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종형’이 아니라면?

복음의 렌즈를 통해 바울의 가르침을 배운다.

Christianity Today June 30, 2024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CT 올해의 아름다운 정통 도서의 발췌문. CT의 2020년 도서상 수상자 전체목록.

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에베소서 5:22)’는 에베소서의 바울의 가르침과 처음으로 씨름했을 때, 나는 케임브리지대학의 학부생이었다. 나는 학구적이고 평등 지향적이며 전교생이 여학생인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나는 당시 남자가 대다수인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

이 구절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아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성이 남성만큼 유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 문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주의 왕이시며 자기희생적인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다르게, 실수하기 쉽고 죄 많은 인간에게 그런 종류의 복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세 번째 문제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지위에 체계가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은 문화에 반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바울은 여성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복음의 역할

처음에는 충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에 ‘복종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앞 구절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5:21)’에만 나타나므로, 나머지 구절은 상호 복종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신약성경에 세 번이나 나온다(골로새서 3:18, 베드로전서 3:1 참조).

하지만 남편에게 주어진 명령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에베소서의 구절이 명확해졌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셨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벌거벗고 피 흘리며 교회를 위해 고통받음으로써, 교회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우선시 함으로써, 모든 것을 희생함으로써 사랑하셨다. 이 명령이 아내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 보았다. 에베소서 5장 22절은 때때로 배우자 학대의 명령으로 비판을 받는다. 비극적으로도, 이것이 악용된 적도 있다. 그러나 남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그러한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학대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을 위해 고통받고,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위해 죽으라고 하는 구절을 얼마나 더 쉽게 왜곡할 수 있겠는가?

이 가르침의 시각이 바로 복음 자체의 렌즈임을 알았을 때, 그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진실이라면, 아무도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나아올 수 없다. 이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려 한다면 우리는예수님을 거부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복종하라고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 렌즈를 통해 나는 하나님이 성과 결혼을 우리와의 친밀함에 대한, 별과 같이 큰 소망을 엿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이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위대한 결혼에서 우리의 역할은 서로 바꿀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우리는 남녀의 구별 없이 그의 인도를 따른다. 궁극적으로 나의 결혼은 나와 내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 관한 것이아니듯 말이다.

결혼이 훨씬 더 큰 현실을 가리킨다는 것을 인식하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부담이 줄어든다. 첫째, 미혼자들의 부담을 줄여준다. 우리는 성적 및 로맨틱한 충족감을 궁극적인 선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결혼을 놓치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어릴 때 인형 놀이를 놓치고 자라서 진짜 아기를 갖는 것과 같다. 우리가 궁극적인 관계를 충분히 누릴 때, 아무도 인형 놀이를 아쉬워하지않을 것이다.

또한 결혼한 사람들의 부담도 덜어준다. 물론, 우리는 연극에서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사람과결혼했는지, 왜 우리의 결혼이 지속적인 행복(열반의 상태)을 제공하지 않는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결혼은 실망하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하며, 그 갈망은 최고의 결혼이 축소된 모형인 최후의 현실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5장은 나를 거부하곤 했다. 이제 이것은 나에게 확신을 주고 예수님께로 나를 부른다.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참된 남편이시며, 진정으로 나의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젠더 심리학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하나님의 명령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결혼의 이 그림을 젠더 심리학에 기초하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자연스러운 추종자이고 남성은 자연스러운 리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성에게 주어진 주요 명령은 사랑하는 것이지,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성이 사랑에 더 능숙하다는 주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일부는 남성에게 인정이 필요하고 여성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거나, 우리가 타고난 결핍에 대응하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성은 사랑에 더 능숙하고 남성은 인정에 더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면 남성이 자연스럽게 여성을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은 눈가리개를 한 채 모래에 머리를 묻는 것과 같다!

기껏해야 이러한 주장들은 남성과 여성의 심리학에 대한 일반화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불필요한 공격을 하고 예외를 초래한다. 아내가 천성적으로 더 복종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주어지고 내가 남편보다 더 자연스러운 리더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역할을바꿀 수 있다는 의미일까? 에베소서 5장은 결혼 생활에서 우리의 역할을 젠더 심리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는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천성적으로 복종하는 성격은 아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리더십이 있다. 나는 박사 학위와 신학교 학위를 받았고, 가족 중에서 훈련된 토론가이다. 나는 이를 열렬히 지지하는 남편과 결혼했다! 그러니 이 연극에서 내 역할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나를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 복종하는 것은 매일의 도전이다. 이는 내가 본래 더 복종적이거나 덜 복종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 더 사랑이 많거나 사랑이 적기 때문도 아니다.

신랄한 비판

에베소서 5장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전통적인’ 성 역할이 아내가 남편의 필요에 맞춰 자신을 누르고, 남편은 지배력을 펼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남편의 필요가 먼저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리더십에 재능이 덜 있다고도,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바울의 주요 사역 동역자 중 한 명은 바로 그런 일을 했던 여성이었고(사도행전 16:14), 이상적인 아내로 묘사된잠언 31장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보다 적게 벌어야 한다거나 가족이 남편의 경력을 아내의 경력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바울은 남성이 자신의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다른 곳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남편이 주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적 용어로, 일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봉사로 측정된다. 실제로, 전형적인 지도자이신 예수 자신도 돈을 벌지못했고, 그는 일부 여성 제자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다(누가복음 8:2-3).

면밀히 살펴보면, 에베소서 5장은 남성을 특권화하고 여성을 깔보는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결혼이라는 극에서 아내의필요가 먼저 오며, 남편의 자신을 우선시하려는 욕망은 복음의 도끼로 가차 없이 잘려 나간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성품에 주목하라는 부름이다.

최고의 인간

우리는 예수님을 최고의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이 남성과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폭풍을 잠잠하게 하고, 천사 군대를 소집하며, 죽음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팔은 어린아이들을 안았고, 그의 말은 여성을 높였으며, 그의 손은 병자를치유하기 위해 내밀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지만 소외된 자와 약한 자를 다정하게 환영하셨다.

예수님은 조롱당하고, 구타탕하고, 경비병들에게 학대당하신 후, 가시 면류관과 자색 옷을 입고 자신의 왕권을 비웃는 군중 앞에 나타나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한복음 19:5)’라고 외쳤다. 이 말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해서 매를 맞고 굴욕을 겪으셨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용해 우월주의, 학대 또는여성 비하를 정당화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를 쳐다보지 않는다.

레베카 맥클러플린 저,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에서 각색된 콘텐츠, ©2019. Good News Publishers의 출판 사역인 Crossway의허가를 받아 사용되었습니다. Wheaton, IL 60187. www.crosswa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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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중범죄 유죄 판결을 둘러싼 도덕적 혼란

전직 대통령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 공히, 악한 것을 선하다고 부르며, 선한 것을 악하다고 부르는 것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티모시 A. 클라리 / 게티 맨해튼 형사법원 밖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티모시 A. 클라리 / 게티 맨해튼 형사법원 밖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Christianity Today June 30, 2024
Timothy A. Clary / Getty

욕타임스 홈페이지는 목요일 오후, 34건의 도널드 트럼프의 중범죄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 기사를 100년 전 과거 신문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용하는 큰 글씨, 검은색 글자 헤드라인으로 발표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공공장소에서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사진 위에는 "모든 혐의에 대해 트럼프는 유죄"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페이지를 조금 아래로 스크롤하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하는 한 기사의 링크와 34개 혐의 각각을 자세히 설명하는 다른 기사의 링크를 찾을 수 있다. 홈페이지 초기화면에는 첫 번째 헤드라인과 두 번째 헤드라인의 글머리 요약이 함께 이상한 대치를 이루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최초의 중범죄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관련된 사건 목록이 있는데, “송장과 관련된 11개 혐의, 장부 조작과 관련된 12개 혐의, 수표 발행과 관련된 혐의 11개”가 실려 있다.”잠깐, 송장? 이것을 두고 정확히 세기의 범죄라 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 헤드라인은 우리의 정치 담론에서 이 판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응인 핵심 이슈를 강조한다. 트럼프의 반대자들과 추종자들 사이에는 공히 악한 것을 선하다고 부르며, 선한 것을 악하다고 부르는 일이 많이 있다(이사야 5:20).

나는 이것이 문제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숨기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가 관찰한 가장 많은 반응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수다나 뜨는 공론의 장 밖에서는 그러한 반응이 의기양양함과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태도, 혹은 분노와 분개를 터뜨리는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양쪽 모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반응을 진심 어린 정의의 상징으로 여긴다고 믿는다. 하지만 순수한 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혼란이다.

판결이 내려졌을 때 크게 기뻐했던 트럼프의 반대자들부터 시작해보자. 그런데 범죄의 본질은 정확히 무엇인가? 내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설득력이 있다고 여기는 트럼프의 조지아 기소와는 달리, 트럼프가 뉴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는 애매모호하거나 윤리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이 사건은 트럼프와 측근들이 포르노 스타 두 명과의 불륜을 숨기기 위해 지불한 금전에 관한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일부 사실이지만 사실 범죄라 할 수는 없다. 포르노 스타와 관계를 맺거나 간통 관계를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트럼프가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연방 선거 자금법(및 기타 일부 다른 법률)을 고의로 위반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사업 기록을 위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뉴욕주 법을 위반한 것이다. 이 법은 그의 2016년 대선 캠페인이 그의 부정행위에 대해 대중이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건의 실체를 숨기기 위한 단계적인 지불 절차를 공개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위조로 인해 또 다른 범죄가 은폐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기록 위조 혐의는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경범죄가 아닌 중범죄이다. 그러나 이 범죄에 대해 트럼프는 유죄 판결은 커녕 기소된 적도 없다.

이 사실이 당신에게 이전에는 고문 당하는 것 같은 고통으로 느껴졌지만,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평이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그런 반응을 보이는 혼자가 아니다. 맨해튼 지방 검사 앨빈 브래그가 작년에 이 혐의로 처음 기소했을 때, 주류 사회와 심지어 좌파 성향의 법률 평론가들도 거의 대부분 눈살을 찌푸렸다.

친트럼프 성향이 거의 없는 폴리티코는 이 모든 일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고 불렀다. CNN 해설자 파레드 자카리아는 “잘못된 범죄에 대해 결백한 사람을 재판하는 사례”라고 불렀다. Vox의 앤드류 프로캅은 트럼프가 "법치주의를 완전히 고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기소라는 사례를 만들었는데, 새로운 법률 이론을 사용하여 "모호하거나 기술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 피고인의 선출된 정적이 주도한 낚시 여행 정도로 설명했다.

