미약해 보이지만 그 성장은 멈출 수 없음을 반영합니다.

도를 만나 육신이 되다

장자의 가르침과 그것이 중국 문화의 구도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는지, 그리고 장자의 참된 사람에 대한 사상의 성취를 보여 주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도, 즉 도이십니다: “태초에 도가 있었고, 이 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도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 도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관의 언어와 가치관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문화에 복음을 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문화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자의 말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로마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적 표현을 설명했던 것처럼 중국인이 아닌 기독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오거스틴이 말했듯이, 그리고 나중에 아퀴나스가 동의했듯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진리가 발견되는 곳마다 하나님이 그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6:13). 그리고 모든 문화에 내재된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푯말은 모든 민족의 소망인 예수님을 가리킵니다(마 12:21).

이스턴 로는 프린스턴 신학교 해외 사역 연구 센터의 학술 프로그램 부디렉터이다.

이 글이전 버전은 ChinaSource에 게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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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 2’는 불안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올여름 흥행작인‘인사이드 아웃’속편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혜를 줍니다.

Christianity Today July 3, 2024
©Disney

“예전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제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지 잘 모르겠어요. 믿어도 될까요?”

“기독교 고등학교에서는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요. 제가 배운 것을 갖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요? 어떻게 다시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과연 그래야 할까요?”

저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과 발전, 변화와 성장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할 때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알고 싶어 하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집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의 내 모습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질문은 올 여름 흥행한 인사이드 아웃 2 핵심 내용입니다. 픽사 팬들은 인사이드 아웃 (2015)에서 기쁨, 슬픔, 소심, 버럭, 까칠이가 함께 힘을 합쳐 라일리의 새로운 중학교 생활을 도와주었던 11살 라일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제 라일리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하키 팀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며 사춘기의 복잡한 시기를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라일리의 사춘기에는 새롭고 혼란스러운 다섯 가지 감정이 등장합니다: 당황, 부럽, 따분,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우리의 삶에서 한편으로는 마비시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건전하게 만드는 복잡한 역할을 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불안은 부정적인 결과를 식별하고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불안은 우리를 높은 난간에서 조심히 행동하게 하고, 야생동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합니다.

우리는 라일리가 불안의 도움으로 사춘기 생활의 위험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라일리는 여고생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추측하고, 하키 주장인 밸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팀원들과의 어색한 출발을 만회하기도 하고, 모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도 하죠.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 2 불안, 심지어 ‘성공적인’ 불안에도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라일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운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떻게 일이 잘못될지 미친 듯이 떠올립니다. 라일리는 ' 불확실성에 대한 불내성'이 생겨 존재하지 않는 위험을 보고, 팀 동료와 코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특히 불안한 순간에는 자신이 너무 못해서 팀에서 비웃음을 당할 거라고 상상하고, 1분 뒤에는 자신이 너무 잘해서 팀원들이 질투할까 봐 걱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절실했던 그녀는 코치의 개인 노트를 몰래 들여다보며 자신의 가치관을 배반합니다.

불안이 라일리가 스트레스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더욱 미친 듯이 노력하는 동안 다른 감정들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불안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요. 이들은 승자 독식의 싸움을 멈추고 대신 불안이 라일리의 복잡한 감정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강박적인 절망감이 지배하지 않고도 불안의 긍정적인 기여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학생 중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안이라는 감정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그들 대부분은 불안을 경험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걱정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치료, 성경적 상담, 약물 치료가 모두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기독교 신앙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는 말씀을 듣고서도 왜 불안이 문제가 되는 걸까요?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서 바울은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때 그리스어(메림나)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이 불안을 그가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투옥, 난파, 굶주림, 목마름, 위험 등 다른 많은 어려움과 함께 묶어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개척한 교회에 대한 연민과 교회가 번성하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메림나는 돌봄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가져야 할 '돌봄' 또는 '관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의 안녕을 염려할 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때로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염려하게 됩니다.

