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와 켄, 에덴의 동쪽으로 가다

그레타 거윅의 신작 영화는 기독교인들도 “행운의 타락”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18, 2023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 제공

젠더와 성평등에 대한 질문이 미국남침례교(SBC)에서 미국장로교(PCA)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 교회에 확산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책도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작 <바비> 영화를 젠더 전쟁의 또 다른 공격으로 보는 사람들의 의견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레타 거윅의 최신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기에는 너무도 다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에 대한 맹목적인 긍정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여 적나라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젠더 전쟁은 줄거리가 아니라 설정에 불과하다. 이는 바비와 켄이 성숙을 추구하는 세계를 형성한다.

켄의 캐릭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영원히 ‘그냥 켄’으로 살아야 했던 바비의 남자 주인공은 바비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바비를 따라 현실 세계로 들어가면서 켄은 바비에게 고분고분하게 순순히 복종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켄은 다른 삶의 비전을 발견한다. 바로 남성이 지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인정받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켄은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남성 우월주의 사상을 바비랜드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 영화는 현대 남성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모르는 광범위한 정체성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 크리스틴 엠바의 최근 담론과 같은 주제를 전한다. 엠바는 이러한 자아 상실로 인해 조던 피터슨부터 앤드류 테이트에 이르기까지 우파 남성 우월주의 전문가들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목소리는 젊은 남성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켄의 여정처럼 여성 혐오로 치닫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일부일 뿐이다.

결국 켄은 자신이 불만을 갖게 된 뿌리가 사회 질서 때문이 아니라 체면과 수행적 정체성을 통한 자아의 퇴보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바비의 여정 역시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켄과 달리 바비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설명하기 힘든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바비는 구루의 형상을 한 이상한 바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영화 매트릭스와도 비슷한 이 장면에서 이상한 바비는 비현실로 돌아가거나 현실 세계에서 퀘스트를 수행하여 지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녀는 바비에게 파란 알약이나 빨간 알약 대신 분홍색 하이힐이나 (납작해진 발에 맞는) 버켄스탁 샌들을 제안한다. 바비는 하이힐을 선택하고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만, 다양한 질문과 도전으로 인해 답을 찾기 위해서는 바비랜드를 떠나야만 한다.

바비와 켄은 단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넘어 온전한(그리고 성을 가진) 인간성을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러한 실존적 질문은 주류 영화에서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불완전함과 실수를 통해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마법 같은 일들이 발견된다.

Vox의 비평가인 알리사 윌킨슨(전 CT 칼럼니스트)이 지적했듯이, 이 영화는 타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창세기와 <바비>에서 전형적인 여성은 금지된 지식을 습득한 후 이를 남성 동반자에게 알린다. 그리고 둘 다 순수함을 잃고 완전함에서 추방당한다.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원죄에 비추어 성숙을 논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는데, 특히 거윅 감독이 인간 발달에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창세기 이야기를 반역의 이야기로 이해한다. 금지된 것을 선택함으로써 여자와 남자는 불순종하고 발 딛고 있는 땅에서부터 자신의 몸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를 괴롭히는 저주를 받게 된다.

더욱이 복음주의 신학과 실천의 대부분은 이 저주를 뒤집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로부터 구속과 회복을 위해 오신 두 번째 아담으로 믿는다 (로마서 5:12-20). 우리는 다시 한 번 완전해질 날을 고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틀 안에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는 과정을 간과한다. 우리의 죄성을 고백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 점점 더 나아지게 되어 결국 완전에 이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계속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제자도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의 인간됨을 부정하여, 우리는 불완전함을 안고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최근에 한 상담사가 내게 이런 인상적인 말을 했다. “한나, 당신은 천사가 아니에요. 당신은 인간이예요.”

여기서 신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타락을 상실로 올바르게 이해하면서, 암브로스에서 시작하여 어거스틴, 아퀴나스, 위클리프는 타락을 인간의 완전성으로는 드러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인 “행운의 타락”으로 불렀다.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이 개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 무한한 선하심, 광대한 선하심이여!
이 모든 선하심이 악에서 생겨나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며, 더 놀랍게도,
이것은 창조 때 처음으로 어둠에서 빛을 가져온 것보다
더 경이로운 일!

우리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6:1). 그러나 은혜는 풍성하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의 실패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과 그분의 은혜에 대해 더 풍부하고 깊은 이해를 가능케 하신다. 우리가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 은혜를 이해하는 것은 신성한 아이러니이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를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할 것이다.

이처럼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존재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성을 결함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상화된 형태에서 구체화된 “삶의 복잡성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바비랜드를 떠나야 하는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인에게 이 과정은 저주받은 세상에서도 인간 존재의 선함을 확증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소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이 과정은 확실해진다.

우리 삶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의심과 죄, 죽음으로 점철된 세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확신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우리의 실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연약함과 불순종을 아시고도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해 안식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최근 내 친구가 하나님은 방황하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네가 누구인지, 네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단다. 그 이유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단다. 내가 확실하게 보증하마. 네 모습 그대로 있으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실제 인간으로 만드신다.

한나 앤더슨은 Made for More, All That’s Good, 및 Humble Roots: How Humility Grounds and Nourishes Your Soul의 저자이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왜 미국 기독교인들은 분단된 한국을 외면하면 안되는가?

나라가 둘로 쪼개진 지 7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인들은 이 해소되지 않은 분단을 끝내는 데 도움을 줄 책임이 있다.

남북한 접경 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국기(뒤쪽)와 남한 국기(앞쪽)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남북한 접경 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국기(뒤쪽)와 남한 국기(앞쪽)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14, 2023
Yonhap / AP Images / Edits by Christianity Today

1992년, 미국의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미국과 북한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도 그레이엄 목사의 평양 공식 교회 두 곳에서 설교하는 것과, 북한 전역의 교회 지도자 및 신학생들과 만나는 것 그리고 김 주석에게 자신의 책 한 권을 선물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2년 후,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 정부의 권유를 거스르고 다시 북한으로 향했다. “전쟁이 언제든 발발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었죠”라고 그는 귀국 후 말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레이엄 목사는 국영 방송과 인터뷰를 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 400명의 학생과 교수진 앞에서 연설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방문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의 평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양국 관계 개선에 작은 기여라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그는 귀국 후 밝혔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이 지역에서 길고 복잡한 역사가 있다. 미국은 수십 년 동안 한국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 이전에는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오랜 기간 분단되지 않았던 한반도 전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번 달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협정 70주년이 되는 달로, 이 협정으로 군사적 전투는 종식되었지만, 한국은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채 독립된 두 나라로 분단된 상태 그대로 지내고 있다. 미국이 이 지역에 개입하고 주둔해 온 역사를 고려할 때, 그리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그레이엄 목사의 용기에서 영감을 얻은 한국인들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 기독교인들은 현대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민족 분단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을 줄 책임이 있다.

분단의 경계를 넘다

한국은 항상 내 삶의 일부였다. 나는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대한민국 서울에서 자랐다. 2014년부터 2019년 사이, 인도주의 활동을 위해 6개의 팀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나의 부모님처럼 수백 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전쟁 전,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에도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때때로 처절한 실패와 권력 남용으로 인해 복잡한 상황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선교학자들은 이 140년을 선교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시기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1990년대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은 기독교 인도주의 단체들이 북한에서 봉사할 수 있는 문을 열었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많은 단체가 북한에서 활동했다. 이 단체들은 이전의 선교사들과 달리 교회를 개척하거나 전도하지 않았고 성경을 배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25년 동안 Christian Friends of Korea와 뛰어난 결핵 연구부터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메노나이트파 중앙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인도주의 기관들은 병원에서 회복 중인 어린이들을 위해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하고 북한 농업 전문가들을 서양으로 초청하는 등 북한 구호 및 개발 사업의 최전선에 서 왔다.

이러한 기독교 기반 기관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끄심을 감지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공동체와 대면한 채 국경을 넘나들었던 성경 속 인물들의 사역을 반영한다.

야곱은 두 사람의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기 위해 에서를 찾아갔다(창세기 32:3-33:17).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 앞에서 동족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예수의 가장 유명한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민족적 정체성이나 종교적 소속과 관계없이 곤경에 처한 나그네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누가복음 10장).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로마의 군사 중심지인 가이사랴로 가서 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을 만났다(사도행전 10장).

이 이야기들은 용기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미덕인 공감 능력을 보여준다. 북한에 대한 뉴스는 주로 핵 공격의 위협이나 긴장된 정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북한을 미국에 미칠 수 있는 위험 이상으로 보는 미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70년 동안 평화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고 북한 주민과의 만남이 거의 없었으며, 외교적 차원에서의 교류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북한에 거주하는 2,600만 명(호주 인구와 비슷한 규모)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한 미군 장성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에서 가장 큰 위험은 군사력 증강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공감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북한 사람들은 미국인들과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북한 사람들과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감을 실천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괜찮은 척 해 지는 것은 아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북한의 지도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가 깊이 동의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감한다는 것은 비난과 비판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위험한 ‘타자’를 인간으로 인정하기 위한 호기심을 요구하며,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는 것이며, 대면하여 자신의 주장만 펼치는 것이 아니라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기독교인 중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그곳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주방 직원들과 함께 취약한 사람들을 섬길 기회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메노나이트 평화 운동가인 존 폴 레더라흐가 ‘결정적 효모’라고 부르는 작지만, 강력한 행동으로 불신과 적대감의 역사를 끊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결정적 효모 제공하기

많은 미국 기독교인에게 ‘결정적 효모’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첫걸음은 알아가고 애통해하며 기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교육에서 비롯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제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있었던 한국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하지만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에게 그 전쟁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2020년, 100명의 한국계 미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애도 서명서에 서명하며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전쟁의 여파에 대해 애도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 민간인 200만 명과 미군 32,000명을 포함해 400만 명이 사망했고,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했으며, 현재까지도 남북한 주민들은 거의 완전히 분리된 채로 지내고 있다.