나는 이 판결을 "선"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판결이 기술적으로나 법적으로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법률 전문 지식은 없다. 그러나 비록 이 판결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유죄 판결은 정의와 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보다는 정치적 경쟁에 의해 훨씬 더 동기가 부여된 사건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아직 트럼프에 대한 처벌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선고는 7월 11일로 예정되어 있음), 만약 그가 이 비폭력 범죄로 실제로 투옥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의기양양한 반응은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부당한 것이다(잠언 24 :17, 고린도전서 13:6).

이제 트럼프 지지자들을 살펴보자. 전 대통령은 간통 혐의와 그 범죄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여러 차례 사례 중 적어도 하나의 지불은 인정했으며, 루디 줄리아니도 트럼프의 변호사였을 때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그리고 트럼프가 자신의 성적인 성향을 공개적으로 밝힌 논평(및 사진)에 대한 이력을 고려할 때, 그의 부인은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다.

트럼프는 음란, “외설, 어리석은 말”, “거친 농담”으로 알려진 “비도덕하고, 불순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자연스럽게 얻거나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수십 년을 보내왔고,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에베소서 5:3-5). 포르노 스타 사건에 대한 그의 부인을 믿는 사람이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그의 가장 열성적인 유권자들조차도 그에게 신뢰를 보낼지 의심스럽다. 그는 분명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당신처럼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알 수 있어서 행운이다. 만약 그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이 제기된다면, 나의 반응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저 웃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그는 '아니요'라고 말하지만, 그의 공적인 모습 전체는 '예'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수치스럽고 천박하며, 그것들과 연관되면 우리의 성품도 부패하기 쉽다(고린도전서 15:33~34).

요컨대, 많은 우파가 비난한 것처럼 지금의 트럼프는 특정한 불의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수 있다. 법적인 질문만 놓고 보자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따르고 방어할 가치가 있는 궁지에 몰린 영웅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도덕의 잣대를 놓고 트럼프를 보자면, 그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온 속량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고백한다”(로마서 3:12, 23~24).

트럼프의 재판(일부는 부당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자초한)을 보면, 고백은 우리를 의기양양함이나 분개,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태도, 혹은 분개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구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누군가가 법정에서 큰 승소를 거두거나 심지어 대통령직까지 얻으면서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보니 크리스티안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아이디어와 서적 편집장이다.

정정: 이 기사의 이전 버전은 누가 은밀한 돈을 지불했는지 설명하는 데 있어 불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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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은 치명적인 죄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지름길을 지속적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Christianity Today June 28, 2024
아비게일 에릭슨의 일러스트 / 출처 이미지: 게티 이미지

미국 변호사 데미안 윌리엄스에 따르면, 여러 노동자들이 뉴저지 건설업자 핀바 오닐에게 그가 건설한 장벽이 안전하지 않다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닐은 그들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작은 위험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비극적으로도 직원들의 말이 옳았습니다. 오닐은 그 건설 지름길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후 8월에 범죄 방치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2017년, 오닐의 회사인 원키는 포킵시의 허드슨 강변에 복층 구조의 고급 아파트를 짓고 있었습니다. 현장 계획에 따르면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큰 흙더미를 쌓아 느슨한 흙을 다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건설업체는 인접 부지에서 공사가 시작되는 동안 한 현장의 흙더미를 막기 위해 콘크리트 블록 벽을 세웠습니다.

이 벽이 흙의 무게로 인해 무너지면서 작업자 막시밀리아노 사반이 사망하고 다른 작업자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기소 서류에 따르면 오닐은 공사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안전을 해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전을 무시하여 생기는 사고는 흔히 일어납니다. 올해 5월 세네갈에서는 한 병원 신생아실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11명의 신생아가 사망했습니다. 세네갈 보건부의 초기 발표에 따르면 화재는 예방 가능한 전기 합선으로 인한 배선 결함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병원 화재 이후 소셜 미디어에 글을 올린 많은 세네갈인 중 한 명은 @samba_massaly는 트위터에 “이 나라는 병들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우리 병원은 죽음의 장소가 되었다. 너무 많은 부주의, 무관심, 경솔함 때문이다!”

불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절도, 살인, 기타 범죄 행위와 같은 고의적인 피해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부주의로 인한 피해도 불의의 한 형태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를 용인해 왔습니다. 누락의 죄(우리가 하지 않았지만 해야 하는 일)는 위임의 죄(우리가 했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일)만큼이나 잘못된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성경적 비전은 의도적인 잘못뿐만 아니라 우발적인 해악을 방지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고를 줄이기 위한 규제를 지지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시간적 압박, 도움이 필요하다는 부끄러움, 조잡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별로 좋지 않고 안전하지 않은 직업에 안주하려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유능함, 선견지명, 주의력은 안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거룩함의 일부입니다.

의도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한 의도는 행동 여부와 관계없이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22, 28). 그러나 악한 동기가 없다고 해서 반드시 결백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악의가 없더라도 실수로 해를 입힌 것에 대해 유죄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의 이스라엘에는 의도하지 않은 죄에 관한 법이 있었습니다(레 4:1-5:18).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 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5:17-18)

지금의 문화에서는 용서를 꺼리기 때문에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을 때도 용서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실수로 저지른 죄, 특히 과실로 인한 죄는 고의로 저지른 죄와 마찬가지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둘 다 속죄가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높은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죄를 포함하여 모든 점에서 율법이 십자가에서 충족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는 율법과 그 심판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5:18).

그러나 율법은 정의의 본질과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에 대해 가르칠 것이 많습니다(마 22:37~40). 여기에는 우발적 피해에 대한 교훈도 포함됩니다.

현대법에서는 과실이 있는 경우 사고에 대한 과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단순한 과실(예: 수영장 주변의 울타리를 고치지 않은 경우)과 고의 또는 중과실(예: 수영장 근처에 유아를 혼자 두는 경우)을 구분합니다. 성경의 율법도 마찬가지로 무책임의 정도에 따라 죄책감의 수준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13에서는 두 가지 살인 사건을 비교하여 과실의 원칙을 소개합니다. 한 사례에서는 오늘날에는 단순 과실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고로 인해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이와 대조되는 사건은 고의로 사람을 살해한 경우입니다. 각 사건은 다른 판결을 받았지만 두 가해자 모두 처벌을 받았습니다.

고의적 살인의 예는 “이웃을 기다렸다가 폭행하여 죽인”(11절) 한 남자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적절한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실행에 옮겼습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명백한 살인 사건이었죠.

당시 법의 판결에 따르면 고의적 살인자는 즉시 복수자에게 넘겨져야 했습니다. 그는 유혈 살인의 유죄를 선고받았고 법의 모든 처벌을 받을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악한 의도에 의해 동기 부여된 그의 행동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대조적인 예는 더 복잡합니다. 이 예시에서는 한 사람이 부주의한 사고로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한 남자가 나무를 자르던 중 도끼날이 손잡이에서 빠져 날아갔습니다. 근처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이 도끼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사고는 사고였지만 도끼를 든 사람은 도구의 관리와 사용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위험한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위험성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민 35:17-18). 특히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도끼 사용에 따른 책임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 판결은 도끼를 휘두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이 친척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면 정당화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고였기 때문에 법은 “피난처 도시”에서 나무꾼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그가 가장 가까운 난민 시설로 달려가 그곳에 머무르면 망명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러나 피난처 도시를 떠나면 그는 안전을 잃었습니다. 보복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끼를 부주의하게 다루어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민 35:26-27, 32-33 참조) 따라서 신명기 19:1-13은 두 경우 모두 타인의 죽음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도구를 사용할 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공의를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크리스천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신명기 19장의 살인법을 살인의 경우에만 국한하는 것은 실수이며, 이러한 극단적인 예는 다른 상황으로 추론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19장은 포괄적인 법령이 아니라 법적 패러다임입니다. 살인에 관한 구절은 그 원칙을 보여줍니다: 단순 과실로 인한 사고는 일반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만 고의적인 피해보다는 죄책감이 덜합니다.

이 원칙은 항상 잠재적인 위험을 염두에 두고 모든 주의를 기울여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나무를 자르거나 콘센트에 배선을 연결하거나 약을 처방하거나 난로 위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거나 고속도로에서 트랙터 트레일러를 운전하거나 공장 기계를 조작할 때 위험한 장비를 책임감 있게 다루는 것은 개인적 거룩함의 한 측면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단순 과실에 대한 처벌은 고의적인 손해에 비해 덜 엄격합니다. 하지만 고의적인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고도 있습니다.

중과실이라고도 하는 고의적 과실은 고의적 피해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책임이 가중될 수 있습니다.

최신판 법률 사전에서는 중과실을 “법적 의무와 상대방에 대한 결과를 무모하게 무시하는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행위 또는 누락”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 과실의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사려 깊고 양심적인 태만입니다.

고의적 태만에 대한 책임의 증가는 소에 관한 성경의 두 가지 법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 (출 21:28-30)

첫 번째 사례에서는 공격 전력이 없는 소가 사람을 공격하여 죽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의 주인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소는 죽었고 주인은 그 고기를 회수할 수 없었습니다.

소 주인에게는 큰 손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소를 적절히 제지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죠. 하지만 소가 크고 본질적으로 위험하기는 했지만, 소가 사람을 물어뜯을 것이라고 예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단순 과실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거의 동일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두 사례의 사실관계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 주인은 소가 공격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위험에 대한 지식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행위는 고의적 과실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고의적 과실은 처벌 수위에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소 주인은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처럼 처벌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소의 주인에게는 사망에 대한 모든 형벌이 부과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시스템에서 고의적인 과실은 우발적인 해악에 대한 책임을 해악을 의도한 사람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윤리와 제품 디자인에 관한 인터뷰에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위한 크리스천 기술 현장 가이드의 공동 저자인 스티븐 밴더레스트는 중과실의 현대적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포드 핀토가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대 소형차의 가스 탱크 배치는 “후방 추돌 사고에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라고 밴더레스트는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설계를 변경할 만큼 사고가 자주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적인 결정을 내렸고, 이는 큰 비용을 초래할 것”이었습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포드는 생산을 계속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연료 누출과 가스 화재는 적당한 속도의 추돌 사고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자동차 제조업체를 상대로 100건이 넘는 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소송은 그림쇼가 포드 자동차를 상대로 낸 소송이었습니다.

