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 아래에서 내가 배운 것

성매매 여성 선교를 통해 배운 새 진리

Christianity Today July 14, 2022
Cover Photograph by Gene Brutty
Ideas

백인 교회들이여, 이제 생명 존중의 관점으로 총기 이슈를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총기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의 다수 기독교인은 불안을 떨쳐버리고 흑인 목회자들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Christianity Today July 13, 2022
Yuki Iwamura / Getty

시카고는 총기 개혁에 대한 이 호소문을 쓰는 장소로는 어색한 장소일 수 있습니다. 결국, 텍사스 그레그 아보트 주지사는 최근에 시카고에서의 총기 사건으로 죽은 흑인 아이들 이슈에 대해, 정교히 꾸며진 dog whistle(특정 집단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서 자신들의 극단적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행위)과 공화당 정치인들의 핑계, 그리고 그들에 대한 많은 기독교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도발적 발언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총기 규제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시카고의 젊은 목사 중 한 명으로서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교회당 한 곳에 앉아, 규모가 크고 정치적 영향력이 대단한 미국 백인 복음주의 교단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 교단들이 남침례교총회처럼, 그들의 지지기반에 의해 압박을 받는다면 행동할 수 있는 주의 상원의원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중요한 이슈들이 있을 때, 그들의 영향력은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상원의원들과 하원의원들은 아마 시카고 한 흑인 목사의 말은 듣지 않을 수 있지만, 조지아주, 플로리다주, 앨라배마주 그리고 테네시주의 백인 목사 집단의 말은 들을 것입니다.

저는 백인 기독교 다수에게 그들의 불안을 떨쳐버리고 시급한 정의의 이슈에 대해 나서라고 압박을 가한 첫 번째 흑인 목사는 아닙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3년 또 다른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 버밍엄 감옥에서 비슷한 호소를 했습니다. 쟁점은 다르지만 권고의 내용은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린이에게 벌어지는 총기 폭력에 대해, 이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선한 의지를 가진 백인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약 30년 전, 남침례교총회(SBC)는 젊은 흑인 성직자들을 대대적으로 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신학교는 교단의 아픈 인종차별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를 원하는 젊은 흑인 사역자들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사역비와 목회 장소, 그리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선교 네트워크를 제공했습니다. SBC 수련회에서는 의도적으로 유색인 사역자를 스피커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자는 초청과 관련한 간절한 부탁도 있었습니다. 흑인 목사들과 그들의 교회는 소위 도덕적 다수라는 정치적 의제를 채택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의제는 신학적 충성심에 대한 리트머스 테스트로 제시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다면, 낙태, 입양, 음란물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이 미국 사회를 형성하는 핵심 도덕적 문제라는 것을 단언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이슈들만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관심사를 가진 초청자들이 우리 공동체를 "정치적"인, 혹은 "분열적"인 집단으로 간주하며 괴롭히도록 분류했습니다.

예를 들어, 총기 폭력에 대한 주제가 그동안은 항상 정치적 이슈의 범주로 분류되었지만, 지금은 이 나라에서 어린이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종 간 협력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던 시대에, 흑인 목회자와 교회는 복수의 연합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들은 흑인 교단의 원조격인 내셔널 침례회(National Baptist Convention)나 프로그레시브 내셔널 침례회(Progressive National Baptist Convention)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종 간의 화해의 신호로 두 세계를 합병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수치심을 참으며 형제애라는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고, 제 시각으로 볼 때, 비록 정치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그때보다 더 사회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흑인교회는 교제 가운데 하나 되자는 것과 공공의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연대 대응하자는 여러분들의 요청을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태아 이슈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시민적 관심 사안으로 삼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역자들을 향한 신뢰성에 기대어 정치인들이 더 고결한 윤리를 촉구하도록 허락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더 많은 사람들은 계획하지 않은 임신 문제에 직면한 여성들을 돌보는 조직을 돕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옳다고 믿고, 여러분들의 주장에 동참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도 여러분들에게 같은 요청을 합니다.

총기 구입에 대한 보편적인 신원 조사 법제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우리 흑인 시구 지역구 상원의원이 아닙니다. 다음에 또 벌어질 수 있는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막을 수 있는 입법을 가로막고 있는 것 역시 우리 흑인들의 교회에 출석하고 학교 행사에서 연설하는 흑인 의회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백인 교회들입니다. 여러분의 지역구를 섬기며, 여러분의 교회 장의자에 앉아 여러분의 설교를 듣는 상원의원들, 그들이야말로 생명보호와 학교 내 총기 반입 금지 안건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생명 보호 법안을 위한 투쟁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제 우리도 같은 것을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의회 지도자들에게 악한 사람의 손에 너무 쉽게 주어지는 총기에 의해 죽는 학생들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촉구함으로써 생명 존중자가 되어 주십시오. 여러분의 상원의원들에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총기 등록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촉구해 주십시오. 주일에 설교하는 그 책 성경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더 많은 학교 운영비, 양질의 의료 돌봄 접근권, 그리고 식량 확보를 위해 의회에 로비를 하기 위해 여러분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우리는 바람둥이를 대통령으로 만든 극우 인종차별주의를 여러분이 비난하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 흑인들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선언하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이제 흑인 아이들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분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도시에 난무하는 폭력을 이해할 때까지 여러분은 시카고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또 다른 조롱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수사학적 의미에서의 희생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뉴스 채널에서 흑인들 특유의 위험성이 있다고 계속 방영하며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용되는 순회극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인종차별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총기 폭력으로 희생된 흑인들의 목숨에 대해 실제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신경을 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흑인 소년과 소녀들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비극적 죽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촉매제로 봤어야 했습니다.

시카고는 국경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일리노이주는 총기 규제를 하는 주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시카고의 범죄와 연관된 총기의 거의 60%가 공화당이 장악한 주들을 통해 반입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느슨한 특권이 우리에게는 직접적이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시카고에서의 살인율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 동안의 박탈과 열악한 학교들에 대해서 역시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가족 전체를 가두어 버리는 레드라이닝(redlining; 은행, 보험 회사가 특정한 지역에 붉은 선을 그어 경계를 지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대출, 보험 등의 금융 서비스를 거부하는 행위)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백인 남성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마리화나 가게들(세대를 이어 흑인 남성들을 범죄자로 몰아넣은 것과 같은 바로 그 마리화나를 파는 곳)이 처벌과 허가 없이 운영되고 있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시카고가 희생양입니까? 왜냐하면 시카고는 흑인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것이 이 도시에 기반을 둔 목회자와 종교지도자들의 노고입니다. 시카고에 대해 말하려면, 주택, 휴식시설, 노숙자 재활 사역, 그리고 상담 서비스를 재건하여 마을 전체를 바꾼 가필드 파크의 획기적인 도시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들, 비즈니스 리더들, 커뮤니티 조직자들 그리고 폭력 행위 감소를 위한 애쓰는 교육자들과 건물 사업주들로 구성된 다방면의 새로운 컨소시엄인 투게더 시카고의 작업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시카고에 대해 말하려 한다면, 제임스 믹스와 20년 동안 이웃에게 조용히 투표를 권장하여 폭력을 줄인 세일럼침례교회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시카고는 이곳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비유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왜 바로 그 버밍엄 교도소에 자필 서류를 제출했는지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을 석방시켜야 할 법들이 여러분을 감금할 때, 목사가 자신을 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한 사람은 다른 목사입니다. 인간의 번영을 가로막는 사람들 중 일부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정치적 관점으로 해석해 설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에 열거된 목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에서 직접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들, 즉 정치인들을 움직여 다른 총기 폭력으로부터 우리 학교들을 구해줄 백인 복음주의 형제자매들이 필요합니다.

Charlie Dates는 시카고 Progressive Baptist Church 담임 목사다. 그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역사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편지는 다음 목회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다. 시카고 Salem Baptist Church 제임스 믹스, 시카고 Apostolic Faith Church 호레이스 스미스, Trinity United Church of Christ 오티스 모스, Compassion Baptist Church 왓슨 존스, 시카고 New Community Covenant Church 데이비드 스완슨, 휴스턴 The Church Without Walls 랄프 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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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월드비전의 잊혀진 창시자

한 한국인 목사가 세계에서 가장 큰 자선 단체 중 하나의 출범을 도왔다. 그는 왜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Christianity Today July 11, 2022
한경직 목사 재단 사진제공

몇 년 전, 필자는 대한민국의 서울 여의도에 있는 9층짜리 월드비전 건물 꼭대기 층에 앉아있었다. 그 건물은 국회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한국의 주요 정치, 금융 단지의 마천루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그 땅의 가치는 최상이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비영리 단체에 걸맞게 그 건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1970년대의 튼튼한 고 가구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몇몇 한국 경영진을 인터뷰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도주의 단체 중 하나인 월드비전의 기원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었다. 나는 1950년 서울에서 공산주의의 잔학행위를 경험한 후 풀려난 밥 피어스라는 이름의 역동적인 복음주의자의 공인된 이야기를 확인하기를 기대했었다. 미군과 함께 일하면서, 피어스는 한국을 전시의 황폐함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지위로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준 학교, 고아원 그리고 교회를 시작했다. 냉전의 불안한 소란 가운데 출범한 이타적인 미국 복음주의 단체인 월드비전의 창립 신화는 반세기가 훨씬 넘게 굳건하게 서 있었다.

월드비전 코리아에서 갓 퇴임한 박종삼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나를 이 진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유명한 은발의 대표는 밥 피어스에 대한 나의 집요한 질문을 받아넘겼지만, 그는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한 한국인 목사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한경직 목사는 6·25전쟁 당시 박씨가 서울 거리에서 겨우 멍석을 두르고 잠을 자던 노숙자 난민 아이였을 때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

나는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나의 질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조바심을 내면서 듣고 있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본론으로 돌리려 하자 화를 냈다. 한 목사 또한 월드비전의 창시자라고 그는 설명했다. “월드비전 코리아 말씀이신가요? 나는 분명히 하려고 했다.” 그는 대답했다. “아뇨, 전부요.”

다시 생각해 보니, 박 대표의 주장은 내가 이전에 간과했던 증거와 맞아떨어졌다. 나는 피어스와 한 목사가 함께 나오는 사진을 여러 장 본 적이 있었는데, 보통 한 목사를 피어스의 ‘통역가’라고 설명하는 자막이 붙어 있었다. 실제, 1950년대 초반의 많은 자료들에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있었으며, 특히 서울에서의 자료가 그랬다. 한 목사가 피어스의 설교를 그의 교인들을 위해 한국말로 통역했을지 모르지만, 한 목사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의 목사로서, 그리고 이후 월드비전의 기반이 된 수백 개의 인도주의적 운동의 설계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피어스가 전 세계 대통령들의 친구이자 월드비전의 설립자로 인정받는 전설이 되면서, 한 목사는 미국인의 의식에서 사라지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에도 한 목사의 기여에 대한 단서가 있긴 했다. 1954년 11월 어느 추운 겨울 저녁, 한 목사가 일찍 무대에 섰던 시카고의 오케스트라 홀에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듯한 피어스는 한 목사의 복음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진실성을 인정했다. 피어스는 한 목사가 “전쟁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쌀과 복음을 전문가처럼 나눠주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로 서로를 파괴할 것처럼 보였던 냉전의 무서운 시기였던 그 순간, 피어스는 부분적으로 한반도에서의 한 목사의 섬김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희망을 선언했다. 피어스는 그를 “하나님의 사람,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 진정한 영혼의 승리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피어스는 그의 모든 소망을 한 목사나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 그는 미군의 서울 폭격을 칭송했고,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저는 병원 침상에서 죽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는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 밤 이 부름에 응답하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성령으로 가득 차고, 얼어붙은 마음이 깨어질 사람들이 있게 해 달라고 어떻게 기도할까요?… 이번 달에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600명이나 됩니다. 이미 그들의 사진을 찍었고, 열흘 안에 그들의 이름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 봉투에 “한 아이를 입양하겠습니다”라고 쓰고, 1년 동안 매달 10달러를 보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다면요.