성명서 초안 작성에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피터 차, 풀러 신학교의 나승찬, Bread for the World의 유진 조가 참여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 화해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에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이들은 성명서에 썼다. “언젠가 모든 한국인이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가 한반도 전역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자매, 형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미국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취약한 주민들에게 동정의 표현이 되는 기독교 기반 인도주의 기관에 재정과 기도로 후원함으로써 결정적 효모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2020년 코로나19로 북한 국경이 폐쇄되기 전까지 20년 넘게 북한에서 활동했다. 미국과 북한 정부 간의 적대감으로 인해 MC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Samaritian Purse, 월드비전과 같은 단체의 직원과 자원봉사자들만이 북한을 정기적으로 방문한 몇 안 되는 미국인들 중 하나다.

이 미국인들은 보건 및 농업 등의 분야에서 북한 주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동료 인간으로 대하고, 함께 여행하고 함께 식사함으로써 북한을 적대적인 적의 단계에서 축소하려는 서사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과 단체가 북한 주민들과 협력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은 우리가 전략적으로 북한의 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과 동정심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셋째, 미국 기독교인들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개입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한인 성명서 초안 작성자들은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를 정치적 행동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평화 협정의 서명 당사국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기도하고, 평화협정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이 협정 체결을 위해 집회도 열 수 있다. 또한 북한에 있는 미국인 가족과 친척들의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지원하는 이산가족 통일법 같은 법안을 지지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고립과 징벌적 압박(제재를 포함), 특히 인권과 핵무기에 대한 압박이 강력하게 가해졌지만, 이 모든 노력들이 긴장 상황을 완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위협하는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압박에만 의존하는 외교는 위험하고 도덕적 상상력이 부족한 접근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기독교 정치 지도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상대방을 비인간화하고 악마화 할 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을 포기하고 상대방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북한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사실, 즉 지속적인 소통, 협상, 신뢰의 채널이 없다는 사실은 위험하다. 의견 불일치, 오해, 위협은 쉽게 갈등으로 확대되고 전쟁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과 같은 긴장 관계가 높은 다수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두 국가간의 한 가지 결정적 효모 순간은 1971년 미국 탁구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친선 경기’는 문화 교류로 이어졌고, 1972년 공화당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전체주의 지도자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것처럼 궁극적인 수교를 위한 씨앗이 심겨졌다. 두 지도자가 만난 시기에는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18만 명의 중국 군인이 사망한 한국전쟁(중국은 “미국에 저항하고 한국을 지원한 전쟁”이라 부르는)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20년 만인 1995년, 미국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 이후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비롯한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은 양측 참전용사들과 함께 화해를 위한 모임을 주도하였다. 중국과 베트남이 된다면, 북한은 왜 안 될까?

넷째, 우리는 분단을 넘어 사역하고 있는 용감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결정적 효모를 제공할 수 있다. 분명히 할 것은, 미국 기독교인들이 인종차별의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듯, 한국 기독교인들도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은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많은 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다른 나라에 불과하다. 반면에, 북한을 함께 치유를 추구해야 할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평화 운동의 멘토 중 한 분은 미국 장로교 최초의 아시아계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만(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이다. 이승만은 평양에서 자랐고, 전쟁 중 공산군이 목사였던 아버지를 살해하자, 어머니는 그와 그의 형을 남한으로 보냈고, 그는 남에서 군에 입대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승만은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 지도자였던 이승만은, 1978년 북한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임무는 분단을 넘어서는 것뿐만 아니라 28년 동안 헤어져 연락이 끊긴 가족이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불과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승만은 친척들과 짧게나마 상봉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남한으로 돌아왔을 때, 일부 사람들은 그를 반역자이자 “공산주의 애호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승만은 나에게 “크리스, 화해자는 다리 역할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리는 양쪽에서 밟히기 마련이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한국인들도 그 부름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젊은 한국 여성 배민정 씨는 분단된 한반도의 트라우마를 느끼지 않고 자랐다. 그녀에게 북한은 그저 다른 나라였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녀는 한국 IVF의 중국-북한 국경 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북한을 직접 보기 위해 배를 타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난생처음으로 북한군 두 명이 강변에 앉아 있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강가에 총을 내려놓고 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한국어로 인사를 건냈다.

“그중 한 명은 제 남동생과 똑같이 생겼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제야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민정 씨는 “그냥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고 말했다. 남한으로 돌아온 그녀는 화해에 대한 열정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자연스럽지도, , 정상적이지도필연적이지도 않은

내가 1970년대 한국에서 자랄 때만 해도, 선교사와 군인이라는 두 그룹의 미국인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 후 서구 선교사들은 떠났고 한국 교회는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외국 땅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를 포함하여 28,000명이 넘는 미군은 여전히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사실 미국은 한반도의 교회, 군사, 경제 지표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나의 한국 친구 중 일부는 “우리는 미국을 동북아시아 국가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컨실리아시아의 메노나이트파 목사인 내 친구 박허수 목사는 한국의 분단은 “한국계 미국인 뿐 아니라 모든 미국인의 문제이며, 전쟁은 우리의 과거만이 아니다”라고 자주 상기시켜 준다.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국인들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책임과 소명을 남겨주고 있다.

분단되지 않은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미국 선교사들은 분단이 자연스럽지도, 정상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인도주의적 협력과 건설적 외교를 추구한다고 해서 뿌리깊은 이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를 더 깊은 소명으로 연결해 준다. 한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밝힌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한국 분단에 관여하는 가장 깊은 동기는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 화해의 대리인으로서 예수의 값비싼 십자가의 길, 즉 제자도와 용서,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정의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파괴적인 전쟁을 촉발할 수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오늘날 지구가 직면한 가장 위험한 평화 및 안보 이슈 중 하나이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의 전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을 때, 그레이엄목사의 방북은 북한 지도자와 클린턴 대통령이 서로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상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레이엄 목사는 기자들에게 “이번 순방이 복잡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했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역사적이고 불안정한 순간은 오히려 미국 교회가 그레이엄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외교적, 국경을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이다.

크리스 라이스는 뉴욕에 있는 메노나이트파 중앙위원회 유엔 사무소의 디렉터이며, 이전에는 듀크 신학교 화해 센터의 공동 창립 디렉터로 근무했다. 그의 신간은 ‘팬데믹에서 갱신으로: 위기로 흔들리는 세상을 위한 실천’(IVP)이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Books

남침례교, 릭 워렌의 새들백 항소 거부

여성 목사가 고위직에 있는 교회를 제명하려는 움직임이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23년 SBC 연례 회의에 참석한 릭 워렌 목사

2023년 SBC 연례 회의에 참석한 릭 워렌 목사

Christianity Today August 9, 2023
소냐 싱 / 침례교 프레스

아무도 릭 워렌 목사의 항소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뉴올리언스에 모인 13,000명의 남침례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누구도 남침례교인들에게 교리를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 교회의 결정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회의장에 설치된 마이크 앞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읽으며 약 3분간 연설을 이어갔다. “공동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잘못된 여러 교리에 동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던 남침례교인답게 행동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SBC 연례 회의에 참석한 메신저들은 여성 목회자 고용에 관해 이견이 없었다. 대다수(88%)가 지난 2월 새들백교회의 제명 결정을 지지하는 데 투표했다.

여성 목사의 안수, 여성 교육 목사의 주일 설교 허용, 여성 캠퍼스 목사의 임명 등 캘리포니아의 대형 교회에 대한 2년간의 조사와 비판을 이 투표로 결정지었다. 이번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투표가 끝난 후 워렌은 이 항소가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수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대화를 진전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새들백교회를 설립하고 지난해 9월 은퇴할 때까지 43년 동안 교회를 이끌었던 워렌 목사는 조용히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4대째 목회하고 있는 워렌 목사는 회의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수십 개의 트윗, 웹사이트, 세 개의 동영상, 공개 서한, 4페이지 분량의 메신저 안내서 등을 통해 새들백교회의 해체가 교회 자율성에 대한 교인들의 신념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교회를 옹호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저는 수백만 명의 남침례교 여성들을 대변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영적 은사, 리더십 은사, 재능이 낭비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워렌은 자신의 명성과 “너그러운 마음과 패기”를 이용해 이러한 주장을 펼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신저들은 대체로 이 항소에 반대했다. 워렌 목사가 새들백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자, 온라인과 총회를 앞둔 행사에서 남침례교인들은 남침례교의 역사적 입장과 상호보완론적 신념을 옹호하며 반박했다.

“남침례교인들은 이 문제가 단순히 교회 정치의 문제나 해석학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적 헌신의 문제이며, 우리는 성경이 목사의 직분을 남성으로 명백히 제한한다고 믿습니다.”라고 워렌의 항소에 반박을 제기한 남침례신학교 총장 앨버트 몰러(Albert Mohler)는 말했다.

또한 메신저들은 여성 목사가 있다는 이유로 제명된 또 다른 교회인 펀 크릭 침례교회(Fern Creek Baptist)와 학대 의혹을 잘못 처리한 것으로 드러난 프리덤 교회(Freedom Church)에 대한 제명 결정을 유지하기로 투표했다.

수요일 오전에 항소 결과가 발표될 때 SBC 회장 바트 바버의 지시에 따라 메신저들은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새들백의 결과가 낭독되자 거대한 홀 뒤쪽에서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남침례교가 여성 목회자 문제로 교회를 제명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며, 이로 인해 새들백을 비롯한 4개 교회가 더는 SBC와 “우호적인 협력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침례교가 여성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훨씬 더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새들백 교회 사안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자격 증명 위원회는 여성 목회자에 대한 교단의 침례교 신앙과 메신저의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 교회를 식별하여 제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SBC에서 훨씬 더 많은 교회가 여성을 목회자로 고용하고 있으며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SBC는 헌법을 개정하여 이미 본문에 포함되어 있듯이 남성 목사만 고용하는 것을 SBC 교회 협력의 요건으로 명시하기로 의결했다. 헌법은 교회가 “성경에 따라 자격을 갖춘 모든 목사 또는 장로”로서 “오직 남성”을 임명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헌법 개정안은 2019년과 2021년에 인종 차별과 학대를 묵인할 경우 SBC 제명 사유가 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추가한 것에 이은 결정이다. 이 개정안이 발효되려면 내년에 다시 통과되어야 한다.

“올해 회의에서 여러 사안 중에서도 새들백 사안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이 문제에 대한 9Marks 토론에서 남신학교 보이스 칼리지의 교수인 데니 버크(Denny Burk)가 말했다. “우리가 이 사안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며… 개정안도 정말 중요합니다.”