그림쇼 재판 과정에서 포드의 내부 문서가 공개되면서 회사가 설계 결함과 그 위험성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배심원단은 이 사건에서 원고에게 1억 2,78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밴더레스트는 “당시 이 소송은 [미국 법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사 소송이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포드는 법정 밖에서 다른 소송을 해결하기 시작했고, 핀토의 설계 결함을 수정하기 위해 자발적 리콜을 실시했습니다.

핀토 피해는 우발적인 사고였습니다. 자동차 회사는 부상이나 사망을 초래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사전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성경의 정의 기준에 따르면 고의적 과실은 고의적 해악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위험 완화는 단순히 개인적 주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서의 율법은 사고를 줄이기 위한 공동체 규제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밴더레스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술이 더 복잡하고 강력할수록 잘못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는 더 많은 규제를 마련해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술은 우리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법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규제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안전한 건축 설계와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건축법을 주셨습니다.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지붕에서 사람이 떨어져도 그 집에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라”(신 22:8)는 지침이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가옥의 평평한 지붕은 오늘날 중동의 많은 건물과 마찬가지로 휴식을 취하거나 때로는 잠을 자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붕에 모이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고의적인 과실에 해당합니다. 그 결과 누군가가 추락하여 사망했다면 건축업자는 살인죄(“과실치사죄”)로 기소될 수 있습니다.

태만과 그 부정한 개념은 이스라엘의 보건 규정뿐만 아니라 안전 규정에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3-14장에서는 히브리어로 ‘차라아트’라고 불리는 질병에 감염된 사람, 집, 의복을 정화하라는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의 경우, 차라아트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궤양성 피부 질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오늘날 나병-한센병이라고 불리는 질환은 아님). 집과 의복에서 이 용어는 곰팡이 또는 곰팡이 감염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13-14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질환에 대한 보고, 검사 및 치료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차는 차라아트의 확산을 막고 감염된 사람들의 의식적 순결을 회복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건강은 신 앞에서 사람들이 온전한 의식을 치르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차라아트 규칙의 주된 관심사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병의 확산을 막는 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이는 국가의 정결성에 중요한 측면이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집을 짓고 전염병이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관심사였으며, 지역 사회 단속을 통한 체계적인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정의롭게 살라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개인적인 과실을 피하기 위한 주의와 적절한 지역사회 보건 및 안전 규정을 위한 지원을 모두 요구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질병 확산과 같은 우발적 피해에 대한 규제 수준이 매우 다양합니다. 정통 장로교 선교사 의사인 제임스 녹스는 규제가 너무 부담스러워 보이는 미국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또한, 규제가 무서울 정도로 느슨한 개발도상국의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재 우간다 나카알레에 있는 아키시온 예수(“예수님의 연민”) 장로교 클리닉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2년 전, 녹스는 우간다 음발레의 조이 헬스 센터와 호스피스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우간다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코로나19 사망자의 주치의라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녹스는 CT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보건 당국은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즉시 엄격한 격리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정부의 대응이 강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두세 달 만에 정부의 협조가 사라졌고, 우리 병원에는 코로나19 검사나 보호 장비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녹스에 따르면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핀토의 문제가 실제 솔루션을 구현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보이는 모든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부나 기업이 해결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들은 때때로 벌금과 법정 소송 패소를 사업이나 정치 권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비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태만으로 인한 다른 보상과 불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를 고려해야 합니다.

보고와 감독은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건축법과 레위인의 차라아트 규범은 하나님께서 공동체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협력적인 정책을 수립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 적합한 규정 목록이나 관리 방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사회별 결정은 공동체가 심의할 문제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기독교인들이 지지하고 참여해야 하는 심의 사항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생명 보호 법안이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이슈를 지지하도록 잘 조직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영향력은 기독교인들이 안전하지 않은 건물이나 병원균 발생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피해에 대한 제도적 보호를 옹호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한 사회의 정의는 법원 시스템만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경찰이나 기타 수단을 통한 고의적인 위법 행위의 제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의무입니다(미 6:8). 그리고 정의에는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도 포함됩니다.

성경의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관행에서 제시된 패러다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거룩함의 이러한 측면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특히 현대 기술의 힘이 커지고 그 잠재력이 커짐에 따라 우발적 피해와 관련하여 강력한 기독교적 증거가 많이 필요합니다.

다른 지역보다 사고가 드물게 발생하는 미국에서도 그 범위는 심각합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1981~2020년 미국 1~44세 10대 주요 사망 원인”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40년 동안 해당 연령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의도하지 않은 부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해 이 사망 원인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흔한 사망 원인인 암(868,100명)보다 의도하지 않은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200만 명 이상)이 거의 2.5배 더 많았습니다.

물론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스라엘의 법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히브리 농장에서 소를 아예 금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잠언 14:4에는 “소가 없는 곳에서는 구유가 깨끗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소 사고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의 힘을 빌려야만 풍성한 곡식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생산적이고 용기 있는 존재로 부르셔서 세상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발전시키도록 하십니다. 위험은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발적인 피해는 반드시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험을 알고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는 것은 고의적인 과실입니다.

우리는 가축 및 산업안전보건법과 같은 규정을 넘어서서 충실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소 주인처럼, 오늘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공격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반려동물에 대한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운전 중 문자 메시지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자를 보내면서 운전하는 것은 고의적인 과실에 해당합니다.

자신이 코로나19 양성인 것을 알면서도 질병 확산을 방지하지 않는 것도 고의적 과실의 또 다른 현대적 예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감염되어 피해를 입는다면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 원칙은 교회 내 성적 학대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에도 적용됩니다. 소가 공격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학대자의 성향을 알고 있는 지도자는 그 지식을 활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의로 학대를 방치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 것은 과실이며, 추가 피해를 방지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학대가 발생하더라도 무죄가 아닙니다. 이 경우 공모는 가해자와 협력했다는 뜻이 아니라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적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고의적인 방치는 고의적인 피해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에도 알려진 모든 위험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의 자세의 일부입니다.

마이클 르페브르는 장로교 목사이자 구약학자로, 목회자 신학자 센터의 펠로우입니다. 그는 창조의 전례의 저자입니다 : 구약의 맥락에서 달력 이해하기』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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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가고, 메타모더니즘이 온다.

우리의 변증은 다음 세대의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에 맞춰 발전해야 한다.

Christianity Today June 25, 2024
일러스트 Elizabeth Kaye / 출처 이미지: Getty, Unsplash

년 동안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종말을 선언해 왔다. 오랫동안 문화적 분위기로 지배적이었던 이 냉소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지적 입장은 마침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시각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 세대(Z세대와 알파 세대)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무엇이며, 변화하는 문화적 경계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학자들이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중 하나는 메타모더니즘(metamodernism)이다. 1975년에 처음으로 문학적변화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이 개념은 2000년대 초반 문화 분석가인 티모테우스 베르뮬렌과 로빈 반 아커의 작업 덕분에 더 두드러지게되었다. 그들은 2010년 논문 ‘메타모더니즘에 관한 노트(Notes on Metamodernism)’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례를 제시하며 그 특징을 분석했다.

베르뮬렌과 반 덴 아커에 따르면, 메타모더니즘은 '감정의 구조’로 ‘조심스러운 희망 그리고 때로는 가장된 진정성’으로 표현된다. 이는 ‘역사가 그토록 공언된 종말을 훌쩍 넘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작업에 대한 학문적 반응은 많지만, 이 용어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고등학교 교사이자 청소년 목사이며 세대 Z의 나이 든 구성원으로서, 나는 메타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적 공기를 느끼며 자랐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보아왔다. 이는 몇 가지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나는 이를 종말론적 희망(apocalyptic hope), 반전된 세계관 구축(inverted worldview-building), 그리고 고도로 서술된 정체성(highly narrated identities)이라고 부른다.

종말론적 희망(또는 베르뮬렌과 반 덴 아커가 ‘조심스러운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루한 비관주의와 대조되며,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 ‘운명지어졌다’라거나 최소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이를 어두운 유머, 아이러니를 통해 표현되는 진지한 희망, 그리고 과거 수십 년의 수동적 체념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 정신으로 대응한다.

젊은 세대는 기술주의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결과, 기후 위기로 인한 자연재해, 경쟁하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미래비전에 직면한 세계적인 불안정을 예상하면서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젊은이는 그들의 젊음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솔직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뚜렷한 절망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 세대는 겉으로는 어두운 농담을, 안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강력한 결의를 두고 미래를 마주하고 있다.

교수이자 문화 이론가인 아그 아폴로니가 ‘종말의 시대’라고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와 대조적으로, 메타모더니즘 세대는 새로운 시작을 갈망한다.

베르뮬렌과 반 덴 아커는 메타모더니즘을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전히 변화에 대한 희망이 있다. 그래서 다음 세대는 겉으로는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환경, 경제, 사회 문제에 있어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불안이나 과민반응처럼 보일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원인을 파악하고 행동하려고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우리의 미래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랐기 때문에, 냉소적인 유머와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맞이하는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왜 교회에 중요할까? 세계관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기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상황이 나아지기 전에악화할 것으로 예상하며, 인류가 스스로 초래한 수많은 재앙을 피하고자 신속히 행동해야 한다는 실질적인 부담을 느낀다. 성경은 이러한태도에 의미 있는 답으로 공감하고 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구속과 재창조를 기다린다고 썼다. 이 신음은 우리 세계의 자연적인 특징이 아니다. 이는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선한 세계에 대한 파괴의 지속적인 결과다. 현실에 대한 기독교 이야기는 메타모더니즘 세대를 괴롭히는좌절과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우리 세상은 우리가 저지른 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다행히 성경은 문제를 진단에서 그치지 않는다. 복음은 매우 현실적인 해결책도 제시한다. 즉,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새 생명을미리 맛보고 그분의 부활을 본받은 우리 자신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재창조의 약속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메타모더니즘의 종말론적 희망에 실제적인 실체를 제공한다.

현실 세계의 메타모더니즘의 또 다른 주요 측면은 내가 ‘반전된 세계관 구축’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세계관은 형이상학적 기초에 근거하여 윤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현세적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그의 책 <덕의 상실>에서‘‘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라는 선행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썼다.

하지만 새로운 메타모더니즘 세대에서는 이 전통적인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메타모더니즘 세대는 먼저 특정 필수 윤리적 원칙에 기반을 두고, 그 윤리와 가장 잘 맞는 이념적 틀을 선택한다. 우리는 흔히 종교적, 철학적 입장을 그 반대가 아닌 이전의 윤리적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레를 말보다 앞세우는’ 세대이다.