비즈니스 할 때와 같은 효율성으로, 안내자들이 서약서를 모으고, 사람들을 내보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면, 피어스는 프레젠테이션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시카고에서 모인 자금은 월드비전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단체로 갔다. 빌리 그레이엄과 1950년대 성장한 Youth for Christ,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같은 복음주의 단체들처럼, 월드비전은 영적 부흥에 대한 강한 헌신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를 키워왔다. 다른 점이라곤 인도주의적 자선에 대한 월드비전의 강조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월드비전을 유명하게 만든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이 사역의 1954년 240명의 아동 후원이 1990년에는 100만 명, 2015년에는 350만 명 후원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미국 정부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보조금과 개인들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소액 기부를 받는 월드비전은 개인 기부 규모로는 미국에서 19번째로 큰 자선 단체이다. 미국 지부의 연간 수입은 10억 달러 이상이며, 월드비전 인터내셔널과 합하면, 이 국제기구의 총 수입은 27억 5천만 달러이다.

하지만 65년 전 오케스트라 홀에서 있었던, 월드비전이 두 사람의 아이디어라는 생각은 이미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피어스가 전 세계 대통령들의 친구이자 월드비전의 설립자로 인정받는 전설이 되면서, 한 목사는 미국인의 의식에서 사라지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 쪽 이야기

피어스는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망연자실하고 있던 다른 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극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과 흔들리던 결혼생활을 극복하고, 극적으로 개종을 경험한 사람의 열정으로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카리스마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침례교 신자들, 나사렛성결교 신자들, 그리고 기독교선교연합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등 급상승하는 선벨트 복음주의 세계를 통해 빠른 길로 그를 이끌었다. 여러 교회에서 청년부 리더와 부목사로 사역한 후, 피어스는 Youth for Christ의 사역자가 되었다.

1940년대 후반 피어스의 첫 번째 중국 여행은 그의 반공 신념을 부채질했다. 성공적인 전도 여행 동안 놀랍게도 17,852명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을 본 후, 그는 붉은 군대에 의해 병원, 학교, 선교 시설들이 파괴되는 것도 목격했다. 미국인 전도자 피어스의 새로운 친구들이었던 중국인 목사들은 살해당했다. 최전선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피어스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본토 전체를 점령하기 직전 간신히 탈출했다. 공산주의의 망령이 비참한 광경으로 변해 있었다.

중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간 것을 본 피어스는 한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1950년 초의 한국 방문은 그의 경각심을 새롭게 강화시켰다. 러시아군은 38선을 넘어섰고, 피어스가 미국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주 후에 북한은 남한을 침공했다. 한국전쟁을 촉발시킨 이 공격은 즉시 서울을 집어삼켰고 남한 사람들을 남쪽 해안지대로 밀어냈다. 1950년 9월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의 9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11월 인천에서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과감한 개입은 서울을 탈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미군과 유엔군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후 대세는 다시 바뀌었다. 중국 인민군의 갑작스러운 투입은 진격을 뒤바꾸어 피어스의 기술에 의하면, ‘피흘리고 구타당한 도시’인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물러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1953년까지 계속되었고, 휴전 협정으로 3년 전에 전쟁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선에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한국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피어스의 사역은 공산주의에 대한 실존적 대응으로 부각되었다. 피어스는 그 몇 년간의 군사 충돌 기간 동안 엄청난 걸음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미국에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그는 속수무책으로 관망만 하다가, 냉전의 첫 번째 뜨거운 최전선 중 한 곳을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1950년 인디애나주 위노나 호수에서 열린 회의에서 피어스는 기독교인 순교자의 극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넓은 아량으로 기부해 줄 것을 간청했다. 피어스의 뒤를 이어 빌리 그레이엄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저는 벨에어 쉐비를 살 계획이었지만, 대신 한국인들을 위해 밥 피어스에게 기부했습니다.”

영적 최전선에서 피어스는 복음으로 계속 공세를 취했다.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그는 2만5000명의 한국 민간인과 한국군, 미군에게 “토착 종교와 불신의 어둠에서 복음의 찬란한 빛으로 돌아오라”고 복음을 전했다. 기독교인인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피어스의 성공을 높이 칭송했다. 피어스는 이날 뉴스레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그리스도를 위한 젊은이’와 같은 유형의 복음화가 극동을 지배하고 있는 무신론의 홍수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전했다.

만약 피어스의 방랑벽과 부흥주의의 조합이 유별나다면, 고통에 대한 그의 반응 역시 그렇다. 비록 복음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전 세계에 걸쳐 병원과 학교를 지어왔지만, 1920년대의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은 적어도-수사학적으로는- 복음주의자들을 사회 복음주의 낌새가 나는 사역에서는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에서의 육체적 고통과 가난을 접한 피어스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수사학적으로 인도주의적 노력에 다시 참여하도록 자극했다.

피어스의 인도주의는 월드비전의 창립 신화가 된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일깨워졌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그녀의 아버지에게 구타당하고 의절 당한 백옥이라는 이름의 중국 소녀를 만났다. 사실상 고아가 된 백옥은 갈 곳이 없었다. 그 지역의 선교사는 이미 고아를 돌보고 있었기에 또 다른 고아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피어스는 선교사와 백옥에게 그가 가진 현금 5달러 전액을 주었고, 그 후 매달 같은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만남들처럼, 이 만남은 특히 피어스를 감동시켜 성경 속 표지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소서”라고 썼다. 이것은 월드비전의 구호가 되었고, 그것이 어린이 후원 프로그램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한 달에 10달러를 기부하면, 고아 한 명의 음식, 옷, 교육, 종교 교육을 후원할 수 있었다. 피어스가 명명한 “나의 고아원”을 위한 기금은 1954년 57,000달러에서 1956년 450,000달러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월드비전은 비종교 미국인들에게조차 친숙한 인도주의적 거물이 되었다. 역사가 데이비드 킹이 언급했듯이, 그것은 “개신교 선교 사역을 둘로 찢어버린 복음주의와 사회적 행동 사이의 이분법”을 하나로 묶어냈다. 피어스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한 거대한 자연의 힘처럼 보였다.

이것이 월드비전의 공식 역사이다. 그러나 한국쪽 시각으로 보자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승리주의적인 미국의 서사에 역행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 쪽 이야기

한경직 목사가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은 피어스보다 낮았다. 1902년 유교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난 한 목사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가난에 시달리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부흥 운동은 한 목사의 출생 무렵에 이 지역을 휩쓸었고, 그의 가족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기독교로 개종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평양은 무신론 국가 북한의 수도가 되기 전에는, 아시아 기독교 전체의 영적 수도였다.

한경직은 매우 인상적인 젊은 청년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상냥한 성격, 뛰어난 지적 능력, 근면한 직업 윤리, 그리고 깊은 신앙에 주목하면서 그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부자들이 그를 프린스턴 신학교로 보내, 그는 저명한 신학자 J. 그레샴 메이첸 지도하에 공부할 수 있었다. 메이첸의 지성과 신학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의 호전적인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한경직은 온화하고 에큐메니컬한 보수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신학적 중간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질들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지대 큰 도시인 신의주에서 그의 첫 번째 한국 목양기간 동안 잘 작동했다. 피어스의 사회적 관심이 외국의 빈곤에 대한 미국인 특권층의 충격에 대한 강렬한 감정적 반응 위에 세워졌다면, 한 목사의 사회적 관심은 고통받는 양떼에 대한 오랜 기간의 목양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신도들이 깊은 사회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의 먼 북쪽에서 보낸 그의 13년은 걱정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생산적인 기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증대한 영향력은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의 교회는 어려운 재정으로 고통받았고, 정치적 자유는 거의 없었다. 한때, 일본 당국은 한 목사를 고문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이는 그가 평생 후회한 행동이었다. 이런 여러 어려운 와중에도, 그는 교회 건물, 고아원, 양로원의 건설을 독려했다. 한 목사는 종교와 시민사회 이슈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 목사의 명성은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 목사는 일본 총독에 의해 과도기 동안 치안을 감독하기 위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젊은 남성들이 치안 유지 활동에 참여하도록 신의주 자치 협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복에 대한 한 목사의 기쁨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한반도 북부 지역 통치는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소련의 신의주 감독과 함께 위도 38도에 남북 경계선이 설치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즉시 단속을 실시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토지 압류, 고문, 즉결 처형에 처했다. 한 목사에 대한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일반 난민으로 위장했다. 그는 1945년 말, 여전히 국경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남한으로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한 목사의 리더십은 서울에서 꽃을 피웠다. 북쪽에서 몰려온 난민들로 인해 악화된 서울도 신의주 못지않게 상황이 좋지 못했다. 한 목사는 거지들, 노숙자들, 매춘부들 사이를 걸으며 절망에 빠졌다. 그는 ‘무소유의 복음’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제 마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저는 고개를 들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텐트를 확보하고 난민들을 협동조합 형태로 조직하고, 작업을 할당하고,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27명의 난민의 첫 번째 모임을 영락장로교회에서 주재했고 그 이름을 ”난민 교회’라 불렀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북에서 왔기 때문이다. 반년 만에 교회는 1,000명의 교인을 확보했고, 2년 내에 4,300명이 모였다.

처음 4년 동안 이들 난민들은 텐트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후 미국에서의 한 목사의 연결고리를 통해, 영락교회는 직접 손으로 거대한 석조 고딕 건축물을 짓기 위한 재료를 위해 2만 달러를 모았다. 그 기간 동안, 한 목사는 인도주의적 사역을 계속했다. 1947년, 그는 6개 정도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몇몇 고아원, 과부를 위한 집, 더 많은 학교들, 그리고 장례식장이 포함됐다. 1948년, 그는 북한에서 내려온 난민들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운동도 펼쳤다. 한 목사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50년 6월 25일, 비극이 다시 일어났다. 영락교회가 교회 건물을 완공한 지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 북한이 침공했다. 양측 모두 잔학 행위를 저지르면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수가 배로 증가했다. 영락교회를 무기고로 사용하길 원했던 침공세력의 진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회 문 앞에서 교회 지도자 1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공산주의 무장세력에 의해 3000여명의 기독교 목사들이 익사 당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몇 달 안에,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파괴되었다.