저는 함께 일하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삶에 안주하며 평온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길 바랍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세상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의 중대함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행동이 이웃의 삶을 개선할 수도 있고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그들이 소명과 사명에 대한 '불안'과 동시에 복음의 확신 속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모든 사람과 그들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말한 긍정적인 의미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로 겸손한 기도의 삶을 통해 모든 것을 가장 아끼시는 분께 자신의 노력을 맡기고 그분께 염려를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벧전 5:6~7).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라일리가 불안 증상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 심장이 두근거릴 뿐만 아니라 불안이 은폐하고 왜곡하는 건강한 갈망도 볼 수 있습니다. 라일리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합니다.라일리는 팀의 일원이 되어 기여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제 학생들에게도 그렇듯이 불안은 종종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냅니다. 성적에 대한 불안은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냅니다. 부모의 수용에 대한 불안은 가족의 축복에 대한 감사를 드러냅니다. 온라인 문화에 대한 불안은 소셜 미디어의 힘과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한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커티스 장의 <불안의 기회>에서 그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불안한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는 사실을 관찰합니다: 과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문둥병자를 만져주셨으며, 감정을 회피하거나 진정하라고 격려하는 대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불안한 자아를 사랑하셨고, 사람들이 자신을 찾게 된 바로 그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정상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은혜로 불안한 자아를 바라볼 때, 불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정당한 순종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J. 마이클 조던은 휴튼 대학교 신학과 부교수로 2013년부터 2024년까지 채플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저서로는 '불안의 시대 예배: 교회는 어떻게 치유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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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잘못에는 특별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모든 죄에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죄를 다르게 처벌하고 치유하는 법을 보여줍니다.

Christianity Today July 1, 2024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삽화 / 출처 이미지: 게티

독교 신학은 무너질 것 같은 진리를 일관되게 하나로 묶어줍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신이시자 온전한 인간이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교회는 지역적이면서도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확언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걷는 것과 껌을 씹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진리를 긴장감 있게 붙잡지 못하고 종종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다른 쪽으로 미끄러지며, 그 과정에서 진리를 왜곡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무적의 초월적 존재로 취급하거나 단순한 선지자로 취급합니다. 우리는 마치 인간이 타락하여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거나 미약한 결점만 있을 뿐 꽤 괜찮은 존재인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마치 유일한 종파처럼 거대해지거나 최소화의 지역 인원으로 모이려고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기독론, 인류학, 교회론에서 각각 이 세 가지 진실한 긴장을 회복하기 위해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한 네 번째 긴장이 있습니다: 모든 죄는 우리를 파멸시키지만 모든 죄가 우리를 똑같이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으로만 속죄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모든 죄를 속죄하시는 유일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죄가 우리에게 같은 종류의 작용을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죄는 죄인을 망가뜨리고 우리 주변에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저지르는 죄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서로 다른 것으로 일관되게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서는 죄에 따라 다른 사회적 구제책이 주어지며 희생 제물도 다릅니다(레 4장, 출 21장). 모든 것에 황소나 염소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비둘기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선지서와 잠언에서 하나님은 특정 죄를 다른 죄와 구별하고 심지어 우선순위를 정하며 의도적인 죄와 의도하지 않은 죄의 차이를 설명합니다(잠 6:16-19; 겔 45:20).

예수님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을 그 자체로 죄의 범주에 포함하셨고(마 12:31), 어떤 죄는 우리를 지옥 불에 들어가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2). 바울도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저지른 죄는 다른 죄가 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피해를 입힌다고 말합니다(고전 6:17~19).

죄에 대한 이 두 가지 진리를 함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도덕적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 교회에서는 성차별 문제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성차별의 죄가 교회 내에서 실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숨겨서는 안 되지만, 그 피해를 어떻게 명명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생깁니다.

이러한 잘못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면서 많은 논의에서 성적으로 학대하는 목회자부터 대인관계 편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죄를 한데 묶어 논의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는 피해를 야기하고 회복이 필요하지만, 상식적으로도 이러한 죄는 의미상으로 다릅니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과 동료에 대해 성차별적인 가정을 하는 것은 같은 죄가 아닙니다.