이 새로운 충동은 일종의 윤리적 확실성에서 자신의 무리가 선호하는 윤리적 결과와 일치하는 종교적 주장으로 역행하고,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윤리적 결과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윤리적 절대주의에 따르면, 일부 사람들은 인기 없는 윤리적 결론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모든 종교적 견해를 버리고 비난한다.

진리와 도덕을 단순한 개인의 선호로 간주하던 시절과는 달리, 이제 사람들은 정통 기독교 가르침의 여러 측면을 윤리적 실패로 명백히 비난하고 있다. 이는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용’이 유행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타테우스 윌리엄스는 그의 책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기>에서 ‘1990년대 이후로 비판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문화가 역사상 가장 비판적인 사회 중 하나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복음화에 새로운 도전을 야기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에는 이점도 있다. 수십 년 동안 어떤 도덕적 현실이나 윤리적 기준도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반대자들과 싸워온 후, 교회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이 세상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신선함을 줄 수도 있다.

변증학적 관점에서 이 대중적인 이념 변화는 전도 접근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단순히 진리의 존재를 옹호하는 법을가르치는 대신, 성경적 윤리의 근거와 이점을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메타모더니즘 세대와 소통할 때, 기독교 윤리에 대한 철저한 성경적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레베카 맥라플린은 그녀의 저서 <세속 신조>에서, 윤리적 결과에 기반한 기독교 세계관을 벗어난 세속주의자들과 사람들이 여전히 다른 윤리적 원칙들(강자가 약자를 책임지는 것과 같은)을 고수한다. 이러한 원칙들을 ‘기본적인 도덕적 상식’으로 여기고, ‘이 진리들이 기독교에서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대중 문화 윤리는 대체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설명한 현대 자유주의의 필수 구성 요소인 ‘해로움의 원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 기독교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해로움의 원칙을 ‘누구도 내 이익을 위해 간섭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할권리만 있을 뿐’이라고 묘사한다. 일부는 해로움의 원칙을 성경적 윤리와 혼동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것뿐이라고 상상하여 황금률을 단순화하여 재해석한다. 메타모더니즘주의의 분위기를 통해 걸러지면, 도덕에 더 많은 것이 있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인에 대한 강력한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테일러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명령은 ‘인간이 번성하라’와 동일하지 않다’라고 지적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 인간의 번영을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성경은 단지 서로의 길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것을 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것’ 이상의 삶의 방식을 요구하며 심지어 우리의 욕망과 자신의 삶까지 내려놓으라고 강요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변화하라고 부르시며, 테일러의 말에 따르면, ‘이 변화는 자연적 질서에 정의된 인간 번영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을 포함한다.’

메타모더니즘의 마지막 중요한 구성요소는 고도로 서술된 정체성에 대한 경향이다.

젊은 세대(밀레니얼 세대부터 알파 세대)와 이전 세대 간의 가장 큰 실질적 차이 중 하나는 정신 건강과 심리적 발달 주제에 대한 편안함과익숙한 정도다. 미국 심리학회에 따르면, Z세대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정신 건강이 보통이거나 좋지 않다고 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27%).… 또한 정신 건강 전문가로부터 치료나 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할 가능성도 더 높다(37%)’.

정신 건강 진단 및 발달이라는 역사적으로 낙인이 찍힌 주제에 대해 편안함과 익숙함이 높아지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공감과 투명성의 증가와 상관관계가 있으며, 이미 현대 직장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대중 심리학의 왜곡된 영향으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

오늘날의 대중 심리학은 보통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심리학 관련 의견과 조언을 간편하게 대규모로 전파되는 형태이다. 트라우마 치료사이자 상담사인 매디슨 마커스-패디슨은 이러한 콘텐츠가 종종 과도한 단순화, 맥락 부족, 제한된 전문 자격, 그리고 실제로 복잡한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개인화의 상실과 같은 문제를 겪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변화들이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자가 진단이 만연한 문화적 분위기로 나타나며, 이는 정신 건강을 개선하려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서술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콜로라도 대학에서 주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치료사 제시카 자라밀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정신 건강 질환을 자가 진단하고 그 진단으로 너무 많은 것을 식별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다. 기술적 진단 라벨이 없더라도, 젊은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과도하게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메타모더니즘 경향과 마찬가지로, 이 움직임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문화적 변화를 함께 가져오며, 그리스도인들이 의미 있게 대응해야 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 변화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직면한 정신적, 정서적 어려움에 대해 훨씬 더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방성은 종종 냉소적인 자기 비하의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더 솔직한 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취약성을 높인다. 이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진입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변화의 어두운 측면은 그에 수반되는 마비감이다. 자신의 자아를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에 귀속시킬수록, 미래에 의미 있는 변화를 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이러한 운명론적 결정론의 감각이 지난 10년 동안 청소년 자살률이 세 배 증가하고 고등학생 자살률이 거의 80% 증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사이자 청소년 목회자로서 나의 경험에 따르면, 메타모더니즘의 이러한 특징은 아마도 내가 매일 함께 일하는 학생들과의 상호 작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뚤어지고 자기비하적인 유머 속에 묻혀 있는 많은 학생은 과거에 쌓인 결점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느낀다.

하지만, 다시 한번 복음은 메타모더니즘 분위기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은 결점이 있고, 자신을 단순히 고쳐서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로워지며’(애 3:23), 우리는 매일 ‘변화되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며(고후 3:18), 언젠가는 ‘모두 변화될 것’이다(고전 15:51).

오늘날 당신의 정체성은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 아니다. 이는 실제 병리와 그 치료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이야기 그 이상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메타모더니즘에 대해 할 말이 분명히 더 있지만, 나의 희망은 시대에 뒤떨어진 포스트모던 변증법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차원에서 대화를 전환하는 데 있다. 변해가는 세상에서 함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메타모더니즘 시대에 부흥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벤자민 빈센트는 남부캘리포니아에서 목사이자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저니 오브 페이스 벨플라워에서 부목사로, 뉴포트 비치에 있는 퍼시피카 크리스천 고등학교에서 역사 신학 학과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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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과학자들이 이 영적 수행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이유

Christianity Today June 25, 2024
보스턴 글로브 / 게티 이미지

기도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생각, 단어, 도와달라는 호소, 즉흥적으로 말하거나 책 내용을 몇 줄 낭독하거나 심지어 신음 소리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온 후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논쟁을 이어왔습니다.

인디애나 대학교 사우스벤드의 교수인 심리학자 케빈 L. 래드는 최근 존 템플턴 재단에서 기도에 관한 광범위한 최신 연구를 조사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도가 친밀한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40여 건의 심리학 연구를 살펴본 결과, 기도와 관계 개선 사이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그는”사람들이 대처 도구로서 어떤 형태의 기도를 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심리학'의 저자 래드는 여러 연구를 통해 '기도의 심리학: 과학적 접근』의 저자 래드는 연구자들이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망원경으로 계속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죠.

래드는 CT와의 인터뷰에서 기도 연구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도의 관행과 사람들이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기도를 마치 누군가가 결정적인 진술을 하거나 자신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도의 묘미는 세상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고 단호하게 말하는 동시에 동시에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걱정을 포기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기도의 형이상학적인 핵심,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것은 야구장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로서 우리가 효과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결과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입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기도로 이끌까요? 기도할 때 무엇을 할까요? 그리고 기도 후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내가 이웃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가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만 이웃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지 연구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많은 공격을 받아온 '생각과 기도'라는 개념에 바로 들어맞는 말입니다. 생각과 기도를 이웃에게 향하면 기도 자체가 무엇을 하는지는 볼 수 없지만 내가 무엇을 하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면 그 이웃을 향한 나의 행동이 달라질까요? 옛 속담에 "마음은 하나님께, 손은 일터에"라는 말이 있듯이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실제로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하나요? 누가 자신의 시간, 재능, 자원을 기부하고 있나요? 맞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연구할 수 있고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사람이 기도에 대해 같은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그렇다면 연구자들은 기도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표준적인 접근 방식은 참가자에게 기도에 대한 정의를 열어두고 “당신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할 때 하는 행동을 한 다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것입니다.

개인마다 차이가 너무 큽니니다. 종교 공동체, 교회, 기도에 헌신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 그리고 기도를 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영성의 본질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큰 두려움 중 하나는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나요?

기도는 항상 기독교인으로서 제 삶의 일부였습니다. 제 아버지는 연합감리교회의 목사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진학했고 신학교 훈련의 일환으로 신학교에서 일종의 비정형적인 경로인 교육 시험 서비스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친구들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저는 통계와 연구 설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죠.

박사 과정 중 첫 번째 연구는 유방암 생존자 그룹이었는데, 운동과 암 생존 후 자신을 위해 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를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는 꽤 참신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그 프로젝트는 언제 시작되었나요?

기드온과 양털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기드온이 양털을 내밀며 하나님께 “젖게 해 주세요!”, “마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연구의 특징이 있습니다.

좀 더 현대적인 과학적 접근 방식을 찾아보면 1800년대와 프랜시스 갤튼이 등장합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기도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면 기도를 많이 하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기도를 가장 많이 할까요? 영국 교회는 항상 군주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은 정말 건강해야 하겠죠! 실제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아이디어는 오랫동안 격렬한 기도 게이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기도가 입술이나 마음에서 나온 다음 형이상학적인 일이 일어나고, 그것이 군주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중간 부분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나오니까요.

결국 그런 접근 방식은 인기가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측정하려다가 실패하면 형이상학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벽에 부딪히게 되죠. 누락된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문제의 일부도 측정의 문제일까요? 과학이 측정에 접근하는 방식으로는 기도를 측정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맞습니다. 생각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갤턴이 가정했던 것 중 하나는 기도를 많이 할수록 더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적 전통에 들어가서 본문을 파헤쳐 보면 더 많은 것이 더 좋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기도는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엘리야와 경쟁하듯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거나,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 요나처럼 성경은 과도한 기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교회마다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과학적으로 기도는 이런 일을 한다"고 말했는데도 효과가 없다면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관한 많은 과학 연구의 교활한 속내입니다. 우리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텍스트로 돌아가면 기도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좋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하며, 우리가 볼 수 있는 효과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연구하면 사람들이 기도를 다르게 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있나요?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사용하는 방식도 한 가지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찰나의 생각이라면 어떨까요? 그것도 기도에 포함되나요? 글쎄요, 일부 신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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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해 볼 가치가 있는 경이로움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방법.