대다수의 남침례교 지도자들은 성경이 신약성경에서 목사-장로-감독자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인도자 및 설교자 역할을 남성에게만 제한하고 있다고 믿는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여성에게 다른 직책(예: ‘주일학교 목사’)에서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혼란을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의는 연례 회의 기간 내내, 집행위원회에서 나온 제안을 논하며 계속되었다. 성경이 남성 목사만을 인정한다고 확신하는 집단에서 이것은 직책에 대한 논쟁일까? 사역의 역할에 대한 것일까? 혹은 교제 모임의 기능에 대한 것일까?

메신저들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직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목사에 “장로/감독”을 추가하는 신앙고백문구 변경 승인을 요청했다.

또한 교회가 SBC의 신앙고백을 얼마나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지, 즉 ‘우호적 협력’의 조건을 조사하는 대책위원회를 승인했다. 내년 총회에서 다시 보고할 이 대책위원회는 조지아 주 제임스 메리트 목사가 제안했으며, 에드 리튼(Ed Litton)과 J. D. 그리어(Greear) 등 전직 SBC 총회장들이 지지했다.

이 토론에 참석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 지도자들이다. 화요일에 열린 침례교21 패널에서 그리어는 여성, 특히 교회 직원으로 봉사하는 여성들의 입장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잘못된 상호보완주의가 평등주의로 가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라고 그리어는 회의에서 언급하며 여성의 “역할, 성실성, 존엄성,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라고 말했다.

“회의장이 전쟁터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좌절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Books

통일에 무관심한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

“평생 교회에서 남북한 통일이나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남성이 북한 국경 근처 남한의 철책에 남북의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태극기를 걸고 있다.

한 남성이 북한 국경 근처 남한의 철책에 남북의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태극기를 걸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8, 2023
안영준 / AP 이미지

김솔가 씨는 한국의 인기 민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자랐다.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 정성 다해서 통일을 이루자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그러나 남북한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 이 곡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자주 부르는 노래는 아닌 것 같다.

인천에 사는 김 모 교사는 “한국에서 성경에 나오는 ‘평화’는 개인 내면의 평화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고, 교회에서 성경의 평화를 남북 관계와 연결해 설교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교회에서 남북한 통일이나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북한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나고 모든 군사력을 철수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하며 전쟁 포로를 송환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분단되어 있다. 그러나 남북한은 평화협정을 체결한 적이 없으며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전쟁 중이다.

올해는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통일된 한국의 일원이 되는 것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면서 통일은 허황된 꿈처럼 보인다.

CT의 인터뷰와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통일을 지지하지만, 통일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 기독교인(한국에서는 MZ세대라고도 함)은 사회적,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통일에 대한 지지가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교회 역시 성도들의 주요 관심사인 통일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인식이 부족하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언어 통합을 추구하거나 젊은이들에게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교육하는 창의적인 교육 방식을 제공하는 등 오랜 꿈을 향해 구체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젊은 세대의 정서

2020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Z세대는 통일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고 북한 주민에 대한 호감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2021년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거의 절반(47.1%)이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답한 반면, 40대는 23.8%에 그쳤다.

CT가 국내 크리스천 채팅 그룹에 설문지를 보내 통일에 대한 Z세대의 생각을 물었을 때, 15세 서윤진 양은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통일이 되면 문화적으로는 좋겠지만 경제적,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많은 갈등이 예상된다”고 답했다.

“오히려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끝내고 분단되면 두 나라 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북한의 완전한 분단이 이상적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은 서 씨뿐만이 아니다. 많은 한국 젊은이들은 북한은 ‘가난하고 전체주의 국가’인 반면 남한은 ‘부유하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경제적 격차가 잘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통일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에 대한 데이터는 없지만, 한국침례신학대학교의 성서신학 교수인 신인철 교수는 통일을 지지하는 MZ 기독교인의 비율을 약 20~25%로 추정하고 있다. 신 교수는 이 비율이 계속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 통일을 위한 교회의 투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는 지금 57살입니다. 한때 교회는 통일이 필요하고 남북한은 하나의 국가라는 것을 강력하게 교육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가 통일에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네번째강 청년교육국 남상득 국장은 이전 세대의 한국인은 통일을 민족적, 경제적, 정신적 의미가 담긴 과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 세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남북한 통일을 위기로 여길 수 있다고 남 대표는 말한다. 첫째, 많은 한국 젊은이들은 신앙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여긴다. 둘째, 기성세대는 공산주의 국가에 고향이 있는 반면,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 발을 디딘 적이 없고 탈북자를 통해 북한을 접해보았을 뿐이다. 셋째, 교회의 일관성 없는 메시지로 인해 통일은 종교적 이슈가 아닌 정치적 이슈로 인식되고 있다.

CT가 인터뷰한 MZ 기독교인들은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지만, 또래들 사이에 광범위한 무관심과 개인주의 성향이 존재하며 이는 지지층의 공허함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한양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27세 신 교수의 아들 동민 씨는 CT에 보낸 이메일에서 “통일에 대한 생각은 그저 생각 속에 머물러 있거나 대화 중에 가끔 언급될 뿐이며, 결국에는 ‘감사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통일은 중요한 문제다’라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남한 젊은이들도 비신도들과 마찬가지로 남한 사회의 바쁜 삶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희생양이 되는 것 같아요.”

서울 유니온장로교회에 출석하는 영화감독 김선우 씨(27세)는 “주변 한국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해 큰 틀의 관점을 고려하기보다 개인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강원택 교수는 “높은 실업률과 치솟는 부동산 가격 등의 문제로 생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20대에게 통일 담론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평화를 위해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으로 휴전 후에도 한국인을 계속 이어주는 유대감 중 하나였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1972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분단 이전에는 한국 기독교인의 3분의 2가 북향민이었으며,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 일부는 난민 교회였다. 피난민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 한 명인 서울 영락장로교회의 한경직 목사는 한국전쟁이 북쪽의 성공적인 해방으로 이어졌다면 북쪽의 1,500만 명 중 80%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과 1992년 사이에 한국인들은 평양에 두 개의 교회 건축을 도왔고, 2008년에는 교회 중 한 곳의 재건과 확장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고 세바스찬 김과 커스틴 김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기록했다.

통일을 지지하는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명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장로교 목사이자 신약학자인 문익환 목사이다. “나는 평양에 가겠다”라는 유명한 시를 쓴 문익환은 실제로 평양에 갔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남한 정치인들을 격분하게 했다.

북한 출신인 많은 나이든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북한과의 관계에 회의적이었고, 김 목사 부부의 말을 빌리자면 “북한과의 어떤 타협도 강력히 반대했으며, 적극적 반공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정부에 대한 이들의 혐오는 국민들을 향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말과 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식량 부족과 기근이 발생했을 때 보수 기독교인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은 북한에 수백만 달러의 원조를 보냈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선언’을 계기로 ‘화해하는 기독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선언에서 1995년을 ‘희년의 해’로 선포한 것은 “통일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고, 보수주의자들조차도 전도에서 인도주의적 사업과 평화 만들기로 전환하도록 도전했다.”라고 기록한다.

“또한 희년은 토지 재분배에 대한 요청으로서 민주화 이후 복음주의 교회뿐만 아니라 진보적 교회의 관심사가 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과 연결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밝히고 있듯이, 평화를 향한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은 통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

통일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 방식은 반공 캠페인과 선교 의제의 일환으로서의 통일(보수 기독교인), 남북한 간의 대화 촉진(진보 기독교인), 인도주의적 지원과 나눔 캠페인 참여(일부 보수 기독교인과 대부분의 진보 기독교인)의 세 가지 입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30대 후반의 송승훈 목사는 통일이 군사력이나 전쟁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이 파산해 갑자기 남한에 항복하는 동화 통일도 56년 동안 분단된 두 나라가 성공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 송 대표는 에베소서 2장 14절을 남북한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방법에 대한 지침 구절로 인용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CT가 인터뷰한 다른 한국 기독교인들도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평화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성서신학 교수인 신 목사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포용과 용서, 사랑을 통한 평화주의의 힘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T가 인터뷰한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은 남성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평화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남북한 사이의 적대감과 증오심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목적이 동족을 사랑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대결과 갈등의 고통을 반복하는 남북한 주민들에게 정서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라고 2020년에 발표한 논문에 기록했다.

미래 구상하기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과 교회에게 통일은 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매일 노력하는 현실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돕는 ‘통일 교구’를 운영하며 탈북민들을 섬기고 있다. 한국이나 한인 디아스포라 출신 선교사들은 북한 국경과 가까운 중국에 거주하며 탈북민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한국인 목사로 사역하는 송 목사는 북한에 기독교 메시지를 라디오 방송으로 송출하는 극동방송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인천의 김 교사는 남한 교회가 북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남한에 있는 탈북민들은 종종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에서 간증을 나누도록 권유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금전적 보상”을 받기도 한다.

“탈북민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경제적 거래를 통해 교회와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교회 밖에서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서 통일을 옹호하기로 결심했다. 강보선 씨는 대구대학교 한국어교육과 조교수로 근무하며 남북한의 언어 차이와 통합을 연구하고 있다. 남북한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 외에도 언어 차이는 문화적 이질감을 더욱 심화시킨다.

예를 들어 남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 번역본은 개역개정판이지만, 북한은 1977년 남한의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만든 성경전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God’이라는 단어는 남한에서는 하나님으로 표기되지만 북한 성경에서는 하느님으로 표기된다.”라고 강 대표는 말한다.

강 대표는 자신의 작업이 언어 통합을 위한 남과 북의 ‘분단’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남북한 학자들과 협력하여 남북한 언어로 된 공동 용어 사전을 만들었는데, 이 아이디어는 한국 성경 번역가 문익환 목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전은 2013년에 출판될 예정이었지만, 남북 관계 악화와 팬데믹으로 인해 현재 프로젝트가 보류된 상태라고 강 목사는 말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 대표는 남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남북 언어 차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남북한 언어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합해야만 남북한 주민들 간의 정확한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개혁하는 것 또한 네번째강의 청소년 교육 책임자인 남 대표가 우선순위로 삼고 있는 일이다. 남 대표는 현재 남한 학생과 탈북 청소년을 대상으로 캠프와 견학을 진행하는 ‘삼수령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1,000명의 12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들이 이 센터를 방문했으며, 공립학교와 해외 거주 청소년들의 방문이 증가하고 있다고 남 이사는 말했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한반도의 역사와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분단된 땅이 아니라 통일된 땅이며, 이는 회복을 말한다”고 남 대표는 말한다. 또한 북한에서 사역했거나 북한을 방문한 선교사들을 만나 함께 기도 산행을 하기도 한다.