누구도 이 두 가지 죄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단 죄라는 하나의 꼬리표를 달고 분류되면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이 광범위한 행위를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혼란이 시작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은 사실이지만, 분리해서 보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대가는 우리의 윤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이 다양한 종류와 피해의 규모를 가진 다양한 죄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적절하게 다른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부족한 방식이 모두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하는 것은 모든 불의의 무게나 결과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죄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이 정신은 신약성경이 아니라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래된 전통에 반하여 크든 작든 모든 죄는 저주받을 죄라고 주장한 존 칼빈을 생각해 보세요. 또는 유한한 피조물의 모든 죄는 무한한 신에 대한 무한한 범죄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주장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접근 방식은 모든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지만, 모든 죄를 평준화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도 있어 우발적인 피해와 고의적인 피해가 다른 이유나 피해의 정도가 중요한 이유를 말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모든 죄를 단순히 저주하는 죄로 규정할 때, 우리는 성경이 죄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따라서 다른 현세적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방식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인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특정한 사람들을 건강하게 회복하려면 다른 형태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두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의 예를 생각해 보세요. 두 제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둘 다 도망쳤다고 전해집니다(마 26:56). 그러나 베드로의 도주에는 적극적인 부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마 26:69-75). 따라서 베드로의 세 가지 부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세 가지 질문에 의해 충족됩니다(요 21:15-17). 더 깊고 다른 종류의 상처에는 다른 종류의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한 오래된 성찰의 전통은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점에서 칼빈과 에드워즈와 다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죄와 우리가 의도하지 않게 저지르는 죄를 구분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우리가 고의로 저지르는 죄와 무지로 저지르는 죄는 다릅니다(눅 12:47-48).

둘째,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경향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과 습관적으로 싸우고 어떤 사람은 교만과 싸우기도 합니다. 두 죄 모두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만,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차이점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죄 자체의 본질에 있으며, 전자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고 후자는 타인과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정욕은 우리의 마음과 욕망을 변형시켜 피조물로서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지만, 교만을 키우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는 도덕적 우주를 뒤엎는 것입니다.

셋째, 죄마다 다른 치료법이 필요합니다. 앞의 예로 돌아가서 성폭행을 폭로하는 것은 성차별적 사고를 폭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둘 다 권력, 대상화, 성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둘은 다른 점도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에 의한 폭력적인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또는 문화적 습관입니다. 하나는 법적 개입이 필요하고, 다른 하나는 대인 관계의 수정과 제자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여러 가지 죄를 구별하시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즉,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가 고의로 저지르는 죄와 무지나 어리석음으로 저지르는 죄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모든 죄는 피해를 주지만 죄의 종류에 따라 죄인과 피해자에게 미치는 피해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죄에 대해 어떤 다른 대응이 필요한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죄가 우리를 파멸시키지만 모든 죄가 똑같이 우리를 파멸시키지는 않는다는 이 긴장을 회복한다는 것은 '나는 다행히도 그 세리와는 다르다 (눅 18:9-14)'는 이기적인 죄 순위 매기기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알고, 우리의 특정한 죄를 알고, 그 죄에서 회복하는 데 필요한 특정한 덕목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 후에 오는 성화의 일부입니다: 정욕적인 사람에게는 순결, 교만한 사람에게는 겸손, 폭력적인 사람에게는 폭력적인 평화, 무자비한 사람에게는 무자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완성되고 특별한 상처를 가진 특정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주어진 이 모든 성령의 열매를 구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깨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복음주의자들은 판단하기 전에 더 세심히 구별하고, 각 죄의 본질과 그 피해를 더 잘 인식하며, 느리더라도 선한 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특별한 방식으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태복음 12장 43~4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깨끗하게 쓸어버린 집과 같은 상태가 계속될 것이며, 사탄을 막을 새로운 선한 세대가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일스 워렌츠는 <고립에서 공동체로: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저자입니다. 그는 Christian Ethic in the Wild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애빌린 크리스천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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