한 목사의 인도주의적 활동은 혼동 속에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쟁 발발 하루 뒤, 그는 한국 기독교 국민 구호회(Korean Christian National Relief Society)를 발족시켰다. 그는 또한 기독교 연합 전쟁 비상 위원회(Christian Union Emergency Committee for War)를 이끌었다. 그는 맥아더 장군과 미군의 텐트를 얻기 위해 협상하여 난민 캠프에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한 목사가 1951년 3월 주 한국 유엔 대표로 근무했다는 사실은 고위급 인도주의 협정을 중개한 완벽한 내부 인사로서의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한 목사는 한국 내 수십 개의 조직을 이끌었기에 천성적으로 관료주의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관찰자들은 그의 조직에 있어서의 천부적 재능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겸손한 지도자로서 그의 조용한 카리스마가 동료들에게 그의 리더를 따르도록 “영감과 격려”를 줬음을 주목했다. 다른 사람은, 한 목사를 온화한 설득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탁월한 중재자로 불렀다. 그는 또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끈질기게 일한 잔인하다 할 정도로 효율성을 보인 사람이었다. 주변의 한 사람은 한 목사가가 “비록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늙은 종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매우 이성적인 사업가처럼 행동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서쪽을 바라보며

밥 피어스의 한국 기독교인 ‘구조’와 서구에서 보는 ‘이질적 통역사’인 한 목사와의 관계 묘사는 동쪽이 아닌 서쪽을 바라볼 때 매우 달라 보인다. 피어스가 한국에 발을 채 들여놓기도 전에 이미 월드비전의 설립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탁월한 교인이자 영어에 능통한 한 목사는 이미 전 세계 인맥들과 구호 활동과 네트워킹을 조율하고 있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결코 이런 식으로 기술하지 않았지만, 피어스가 한 목사를 발견한 것만큼 한 목사도 피어스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1950년 초 미국 선교사의 조언으로 피어스를 영락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한 사람은 한 목사였다. 피어스가 자신이 세운 인도주의 사업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한 한 목사는, 피어스가 서울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 그를 초청했다. 피어스는 1,500여 명의 신도들에게 “인간 육신의 거대한 모자이크로 함께 끌어안고” 설교를 했다고 기록했고, 한 목사는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야외 부흥회에서 피어스를 설교하도록 초대함으로써 거의 동시에 이 새로운 관계를 이어나갔다.

때때로, 통역사는 통역 이상의 역할을 한다.

불과 몇 주 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 목사는 피어스에게 상황을 계속 알려주었다. 1950년 말, 그들은 부산에서 다시 만나 몇 번의 목회자 수련회 개최를 위해 함께 일했다. 막바지 행사에서 피어스는 주 설교자였고, 그가 수련회 전체 비용을 지불했다. 미국이 끊임없이 언급했듯이, 한 목사는 확실히 피어스를 위해 통역했지만, 이것이 그가 둘의 관계에 있어서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한 목사가 모든 것을 조직했다.

이 협력적인 정리는 두 인도주의자들의 패턴이 되었다. 피어스는 모금과 홍보에 앞장섰고, 한 목사는 월드비전의 유아 사역을 감독했다. 이 사역들 대부분은 피어스가 현장에 나타나기 전부터 가동되고 있었다. 한 목사의 영향 아래, 그들의 파트너십은 점점 더 사회적 구호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이것은 전 세계 월드비전 활동의 중심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피어스는 한 목사가 구축한 이미 존재하는 인도주의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있었다. 월드비전 이전에는 영락교회가 있었고, 영락교회 이전에는 신의주가 있었고, 신의주 이전에는 평양 외곽에 사는 한 기독교 가족이 있었다. 월드비전의 계보는 매우 한국적이다.

그러나 해가 지남에 따라 월드비전의 기원 신화에서 한 목사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줄어들었다. 작가 리처드 게먼의 1960년 기사는 서울 공항에서 피어스를 맞이하는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한 목사를 간략하게 언급할 정도였다. 그 기사에서는 고아원 사역의 공을 서구 단체들에게 돌렸다. 1972년 기고문에는 한 목사를 헌신된 성자이며 난민들을 위해 여러 고아원과 학교를 지은 “온화하고 헌신적인 목사”라고 묘사했지만, 월드비전이 한 목사의 한국전쟁 전과 전쟁 중 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 1983년,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훌륭한 통역가, 닥터 한(Dr. Hahn)[틀린 철자]”이 피어스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통역했다는 오랜 대사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피어스의 딸인 메릴리 피어스 던커가 쓴 전기인 맨 오브 비전은 피어스가 “영(Yung)[틀린 철자]낙장로교회가 후원하는 타비타 과부들의 집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사역 뒤에는 한 사람의 동정심, 에너지, 그리고 비전이 있었는데, 결국 월드비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밥 피어스였다.”고만 기록하였다.

한 목사가 월드비전 인터내셔널과 월드비전 코리아에 지속적으로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에 대한 언급은 서구 복음주의 사회 행동에 대한 승리주의적 서사에 묻혀버렸다.

피어스 자신은 한 목사의 업적을 간과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월드비전의 초기 기록에는 한 목사 대한 묘사와 심지어 그에 대한 열렬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회고록인 “한국의 들려지지 않은 이야기(The Untold Korea Story”에서 피어스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섬긴 한 목사의 용기, 경건함, 그리고 훌륭한 솜씨를 극찬했다. 피어스는 “과거의 혼란에서 벗어나 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민족을 위해 미래를 만들었다.”고 까지 썼다. 던커는 CT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나는 비전이 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난 단지 기금 조성자에 불과했다. 난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거기 있었던 분이 그것을 해냈다.’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일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한 목사 역시 피어스를 떠오르는 스타로 원망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한 목사는 서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와 그의 동료인 피어스의 1978년 장례식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는 “한국 사람들은 그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그는 가장 잘 알려진 복음 전도자이자 해외에서 온 사회복지 사업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왔다”는 한 목사의 제한적인 표현은 피어스가 결코 유일한 창업자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은 월드비전을 피어스와 한 목사가 공동 설립한 합작기관으로 꾸준히 그려왔다. 월드비전 코리아 박 전 대표는 피어스는 “악보 대로 연주한 명연주자였다. 나머지 90%는 한국인이 해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월드비전은 미국에서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북한 출신 목사가 실제로 서울의 빈민가에 그것을 정착시켰다.

“한쪽 이야기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TED 강연에서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마만다 아디치(Chimamanda Adichie)는 지배적인 서사가 어떻게 다른 배우들을 고정관념으로 묶고, 궁극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를 묘사한다. 그들 자신들의 영웅 중 한 사람의 경건함과 진보를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기를 열망하는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이 정확히 이것을 행하였다. 그 결과는 강하고 자비로운 미국과 궁핍하고 절망적인 한국에 대한 강조라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확실히, 미국의 자본과 기술적 전문 지식이 한국을 처참한 파괴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피어스는 그것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이미 활기찬 기독교가 거기 있었고, 그것은 미국 버전 보다 확실히 더 활기찬 것이었으며, 미국인들에게 열렬한 기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발전적인 사역을 가르친 기독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통역사는 통역 이상의 역할을 한다.

한 목사와 피어스 사이의 협력과 같은 초국가적인 협력 사역은 이 새로운 세기에 믿음이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이듯 배가되고 있다. 현재 기독교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북미와 유럽 밖에 있다. 그리고 인구학자들은 미국이 2040년대 어느 시점에 다수를 차지했던 소수 국가가 될 것이라 예측한다.

컴패션 인터내셔널 에서부터 IVF, 전미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까지 많은 미국 단체들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독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의 리더십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의한 신앙에 기반을 둔 기관 형성이 단지 현재와 미래의 현실만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것은 그동안 줄곧 일어나고 있었던 현상이다. 지금은 선교 단체와 인도주의 단체들이 자신들의 한경직 목사를 찾아 과거를 파헤쳐야 할 때다. 전 세계에 기독교 기관을 세운 그렇지만 역사적 명성을 잃었거나, 혹은 계속 외면되어 왔던 남성들과 여성들은 누구일까?

2018년 최초로 비백인 미국인 에드거 산도발을 CEO로 임명하고, 1970년대에 기관 구조를 국제화했고, 반세기 동안 다양한 후원자 모집을 표방해온 월드비전의 경우 이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월드비전이 이미 존재하는, 한 목사를 창립 서사에 포함시키는 것은 국제적이고 다민족적인 조직에 훨씬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사실, 이야기가 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있다. 아버지의 전기를 쓴 지 40년이 지난 뒤, 던커는 다음 책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것은 월드비전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관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다른 교회들과 개인들의 이야기와 함께 한 목사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한다.

데이비드 R. 스와츠는 애즈베리 대학교의 역사학과 부교수이다. 그는 Facing West: American Evangelicals in an Age of World Christianity (Oxford University Press, April 2020) 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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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송 리더들에게는 카리스마보다 인격이 요구된다

브라이언 휴스턴 목사의 사임을 통해 우리는 단지 재능 있는 목회자가 아닌 경건한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Christianity Today July 5, 2022
Marcus Ingram / Contributor / Getty

초대형교회 힐송의 설립자이자 담임목사인 브라이언 휴스턴이 이번 주 시드니에서 현재 진행 중인 법정 소송과 목회자로서 위법행위 폭로로 인해 사임했다.

이 법정 사건에서 브라이언 휴스턴은 아버지 프랭크 휴스턴 목사가 1970년대 뉴질랜드에서 한 소년을 성폭행한 사건을 은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브라이언 휴스턴 목사가 그의 아버지를 목사직에서 해임하고 교단에 보고했으며 학대가 있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뉴사우스웨일즈주 경찰 당국은 휴스턴 목사가 ‘1970년대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재판은 올해 10월로 예정되어 있다.

최근에 힐송 국제 이사회는 휴스턴 목사에 대한 항의 이메일을 보냈다. 10년 전 발생한 첫 번째 사건은 ‘브라이언 휴스턴 목사가 직원에게 보낸 부적절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 직원이 사임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휴스턴 목사는 수면제의 영향으로 무분별한 행동을 했다고 설명하였다.

두 번째는 2019년 휴스턴 목사가 호텔에 있는 신원 미상의 여성의 방문을 두드리고 객실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면서 발생했다. 이번에도 그는 다른 사례와 유사하게 알코올과 함께 복용한 항불안제로 인한 운이 나쁜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힐송은 전 세계에 교회를 개척하고 오순절주의를 디지털 시대로 가져옴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공과 함께 사역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사역자와 사역을 보호하고 거대한 돈의 흐름을 유지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 그것이 경솔한 행동을 눈감아 주거나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휴스턴 목사의 변명은 매우 실망스럽다. 약물 치료는 개인의 정신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결코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변명은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힐송 이사회가 올바르게 지적한 한 가지 분명한 문제는 ‘힐송의 통치 모델은 역사적으로 담임목사에게 상당한 통제권을 부여’해 왔다. 한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건강한 리더십 문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회의 통치 모델, 어떤 종류의 리더십이 투명함과 책임감에 더 도움이 되는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성서학자 앤디 주드가 제안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권력이 어디에 분산되어 있는지, 어떠한 결정이 내려지고 검토되는지, 그리고 리더에게 역할을 강행하는 경우 그다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언제나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리더십 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목회자의 성경적 자격은 조회 수, 다운로드 수, 책 판매 기록, 수익, 집회 횟수, 신도 수 또는 교회에 출석하는 유명 인사의 수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회자에게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기를’ 요구한다. (디모데전서 3:2-3) 예수님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23:11-12)

신학교 시절, 나는 성경적 신앙을 기반으로 한 훌륭한 교회에 들어갔고, 전도사 자리를 놓고 고민하던 중 한 목회자를 만났다. 나를 안지 얼마 안 된 그는 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었지만 성격에 대해서는 현명하고 신중하게 말했다.

“네가 재능이 있다는 건 알지만, 네가 경건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그 말은 그 이후로 내 마음에 계속 맴돌고 있다.