남 목사는 통일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몇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한국 크리스천들은 시간이 없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에서 진행하는 통일 교육은 대부분 행사 위주입니다. 그리고 그 행사도 대부분 정보 전달이나 설교 위주의 집회입니다.”

2020년 문을 닫은 네번째강 사업의 ‘생명의 강’ 학교 출신 탈북학생과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캠프를 운영하던 중, 한 탈북학생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남한에 오게 되었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 당황스러워했다. 생명의 강 학교의 한 학생은 “궁금하긴 한데, 그냥 여기 온 것만으로도 충분해요!”라고 대답했다.

“생명의 강 학교 학생들의 태도는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탈북민이라는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라고 남 대표는 말했다.

“에스겔서 37장에는 통일한국이 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조건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즉 마른 뼈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른 뼈와 같은 나와 내 가족, 교회가 영적 부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남 목사는 말했다.

“그러므로 통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기도와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화감독 김선우 씨를 비롯한 남한 크리스천들도 남 대표의 희망에 찬 신념에 공감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통해 일하기로 선택한다면 성공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 영혼이 한 나라의 경제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Julian Chae와 Morgan Lee의 추가 보도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기독교인들이 ChatGPT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묻고 있다. 이것은 구글 검색과 다를까?

전 세계 전문가들이 인터넷 안팎에서 AI 혁명이 신도들에게 가져올 결과에 관해 설명한다.

Christianity Today August 4, 2023
Illustration by Abigail Erickson / Source Images: Getty, Unsplash

작년 11 월 출시 이후 수억 명의 사람들이 휴가 일정을 계획하고 , 더 나은 코딩을 돕고 , 대중문화 소네트 매시업을 만들고 , 자신의 신념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배우기 위해 ChatGPT 를 사용하고 있다 .

수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신학적 질문에 대해 구글에 검색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질문에 답한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곤 했다. 이제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을 인공지능 챗봇에 할 수 있다. ChatGPT와 같은 자연어 처리 도구가 우리의 성경 해석 방식을 어떻게 바꿀까?

전 세계 8명의 AI 전문가와 ChatGPT가 직접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했다.

파블로 A. 루즈 살모네스, CEO, 엑스엘레바 그룹, , 멕시코시티멕시코

요한복음 17:11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진리를 찾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Chat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LMMs)은 정의상 진리의 원천이 없기 때문에, 때때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추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진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우연히 발견하더라도, 진리를 진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에 관한 대규모 언어 모델의 검색 결과를 볼 때, 우리는 그 결과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에 대한 “역류”와 추정(일명 알고리즘)을 혼합하여 나온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 결과, ChatGPT는 자체적으로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ChatGPT에 질문하는 사람은 앵무새가 답변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쳇봇의 답변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다. 앵무새는 다른 사람의 말을 모방하기 때문에 자신이 모른다고 해도 결국 진실을 말하게 된다.

수만 쿠마르 플레파카, 현재 독일 뮌헨에 위치한 바이블메이트의 설립자

ChatGPT와 같은 생성형 텍스트 AI 모델은 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구글링을 하거나 끝없이 많은 기사를 검색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신 AI 챗봇은 방대한 양의 텍스트, 서적, 기사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즉각적이고 명확하며 권위 있는 답변을 제공한다. 편리함, 속도, 대화형 특성 덕에 쳇봇은 흔히 사용하는 소스가 되었다.

모든 구절에 대해 즉각적이고 다양한 해석들과 문맥을 제공함으로써 개인 성경 공부의 질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범용 모델인 ChatGPT는 신학적으로 또는 성경적으로 정확성이 부족할 수 있다. 이 앱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증진하거나 영적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ChatGPT 기반의 대안인 BibleMate.org를 만들게 되었다. 바이블메이트의 사명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답변을 제공하고, 사용자의 신앙 여정을 제대로 안내하는 것이다. AI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 성장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기대가 된다.

앙 위 헤이, IT 실무자 겸 설교자, 싱가포르

정보를 수집, 필터링하고, 데이터를 통합, 정렬하며, 다양한 언어로 요약을 제공하는 ChatGPT의 속도는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지능을 제공한다.

이 기술은 성경적 조언을 원하는 크리스천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성경 구절을 적용하도록 ChatGPT에 요청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ChatGPT의 다양한 언어 기능을 통해 성경 원어부터 다양한 현지 언어에 이르기까지 성경 구절에 대한 주석 연구를 더 쉽게 수행할 수 있다.

ChatGPT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거나 성경의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ChatGPT의 답변이 자신의 신앙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개인의 성경적 통찰력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설교자로서 설교 원고 준비 속도를 높이는 데 ChatGPT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동시에 설교자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요청에 빠르게 응답하는 ChatGPT를 통해 목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사라 챈드라 코길라, , , 델 테크놀로지에서 AI 이니셔티브를 담당하는 제품 라인 관리자방갈로르인도

우리는 정보 과부하를 즉시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노출되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인지 능력이 저하되고 정보를 요약하고 이해하고 가치를 추출하는 능력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지금 세대부터는 대규모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ChatGPT와 같은 AI 시스템에 의존하여 정보를 해석하고 요약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보는 문제점은 성경을 포함한 정보를 읽을 때 특정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도록 모델을 훈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특히 신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자료와 정보를 찾을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음성을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콘텐츠는 GPT 시스템을 사용하여 실제처럼 보이도록 제작 및 생성될 수 있다. 원본 콘텐츠와 위조 또는 조작된 콘텐츠의 차이를 우리는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위험 요소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시스템에서는 정보가 웹사이트에 연결되어야 하며, 따라서 정보의 진위 여부를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웹을 통해 정보에 접근하는 것과 달리 정보의 출처를 추적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얻은 모든 정보를 신뢰할 수 있거나,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론을 사용할 경우, 인공지능 시스템은 중립적인 관점을 가지거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성경적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

밧세바 카싸훈, , , 디지털 의료, e러닝 및 통신 회사를 지원한 바 있는 HR 컨설턴트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

세계 교회는 서구 문화가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관련 있는 지와 상관없이 서구 문화를 중시한다. 현재 에티오피아에는 ChatGPT가 도입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서양 문화를 더욱 미화하도록 이끄는 또 다른 도구가 될까 걱정이다. 또한 ChatGPT가 매우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우리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그 해답과 적용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점도 걱정된다.

ChatGPT에 접속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인공지능이 잘 발달한 설교와 가르침을 생성한다는 사실과 씨름해야 한다. 이 정도로 발전하면 우리의 개인 성경 공부를 얼마나 더 모방할 수 있을까? 우리의 개인적인 변화는 우리 스스로 성경을 파고들고 연구할 때 일어난다. 요약과 결론만 제공된다면 어떻게 될까?

공공 부문 업무의 특성상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없었던 IT 전문가이자 AI 사고 리더, 인도

사용자와 상호작용할 때 ChatGPT와 같은 자연어 처리 도구는 단어 임베딩이라는 프로세스를 사용한다. 각 단어 임베딩에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단어를 연결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자체 내부 수학적 규칙이 있다.

문장을 구성할 수 있는 다음 단어 목록의 각 단어에는 확률이 할당되며, 최대 확률 또는 사람의 피드백이 포함된 강화 학습을 통해 도입된 선호도(편향) 결과에 따라 최종 단어가 답변으로 채택된다.

따라서, ChatGPT가 답변하는 모든 질문은 사전 훈련에 사용된 훈련 데이터와 모델을 미세 조정할 때 제공되는 사람의 피드백에 따라 달라진다. ChatGPT가 사용하는 인터넷 학습 데이터에는 친 기독교적인 글 모음 뿐 아니라 비판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인 글 모음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ChatGPT와 같은 챗봇은 의도적으로 가짜 또는 합성 데이터에 중독될 수 있으며, 그럴듯하지만 가짜 답변을 생성하는 등 답변에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 따라서, ChatGPT의 모든 답변은 신학적 타당성과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심각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ChatGPT는 수많은 블로그, 토론, 설교, 주석, 지도, 차트, 안내서, 조직 신학 서적, 일반 기독교 서적 및 성경 공부 교재를 통해 방대한 양과 높은 수준의 성경 가르침을 간결하고 무료로 참조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데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다.

ChatGPT를 사용하고자 하는 인도 기독교인에게는 좋든 나쁘든, 이 방대한 양의 지식이 대부분 영어로만 제공되며, 힌디어나 21개의 다른 공식 언어와 같은 인도 현지 언어로 된 자료는 많지 않다.

마르셀로 카브랄, ABC2, 브라질 과학 기독교인 협회 편집자 겸 교육 관리자, , 상파울루브라질

한편으로 ChatGPT는 기독교인(평신도와 안수자 모두)이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계획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큰 그림, 주석자들의 견해, 접근 가능한 신학 전통 요약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에 ChatGPT는 성경 본문을 깊이 묵상, 적용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소셜 미디어와 함께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대가로 성경 본문이 독자를 “읽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러한 지적, 영적 작업은 지나치게 자동화되어, 생각과 창의성 형성 과정에서 정신과 마음을 위축시킬 수 있다.

멘자민 비마니와루한가, AI 실무자, 우간다

우간다 사람들은 영적이며, 따라서 실제 상황과 관련된 성경의 특정 가르침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이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ChatGPT라면 많은 사람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인터넷이 지식의 원천으로 활용되는 반면, 개발도상국의 대다수 인구는 인터넷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이 제공하는 국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엘리트층만 인터넷을 정보 소스로 활용했다.

인터넷 보급률이 증가하고 [전문화된 커뮤니케이션] 경로를 사용하는 채팅 기반 인터넷 어플리케이션이 증가함에 따라 개발 도상국의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곳에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현지 언어로 작동하는 ChatGPT와 같은 도구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모바일 머니 혁명에서 신흥국의 사용자 수가 선진국을 뛰어넘게 증가한 것과 같은, 서구의 사용자 수를 능가하는 ChatGPT와 유사한 어플리케이션 채택이 일어날 것이다.