Christianity Today June 20, 2024

만약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다면 다음 주일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약 하나님의 영이 성경을 밝혀 주시지 않는다면, 성경이 읽혀지고 설교 될 때 설교가 여전히 영혼을 만지고 진리가 선포될 수 있을까? 손을 높이 들었으나 성령께서 풍성히 거하시는 찬양이 없고 평소의 울림이 부족한 예배를 상상해 보라. 회중들이 떠날 때 주목할만한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예배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하나님이 부재하신다는 위협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다.

나의 목회 여정은 1999년 작은 아파트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실향민 신자 집단으로서 우리는 영적으로는 노숙자였으며 소위 “진정한 영성”이라 부르는 것을 추구했다. 그 단순한 모임은 내 인생에서 영적으로 가장 풍성한 경험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한 믿음, 의심, 외로움, 슬픔, 정신 건강에 관해 정형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고 찬송가, 합창곡, 시편을 찬양했다. 공적 교육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도울 방법을 찾았다.

그 후, 우리는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도다”(창 28:16, 새번역)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박한 출발에서 교회 개척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아파트가 너무 낡아서 결국 우리는 오래된 교회 지하실로 옮겼다.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모임은 조금 더 형식을 갖추게 되었지만, 간절함과 단순함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우리는 기도했고, 찬양했으며, 진로 결정, 관계, 유산, 이사 문제 등에 대해 서로를 격려했다.

몇 년 후, 교회는 대형 기관과 유사해졌다. 5년 사이, 세 번째 재정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사역자들은 분열되고 지쳤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반 수면 상태에서 이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없는 상태에서도 교인들을 진정한 예배로 초청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배후의 혼란을 능숙하게 가리면서도, 우리가 나름 준비한 예배가 초기 모임만큼 교인들을 영적으로 충만하게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러한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아파트 교회 시절과 더 큰 교회의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단지 더 젊었다는 것과 이상주의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공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명백하게 느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조직화된 교회와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뚜렷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의문이 종종 나를 괴롭혔다. 나는 우리 초기의 단순함과 큰 규모 모임의 복잡성 모두가 우리 신앙 여정의 진정한 과정이었다고 믿지만, 내 자신의 기대와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의 이유는 탈주술화였다.

믿음이 기능으로 변화되었을 때

20세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성의 효과를 탈주술화로 묘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베버가 보았듯이 계몽주의 이후, 과학혁명 이후의 세계는 신비로움으로부터의 탈피였다. 베버는 전차를 타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현대인에게는 도서관에 가거나(그의 시대에는) 빠른 구글 검색만으로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요점은 이 기본 설정이 매 순간의 초월성을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신비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베버의 주장에 더해서 현대성이 특히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만연한 회의론을 확산시켰다고 주장한다. 한때 초월성에 대한 믿음과 대부분의 개인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신비와 힘의 존재를 인정하던 믿음이 일상생활을 뒷받침했던 시대 정신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바뀌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지적 담론의 대부분은 모든 것이 물질적 수단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즉 신 없는 현실의 가정 하에서 운영된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많은 신비로운 현상을 비신화화 했다. 전염병은 더 이상 신령한 영이나 저주의 산물이 아니라 세균과 바이러스의 결과이며, 악천후는 신의 행위가 아니라 기압 시스템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베버의 전차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작동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논리적인 설명이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 특히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은 비슷한 렌즈를 통해 영적인 삶을 보는 공통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종종 종교적 체험을 우리가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과정의 결과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주일 예배든,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든, 목회 사역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에는 특히 강한 매력이 있다.

통제에 대한 이러한 욕구는 이해는 가지만, 결국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실용주의와 슬프게도 냉소주의의 길로 인도한다. 진정한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교회 모임은 연상을 불러 일으키는 찬양이나 이벤트적 설교에 의존함으로써 "의미 있는 순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 나쁜 것은 초월성에 굶주린 교인들이 이러한 조작적이고 감정적으로 흐르는 모임을 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반응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생산, 성과 및 에너지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건강의 몇 가지 중요한 지표인 영적 성숙, 지혜, 성품 및 사랑이 부족한 공허한 사역을 초래할 수 있다. 많은 대형 교회와 교단이 리더십 실패의 여파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탈주술화가 지도자의 성품과 영적 발전을 도외시하게 만들었는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번아웃된 파수꾼들

대안적인 접근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탈주술화로 인한 본질적인 의심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항복이 아니라 도전으로서 맞서고 씨름해야 할 과제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령의 적극적인 임재에 진정으로 의지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다.

이는 활동에서 존재로 전환하라는 초대이다. 설교, 기도, 예배 인도, 심방과 같은 실제적인 사역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에 열린 마음으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좋은 소식은 이 길이 어둠에 가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갈망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시편 기자는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시편 42:3~4).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은 지나간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것이다.

시편 기자가 연약한 순간에 쇄신을 추구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이전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탐구는 개인과 공동체를 막론하고 탈주술화에 빠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예배의 핵심이다.

다른 이들을 경이로움으로 이끄는 것은, 전체 회중을 위해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부담은 목회자들이 영적 쇄신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을 개척하고, 안내자의 역할을 벗고 대신 구도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거룩한 장소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안전한 공간은 웅장한 교회당이 아니라 소그룹, 우정, 심지어는 교회 지하실에서의 조용한 순간일 수도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교회 지도자들도 영적 피로감에 취약하다. 이러한 감정은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예언자와 성도들이 직면한 고난을 반영한다. 이 상태를 인식하는 것은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은 용감한 영혼의 역사에 여러분을 맞추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의 회중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피곤함과 탈주술화는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영적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도자와 성도 모두에게 이해와 쇄신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마법적인 공식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는 것이 신앙의 생명선이다. 냉소주의와 정체에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기회를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열린 마음과 연약한 영혼은 우리가 갈망하는 기쁨을 재발견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추구를 통해, 마법의 불씨가 다시 점화되는 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끌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영웅의 죽음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 멘토, 동료들에 의해 교회 서사의 영웅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들은 영감 있는 설교를 하고, 지혜로운 상담을 제공하며,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잠시나마 감정적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지만, 결국에는 희미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당신을 영웅으로 여길 때 왜 당신이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할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압박감은 당신의 영혼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

대신, 목회자들은 서사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예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중요한 영웅이지만, 그것을 신학적인 프레임에서만 구성하는 것은 교회가 냉소주의와 탈주술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핵심은 영웅 패러다임을 버리고, 교인들이 영적 여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주인공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다. 목사, 지도자, 멘토는 이 여정의 아름다움을 조명하고 종종 장애물과 도전을 통해 그들을 인도할 수 있지만, 천국을 향해 개인이 밟아야 할 발걸음을 대신 내딛거나 밟을 수는 없다.

실제로 이는 교회를 실제적이고 생생한 영성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한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영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영적인 훈련을 갖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게 도구를 제공하여 광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의심과 탈주술화의 감정을 포용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로서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자존심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시에 복음으로 나아간다', 혹은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비전을 추구하는 대신, 임재의 조용한 순간을 맞도록 독려한다면 어떨까? 병상 옆에 있는 것, 삶의 희로애락을 받아들이는 것, 교인들이 실제적인 방법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격려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행동이다. 자리를 채우고 헌금을 모으는 것보다, 눈물을 흘리고 음식를 제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요점의 일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 임재하시는 것을 의존하는 훈련을 통해 자라나야 한다.

깨어지고 상처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만 우리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 자신 이외의 것에 굶주린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한 공동체로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그 간증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

어두운 아파트에서 함께 조용히 드리는 기도를 기립 박수와 맞바꾼다면 어떨까? 연기를 뿜는 기계와 세련된 설교로 조율된 연극과 같은 기도가 아니라, 초창기를 연상케 하는 연약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는 기도 말이다. 우리의 불씨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으로 점화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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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전 세계적으로 동아시아인은 종교를 가장 많이 떠났지만 여전히 영성 유지합니다

홍콩, 한국, 일본, 대만, 베트남의 성인 10,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퓨 설문조사에서 기독교인과 불교도의 신앙 및 관습과 다른 전통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했습니다.

Christianity Today June 17, 2024
Illustration by Mallory Rentsch Tlapek / Source Images: Unsplash / Pexels

동아시아의 종교 개종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홍콩과 한국의 성인 중 절반이 자라온 종교를 떠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종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보다 신앙을 떠난 성인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 지역은 가장 높은 수준의 탈종교화율을 보였습니다. 홍콩과 한국의 성인 중 3분의 1 이상이 더 이상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및 베트남의 성인 10명 중 4명은 종교가 없는데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 또는 신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대만과 일본 성인의 약 80%가 작년에 조상을 기리기 위해 향을 피웠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퓨 리서치 센터가 오늘 발표한 대규모 보고서인 “동아시아 사회의 종교와 영성”의 조사 결과 중 일부 내용입니다. 이 지역에서 매일 기도하거나 종교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또는 영적 신념을 계속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의식에 참여하고 있다”고 퓨 리서치 센터 연구진은 말합니다.

작년 6월부터 9월까지 홍콩, 일본, 한국, 대만(동아시아로 정의)과 베트남의 성인 10,39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하지만 유교 전통을 채택하고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동아시아 공통의 불교 분파인 대승불교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을 이번 조사에 포함했습니다. (지난 9월 퓨 리서치 센터는 동남아시아의 종교에 대한 심층 설문조사를 발표하면서 6개 국가를 선정한 바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지역에서 “종교”라는 단어가 “전통적인 아시아의 영성 형태”보다는 조직적이고 위계적인 예배 형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교”를 측정하는 것이 복잡하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 전화 통화와 베트남에서 대면 인터뷰를 통해 7개 언어로 진행된 설문조사의 번역가들은 “신”에 대해 가능한 가장 일반적인 단어를 선택하고 특정 종교의 신적 실체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피하도록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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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 설문조사는 홍콩, 한국, 베트남에서 종교가 없는 성인이 인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일본과 대만에서는 불교가 무교인을 근소한 차이로 앞섰습니다.