재능이 있는 것과 경건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마치 당신이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당신의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욕망이 다른 것처럼. 그리고 무대 위의 모습과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을 때 하는 행동 정도의 큰 차이다.

휴스턴 목사의 사건을 통해 복음주의 세계가 단순히 대중의 인정을 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닮은 성품을 품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아첨꾼이 아니라 제자를 키우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벌거벗은 것처럼 여기고, 개인의 명성에 연연하지 않을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공을 우상으로 여길 때 예배가 거짓 된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지도자를 원한다.

Michael Bird (퀸즐랜드 대학 박사)는 호주 멜버른에 위치한 리들리 칼리지(Ridley College)의 신약성서 학장 및 교수이다.

Books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투자한 억만장자가 수십억 달러 사기 혐의로 기소되다

화이트칼라 범죄 전문가들이 버니 메이도프 이후 월스트리트의 가장 심각한 기소 대상으로 보는 범죄의 중심에 빌 황(Bill Hwang)이 있다.

아르케고스 캐피털의 설립자 빌 황이 사기 혐의로 기소된 후 맨해튼의 연방 법원을 떠나고 있다.

아르케고스 캐피털의 설립자 빌 황이 사기 혐의로 기소된 후 맨해튼의 연방 법원을 떠나고 있다.

Christianity Today June 6, 2022
스펜서 플랫 / 게티 이미지스

아르케고스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설립자인 빌 황이 지난주 수십억 달러의 형사 사건으로 기소되었을 때, 연방 지방 검사는 그 기독교 투자자의 “거대한 사기극이 이 나라 금융 시스템을 거의 붕괴시킬 위험에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의혹은 황씨가 내부 거래 혐의의 민사 사건으로부터 벗어난 지 10년 만에 나온 것이다. 그 이후 수년 동안, 이 한국 태생의 펀드 오너는 기부자, 이사, 그리고 ‘신앙과 직업의 대화’에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복음주의 기관과 함께 일해 왔다. 만약 유죄가 확정된다면, 황씨는 버니 메이도프와 같은 엄청난 증권 사기 사건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이며, 감옥에서 다중 종신형에 처해질 것이다.

미국 정부는 황씨의 지시에 의해 아르케고스가 가격을 부풀리기 위해 자회사 주식의 상당 부분을 사들이는 시장 조작에 관여한 후 더 많은 자금 모금을 위해 상장 계획에 대해 은행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2021년 며칠 동안, 정부는 이 계획이 아르케고스에 자금을 대주는 은행에 100억 달러의 직접적 손실을 입혔고, 아르케고스가 거래하고 있던 12개 이상의 회사들에서 1,00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폭락시켰다고 밝혔다.

황씨는 주식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유명한 투자자는 아니었고, 그의 뉴욕 생활 방식은 억만장자치고는 화려하지 않았다. 목사의 아들인 그는, 작은 기독교 컨퍼런스들에서 강연했고, 그의 미드타운 회사 사무실에서 성경 읽기 모임을 주도했으며, 방문객들에게는 기독교 서적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가 설립한 은혜와 자비 재단(the Grace and Mercy Foundation)을 통한 기독교 자선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르케고스는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의 “창시자”(히브리서 2:10)이자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로 묘사할 때 사용한 그리스 단어 ἀρχηγός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

황씨는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투자가 어떻게 주식의 “공정 가격”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지, 그리고 이 일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기소장에 적시된 설명문에서 황씨는 주가가 오르는 것은 “주식을 사라고 내게 주시는 싸인”이라고 언급했고, 이어 웃는 이모티콘을 사용하여, 연방 검사는 이를 시장 조작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황씨는 2018년 연세대학교에서 개최한 신앙과 직업 학술대회에서 한국어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은 투자보다는 '투기'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공정한 가치를 설정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기업이 투자를 통해 적정한 시장 가격을 형성하고, 그들이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따라 투자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방법은 두려움 없이 투자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죽음이나 돈이 두렵지 않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사람들은 제가 실제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메이도프와 비교해 본 금전적 손실

달러화 기준으로 볼 때, 황씨에 대한 기소는 월가 사상 최대 사기 사건이었던 2008년 버니 메이도프 이후 개인에 대한 최대 화이트칼라 기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메이도프의 피라미드형 기획에 개인투자자들은 약 175억 달러를 투자했고, 그들은 메이도프의 주장으로 인해 약 600억 달러의 주식을 보유했다고 최종적으로 믿었다. 메이도프는 150년 징역형과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황씨는 연루된 금융 총액의 최대치와 금융 시스템에의 잠재적 영향을 고려해 최대 38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변호사인 로렌스 러스버그는 뉴욕타임스에 그에 대한 기소는 “사실관계나 법적 근거가 전혀 없다.”며 “과잉”이라고 주장했다. 황씨는 기소된 내용 전체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러스버그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아르케고스의 고위직 2명은 유죄를 인정하고 정부에 협조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범죄 전문가들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비록 사건의 일부 요소들이 검찰을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황씨의 기소가 큰 건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미 법무부의 리사 모나코 법무차관은 황씨에 대한 기소를 발표하기 위해 맨해튼으로 이동했는데, 전문가들은 이 사실 역시 매우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첫 번째 심리에서 판사는 황씨의 채권을 1억 달러로 설정하고, 보석금을 현금 500만 달러와 두 개의 부동산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최고액 보석금이다.

현재 민간 로펌에서 화이트칼라 변호를 맡고 있는 전 뉴욕 남부지구 국선 변호사 데이비드 밀러는 이 사건이 “매우 중대한 기소”라고 말했다.

그는 부패 및 조직범죄 처벌법(RICO)을 포함한 남부지방검찰청이 황씨와 아르케고스 최고재무책임자(CFO) 패트릭 할리건에 대해 형사고발을 했던 것처럼, 황씨를 증권사기 혐의로 기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말했다. RICO는 과거 주로 기업형 범죄를 표적으로 삼았고, 지금 검찰은 아르케고스가 범죄기업처럼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혐의만 포함시키려면, 워싱턴에 있는 법무부 형사과의 승인이 필요할 것이다. 밀러 변호사는 RICO의 기소가 “심각한 몰수 귀결”을 가져올 것이며, 이는 정부가 아르케고스와 관련된 자산을 더 많이 몰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연방 검사는 보통 90% 이상의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들은 승소를 좋아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경력을 사랑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승패 기록을 좋아합니다.”라고 존 제이 형사 사법 대학의 금융 범죄 전문가인 데이비드 샤피로는 말했다.

밀러 변호사는 연방 사건 대부분이 유죄 판결로 귀결되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증권사기 사건에는 복잡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밀러 변호사는 기소의 복잡성과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이 사건을 예외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르케고스의 파산으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본 글로벌 투자 은행 Credit Suisse는 메이도프의 손에 돈을 맡긴 개인 투자자들과 자선 단체들이 받은 감정적 영향 만큼의 영향을 받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기소를 통해 연방정부는 황씨가 했던 투자의 종류를 분명히 밝히기를 원하고 있다.

뉴욕에서 금융 산업의 고객들을 대리하며 주로 화이트칼라 변론 사건을 다루는 저스틴 셰어 변호사는 “그들의 보유 자산들이 매각돼야 하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이런 자산을 빌려준 은행들뿐만 아니라 시장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메이도프 때보다 악영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주주들의 주식 가격 중 많은 부분들이 아르케고스의 거액의 주식 보유와 활동에 의해 부풀려졌습니다. 그래서 아르케고스가 파산해서 물러났을 때, 아마 진짜가 아닐지도 모르는 거품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법이든 아니든, 투자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공통점은 속았다는 것입니다.”라고 샤피로는 지적했다. 그는 두 가지 상황 모두에서 사람들은 “‘이 사람은 대단해!’ 그러나 백만 달러를 더 투자해 보면, ‘아, 이건 지어낸 것’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라고 샤피로는 덧붙였다.

“이 사람은 대단해!”라는 사고방식은 황씨가 이전에 내부 거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복귀했을 때 월가와 기독교계에서 다시 환영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2012년으로 가 보면, 황씨와 그의 헤지펀드 Tiger Asia Management는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내부 거래와 관련된 혐의를 받았고, 4,400만 달러의 민사 합의금을 지불했다. 기금 자체는 별도의 범죄 사기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아 1년의 집행유예와 1,600만 달러 몰수를 선고 받았다. 2013년, 황씨는 타이거 아시아를 헤지펀드 대신 패밀리 오피스인 아르케고스로 전환했는데, 이것은 이 회사가 그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다시 높은 투자 기록을 세우자, 더 많은 은행들이 그에게 투자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자선 사업은 성장했다.

그에게 신앙과 재정을 묻는 기독교인들은 내부 거래 혐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그 역시 “여러 번 실수했다.”고 말하는 것 외에는 이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곳에서의 강연에서, 그는 “사업상 나쁜 문제들이 있습니다 … 성경으로 갔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이 황 교수의 기독교 자선 단체인 the Grace and Mercy Foundation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 재단은 지난 10년 동안 풀러 신학대학원, 랍비 사가랴 국제 사역회(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 그리고 Bowery Mission 같은 뉴욕 비영리 선교 단체들에게 최소한 8천만 달러를 기부했다. 범죄 혐의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부터 최근까지 세금 신고 기준으로 약 5억 8,000만 달러를 그들은 보유하고 있다.

기독교 단체들이 황씨의 강연을 삭제하다

현재 일부 기독교 단체들은 황씨와 아르케고스의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행사에서 연설하는 비디오를 삭제하고 있다.

풀러 신학교는 황씨가 신앙과 직업에 대해 연설하는 동영상을 삭제했고, 더 이상 황씨가 이사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Faith Driven Investor는 2014년부터 아르케고스 경영 의장을 역임한 뒤 2019년 공동 CEO였던 앤디 밀스가 리디머 장로교회에서 한 2019년 강연을 삭제했다. King’s College의 전 총장인 밀스는 King’s College 현재 약력에 아르케고서 이력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그는 기소장에도 언급되지 않았고, 그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

아르케고스의 2021년 파산을 앞두고, 몇몇 기독교인들은 돈과 신학에 대해 황씨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2019년 뉴저지주 Metro Community Church 강연에서 주최측 목사인 피터 안은 황 교수에게 묻기를 “돈을 참 많이 가지셨네요. 누구나 그걸 갖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돈은 기쁨의 원천이라 생각하고, 더 갖고 싶어합니다. … 여기 있는 청중들에게 어떤 지혜의 말씀을 주셔서, 돈을 그들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라는 방식으로 계속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황 교수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며 화답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르게 움직이십니다. 안 목사님은 아마도 유명세를 잘 다루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서 돈을 꽤 잘 다룹니다. 저희집은 가난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식으로든 여러 가지 것들을 항상 나눠주셨어요.”

황씨의 아버지는 한국인 목사였고, 황씨가 18세 되던 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첫 번째 직업인 호텔 세탁소에서 일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UCLA 대학을 다녔고,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MBA를 땄고, 그 이후 금융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즐깁니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고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난하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살 수 있는 것보다 한 단계 낮춰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이 정말 행복합니다. 저는 팀 켈러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들은 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돈이 불과 같습니다. 저는 그 불을 좋아하고, 불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그 불로 제집을 따뜻하게 하고,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이 나면, 그 불이 여러분을 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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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 투쟁과 중간에 끼어있던 선교사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 해외 선교사들은 한쪽 편을 선택하라는 압력에 직면했다.