ChatGPT

ChatGPT와 같은 자연어 처리 도구는, 성경 해석과 주석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며, 문맥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개인화된 안내를 제공함으로써, 성경 해석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들은 신학 정보에 즉시 접속할 수 있게 하여, 더욱 포괄적인 정보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ChatGPT는 다양한 출처를 처리할 수 있어 성경 이해에 있어 미묘한 뉘앙스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문맥, 역사적 배경, 문화적 참조를 분석하여 정확한 해석을 도울 수 있다. 이 도구는 대화식 상호작용을 통해 사용자가 복잡한 개념을 탐색하여 여러 가르침들을 개인적인 상황에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AI 챗봇은 인간의 해석을 대신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성경은 복잡하기 때문에 전문 지식과 분별력,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AI 챗봇은 유의미한 통찰력을 제공하지만, 포괄적인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훈련된 신학자 및 학자와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비극적인 결혼 생활을 끝내도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파괴적인 관계에서 겪는 고통과 경건한 파트너십에서 자기희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구별할 방법.

Christianity Today July 27, 2023
말로리 렌취의 일러스트 / 소스 이미지: 언스플래시 / 게티

약 10년 전, 제 가족과 제가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내던 한 믿음의 자매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오랜 친구였던 그녀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이별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녀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고향인 브라질 중서부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그녀가 “고통당해서 병에 걸렸다”며 “이제야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저는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학대받는 관계를 견뎌냈던 것입니다.

친구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관계와 엄청나게 힘든 상황을 견뎌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남편이 언젠가는 변할 것이라는 믿음과 이혼하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남편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었고, 목회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계속 금식하고 기도하며 결혼 생활에 전념하라고 조언했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 관행을 지켰습니다.

누군가에게 폭력적인 결혼 생활이지만 복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수년간의 죄악된 권력 남용에서 기원을 비롯된 가학적인 사형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에 매일 스스로 죽으라는 우리의 소명은 개인적인 관계로까지 확장됩니다. 그러나 영적 희생과 배우자의 폭력을 견디는 것을 동일시할 정도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죽음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한 사랑에 뿌리를 둔 반면 다른 하나는 파괴적인 죄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의 부담

폭력적이고 치명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많은 목회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전서 3장 1-2절을 인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여성들에게 믿지 않는 남편에게 믿음의 증인이 될 기회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남편 (기독교인 남편도 마찬가지)에게 복종하여 아내의 행동에 “말없이 이길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말라기 2장 16절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은 이러한 폭력을 정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혼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신 같은 구절에서 주님은 또한 폭력을 미워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학대에 복종하는 결혼은 경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유대가 아니라 죽인 동물을 벽에 고정하는 화살과 비슷합니다. 포식자가 용서와 변화의 약속에 대한 감정적 호소를 통해 사랑을 속인다면,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죄가 썩어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썩어가는 먹잇감에 향수를 뿌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학대적인 관계에서의 고통과 경건한 결혼 생활에서 자기희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후자에서는 두 배우자 모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육체가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삶, 즉 부활이 이 결혼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누구의 책임인가?

이와 같은 성경 말씀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결혼 생활에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이혼은 너무 큰 죄이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비극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학대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여성이 ‘좋은 아내’로 행동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내가 남편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으며 나중에 남편이 마침내 변화할 때 아내의 끈기가 증명되고, 이는 “단순히 이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미덕으로 보일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내가 이 상황을 충만해질 기회로 여겨야 하며 이혼을 신청하는 것은 불순종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가정 폭력의 경우 이혼하려는 여성을 비난하는 것은 죄책감을 옮겨 남편의 행동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여성에게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내에게 남편을 영적으로 바꾸도록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최악의 상태에 있는 한 인간을 최상으로 변화시키는 것, 즉 예수님의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여성이 모든 상처를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성이 폭력적인 가정을 견디면서 결혼 생활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마치 이것이 본질적으로 여성의 역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5장 25~28절에 나오는 바울이 말하는 결혼의 이상과 충돌하는데, 여기서 남편은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리스도와 같은 구속자로 묘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에게 일차적이고 구체적으로 희생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성경적 기준을 많은 사람들이 뒤집어 버렸습니다. 성경의 결혼 언약은 약탈적인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언약이며, 그리스도의 희생에 영감을 받은 사랑의 희생이 그 바탕이 됩니다.

하나님은 폭력적이거나 간음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며, 이러한 회복은 그가 해를 끼친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상처를 짊어지셨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내면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여성도 인간의 영혼, 심지어 남편의 영혼을 사랑하기 위해 강제로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환영할 만한 변화

올해 초, CT는 가정 폭력 피해자에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라고 조언한 한 미국 교회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지만, 많은 기독교인이 이제 이러한 지도자들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과거에는 이러한 행동이 ‘정상’이거나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더라도 실제로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선하게 바꿀 수 있을까?”일 것입니다.

2019년,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것에 대한 논의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보완주의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 대한 자신의 재해석을 CT와 공유했습니다. 거의 40년 동안 사역을 해온 그루뎀은 간음과 유기 외에도 폭력과 학대를 이혼의 원인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 해석학적 전환을 공유했습니다. 수년간 가정 폭력 피해자를 상담해 온 사람으로서 저는 이러한 중대한 변화를 환영합니다.

내일도 살아 있을지 모르는 여성들에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여성들에게 이런 종류의 복종에 대한 성경적 논거가 있다고 조언하는 것은 결혼 언약 자체가 이미 깨진 상황에서 거짓되고 피상적인 결혼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CT의 편집장 러셀 무어는 작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배우자가 가정을 버린다면, 성경은 무고한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가정을 다른 배우자(또는 자녀)에게 위험한 곳으로 만든다면, 그것도 무고한 당사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우 이혼하는 행위는 죄가 아니며, 무엇보다도 이미 한 몸으로 결합하기로 한 언약이 깨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학대당한 배우자는 이혼에 대해 절대 비난받아서는 안 됩니다.”

제가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배우자로부터 학대당하는 여성들이 목회자로부터 위로와 지지를 얻고, 그들이 좌절할 때마다 아버지의 보호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며(창세기 16장),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음의 언약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 생명을 충만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하나님 앞에서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아내가 죽거나 매를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온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12-14).

브루나 산티니는 가정법 관련 일을 일하며 브라질과 미국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률 자문을 해왔으며, 현재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현재 애틀랜타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팀 켈러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교회 개척 사역에 변화를 가져왔다.

베이루트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목회자들은 그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다.

팀 켈러

팀 켈러

Christianity Today July 25, 2023
Illustration by Christianity Today / Source Images: Unsplash / Photo of Keller by Nathan Troester / Courtesy of Redeemer City to City

팀 켈러는 2006 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기고한 글에서 “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모든 도시 안에서 대안 도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 라고 말했다 . “ 우리는 우리 공동체 뿐 아니라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의 ( 진정한 ) 능력을 찾기 위해 힘을 빼야 합니다 .”

5월 19일 금요일, 향년 72세로 별세한 켈러는, 도시 환경에서 복음이 주도하는 사역을 섬길 지도자를 훈련하고 개발하 는 비영리 단체인 리디머 시티 두 시티를 설립했다. 이 분야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그의 경험은 뉴욕의 ‘영적 사막’으로 불리는 맨해튼에 리디머 장로교회를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1989년 교회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이 지역에는 복음주의 교회가 소수에 불과했다. 20년 후, 뉴욕의 복음주의 교회 수는 197개로 늘어났다.

도시 교회 개척에 대한 켈러의 여러 가르침 중에는 인구의 10~20%가 예수를 따르고 도시 문화에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때 발생하는 “도시 전체 티핑 포인트”라는 개념이 있다. 이러한 ‘도시 전체에 걸친 복음 운동’은 유기적이고 활기차며 성령이 주도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팀 켈러는 도시 안에, 도시를 위해, 도시와 함께하는 교회가 되려면 현재에 존재하는 교회, 이웃과 이웃 사회를 섬기는 교회, 도시와 기꺼이 대화하고 도시의 결점, 질병, 필요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야만 그 도시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교회 인근의 필라르 파벨라(‘빈민가’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에 사는 주민들을 매일 섬기는 브라질의 디고 카라굴리안 목사는 말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바르셀로나, 베이루트, 첸나이, 하노이, 멜버른, 케손시티, 헤시피, 상하이 그리고 비엔나에 있는 교회 개척자들을 인터뷰하여 각 도시의 독특한 매력과 도전 과제, 그리고 그 도시에서 복음을 어떻게 토착화 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다음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했다. 교회 개척에 대한 켈러의 접근 방식이 그들의 사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

중동

레바논, 베이루트의 마르완 아불-젤로프

  • 시티 바이블 교회 목사
  • 이 개혁파 침례 교회는 70명의 헌신된 신도가 모이는 교회로서, 영어로 예배 드리고 있다.
  • 60%는 현지인이고 나머지 신도들은 여러 대륙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베이루트는 놀랍도록 풍성한 역사를 지닌 아름답고 국제적인 도시이다. 뉴욕보다 훨씬 작지만 인구 밀도는 두 배나 높다. 우리는 팀 켈러가 중동에 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는 한 번도 중동을 방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 소셜 미디어 게시물을 통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베이루트와 우리 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혁명, 팬데믹, 경제와 정권의 붕괴, 2020년의 대폭발 등으로 인해 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시다.

팀과 통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그 순간에 촉매제 역할을 하는 큰 위기가 종종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는 레바논이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으면서 복음에 대한 개방성을 키울 수 있었다고 지적했고, 내가 이곳에서 교회 개척자로서 직면한 어려움을 인정하며 신실함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남아메리카

브라질 헤시피의 디고 카라굴리안

  • 2014년에 설립된 폰테(더 브릿지) 교회 목사
  • 이 개혁주의 기독교 교회는 두 지역에 있다: 헤시피 안티고(카니발이 열리는 예술적이고 역사적인 지역)와 보아 비아젬(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

헤시피는 브라질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로 약 16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음악, 춤, 문학, 장인정신이 풍부한 도시이다.