기독교인은 한국 인구의 32%, 홍콩의 20%, 베트남의 10%, 대만의 7%, 일본의 2%를 차지합니다. (일본 기독교인의 표본 규모가 매우 작기 때문에 퓨 리서치 센터는 이 국가의 조사 결과를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퓨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종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종교를 갖고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행동하는 것을 기준으로 이 사회의 종교를 측정하면 보이는 것보다 종교적으로 더 활발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동아시아의 기독교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복음주의 신자라고 밝힌 기독교인의 비율은 한국이 51%로 가장 높았습니다. 젊은 층(38%)에 비해 35세 이상의 기독교인 비율이 더 높았다(54%). 또한, 여성이나 대학 학위가 없는 기독교인이 복음주의자인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베트남 기독교인의 44%, 홍콩 기독교인의 36%, 대만 기독교인의 8%만이 자신이 복음주의자라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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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종교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집단입니다. 동아시아 기독교인의 약 3분의 1 이상과 베트남 기독교인의 3분의 2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반면 동아시아 불교 신자 중 종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20% 미만이었습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일반적으로 교회에 출석한다고 답했으며, 베트남 신자의 80%가 매주 출석한다고 답한 반면 대만과 홍콩의 신자는 46%에 그쳤습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기독교인 10명 중 약 9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한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종교가 없는 사람에 비해 기독교인은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습니다: 베트남과 한국의 기독교인 중 약 절반, 대만과 홍콩의 기독교인 중 40%가 매일 기도한다고 답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은 불교도나 종교가 없는 사람에 비해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깊이 생각하거나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과반수(62%)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이런 생각을 한다고 답했습니다.

유일하게 아태지역에서 한국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연령대가 성인의 35%인 반면, 청년층은 1/4에 불과해 연령 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도 활동과 관련해 홍콩 기독교인 대부분은 전도를 해도 된다고 답한 반면(82%), 한국 기독교인 대부분은 전도에 반대했습니다(70%).

홍콩은 성인의 절반이 가톨릭이나 기타 기독교 교회와 관련된 학교에 다녔지만, 그 외 국가에서 성인 대다수는 종교적 소속이 있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이는 영국 통치하에 홍콩에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의 기독교인은 불교도보다 종교적 소속이 있는 학교에 다녔을 확률이 더 높다. 예를 들어, 대만 기독교인의 22%는 기독교 또는 가톨릭 교회와 관련된 학교에 다닌 반면, 대만 불교도의 10%만 불교 단체와 관련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종교 전환

현재 아시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자란 종교와는 다른 종교적 정체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퓨 연구진은 가톨릭과 개신교처럼 한 전통 내에서가 아닌 불교와 기독교처럼 세계 주요 종교 간의 ‘종교적 전환’ 비율을 측정했습니다.

종교적 전환으로 인해 홍콩과 한국의 기독교인 수가 거의 10% 감소했습니다. 두 곳 모두에서 다른 종교 전통에서 자랐거나 이전에 종교적 정체성이 없던 성인 10명 중 약 1명이 현재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훨씬 더 많은 수(홍콩 17%, 한국 19%)가 어린 시절에 믿었던 기독교를 떠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종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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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대만과 베트남은 종교 전환으로 인해 기독교가 증가한 유일한 두 곳입니다. 대만에서는 기독교인의 15%가 불교 신자로 자랐습니다. 홍콩과 한국에서도 불교 신자의 비율이 각각 12% 포인트와 15% 포인트 감소했으며, 일본에서는 10% 포인트 감소했습니다.

종교 전환의 가장 비율을 차지하는 집단은 무교이며, 홍콩과 한국에서는 30% 포인트, 대만과 일본에서는 20% 포인트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오히려 무교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트남인의 55%는 종교 없이 자랐다고 답한 반면, 48%는 현재 종교를 갖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홍콩과 한국은 세계에서 종교를 떠나는 비율이 가장 높은 두 국가입니다. 홍콩에서는 인구의 37%가 어릴 적 종교를 떠났고 현재는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는다고 답했으며, 한국은 35%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종교 단체가 얼마나 ‘끈끈한’지, 즉 교인들을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에서 베트남에서는 기독교인의 교인 유지율이 95%에 달하는 반면,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40~60%에 그쳤습니다.

다른 종교 및 전통과의 친화성

홍콩, 한국, 베트남에서는 종교가 없다고 답한 성인이 성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일본과 대만 역시 종교가 없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각각 42%와 27%로 상당히 높습니다.

이 집단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종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경향이 높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교나 민속 신앙과 개인적인 유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일본, 대만에서 종교가 없는 성인의 3분의 1 이상이 불교적 삶의 방식에 유대감을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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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만, 일본의 성인 중 절반 이상이 자신의 전통 외에 적어도 하나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인, 불교도, 무교인의 대다수가 유교적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대만에서는 기독교인의 4분의 1, 불교도 및 종교가 없는 무교인의 약 40%가 도교적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답했습니다.

영적 영역에 대한 믿음

동아시아 및 베트남 전역에서 응답자들은 신보다는 영혼과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다고 답하는 경향이 더 높았습니다. 또한 인간이 만든 풍경이나 물리적 사물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는 상반되게 산, 강,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습니다.

교육 수준은 이러한 믿음에 놀라운 영향을 미칩니다. 퓨 연구진은 교육 수준이 높은 응답자가 교육 수준이 낮은 응답자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했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은 홍콩 성인 10명 중 8명은 이렇게 답했으며, 교육 수준이 낮은 응답자(64%)는 그렇지 않은 응답자보다 더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80%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불교인은 62%, 무종교인은 41%에 그쳤습니다. 대만과 홍콩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불교 신자가 기독교인보다 더 많이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는 가장 큰 집단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천사나 도움의 신이 존재한다고 답한 기독교인이 69% 대 54%로 불교도보다 더 많았고, 악마나 악신이 존재한다고 답한 비율도 63% 대 47%에 달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모두 존재한다고 답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전자를 더 강하게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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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가 없는 사람의 비율은 지역 전체에서 39~73%에 달했습니다.

또한 베트남 성인의 92%가 지난 1년간 조상을 위해 음식과 음료를 제물로 바친 적이 있다고 답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거의 모든 베트남인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향을 피우며, 일본과 대만 성인의 80%도 향을 피운다고 답했습니다.

기적, 업보, 운명, 환생, 열반에 대한 믿음

퓨 연구진은 홍콩에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기적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경향이 더 높다고 밝혔습니다(65% 대 55%).

홍콩 기독교인들은 기적이 존재한다고 답한 비율이 85%로 가장 높았으며, 대만, 한국, 베트남의 기독교인 상당수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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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카르마)에 대한 믿음도 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업이 존재한다고 믿는 비율이 가장 높지만, 베트남(71%), 홍콩(68%), 대만(64%)의 기독교인 대다수가 이에 동의합니다. 이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또한 운명을 믿는다고 답하는 경향이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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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의 기독교인들도 환생과 열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홍콩 기독교인의 35%는 인간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인 윤회를 믿으며, 42%는 윤회의 순환으로부터 해탈한다는 불교의 개념인 열반을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

퓨 조사는 또한 응답자들이 종교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데 있어 사회에 도움이 되며, 종교가 사람들에게 “옳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하도록” 지침을 제공한다는 데 동의하는 정도를 측정했습니다.

대부분의 응답자가 이 진술에 동의했으며, 베트남과 대만에서 다른 지역보다 긍정적인 응답이 더 많았습니다. 일본 성인의 동의 비율이 가장 낮았습니다.

기독교인은 다른 그룹보다 이러한 진술에 긍정할 가능성이 다소 높았습니다. 홍콩 기독교인의 89%는 종교가 윤리적 행동을 알리고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한 반면, 불교 신자의 78%와 종교가 없는 사람의 76%는 종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퓨는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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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도자의 정치 참여 여부에 대해서는 대만, 한국, 일본 국민들의 지지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모든 조사 지역에서 대부분의 응답자는 종교 지도자가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종교적 정체성의 놀라운 변화를 관찰하면서 퓨 연구자들은 “아시아에서 종교적 소속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종교적 라벨이 중요할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퓨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현재의 종교적 소속과 어린 시절의 소속을 설명하는 방식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 및 실천 수준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퍼듀 대학교의 사회학자인 양은 사람들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흔한 종교가 ‘무교’라는 조사 결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무교’는 서구에서는 점점 더 우려할 만한 현상이 되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종교적 정체성이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통적인 현상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종교의 요소를 자신의 영적 신념에 혼합하는 셰일라이즘과 같은 서구의 다른 새로운 종교적 경향도 수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고 양은 덧붙였습니다.

“동아시아의 종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현재 서구의 종교적 변화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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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빌 워’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디스토피아 영화는 시청자들에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목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시빌 워에서 제시 역을 맡은 카일리 스페니(가운데).

시빌 워에서 제시 역을 맡은 카일리 스페니(가운데).

Christianity Today June 12, 2024
머레이 클로즈 / A24 제공

영화 시빌 워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패스트 라이브즈 등을 제작한 A24가 배급한 이 영화는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연합군인 서부군과 싸우는 미국 정부의 잔존 세력을 묘사한다. 왜 이런 분파가 존재할까? 왜 지금인가?"라고 묻는다면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병참에 대해 실망스러울 정도로 불투명하지만, 몇 가지 언급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닉 오퍼만이 연기한 익명의 대통령은 세 번째 임기에 접어들고 있으며 미국 시민에 대한 공습에 대해 주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사스와 협력하는 캘리포니아는 억지스러워 보이다.

작가 겸 감독인 알렉스 갈랜드는 이러한 믿기 힘든 상황이 흥미롭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이 두 국가는 절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흥미롭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상황? 확실합니까?” 라고 갈랜드 주지사는 The Atlantic에 말했다. 갈랜드는 자신의 전제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념적 분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알고 보니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생겨났든 여전히 디스토피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진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그녀의 로이터 동료 조엘(와그너 모우라), 그리고 그녀의 멘토인 뉴욕타임스 기자 새미(스티븐 맥킨리 헨더슨)가 전쟁이 언론인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취재한 잔학 행위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에 대한 경험을 보여준다. 무자비한 효율성과 깨끗한 기술로 끔찍한 내전 장면을 기록하는 리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소름 끼치는 장면에서 많이 나온다. 군인이 처형당하는 장면이나 민간인이 불에 타는 장면을 완벽한 ISO와 조리개 값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소름이 돋다.