Christianity Today June 6, 2022
East Asian Library,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 집단으로 봉기했다. 비록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 봉기는 민족주의를 통해 한국인들을 활기차게 하여 하나로 묶었으며, 그 운동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되었다. 지금은 매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이날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들도 이날을 기념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 공동체가 그들의 참여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 한국에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은 공식적으로 이 운동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또한 이 운동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일제 강점 초기

호레이스 알렌과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시작으로, 미국 개신교 장기 선교사들이 1884년부터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최초의 한국 주재 선교사였고, 언더우드는 1911년 성경 전체를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는 것을 감독했다. 헨리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메리 스크랜턴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로 불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첫 번째 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들이 접한 한국은 공식적으로 조선왕조로 알려진 독립 왕조였고, 그 군주들은 1392년부터 한반도를 통치해왔다. 그러나 20세기로 전환된 무렵, 유교(Neo-Confucian)에 바탕을 둔 왕조는 근대화된 일본의 공격을 받았다.

한국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왕조를 전복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10년에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다. 그러나 선교 사역은 계속되었고 1919년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 1명과 로마 가톨릭 선교사 52명 외에 개신교 선교사가 329명이나 되었다. (한국인들은 1700년대 말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개신교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인이었고, 영국인 선교사와 호주 선교사도 일부 있었다. 1919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전체 한국 인구의 2% 미만이었다. 그들 중 약 20만 명은 개신교도였다.

누가 한국에 복음을 가져왔을까? 한국인이 직접했다.

초기부터 선교사들은 포교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정치적 활동을 삼갔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 특히 교육과 의학 분야에 큰 도움을 줬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의 개혁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때, 한국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일본의 통치를 따랐다. 약 1만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폭력적인 19세기의 영향으로 인해, 대부분의 한국 가톨릭교도들은 일제 강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전도를 위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본 당국과 천주교보다 일본 당국에 훨씬 더 원망하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인 개종자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출범 이후, 3·1운동은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끈질긴 열망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반신으로 알려진 단군이 하나의 국가로서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역사적 기억과 상상력에 의해 촉진되었다. 두 번째는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 첫 10년에 기인하는데, 서울에서 일본 총독부가 무시무시한 순사들을 동원해 인종 차별, 조직적인 테러, 고문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만세!"라고 외쳤다.
시위대가 “만세!”라고 외쳤다.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원칙 연설은 3·1 운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윌슨이 미국인들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합류하는 것을 설득한 9개월 후, 윌슨은 전후의 세계 질서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의회의 합동 회의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연설은 전 세계의 식민지인들에게 자결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이상은 한국처럼 미국의 연합국이 강점하고 있는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허하게 변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연설이 처음 방송되었을 때,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그것을 행동으로의 명확한 부름으로 받아들였다.

처음 만세운동을 조직한 한국인들은 한국에 있는 동포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세계정세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디아스포라에 있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과 미국에 있던 한국 이민자들은 1919년 1월에 시작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힘을 모아 나섰다. 그들은 파리와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영향력 있는 한국인들이 파리 대표들을 지지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도록 설득하였다.

그들의 시위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만족하고 있다는 일본 선전의 거짓을 드러내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공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토착 종교인 천도교의 지도자들도 평화적인 시위를 계획했다. 1919년 2월 22일, 이 두 종교는 힘을 합쳤다. 닷새 뒤 불교도들이 이 시위에 합류해 3축의 종교지도자들의 동맹의 키가 마무리했다. 33명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그들의 이름을 올렸고, 그 사본은 널리 배포되었다.

기독교인들과 한국의 독립

1919년 3월 1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 파고다 공원에 모였다. 오후 2시, 한 청년이 공원 한가운데 있는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의 낭독이 끝나자마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 (한국의 독립이여, 영원하라!)라고 열광적인 함성을 질렀다. 수도 서울과 전국에 걸쳐, 한국인들은 비슷한 시위를 벌였다. 며칠 안에, 독립운동은 한국의 모든 곳에서, 그리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일어났다. 한국의 281개 군 가운데 7개 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2백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1,500개 이상의 시위에 참가했다.

그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와 열렬한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개신교도들은 그 운동에서 가장 큰 리더십을 발휘했다. 개신교 리더십의 중요성은 시위 기간, 일본이 체포한 사람들 수로 확인될 수 있다. 1919년 일본 군사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 후 19,525명의 한국인들이 체포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체포당한 전체 수의 거의 20%를 차지했다. 종교인들 가운데 체포된 사람 6,310명 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는데, 1919년 당시 개신교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를 약간 넘는 정도였다. 게다가, 체포된 489명의 성직자들 중 거의 절반과 체포된 471명의 여성들 중 2/3가 개신교도였다.

시위대 행렬에 합류한 여성들
시위대 행렬에 합류한 여성들

3·1운동은 비폭력 시위로 계획되었으나 그 계획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한국의 지도자들은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양심에 호소하려 했고, 더 중요하게 파리 평화 회의에서 서구 정복자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려 하였다. 대신, 시위는 주한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하고 총격을 가한 순사들을 자극했을 뿐이다. 그로 인해 일부 시위는 폭력적 폭동으로 변했고, 추가 일본군이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위가 진정되었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7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5,0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으며, 715채의 가옥과 47개의 교회, 2개의 학교가 완전 파괴되었다.

봉기에 대한 선교사의 대응

3.1운동이 진행되면서 시위가 자발적인 격발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일본이 한국 정보기관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에, 많은 일본인들은 외국 선교사를 주동자로 의심하고 비난하였다. 1919년 3월 12일 한국에서 발행된 일본 신문인 조선신문에 “한국인의 마음을 동요시킨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죄”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번 봉기는 그들의 소행이다. … 그들은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윌슨의 원칙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그들의 종교 뒤에 숨었다.”

이러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시위는 일본 못지않게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승인하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한국인들을 사주하고 협력한 혐의를 받고 있는 선교사들은 일본의 비난을 강력히 부인했고 그들의 정치적 중립성을 재확인했다. 결국 3월 중순, 일본 총독부는 선교사들과 미국 영사관의 압력으로 선교사들의 무죄를 공표했다.

덕수궁 근처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덕수궁 근처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교사들이 공언한 정치적 중립을 고려하면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비밀을 지킨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고려하면, 이 결정은 충분히 현명한 결정이었음이 증명됐다. 시위가 확산되자 많은 선교사들은 온정주의에서 비롯된 개종자들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개종자들의 정치적 행동이 선교 사역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본능적으로 한국 개종자들의 참여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학교와 교회를 휩쓴 민족주의적 열정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일본 당국의 유혈 진압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목격한 후, 선교사들은 더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상자 보호에 적극 나서게 됐고 그들의 슬로건을 바꾸어 '잔혹 행위에 대한 중립 거부'를 천명했다. 그들은 도덕적 의분을 가지고 일본 당국에 대해 시위자들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일본이 이런 호소에 대해 귀를 닫자, 선교사들은 해외 경로를 동원했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잔혹 행위를 기록했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유럽과 미국의 선교위원회와 영향력 있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미국 교회 연합회(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에 의해 약 1,000페이지 규모의 문서가 발행되었으며, 1919년 7월에는 “한국 상황: 목격자에 의한 최근 사건들의 믿을만한 설명”의 팸플릿이 출간되기도 했다. 수많은 설명들 중 인용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3월 4일 낮 12시 30분경, 한국인들은 다시 큰 함성을 질렀다. 이런 함성을 지르는 군중들에 맞서 일본 소방대는 곤봉을 사용하려 해산을 시도했고, 일부는 곡괭이 손잡이를 들었고, 일부는 긴 창의 나무 고리를, 일부는 쇠막대, 다른 이들은 단단한 막대와 소나무 곤봉을, 또 다른 이들은 짧은 손잡이의 곤봉을 사용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달려들어,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내에 중상을 입을 때까지, 그들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창 갈고리로 그들을 여기저기 낚아챘다. 얼굴에는 피가 줄줄 흐르는 가운데, 소방대원들에 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는 이들이 많았다.

파주에 살던 34세의 정용휘 씨는 3월 28일 오후 1시, “만세(한국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는 400여 명의 군중에게 총격을 가한 일본 헌병들과 맞닥뜨렸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심지어 돌멩이로 무장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8명이 사망했다. 정용휘 씨는 목에 총을 맞고 말았다.

독립 운동 참여로 인해 체포된 학생들
독립 운동 참여로 인해 체포된 학생들

이러한 보고서는 미국 상원에서 일본 비판자들에게 제공된 무기였고,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기에, 일본 정부에게는 미국과의 공식적인 관계에 있어서 악몽으로 판명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당국은 무력 사용을 포기했고, 한국에 대한 엄격한 식민지 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을 주도하면서 개신교도들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연결되었고, 이는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에 좋은 촉매제 역할을 했다. 교회사 학자인 알프레드 와슨은 1934년에 출판된 그의 책 “한국의 교회 성장”에서 “한국의 여러 교회들에게 1920년은 교회 성장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이 급속한 성장의 시기는 독립운동에 의해 선도되었다.”라고 썼다. 수량화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선교사들이 받은 새로운 차원의 신뢰였다. “선교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비난은, 사람들의 마음에 선교사들에 대한 신용을 잃게 하는 대신, 그들을 더 호의적으로 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동지로 여겨졌다.”

Timothy S. Lee는 텍사스 포트워스에 있는 Brite Divinity School의 기독교회사 부교수이다. 그는 Born Again: Evangelicalism in Korea(호놀룰루; 하와이 대학 출판부, 2010)의 저자이기도 하다.

Books

선교사 케네스 배, 북한 강제 수용소의 경험을 이야기하다

“주님,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에서 “주님, 저를 사용해주시옵소서”로 바뀐 기도제목

Christianity Today June 6, 2022
Micah Kandros / Courtesy of W Publishing Group

이 박해받은 그리스도인이 데니스 로드먼보다 승자처럼 보인다. 북한 체제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억류되어 15년 중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케네스 배 선교사를 둘러싼 극적인 이야기에 전미 농구 스타 로드먼은 유별난 카메오로만 등장했다. 2013년 4월 배 선교사가 15년 형의 선고를 받은 후, 고립무원의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한 로드먼은 은둔의 지도자 김정은과 친구관계를 표방하며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 제가 ‘ 김 ’ 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케네스 배를 풀어달라고 즉시 요청할 것입니다.” (이 변덕스러운 농구선수는 나중에 〈 CNN 〉 진행자와 설전을 벌이면서 북한을 옹호하고 오히려 배 선교사를 탓하는 발언을 했다.)

Not Forgotten: The True Story of My Imprisonment in North Korea

Not Forgotten: The True Story of My Imprisonment in North Korea

Thomas Nelson

272 pages

$10.99

배 선교사는 북한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체포될 때까지 2년 동안 15번이나 북한에 들어갔다. 북한 “관광”을 목적으로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국제 투자가 허용되는 나선 경제무역특구를 방문했다. 이는 북한에도 투자수익을 가져오는 일이기에, 선교사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북한에 드러내는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선교 관련 파일, 사진이 가득한 외장 하드를 지닌 채 북한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었다. 북한 체제전복 음모라는 죄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북한은 “여리고 작전 (Operation Jericho) ” 이라는 표현에 군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꼬투리를 잡았다. 미국이 끈질기게 로비한 결과로 2014년 11월 배 선교사는 석방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미국인이 됐다. CT의 모건 리는 그의 수감생활, 북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그치지 않는 사랑, 그의 비망록 「잊지 않았다 (Not Forgotten) 」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이 당신을 선교사가 되도록 이끌었습니까?