켈러의 ‘문화 꾸미기’ 개념은 한 도시의 풍부한 예술, 음악, 표현적 브랜드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접근하기 쉽고 전략적인 방법으로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화 속에서 소금이 되는 것이다: 문화가 썩는 것을 방지하고 죽음이 아닌 생명을 낳는 도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시피의 주요 문화적 힘은 카니발로, 예술적 풍요로움이 많지만, 특정 왜곡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 도시의 문화적 우상은 술 취함, 방탕, 정욕, 미학과 자기 이미지에 대한 매혹이다. 카니발 기간 우리는 예술과 영성에 대한 강의, 지역 예술가와의 대화, 전시회, 음악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이웃 주민들을 교회로 초대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하는 연례행사인 “A Praça” (광장)을 개최한다.

우리 도시와 이 나라 전체의 많은 교회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북미 교회가 하는 것을 따라 하려는 것이다. 이 ‘복제’는 멋진 미학, 전례, 음악을 도입할 수 있지만, 도시에 영향을 미치거나 도시와 소통하지 못하고 도시 내에서 ‘이상한 몸’이 된다. 켈러의 글은 도시에 꼭 있어야 할 교회, 도시의 땅을 밟고 도시와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교회가 되라는 영감을 주었다.

아시아

인도 첸나이의 크리스토퍼 P. 데이비드

  • 인도의 보수적 장로교단 소속 트리니티 장로교회 목사
  • 교회를 개척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주일 평균 출석 인원은 35명이다.

첸나이는 서구의 포스트모던 문화와 인도의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곳이다. 약 1,2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보수적이며, 힌두교가 문화 전반에 퍼져 있어 뉴욕과는 매우 다르다. 하지만 뉴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교육, 직업, 부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인도에서 교회 개척의 가장 큰 어려움은 번영신학의 인기, 세속주의의 영향력 확대, 인도 전통문화에 뿌리내린 힌두교 규범 등이다.

켈러가 강조하는 공동체는 많은 사람이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나 수치심과 명예의 패러다임을 헤쳐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첸나이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들에게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온전한 수용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혁명적이다.

켈러에게서 내가 배운 핵심 교훈은 복음에 뿌리를 둔 섬김의 리더로 구성된 초기 팀을 모집하고 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는 평신도의 참여가 필수적이며, 이 팀의 남성과 여성은 매주 만나 기도하고 계획을 짠다.

높은 수준의 문화적 관련성을 추구하는 켈러의 상황화 브랜드는 여전히 이전의 기독교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서구 세속 세계에서는 유효하다. 그러나 인도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소외되고 거의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철저한 이교도 문화에서는 이러한 상황화가 어렵다. 따라서 ‘제3의 길’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켈러는 분명 우리의 교회 개척 접근 방식에 영향을 주었지만, 우리의 사역 철학의 대부분은 선포 된 말씀과 성례전에 초점을 맞춘 구식 개혁주의 실천이다.

중국 상하이의 존 후(보안상의 이유로 가명을 사용함)

  • 팬데믹 상황에서 개척한 개혁교회의 목회자
  •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교회는 세 곳의 집회 장소를 열었다.
  • 주로 젊은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된 약 260명의 신도가 매주 예배에 참석한다.

상하이는 뉴욕과 인구 밀도가 비슷하지만, 인구는 더 많고 기독교인 비율은 더 낮으며 신앙에 더 적대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내가 상하이에서 사역하는 이유는 그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작년 두 달간의 코로나19 봉쇄 이후, 우리는 교인들에게 상하이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권했다: 점점 더 불친절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도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나? 아니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그분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 남아 이곳에서 살아감으로써 도시의 축복이 되고 있나?

켈러의 신학적 비전(DNA) 개념을 이해한 덕분에 나는 성공적인 교회 개척 모델을 모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켈러는 또한 내가 도시의 평화와 번영(예레미야 29:7)을 추구하도록 격려해 주었고, 사업가로서의 배경과 근본주의 교회에서의 경험 사이에서 직면했던 엄청난 긴장을 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성과 토론을 활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비즈니스 세계에서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근본주의 교회에서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한다.” 팀 켈러의 책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는 비기독교인이나 구도자 친구들에게 어떻게 이성을 동원하고 토론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필리핀 케손 시티의 조셉 보니파시오

  • 교단에 속하지 않은 ‘No Other Name’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
  • 캠퍼스의 미래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케손 시티는 필리핀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다. 필리핀의 문화, 비즈니스, 교육의 중심지이다. 많은 인파, 교통 체증, 공해, 죄의 영향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을 들어야 하는 1,2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교차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사고방식과 기존 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는 세대의 부상이 충돌한다.

팀 켈러의 사역과 저술은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 ‘복음의 통로’로서, 서로를 연결할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는 젊은 사역자들이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으면서도 신앙적이고 매력적이며 그리스도를 닮은 방식으로 무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켈러가 제3의 길로 복음을 설명한 것은 죄에 대한 무절제한 굴복이 잘못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강압을 통해 죄를 억제하려는 종교적 시도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은 또한 신앙과 교회가 무슨 말인지 안다고 생각하여 신앙과 교회를 멀리하는 많은 방황하는 어린 아들과 큰아들을 섬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바라시는 아버지와 그 길을 만드신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새롭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무엇보다 교회에서 활발하게 봉사하고 있고, 많은 성과를 자랑하며, 그렇지만 쉽게 순응하여 지친, 그래서 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큰아들의 상실감’을 인식하고 온유하게 그들을 섬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베트남 하노이의 제이콥 블룸버그

  • 1995년에 설립된 초교파 교회인 하노이 인터네셔널 펠로우십의 담임 목사
  • 필리핀, 한국, 나이지리아 등의 국가에서 온 현지인과 외국인으로 구성된 600명의 신자가 두 곳의 예배에 참석한다.

아시아의 ‘떠오르는 용’으로 불리는 베트남의 1,000년 수도 하노이는 고풍스러운 역사적 유적에서 불과 30년 만에 번화한 거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한 도시에 복음이 전파되려면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켈러의 말이 맞다. 이곳의 개신교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인구의 0.1%를 차지한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1997년 이후 교회는 성장했지만, 현재 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도시의 인구 증가율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의 도시 상황에서 효과적인 교회 개척을 위해서는 켈러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교회는 2012년에 ‘러브 하노이’ 운동을 시작했고, 지역 교회 신도 3,600명 이상이 참여한 지역사회 봉사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2017년에는 베트남 북부 전역에서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축제를 공동 주최했다. 4,500명 이상이 복음 메시지에 응답했다.

그러나 도시 사역에 대한 서구의 접근 방식은 베트남의 도시 상황에 맞게 토착화 될 필요가 있다. 나의 책 Love [Your City]: 5 Steps to Citywide Movements에서 나는 태도의 중요성에 관해 강조했다. 경찰과 정부에 대해 개방적이고 따뜻하며 환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들과 맺은 긍정적인 관계 덕분에 하노이의 주요 활동과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세아니아

호주 멜버른의 스티븐 탄

  • 빅토리아 침례교 연합에 속한 리제너레이션 교회 목사
  • 호주 최대 대학인 모나시 대학교 옆에 자리 잡고 있다.
  • 각각 약 100명으로 구성된 두 교회는 문화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고학력 청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멜버른은 호주의 커피 및 문화 수도로, 2031년에는 시드니를 제치고 호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멜버른에는 주로 아시아에서 온 수많은 유학생과 이주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호주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부터 동성 결혼, 난민, 인종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멜버른의 관점은 호주의 다른 지역보다 좌파적이다. 교회를 개척하기 가장 쉬운 곳은 아니다.

호주인들이 왜 말레이시아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 의문이 들었다. 켈러의 Center Church 와 씨티 투 씨티의 ‘인큐베이터’ 교육을 통해 세속적인 호주인과 보수적인 아시아 이민자 모두에게 목회자, 설교자, 교회 개척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우상 숭배에 대한 켈러의 관점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정서적, 문화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우상은 삶의 중심이자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잃으면 삶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내가 같은 설교에서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우상 숭배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다. 유학생들은 학업적 성취와 부모님의 인정을 우상화하지만, 이에 따라 자기 스스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하시는 것은 그들의 성공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성공하셨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말한다. 세속적인 호주인들은 꿈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우상화하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없고 상상만큼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노예가 된다. 복음에서 진정한 자유는 올바른 규범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유럽

오스트리아 빈의 코리스티안 호프레이터

  • 주일 평균 성인 70~100명, 어린이 12명 이상이 출석하는 독일어권 성공회 교회 CityKirche(도시교회)의 목회자
  • 신도들은 대부분 20세에서 55세 사이의 전문직 종사자 또는 학생이다.
  •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실존적, 지적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중점을 둔다.

빈은 가장 찬란했던 옛 유럽의 도시로, 전 세계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설문조사에서 자주 1위를 차지한다. 약 200만 명(오스트리아 인구의 4분의 1)의 인구, 세계적인 수준의 예술, 화려한 건축물, 풍부한 녹지 공간이 있다.

뉴욕에 비해 빈은 훨씬 더 작고 다문화가 덜하다. 이곳의 삶은 더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주택은 더 저렴하며 주 정부는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도시는 대체로 포스트 기독교적이며, 빈에서 포스트 기독교란 대부분 포스트 가톨릭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며, 점점 더 개인의 발전과 문화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종교로 여겨지고 있다.

켈러의 훌륭하고 문화적으로 지성적이며 성경적으로 정통적인 사역의 모범이 없었다면 나는 시티키르케를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화에 대한 그의 의도적이고 균형 잡힌 성경적 접근 방식은 매우 유용하고 유익한 틀이었다. 주변이나 교회 밖 사람들의 질문과 반대에 귀를 기울이고, 문화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존중을 가지고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의 태도는 고무적이다.

매월 첫째 주 주일에는 성례전, 기도, 성경 낭독을 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과 같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주제를 탐구하는 ‘큰 질문 일요일’을 개최한다. 사이보그와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종교와 폭력의 관계는 무엇일까?

예배의 절반은 청중 질의응답이며 중간중간 음악 공연이 진행된다. 이러한 대화 형식은 교회 주변이나 교회 밖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청중은 원하는 질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정직하고 정중하게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비에르 멤바

  • 2011년에 설립된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교회인 시우타트 노바 교회 공동 설립자
  • 설교는 카탈루냐어로 진행된다.
  • 이 교회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60명의 교인이 있다.