특종을 쫓던 세 사람은 리는 대통령을 촬영하고 조엘은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에서 워싱턴 DC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해야죠.” 라고 리는 말한다. 조엘도 동의한다: “대통령을 인터뷰하는 것만이 남은 유일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순간, 리를 우상화하는 젊은 사진기자 제시(카일리 스페니)가 합류한다. 두 사람은 함께 무너져가는 나라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사진작가들은 클릭 할 때마다 자신이 기록하는 전쟁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촬영 감독 롭 하디와 편집자 제이크 로버츠는 각 사진의 여파를 반복적으로 촬영하여 끔찍한 효과를 낸다. 리나 제시의 얼굴에서 카메라가 떨어질 때는 마치 가면이 벗겨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버려진 쇼핑몰의 솔직한 모습이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군인의 모습을 촬영할 때 리의 냉정한 침착함은 소름 끼친다. 그녀는 너무 많은 잔학 행위를 목격했고, 자기 보호를 위해든 과도한 노출로 인해든 주변의 공포에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젊은 기자인 제시는 달랐다. 그녀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관객은 적어도 처음엔 작품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알게 된다. 그녀의 감정이입이 냉담함으로 바뀌는 것은 비극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닌 냉정한 표정이 된다.

시빌 워는 전쟁 저널리스트의 고된 업무에 대한 찬사를 표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저널리스트가 기를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은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라는 관념에 반기를 든다. 객관성은 필수적이지만, 최악의 상황을 취재하면서도 동요하지 않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어야 한다.

한 고통스러운 시퀀스에서 제작진이 무자비한 폭력 행위를 목격한 후, 리는 눈에 띄게 흔들리는 제시에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물어볼 수 있도록 기록합니다.” 라고 말한다. 리는 클릭 한 번으로 이야기에 대한 투자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목적에 대한 더 큰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고요? 그게 바로 이 직업입니다."라고 그녀는 외친다. 자신이 보는 것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저널리스트의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 없이 행할 때 그들은 불안하다.

다윗의 시편은 시빌워에서 형상화한 것과는 정반대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모두 주변 세계를 해석하면서 애도하고 기뻐하고 분노한다.

고난에 처한 다윗에서: 역사 시편을 통해 본 다윗의 초상』에서 학자 비비안 L. 존슨은 사무엘상 1장과 2장 같은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특정 노래를 찾아낸다. 그중 하나는 사무엘하 51장에 기록된 다윗이 벳세바를 강간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이후에 쓰인 시편 11편이다.

사무엘서의 역사는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반면, 시편은 다윗의 내면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존슨은 “사무엘서에는 다윗의 사적인 묵상이나 참회의 몸짓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사실 사무엘서는 일반적으로 다윗의 가장 끔찍한 행위를 공개하는 데 거의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다윗이 사무엘하에서 ”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다” 는 한 줄 고백보다 더 자세히 자신의 후회를 묘사한 시편 51편은 “다윗이 내연의 남편을 살해했을 때 자신의 행동의 중대성을 인식한 후 한 말에 대한 정교하고 경건한 버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고 주장한다.

시편 기자의 역할은 기자의 역할과는 다르다. 그러나 성경과 마찬가지로 시빌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세상의 고난 앞에서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 준다. 잔학 행위에 대한 모든 기록 뒤에는 이를 증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널리스트가 있다.

예를 들어 가자지구의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롤링스톤 갤러리를 살펴보면 가자지구의 사망자 수가 33,000명을 넘어선 지금, 이 사진들은 선별하기 어렵고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 사진들은 선정적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상황에 맞는 글귀와 함께 발표 되었 다. 사진기자 아메드 자코트는 2023년 10월 9일의 가자 지구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사진은 가자지구의 고층 빌딩 19층에서 찍은 사진이다. 25년 동안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런 공포와 고통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모든 것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켜야 했다.”

우리 역시 리처럼 될 수 있다. 역사의 기록 사진이나 먼 옛날의 잔혹한 장면을 멀리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온라인에 과도하게 노출된 세상에서 끔찍한 이미지와 증언은 타임라인을 새로고침하기만 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고통뿐만 아니라 기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욥의 하나님에 대한 연설에는 단순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온전히 표현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 1장에도 마리아의 노래를 위한 여지가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 탄생의 사건을 간략하게 서술하지만 누가는 잠시 멈춰서 마리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영혼은 “나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신실함을 보여주셨기에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한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은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금욕주의가 아닌 애도, 축하, 찬양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시빌 워 역시 비슷한 교훈을 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목격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목격하느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그 현실 속에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한다. 고통을 자세히 바라보며 우리의 영혼을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그 고통을 우리가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커리 리는 공공 정의 센터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미디어, 신앙, 기술, 환경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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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정의하는 것은 여성성이 아닌 인간성에서 시작된다

‘두 번째 성’에 대한 논쟁은 우리를 생물학, 겸손, 그리고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게 한다.

Christianity Today June 7, 2024
Rakah Miftah / Pexels

대법원 후보자 켄탄지 브라운 잭슨은 ‘여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거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잭슨은 상원 의원 마샤 블랙번의 질문에 “저는 생물학자가 아닙니다.”라고 답하여 질문을 회피했다. 테드 크루즈 상원 의원은 잭슨에게 성차별 소송에 누구를 포함할 것인지 묻자, 잭슨은 이런 소송이 현재 하급 법원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다시 한번 답변을 회피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재빨리 잭슨의 답변을 밈으로 삼아 그녀의 답변 거부를 진보적인 난센스의 명백한 증거로 묘사했다. 결국 누구나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유일한 문제는 수천 년 동안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여성을 ‘훼손된 남성’으로 보았든,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지 않는 교회의 아버지들이든, 역사는 사람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몰랐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과거에도 여성들은 표면적으로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자 ‘창조주가 부여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해 왔다.

기독교 옹호자이자 학자인 도로시 세이어즈는 1947년 에세이 ‘인간이 아닌 인간(The Human-Not-Quite-Human)’에서 여성에 대한 우리의 실제 정의가 부적절하다고 다음과 같이 성찰한다.

어떤 현상을 연구할 때 첫 번째 과제는 그 현상의 가장 분명한 특징을 관찰하는 것이다. … 대부분의 ‘여성문제’ 연구자들이 실패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교회는 대부분의 경우보다 더 애석하고 변명의 여지도 적다. … 어떤 논증을 사용하더라도 논의는 무효화 되는데 남자는 항상 호모[인간]와 비르[남성]로 다루어지지만, 여자는 페미나[여성]로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이어즈에게 여성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정의에는 여성성과 인간성을 모두 포함해야 하며, 인간이 명사 역할을 하고 여성이 형용사 역할을 해야 한다. 결국, 고양이, 새, 심지어 몇몇 나무들까지 많은 것들이 암컷이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와 책임은 그녀의 성별이 아니라, 그녀의 공통된 인간성에 기인한다. 암컷 고양이들은 시민 평등권이 없다. 암컷 나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자 인간에게는 시민으로서의 평등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을 단순히 남성과 반대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형상을 지닌 존재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대로 내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세이어즈가 강조하는 딜레마는 우리 사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는 다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블랙번 상원의원의 질문 뒤에는 트랜스젠더 여성 운동선수가 여성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지가 있다.

트렌스젠더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여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들은 성차별로부터 보호받는 계층에 속하는가? 여성 개인의 인격을 주장하는 세이어즈와 달리, 우리는 누가 여성이라는 계급에 속할 수 있는지 규정하려 데 애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이어즈의 기본 공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정치적 차원을 띠게 되는 맥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homo)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기 때문에 여성(Femina)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 세기 동안 여성들은 인권을 위해 여성성에 기반한 연대를 구축해 왔다. 그래서 현재의 순간에, 브라운 잭슨 판사의 지적대로, ‘여성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깊은 법적,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특히 까다롭다. 여성성에 중점을 두고 남성과의 공유된 인간성을 강조하지 않는 여성성의 정의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시민 평등의 근원이 되는 범주 자체를 축소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자들은 현재의 논쟁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성희롱과 학대를 남성들만의 ‘라커룸 대화’로 치부하고, 성별을 기준으로 여성 보호 법적 범주에 반대해 온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경우에 더욱 그렇다.

지난 100년 동안 여성을 성별에 기반한 특별 이익 집단이 아닌 생물학적 인간 현실로 정의하는 법적 선례를 마련했다면 오늘의 대화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우리가 여성들을 그들이 가진 형상 그대로 바라봤다면 오늘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 펼쳐질까.

그러나 만약의 상황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것에 대해 합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혼란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우리의 여성 정의의 결함을 인정해야 한다. 얼마나 빈번하게 그 정의가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하지 않고 ‘남성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는지 말이다. 여성을 인간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이러한 범주는 서로 다르며 하나가 서로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확고한 이해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여기서 권리와 책임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이론을 창세기 2장이나 에베소서 5장에서 시작하는 대신, 창세기 1장에 뿌리를 두고 우리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맥락으로서 공유된 인간성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의 차이점은 실제적이고 사실이지만, 성적 차별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리고 남성이 우리의 하위문화에서 기본 정의가 된 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둘째, 현재의 취약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들이 성별, 심지어 생물학적 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너무 빠르게 변화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압도될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 순간은 확실히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젠더뿐만 아니라 인간성과 자기 창조의 한계에 관한 현대 범주의 약점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대화는 마치 파도가 정점에 도달하고 부서지려고 할 때 급변하게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이서즈는 1942년 에세이 ‘왜 일하는가?(Why Work?)’에서 이 현상을 다루면서 사회가 내재한 자기 수정 주기가 종종 파국적인 방식으로 끝난다고 언급했다.

자기 생각을 자발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가져온 사건의 순전한 압력으로 인해 수정할 수밖에 없다. … 갈등의 근본 원인은 일반적으로 모든 당사자가 동의한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발견되며, 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원칙 있는 지도자들은 이 순간에 어떻게 대응할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논쟁의 진정한 핵심을 확인하고, 여성의 인간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을 포함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 조건이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화 상대와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추구해야 한다. ‘여성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이웃은 점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그러한 차이를 은혜와 진리로 탐색하며, 우리와 동의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서 이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부터 단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인간성을 구속하고 성취하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자세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한나 앤더슨은 ‘Made for More’, ‘All That’s Good’, ‘Humble Roots: How Humility Grounds and Nourishes Your Soul.’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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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 큰 믿음

소규모 교회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독특한 장점도 있다.

Christianity Today June 5, 2024
Michael Marsicano의 일러스트레이션

요일 아침마다, 갈렙 푸게이트(Caleb Fugate)는 펜실베니아 주 피처버그에서 북동쪽으로 70마일 떨어진 지역의 구불구불한 언덕 길을 따라 운전하여 광활한 부지에 있는 오래된 집들과 다이아몬드빌 연합 감리교회 뒤편의 자갈밭에 있는 공원들을 지나간다. 이 작은 흰색 건물은 빨간 문 옆에 있는 거대한 감리교 로고(십자가와 불꽃)가 아니었다면, 정면에서 보면 원룸형 학교 건물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오전 9시 예배를 주관하고, 그 후 30분 동안 교인들을 방문할 예산을 책정한다. 그런 다음, 클라이머 시내의 작은 식당들과 지역 사업체로부터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은 클라이머 제일 연합 감리교회 11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다시 3마일을 운전하여 시내로 돌아간다.