1984년에 저는 “예수님 안에서의 비전”이라는 주제의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고, 제가 받은 단어는 ‘목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저는 중국 교회들이 모인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설교자는 중국을 위한 선교에 헌신하길 원한다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그곳에는 500명이 있었고, 제가 처음으로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중국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마음을 간직했습니다.

남한에서 자라면서 북한에 대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는 공산주의는 악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1997년과 2002년 사이에 저는 서구와 남한의 언론을 통해서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한의 대기근, 특히 그곳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탈북자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는 선교사들(남한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들은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2005년에 저는 단둥이라는 중국 국경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그때가 북한을 위한 제 소명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시기입니다.

처음으로 북한에 입국할 때 두려웠습니까?

저는 2~3년 동안 단둥에서 살긴 했지만, 국경을 넘어 북으로 들어간 적은 없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북한 당국의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서는 그렇게는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방문은 북한에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계획의 실현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는 좀 겁이 났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제 아내와 다른 부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바로 북한당국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노동 수용소는 어떤 곳입니까?

처음에는 그 말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5개월 동안 독방에 있었고 교도관과 검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노동수용소에 대해 제가 들은 내용은 꽤나 끔찍했지만, 동시에 든생각은 최소한 감방 안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엔 제가 유일한 죄수였습니다. 텔레비전과 책상이 있는 작은 거실과 침대와 화장실, 그렇게 세 구역으로 되어있는 독방을 받았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씻고,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현장에 일하러 가기 전까지 1시간 정도 성경을 읽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주님의 능력과 보호를 구하며 주님의 전신갑주를 입었습니다.

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렸고 콩밭에서 일했습니다. 밭에는 거의 반이 돌이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8시간 일했고, 잠깐의 휴식과 점심시간 1시간이 허용되었습니다. 일요일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독서나 빨래를 하는 몇 시간 외에는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만 허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상이 몇 개월 지속되었고, 몸무게가 상당히 줄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저를 병원으로 보냈고, 제가 체중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다시 노동수용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요요 현상처럼, 한 곳에서는 10킬로그램 정도가 빠지고, 다른 곳에서는 5킬로그램 정도가 도로 찌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영양실조와 관절염, 그리고 다른 합병증에도 시달렸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근처에는 교도관이 최소 두 세 사람 있었습니다. 위협적인 장면일 수 있지만, 일단 날씨가 매우 더워지면 그들도 그늘이나 앉을 곳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재를 부수고 땅에 구멍을 파고 돌을 옮기고 길을 닦는 일 같은, 제게 주어진 일에 그냥 집중했습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하루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의 가족이나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애를 썼습니다. 저는 여러 찬송,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고등학교 합창단에서 즐겼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중에 고등학교 합창단 선생님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분이 저를 생각하고 계시며 교회 친구들과 학교 사람들과 함께 저를 지원하는 운동을 하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교도관이나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나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선교사이며 목사라는 것을 모두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지만 그리스도인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록 수감되어 있지만 여전히 나는 선교사다’라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저는 103번 죄수 혹은 “103번”으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끼리 있을때, 때때로 그들은 “목사님,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가정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가족 상담이나 혼전 상담을 했습니다. 한 교도관은 자주 아픈 10대 아들이 있었고, 저는 비타민C를 먹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어느 날, 인권특사가 제 석방 협상을 하러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매우 흥분되었고, 당연하게 교도관들에게 “저는 이제곧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작별노래를 불렀습니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다음에 또 봐요.” 한 교도관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무데도 가지 마세요. 당신이 여기 있어서 우리는 행운이었어요. 조금만 더 계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워요.” 저는 그들에게 금방 가겠지만 곧 다시 돌아올 것인데 그때는 죄수가 아닌 신분으로 올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는 선교사지만 꼭 나쁘지는 않아”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교도관이나 다른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저는 복음을 나누는 일에 조심스러웠는데,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사실이 발각되면 그 사람은 바로 감옥행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우리는 교도관이고 당신은 죄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보다 행복해 보일 수 있나요? 당신의 기쁨은 대체 어디서 오나요?”

어느 날, 한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게 저한테 무슨 이득이죠?” 누군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길 원한다면, 교회에 무엇을 내야 하나요? 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며, 값없이 주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은 전에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대화 끝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들에 응답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진짜라면, 당신은 왜 여전히 여기에 있는거죠?” 저는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에 당신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겠어요?” “그건 맞네요. 저는 이런 말은 전에 들어본 적도 없어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저는 복음을 직접적으로는 나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도관들이 제 안의 복음의 단초라도 보고, 말씀을 나누던 제가 없이도 그들에게 무언가 일어나길 희망했습니다. 제가 떠날 때, 교도관과 악수하며 서로에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보낸 시간에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하심이 있으심을 알게 되자, 저는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데니스 로드먼의 개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저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도움을 주는 시도를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개입으로 인해 미디어의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가〈CNN〉과 인터뷰한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로드먼은 농구경기를 위해 평양에 갈 때 배 선교사의 석방을 위한 로비를 계속할 것이냐는 진행자 크리스 쿠오모의 질문에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저는 북한 텔레비전에서 그를 봤습니다. 관중석에는 대략 2만 5000명이 있었습니다. 로드먼은 김정은 옆에 앉아서 시가를 피우고 있었는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경기 전에 그는 김정은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고, 그 주에만 5번 상영했습니다.

대략 10일 후에 검사가 제 병실로 왔고 로드먼의 그 인터뷰 때문에, 서방 언론들이 북한이 무고한 사람을 가두고 있다고 비난한다며, 당국에서 이를 매우 언짢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가 기자회견에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제가 그렇게 한다면 저를 석방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한겨울에 저를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영혼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관심이 제 석방을 위한 더 많은 협상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도 2014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저를 언급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지지하기 위해 달리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석방을 요구했는지 알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혼자라든가 버려졌다고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와 지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저와 함께했습니다.

저는 45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미국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특히 제가 희망을 잃기 시작할 때마다, 이 편지들이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과 함께요.

이 모든 경험이 당신의 여동생 테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여동생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여동생은 저의 석방을 위한 목소리, 저희 가족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영어를 가르쳤는데, 제 일 때문에 수업을 줄이거나 휴강을 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동생은 하던 일에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저를 위해 일하면서 더 강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에 더 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테리가 변호사인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CNN>에 출연해 제 상황에 대해서 알렸는데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이런 경험은 저희 가족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이전보다 더욱 가깝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이 말씀을 실감합니다.

당신의 아내 리디아와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지난 2년간은 아내에게 끔찍한 나날이었고, 특히 처음 몇 달 동안 매우 그러했습니다. 제가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오기는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매달 아내는 좋은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단둥 선교를 위해 해야 할 너무나 많은 업무를 두고 북한에 억류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기운을내어 제 일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냈고, 북한과 중국을 향한 훨씬 더 큰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 아이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중국에 살고 있을 때도 떨어져 있는 날이 자주 있었지만, 크리스마스와 여름에는 하와이나 시애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수감되기 전에 가족들에게도 말한 적이 있는데, 제가 집에 돌아온 후에 저는 제가 그들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헌신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여전히 예수전도단 YWAM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북자와 그 자녀들에게 교육·경제적인 필요가 있을 때 도움을 주는 일에 특화된 비정부기구를 출범할 계획입니다. 그들은 새로 정착한 후에도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고립되기 쉽습니다. 저는 교회와 탈북자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생각이 있습니까?

위협이 아닌 축복으로서 다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선교사의 신분으로 가면 저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크나큰 어둠과 억압 아래 있는 북한 사람들을 보듬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그러한 사역의 일부로 사용되길 바라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험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무엇입니까?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다음에는 집에 다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믿음을 지키라고 편지로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북한에 있기를 원하시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지만 저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저의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주님께 맡깁니다.” 저의 기도는 “주님,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에서 “주님,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저를 감시하는 사람들과 제가 연결되도록 문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관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버리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CT 독자들도 아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북한의 감옥이나 다른 어떤 고난의 시기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보낸 시간을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북한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할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의 몸된 우리는 북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지원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저의 소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석방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듯이, 제가 할 일은 말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는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Church Life

북한을 탈출하다

중국 교회의 큰 도움을 받다.

Christianity Today June 6, 2022
Peter Murphy

어떤 면에서는 북한에서 자란다는 것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나에게는 항상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고, 나를 끊임없이 돌봐주던 누나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잠자리를 잡기도 했고, 텔레비전 만화를 보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던 1995년, 전무후무한 대기근이 북한을 덮쳤고, 내 어린 시절의 달콤한 특권은 사라졌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굶주림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빚을 갚느라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 해, 어머니는 식량과 돈을 구하기 위해 누나와 함께 중국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어머니는 혼자 돌아오셨다. 어머니가 누나를 노예와도 같은 어린 신부로 팔아넘기셨던 것이다. 젊은 탈북 여성에게 흔히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기다리는 나보다 중국에 있는 누나가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성매매가 무엇인지조차 모르셨던 것 같다. 중개인 대부분은 중국 남성과 결혼하면 얻게 될 혜택에 대해서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많은 탈북 난민들이 이처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해야만 했다. 이후 어머니는 몰래 중국과 북한을 오갔고, 그러다가 북한 정부에 잡혀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는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내가 정의를 내리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나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노숙자, 고아, 그리고 거지. 내가 장마당에서 음식을 파는 곳으로 다가갔을 때 그들은 나를 마치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대했다.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지치고 절망적인지 안단다.”

눈을 들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버지처럼 굶어서 죽거나 아니면 나은 삶을 찾아 도망치거나. 남으면 죽음을 맞을게 분명하고 떠나면 살아남을 기회라도 갖게 되는 갈림길에서, 나는 살아남기로 선택했다.

나는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밤에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낮에 북한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2006년 2월 어느 날. 나는 두만강 둑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모랫구멍에 발이 빠져 신발이 모래범벅이 되었지만, 얼음으로 덮인 강 위를 달려 반대쪽 강가에 도착했다. 나는 기적을 만들었다.

나는 희망을 가득 품고 탈출했다. 먹을 걸 찾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내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장면은 중국 사람들이 먹고 남은 밥을 나에게 흔쾌히 주는 것이었다. 남은 밥 한 공기는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 내가 맞닥뜨린 건 차디찬 현실이었다. 중국 사람들 대부분이 나에게 남은 음식을 나눠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은 내 부탁에 짜증을 냈다.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몇 주 동안 나는 살아남기 위한 구걸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나이가 지긋한 조선족 여자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네. 하지만 꼭 교회에 가 봐라.” 이렇게 말하면서 십자가가 있는 건물을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북한에서 어느 병원 문에 달려 있던 붉은 십자가를 본 적 있었다. 나는 십자가가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분이 설명해준 대로 십자가를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많은 건물들을 찾아가 봤지만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없었다.

나는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물었다. “어디에 가면 십자가를 찾을 수 있나요?” “위를 봐라.” 그곳에 십자가가 있었다.

교회를 방문한 생애 첫 순간이었다. 늦은 저녁 즈음이었는데 남자 몇명이 그 허름한 건물 안에 모여 있었다.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한 남자가 나에게 20위안(약 3달러)을 주면서 그 돈이 그들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전부라고 말했다.