바르셀로나는 맨해튼과 인구 밀도가 비슷하며 풍부한 역사, 멋진 건축물, 훌륭한 요리, 활기찬 밤 문화, 수준 높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도시이다. 시우타트 노바는 바르셀로나의 다양성, 국제성, 현재성, 문화 및 역사적 유산을 반영하는 교회이다.

2007년 리디머 교회 개척 펠로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팀 켈러와 함께 훈련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문화적, 도시적 맥락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를 통해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존재로서의 교회에 대한 나의 비전이 바뀌었고, 시우타트 노바의 창립에 영감을 주었다. 교회가 교인들을 섬길 뿐 아니라 사회 변혁과 지역 사회 복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켈러는 특정한 방법을 강요하기보다는 신자의 삶과 교회의 구조, 그리고 교회가 특정 상황에서 추진할 수 있는 모든 사역이나 운동에서 복음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앵글로-색슨 국가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더 빠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유럽, 특히 남유럽의 상황에서는 교회 개척 과정을 지속해서 검토해야 한다. 유럽에 기반을 둔 많은 교회 개척자는 선교, 비전, 공동체, 선포와 같은 전략적 측면에만 집중하기 위해 행정이나 물류 측면의 업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Jayson Casper and Surinder Kaur의 추가 기사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인터뷰: 팀 켈러가 말하는 “결혼의 의미”

팀 켈러 목사가 성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와 교회가 효과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수 있는 방법

팀 켈러

팀 켈러

Christianity Today July 20, 2023
리디머 시티투시티 제공

이 책이 다른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결혼에 관한 주제에 기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

The Meaning of Marriage: Facing the Complexities of Commitment with the Wisdom of God

The Meaning of Marriage: Facing the Complexities of Commitment with the Wisdom of God

Viking Drill & Tool

288 pages

$15.69

이 책은 단순한 방법론 매뉴얼이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 결혼 서적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라는 식입니다. 반면에 이 책은 단순히 신학적이거나 “결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이렇습니다”라고 제시하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결혼에 관한 베스트셀러 기독교 서적은 신학적이거나 논쟁적이거나 혹은 매우 실용적인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이 모든 것을 결합한 책입니다. 최근에 제가 본 결혼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목회자가 쓴 것이 아니라 상담가나 신학자들이 쓴 책들이었습니다. 이 책은 원래 설교집 시리즈였습니다. 설교를 할 때, 설교는 보통 신학적인 것에서 좀 더 논쟁적인 것, 그리고 실제적인 것으로 넘어갑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명료한 명제뿐만 아니라 훌륭한 이야기와 감동적인 시를 통해서도” 전달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 교회는 명제를 제시할 뿐, 결혼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올바른 규칙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인 것은 명제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격론적인 것은 논쟁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실용적인 것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좋은 결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요점을 제공합니다. <미스터리와 매너> 매체에서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단편 소설의 요점을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었겠죠.”

이야기는 의역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네, 맞아요. 이야기는 어떤 명제나 명제의 집합으로 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내러티브에는 분명 어느 정도 명제적인 의미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명제에 넣을 수 있겠지만 그로 인한 영향력은 그보다 더 큽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제 책은 기혼자뿐만 아니라 미혼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혼이나 기혼자 모두에게 매우 실용적인 것은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놀라운 비전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신학적이고, 매우 논쟁적이거나 매우 실용적인 책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역설 중 하나는 결혼이라는 헌신이 실제로 자유, , , 즉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온전히 알려질 수 있는 자유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미래에 함께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헌신이 대체로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 문화는 두 가지를 서로 대립시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어떤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야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자유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어떤 의무로부터의 자유,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군가로부터의 자유 등 부정적인 의미의 자유입니다. 성경적 관점은 자유에 대한 더 풍부한 관점입니다. 그것은 기쁨의 자유이자 내가 지음 받은대로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만약 10년 동안 하루 8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매진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자유가 없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자유는 모든 선택권이나 선택의 힘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유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것들을 모순으로 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내인 캐시는 성 역할에 대한 보완주의적 관점을 고수하지만, , , 결혼 생활 내에서 그리고 문화세대사회에 따라 노동 분업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 문화적 성 역할이 성경적 성 역할과 반드시 같지는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러한 견해가 평등주의 대 보완주의 논쟁을 현재의 교착 상태를 넘어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길 바란다고만 말하죠. 저는 지금 우리 복음주의 세계에서 교착 상태에 있는 몇 가지에 대해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남성에게 머리가 될 직분과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에서 환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에 대한 세부 사항은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힌트는 있지만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원칙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문화에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부 사항을 나열하면 원칙의 적용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보완주의자들은 원칙을 인정하지만, 항상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구체적인 목록을 추가합니다. 평등주의자들은 원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가 “남편이 머리다”라는 원칙을 지지하는 보완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다음 부부가 각자의 결혼 생활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생각해 내기를 기대합니다.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결혼을 각 배우자가 “희생적인 봉사와 영적 우정을 통해 영광스러운 미래의 자신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섹스를 그 관계의 표현 중 하나로 설명합니다. . 이러한 목적은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그런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결혼은 어떤 목적이 있을까요?

결혼에는 수직적 차원이 없습니다. 크리스천 결혼은 복음을 더 많이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결혼에는 자연스러운 이익도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첫째, 결혼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합니다. 또한 남녀가 서로를 보완하고 모난 부분을 다듬기 위해 함께 노력하게 됩니다. 결혼은 성별을 초월한 관계를 통해 개인적 성장을 제공합니다.

동성 결혼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교회가 성경적 결혼 모델을 더 효과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했다면 이 문제를 더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을까요?

지금은 동성 결혼이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50년 후에도 동성 결혼이 여전히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동성 결혼 지지자들은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종 간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요 종교의 경전에서는 인종과 동성애를 동일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경제적 이유로 가정과 가족에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직장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가족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나요?

지금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입니다. 그러나 결국 돈 버는 것보다 가족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죽기 전에 “사무실에서 일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Books
Review

팀 켈러: 희망을 잃지 않고 고통을 견디는 법

삶이 가져다주는 고통에 대한 최고의 해답이 기독교에 있는 이유.

Christianity Today July 13, 2023
일러스트: 키스 네글리

고통은 안정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조차도 의문을 품게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 그분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위해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고통받는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절대 확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인은 고통을 겪은 후 신앙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직접 심각한 상실을 경험한 후 이에 관한 긴 글을 썼던 필자는 팀 켈러가 이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습니다.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Viking Drill & Tool

368 pages

$45.00

그의 저서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변증법적, 신학적, 목회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뉴욕 리디머 장로교회의 창립 목사인 켈러는 변증가로서 다른 종교와 철학이 악과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답하는지 설명합니다. 스토아주의, 불교 등 다양한 종교와 철학을 살펴본 후, 그는 설득력 있고 도움이 되는 해답을 기독교가 제시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에 대해 어설프고 피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적 대답이어야 한다고도 덧붙입니다.

켈러는 고작 지난 200년에 불과한 기간에 서양인들이 신의 존재(또는 선함)에 대한 근거로 악과 고통을 말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특히 인간의 이성에 기대어 신이 존재한다면 오로지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고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고통에 대한 관점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왜 많은 사람이 고통을 어떻게든 피하고, 고통이 삶을 덮칠 때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고통이 지속되면 완전한 절망에 굴복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결국 세속적인 관점은 우리를 공허하고 외롭게 만들며, 모든 위로와 자신감을 잃은 채 답을 찾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에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은 그 어떤 대안보다 더 일관되고 완전하며 인도적입니다. 인간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고통받는 존재로 봅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켈러는 용광로의 은유로 기독교적 관점을 요약합니다. 고통의 불길은 우리의 죄악된 성향을 태워버리는데, 물론 이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월자이면서 현존하시는 하나님, 승리자이면서 희생자, 주님이면서 종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이 정화의 과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켈러는 강단을 누비며 신학자이자 설교자로서 성경적 관점에서 고통에 대해 철저하고 균형 잡힌 섬세한 관점을 제공하였습니다. 때때로 고통은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나 개인의 죄(다윗의 간음)에 대한 형벌을 나타냅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그 원인이 무작위적이고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욥의 고뇌).

켈러는 모든 상황에 대해 하나의 답을 암시하는 포괄적인 진술에 대해 신중을 기합니다. 켈러는 성경을 통해 고통에는 우리 자신의 잘못, 배신과 상실의 결과, 완전히 신비로운 고통 등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이 고통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통을 겪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고통을 물리치고 악을 스스로 돌이켜 멸망을 앞당겼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켈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인도하는 현명한 조언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강단을 떠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행동 방침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충격과 놀라움 없이, 슬픔과 연약함을 부정하지 않고, 분노나 마비되는 두려움 없이, 묵인하거나 항복하지 않고 절망 없이 고통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길이 어둠에 가려져 있어도 고통 속을 걸어갈 수 있고 또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시편의 말씀 등을 통해 애통함을 겪는 인간의 감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제시하므로 우리는 마음껏 슬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애통하고 부르짖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시 22:1; 마 27:46).

우리의 초라한 삶이 혼란스럽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 성경 말씀을 통해 인내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뇌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욥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친구들과 달리 하나님과 계속 씨름했습니다. 켈러는 중요한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전능하고 친근하며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분이며, 욥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이처럼 생각하고,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내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속 영원한 진리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성경적 진리를 통해 우리의 고통에 대해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감사함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며, 영광을 깨닫고 고통을 자신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 내어주신 분에게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완벽하게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사랑의 길을 선택하셨고, 우리도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로 인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절한 때에 다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며 지상에 그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너무나 놀라워서 우리가 견뎌온 극심한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마지막 구속의 행위에 비추어 아름답고 거룩하게 보일 것입니다.