두 교회는 총 인구가 1,500명 미만인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점심시간까지 푸게이트는 60명도 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설교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그는 또한 인근 펜실베니아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감리쿄 캠퍼스 사역을 감당하고 있기에, 주중에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이 부르심은 27세의 푸게이트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는 Punxsutawney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담당했던 목사님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 휴스턴에 있는 대형 감리교회의 부목사직을 거절했다. “펜실베니아 시골로 돌아가 당신이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역하세요.”

“이 작은 책임을 맡게 된 것은 제가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가장 좋은 경험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푸게이트가 섬기는 교회와 같은 소규모 교회는 미국에서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다. 하트퍼드 종교연구소(Hartford Institute for Religion Research)가 지난 20년 동안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 소규모 교회(매주 출석이 100명 이하)는 현재 미국 교회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소규모 교회가 여러 도전들에 직면에 있다. 미국 15,000개 이상의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을 취합한 FACT(Faith Communities Today)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교회 규모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각 규모의 교회마다 지역 사회와 기독교 전반에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선물이 있습니다.”라고 연구소 소장인 스콧 썸마(Scott Thumma)가 말했다.

주일 아침 교회에 모이는 평균 교인수는 20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2000년, 미국 교회 예배 출석 평균수는 137명이었다. 지금은 65명으로 줄었다. 교회 출석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소규모 교회가 미국 교계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00년에는 교회의 45%가 매주 출석 인원이 100명 미만이었다. 그 비율이 65%까지 올랐다.

출석 교인이 100명 미만인 교회는 종종 실존적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들은 시간제, 무급 또는 이중직 목사를 고용할 가능성이 더 높으며, 예산의 가장 많은 부분을 시설에 지출한다. 주일 오전 출석수가 50명 미만인 교회 중 65%는 지난 20년 동안 출석률이 5%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작은 교회 신도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실합니다. FACT 조사에 따르면 소규모 교회가 매주 일요일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1인당 가장 많은 금액을 교회에 헌금하고, 자원봉사자로 참여할 가능성도 더 높다.

그리고 소규모 교회에는 파트타임이나 무급 목회자가 있는 경우가 많고, 직원 채용에 대한 지출도 적기 때문에, 선교와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역에 예산을 더 지출할 수 있다.

27세의 독신인 푸게이트는 세 가지 사역에 매주 최대 70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있지만 부담감 또한 느낀다. 클라이머에 있는 교회에는 십대 자녀를 둔 가정이 있어서 청소년 사역이 필요하다. 양육 사역에는 목회자의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세 가지 사역을 감당해야 하기에, 그가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푸게이트는 “그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라고 인정한다.

다이아몬드빌 연합 감리교회는 인구 200명의 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교회 출석자 20명은 지역 인구의 10%를 차지한다. 푸게이트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인정했는데, 이는 FACT 조사에서 가장 작은 교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혜택을 지역 사회에 주기를 원한다.

그 지역의 Head Start 유치원의 한 학생이 겨울 옷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교인들은 교사에게 연락하여 겨울 옷뿐만 아니라 필요한 신발과 옷을 모두 구입하도록 했다. 지역사회에 있는 기독교 어린이집이 건물을 이전하자, 교회는 수프를 팔아 수리 비용으로500달러를 모금했다.

푸게이트는 그의 교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반세기 이상 교회에 출석해 온 교인들이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다.

다이아몬드빌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캐롤 보이어(Carol Boyer)는 자신이 자랐고 거의 75년의 기간을 보냈던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다른 감리교회들을 지나갔다. 그녀의 증조부모님은 1842년의 교회 설립을 도왔다. 그녀가 어렸을 때는 매주일 마다 사람들이 집에서 쏟아져 나와 교회를 향해 행진하는 일종의 퍼레이드에 동참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제 교회로 향하는 행렬은 훨씬 짧아졌고 보이어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는 교인들이 다이아몬드빌 주민들을 계속 초청하고, 심지어 마을의 모든 집에 담요와 초대장을 배달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하기를 “저는 사람들에게 '헌금 접시를 채우기 위해 당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위해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푸게이트는 2년간의 목회 사역을 통해 시골의 작은 교회들이 목사가 새로운 사역을 시도하도록 기꺼이 허락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축복이었습니다”고 밝혔다.

매주 평균 125명이 참석하는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에 있는 제일침례교회는 당장 문을 닫을 위험은 없지만, 예배당을 가득 채우지도 못하고 있다. FACT 조사에 따르면, 제일침례교와 같은 중간 규모의 교회는 예전만큼의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1~250명의 출석자가 있는 중소형 교회는 미국 교회의 21%를 차지한다.

재건 시대 설립된 제일침례교의 담임목사인 콜린 몽고메리(Collin Montgomery)는 교회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쇠퇴했지만 지난 2년 동안은 부흥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출석률이 낮아 고전적인 600석 규모의 예배당이 텅 빈 느낌을 주기 때문에 교회는 가능할 때마다 지역 사회에 문을 연다.

사립 차터 스쿨은 주중에 교회의 교육관을 임대한다. 십대 엄마들을 위한 영 라이프( Young Life) 사역인 영 라이브(Young Lives) 도 이제 막 시작된 ​​이동식 임신 클리닉의 이사회와 마찬가지로 제일침례교에서 모임을 갖는다.

중간 규모 교회의 10개 중 거의 6개(58%)가 외부 그룹에 공간을 제공하며, 이들 교회 중 약 절반은 건물 사용료를 받지 않는다. 외부 그룹은 대부분 지원 단체거나 비영리 단체이지만 FACT 조사에 따르면 교회는 4H 클럽에서 요가 수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임에 문을 여는 것으로 나타났다.

캘리포니아주 로즈빌 전역에 걸쳐 있는 밸리 스프링스 장로교회는 주중에 너무 많은 외부 그룹에 문을 열어 거의 비공식 커뮤니티 센터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밸리 스프링스 교회의 출석률은 주일 기준 250명 미만에 머물고 있으며 40명 이상의 가구가 YouTube로 예배에 온라인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역사회 활동의 중심지이다. 주중에는 유치원, 카운티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지역사회 행사, 퀼터 동호회 모임 등에 교회를 오픈한다. 밸리 스프링스 교회는 또한 다른 교회에도 공간을 임대한다.

지역사회 단체의 임대료는 250명 정도의 교인이 짊어져야 하는 건물 비용 부담을 절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몽고메리는 추가 임대 수입이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교회가 단지 재정 때문에 임대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교회는 이 역사적인 건물이 지역 사회를 축복하기 위해 사용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원하지만, 교회의 현재 규모는 교회가 진정으로 환대의 장소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몽고메리는 말했다. “이 정도 규모는 우리가 관계를 정말 잘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필요할 때 신속히 움직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밸리 스프링스 교회와 제일침례교회 모두 축구 경기나 호수 투어처럼 그들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활동으로 인해 한 달에 한 번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인들은 깊이 헌신되어 있다. 밸리 스프링스의 담임목사인 브래드 앤더슨(Brad Anderson)은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헌금이 증가했다고 언급했다.

“소규모 교회는 친밀감과 강렬한 체험을 하는 장점이 있고, 많은 것을 갖춘 큰 교회 역시 장점이 많겠지만. 어떤 면에 있어서 중간 규모의 교회는 친밀감의 장점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여러 프로그램을 갖춘 대형 백화점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쇠퇴하고 있습니다”라고 썸마는 말했다.

FACT는 최근에 절반 이상(52%)의 교회에서 출석률이 5% 이상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제프 키디(Jeff Keady)는 중소형 교회에서의 사역이 매우 소중하다고 믿는다. 그와 조니 크레이그(Johnny Craig)는 매주 2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2013년에 200 교회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키디는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이 전국 각지의 가족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소규모 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자원이 늘어나는 것에 고무되어 있다. 95Network , New Small Church , Grow a Healthy Church , Small Church Pastor 와 같은 사역과 조직은 소형 교회의 위상을 유효한 목회적 소명으로 높인다.

그러나 대형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더 많은 사역자들과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면, 소형 교회들이 성장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2020년에는 교회 가는 사람의 60%가 가장 큰 10%에 드는 교회에 출석했고, 대형 교회는 교인수가 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0%의 교회에 60%의 교인이 있다고 해서, 나머지 교회에 많은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썸마는 말했다. “이것은 도전입니다.”

가장 큰 교회에 가장 많은 방문자들이 가지만, 그 방문자들이 그 교회에 계속 출석한다는 것은 아니다. 키디는 미국 대형 교회에서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의 숫자가 매우 높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교회 멤버로 등록한 교인들 역시 의미 있게 공동체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Hartford의 연구에 따르면 대형 교회들은 자원 봉사하는 교인들의 비율이 가장 낮고, 1인당 헌금 금액도 가장 적다.

키디는 대형 교회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교회들이 교인들을 어떻게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걱정한다.

썸마는 이러한 대형 교회가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엄청난 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주중에 교회 공간이 자체 프로그램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지역 사회 그룹이 교회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이 2,000명 이상인 교회를 섬기는 대형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소그룹으로 연결시켜 주일 아침의 압도적인 규모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

2020년에는 대형교회의 90%가 소그룹을 "기독교 양육 및 영성 형성 전략의 중심"으로 여겼는데, 이는 20년 전의 50%와 비교된

썸마는 이러한 연구를 수행한 지난 20년 가운데 2020년 처음으로 교회 출석률의 평균값 변화율이 -7%를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평균적인 교회는 지난 20년 동안보다 어떤 면에서 조금 더 나쁜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놀랐어요.”

그러나 그는 현재 미국 교회의 4분의 1이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교인의 20% 이상이 유색인종이라는 의미)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비록 가장 큰 교회가 인종과 연령이 더 다양하게 혼합되어 있는 경향이 있지만 모든 규모의 교회는 교회 밖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필수 도구로 Facebook과 같은 기술을 채택했다.

목회자들은 회중이 직면하고 있는 장애물을 사탕발림으로 포장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다.

몽고메리는 “저는 우리 교회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위대한 일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메건 파울러(Megan Fowler)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펜실베이니아 지부의 기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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