중국의 가장 북쪽에 있는 그 마을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는 연길까지, 그 다음에는 도문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또 다른 교회를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를 헤맸다. 마침내 발견한 두 번째 교회 벽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지쳤는지 이해한단다. 너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도. 이제 네 손을 나에게 건네지 않겠니? 지금부터 내가 너의 보호자란다.”

그때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여성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 분은 몇 주 동안 씻지 못했던 나를 개의치 않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질문에 나는 긴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거짓말을 했다. 나는 다른 도시에 있는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며 그곳에 가기 위해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분은 로비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시 돌아와 50위안(8달러)을 주었다. 그리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50위안.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내 손으로 쥐게 된 가장 큰 액수의 돈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그 교회에 다시 돌아갔다. 내가 다시 50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때 교회 사람들이 나에게 잠깐 머무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들의 호의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겨울에 문이 하나도 없는 버려진 집에서 자곤 했기 때문에, 담요가 있는 방에서 잔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머무르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나에게 50위안을 주었던 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목사님의 부인이었다. 나는 사모님이 내가 한 거짓말 때문에 나를 혼내고 쫓아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사모님은 내가 교회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어느 날 오후, 교회 사람들이 몇몇 모여서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목사님의 치아가 어떻게 나빠졌는지, 하지만 치과 치료를 받을 돈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사모님이 나에게 50위안을 준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로소 그때 나는 50위안이 목사님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사모님의 호의는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사모님은 남은 밥을 나눠주기를 거절했던 다른 중국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사모님이 믿는 것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과는 달리 나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단어, 개념이 무엇인지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사모님의 믿음이 궁금했다.

중국에서 탈북 난민을 머무르게 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벌써 2주 이상이나 나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 교회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교회 성도 한 분이 기꺼이 나를 받아주겠다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조선족 여자 성도를 소개시켜주었다. 그 분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에게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도록 했다. 나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할머니는 내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고 찬송가를 부르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이름,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는 첫 번째 기도를 중국어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날 밤, 할머니는 나에게 찬송가 한 곡을 가르쳐주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할머니의 집으로 옮겨간 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탈북 난민들을 위한 지하 쉼터를 운영하는 한 중국인을 만났다. 같은 해 말, 나는 한 사회운동가를 만났고 그는 내가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2007년, 나는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도착했고 리치먼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장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수업 내용도, 친구들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충격이었고 나는 그 문화의 흐름을 거의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어렸기 때문에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4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현재 뉴욕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더 배우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할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준 찬송가는 내 마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글로 표현해 준 것과도 같았다. 나는 세상에서 혼자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북한 정부는 나를 체포할 수 있었고, 나는 굶주림에 고통 받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나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멀리하시면 어떻게 될까? 나를 머무르게 해 주었던 교회들, 나누어 줄 수 없었던 50위안을 건네 준 사모님,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주어진 할머니까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중국으로 도망친 이후, 나는 인간의 선함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 나서 희망을 되찾았다. 이방인들을 돌보고,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요 복음의 본질이다.

요셉 김 「같은 하늘 아래 (Under the Same Sky: From Starvation in North Korea to Salvation in Americay ) 」의 저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교회를 떠난 사람들

지역 신도들에게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최근 연구지만, 한편 새로운 기회로도 볼 수 있다.

Christianity Today May 25, 2022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 Source Images: Luis Alvarez / Getty Images

마이크 메쇼(Mike Meshaw) 목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그레이스 교회(Grace Church)의 담임목사로 21년간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교가 있는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코로나19로 2020년 3월에 폐쇄되기 전까지 이 복음주의 교회에 매주 평균 약 220명이 방문했다. 메쇼 목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교회가 일시적으로 대면 예배를 중단한 지 거의 2년이 지난 지금, 일주일에 평균 약 150명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기를 불편해합니다.”라고 말했다.

교회는 대유행 초기에 자발적으로 대면 예배를 중단했지만 교회의 지도자 그룹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 가족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는 성도들의 소식을 듣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 성도의 50% 이상이 교회 문을 다시 열도록 강하게 요청하였습니다.” 메쇼 목사는 말했다.

교회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보다 먼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교회에 긍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메쇼 목사는 “우리 교인들은 여전히 방역수칙,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착용을 자발적으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예배를 취소하기도 하지만 교회는 계속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는 잘 버티고 있지만 특히 최근 급증하는 팬데믹 상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메쇼 목사는 우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메쇼 목사는 “양성 결과가 하나라도 나오고 정보가 공개되면 공포는 괴물처럼 확대되고 사람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닳아 없어질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들이 좌절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일부는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요.”

다른 교회들은 출석률 감소와 안전 수칙에 대한 신도들의 불안을 해결해야 했다.

웨이드 브래드쇼(Wade Bradshaw) 목사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 있는 대형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다. 이 교회는 2020년 3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고, 지난 가을 대면 예배를 재개하였다.

그는 “스트리밍과 함께 시작된 줌 (Zoom)예배는 피로감이 있었습니다”라며 교회가 “마스크 착용에 대한 심각하고 어려운 긴장감을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의사들은 보수적으로 행동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마스크를 의무화한 입장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브래드쇼 목사는 전반적으로 교회 출석률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팬데믹이 장기적으로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다음 소개하는 최근 연구는 그 의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2021년 6월, AP 통신은 팬데믹으로 인해 미국의 많은 예배당이 영구 폐쇄되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바르나 그룹(Barna Group)이 2020년 4월과 5월에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기독교 신자 3명 중 1명은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났다. 게다가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갤럽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교회 회원 수는 2020년에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다.

올해 미국 가족 조사(American Family Survey)를 사용한 새로운 가족학 연구소(Institute for Family Studies, IFS) 분석은 지난 2년 동안 종교 출석률이 어떻게 크게 감소했는지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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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교인의 비율은 2019년 34%에서 2021년 28%로 6% 감소했다. (‘교회’, ‘종교 예배’ 및 ‘예배당’이라는 용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편, 종교 예배에 참석한 적이 없거나 거의 없는 일반 미국인의 비율은 7% 증가했다.

미국 가족 연구를 통해 종교 예배 참석을 다음과 같이 측정했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제외하고 얼마나 자주 종교 예배에 참석합니까?’ (응답에 종교 예배 참석의 일부로 온라인 예배가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음)

종교 출석률의 감소는 인구 통계에 따라 다르다. 젊거나 나이가 많은 미국인은 중년층보다 출석률이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18세 미만의 자녀가 없는 기혼 성인의 경우에도 더욱 두드러진다. 어린 자녀가 없는 기혼 성인의 약 30%가 2021년에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2019년의 40%에서 감소한 수치다.

반면에 정치적 성향은 출석률 감소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보수는 온건파와 진보파보다 먼저 종교 예배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지만 출석률 감소는 세 집단 모두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소득별로 보았을 때에도 출석률 감소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인종에 관한 한 결과는 다르다. 자료에 따르면 흑인 미국인들은 다른 인종의 사람들보다 교회 출석률이 급감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2019년에는 흑인 미국인의 45%가 정기적으로 종교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2021년에는 그 비율이 15% 떨어진 30%로 나타났다. 다른 인종/민족 집단의 감소는 5~6%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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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 있는 2000명 규모의 복음주의의 교회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나님의 다락방 교회(The Upper Room Church of God in Christ)는 거의 2년 전 7주 동안 온라인 예배를 드린 이후로 86주째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원로목사인 우든 목사(Patrick L. Wooden, Sr.)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슬로건 중 하나는 ‘우리는 예배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에는 의무적인 체온 체크, 사회적 거리 두기, 자리 띄워 앉기, 사람들이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한 두 번의 예배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잘 지냈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비록 교회의 출석률이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성도는 질병, 가족의 건강 악화 또는 아직 직접 대면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대면 예배에 여전히 복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전히 직접 모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성도들은 정말로 나왔습니다.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우든 목사는 말하며 함께 예배하기 위해 다른 주에서 온 방문객들까지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국적으로 교회 출석률이 하락하는 것을 우려하는데, 상당수 교회가 대면 예배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든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특정한 시간에 많은 교회들이 대응하는 부분이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폐쇄하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교회 출석이 전반적으로 줄었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성도들이 목사들의 교회 출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집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정말 똑같은가요? 저는 우리가 그런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코로나19 백신과 치료법이 가능해지면서 대두되는 중요한 문제는 팬데믹이 마침내 끝난 후 교회 출석률이 회복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2007~2009년 대공황이 종교 출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전 연구를 보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경제 위기가 교회 출석률을 높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데이터에 따르면 대공황 이후 그런 증가는 없었다. 연구는 또한 금융 위기가 유럽 국가의 종교 출석 수준에 명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메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팬데믹으로 인한 교인 감소를 교회에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가 교회가 정화되는 쪽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경우 그 숫자가 적습니다.” 메쇼 목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면 예배에 참석할 만큼 편안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일요일에도 계속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심했다.

빈 좌석이 온라인 예배자로 대체된 것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없다. 게다가 대면 상호작용의 부족은 팬데믹이 지속됨에 따라 교회 내의 사회적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종교 예배 참석은 더 나은 사회적 지원 네트워크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우울증 감소, 자살률 감소, 약물 및 알코올 과다 복용 감소와 같은 여러 공중보건적 이익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집에 고립되어 있는 온라인 예배는 동일한 수준의 장점을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종교를 믿지 않지만 더 이상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서적 비용을 치른다. 바르나 조사(Barna survey)에 따르면 코로나19 기간 동안 교회 출석을 중단한 응답자는 대면 예배 참석을 중단하지 않은 기독교인에 비해 불안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았다.

타일러 밴더윌(Typer VanderWeele)과 브랜든 케이스(Brendan Case)가 최근 CT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예배당의 빈 좌석은 공중보건의 위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위기는 핵가족의 건강을 포함한다. 종교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미국인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종교적인 미국인들은 비종교적인 미국인들보다 결혼과 자녀에 대한 더 강한 욕구를 가질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예배 참석자의 감소는 공중 보건뿐만 아니라 가정 안정과 인구 증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든 목사는 “자살, 우울증, 정신적 문제가 엄청나게 증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 출석률 감소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고 믿는다. 더 많은 교회가 안전하게 대면 교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그레이스 교회 메쇼 목사는 팬데믹으로 목회 사역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격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노인들을 위해 사역자들이 소셜 미디어, 이메일, 전화, 되도록 직접 방문 등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메쇼 목사는 팬데믹이 교회의 미래에 대한 의욕을 꺾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양치기로서 그 어느 때보다 사역을 통해 성도들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싶은 동기부여를 받고 있습니다.”

웬디 왕(Wendy Wang)은 가족 연구소(the Institute for Family Studies)의 연구 책임자이자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전 선임연구원이다.

앨리스 엘헤이지(Alysse ElHage)는 가족 연구소 블로그의 편집자이다. 그녀는 노스캐롤라이나 가족 정책 위원회(North Carolina Family Policy Council)에서 작가이자 연구원으로 17년간 일했다.

한국이 ‘메이플라워’ 교회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에 따라, 중국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를 회피하는 이슈에 대해 논쟁중이다.