인간적 요소

켈러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아버지로 남았습니다. 목회자, 교회 개척자,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그의 재능은 그의 저서에서 모두 훌륭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폭넓은 독서와 성경 및 기독교 신학에 대한 인상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방어적이거나 고집스럽지 않고 세속 문화에 과감하게 참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드러난 문맥을 파악한 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해서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일관되게 목회적 관점을 제공합니다. 저서의 마지막 장에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쓴 개인적인 이야기를 인용하여 책의 변증법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에 인간적인 요소를 더합니다.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누가 이 책을 읽을까요? 팀 켈러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입니다. 이 책은 독자들이 고통에 대해 비판적이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찰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상실에 빠진 사람에게 건네야 하는지 묻는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통에 실질적인 책을 읽기 전에 단순히 고통 속에서 함께 할 친구가 필요합니다. (켈러의 책이 서사적이거나 시적이기보다는 엄밀히 말해 신학적인 책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기 전에 1년 정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에게 권유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 깊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희망으로 견디기 돕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해 계신 분의 말씀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 같습니다.

Gerald L. Sittser는 Whitworth 대학교 신학 교수이자 <A Grace Disguised: How the Soul Grows through Loss> 및 <A Grace Revealed: How God Redeemed ths Story of Your Life>의 저자입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새로운 종류의 도시 크리스천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문화도 발전합니다.

Christianity Today July 10, 2023
Vlada Karpovich / Pexels

팀 켈러의 절제되고 소박한 화법은 듣는 이들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 팀 켈러처럼 내뱉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한 설교자는 드뭅니다 . 16 년 동안 맨해튼의 리디머 장로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급진적인 놀라움과 은혜로운 진리를 놀랍도록 단순한 문구로 풀어냈습니다 . 이러한 대표적인 문구 중 하나는 2006 년 크리스천 비전 프로젝트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익에 반하는 반체제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는가? 도시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켈러의 비전을 통해 매주 4,000명의 예배자가 네 곳의 리디머 예배당에 모였고, 교회의 사역인 Hope for New York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자선 봉사로 섬겼으며, 침례교와 오순절교계 뿐만 아니라 장로교, 이민자 지역과 맨해튼을 포용하는 교회 개척 노력에 동력을 불어넣었습니다. 50년 후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도시에 대한 사랑, 자비와 정의에 대한 헌신, 이웃 사랑을 행하는 자들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팀 켈러는 새로운 도시 기독교인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2006년 겨울, 두 편의 영화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기독교와 문화 간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많은 비기독교인의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언론은 디즈니와 같은 회사가 이처럼 심오한 복음주의적 호소력(물론 내용에 대한 우려도 있었음)을 지닌 영화를 제작한다는 사실을 우파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디즈니는 왜 동성애자 친화적인 TV 리얼리티 시리즈 웰컴 투 더 네이버 후 제작을 중단했을까요? 전문가들은 기독교인이 문화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했습니다.

동시에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복음주의 선교사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엔드오브 스피어End of the Spear)는 실제 동성애자가 영화의 주연인 성 네이트 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분노했습니다. 보수적인 문화 평론가들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월드 매거진의 유진 베이트와 같은 평론가들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스크린 밖 배우들의 도덕성이 아닌 예술적 가치로 영화를 판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보이콧을 촉구했습니다. 수백 개의 웹사이트에서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주요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무엇이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만드는가? 모든 배우가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종류의 죄인이 허용되고 어떤 죄인은 허용되지 않는가? 기독교인이 주류 문화 제작에 참여하려고 할 때 영적 타협이 불가피한가?

기독교인과 문화의 관계는 현재 교계에서 위기 지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점점 더 탈 기독교화되어 가는 사회 질서와 어떻게 상호 작용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통을 다시 강조하고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말하며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려는 직접적인 시도를 거부합니다. 다른 이들은 문화에 적대적이지만 적극적인 행동이나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희망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움직여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은 새로운 문화에 매료되어 교회가 문화와 적대적인 관계를 재정립하기를 원합니다. “조금씩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은 교리와 경험을 강조하는 반면, 재정립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화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복음주의 교리의 특징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변화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문화에 다가가기 위해 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위 전략 중 어느 것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 전통과 정치에 참여하는 기독교인, 효과적인 전도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항상 주변 문화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한 접근 방식은 항상 해로움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전문성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마법의 총알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법의 총알이 존재할지 의문이지만, 모든 것을 한데 엮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신 새롭고 이전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합니다.

도시 속의 도시

저의 첫 번째 전략은 간단합니다: 더 많은 기독교인이 장기적으로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서기 300년 무렵 로마 제국의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고, 이교도들은 시골에 거주했다고 기록합니다. (실제로 이교도라는 단어는 원래 시골 출신이라는 뜻으로, 비기독교인의 동의어로 사용된 것은 이 시대부터입니다.) 서기 1세기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기독교인은 도시에 모여 살았지만 시골의 대다수 인구는 이교도였습니다. 두 시대의 교훈은 도시의 인구가 기독교인일 때 인구의 대다수가 이교도일지라도 사회는 기독교적 궤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도시가 발전하면 문화도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문화 트렌드는 도시에서 생성되어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도시의 문화 중심지에 살면서 예술, 비즈니스, 학계, 출판, 서비스업, 미디어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문화에 불균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17년 동안 살면서 사역하면서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미디어, 출판, 예술, 비즈니스에서 일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목격하며 계속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들은 단순히 부유하고 저명한 “상위 엘리트”가 아니라 “풀뿌리 엘리트”입니다. MTV를 만드는 것은 최고 경영진이 아니라 대학을 갓 졸업한 수많은 젊고 트렌디한 크리에이터들이며, 그들이 조직의 모든 직급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문화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기독교인이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뜻일가요? 물론 아닙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독교인과 교회가 필요합니다. 저는 도시 목회자(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였던 고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의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특히 도시에 살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 두 개의 도시: 두 개의 사랑에서 보이스 목사는 복음주의자들이 적어도 일반적 인구와 비슷한 비율로 도시에 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도시에서 기독교인들은 역동적인 반체제적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단순히 도시에서 개인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부류의 공동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4-16).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모든 도시 안에서 우리만의 대안 도시를 이루고, 문화 속에서 대안을 제시하며 성, 돈, 권력이 어떻게 비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보여 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섹스와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세속적인 사회의 섹스 우상화와 전통 사회의 섹스에 대한 두려움을 기피합니다. 이는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순결이 당연합니다. 이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결혼 밖에서는 금욕을, 결혼 안에서는 정절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복음의 모양에 갖추도록 가르칩니다. 돈과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 정의와 가난한 이들, 이민자, 경제적 또는 신체적 약자를 섬기기 위해 시간과 돈, 관계와 생활 공간을 내어 관대하게 헌신할 것을 권합니다. 권력과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로부터 소외된 인종과 계층 간에 권력을 분산시키고 관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교회 전체와 지도층에서 점점 더 다민족화되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더 넓은 문화의 가치에 반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도시 전체의 선을 위해 근본적으로 헌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공동체 전체의 공익,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물질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개인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분쟁, 이기심이 아닌 정의와 평화,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도시와 이웃의 평화, 안전과 정의, 번영을 위해 일하며,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말과 행동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단순히 그 도시에 사는 것뿐만 아니라 그 도시를 사랑하고 도시의 샬롬, 즉 경제적, 사회적, 영적 번영을 위해 일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시 시민은 지상의 도시에서도 가장 훌륭하게 살아갈 능력이 있는 시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세상의 삶의 패턴에 순응하지 않는 문화적 참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권력을 얻기 위해 도심으로 간다면, 더 깊숙이 연관되고 오래 지속될수록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문화적 영향력과 변화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모든 민족을 섬기기 위해 도시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힘을 찾기 위해 힘을 잃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신념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희생적인 봉사를 한다면 영향력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전략(굳이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문화권에서 기독교인의 행동은 때로는 불쾌감을 주고 공격받지만, 어떤 행동은 비기독교인에게 감동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비난할지라도 …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벧전 2:12, 마 5:16 참조). 중동에서는 기독교 성 윤리가 합리적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뺨을 내어주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뉴욕에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환영받지만, 기독교 성 윤리는 엄청나게 퇴행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기독교 문화는 세상에서 기존의 문화에 반하기도 하지만, 반면 비기독교 문화에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드러나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공통적 은혜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를 무조건적 비난하거나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오해받고 때로는 공격을 받을 것을 예상하면서 희생적으로 공익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적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직업의 세계관

공익을 위한 기독교 문화를 이루기 위해 강조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일을 일치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화는 우리의 관행과 태도, 가치, 신념의 집합이며, 사람들은 삶이 어디에서 왔는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 동안 시간을 할애할 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 “중요한 질문”을 문화를 통해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도, 일을 할 수도 없으며, 모든 해답이 모여 문화를 형성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직업 분야에서는 기독교와는 매우 다른 해답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일터에 가면 신앙을 봉인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일하거나 혹은 동료들에게 성경 구절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세상적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 비즈니스, 정부, 저널리즘, 엔터테인먼트, 학문에 대한 복음의 함의를 생각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지 잘 모릅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적이고 창의적이며 훌륭한 비즈니스 환경을 개발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 기쁨과 희망, 진리를 구현하는 것도 이 사역의 일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주요 문화 중심지에 많이 거주하면서 탁월하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일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금 우리가 사는 문화와는 다른 부류의 문화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영적인 힘을 추구했고, 그리스 사회는 지혜를 중시했습니다(고전 1:22-25). 각 문화에서 바울의 설교를 통해 우상이라고 드러난 희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게는 참된 ‘하나님의 지혜’이고 유대인에게는 참된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화는 행복한 끝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시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소망을 성취하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기독교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번역글 업데이트 알림을 받으려면, 페이북에서 팔로우 해주세요.

Apple PodcastsDown ArrowDown ArrowDown Arrowarrow_left_altLeft ArrowLeft ArrowRight ArrowRight ArrowRight Arrowarrow_up_altUp ArrowUp ArrowAvailable at Amazoncaret-downCloseCloseEmailEmailExpandExpandExternalExternalFacebookfacebook-squareGiftGiftGooglegoogleGoogle KeephamburgerInstagraminstagram-squareLinkLinklinkedin-squareListenListenListenChristianity TodayCT Creative Studio Logologo_orgMegaphoneMenuMenupausePinterestPlayPlayPocketPodcastRSSRSSSaveSaveSaveSearchSearchsearchSpotifyStitcherTelegramTable of ContentsTable of Contentstwitter-squareWhatsAppXYouTub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