중국 본토 신자들은 메이플라워 교회 신도들의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중국을 떠나 제주도로 도피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Christianity Today May 4, 2022
Illustration by Rick Szuecs / Source images: Kevin Frayer / Stringer / Getty / Envato

2019년 말과 2020년 초, 중국 크리스천 60명이 중국 남부 도시 쉔젠(심천,深圳)의 집을 떠나, 한국의 유명 관광지인 제주도에서 종교적 망명을 신청했다.

그들보다 먼저 한국에 건너간 판용광 목사의 인도를 따른 28명의 성인들과 32명의 어린이들로 구성된 이 그룹은, 쉔젠 개혁교회(Shenzhen Holy Reformed Church; SHRC)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월 말 광주고등법원은 교회의 망명 신청을 최종 기각했다. 그들은 이제 다른 나라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는 한 즉각적인 중국으로의 추방에 처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

판의 교회는 판 목사를 잘 알고 있던 왕이(Wang Yi) 목사가 담임으로 섬기고 있던 청두 Early Rain Covenant Church에 가해진 2018년 박해 이후 이민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왕 목사는 그해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왕 목사, 판 목사, 그리고 판의 교회 장로들 중 몇 명은 2018년부터 효력이 발생한 강력한 종교 규정에 비판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400개가 넘는 가정교회 회중들을 대표하였다.

왕 목사가 체포된 후, 판 목사는 중국 사회에 더 이상 가정교회가 공개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그는 이후에 “우리가 흩어지거나 우리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교회는 떠나야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9년 10월 중순, SHRC는 총회를 열고 제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투표했다. 만약 교회(당시 약 120개 교회)가 쉔젠에 남아 있다면, 그들에게는 단 두 가지 선택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뿔뿔이 흩어지거나, 정부가 공인하는 중국 삼자교회에 “무릎을 꿇는 것”.

게다가, 교회 성도들의 많은 자녀들이 그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국은 이후에 이 학교를 폐쇄해 버렸다. 그들의 자녀들이 믿음에 위반되는 자료로 배우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SHRC 부모들은 이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무렵, 판 목사는 제주도를 답사하기 위한 탐험 여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집을 떠났는데, 그때 그는 단지 두벌의 옷만 가지고 떠났다. 하지만 이후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후 몇 달 내에, 그의 가족과 그의 신도들 중 상당수가 그에게로 합류했다.

그러나 교회가 도착하여 망명을 신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한국의 매우 제한적인 망명 정책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판 목사는 밝혔다. (이 과정이 시작될 바로 그 무렵에 판 목사는 한 변호사로부터 교우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완벽하게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고 이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알렸다.) 전직 의사인 그와 그의 교회 성도들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중국을 떠난 이후로 하찮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SHRC는 현재 일부 사람들에게 “메이플라워 교회”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판 목사의 친구 목사가 종교의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순례자들과 SHRC 회중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한 후 붙여준 이름이다.

중국을 떠나기 1년 전, 필그림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플리머스 농장에서의 필그림 체험기 초판본을 공부하였던 것에 주목하며 판 목사는 말했다. “아이들조차 메이플라워호의 역사에 익숙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메이플라워호의 믿음과 같으며, 우리의 경험 또한 그들의 경험과 흡사합니다.”

다른 결정

중국의 종교적 사안을 다루는 새로운 법이 2018년부터 시행됨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방 정부에 등록하는 것과 정부의 감독하에 있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는 SHRC와 같은 교회들은 한때 그랬던 것처럼 공개적으로 모이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에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특히 리더들이 공개적으로 공동선언에 서명한 도시에 위치한 개혁 가정교회 회원들에게 더 심각하다.

그러나, SHRC의 박해에 대한 대응책은 오늘날 중국에서 등록하지 않은 채로 새로운 힘든 현실을 계속 견디고 있는 다른 가정교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예배의 자유를 갈망하는 신도들의 열망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도피에 대한 집단적 결정에 비판적이기도 하다.

판 목사에 대한 박해 연대기는 생소한 것이 아니지만, 미등록 교회에 출석하는 중국 신자들에게는 흔한 경험이기도 하다. 다른 많은 중국 가정교회들도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만, 어떤 교회들은 집단적 대피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가정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하에서 한 가구뿐만 아니라 전체 교우가 관여된 사안에 대한 목회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한 가정교회 목사는 말하기를 “그들의 동기와 근원적인 상황이 모두에게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직 그들만이 자신들의 동기를 알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본토를 떠났고,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메이플라워호와 비교했던 목사는 어떤 이들이 SHRC를 ‘메이플라워 교회’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가정교회 목사는 해외 유학을 마치고 해외에서의 안전한 삶을 포기하고 가정교회를 이끌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현재의 상황이 내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저를 그곳으로 이끄신 상황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종한 첫날부터, 전통적인 가정교회에서 자란 저에게 박해란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이 목사는 귀국할 짐을 챙기면서 나치 독일로의 귀국을 그의 국민들과 함께 시대적 시련을 나누기로 한 결정으로 설명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묵상했다. 그는 또한 중국인들과 복음을 나누기 위해 순교한 윌리엄 보든 같은 선교사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본회퍼처럼 중국에서 목양하는 것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말하기를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로서, 제가 도피할 계획을 하면서 중국의 형제자매들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을 전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 목자는 그의 양 떼와 함께 있어야 하고, 목장에 머물러야 합니다. … 저는 신실함을 위해 머물 것입니다.”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역사적으로 중국에서의 종교적 박해의 위협 아래 있던 교인들을 위해 이민과 망명을 찾았던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개인과 가족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교회 전체가 다른 나라로 망명을 원한 사례는, 전례 없는 상황은 아니더라도, 중국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가정교회는 정부의 감독하에 있는 교회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여 투옥된 워치만 니(Watchman Nee)와 왕밍다오(Wang Ming-Dao)와 같은 중국에 머물며 박해를 견뎌낸 선조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워치만 니는 홍콩에서 박해를 피할 기회가 있었지만, 상하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이들 교회들의 역사적 입장 기준은 머물면서 인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유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박해 아래에서도 인내하는 것을 “십자가 신학”의 적절한 적용으로 본다. SHRC의 대피 이유가 메이플라워를 타고 대피한 영국 청교도들에 역사적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들은 다른 중국 교회들에 의해 중국 가정교회의 역사적 유산을 등진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더 큰 중국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는 그들의 사례가 신뢰를 얻기 위해 “박해”를 받았다고 거짓 주장한 많은 이들의 역사도 있다.

판 목사는 그의 행동이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목회적 책임은 그의 신도들이 함께 있도록 지키는 것이라 믿었다. 중국에 남아 있는 신도들에게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만약 제가 떠나게 된다면, 저는 분명히 다른 교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며, 이런 부정적 평판은 제 남은 생애 동안 감수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전 세계의 교회들이 박해에 직면했을 때 그대로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대피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해 왔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신자들이 고문 가운데서 인내하는 것과 대피를 통해 다른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느냐에 대한 첨예한 선택 앞에서 중동의 기독교 공동체는 심하게 훼손되어왔다.

성경은 하나님의 제자들이 그대로 머물거나, 박해를 피하는 것 둘 다에 대한 사례들을 제시하는데, 결국 하나님께서는 더 큰 목적을 위해 두 결정 모두를 사용하신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박해를 피하도록 엘리야를 이방 땅으로 보낸 반면, 오바댜는 아합의 궁에 그대로 머물게 하셨다(열왕기상 18:1-16). 신약에서는,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사건이 많은 제자들을 예루살렘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사도행전 8:1). 각각에 대한 성경의 사례들은, 그대로 남아서 인도하든, 대피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에 이뤄진 것이며,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쟁취한 이후 현재 많은 신자들에게 강력한 믿음의 씨앗을 심었던 중국 기독교인들의 충성에 의해 지금도 계속 전해진다. 반면에, 마오가 권력을 잡은 후 중국 본토를 떠났던 사람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젊은 가정교회들을 강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만한 많은 자원을 개발하기도 했다.

판 목사와 SHRC에 대한 비판들이 타당한 논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그 회중 밖에 있는 누군가가 SHRC가 제주도로 떠난 동기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박해에 대한 광범위한 글로 잘 알려진 선교학자 크리스토프 사우어는 아프리카 선교학 저널인 Missionalia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대피하거나 대피하지 않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우어는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의 대사명에 복종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위태로워질 상황”에서는 피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 오직 판 목사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원하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동기가 이러한 함정을 피하는 결정인지 여부와 성령의 인도하에 이루어진 것인지 여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슈는 양쪽 모든 선택을 향한다. 대담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던 워치만 니와 왕밍다오의 유산에서 종종 잊혀지는 것은, 두 사람 다 나중에는 철회하고 그 철회에 따르는 고통에 직면했지만, 그 전에 처음에는 정부 통제하의 교회에 어느 정도 굴복하고, 협력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유산에 자신을 포함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박해에 대한 대응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인도와 성경적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 위험으로 가득찰 수 있다.

이민을 결정한 교회들에게 있는 한 가지 위험은 그들이 정착하려는 새로운 지역에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어는 “높은 수준의 율법주의와 고립으로 특징지어지는 게토 심리와 생활방식”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SHRC처럼 함께 이주하는 그룹에게는 확실히 더 위협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예를 보자면, 크리스천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것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사도행전 1:8) 교회 개척으로 이어졌다. 판 목사는 이러한 위협을 인식하고 그의 신도들이 머무르려고 하는 곳에서 “성읍의 평안을 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예레미야 29:7).

다음은 무엇인가?

SHRC의 최종 항소가 거부당한 후, 이 교회는 이제 몇 주 안에 한국을 떠나야만 한다. 최종 판결에 앞서 판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한국 외의 다른 나라로부터 망명 허가를 받기를 “매우 희망한다”고 밝혔지만, 그는 그 과정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비록 그 공동체가 중국으로 돌아갈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2월 중순을 넘어서 그들이 한국에 남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만약 SHRC가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들은 심각한 박해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에서 교회에 조인할 수 없었던 일부 SHRC 신도들은 쉔젠으로 돌아간 후 이미 조사를 받았고, 감시 혹은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만약 판 목사가 중국으로 송환된다면, 그는 국가 권력 전복이나 해외 세력과의 공모, 인신매매와 같은 심각한 혐의를 받게 될 것이다. 판 목사의 친구 왕이 목사는 국가 권력 전복 혐의로 형을 받았는데, 이는 정치범들에게 종종 사용되던 포괄적 혐의이다. 인신매매 혐의는 판 목사가 해외의 보호소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었을 때, 그가 신도들을 인도한 것에 기인한다. 그의 교회의 다른 신도들 역시 아마도 심문, 감시, 괴롭힘,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투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더 큰 경고들과 고려사항들은 비단 SHRC나 중국 가정교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The Pew Research Center는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종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러한 박해는 지난 10년 동안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과 이란, 에티오피아와 인도에서 많은 교회들은 판 목사와 SHRC가 겪은 것과 같은 유형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많은 신도들에게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도피를 선택한 SHRC와 같은 신도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교회의 반응을 배우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어떤 결정일지라도, 21세기 중국 가정교회의 역사든 영국 청교도의 역사든, 과거의 역사보다 성경에 뿌리를 둔 성령의 인도가 동기가 되어야 한다.

Jarred Jung 아시아의 신학 교수이며 가정교회 신학 센터의 협력 교수이다. 그는 중국에서 여러 사역을 감당하며, 많은 해를 보냈다.

E. F. 그레고리는 중국 가정교회의 오늘날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China Partnership 블로그 편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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